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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아홉번째(과치재~유둔재)-멀고 힘들었던 유둔재 가는 길! 본문

1대간 9정맥/호남정맥종주기

[호남정맥]아홉번째(과치재~유둔재)-멀고 힘들었던 유둔재 가는 길!

강/사/랑 2010. 3. 1. 10:40
 [호남정맥]아홉번째(과치재~유둔재)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 선생(1510∼1560)의 호를 딴 ‘하서로 도로명 표석 제막식’이 20일 오후 광주 북구 운암동 광주 문화예술회관 사거리에서 열렸다. 울산 김씨 대종회와 재단법인 하서학술재단이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송광운 북구청장, 김달수 울산 김씨 대종회장, 박태근 광주향교 전교 등 유림과 주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김달수 대종회장은 축사를 통해 “하서 선생은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된 대학자로 문장과 절의, 도학을 두루 갖춘 성현”이라며 “예향과 의향인 광주의 관문에 하서로 표석이 들어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도로명 주소법이 생긴 이후 전국에서 도로명 표석이 세워진 것은 하서로가 처음이다. - 동아일보 기사.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선생은 장성(長城) 사람으로 호남 유림(儒林)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남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호남 학맥(學脈)의 태두(泰斗)이자 호남사람들의 자랑으로 오랜 세월 추앙을 받아온 대학자다. 그런 만큼 위의 신문기사처럼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김은 어떤 면에서 늦은 감이 있다 하겠다. 

 

하서 선생은 젊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 홍문관 박사(弘文館 博士) 겸 세자 시강원 설서(世子 侍講院 設書)가 되어 세자 시절의 인종(仁宗)을 가르쳤다. 그러나 인종의 갑작스런 승하를 계기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는데 남은 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학문은 성경(誠敬)의 실천을 목표로 하였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의 혼합(混合)을 주장하였다. 이항은 동시대 학자인 하서와 교유하며 학문을 논한 사이였다. 이(理)와 기(氣),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등은 조선 성리학의 중심 주제였다.

 

그런 하서 선생이 스승인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선생을 뵈러 갈 때 반드시 들르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소쇄원(瀟灑園)이다. 신재(新齋)는 화순 동복현(和順 東福縣)에 유배 중이었다. 장성에서 동복을 가자면 담양을 거쳐 가야 한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란 이가 담양군 남면에 세운 우리나라 대표적 민간 정원(庭園)이다.


양산보(梁山甫)는 제주(濟州)사람이다.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어려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조예가 깊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담양(潭陽)으로 내려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거하였다. 

 

'맑을 소(瀟)', '물 뿌릴 쇄(灑)' 자를 쓰는 소쇄원은 맑고 서늘한 은둔의 장소를 뜻한다. 하지만 소쇄원은 단순한 은둔의 장소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경외(敬畏)와 순응(順應), 그리고 도가적 무욕(道家的 無慾)의 삶을 살고자 했던 옛 선비들의 뜻이 스며들어 있는 장소였다. 그로 인해 그 뜻을 이해한 당대 호남 선비들의 교류의 장(場)으로 역할했다.

 

하서 선생 역시 그러한 선비 중 한 사람이었고 소쇄원 주인인 양산보와 각별한 우정을 평생 유지했다. 하서 선생이 소쇄원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쇄원의 풍광을 노래한 소쇄원 48영(瀟灑園 四十八詠)이다. 그 중 하나가 호남정맥 과치재~유둔재 구간의 산길 한 곳에 적혀 있다.

 

봄은 아직 먼 강남에 있고 한바람 성했던 2월말 홀로 전라도 담양의 호남정맥 산길을 걷다가 하서의 시가 적힌 안내판을 발견했다. 소쇄원이나 이 지역 지자체에서 하서선생을 기려 세운 것인 듯하였다. 하지만, 하서 선생의 명성에 비해 조악한 양철판에 맞춤법까지 엉터리로 적은 무성의한 글이었다.


그러나 무지한 뒷사람들이 맞춤법까지 틀려가며 조악한 양철 팻말에 페인트로 적어 둔 것이지만, 나는 그 양철판이 제법 의미 있어 보였다. 이 길을 지나는 뒷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하서선생의 높은 뜻을 한번 떠올려 본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石逕攀危(석경반위)

 

一逕連三益 (일경연삼익)

攀閒不見危 (반한불견위)

塵蹤元自絶 (진종원자절)

苔色踐還滋 (태색천환자)

 

좁은 돌길 위험하게 매달려 오르며

 

좁은 돌길에 연이어 매(梅), 죽(竹), 석(石) 삼익우(三益友)가 이어지고

한가롭게 오르니 위험은 없네.

속세의 발자취 스스로 끊으니

이끼 빛깔은 밟을 수록 더 풍성해지네.

 


멀고 힘들었던 유둔재 가는 길!


구간 : 호남정맥 제 9구간(과치재~유둔재)
거리 : 구간거리(21.6 km), 누적거리(184.8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0년 2월 27, 28일. 흙과 해의 날.
세부내용 : 과치재(16:00) ~ 무명봉 ~ 연산(17:25) ~ 방아재(17:50)/
우천으로 인하여 산행 중단. 방아재 인근 청운동마을에서 車泊.

