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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한양 서촌/漢陽 西村 본문

산이야기/사진으로 만나는 세상

[나들이]한양 서촌/漢陽 西村

강/사/랑 2016. 4. 4. 21:32

[나들이]한양 서촌/漢陽 西村

  

 

조선 후기에 '위항인(委巷人)'이라 불리던 집단이 있었다. 위항(委巷)에 모여 사는 사람이어서 위항인이라 불렀다. 자료를 찾아보니 위(委)는 곡(曲) 즉, '굽은 것'을 의미하고, 항(巷)은 ‘이중도(里中道)’ 즉, 골목길을 말한다. 결국, 위항은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 작은 길' 이고, 위항인은 그 골목길에 모여 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위항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중인집단(中人集團)이었다. 중인이란 의(醫), 역(譯), 율(律), 산(算), 역(歷)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관이나 기술관보다 지위가 낮은 하급 관원, 지방 향리 등 중간 신분을 뜻한다.

 

그들은 양반은 아니지만 비교적 부유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따라서 북촌의 양반 계급과 달리 서양의 문물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기도 했던 문화의 선두주자였다. 그리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조선 후기 위항인의 예술 활동의 영역은 대단히 넓었다. 그들의 예술 활동은 음악, 회화, 글씨, 국문학 (시조, 판소리 등), 한문학 등의 광범위한 영역을 망라했다. 그들이 발전시킨 문화를 위항문화(委巷文化)라 불렀다.
 
사대부와 달리 출신 성분이 낮았던 그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분을 뛰어넘는 전문지식을 추구하였고 그 지적기반을 바탕으로 저술 등 활발한 문화 활동을 하였다.
때문에 이들을 조선의 르네상스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 위항인은 경복궁의 서쪽인 인왕산의 동측 산록(山麓)과 그로부터 흘러내린 백운동천을 포함하는 지역에 모여 살았다. 그곳을 서촌(西村)이라 부른다. 그들이 서촌에 모여 산 이유는 그곳이 관청에 가깝고 자연경관이 빼어났기 때문이다. 또 비교적 땅값이 저렴한 것도 작용하였다 한다.

 

지금의 청운효자동, 통인동, 체부동, 옥인동부터 경복궁역 일대의 성곽에 둘러싸인 경복궁 서쪽 동네인데, 청와대가 근처에 있어 개발이 어려웠고 지금도 다른 도심지역에 비해서는 저평가되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같이 한양 집값을 감당 못 해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난 이들에겐 꿈같은 동네일 터지만...

 

얼마전부터 산동무들과 한양의 옛 동네를 돌아보는 나들이를 계획했는데, 그 일환으로 이번에는 서촌을 돌아보기로 했다. 앞서 논(論)한 대로 서촌은 내로라하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는 북촌과 가난한 딸깍발이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남산골과는 달리 조선의 르네상스인이라 불리던 전문가 집단인 중인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이다.

 

그리하여 옥계시사(玉溪詩社)를 필두로 한 각종 시사(詩社) 즉, 문화 모임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이 전개되었고,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와 추사 김정희의 명필이 이 동네에서 탄생하였다. 역사는 이어지는 법이다. 근대에는 이중섭, 윤동주, 노천명, 이상 등이 거주하며 문화예술의 맥을 이었다.

 

서촌은 그러한 문화예술의 맥(脈)이 살아 있는 동네이다. 산꾼들의 한양 옛 동네 둘러보기 발걸음이 그곳 서촌으로 향했다.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함. 사진은 모두 스마트폰 버전임.)

 



# 경복궁역에서 동무들과 조우했다. 역내 벽에 서촌 일대의 거리 개념도가 걸려 있다. 파란 글씨로 된 주요 명소를 차례로 돌아볼 작정이다. 

 



# 씨앗으로 뿌려진 별들이 꽃 피어 자라면 어떤 열매를 맺을꼬?

 

 



# 북악과 경복궁 일대의 전경이 걸려있다. 중앙의 북악을 중심으로 좌측 동네를 돌아볼 생각이다.

 



# 불로문(不老門)이 서있다. 그 속으로 통과했다. 늙지 않기 보다 바르게 잘 늙기를 바라면서.

 



# 경복궁 옆으로 나왔다.

 



# 북악이 좌측 전방이다. 그 아래 대한민국 논란의 중심 파란 기왓집이 보인다.

 



# 궁궐 담벼락 근처 공원에 백송(白松)이 자라고 있다. 중국에서 들어와 당송(唐松), 수피가 얼룩덜룩하여 호피송(虎皮松)이라고도 부른다.

 



# 백송이라고 하지만 완전히 흰색은 아니고 껍질이 벗겨진 부분이 희어서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차라리 백송은 수피가 버즘나무를 닮았다. 버즘나무는 플라타너스를 말한다. .

