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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도 비렁길]1코스/함구미~두포 - 봄빛 내린 금오도(金鰲島)!! 본문

길이야기/금오도 비렁길

[금오도 비렁길]1코스/함구미~두포 - 봄빛 내린 금오도(金鰲島)!!

강/사/랑 2017. 3. 28. 09:20
[금오도 비렁길]1코스/함구미~두포

 


군 생활 때의 일이니 35년도 더 된 옛이야기이다. 군기 바짝 든 신병의 신분으로 내가 처음 자대(自隊) 배치받은 곳은 경남 남해의 바닷가였고 맡은 임무는 취사병이었다. 첫날 고참병에게 관련 업무 배우고 잔심부름하는데,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의 발이 부스럼 같은 염증으로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는데 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름인 데다 취사 열기 때문에 무더워 나 역시 반바지 차림이었다. 도마에 여러 음식 재료를 놓고 칼질을 하다가 문득 다리를 바라보니 까만 털이 가득하였다. 나는 원래 털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웬일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수백 마리의 모기였다.

  

기겁을 하여 털어냈지만 이미 수백 곳을 물린 뒤였다. 그때부터 모기와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모기약을 바르고 긴바지를 입고 꽁꽁 싸맸지만 언제나 승자는 모기였다. 바닷가 모기가 그렇게 강하고 집요하며 집단적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후 제대할 때까지 여름이면 늘 모기와의 전쟁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바닷가 모기의 높은 전투력은 하루 이틀 전의 일은 아닌 모양이다. 옛글을 찾아보니 바닷가 모기에 관련된 글이 여러 편 발견되는데 그중에 고문설(苦蚊說)이란 글이 압권이다. 내용은 이렇다.


苦蚊說(고문설 ; 고약한 모기 이야기)


湖南全州之蚊 聞於國中 而沿海諸蚊 亦相伯仲於全州 全州及沿海諸蚊 皆推順天金鰲島之蚊 以爲大父 於是金鰲島之蚊冠於一國 島中素多麋鹿 金鰲島以鹿聞於國中 遠方之人 裹粮涉海而來 飮其血 來者必苦於蚊 而减其血膚 於是以爲金鰲島之鹿 無補於人 非鹿之無補也 則蚊之爲害 多也 蚊 大小如蠅 嘴如麥芒 獨鳴如雷 群飛蔽天 晝集人肌 毒螫如蝎 余嘗夜臥不得眠 起而歎曰 蚊乎 余之無罪也 (호남전주지문 문어국중 이연해제문 역상백중어전주 전주급연해제문 개추순천금오도지문 이위대부 어시금오도지문관어일국 도중소다미록 금오도이미록문어국중 원방지인 과량섭해이래 음기혈 래자필고어문 이감기혈부 어시이위금오도지록 무보어인 비록지무보야 즉문지위해 다야 문 대소여승 취여맥망 독명여뢰 군비폐천 주집인기 독석여갈 여상야와부득면 기이탄왈 문호 여지무죄야)


호남 전주(全州)의 모기는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하며, 바닷가 모기 또한 전주 모기와 막상막하다. 그런데 전주와 바닷가 모기들은 하나같이 순천(順天) 금오도(金鰲島)의 모기를 대부(大父)라고 추켜세웠다. 이에 금오도의 모기가 나라 안에서 으뜸이 되었다. 섬에는 본래 고라니와 사슴이 많아서, 금오도는 고라니와 노루로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하다. 먼 곳 사람들도 먹을 것을 싸들고 바다를 건너 그 피를 마시러 오는데, 찾아온 사람들은 반드시 모기한테 당해서 피며 살점이며 모두 뜯기고 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금오도의 사슴이 사람에게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사슴이 보탬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기가 끼친 해가 크기 때문이다. 모기는 크기가 파리만 하고, 주둥이는 보리 까끄라기 같다. 혼자 앵앵거려도 그 소리가 우레 같고, 떼 지어 날면 하늘을 뒤덮는다. 낮에도 사람 살갗에 모여들어 전갈처럼 독침을 쏜다. 나는 밤에 누워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기에 일어나 탄식하기를, “모기야, 나는 죄가 없다!”라고 했다.