 

방아재(06:45) ~ 400봉 ~ 청운동 고개 ~ 헬기장 ~ 만덕산(08:15) ~ 상여바위/신선바위 ~ 임도사거리(09:00) ~ 453.6봉 ~ 임도 ~ 호남정맥 중간지점 ~ 임도 ~ 수양산 갈림길 ~ 입석리 고개(10:15) ~ 국수봉 전위봉(11:00)/점심 후 11:50 出發 ~ 국수봉(11:55) ~ 인동장씨묘역 ~ 임도 ~ 월봉산 갈림길 ~ 468봉 ~ 흑염소 농장 ~ 406봉 ~ 전망대 ~ 425봉 ~ 활공장 ~ 노가리재(13:50) ~ 송전탑/30분 휴식 ~ 450봉 ~ 431.8봉 ~ 장원봉 갈림길 ~ 해남터 갈림길 ~ 최고봉(15:40) ~ 삿갓봉 갈림길/466봉 ~ 493봉 ~ 새목이재 ~ 폐헬기장 ~ 459.1봉(17:55) ~ 어산이재 ~ 439봉 ~ 유둔재(18:55).

총 소요시간 14시간 0분.(1일차 1시간 50분, 2일차 12시간 10분)


2월 27일 흙의 날.
전날 늦은 퇴근 때문에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챙겼다. 이번 구간은 거리가 꽤 있고 오르내림이 많은 구간이라 지금 내 체력으로는 하루에 끊기가 좀 어렵다. 그래서 토요일 어느 정도 진행을 해야 무사히 유둔재에 내려설 수 있다.

 

따라서 대중교통으로는 오늘 해지기 전에 과치재에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아 이번 구간은 자동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열한 시에 산본 집을 나서면서 교통정보를 확인하니 3일 연휴 첫날의 모든 도로는 all 정체 중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최대한 빠른 길을 찾아 달려가야지...

 

두 개의 국도, 다섯 개의 고속도로를 갈아타고 달려 달려 옥과나들목을 빠져나오니 집 나선 지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중간에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드니 비가 내려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다행히 도착하니 비는 이미 한 번 지나간 뒤다.

 

옥과면은 시골 면 답지 않게 제법 규모가 있고 대형 마트도 두어 개 있다. 그곳에 들러 김밥과 빵 등 오늘과 내일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과치재로 올라갔다.

 



만덕산/萬德山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운암리, 문학리, 용대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 575m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운암리·문학리·용대리에 걸쳐 솟아 있다. 만인에게 덕을 베푸는 산이라는 뜻으로 만덕산(萬德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에는 산신제단·신선바위·물통구리전망대·신선화장실바위·고깔바위 등이 있으며, 주봉우리인 할미봉(할미바위)에 오르면 광주의 무등산을 비롯하여 불태산·병풍산·추월산·백아산·모후산이 펼쳐진다. 산 아래로는 담양 창평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덕산과 등산로를 따라 이어져 있는 산과 고개들은 수양산·국수봉·노가리재·방아재 등으로, 만덕산을 지나 수양산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호남정맥중간지점(영취산에서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462km 구간의 중간지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만덕산 아래의 마을들은 만덕산에서 흐르는 석간수를 식수로 사용하여 예로부터 병 없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산 중턱에 천마폭포 또는 물통구리(물통거리)라 부르는 계곡물이 약효가 있다 하여 병을 앓는 환자들이 모여들었으나 객지 병자들의 출입을 싫어하는 주민들에 의하여 폐쇄되었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김인후(1510~1560)의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 혹은 담재이다. 본관은 울산. 1510년(중종 5)에 장성현 대맥동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1560년(명종 15)에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부터 장성의 신동이요 천하 문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다가 18세 때에 기묘사화로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1483~ ?)를 찾아가 학문과 삶의 자세를 배운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4세 때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게 된다. 35세 때 인종은 중종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하서는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을 돌아와 후학에 힘쓴다. 사후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처사 양산보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양씨가승집인 '소쇄원사실'의 기록에 따르면 "신재 최산두가 화순 동복 적벽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고향 장성에서 학문을 배우러 나아갔는데, 이때 하서는 반드시 소쇄원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또한 양산보와 도의지교를 맺어 자식들을 서로 혼인시켰는가 하면 소쇄원에 이르면 달이 넘도록 갈 것을 잊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하서가 18세에 그를 만났다. 최산두가 살고 있는 동복에 가기 위해서는 소쇄원 인근을 통해 가야 했는데, 하서는 양산보를 잊지않고 반드시 소쇄원을 오며가며 들렸던 것이다. 결국 둘은 사돈 관계가 되어 도의와 우정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16세기 당시 소쇄원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은 주인인 양산보였겠지만, 소쇄원을 시로 표현하여 나타내 보여준 사람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소쇄원과 관련된 시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작품은 바로 '소쇄원 48영'이다.

 

소쇄원/瀟灑園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림이다. 1981년 국가 사적 304호로 지정된 한국 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진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으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 생을 마감한 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선비가 불행하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를 마음에 담아둘 뿐 펼치지 못하며 교화는 자신의 집안으로만 그치고 넓혀지지 못한다는 옛적의 말을 볼 때 그로 인해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정유재란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호남정맥 제 9 구간 과치재~유둔재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과치재 올라가기 직전 좌측으로 용주사를 알리는 팻말을 따라 좌틀하면 고속도로 아래 지하도가 나온다. 지하도를 지나 우틀하여 용주사 쪽으로 오르다 보면 고속도로 좌측에 오늘 구간 들머리가 있다.


용주사로 올라가는 길이 꺾이는 지점에 공터가 있어 주차하고 짐을 챙겼다. 바로 곁에 '로뎀 자연학습장'이란 농원이 자리하고 있고 작은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 가볍게 몸 풀고 길을 나섰다. 16:00.


