강/사/랑 2016. 3. 10. 13:45

[근황]그래 걷자!! 


 
선사시대(先史時代) 어느 동굴에 아침이 찾아 왔다. 그 동굴의 가장(家長)인 남자 원시인은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의 아침 먹거리를 위해 돌창과 돌도끼를 챙겨 동굴을 나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어깨는 고금(古今)을 불문하고 무겁기 마련이다.

 

저 멀리 들판 너머로 원시의 싱싱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그 불타는 해를 보며 원시인은 두 손 모아 기원을 올린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대자연에 질서(秩序)를 부여한 강력한 절대자를 향한 기원이다. "오늘은 부디 맹수를 만나지 않고 영양 한 마리를 쉽게 잡을 수 있기를..."

 

그의 손엔 돌창과 돌도끼가 들려 있지만, 그의 주 무기는 창이나 도끼가 아니라 '끈기'이다. 창과 도끼로는 영양을 바로 잡을 수 없다. 오직 끈기있게 영양을 추적하여 지치게 만든 후 창이나 도끼로 끝장을 내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인의 사냥 시 추적 거리는 2, 30km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그것도 영양을 바로 만났을 때 얘기이니 실제로 사냥을 위해 달린 거리는 두세 배는 되었을 것이다.


하루의 식량을 위해 그가 투자한 거리는 적게는 이삼십 킬로미터, 많게는 오륙십 킬로미터를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가장으로써 의무를 다하기 위한 그의 노정(路程)은 멀고도 험했다.

 

인간의 걷기는 사냥 만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도 필수였다. 기원(紀元) 전후 고대 사회의 지배자는 로마제국이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과 앞선 문명으로 지중해를 벗어나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근동의 아시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로마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평화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렀다. 제국의 평화는 막강한 로마의 군사력에 기초하였다.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로마는 제국의 확장과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 승리하였다.


모두가 잘 조직되고 강화된 로마 병사들의 전투력을 바탕으로 한 결과였다. 로마 병사들은 잘 훈련되고 잘 관리되었다. 로마의 전장은 대부분 먼 외국이었다. 교통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 전투지로의 이동은 도보 행군이었다. 로마 병사들은 세 가지 경우의 상황에 맞춘 행군을 하였다.

 

우선 평상시에는 1일 25km 정도의 행군 거리를 기본으로 하였다. 이 경우 다섯 시간 정도 행군을 하였다고 한다. 시간당 5km 속도를 유지한 셈이다. 이를 '이테르 유스툼(Iter Justum)'이라 불렀다. 당시 로마 병사의 군장 무게가 40kg에 달했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강행군을 할 때는 일곱 시간에 30 내지 35 km를 내달렸다. '이테르 마그눔(Iter Magnum)'이라 부르는 이 강행군은 로마군 전투 역사에서 종종 등장한다.

 

최고 강행군은 '이테르 막시뭄(Iter Maximum)'이라 불렀다. 이 경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달리는 것을 말한다. 어느 경우이든 로마군은 40kg에 달하는 무기와 식량 등 군장을 지고 달려야 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밤낮 없이 행군을 헸다하니 정말 놀라운 체력이자 군사 전략이다.

 

로마인에게 있어 병역이란 로마 시민으로서의 가장 성스러운 의무이자 권리였다. 따라서 로마 시민만이 군인이 될 자격이 있었다. 병역은 로마 시민이 아닌 이민족이나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그리하여 로마인은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인 병역 의무를 즐거이 감수했고 최고의 전투력을 유지하였다. 사십 킬로그램의 군장을 지고 하루 종일 내달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그곳에 있었다. 

 

강/사/랑의 직장은 가산동에 있다. 서식지인 수원에서 30km 거리이다. 자전거로 출퇴근할 때는 한 시간쯤 걸렸다. 한창 라이딩에 열이 올랐을 때는 풀 페달링으로 내달려 54분에 끊은 적도 있다.

 

허리 부상 이후는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였는데, 내연기관의 힘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한 시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교통정체가 심한 월요일이나 금요일에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기도 하였다.

 

편도 30km, 왕복 60km 거리이니 석기시대 원시인의 1일 사냥 거리와 비견되고 로마군의 1일 행군 거리와 흡사하다. 로마인에게 있어 제국은 가족의 범위 확장 그 자체였다. 따라서 원시인의 하루치 먹거리를 위한 사냥행위나 로마군의 영토 확장을 위한 행군은 모두 가족 부양이라는 성스러운 의무에 수렴된다. 

 

현대인의 직장생활은 소명(召命)이나 자아실현 등 거창한 목표의 포장을 걷어내면 가족 부양을 위한 밥벌이에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나 역시 그러하여서 밥벌이란 순결한 목표를 위해 하루 60km 거리의 숨 가쁜 라이딩을 기꺼이 감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허리 부상으로 인해 당분간 라이딩을 접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내연기관의 힘으로 하루 분량의 출퇴근을 감당하였는데, 육체의 힘을 이용한 아날로그적 행위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십수 년 근력을 이용한 활동에 심취해 있던 몸이 내연기관에 의존하자니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바퀴의 힘 대신 두 다리로 밥벌이와는 별개의 이동을 계획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비록 걷기라는 이 행위가 밥벌이와는 직접적 연결이 없을지라도 건강 회복을 통해 몸을 이용한 밥벌이가 가능하다면 그것 역시 밥벌이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은 건강이 최상은 아니니 1일 10km내외의 거리를 목표로 하고 지역은 서식지인 왕송호수 주변으로 한정하기로 했다.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함. 사진은 모두 스마트폰 버전임.)