이 글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선생의 문집인 운양집(雲養集)에 나오는 고약한 모기 이야기(苦蚊說)이다. 운양(雲養)선생은 한문학 마지막 시대의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구한말(舊韓末) 정계의 중심적 인물이기도 했다. 1835년(헌종 15년)에 태어나 1922년에 87세로 졸(卒)하였으니 장수하신 분이시다. 


봉서 유신환(鳳棲 兪莘煥)과 환재 박규수(瓛齋 朴珪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30세에 진사시(進士試), 40세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림(詞林)과 대각(臺閣), 대사마(大司馬), 광주 유수(廣州留守), 경학원(經學院)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관직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아 면천군(沔川郡), 제주(濟州), 지도(智島) 등에서 도합 16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선생이 25세 때인 1860년 경신년(庚申年) 여름에 금오도에 머물면서 사슴피나 마시며 한가로이 지낼 때의 기록이 바로 고문설이다. "모기야 나는 죄가 없다!"라고 애원하는 선생의 넋두리가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데, 내용은 사슴피 마시며 몸을 보(補)하려다 외려 모기에 물려 피를 잃듯이 세상 모든 일에는 화복(禍福)의 균형이 있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위 글 다음에 그런 내용이 이어진다. "세상에 완전한 복이란 없으며 반드시 되돌아오는 이치만이 있다. 해는 정 가운데 이르면 기울고, 달은 차면 이지러진다. 물이 불을 이기지만 흙이 반대로 물을 이기는 것, 이는 변함없는 이치이다. (天下無完全之福 有必反之理 日中則昃 月滿則虧 水克火而土反克水 理之常也 ; 천하무완전지복 유필반지리 일중즉측 월만즉휴 수극화이토반극수 리지상야)"


세상사 모든 일이 얻는 바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열흘 붉은 꽃이 없듯 영원히 양지쪽에 서 있을 수는 없는 단순하면서도 늘 잊어버리기 쉬운 이치를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권력을 가지고 있다 놓친 인물들이나 주인 없이 허공에 뜬 그 허망한 권력을 쟁취하고자 발악하는 이들이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운양 선생이 사슴피를 먹고자 했다가 모기에게 도로 빼앗긴 금오도(金鰲島)는 여수시 남면에 속하는 섬이다. 북쪽에 돌산도, 북서쪽에 개도, 남쪽에 소리도와 이웃하고 있다. 원래 수림(樹林)이 울창하였는데 특히 소나무가 훌륭하였다. 그리하여 황장목(黃腸木)을 봉(封)하여 일반의 출입을 금하였다.


실록을 보면, 세종 30년에 금오도 포함한 전국 수백 곳 섬[島]과 각 곶(串)의 소나무를 관리 감독하기를 주청한 기록이 있고, 성종 때는 왜적의 침입이 있었다 하며 영조 때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땅을 경작하도록 명하고 있다.


이름인 금오(金鰲)는 '황금 자라'란 뜻이다. 섬의 모양이 자라(鰲)를 닮아 그런 이름을 얻었다 전해지지만, 대개 섬이란 것이 자라 등짝처럼 둥근 봉우리에 자라 발처럼 들락날락한 곶부리를 가지게 마련이다. 어느 섬이라 특별히 자라섬이라 부를 일이 없다는 말이다.


다른 전언(傳言)으로는 숲이 울창하고 소나무 좋아 섬이 검게 보여 '거무섬'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금오도가 되었다 한다. 실제로 대동여지도에는 거마도(巨磨島)라 적혀 있으니 거무섬에서 음차(音借)한 것이 옳은 듯하다.


고종 21년인 1884년 태풍으로 금오도의 소나무가 대부분 쓰러져 버려 조정에서는 봉산(封山)을 해제하였고, 이듬해 일반인의 개간을 허가하여 사람들이 입도(入島)하게 되었다. 그 후 세월 흘러 70년대에는 2만여 주민들이 살 정도로 인구 규모가 컸으나 이제는 1천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생활하고 있다.