 

  

# 과치재 직전에 좌측으로 용주사 안내판이 서 있다.

 

  

# 호남고속도로 지하도를 통과한다.

 

  

# 연산 들머리. 좌측 건물은 로뎀 자연학습장이다.

 

  

# 호남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또 하나의 통로. 저 좁은 하수관로를 포복을 해서 건넌 이들도 많다고 하는데, 비 온 뒤라 물이 많이 흐르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저리로 지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해서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일단 오늘 연산 넘고 방아재를 지나 만덕산을 넘어 입석리고개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다면 한 아홉 시나 열 시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테니 한 세 시간 정도 야간 산행을 각오해야 한다.

 

마침 내일이 대보름날이니 잘하면 오늘밤에 보름달 보며 산행을 할 수도 있겠다는 야무진 꿈도 꿨다. - 그러나 이때까지는 내가  오늘 일기예보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다.

 

 

 

# 고속도로 절개지 위에서 지난 구간을 돌아본다. 호남고속도로와 너머의 과치재, 신촌주유소가 건너다 보인다. 과치재는 옥과로 넘어가는 고개라 과치란 이름을 얻었고 옛 이름은 과투재라 한다.

 

  

고속도로 갓길을 잠시 따르다 절개지를 치고 오른다. 비가 많이 왔었는지 배수로를 따라 물이 많이 흘러 내리고 있다. 절개지 위에 서면 호남고속도로와 과치재, 그리고 신촌 주유소, 그 뒤로 지난 구간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호남고속도로는 차량통행이 많아 저곳을 무단횡단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걸어야 할 일인 듯하다.

 

바로 숲으로 들어가는데, 비 온 뒤라 숲속은 축축하고 미끄럽다. 시작부터 가파르게 밀어 올린다. 경사가 급해 헉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름은 경사도 급하고 잡목의 저항도 심하다. 겨울에 이 정도인데 여름이면 잡목 때문에 고생 꽤나 하겠다. 금세 땀이 흘러 하드쉘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동계용 짚티, 베스트 하나만 입은 채 산행을 했다. 지난주는 추워서 두꺼운 소프트쉘 자켓을 산행 내내 입었는데 이번 주는 간편한 차림으로도 추위를 느낄 수가 없다.

 

한차례 쎄게 밀어 올려 봉우리에 오르지만, 정상은 저 멀리 뒤쪽에 물러나 있다. 다시 잔봉을 두 개 넘고 지겨울 만큼 길게 계단식으로 서너 차례 더 찐하게 밀어 올린다. 지난주 과치재에서 끊지 않고 방아재까지 계속 진행했다면 이쯤에서 죽는단 소리 나왔겠다.

 

계속 가파르게 밀어 올리는데 짙은 연무가 숲을 뒤덮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라... 이게 웬일이냐?? 오늘 비 온다는 예보가 있었나? 가만 생각하니 일기예보를 전혀 파악하지 않고 왔구나! 우의야 항상 챙겨 다니니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자! 17:25.'연산' 정상에 도착했다.

 

  

# 오름 도중에 우측으로 잠시 트인 곳이 나오고 호남고속도로와 신촌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 갑자기 짙은 연무가 숲을 뒤덮었다.

 

  

# 순식간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넓은 묘역을 지나 오르면,

  

 

# 연산 정상에 도착한다.

 

  

연산은 '연꽃 연(蓮)' 자를 쓰는데,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에 나오는 지명을 딴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지난 구간의 무이산도 같은 연유로 '무이(武夷)'란 이름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무이구곡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멋진 계곡의 경치가 연상되는데, 어째 이 지역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연산 정상은 고생해서 올라온 것과는 달리 조망도 없고 정상석도 없다. 다만 어느 산악회에서 만든 코팅된 종이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보수를 해서 나무에 매달아 보려고 했지만, 많이 훼손되어 그냥 나무 사이에 끼우고 사진 한 장 남겼다.

 

하산은 좌측으로 내려가야 한다. 묘지들이 연달아 나타난다. 연무가 짙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우측 아래로 방아재를 지나는 차 소리가 들린다.

 

길게 내려가는데, 연무가 걷히더니 빗방울이 굵어진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 우의는 꺼내지 않고 그냥  계속 진행하였다. 아래로 내리자 연무가 걷히고 방아재가 내려다보인다. 17:50. 대덕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방아재에 내려섰다.

 

  

# 연무가 걷히자 방아재가 내려다보인다.

  

 

# 간간이 차들이 지나다닌다.

 

  

# 포장도로가 지나는 방아재. 비가 내리고 있다.

 

  

방아재에서 잠시 물 한 모금 마시고 건너편 산으로 올라갔다. 곧 빗줄기가 굵어졌다. 얼른 배낭 내리고 우의를 꺼내 입었다. 다시 잠시 오르는데 등로가 미끄러워 죽죽 뒤로 밀렸다. 그 와중에 멧돼지 발자국이 어지럽게 등로에 찍혀 있다.

 

아이고, 이 상태로는 더이상 진행할 수가 없다! 애초에 야간산행을 준비할 때 대보름 밝은 달빛을 받으며 홀로 낭만을 즐기며 산길을 걷고자 했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겨울 산을 밤중에 혼자 돼지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은 무리다. 무리이다 싶을 때는 언제든 멈춰야 한다!

