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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022년 6월 6일-충심(忠心)을 기리다(顯) 본문

산이야기/사진으로 만나는 세상

[근황]2022년 6월 6일-충심(忠心)을 기리다(顯)

강/사/랑 2022. 6. 9. 21:34
충심(忠心)을 기리다(顯)

 

2022년 6월 6일 아침.

날이 흐리고 간혹 빗방울도 떨어진다. 그래도 오늘이 현충일이니 태극기 꺼내 베란다 밖에 게양했다. 앞 동엔 네 집, 우리 동에는 우리 포함해 딱 세 집만 태극기를 내걸었다. 몇천 세대가 모여사는 동네가 이 모양이다.

 

그러려니 하고 휴일 오전을 맹숭맹숭 보내는데 느닷없이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아! 현충일 오전 열 시에는 추모 사이렌을 울렸었지! 가만, 작년에도 사이렌을 울렸던가? 정권교체 덕분에 올해부터 다시 부활한 건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잠시 고개 숙여 순국선열께 묵념하였다. 이윽고 마눌이 집에서 빈둥대지 말고 현충원에 참배 가자는 제안을 한다. 오잉? 웬 현충원 참배?

 

평생 정치적 신념과는 무관하게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았던 내 마눌은 2019년 개천절의 광화문 대집회와 그해 가을 겨울 주말마다 이어진 광화문과 청와대 앞 주야간 시위 이후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로 거듭났다.

 

이듬해  봄 전 세계를 덮친 우환 역병만 아니었다면 문재앙정권은 내 마눌의 강력한 투쟁에 의해 이미 벌써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공동체를 갉아먹고 있는 부패하고 무능한 좌파 선동주의 세력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뜨거웠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그녀의 각성은 강렬하였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잘 아는지라 느닷없는 그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현충일 당일은 여러 행사와 유족들의 참배로 번잡할 것이니 하루 뒷날 조용히 다녀오자 하였다.

 

게다가 현충원은 내 군대시절의 흔적이 있는 곳이니 내 젊은 날의 기억도 더듬어 볼 수 있어 이래저래 의미 깊겠다 싶기도 했다.

 

 

 

# 국립현충원 안내도. 현충원은 '동작동 국립묘지'로 불렸는데 96년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전쟁 이후 조국을 수호하다 순국한 이들의 묘지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로 창설한 것이 현충원의 시작이다.

 

 

# 주차장 상황을 알 수 없어 자동차는 포기하고 전철 타고 현충원을 향했다. 동작역에서 나오면 곧바로 현충원 정문을 만날 수 있다. 나는 1984년 상반기 이곳 국립묘지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군대 제대 이후 만 38년 만의 재방문이다.

 

 

# 정문을 들어서면 햇살 뜨거운 광장이 한산하다. 국록을 먹고 지도층입네 하는 이들은 어제 다들 참배하였겠지?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한가하겠지?

 

 

# 현충문.

 

 

# 어느 단체에서 오신 분들이 현충탑 집단 참배를 준비하길래 우리도 함께 참배하기로 했다.

 

 

# 단체가 함께 참배드리는 것이라 현충원 직원들이 분향, 묵념 등 공식적인 행사를 진행해 주었다. 오래 고개 숙여 묵념하였다. "편히 쉬소서! 님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와 후손들이 억압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마음껏 제 뜻을 펴고 살 수 있었습니다."

 

 

# 삼권분립의 원칙과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 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린 자의 화환도 대통령 화환 옆에 서 있다. 저 자와 저 자가 속한 무슨무슨법연구회 판사들로 인해 법치의 잣대는 진영에 따라 고무줄같이 늘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는 무원칙으로 변해버렸다. 걷어차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 현충탑 뒤 지하에 있는 위패봉안관.

 

 

# 봉안관을 나오는데 현충탑 뒷면에 새겨진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보인다. 1967년 글씨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저 글씨를 쓰셨구나!

 

 

# 충혼탑 참배 후 현충원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학생들의 추모시가 여럿 서있다. 난향초등학교 4학년 장수찬 어린이의 시가 제일 눈에 띄었다. 초등 4학년의 글이라 여겨지지 않게 문맥이나 어휘의 선택이 탁월하였다. 무엇보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제목이 적절하였다. 노란 리본 매달고 잊지 않겠노라 고함지르는 영문을 알 길 없는 불망(不忘)의 다짐과는 너무나 다른 울림이 저 어린이의 마음속에 있다.

 

 

# 참으로 많은 이들이 국가와 민족의 영속을 위해 희생하셨다.

 

 

# 외곽 도로를 따라 크게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이 길은 40여 년 전 내가 매일 아침 점호 후 구보하던 길이다. 그때는 달려서 올라가던 이 길이 오늘은 천천히 걷는 데도 숨이 차다.

 

 

# 조망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이곳 현충원은 풍수 상으로도 명당으로 여겨지는 곳이란다.

 

 

# 6월 7일, 현충원은 한가하다.

 

 

# 그늘 좋은 곳에 약수터가 있다. 군 시절 우리는 아침 구보 도중 이곳에서 늘 약수 한 잔 마시고 목을 축인 후 다시 달려 내려가곤 했다. 지금은 인근 주민들이 자동차 몰고 와서 약수를 받아가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묘소에 참배했다. 박대통령 묘소는 현충원 제일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내 젊은 날은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렇듯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직 정치의식 여물기 이전의 인물이라 전두환 정권 시절 의식화 공부하면서 굳은 독재자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 그러나 나이 들어 내 손으로 생산물을 만들어내고 세금을 납부하고 책임 있는 위치에 서서 세상 이치를 깨달은 후 다시 만난 박정희대통령은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라 오천 년 가난의 질곡과 이념 전쟁으로 존립이 위태로운 국가의 번영을 위해 노심초사한 지도자였다. 