그렇게 고요히 저물어 가던 이 섬에 외지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돈도 같이 흘러들어 섬 생활에도 윤기가 흐르게 되었으니 '금오도 비렁길'의 개척이 그 변화의 주역이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방언이다. 금오도는 남해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해안단구의 벼랑을 가지고 있는 섬이다. 전체 해안선의 둘레가 64.5km이다. 그중 남쪽 사면의 해안선이 비렁인 해안단구로 되어 있다. 그 남쪽 사면의 18.5km를 비렁길로 조성하였는데, 애초에 섬 주민들이 나무하거나 농사지으러 다니던 소로길을 최대한 훼손 없이 그대로 담아냈다.


전체 5개 코스이고 너무 멀지 않은 거리여서 여덟 시간 정도면 완주가 가능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이 끼어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완만하여 누구나 쉽게 산책하듯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이다. 아찔한 벼랑길을 바닷바람 맞으며 걷는 매력이 있어 외지 사람들 발길이 갈수록 늘어 이제는 여수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이야기가 있는 콘텐츠의 결합이 이런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으니 칭찬할 만하고 널리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경치 눈 속에 얼른 담아보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봄이 시작되는 3월 초 비렁길 걸어보고자 금오도에 입도(入島)하였다. 



 


봄빛 내린 금오도(金鰲島)!!


일시 : 2017년 3월 19일. 해의 날.

거리 : 5km (누적 5km)

세부내용 : 여천항/버스 이동 ~ 함구미 ~ 미역널방 ~ 수달피 비렁전망대 ~ 송광사 절터 ~ 소나무쉼터 ~ 초분 ~ 약수터 ~ 신선대 ~ 화장실 ~ 두포.

 

 

3월 초에 그동안 미뤄왔던 진주 방문을 했다. 부모님 산소에 인사 올리고 일찍 세상 떠난 셋째 형의 기일이 가까워 술 한 잔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주는 먼 고장이다. 이 먼 곳에 왔다가 그냥 올라가면 기름값이 아깝다. 진주에 사시는 누님네와 함께 여수로 봄바람 맞으러 가기로 했다. 우리 누님은 요즘 우울한 일이 많으시다. 따스한 봄빛 즐기면서 근심 날려 보내시길 바랬다.




금오도/金鰲島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에 있는 섬. 동경 127°46′, 북위 34°30′에 위치하며, 북쪽에 돌산도, 북서쪽에 개도, 남쪽에 소리도가 있다. 면적은 27.0㎢이고, 해안선 길이는 64.5㎞이다. 남면사무소가 섬의 중앙부인 우학리에 있으며, 남쪽의 안도와는 안도대교로 연결되었다. 여수시에서 돌산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주위에 있는 돌산도·소리도·월호도·두리도·개도 등과 함께 금오열도를 이루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섬의 모양이 자라를 닮았다고 하여 큰 자라라는 뜻으로 ‘금오도(金鰲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오도의 두모리에 직포해송림이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송림의 동쪽에 있는 옥녀봉에서 선녀들이 달밤에 베를 짜다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바닷가로 목욕하러 와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목욕을 하고 놀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훗날 소나무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직포(織布)라 한 것도 이러한 전설과 관계가 있다. 북쪽에 대대산(382m), 동쪽에 옥녀봉(261m), 남쪽에 망산(344m) 등이 연속적으로 분포하며, 산세의 경사가 급한 편이다. 산줄기의 완사면에는 농경지와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부 사빈해안이 있다. 침강운동으로 형성된 해안선의 드나듦이 복잡한 이른바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으며 수심이 다른 해안보다 깊은 것이 특징이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금오도 비렁길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이번 여수행은 예정에 없던 길이라 카메라 준비를 못했다. 사진은 전부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사진의 구도가 불안정해 보이고 흐리멍텅하다.


전날 여수 오동도에서 동백꽃 구경을 하고 여수 시내에서 숙박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금오도행 여객선의 기항지인 돌산도의 신기항으로 향했다. 우리만 왔으면 토요일 들어가서 야영하며 진행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






# 금오도행 여객선은 여수 여객선터미널에서 가는 방법과 돌산도 신기항에서 가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여수에서 가는 배는 하루 세 번만 있고 시간도 90분이나 걸린다. 신기항에서는 25분이면 충분하고 배도 자주 있다. 우리는 전날 인터넷 예매를 못했다. 표 없을까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현지 발행표는 넉넉했다. 대신 나오는 배는 뭍에서 예매가 되지 않고 섬에서 표를 끊어야 한단다.