 

절개지를 도로 내려와 방아재로 복귀했다. 무리한 야간산행을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다만 오늘 계획했던 입석리까지의 산행이 미뤄져서 내일 구간 거리가 길어진 것이 걱정이 되고 과연 이 비가 밤 사이에 그쳐 줄지도 의문이다.

 

방아재는 대덕면 문학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인데, 고개 모습이 디딜방아처럼 생겨서 얻은 이름이다. 고개 아래에 담양 참사랑병원이란 치매, 알콜 등 정신 관련 병원이 있고 고개 바로 곁에 몇몇 가구가 사는 수곡마을이 있다.

 

이제는 과치재로 돌아가 차를 회수해야 하지만,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 과치재에서 밝은 대낮에도 한 시간 가까이 시도해서 결국 히치에 실패했는데, 비 내리는 고갯길에 시커먼 판초우의 입은 사람에게 세워줄 차가 없어 보였다.

 

십여 차례 시도하다 포기하고 택시 번호 알아보려고 하는데, 나를 지나쳐 고개를 내려가던 차 한 대가 차를 돌려 돌아와서는 타라고 한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고개 바로 곁에 있는 수곡마을에 사는 분이다. 비록 대덕면까지 10분 정도의 짧은 거리지만 덕분에 편안히 잘 내려올 수 있었다.

 

대덕면엔 버스종점이 있지만, 과치재 쪽으로 넘어가는 버스는 없다. 택시가 대기하고 있어 타고서 과치재로 돌아가 차를 회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마눌은 비가 내리니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오라지만 달랑 두 시간 산행하고는 그 먼 거리를 왕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일기예보에서도 내일은 비가 그친다고 하니 일단 기다려 보세!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야영하기는 어려웠다. 찜질방이 있나 싶어 옥과면으로 내려가 보지만 작은 시골 면소재지엔 기대하기 어렵고 담양까지 나가야 가능한 일인데, 그 또한 거리가 너무 멀다. 그래서 일단 내일 산행을 시작할 방아재로 가 보지만, 마땅히 야영할 장소가 눈에 띄질 않는다. 수곡마을 입구에 정자가 하나 있어 야영하기엔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차를 세워 둘 곳이 없어 그 역시 마땅치가 않다.

 

차를 돌려 화순 쪽으로 넘어가면 참사랑병원이 나온다. 혹시나 해서 병원으로 올라갔다. 주차장이 넓기는 하지만 비 피하고 텐트 칠 만한 장소는 없다. 다시 길을 나서 고개를 내려가는데 우측에 청운동이란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청운동 마을이면 내일 구간인 만덕산에 폭 둘러싸인 동네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은 공터가 있고 정자가 하나 있다. 텐트 치려고 살펴보니 비가 들이쳐 정자 바닥이 빗물로 흥건하니다.

 

에이 그냥 차에서 의자 젖히고 차박이나 하자! 청운동 마을은 꽤 큰 동네인데,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저녁을 끓여 먹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배가 전혀 고프질 않았다. 내려오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을 하나 사 먹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속이 더부룩하고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저녁을 굶은 채 침낭 속으로 들어가 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두어 시간 자다가 눈을 뜨니 11시가 넘었다. 아무래도 그냥 자기는 뭔가 허전해서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마눌이 싸준 신선 채소와 과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비는 아직도 꾸준히 내리고 있다.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 내일 아침엔 비가 그치기를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고르지 않은 자동차 시트 때문에 허리가 아파 밤새 뒤척이다가 눈을 뜨니 4시 30분이다. 차창 밖을 살피니 다행히 비는 그쳐 있다. 몸이 찌뿌드해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미적거리다 겨우 일어나 햇반 데우고 찌개 하나 끓여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곤 하룻밤 잘 보낸 청운동 마을에 감사 인사를 하고 차 몰아 방아재 고개로 향했다. 


 

  

# 만덕산 아래에 있는 청운동 마을.

 

  

# 신새벽 방아재.

  

 

방아재 고개 한 쪽에 주차하고 짐 챙겨 길을 나섰다. 밤새도록 비가 와서 숲이 축축히 젖어 있을 것 같아 판초 우의에 비옷 바지까지 입고서 산행을 시작했다. 06:45.

 

시작부터 제법 가파르게 밀어 올리는 형국이다. 준비 덜 된 몸이 힘들다고 야단이다. 그래서 가다쉬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몸을 워밍업 시켰다.

 

어제 연산 오르막이 잡목의 저항이 심해 빗물에 젖은 숲이 물구덩이일 것으로 예상하고 비옷으로 단단히 중무장을 했는데, 다행히 오늘 구간은 등로 확보가 잘 되어 있어 수풀에 몸을 비빌 일은 없다. 게다가 바람이 물기를 많이 날려버렸는지 의외로 숲에는 물기가 그다지 많지 않다. 기온도 높아 금세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차례 밀어 올려 묘지가 있는 '400봉'에 올라섰다.

 

  

# 능선에 오르면 어젯밤 들렀던 참사랑병원의 불빛이 보인다.

  

 

# 벌목지여서 빗물 먹은 수풀의 공격은 피할 수 있다.

 

  

땀이 흘러 우의를 벗어 배낭에 패킹하고 간편하게 길을 나섰다. 고개 아래에 독가촌이 있어 불빛이 보이고 건너편 만덕산의 위용이 우뚝하다. 묘지 하나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급격하게 떨어져 내렸다. 경사가 급해 스틱으로도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이 봉우리의 하산길이 이 모양이니 만덕산 오름이 어떠할지 어렵지 않게 잠작할 수 있다. 길게 내리자 임도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잠시 오르면 청운동 마을과 연결되는 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청운동고개'다.