 

그로 인해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 강국 대한민국이 있다. 그의 터전 위에 세계 유일의 전후 후진국을 탈피한 선진국 대한민국이 있다. 이것이 그가 행한 독재의 결과다. 고개 숙여 그의 노고와 불행했던 가족사에 묵념하였다.

 

 

#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고 쓴 휘호(揮毫)는 그의 일생을 대변하는 한 문장이다. 오래 머물다 박 대통령의 묘역을 떠났다.  

 

 

# 장군묘역. 이곳이 현충원 내 가장 뛰어난 명당이라고 예전 군 시절 우리 부대 어느 장교가 알려줬다.

 

 

# 장군묘역은 박 대통령 묘역 아래 독립되어 솟은 작은 봉우리 위에 조성되어 있다.

 

 

# 이제 겨우 이십대 초반 나이에 풍수에는 문외한인 내 눈에도 이곳이 명당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던 그런 곳이다. 

 

 

# 전방으로 한강이 조망된다.

 

 

# 그 뒤로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과 남양주 천마산 일대의 산마루금이 병풍을 두르고 있다. 최고의 조망이고 최고의 명당이지 싶다.

 

 

# 현충원 곳곳에는 숲길과 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다. 어느 유치원에서 꼬맹이들이 소풍을 나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낭자하다. 한적하고 쓸쓸했을 영령들이 저 티 없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덕분에 함께 즐거웠으리라 싶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나들이 온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좋은 일이다. 쉼터로 체육시설로 나들이로 자주 이용하시라. 그러다 문득 이 안온한 우리의 일상이 이곳에 묻힌 호국영령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된다.

 

 

#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묘역이다. 이승만 대통령만큼 그 업적에 비해 자기 민족에게 폄하된 지도자도 전세계 역사상 찾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 이 땅에서 기록되고 교육되는 역사 속의 이승만은 독재자, 부정선거, 민중에게 쫓겨 하야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의 생은 '선각자의 삶'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먼저 깨우친 이'의 악전고투였다.

 

우남은 고종12년인 1875년 생이다. 한학을 수학하다 과거가 없어지자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창간하였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9년 박영효와 관련된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5년 7개월간 투옥되었고 탈옥으로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나 1904년 석방되었다.

 

이후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독립의 방법을 찾자는 노력이었다.

 

수십 년 해외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 대통령과 국무위원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했고 1945년 해방 이후 좌우 이념 투쟁 속에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더 선호했다. 광복 1년 후인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 77%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자본주의 선호는 단 14%에 불과했다.

 

국민의 절반이 노비 출신이고 국민 대부분이 상민으로 구성된 조선시대를 거친 해방공간 우매한 민중의 눈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평등사상은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발상지로 세계 질서의 주축인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한 이승만은 전체주의의 폐해와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는 온국민의 멱살을 잡아끌고 자유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이 땅의 간악한 좌익들은 이승만을 지극히 싫어한다. 이승만만 아니었다면 이 땅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승만을 폄하하고 왜곡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승만만 아니었다면, 이승만만 없었다면...

 

그들은 간악하고 끈질기다. 그들은 '백년전쟁'을 기획하여 역사에서 이승만을 지우고자 한다. 그들 식의 역사 바로 세우기로 이승만을 폄하하고 이승만의 업적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끈질긴 공격은 거의 성공 직전이다. 우리 헌법에서 '자유'를 지우고자 하는 그들의 백년 공격은 거의 성공할 뻔했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는 나이가 한참이나 들어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먼저 깨우친 자의 고뇌와 우매한 민중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악전고투를 말이다.

 

2022년 6월 7일. 40여 년 만에 그의 묘소 앞에 다시 서서 그의 선각을 칭송하고 그의 노고에 감사의 묵념을 오래 올렸다.

 

 

# 물론 선각한 지도자의 노고와는 별개로 이름 알려지지 않은 저 젊은 호국영령들의 희생의 결과가 오늘날 대한민국이기도 하다.

 

 

# 한참 돌아 우측으로 내려가면 현충지가 나온다. 뒤쪽 건물 뒤 언덕 숲 속에 사십여 년 전 우리 부대 막사가 있었다. 숲이 우거져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 일이다. 오늘 우리가 타고 온 전철 4호선 동작역과 터널 등 공사가 한창 진행될 때이기도 하다. 외박 나갔다가 술에 취해 무교동 길바닥에 잠들었던 이야기를 해줬더니 마눌이 기겁을 한다. 옛 추억 새록새록 일어난다.

 

 

# 한 바퀴 돌아 정문을 향했다. 오늘따라 저 펄럭이는 태극기가 새삼스런 의미로 다가온다. 

 

사십여 년 전 내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고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번영을 만들고 이끈 선각자들과 이름 없는 호국 영령들의 영면처이기도 한 현충원에서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

 

전철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이 되었다. 베란다 바깥에서 하루 종일 펄럭였던 태극기 걷어 갈무리했다. 2022년 현충일 뒷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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