# 우리가 일찍 온 편이었는데, 이윽고 관광버스 편으로 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 금오도행 페리.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배이다.




# 여수만쪽 풍광이다. 남해바다는 늘 이렇게 잔잔하고 은은하다.




# 돌산도와 화태도를 이어주는 화태대교이다. 사업비 천오백억 원을 들여 2016년에 완공한 국내 세 번째 최대 경간 사장교이다. 사장교(斜張橋)는 교각 위에 세운 탑에서 비스듬히 드리운 케이블로 주 빔을 지탱하도록 설계된 교량이다. 이 다리의 건설로 화태도 주민 700여 명은 섬 사람이 아닌 육지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 당 2억 원 넘게 들인 셈이다. 2004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그때 여수 국회의원이 힘이 좋았나 보다.




# 긴 시간 들여 승객과 짐을 모두 싣고 신기항을 출발했다. 9시 10분 배인데 출발은 9시 30분 쯤 되었다. 늘 그런지 이 날만 그런지는 알 수 없다.




# 단체로 이 섬을 찾은 이가 대부분이다. 봄바람 따스하여 모두들 들떴다.




# 신기항을 뒤로 하고 배는 물살을 가른다. 긴 꼬리가 뒤를 따른다.




# 돌산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금세 전방에 섬의 모습이 드러난다.





# 금오도 가는 길목에 있는 소횡간도. 말안장을 닮았다. 




# 잠깐 사이에 도착했다. 남해안에 있는 섬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




# 금오도 여천항이다. 면소재지는 섬 아랫쪽 우학리에 있지만, 이곳이 여수와 가까워 여객선 기항지가 되었다.




# 금오도 입도 완료.



# 여천은 자그마한 규모의 마을인데 금오도로 들어오는 대문의 역할을 하면서 늘 외지인으로 번잡하게 변했다. 여천(汝泉)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인 대부산의 생김새가 여자의 젖가슴을 닮았는데, 그곳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얻은 이름이다. 여천에서는 미니버스가 마을 버스로 운행되고 있다. 비렁길 1코스 출발지인 함구미까지는 저 마을버스로 20여 분 달려야 한다. 




# 바닷가 벼랑 위에 건설된 도로를 따라 잠시 달려 함구미에 도착했다. 여객선 드나들며 번잡했던 여천과는 달리 고요한 동네이다. 이곳으로도 하루 세 번 여객선은 들어온다. 그 기항지는 여수 여객선터미널이다.




# 남해안 섬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고요한 어촌마을이다.




# 비렁길은 이곳 함구미에서 장지까지 18.5 km 거리이다. 우리는 오늘 1코스만 걷기로 했다. 누님과 자형 두 분 다 무릎이 좋지 않아 긴 거리는 걷기 어렵다. 나머지 구간은 다음에 야영짐 지고 와서 하룻밤 자면서 걸어 볼 계획이다.






# 금오도는 방풍이 유명한 모양이다. 방풍은 원래 바닷가에서 해풍 맞은 것을 최고로 친다. 풍(風)을 막아주는(防) 나물이다. 해열, 항염증 등에 효염이 있는데 주로 뿌리를 말려 약재로 쓰고 잎과 줄기는 나물로 먹는다. 나중에 집에 와서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으니 당귀와 맛과 향이 비슷하였다.




# 고요한 어촌 항구에 작은 배 한 척 졸고 있다.




# 화장실 옆에 들머리가 있다.




# 섬의 지형은 으례이 바닷가 쪽으로 경사가 지게 마련이다. 시작부터 제법 가파르게 올라간다.




# 비렁길 곁에 방풍이 푸른 잎을 해풍에 씻고 있다. 금오도 사람들은 저 방풍을 관광객에게 팔아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 한쪽엔 갓이 자라고 있다. 이 동네는 갓김치도 유명하다.