# 좋은 세상이다. 스마트폰에 걷기 행위의 결과가 모두 기록되고 있다. 우리 동네 아파트 문을 나서면 바로 왕송호수 둑이 나온다. 그 호수 주변을 따라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다. 한 바퀴 돌면 6km 거리에 한 시간쯤 걸린다. 계절 마다 변하는 호수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산책코스이다.

 

 

 

# 찬바람 너무 강한 한겨울밤이나 퇴근이 너무 늦은 경우에는 아파트 단지 주변을 돌았다. 다섯 바퀴 정도 돌면 7km 거리에 만 걸음을 걸을 수 있다.

 

 

 

# 어느날인가는 아파트 단지를 한바퀴 돈 후, 뺑뺑이 도는 그 길이 싫어 호숫가 나무데크로 나갔다가 동네를 크게 한 바퀴 휘감아 보았다.

 

 

 

# 시간 여유가 좀 있던 날에 호수 위쪽에 있는 부곡 아파트 단지와 초평동을 이어 걸어 보았다. 10km 정도 되었다.

 

 

 

# 처음에는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스를 계속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일한 코스에 싫증이 나서 코스에 조금씩 변화를 주기로 했다. 호수 좌측 초평동에는 골짜기가 여러개 있고 그 골마다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 골짜기들을 이어보았다.

 

 

 

# 호수 우측에는 의왕시 부곡동이 있다. 호수 우측길로 북상했다가 의왕역 고가를 지나 부곡동 외곽을 크게 한 바퀴 휘감아 보았다.

 

 

 

# 이번에는 아예 성균관대역까지 포함하여 그 반경을 넓혀보았다.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 수원을 관통하는 대표적 하천인 황구지천은 왕송호수에서 발원한다. 황구지천을 따라 남하하여 금곡교까지 갔다가 개천 건너편 둑길을 따라 돌아 왔다.

 

 

 

# 시간 여유 있을 때 황구지천을 따라 내려갔다가 수원 하나로마트 앞 들판을 크게 한 바퀴 돌기도 하였다.

 

 

# 동네 근처 월암동에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그 회화나무 구경을 하고 율전동을 거쳐 성대역앞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 우리 동네 우측 아래에 일월저수지가 있다. 그 일월저수지를 한바퀴 돌아 오면 7킬로미터 거리이다.

 

 

 

# 일월저수지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는 수인산업도로를 따라 와보기도 했다.

 

 

 

# 월암동에는 의왕시에서 만든 달바위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달바위길을 따르다가 역시 의왕에서 만든 산들길을 걸었다. 고속도로 굴다리에서 산들길을 벗어나 부곡동 길을 따라 귀가했다.

 

 

 

# 달바위길과 산들길을 따라 갔다가 고속도로 굴다리에서 빽해서 산들길, 다시 달바위길을 따라 복귀했다.

 

 

 

# 수원둘레길을 따라 정북진했다. 율전동 밤꽃마을 끝까지 갔다가 둘레길을 벗어나 율전동 청개구리 공원을 한바퀴 돌았다. 이후 성균관대역을 거쳐 귀가했다. 꽤 먼 거리였다.

 

 

 

# 의왕 월암동 도룡마을 일대를 구석구석 걸어보았다. 이후 회화나무와 성대역을 찍고 수원둘레길따라 복귀했다.

 

 

 

# 주말에 시간 있을때 칠보산까지 걸어갔다. 칠보산 등로 곁에 임도가 화성군 매송으로 넘어가고 있길래 그 길로 가봤다. 중간에 임도가 갈라져 우측길로 들어갔다. 칠보산 우측 숲속을 많이 헤맸다. 산을 벗어나니 사사동에서 어천리로 넘어가는 산중도로가 나왔다. 이후 아주 먼길을 돌아 귀가했다. 마눌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 같은 길을 따라 칠보산까지 갔다가 이번에는 좌측으로 칠보산 아래에 있는 당수동 일대를 휘감아 보았다.

 

 

 

# 시간 많을 때 군포 수리산에 있는 우리 순이 무덤까지 걸어 보았다. 갈 때는 호수 우측으로 갔다가 부곡아파트 단지와 화물터미널, 대야미역과 갈치저수지를 거쳐 갔다. 순이 만나본 후 돌아올 때는 군포 송정지구 신도시 건설 현장을 통과하고 산을 넘은 후 엄청나게 멀리 걸어 돌아왔다. 네 시간이 걸렸고 2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였다.

 

 

 

# 초평동 마을과 골짜기 구경을 하며 구석구석 돌아 보았다. 

 

 

 

 # 초평동 마을을 돌다가 작은 야산을 치고 올라가봤다. 지도에 이름없는 봉우리가 나왔는데, 눈에 익은 표지기들이 보였다. 서봉지맥이 지나는 산이었다.

 

 

강/사/랑의 걷기는 언제나 집에서 출발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왕송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스를 택했다. 하지만 이내 동일한 반복에 싫증이 났다. 그리하여 호수를 중심으로 전후좌우 여러 걷기 코스를 개발하였다. 음악 들으며 홀로 그 길들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철학자 칸트는 팔십 평생 고향인 쾨니스버그에서 단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곳을 산책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산책을 다녔기 때문에 그 고장 사람들은 칸트의 산책모습을 보고 시각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철학의 겉껍질도 모르는 나로서는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택한 칸트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그리하여 이곳저곳 동네 주변을 번잡하게 돌아다녔다.

 

칸트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 철학적 업적을 남긴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미미한 업적도 없는 나는 나만의 방식이 좋다. 그리하여 이곳저곳 미지(未知)의 여러 길을 찾아보는 것이 아직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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