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간 9정맥/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일곱번째(육십령~동엽령)-德裕는 넓고 컷으나 매우 광폭했다!

강/사/랑 2007. 6. 25. 19:00

 [백두대간]그 일곱번째(육십령~동엽령)


 

'덕유산(德裕山)'은 군대 제대 말년 때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84년 7월. 제대를 한 달여 남겨 둔 시점이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였다.


집권과정의 여러 사건 때문에 두려웠든지 아니면 최고권력자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는지 그때 대통령의 경호는 상상초월이었다. 예를들어 전씨(全氏)가 어느 지역에 시찰나온다 하면 지역 군부대는 무기고를 봉인하고 심지어 소총의 격발장치인 공이까지 분리하여 보관하곤 했었다.

그해 7월 집권당인 민정당의 평생 동지 수련회가 덕유산에서 열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이 평생 갈 것으로 생각했는지 서로를 평생동지라 불렀다. 그들 중엔 지금은 노무현정권에게 붙어 개혁을 외치고 있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권력편에 자신을 위치시키는데 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 의외로 많은 법이니까.

 
어쨌거나 그때는 전국에서 당시 집권세력에 가담한 사람들이 모여서 평생 잘 먹고 잘 살자고 일종의 정당 워크숍을 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부대는 전씨가 잠시 들러서 격려하는 몇 시간 때문에 일주일간 덕유 산중에 들어가 텐트 치고 야영하면서 외곽경비를 했다.


지급 받은 장비는 단 하나 탐침봉(探針棒) 뿐이었다. 탐침봉은 지뢰나 폭발물을 찾기 위한 기다란 쇠꼬챙이 형태의 도구이다. 산속에서 일주일 동안 세수도 못하고 탐침봉으로 땅이나 쑤셔대며 지냈는데, 하루종일 왁자지껄한 민정당원들의 소음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우리를 구원했던 단 하나의 위안은 수련회 진행본부에서 안내방송을 하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시끄러운 소음 중간중간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안내방송하는 그 목소리가 어찌나 예쁘던지 모두들 넋을 잃고 지냈다. 특히 방송 말미에 "캄샤합니다!"라고 속삭이듯 인사를 하면 다들 쓰러질 정도로 전율하곤 했다. 피 끓는 청춘들이 산속에서 짐승처럼 웅크려 지낼 때이니 오죽하겠는가?

어느날 밤 우리는 특공대를 조직해서 잠복지를 벗어나서 수련회 장소에 숨어 들었다. 민정당원들은 각 도별로 대형 텐트를 수십 개씩 세우고 고기 굽고 술 마시고 잔치가 참으로 은성하였다. 어느 텐트에서 밥이며 고기를 실컷 얻어 먹고 살금살금 돌아오다 진행본부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 장면을 문득 보았다.


음... 그때 우리는 상상력의 깊이가 극(極)에 달할 때는 그냥 상상 속 세상에서만 지내는 것이 더 나음을 알 수 있었다. 뭐 그랬다는 얘기다. 그렇게 덕유산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강렬하고도 웃음 입가에 번지는 개그 느낌의 추억이었다.


이제 오랜 세월 흘러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두 번째로 덕유산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덕유는 엄청난 강풍과 비바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 바람 어찌나 광폭하던지 자칫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아... 덕유는 여전히 강렬하였다.



德裕는 넓고 컷으나 매우 광폭했다!



구간 : 백두대간 제 10 소구간(육십령 ~ 동엽령)
거리 : 구간거리(23.56 km), 누적거리(127.2 km)
일시 : 2005년 5월 5일
세부내용 : 육십령(05:30) ~ 할미봉(06:45) ~ 대포바위(07:10) ~ 전망대(07:
50) ~ 교육원 삼거리(08:20) ~ 헬기장(08:35) ~ 전망바위(09:05) ~ 장수덕유산(10:05) ~ 남덕유산 갈림길(11:00) ~ 월성치(11:30) ~ 점심/출발(12:45) ~ 삿갓봉 우회(13:20) ~ 삿갓골재대피소(13:45)/출발(16:14)/날씨 급격히 나빠짐.광풍으로 목숨의 위협 느낌 ~ 무룡산(15:05) ~ 돌탑 무명봉(15:55) ~ 동엽령(17:00) ~ 칠연계곡 ~ 안성매표소(18:50)

총 소요시간 13시간 20분. 만보계 기준 44,000보.