# 작고 앙증맞은 개불알풀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 햇살 좋다. 이 먼 남도 땅은 이미 봄이 완연하다. 애초에 이 금오도 비렁길을 목표로 여수를 방문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모두 복장이 단촐하다.




# 따스한 햇살, 살랑이는 바닷바람, 꽃향기까지. 봄은 이미 온 천지에 가득하다.





# 조릿대숲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는 이 길이 참 좋다. 이런 아늑한 길이니 뭍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 잠시후 깎아지른 벼랑위에 마련된 전망대에 도착했다.




# 미역널방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주민들이 미역을 채취해서 이곳까지 지고 올라 널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 이 벼랑의 표고는 90m나 된다. 그 높은 벼랑을 미역 가득한 지게를 지고 올랐다는 얘기다.





# 저 아찔한 높이의 벼랑을 올랐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 가슴에 섬 하나씩 가지고 사는가?






# 저 벼랑은 커다란 짐승 한 마리 바다에 머리 박고 물 마시는 듯한 모양이다.




# 벼랑끝으로 나가 내려다보니 정말 아찔한 높이다.




# 고요하고 푸른 바다.




# 미역널방에서 오래 경치 구경하다가 다시 산길을 따라 길을 나섰다.




# 산길에서 돌아보니 정말 아찔한 높이의 벼랑 위에 마련된 전망대이다.




# 그 벼랑 앞에서 어선 한 척 맴을 돌고 있다.


 




# 멀리서 보니 미역널방의 온전한 높이를 실감할 수 있다.




# 멋진 경치이다.




# 산모퉁이 돌아 다시 길게 가면 나무 데크로 된 길이 나온다.




# 그 길 끝에 다시 전망대가 있다.




# 광주에서 왔다는 어느 산악회팀이다. 저들과 함께 걷다가 내도록 껄쭉한 음담패설에 시달려야 했다. 저 팀은 여자들의 입이 더 야하고 거칠었다. 




# 이 전망대의 이름은 수달피 비렁전망대이다. 벼랑 아래 바닷가에 수달이 살았던 모양이다.





# 이곳도 바다 조망이 좋은 곳이다.




# 다시 길을 나서 시원한 대밭 사이를 지난다.





# 남도 땅은 벌써 이런 그늘이 좋은 계절이다.




# 한 모퉁이 돌아 나가자 높은 벼랑 아래에 있는 넓다란 공터가 나타난다. 송광사 절터이다. 예전 이곳에 송광사(松廣寺)라는 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육지에 있는 순천의 송광사와 함께 지었다고 적혀 있다.








# 절터 앞에 고래 한 마리가 물을 박차 오르고 있다.




# 절터를 지나자 산모퉁이 돌아 돌아 가는 길고 평탄하며 아늑한 길이 이어진다.




# 그 앞 바다에 짐승 여러 마리가 출발선에 선 주자(走者)처럼 도열해 있다.




# 햇살 따가워 저런 그늘을 만나면 일단 멈춰 쉬고 본다. 




# 나는 군 생활 삼 년 동안 늘 이런 풍광을 보고 살았다. 참 오랜 옛 이야기이다. 





# 송광사 절터도 미역널방과 비슷한 모습이다. 다만 이곳은 더 넓고 바위가 아니라 농사 가능한 토양으로 되어 있다. 




# 아늑한 길을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걸었다. 그동안 걸었던 길 중 가장 느긋하게 솔방솔방 걸었다.




# 날씨 따스하여 노란 민들레는 벌써 꽃을 피웠다.





# 산모퉁이 돌아 오르면 용두가 나온다. 용두는 함구미의 뒷고개이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고개이고 섬의 남북을 모두 조망하는 곳이라 바람 잘 통하는 곳이다. 그곳 언덕 소나무 그늘 아래 쉼터가 있다.




# 건너편에는 규모가 큰 주막집이 성업 중이다.



# 우리는 이쪽 컨테이너로 소박하게 만든 쉼터에 자리잡았다.




# 이웃 섬인 개도에서 만든 개도막걸리가 유명하단다. 단맛이 좀 강한 편이었다. 술꾼들에겐 거북할 맛이지만, 술 약한 사람들이나 여자들에겐 환영받을 맛이었다. 땀 흘린 후 시원한 그늘 아래서 먹으니 입에 딱 달라 붙었다.