 

 

 

# 아래로 청운동 고개의 독가촌이 보이고 건너편 만덕산은 구름 속에 당당한 위용을 드러낸다.

 

  

# 급경사 내리막을 내리면 임도에 도착한다.

  

 

# 청운동고개.

 

  

곧 가파른 오름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코가 땅에 닿게 경사가 가팔라진다. 힘이 들어 숫자세기를 시작하고 1,300걸음을 걷고서야 봉우리 하나를 오르지만, 정상은 저 멀리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마루금을 따르다 봉우리 하나를 넘고 다시 꾸준히 걸어 똑같이 다시 1,300걸음을 더 걸으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잡풀이 무성해 용도 폐기된 헬기장은 돼지란 넘이 얼마나 파헤쳤는지 밭으로 변해 있다. 바로 직전에 파헤쳤는지 흙이 뽀송뽀송하다. 잠시 더 진행하면 '만덕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08:15.

 

 

 

# 벌써 올괴불이 꽃을 피웠다. 올해 처음 꽃구경을 한다.

 

  

# 솔잎은 간밤의 빗물을 아직 달고 있다.

  

 

# 겨우내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서 봄을 맞이하고 있는 나뭇잎.

 

  

# 돼지놀이터로 변한 헬기장.

  

 

#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조금 더 가면 정상이다.

 

  

# 만덕산 정상.

  

 

# 정상 너머의 할미바위. 조망이 좋은 곳이지만, 연무 때문에 시계 제로상태다.

 

  

# 좌측으로 가야 할 정맥길의 산하들은 뿌연 연무 속이다.

 

  

만덕산(萬德山)은 만인에게 덕을 베푸는 산이라 만덕이라 하기도 하고, 옛날 전란 때 이 산에 만 명의 군사가 숨어 목숨을 구했다 하여 만덕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어찌하였든 萬德한 산이니 내 오늘 이 산에서 큰 덕을 얻고 가리라!

 

만덕산 정상엔 만덕산 할미봉이란 이름표를 단 정상석이 서 있다. 정상 한쪽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아마 그 바위가 할미바위인 듯하다. 평소 같으면 조망이 좋았을 곳이지만, 오늘은 연무가 짙어 조망이 전혀 없다. 다만 좌측으로 가야 할 정맥 구간의 산들이 연무 속에 잠깐잠깐 모습을 조금 보여줄 따름이다.

 

한숨 돌린 후 다시 길을 나서는데, 정상에서 갈림길 쪽으로 도로 물러 나와야 했다. 잘 가꿔진 묘역을 지나 내려가다가 살짝 올리면 '상여바위'가 나타난다. 이곳 역시 훌륭한 조망지이지만 오늘은 시계 제로 상태다. 다만 그 절벽 위에서 팔 벌려 천지기운을 조금 나눠 가질 뿐이다.

 

이후 아래로 길게 내려가다가 이정목이 있는 고개를 하나 지나고 바로 봉우리를 넘고 곧바로 다시 이정목 있는 고개를 만난다. 그리고 다시 봉우리를 넘어 아래로 내려가면 '임도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09:00.

 

 

 

# 상여바위.

 

  

# 조망이 훌륭했을 곳이지만 오늘은 시계 제로다.

 

  

# 신선바위.

 

  

# 이정목있는 고개를,

  

 

# 두 개 연속으로 지난다.

  

 

# 청운동에서 올라온 임도가 정맥을 가로지르는 임도사거리에 도착했다.

 

  

만덕산에서 1.68km 왔고 수양산까지 2.3 km를 가야 하는 지점이다. 곧바로 쭉쭉 뻗은 소나무숲길로 들어가고 편안하게 진행하다가 우측으로 꺾어 떨어져 내리면 다시 임도를 가로지르게 된다. 평탄하게 오르내려 잠시 진행하면 '호남정맥 중간지점 팻말'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09:35

 

  

# 임도를 다시 만난다.

 

  

# 호남정맥 중간 지점.

 

  

# 백두대간 영취산을 기점으로 계산한 것이다.

 

 

  

이곳을 호남정맥 중간지점으로 선정한 이들은 호남정맥의 기점을 영취산으로 정해서 이 지점을 선정했다. 그렇지만 영취산을 호남정맥의 기점으로 하면 금남호남정맥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 버리고 급기야 금남정맥은 그 출발점이 호남정맥 조약봉이 되어 버려 정맥이 아닌 기맥으로 그 위상이 격하되어 버려야 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무엇보다 단 4구간으로 짧은 거리이지만 어느 한 곳 버릴 곳이 없이 알차고 꽉 찬 느낌의 금호남정맥은 호남정맥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정맥으로 충분하더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곳은 호남정맥의 중간지점이 아니다.

 

아무튼, 중간지점이란 팻말이 있는 만큼 간만에 셀프샷 한 방 날리고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편하게 오르내리다 아래로 가면 다시 임도를 만나고 한차례 올려 진행하노라면 '수양산 갈림길'을 만난다. 수양산은 정맥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우틀하여 아래로 길게 내려가면 어제 밤중에 도착하기로 계획했던 '입석리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10:15.