5월 5일. 어린이날. 원래 계획은 5월 5일은 집에서 쉬고 7, 8일 양일간 그동안 산불방지기간으로 입산금지되었던 지리산 종주를 하려고 했다. 백두대간의 출발점이 지리산인 만큼 지리산 구간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영 찜찜했던 탓이다.

그런데 갑자기 7일날 다른 계획이 생기는 바람에 부득이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리산은 중간에 탈출하기가 쉽지 않아 최소한 1박 2일이 필요한 만큼 지난번 북상하다가 멈춰선 육십령에서 시작하는 덕유 구간을 5일날 하기로 했다. 덕유구간은 중간에 동엽령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기에 당일로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당일날 뼈 저리게 느꼈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어떤 이들은 지리종주보다 덕유종주가 훨씬 어렵다고 말하였다. 지리(智異)는 종주 중간에 오르내림이 덜하지만 덕유(德裕)는 줄기차게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간 탈출로도 만만치 않아 육십령에서 빼재까지 1박 2일 정도 기간을 잡고 중간에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1박을 하든지 동엽령 근처에서 야영을 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급히 계획을 수정하느라 이런 사전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 나중에 큰 어려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월 4일날 회의 후 회식이 있었지만 급한 집안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회식 내내 소주 한 잔으로 버텼다. 회식 후 2차 가자는 걸 뿌리치고 집에 오니 11시. 샤워하고 장비 챙겨 마눌과 바로 출발했다.

오늘은 구간도 길고 중간에 대간에서 탈출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으므로 미리 현장에 도착해 조금 눈 붙이고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하자는 계획이었다. 도중에 너무 졸려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눈 붙이고 이른 아침식사도 하고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장수 IC 거쳐 육십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5시다.


이미 주변은 여명이 밝아서 사물들이 희뿌연 새벽 안개 속에 제각기 제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남부 지방의 강수 확률을 오전은 20%, 오후는 무려 80%를 예상한다. 
그래도 여기 육십령은 구름 한 점 없고 날씨도 무더울 듯한 기분이다.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장비 챙겨 백두대간 들머리로 향했다.

"자, 오늘도 백두대간의 품속으로 들어가 보입시다!!!"



덕유산/德裕山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에 걸쳐 있는 덕유산(德裕山, 1,614m)은 넓고 큰 산이다. 덕유산의 한자 이름을 풀면 "크고 넉넉한 산" 이 된다.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 등 난리를 겪을 때 백성들이 이 산속으로 숨어 들면 안개가 끼어 적군이 찾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는 데서 '덕이 큰 산'이라는 뜻의 덕유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1,614m)에서 남덕유산(1,507m)에 이르는 17km 쯤 되는 주능선에 중봉,무룡산, 삿갓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연달아 솟아 있고, 덕유평전 등 널널한 초원이 펼쳐 있어 장쾌함이 그만이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뻗어 나간 지능선에도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많다. 향적봉 북쪽의 적성산(1,029m), 깃대봉(1,055m), 두문산(1,051m), 칠봉이 있고, 향적봉 동쪽에 못봉(1,302m)과 투구봉이 있으며, 주능선 서쪽에 망봉(1,047m)과 시루봉(1,105m)이 있다.이렇게 덕유는 남북으로 30km가 넘고 1,000m 이상의 봉우리만도 20개가 넘는다.