# 마눌은 매형과 조곤조곤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 방풍나물과 방풍파전을 먹었다. 상큼하고 고소하였다. 막걸리와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 된장에 조물조물 무친 방풍나물이 아주 맛났다. 여러 접시 비웠다. 나중에 집에서 초고추장에 새콤달콤하게 무쳤더니 또다른 맛이었다.




# 시원하게 막걸리 한 잔 나눈 후 다시 길을 나섰다.




# 1코스 종착지인 두포까지는 아직 3.5km를 더 가야 한다. 함구미에서 이곳까지 2.3km 정도 걸어 왔으니 절반 조금 못 온 셈이다. 합치면 5.8km 정도 되는데 지도에는 1코스가 5km라고 적혀 있다.




# 이 고개는 바람골이라 바닷바람 강하게 불고 있다. 겨울에는 춥겠다.




# 1코스 출발지인 함구미항이 발 아래 내려다보인다. 저기서 출발하여 섬의 좌측 돌출부를 한바퀴 휘감아 온 것이다.




# 고개를 넘어 다시 남쪽 바닷가로 다가간다.




# 좀전에 우리가 쉬었던 소나무쉼터가 건너다 보인다.






# 한 모퉁이 돌아가면 초분(草墳) 안내판이 나타난다. 초분은 시신이 육탈(肉脫)될 때까지 노지(露地)에 두었다가 뼈만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치르는 방식이다. 고대부터 전해지던 것인데 대부분 사라지고 유일하게 전라도 섬지방에서만 근래까지 이어지던 장례문화이다.





# 아랫쪽에 초분을 재현해 두었다. 비록 재현한 것이지만, 썩 유쾌한 모습은 아니다.




# 대부산을 배경으로 솔방솔방 진행하였다. 대부산은 금오도의 주봉이다.




# 대부산 삼거리에서 잠시 쉬었다. 나중에 대부산 정상에서 하룻밤 야영하며 금오도의 밤바다를 구경하는 것도 좋을 일이다.





# 커다란 주목나무 한 그루 서있다. 그 표면에는 콩란이라고도 부르는 두란(豆蘭)이 가득 덮혀있다.




# 편안한 길이고 경치 좋은 길이라 전국 곳곳에서 단체로 많이 왔다.





# 중간에 샘터를 만났다. 음용 가능 여부가 적혀 있지 않다. 그래도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 신선대입구 갈림길에 도착했다. 사투리 찐한 산악회 사람들이 식사 중이다.




# 두포, 직포 방향으로.






# 쉽게 만나지지 않는 산자고(山慈姑)를 만났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꽃이다. 잎은 나물로 무쳐먹고 뿌리는 약용으로 쓴다. 산자고란 이름은 자애로운 할머니란 뜻이다.




# 세 번째 전망대를 만났다. 이곳이 신선대인 모양이다.




# 전방의 바다는 푸르고 고요하다.




# 지나온 비렁길이 돌아다 보인다.




# 좌측으로는 2코스의 비렁길이 보인다. 낚시꾼을 실은 배가 비렁 아래 갯바위에 접안하고 있다.




# 대부산 정상이 올려다보인다. 언제일지 모르나 저 산 정상의 하룻밤을 기약해본다.




# 우리 누님은 원래 운동광이고 운동능력도 뛰어나신데 요즘 무릎이 좋지 않으시다. 스틱 보행법을 알려 드렸더니 그 효과에 대만족하신다. 스틱 보행을 정확히 하면 네발 짐승의 걸음 효율을 누릴 수 있지요.





# 가다쉬다 천천히 진행했다.





# 신선대 이후 두포까지의 길은 큰 특징없이 편안한 산모퉁이 길이다.




# 다음 코스의 저 튀어나온 곶부리 이름은 굴등이다.





#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살았던 저 댁은 이제 사람 살지 않는 폐가가 되어 있다. 외로움만 극복 가능하다면 얼마간 살아 보아도 좋을 곳이다.