 

 

 

# 임도를 다시 만나고,

 

  

# 입석리고개에 도착하였다.

 

  

# 느티나무 여러 그루가 서 있는 입석리 고개.

 

  

# 여러 느티나무 중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 수령이 335년이란다.

 

  

입석리 고개는 대덕면 입석리와 운암리를 이어주는 포장도로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가 널따란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 마을이 고개 정상에까지 자리하고 있다. 양지바르고 순한 지형이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 여겨지는데 그래서인지 전원주택들이 이곳저곳 자리하고 있고, 따스하고 조용해 아늑한 느낌이 든다.

 

입석리라면 선돌에 관한 전설이 있을 법한데, 자료를 찾아보지만 정리된 것이 없고 지도에 국수봉 좌측 산줄기에 선돌재란 고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고개 정상엔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작은 쉼터도 있어 잠시 다리를 쉬고 휴식을 취했다.

 

한숨 돌린 후 다시 짐 챙겨 길을 나섰다. 고개 건너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논이 시작되는 곳에서 우측으로 올라 숲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위로 밀어 올리는데 갑자기 체력이 떨어지며 힘이 많이 들었다. 길게 올라 봉우리에 올라서지만, 정상은 저 뒤쪽에 있다.

 

벌목지가 나타나 잠시 조망을 허락하지만 흐려서 명쾌하지는 않다. 잠시 후 임도를 만나는데, 입석리에서 올라와 국수봉을 구불구불 휘감는 형태로 진행하는 임도다. 다시 가파르게 오르는데 가다 쉬다 반복하다가 겨우 전위봉에 있는 '바위전망대'에 올라 배낭 내리고 점심상을 펼쳤다. 11:00.

 

 

 

# 마을길을 따르다 우측 산으로 올라서 전방의 국수봉으로 휘감아 올라야 한다.

 

  

# 양지바른 곳에선 벌써 쑥이 쑥쑥 자라고 있다.

  

 

# 벌목지가 나타나 조망이 트이고 국수봉이 올려다보인다.

 

  

# 돌아보면 지나온 정맥길과 정맥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있는 수양산이 보인다.

  

 

# 막걸리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랬다.

 

  

산본에서 사온 막걸리 한 병과 어제 옥과에서 구입한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사람 왕래가 전혀 없는 산길이라 마음 놓고 거풍도 한 판 즐겼다. 그러다 11:50에 다시 짐 챙겨 출발했다. 잠시 후 산불감시탑이 있는 '국수봉'에 도착했다. 11:55.


국수봉은 '나라 國', '지킬 守' 자를 써서 국수봉(國守峰)이라 불린다. 이 산에 나라를 지키던 봉화터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정작 봉화터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산불감시탑이 우뚝 솟아 있을 뿐이다.

 

정상을 지나 잠시 진행하면 봉우리가 다시 나오고 전방으로 조망이 트여 가야 할 정맥길이 조망된다. 정맥은 직진하여 내린 후 다시 올렸다 월봉산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가야 하는 형국이다. 저 멀리 월봉산이 조망되지만 월봉산은 정맥길이 아니다.

 

가파르게 아래로 내렸다가 선답자의 산행기에 꼭 등장하는 인동 장씨의 묘역을 만난다. 지난 추석에 벌초를 했는데, 다시 잡목이 자란 건지 넓은 묘역과 석물들에 비해 묘들은 모두 잡풀이 자라 봉두난발하고 있다.

 

바로 아래에 입석리에서 올라온 임도가 지나고 잠시 임도를 따르다 전방의 산으로 올라가면 '월봉산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월봉산은 이곳에서 직진하여 가야 하고 정맥은 좌틀하여 가는데, 468봉은 좌측 사면으로 우회하여 가게 된다. 아래로 내리면 '염소농장'이 나타나고 편하게 가다가 한차례 밀어 올리면 '406봉'을 지난다.

 

우측으로 창평면 일대가 조망되고 아래로 내렸다 연속으로 잔펀치를 몇 차례 얻어맞게 되는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힘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점심때 먹은 김밥이 잘못되었는지 배가 계속 부글거리고 복통이 발생했다. 그 김밥은 어제 옥과에서 구입한 것인데, 차갑고 딱딱해 맛도 못 느끼고 그냥 허기 채우느라 먹었다. 어제 내려오면서 휴게소에서 사 먹은 우동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천근만근 늘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봉우리를 한차례 밀어 올리니 '암봉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 국수봉 정상의 산불감시탑.

 

 


# 가야 할 정맥길. 저멀리 월봉산이 보이고 그 전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가야 한다.

  

 

# 염소목장.

 

  

# 암봉전망대에서의 조망. 425봉과 활공장, 그리고 노가리재로 올라오는 도로가 구불구불 보인다.

  

 

# 활공장을 땡겨본다.

 

  

# 유천리 저수지와 건립 중인 서원인지, 재실인지 한옥단지가 보인다.

 

  

# 창평면의 넓은 들판.

 

 

 

# 전방의 조망을 파노라마로 펼쳤다.(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전망대에서는 조망이 훌륭하다. 창평면 일대의 넓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좌측으로 구불구불 오르내려야 하는 정맥줄기와 425봉, 활공장, 그리고 노가리재로 올라가는 도로가 구불구불 구절양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힘들어서 한참을 휴식하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잠시 내렸다가 잔봉을 하나 넘고 길게 올려치면 '425봉'에 올라선다. 425봉엔 폐활공장이 있고 우측으로 내렸다가 살짝 봉우리 하나를 오르면 새로 조성된 '활공장'이 나타난다. 활공장인 만큼 당연히 전방으로 조망이 훌륭하다. 잠시 경치 구경하다가 아래로 내려가면 '노가리재'에 도착하게 된다. 13:50.

