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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연표(茶山 年表) 본문
▣ 다산 연표(茶山 年表)
연령 | 연대 | 경력 | 국내외정세 | 주요저작 |
1 | 1762 | 음력6월16일 사시(巳時)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어머니 해남 윤씨의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 아명은 귀농(歸農), 관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 호는 삼미자(三眉子), 다산(茶山), 사암(俟菴), 열초(冽樵),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천주교명은 요한 | 사도세자가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서 죽자 부친이 사직하고 귀향 | |
2 | 1763 | 완두창을 앓음 | ||
4 | 1765 |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 ||
6 | 1767 | 아버지가 연천(連川) 현감으로 부임하자 그곳에 따라가 아버지의 교육을 직접 받음 | ||
7 | 1768 | 오언시를 짓기 시작. ‘산'이라는 제목의 한시가 있는데,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지)라는 구절이 있음. 연두를 앓은 흔적이 오른쪽 눈썹위에 남아 삼미자(三眉子)란 별호를 가짐. | ||
9 | 1770 | 어머니 해남 윤씨가 43세로 운명 | ||
10 | 1771 |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많이 읽고 아버지에게 수학했음(이때 아버지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음). 며 많은 양의 작문을 함 | ||
12 | 1773 | 서모 김씨가 측실로 들어옴 | ||
13 | 1774 | 두보(杜甫)의 시를 애독하고 이를 본떠 우수한 한시를 창작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음. | ||
15 | 1776 | 2월에 풍산(豊山) 홍씨와 결혼 (장인 홍화보(洪和輔)는 무과 출신으로 후일 승지에 오름). 부친이 호조좌랑이 됨. 아버지를 따라 서울 남촌에 거주함. | 3월 영조왕 서거, 왕세손(정조) 즉위,미국독립선언 | |
16 | 1777 | 성호 이익의 유고를 처음 읽고 실학에 뜻을 두었으며 유고경전과 주자의 집주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짐. 체제공(蔡濟恭),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등 성호학파의 인사들과 박연암(朴燕岩),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제하기 시작. 가을에 부친이 전라도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여 따라 감. 청주, 전주 등을 유람하면서 시를 지음. | ||
17 | 1778 | 가을에 전라도 동복현의 물염정(勿染亭)과 광주의 서석산을 유람. 겨울에 둘째형 약전과 화순현 동림사에서 맹자를 읽고 ‘동림사독서기'를 지었으며 송유(宋儒)들의 주해를 비판함 | ||
18 | 1779 | 형 약전과 서울에서 과문(科文)의 여러 체를 공부. 성균관에서 매달 유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인 승보시에 합격 | ||
19 | 1780 | 경상도 예천 현감으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 뵙고 반학정에서 글을 읽으며 ‘반학정기'를 지음. 예천 관청 서재에서 독서 | ||
20 | 1781 | 진주 촉석루를 유람하며 ‘진주의기사기'를 지음. 서울에 살면서 과시(科詩)를 익힘. 7월에 첫딸을 낳았으나 5일만에 사망. | ||
21 | 1782 | 서울(창동)에 처음으로 집을 사서 삶. 가을에 봉은사에서 경의과문을 익힘. | ||
22 | 1783 | 2월에 세자책봉 경축으로 열린 증광감시에서 둘째형 약전과 함께 경의 초시(初試)에 합격, 4월에 회시에서 합격하여 진사가 됨(정조와 처음으로 상면). 성균관에 들어감. 회현방으로 이사하여 재산루에 삶. 9월에 장남 학연(學淵) 태어남. |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음 | ‘유수종사기’ |
23 | 1784 | 여름에 정조에게 <중용강의(中庸講義)>80여 항목을 바침(율곡의 기발설을 위주로 했는데 정조가 감탄). 이벽(형 약현의 처남)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협을 내려가면서 천주설에 대해 듣고 책 한권을 얻어 봄. 6월 반제에 뽑힘. | 이승훈이 西敎관련 책을 가지고 귀국 | <중용강의> |