남덕유산/南德裕山

남덕유산은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전북 장수군 계북면을 경계지으며 솟아 있다. 옛날엔 봉황산, 황봉으로 불렸다. 그 중 서봉은 장수덕유산이라 부른다. 남덕유산은 북덕유산과 달리 날카롭게 솟은 산이다. 경치가 아름답지만 등로가 가팔라 700여 철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남덕유산은 두 개의 發源샘을 갖고 있다. 남쪽 기슭의 참샘은 진주 남강으로 흐르는 첫 물길이며, 북쪽 바른골과 삿갓골샘은 황강의 첫 물길이다.

<이곳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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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0 소구간 육십령 ~ 동엽령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새벽 여명속의 육십령 휴게소. 입간판 있는 쪽이 9소구간 날머리이다.

 

 

# 육십령 표지석. 새벽 한기에 추워 보이는 마눌. 육십령 들머리에서 5시 30분에 출발했다.

 

 

잠을 한 시간 밖에 못자서인지 컨디션이 별로이다. 게다가 긴 구간을 생각해서 초반에 너무 오버 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쉬엄쉬엄 속도조절 해가며 천천히 갔다.

                     

# 온 몸에 땀이 한 바퀴 돌 즈음에 헬기장에 도착했다.(06:15)

 



# 육십령 고개 부근의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현장. 골재 채취를 위해 산이 통째로 깎여 나가고 있다. 

 

 

# 골프장 건설을 위해 온통 파헤친 모습. 육십령 장계쪽 사면.

 

 

                      

# 멀리 할미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 기묘한 암봉이 절경을 자랑한다.

 

 

헬기장에서 '할미봉'까지는 급한 오름의 연속이다.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고 일부 구간은 로프를 잡아야 올라 갈 수 있다. 따갑게 내려 쬐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헉헉헉헉 할미봉 정상에 도착했다.(6:45). 육십령에서 1시간 15분 걸렸다.

할미봉 정상엔 가족으로 보이는 남녀 다섯 분이 계신다. 4일 동안 덕유 구간을 마치는 계획으로 오늘은 삿갓골재 까지만 간다한다. 일부러 느긋하게 계획을 잡은 모양이다. 이 분들 실제로 먼저 출발하셨는데 중간에 교육원 삼거리 부근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구간이 끝날 무렵 이분들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 할미봉 정상의 조망안내판.

 

                       

# 날씨가 하도 맑고 화창해 기상청을 마음껏 비웃었다.  나중에 큰코 다쳤지만...

 

 

                      

# 할미봉 하산길은 아슬아슬한 절벽 구간이 많다. 동계에는 상당히 위험할 것 같은 느낌이다.

 

 

                     

# 왼쪽 할미봉 정상에서 오른쪽 암반지대의 정 중앙 절벽지대로 하산하여야 한다.

 

 

        

# 잠시 진행하면 기묘한 모양의 대포바위를 만난다.(07:10).

 

 

        

# 그 유래와 별칭이 재미있다.

  

 

         

# 멀리 지나온 할미봉이 보인다. 산세 참 예쁘다.

 

 

         

# 가야 할 백두대간 길. 저멀리 장수덕유가 보인다.

 

 

                      

# 등로엔 둥글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 연달래.

 

                      

# 우산나물.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비슷한 종류인 삿갓나물은 독초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 사거리로 갈라지는 곳.(07:50)

 

        

# 표지기를 따라 가야 한다.

 

                      

# 숲바닥은 연초록 잔디밭이다.

 

                    

# 대간길도 연초록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 교육원 삼거리.(08:20). 육십령에서 5.22km(2시간 50분 소요)를 걸어 왔다.

 

                     

# 교육원 삼거리를 지나 한바탕 차고 오르면 헬기장에 도착한다.(08:35)

 

                     

# 헬기장은 조망이 좋아 지나온 백두대간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멀리 할미봉이 보인다. 할미봉까지 힘들게 차고 오르고 이후 오르락 내리락한 대간의 마루금이 일목요연하다.