 

 

 

# 잠시 편안한 길을 허락한다.

 

  

# 425봉의 폐활공장.

 

  

# 노가리재 직전의 활공장.

  

 

# 지나온 정맥길. 완만해 보이지만 지친 나에겐 굉장히 힘든 구간이었다.

 

  

# 활공장에서의 파노라마.(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창평면 쪽만 파노라마로.(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간만에 표지기 하나 남겼는데...

 

  

# 또 하나 가장 저렴해 보이는 표지기. 대간, 정맥 가리지 않고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이마트 포장끈으로 된 표지기. 이마트 직원인가??

 

  

# 노가리재.

 

  

노가리재는 정말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고개다. 산 동무인 백곰님 부부가 이 고개에서 실제로 노가리를 발견해 한바탕 웃음을 지었던 일이 있다 했다. 그러나 정작 고개 이름이 노가리재인 것은 명태 새끼인 노가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옛날에 고개의 모양이 사슴 모양이라 '녹재(鹿峙)'라 하였던 것이 오랜 세월 사람들 입을 거치면서 노가리재로 변형된 것이다.

 

노가리재는 담양 창평면의 유천리와 외동리를 이어주는 포장도로인데, 간간이 차량통행이 이뤄지고 있다. 너무 지쳐서 고개 한 켠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있자니 고개를 넘던 차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속도를 늦춰 살피다 지나간다. 그냥 저 차들 중 하나 얻어 타고 탈출해 버릴까 하고 고민도 하다가 이왕 나선 길 끝까지 가보기로 하고 다시 짐 챙겨 길을 나섰다.

 

노가리재 절개지는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내려 진창을 이루고 있다. 발이 푹푹 빠지고 뒤로 죽죽 미끄러진다. 억지로 스틱에 의지해 절개지를 치고 올랐다. 순식간에 신발이 완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잠시 오르면 송전탑이 나오는데 도저히 더이상 진행할 기운이 없다. 다리도 아프지만 무엇보다 배가 계속 아파 영 불편했다. 그래서 송전탑 한 켠 그늘 아래 배낭 내리고 벌렁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30여 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이후 급경사의 오르막이 길게 이어진다. 30분 간 휴식을 취했다고 하나 한 번 떨어진 체력은 회복될 줄 모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상 역시 애를 먹인다고 잔봉을 두어 개 넘고서야 오름을 허락한다.

 

'450봉' 정상엔 묘지와 갈림길이 있다. 좌틀하여 아래로 내려 가다가 잠시 위로 올리면 삼각점이 있는 '431.5봉'이 나타난다. 이어 잔봉을 하나 넘고 다시 오르면 갈림길이 있는 봉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장원봉 갈림길'이다.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가다가 봉우리 하나를 넘고 길게 밀어 올리면 '해남터 갈림길'이 나온다. 해남터가 무얼 의미하는 지는 잘 모르겠고 소쇄원으로 가는 갈림길이란 것으로 보아 그와 관련된 사연이 있을 걸로 짐작만 해본다. 이곳에서 유둔재까지 7.14km 거리라고 적혀 있다. 이후 다시 길게 치고 올라가면 돌탑이 있는 봉우리가 나오는데 '최고봉'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15:40.

 

 

 

# 묘지가 있는 450봉 정상.

  

 

# 삼각점이 있는 431.5봉.

 

  

# 이름 없는 옛 고개를 지나고,

 

  

# 이런 형태의 이정목이 유둔재까지 계속 나타난다.

 

  

# 편안한 길이지만 오늘 나에겐 힘든 길이다.

 

  

# 해남터 갈림길. 소쇄원 가는 길이다.

 

  

# 호남 유림의 태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싯귀가 적혀 있다. 맞춤법도 고치고 새롭게 정비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주석이란 한자나 한시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설명해야 한다.

 

  

# 최고봉.

 

  

최고봉은 지도에 없는 이름이다. 해발고도 493m라고 적어 두었는데 오늘은 고도계조차 배터리가 다되어 고도 확인도 할 수 없다. 정상엔 돌탑까지 쌓아 두어 최고봉이란 이름을 나름 의미 짓고 있다.

 

정상을 지나 아래로 내렸다가 잔봉을 하나 넘으면 '삿갓봉 갈림길'이 나온다. 지도에는 '까치봉 갈림봉'이라 기록되어 있고 국립지리원에는 '466봉'으로 되어 있다.

 

좌틀하여 아래로 내리는데 곧바로 계단식으로 길게 밀어 올리라고 한다. 아이구~ 죽갔구나야!!! 오늘 구간은 거리도 멀거니와 정말 오르내림이 심하다. 똥꼬 수선 때문에 5개월 동안 산행은 물론 운동을 전혀 못 한 몸이 긴 산행 거리에 유달리 오르내림이 심한 구간을 하자니 정말 죽을 맛이다.


누군가의 산행기에 이 구간을 산행길이 아니라 고행길이라 표현해 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과연 그이의 표현이 정확하다. 아..... 정말... 힘들다.....

 

한차례 길게 올렸다 우틀하여 다시 위로 밀어 올리면 '493봉'이 나오고 바로 아래로 내리는데 계단식으로 꺾여 떨어지는 지점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가 웬일로 비교적 평탄하고 길게 진행하게 하지만, 마냥 편한 것은 아니고 작으나마 볼록거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더니 웬걸? 곧바로 잔 펀치 서너 개가 집중된다. 아이고 죽갔다 소리가 나올 즈음 희미한 옛 고개가 하나 나타난다. '새목이재'다.