 



# 홀로 산꾼들이 깊은 산속 대신 서울 도심을 활보하고 있다. 이 멤버의 한양 옛 동네 공부하기는 벌써 횟수가 서너 차례가 되었다. 그동안 북촌, 한양 궁궐, 장충단 등을 함께 답사했다. 답사 내내 서울 토박이 비그쳐님이 안내를 맡았다. 멤버 구성을 가만보니 이런 모임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 경복궁 서쪽 담벼락을 끼고 올라갔다. 길 건너에 오래 되어 보이는 음식점이 있다. 메밀 음식을 파는 곳이다. 왠지 맛집일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 밥 때가 아니라 그냥 눈으로만 보았다.

 



# 조금 더 가자 보안여관이란 간판을 단 낡은 건물이 보인다. 1930년대에 문을 연 여관이란다. 1936년 미당 서정주가 저 여관에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과 함께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화가 이중섭도 자주 찾은 집이고.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인데 이제 더는 여관이 아니다. 2004년에 여관으로의 기능은 다 했고 지금은 갤러리 역할을 하는 복합 예술 공간이 되었다. 

 



# 북악 아래 푸른 기와집이다.

 



# 좌측으론 인왕산이다.

 



# 저 집에만 들어가면 모두가 불행한 결말로 빠지는 희한한 집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명의 상처없이 온전한 대통령을 남기지 못한 우리는 불행한 국민이다. 그들의 책임이자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제대로 일할 수 있게 지원해 본 역사가 없으니...

 



# 불행한 우리의 역사와는 무관한 중국 관광객들만 그 파란 기와집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다. 

 



# 경북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다. 세종 15년인 1433년에 건립된 건이다. 임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2년인 1865년에 현재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신무라는 이름은 네 방향의 동물 신 중 북쪽의 현무(玄武)에서 따 온 것이다. 음기가 강한 곳이라 평소에는 문을 닫아 둔다고 했는데, 옛날 일이고 지금은 활짝 개방되어 있다.

 



# 신무문 우측에 암문(暗門)이 있다. 그 위에 전서체로 이름이 적혀 있는데 맨 앞 글자가 전서체 중에서도 희한한 모양이라 우리 일행 중 아무도 해독을 못하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소전체(小篆體)라고 진시황 때 이사가 만든 글씨체란다. 2천년이 넘은 글씨 모양을 우리가 알리 있는가? 사방으로 포크가 매달린 듯한 저 글씨는 12지간지 중 열째천간 계(癸)이다. 계(癸)는 북쪽, 겨울을 의미한다. 결국, 계무문이란 이름을 가진 북쪽의 암문이다.

 



# 그 우측에 또다른 암문인 광무문(廣武門)이 있다. 저 글씨는 우리도 해독 가능하였다.

 



# 경북궁 동쪽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그냥 통과.

 



#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이다. 양반 중 문반(文班)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 동십자각(東十字閣). 경복궁 동남쪽에 있는 망루이다. 길이 생기면서 경북궁과 떨어져 도로 한가운데 홀로 서있다.

 



# 광화문(光化門) 앞에 가니 수문장 교대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 한복 빌려 입고 궁궐 구경에 나선 젊은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 경복궁을 한바퀴 돌았다. 정부청사 사거리에서 공손한 조형물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낡은 건물에 오래된 작명소가 있다. 비그쳐님의 이름도 이곳에서 작명하였다 한다.

 



# 궁궐 담장 한바퀴 돌았더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 이 동네에서 굉장히 유명한 삼계탕집이란다. 삼계탕 좋아한다는 중국인들이 나래비를 서 있었다. 그 관광객 틈에 끼어 삼계탕 한그릇 먹었다. 맛은 평범하였다.

 

 


# 통인동 백송을 만났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노거수(老巨樹)였는데 태풍 때 낙뢰를 맞아 고사하고 말았다. 자연히 천연기념물에서 지정해제 되었다.



 



# 이 자리는 창의궁(彰義宮)이 있던 자리이다. 창의궁은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머물던 궁이다. 그 시기에 심어진 백송은 3백년을 살다가 벼락에 쓰러져 그 삶을 마감했다. 지금 그 곁에 다른 백송을 심어 훗날을 기약하고 있다.

 


# 제헌회관. 여의도에 어마무시한 규모로 세워진 국회 건물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이를데 없다. 국민 세금이 가장 낭비되는 건물이고 가장 혐오스런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한, 그러면서 이 땅에 출세했다는 인물들이 최종적으로 꿈꾸는 그곳의 모습과는 정말 대조적이다.