24 | 1785 | 10월 정시(庭試)초시에 수석으로 합격 | ‘우인이덕조만사’ | |
25 | 1786 | 2월에 별시(別試) 초시에 합격. 7월에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태어남 | ‘감흥이수’ | |
26 | 1787 | ‘추일문암산장잡시’ | ||
27 | 1788 | 남인이 攻西派와 信西派 로 분리 | ‘원진사칠수증내’ | |
28 | 1789 | 1월 반시에서 표를 지어 수석을 차지하고 곧바로 전시에 나아가 수석으로 급제함. 3월 전시에 나아가 탐화랑의 예로써 7품관에 부쳐져 희릉직장에 제수됨. 堂下文官중 문학이 뛰어난 자를 뽑아 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됨. 초계문신에 임명되어 <대학>을 강의함(이것이 ‘희정당대학강의'). 5월에 부사정(副司正)이 되고, 6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됨. 겨울에 배다리(舟橋)의 제작규제를 만들어 공을 세움. 12월에 셋째아들 구장(懼?)이 태어남. | 장헌세자(사도세자)묘를 수원으로 이장. 프랑스 대혁명 | ‘희정당 대학강의' |
29 | 1790 | 2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됨. 3월 翰林被選과정 문제로 해미현(海美縣: 충남 서산군)으로 정배. 배소에 이른지 6일 만에 용서받아 풀려 남. 9월에 사간원 정언(正言)과 이어서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받음. | ‘해미남상국사당기' | |
30 | 1791 | 3남 사망. 5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됨. 10월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됨. 겨울에 시경강의(詩經講義) 800여조를 정조에게 바쳐 칭찬을 받음. 사학도(邪學徒)라 하여 반대파들로부터 규탄받음. | 진산사건(신해사옥) | <시경강의> |
31 | 1792 | 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됨. 4월 9일에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가 임소에서 별세. 5월 광주에서 여막을 짓고 거처함. 겨울에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기중기와 녹로를 고안하여 수원성 축조에 이용함(경비 4만 냥을 절약) | ‘성설' | |
32 | 1793 | 남인의 영수 채제공,영의정이 됨 | ||
33 | 1794 | 6월에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침. 7월 성균관 직강(直講)에 제수됨. 8월 비변사랑(備邊司郞)에 임명하는 계가 내려짐. 10월 홍문관 수찬에 제수됨. 10월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현감 김양직과 삭령군수 강명길을 벌함. 12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됨 | ‘7월7일야', ‘명봉편' | |
34 | 1795 | 정월에 사간원 사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됨. 2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됨. 3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됨. 7월에 주문모 입국사건으로 충청도 금정(金井-洪州) 찰방(察訪)으로 좌천. 성호유고 교정. 12월에 용양위(龍槐衛) 부사로 옮김. | 4월에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 하여 서교 전파하다 7월에 발각 | ‘봉곡사술지시서' ‘서암강학기' ‘조룡대기' ‘유오서산기' ‘도산사숙록' ‘기민시' ‘탄빈' |
35 | 1796 | 12월에 병조참의,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됨. 수원성 준공(둘레길이 5,743m, 4,600보) | ‘양강우어자' ‘신승지광하만사' | |
36 | 1797 | 6월에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사직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일명 自明疏)를 올림. 6월에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에 제수됨. | <마과회통> ‘변방사동부승지소' | |
37 | 1798 | <사기찬주> | ||
38 | 1799 | 2월에 황주영위사(黃州迎慰使)가 됨. 5월에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많은 옥사를 처리함. 12월에 넷째아들 농장(農?)이 태어남. | 채제공이 죽음 | ‘확연폭포가' ‘입갈현동' ‘영남인물고서' |