# 짧은 코스에 급할 것 없어 가다쉬다 하였다.





# 길게 산모퉁이를 돌아 나가자 목적지인 두포마을이 눈앞에 보인다.




# 두포로 내려가는 마지막 길은 조릿대 터널 사이로 뚫려있다.




# 산책하듯 쉬엄쉬엄 걸어 1코스 종착지인 두포에 도착했다.




# 두포는 대부산 남쪽에 자리한 작은 동네이다.




#조는 듯 고요한 포구마을이다. 두포는 1885년 봉산(封山)이 해제되어 일반의 개간이 허가된 이후 박포수란 이가 아들 삼형제가 처음 입도하여 정착한 곳이다. 지금은 낚시터로 유명한 모양이다. 이날도 방파제에 낚시꾼 한 사람이 낚시삼매 중이었다. 




# 대부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동네이다.




# 두포리 본 마을은 안쪽으로 조금 더 가야 하고 여기는 분무골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멈추기로 했다. 비렁길이 전체 18km 거리라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주파가 가능한 거리이지만 오늘 우리는 마음껏 한가하기로 했다.




# 한 바퀴 돌며 동네구경하였다.




# 이 동네는 신기하게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 모습 특이하여 가만히 보니 할머니댁에 다니러 온 아이들인가 보다. 





# 바람 많은 곳인가 보다. 돌담이 지붕만 남기고 온 집을 감싸고 있다.




# 비렁길 쉼터란 이름표를 단 점방이 있다. 아이스바 하나 사먹고 버스를 기다렸다.




# 그런데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버스가 떠난 모양이다. 산악회 사람들은 관광버스 편으로 떠나버리고 우리만 남았다. 이 동네 주민에게 부탁하여 기름값 지불하고 여천항으로 복귀했다.




# 두포에서 여천까지는 자동차길로 꽤 먼 거리였다. 하지만 F1 드라이버 처럼 운전을 엄청나게 거칠게 하신 주민 덕분에 금세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손에 땀이 묻어났다. 금오도를 즐긴 후 출도하려는 사람들로 여천항은 시끌벅쩍하였다. 금오도는 출도하는 배표를 예매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배표 없을까 걱정하였지만 넉넉하였다.




# 눈앞에 빤히 보이는 돌산도에서 여객선이 들어오고 있다.





# 배에 오르니 뒤쪽으로 대두라도, 두라도와 너머로 돌산도가 보인다.




# 그렇게 소박하고 알뜰하게 보낸 금오도의 하루를 마감하고 섬을 떠났다. 두시 반 배로 출도했으니 네 시간쯤 머물렀다. 다음엔 하룻밤 야영하며 나머지 구간을 마무리해야 겠다.





# 신기항에 복귀. 14시 52분.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급격하게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전 인구의 90%가 도시에 살고 있고 전체의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되었다.


비교적 문명의 혜택 가까운 근교의 농촌조차 젊은 세대는 모두 사라지고 노인들만 남았으니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마을은 그 상황이 더욱 심각할 것이다. 금오도 역시 그러한 이농현상에 예외일 수 없어 한 때 2만여 명에 이르던 주민이 이제 천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렇게 시들어가던 이 섬에 다시 사람의 온기 넘치고 그들이 몰고 온 경제적 윤기 또한 흐르게 되었으니 그 중심에 금오도 비렁길이 있다. 우리나라 섬의 개수는 3,215개이다. 그 섬 중 어느 섬인들 비렁이 없을 것이며 어느 곳인들 산길, 바닷길이 없을 것인가?


하지만 금오도는 그 비렁과 산길, 바닷길에 이야기를 입혀 세상에 내 놓았고 이야기가 있는 그 오솔길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니 어느 섬에도 없는 새로운 명품의 테마길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접근이 쉽지 않았는데, 이번 정유년 초봄에 짧게나마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과연 편안하고 아늑한 길이어서 가까운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책하듯 걷기에 알맞은 길이었다. 추천하고픈 길이다. 남은 구간은 내년 봄쯤에 야영짐 짊어지고 마무리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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