 

 

 



# 해공 신익희 가옥.

 

 



# 해공(海公)은 경기 광주사람이다. 독립운동가로 임정에서 내무부장을 했다. 해방후 제헌국회에서 이승만 의장과 더불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의장이 되었다. 나중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경쟁하였다. 1956년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통인동 집은 골목 안에 작은 규모로 남아 있다.

 



# 근처에 우당 이승만의 기념관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한 두 사람의 흔적이 가까이 있는 것이 묘하다.

 


# 농아학교 마당에 수화 조형물이 서있다.

 



# 자신의 존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歌辭)문학의 대가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작품비가 서있다. 송강은 1536년 이곳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 강호에 병이 깁퍼 듁님의 누엇더니...

 



# 서포 김만중은 그의 저서 서포만필에서 "예로부터 조선의 참된 문장은 오직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 편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조선 중기 시가문학의 대가인 송강은 이제 길가에 선 비석 몇 개로만 기억되고 있다.

 



# 1923년에 개교하였다는 청운초등학교 교정에서 인왕산을 올려다보았다.

 



# 학교 교정에 매화향 그윽하였다.

 



# 인왕산 기차바위. 달 밝은 밤 인왕산 호랑이가 저 바위 위에서 어흥하고 포효할 듯하다.

 



# 흐린 서울 하늘 너머 남산도 보인다.

 



# 자하문(紫霞門) 고개로 올라 갔다. 그 고개 입구에 최규식경무관 동상이 있다.  이 분은 1.21 무장공비 침투 때 순직한 경찰관이다.

 



# 자하문은 생략하고 좌측으로 방향을 잡았다.

 



# 그곳에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이 건물은 버려진 물탱크와 수도가압장 시설을 재건축하여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시인이 이곳 가까운 누상동에서 하숙을 한 인연으로 이 문학관 뒷동산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가 시인의 시 몇 편 읽었다. 

 

 



# 북악산이 건너다보인다.

 



# 시인의 언덕에서 이어지는 인왕산 자락을 걸었다.

 



# 꽃잎을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인 제비꽃을 만났다.

 

 



# 잘 단장된 산책로이다. 좋은 조망처도 곳곳에 있다.

 

 

 



# 오래 된 이런 동네에서 사는 것도 복 받은 일이다. 대신 동네에 얽힌 옛 이야기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한다.

 



# 인왕산을 우측에 두고 그 산자락을 제법 길게 걸었다.

 

 



# 돌단풍 그 이름답게 돌 틈에서 꽃대를 밀어올렸다.

 



# 그곳에 수성동계곡이 있다. 옥인동에 속하는 이 계곡은 맑은 물소리가 좋아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다. 특히 겸재 정선의 산수화인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에 등장하여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 저 돌다리는 안평대군이 살던 비해당이란 집의 기린교(麒麟橋)인데, 겸재의 그림에 그 모습이 등장한다.

 

 



# 수성동계곡 아래 옥인동으로 내려갔다.

 



# 윤동주 시인이 하숙하던 집이 나온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는데 지금 주인과의 연관성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집 주인은 대단한 자부심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 그 아래에 박노수 가옥이 있다. 원래는 친일파인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1938년에 지은 벽돌집이다. 한식과 양옥, 그리고 중국풍까지 섞인 당시로는 굉장히 호사스러운 집이었다. 나중에 화가 박노수가 인수하여 지금은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이런저런 구경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 어느 골목의 담벼락에 복돼지 한 마리 앉아있다.

 



#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집터라고 적힌 집을 만났다.

 



# 이상은 내 고교 시절의 우상이었다.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청춘을 보내던 고교 시절에 만난 날개, 오감도 등 난해하고 괴상하기까지 한 그의 시는 우울한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이 집은 이상이 23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 백부인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 이 집에서 청춘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고 이 집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최근 이 집이 실제 이상이 살던 집이 아니고 이상이 떠난 후 필지가 쪼개지면서 집장사들이 지은 집의 일부라는 것이 밝혀져 문화재 지정이 취소된 모양이다. 어쨌건 내부 구경 좀 하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만 보았다. 

 



# 그렇게 서촌 일대를 한바퀴 돌고 마지막으로 먹거리 골목을 찾았다.

 



#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서촌기행의 감상을 나누었다.

 



# 이후 청계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 봄은 짧고 가녀려 정말 부서질 것 같다.

 



# 내친 김에 청계천도 한바퀴 돌았다.

 

 

 

 

 

 

 


긴 하루였다. 홀로 산꾼들의 한양 도성 나들이 중 서촌기행을 그렇게 마쳤다. 이 동무들과는 북촌과 궁궐 감상, 장춘단 기행 등을 함께 하였다. 다음에 좋은 날 잡아 성곽길도 함께 걸어 봐야겠다. 조곤조곤 대화 나누며 솔방솔방 느린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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