39 | 1800 | 봄에 고향에 돌아와 저작에 주력하면서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함. | 6월 28일 정조 승하하자 11살의 순조를 대신하여 노론벽파인 김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 | 여유당기' |
40 | 1801 | 2월에 책롱(冊籠)사건으로 이가환, 이승훈, 홍락민 등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되어 하옥됨. 셋째형 약종(若鐘, 세례명 아오스딩) 사형됨. 둘째형 손암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고,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됨(3월에 도착). 10월에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으로 다시 투옥됨. 11월에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이배됨(형과 나주 반남정에서 길이 나뉨). 마재 본가가 가택수색을 당하고 초고들이 산실됨. | 서교를 범하는 법령 선포. 신유사옥으로 권철신, 이승훈 등이 처형됨 | 〈爾雅述〉 |
41 | 1802 | 큰아들 학연이 와서 근친함. 넷째아들 농장 사망. | ||
42 | 1803 | 김대비의 해배명령이 있었으나 서용보가 반대. | ‘檀弓箴誤' ‘弔奠考' ‘애절양' | |
43 | 1804 | ‘兒學編訓義' | ||
44 | 1805 | 봄에 아암 혜장선사와 만나 교유. 겨울에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으며 고성사에서 주역과 예기를 가르침. | ‘正體傳重辨(己亥邦禮辨)' | |
45 | 1806 | 목리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이주 | ||
46 | 1807 | 장손 大林이 태어남. 학문의 후계자로 여기던 약전의 아들 학초의 부음을 받음. | ‘禮箋喪具訂' <상례사전>50권 완성 | |
47 | 1808 | 봄에 윤단(尹博)의 산정(다산초당)으로 옮김. 둘째아들 학유가 옴. | ‘祭禮考定' <周易心箋> | |
48 | 1809 | <禮箋喪服商> | ||
49 | 1810 | 학연의 청으로 해배명령이 났으나 공서파(홍명주 이기경)가 반대로 석방되지 못함. | <詩經講義補> <尙書古訓><梅氏書評><嘉禮酌儀><小學珠串> | |
50 | 1811 | 홍경래의 난 | <我邦疆域考> <禮箋喪期別> | |
51 | 1812 | 딸이 윤창모(翁山 윤서유의 아들)에게 시집감. | <民堡議> | |
52 | 1813 | 서모 김씨(슬하에 1남 3녀) 사망. | <論語古今註> | |
53 | 1814 | 조인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의금부에서 관문을 발송하여 석방시키려 했는데, 강준흠의 상소로 석방명령서가 발송되지 못함. 문산 이재의와 편지로 학문과 사변의 공을 논함. | <孟子要義><大學公議><中庸自箴/中庸講義補><大東水經> | |
54 | 1815 | <心經密驗/小學枝言> | ||
55 | 1816 | 6월에 형 약전이 유형지(흑산도)에서 작고. 학유의 처 심씨 사망. | <樂書孤存> | |
56 | 1817 (순조17) | <방례초본>의 저술을 시작했는데 끝내지는 못함(뒤에 ‘경세유표'로 개명) | <經世遺表(邦禮草本)> (미완성) | |
57 | 1818 (순조18) | 봄에 <목민심서>가 이루어짐. 8월에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석방됨. 9월에 강진을 떠나 고향 마재 본가에 돌아옴(9월 14일) | <牧民心書> | |
58 | 1819 (순조19) | 선산(충주 하담)에 성묘. 여름에 <흠흠신서>가 이루어짐. 가을에 용문산 유람. | <欽欽新書> | |
59 | 1820 (순조20) | 봄에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 청평산 등을 유람. | ||
60 | 1821 (순조21) | 9월 맏형 약현 작고. | <事大考例刪補> | |
61 | 1822 (순조22) | 회갑년을 맞이하여 ‘자찬묘지명'을 지음. 석천 신작(石泉 申綽)과 편지로〈周禮〉에 대해 논함. | ‘자찬묘지명' | |
62 | 1823 (순조23) | 승지후보로 낙점되었으나 곧 취소됨 | ‘산행일기' | |
69 | 1830 (순조30) | 탕제의 일로 부호군(副護軍)으로 단부되었으나 약을 올리기 전에 익종(翼宗: 순조의 세자) 승하 | ||
73 | 1834 (순조34) | 11월 순조 환후가 급해 소명을 받고 상경 중 승하소식을 듣고 귀향. | <상서고훈>과 <지원록>을 개수하여 합편. <매씨서평>개정 | |
75 | 1836 한종(2) | 회혼일인 4월 7일(음 2월 22일)에 본가에서 병으로 서거.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에 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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