 

 

 

# 삿갓봉 갈림길(지도에는 까치봉으로 나온다.)

  


# 아이고 더이상 못 가겠다! 등로에 배낭 멘 채로 주저 앉아버렸다.

 

  

# 내리막길의 계단식으로 꺾이는 부분에 설치된 삼각점.

 

  

# 새목이재.

 

 

새목이재는 일반 지도에 넓은 길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중간 탈출을 하려고 작정했던 곳이다. 오늘 구간이 거리도 멀고 오르내림이 심한 데다 수술 후 오랜 휴식으로 저질 체력이 되어 중간에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지도 확인하고 이곳 새목이재에서 탈출하자 작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국립지리원에서 출력해 온 25,000 지도에는 새목이재가 이름만 적혀 있고 길 표시는 없어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현장에 와보니 역시나 희미한 옛 길이 있을 뿐이고 탈출하기에 적당치 않다.

 

굳이 탈출하자면  바람모퉁이를 통해 남면으로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희미한 옛 길 억지로 찾아 내려가느니 힘이 들더라도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끝까지 가는 수 밖에! 한숨 쉬며 곧바로 411봉을 향해 오르막에 몸을 맡겼다. 헉헉 낡은 기관차 소리를 내며 꾸준히 밀어 올리면 묵은 헬기장이 있는 '411봉'에 도착한다. 이곳은 돼지의 흔적이 낭자하다.

 

이후 아래로 내렸다가 또다시 길게 밀어 올려야 한다. 참 징글징글한 구간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거친 내 숨소리만 집중한 채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꾸준히 밀어 올려 억새 무성한 '헬기장'에 도착했다. '459.1봉'이다. 정상 한 켠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17:55.

 

 

 

# 억새 무성한 459.1봉.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곧바로 깊게 떨어져 내려 희미한 옛고개인 '어산이재'에 도착했다. 어산이재는 유어상탄(遊魚上灘)의 명당이 있어 어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물고기가 여울을 거슬러 오르는 형상이란 뜻이다. 지도 확인하니 과연 고개 좌우로 물길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희미한 옛 고개라 인적 끊긴 지는 오래인 듯하다.

 

곧바로 힘겹게 봉우리 하나를 치고 오르니 '439봉'이다. 잠시 내렸다가 봉우리 하나를 다시 넘는데, 이 봉우리가 오늘 구간 그 많고 많았던 봉우리들 중 마지막 봉우리다. 이제는 정말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길게 내리면서 진행하는데, 날이 어느새 어둑어둑 해지며 숲속에 어둠이 찾아온다. 하지만 빨리 마무리 하고 싶은 욕심에 등불 밝히는 것은 생략하고 계속 속도를 내서 진행했다.

 

그러다 마루금을 버리고 우측 사면으로 90도 방향을 꺾어 떨어져 내렸다. 이미 숲속은 캄캄해지고 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물기가 있어 미끄럽지만 계속 더듬으며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가다보니 넓다란 임도가 나타나고 임도 좌우로 묘지들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 구불구불 길게 내리니 숲을 벗어나며 오늘 목적지인 '유둔재'에 도착하게 된다. 18:55 .

 

 

 

# 어산이재. 고개의 흔적은 세월에 파묻혀 버렸다.

 

  

# 어느새 해가 서산에 기운다.

 

  

# 정말 어렵게 도착한 유둔재.

 

  

# 차량통행이 없는 곳이라 캄캄절벽이다.

 

  

아, 정말 힘들고 어렵게 도착한 유둔재다. 오늘 구간은 도상거리만 20km가 넘는 먼거리인 데다 오르내림이 심한 구간이라 너무나 힘이 들었다. 게다가 5개월 간의 공백기간 동안 체력이 많이 약해진 데다 오늘 식중독 증세까지 있어서 산행 내내 무지무지 힘이 들었다. 꼭 몇 년 전 낙동정맥 면산 오를 때 힘들었던 것처럼 어렵게 진행한 구간이었다. 너무너무 멀고도 힘들었던 유둔재 가는 길이었다.

 

유둔재는 고개에 장군대좌의 명당이 있고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였다 하여 유둔재란 이름을 얻은 곳이다. 유둔재는 남면에서 화순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데, 차량 통행도 전혀 없고 캄캄한 밤길엔 불빛 하나 없다. 남면 택시에 전화했더니 5분 만에 도착해 준다. 택시 타고 방아재로 차 회수하러 가는데, 점심 이후 계속 아팠던 배 때문인지 가는 내내 멀미가 나며 속이 매쓱거렸다.

 

20여 분 차 달려 방아재에 도착하니 어둠 속에 내 차만 홀로 외롭게 서 있는데, 어제 내려왔던 연산 위에 뿌연 안개 속에 달무리가 낀 정월 대보름달이 떠 있다. 아,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지!! 보름달 향해 두 손 모으고 너무나 힘들었던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홀로 걷는 산길 무탈하게 보살펴 주십사 빌었다.

 

 

 

# 연산 위로 달무리 낀 정월 대보름달이 홀로 산꾼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후 짐 정비하고 다시  두 개의 국도와  다섯 개의 고속도로 번갈아 달려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멀고 힘들었던 호남 유둔재 가는 길을 마무리 했다. 정말 힘든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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