 

                     

# 다시 차고 올라 가야 할 대간. 뒤쪽의 장수 덕유산이 보인다.

 

                     

# 언제나 그렇듯 오르막엔 산죽밭이 이어진다.

 

        

# 장수덕유산 오름 직전에 전망대 암봉을 만났다.(09:05)

 

        

# 그림이 제법 나온다.

 

        

# 코 큰 짐승의 두상같은 바위.

 

        

# 장수덕유산 앞 암봉을 올려다본다.

 

        

# 육십령에서 6.8km를 걸어 왔다.

 

        

# 기묘한 모습의,

 

                     

# 암봉들.

 

        

# 장수덕유는 경관이 아주 좋다.

 

        

# 장수덕유의 정상부는,

 

                     

# 암봉을 힘들게 차고 올라 가야 한다.

 

                      

# 정상부는 대문을 열어 놓은 듯하다.

 

        

# 높은 고도 탓에 뒤늦게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

 

                     

# 남덕유산 쪽에서 갑자기 연무가 밀려 오기 시작했다.


        

# 장수덕유산 정상(10:05). 육십령에서 4시간 20분 걸렸다.

 

        

# 해발 1,510m. 서봉이라고도 한다.

 

              

# 간만에 등장한 姜某氏. 장수덕유 정상에 서다.




# 장계 쪽으로 연결되는 1,082봉의 헬기장들. 백두대간길이 아니다.

 

                     

# 남덕유산 쪽으로 연결되는 대간길.

 

 

        

# 갑자기 짙은 연무가 덮쳐온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남덕유산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 장수덕유 하산길의 철계단. 동계엔 얼어 붙어 아주 위험한 곳이다. 경사가 무지무지 급하다.  난간을 붙잡고 옆으로 걸어 내려 가야 한다.

 

 

                     

# 철계단 중간엔 죽어 천 년을 사는 주목 고사목이 있다.

 

 

                     

# 정상 사면은 주목 군락지다.

 

 

        

# '박새'라고 독성이 있어 뿌리는 살충제로 쓰인다.

 

 

                     

# 박새는 이후 빼재까지 덕유 구간 내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큰 놈은 거의 큰 배추통만 하다.

 

        

# 남덕유 갈림길(11:00). 남덕유산은 대간길이 아니다.

 

        

# 11시 30분. 월성치에 도착. 육십령에서 6시간 걸렸다.

 

 

        

# 연무와 바람이 강하게 일면서 기온이 급강하하여 아주 춥다. 월성치 안내판 뒤에서 벌벌 떨면서 식사를 했다. 오늘따라 따끈한 국물을 준비해 오지 않아 추위가 더 심하다.

 

                     

# 너무 춥고 힘들어 1시간 15분이나 지체한 후 12시45분에 출발했다.



# 산죽밭에 연무가 끼어 신비롭게 보인다. 산죽밭은 동엽령까지 중간중간 이어지는데, 나중엔 아랫도리를 흠뻑 젖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 전망바위. 해발 1,340m다.  연무 탓에 아무것도 전망할 수 없다.

 

 

        

# 삿갓봉 갈림길.

 

 

        

# 대간길은 삿갓봉을 우회한다.

 

 

        

# 드디어 삿갓골재 대피소에 도착.(13:45)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따끈한 캔 커피 한 잔으로 추위를 녹였다. 할미봉에서 만났던 분들은 아직 도착을 하지 않고 있다. 평소 우리의 산행속도는 언제나 평균 속도보다 구간별로 한두 시간 정도 늦게 진행된다. 사진 찍느라 중간중간에 지체하는 데다 식사 시간도 길고 체력도 떨어지니... 그런데 이분들 우리보다 더 늦게 진행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들은 오늘 여기에서 1박을 한다니 걱정은 없을 것이다.

쉬는 동안 몇몇 팀이 도착하시는데, 대부분 이곳에서 머물거나 하산할 계획이라 한다. 날씨 변하는 것이 심상찮아 다들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강행하기로 했다. 아직 비는 오지 않고 일찍 시작하여 시간도 넉넉했다. 또 미리 비 올 것을 대비하여 여벌 옷이나 비옷, 베낭커버, 스패츠 등도 준비했으니 끝가지 가기로 했다.

        

# 황점 방향 하산로. 이곳에서 탈출했어야 했다.

 

 

                     

# 우리는 무룡산을 향해 출발.(14:05). 아직 주위는 안온하다.

  

                     

# 첫 번째 헬기장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시련은 시작되었다. 시정거리는 10m를 넘지 않고 강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헬기장에서 연세 지긋하신 분들 세 분을 만났다. 설천봉 쪽으로 하산하셔야 하실 분들이 길을 잘못 들어  몇시간째 산을 헤매고 계시단다. 우리가 동엽령까지 가니 같이 가서 안성매표소 쪽으로 하산하자고 하니 그쪽으론 가기 싫다고 한니다.


삿갓골재 대피소로 가서 하산한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그분들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금방 이유가 밝혀졌다. 무룡산 정상으로 향하는 사면은 수목이 전혀 없는 구간이다. 헬기장을 내려와서 안부에 이르자마자 오른쪽 급사면을 타고 올라 오는 강풍이 대간 마루금을 강타했다.

무심결에 걸음을 옮기다가 한순간에 몸이 휘청하면서 왼쪽으로 1m 이상을 밀려 나버린다. 마눌을 돌아보니 밀리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붕 떠서 좌측으로 처 박힌다. 달려가서 붙들어야 했다. 어마무시한 바람이다. 스틱을 땅에 콱 박고 한 걸음 옮기고, 또 콱 박고 한 걸음 옮기고 하며 힘겹게 진행했다. 마눌은 내 왼편에 세워서 강풍이 바로 들이치지 않게 하고 나란히 한걸음 한걸음 사투를 벌이며 올라야 했다.

급경사 사면을 타고 올라온 비바람이 마루금에서 휘감기면서 빗물이 수평으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솟아 올라 귓속과 콧속으로 마구 들어 온다. 분수에 얼굴을 들이 댄 기분이다. 모자로 얼굴을 감싸고 콧김을 킁킁 내 뿜으며 엄금엄금 올라 갔다.

 


                      

# 무룡산 사면.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오른 구간이다.

 

        

# 좌측으로 몇 걸음만 밀리면 세상을 하직 할 듯하다. 그 정도로 강풍이 심하게 불어재겼다. 이거 이러다 큰일날 수도 있겠다 싶다.

 

 

                     

# 그 와중에도 생명의 꽃을 피운 호랑버들.

 

                     

# 그나마 수목이 있는 곳은 바람이 적어 걸을 만하다.

 

 

        

# 그야말로 사투를 벌여 도착한 무룡산(15:05). 해발고도 1491m이다.

 

 

        

# 살아서 왔구나, 마눌이여.

 

 

무룡산 오름 사면에서 갑자기 강풍과 비바람을 만난 탓에 비옷과 스패츠를 준비했지만, 미처 착용도 못 해보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젖어 버렸다.

마눌은 윗옷이 고어택스라 걱정이 없는데, 내 쟈켓은 생활방수 정도라 이미 상당히 젖었다. 등산화는 고어텍스라서 방수가 잘 되지만 바지가 젖어 다리에 달라 붙는 바람에 목으로 물이 들어가서 걸을 때마다 신발 속에서 개구리 소리가 난다.
그래도 이왕 젖은 몸,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왜국 속담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무룡산에서 동엽령까지는 아직 1시간 45분을 더 가야 한다. 일단 돌탑이 있는 무명봉까지 50여 분을 내 달려야 한다. 무룡산에서 돌탑까지 가는 동안에도 수목이 없는 안부에서는 여지없이 강풍이 휘몰아친다. 그때마다 마눌을 왼쪽에 세우고 스틱으로 땅을 찍어 가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진행했다.


                     

# 무룡산 하산길의 산죽밭. 산죽은 물을 듬뿍 머금고 있다가  허리 아래쪽을 완전히 적셔준다. 마눌은 완전히 질린 표정이다.

 

        

# 돌탑이 있는 무명봉.(15:55)

 

 

돌탑이 있는 무명봉을 지나 다시 55분을 비바람, 강풍과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17:00에 동엽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삼재에서 시작한 대간이 육십령을 지나 이곳 동엽령에 도착하는 동안 "고개에서 시작해서 고개에서 끝낸다." 는 백두대간 소구간 종주의 대원칙대로 항상 고개에서 구간 종주를 마쳤으며, 그 고개들은 대부분 차가 다닐 수 있거나 걸어서 마을까지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엽령은 해발 1,260m의 산 꼭대기에 있는 이름만 고개인 곳이다. 게다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풍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으니... 한 구간을 끝냈다는 기쁨보다는 다시 두 시간을 걸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 가야 한다는 걱정이 더 크게 일어난다.


        

# 동엽령. 당일날은 비바람 때문에 카메라를 꺼낼 수 없어서 1주일 뒤 다음 구간을 끝내면서 찍은 사진으로 대신했다. 

 

 

동엽령에서 안성매표소까지 내려가는 길 역시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팍팍한 돌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나무 계단이 무릎을 지끈지끈하게 만들고, 흙길에서는 쭉쭉 미끌어지고...

한 시간여 내려 오자 비로소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람도 잦아들고 칠연계곡의 기가 막힌 경치가 이어지지만, 그런 것을 감상할 여유가 이미 우리에겐 없다. 

        

# 그래도 이 폭포 만은 너무 멋져 보여서 잠시 눈을 즐겁게 한다.  "문덕소"

 

        

# 그야말로 악전고투끝에 도착한 안성매표소(18:50).

 

 

5시 30분에 육십령을 출발하여 오후 6시 50분이 돼서야 하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총 13시간 20분이 걸렸다. 만보계를 보니 44,000걸음을 걸었다.

몸은 완전히 젖어 버렸고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걸으라고 하면 차라리 날 죽여라 할 것 같다. 덕유산 구간은 휴대폰 불통지역이어서 안성매표소로 완전히 나와서야 겨우 전화로 안성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택시 기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우리를 보고 매우 놀란다. 그냥 택시를 타면 실례인 것 같아 시트에 배낭커버를 깔고서 탔다. 육십령까지 택시비 30,000원.

육십령은 높은 고개이다. 찬바람 강하게 불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우리 차 있는 곳까지 이삼십 미터 정도 걸었다. 그런데 우리 차에 탄 순간 갑자기 한기가 몰려오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저체온증'이었다. 비에 흠뻑 젖어 있던 몸이 택시에서 조금 덥혀졌다가 육십령고개의 찬바람에 잠깐이나마 노출되면서 급격하게 저체온증이 온 모양이다.


몸이 너무 많이 떨리니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정신이 희미해져 판단력도 떨어졌다. 마눌이 급히 젖은 옷을 모두 벗기고 몸의 물기를 닦아 냈다. 그리고 마른 옷으로 갈아 입힌 후 몸을 비벼주었다. 한참을 부들부들 떨다가 차안의 히터가 들어오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말로만 듣던 저체온증을 오늘 처음 경험했다. 우리는 오늘 똑같은 환경에서 함께 비 맞으며 산길을 걸었다. 육십령의 찬바람도 함께 맞았다. 그런데 내게만 저체온증이 찾아왔다.


차이는 자켓이었다. 마눌은 고어텍스 재질의 자켓을 입었고 나는 일반 자켓을 입었다. 산행 마칠 때까지 마눌은 몸이 젖지 않았고 나는 무룡산 오르기 전에 이미 속옷까지 모두 젖은 상태였다. 그 차이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장비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소백산에서 눈보라와 칼바람 때문에 비박 도중 저체온증으로 사망 사고가 발생했던 사건의 이야기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혼자서는 어떻게 대처하기가 힘든 순간이었다. 철저한 장비의 준비와 상황 발생 시의 대비가 절실하였다.


'덕유(德裕)'는 "크고 넉넉한 산"이란 뜻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덕유는 무시무시하고 광폭(狂暴)한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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