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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1구간(숭례문~양재역)-영남대로(featuring 박제가/朴齊家)!! 본문

길이야기/영남대로

[영남대로]1구간(숭례문~양재역)-영남대로(featuring 박제가/朴齊家)!!

강/사/랑 2020. 5. 27. 23:54
[영남대로]1구간(숭례문 ~ 양재역)



박제가(朴齊家)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蕤) 또는 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승지(承旨) 박평(朴坪)의 서자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조선은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사회다. 출신 성분이 서얼인 박제가에게 사회적 차별은 천형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회든지 천재성은 차별을 뛰어 넘는다. 박제가가 바로 그러했다.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일찍부터 시(詩)·서(書)·화(畵)로 명성을 얻었다.

천재성과 명성은 인간관계와도 연결된다. 좋은 소리는 좋은 귀를 가진 이가 알아보는 법이다. 그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북학파들과 교유하면서 북학의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따랐다.

29세 때인 1778년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네 차례의 연행(燕行)을 통해 신문물에 눈을 떴고 그를 바탕으로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그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생산 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하여 부국을 이루자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이용후생(利用厚生)' 한마디로 요약된 경제발전과 생활 향상의 급진개혁사상이었다.

박제가는 소비와 생산의 선순환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조선의 야만(野蠻)은 가난함이 원인인데 그 가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검소함이 아니라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릇 재물은 샘(井)에 비유되는 것이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사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나라에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고 여공도 쇠하게 될 것이며, 비뚤어진 그릇을 탓하지 않으면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工匠)과 도야(陶冶)의 기예가 없어지게 된다. 이에 농사가 황폐화되어 그 대책이 없을 때 상업이 그 업을 잃어버리면 백성의 곤궁을 구제하지 못한다.(夫財譬則井也 汲則滿 廢則竭, 故不服錦繡 而國無織錦之人 則女紅衰矣, 不嫌窳器 不事機巧 而國無工匠陶冶之事 則技藝亡矣, 以至農荒而失其法 商薄而失其業 四民俱困 不能相濟)"

건강한 소비가 수요를 불러오고 이는 다시 공급으로 이어져 경제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기술축적과 산업 개발이 일어나며 경제 부문 간 보완도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문명 발달한 지금의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제 원리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북경에는 대낮에도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쿵쿵’거리는데 꼭 천둥소리가 나는 것 같다.(燕京 白晝車轂訇訇 常若有雷霆之聲)"

처음 스물아홉에 채제공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수레'였다. 수레는 인간 문명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인 바퀴를 이용한 운송수단이다. 수레가 있어 물류의 이동이 쉬워지고 전투의 능력이 배가되었다.

연경은 수레가 일상화된 국제도시였다. 말이 끄는 교통수단의 수레와 소가 끄는 운송수단의 수레, 그리고 사람이 끄는 개인용 손수레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수레바퀴는 나무로 만들어져서 굴러갈 때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청년 박제가는 수레가 내는 요란한 굉음에 놀라고 그 편리함에 경악했다.

"만 리 길을 가면서 사람에게 걸어서 따라오기를 강요하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다. 중국에 들어가는 자는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이국땅에서 부끄럼을 당한다.(夫行萬里之路 而責人以步從者 惟我國有之, 非特步從 而又必使之不離左右, 疾徐如馬 故馬卒之入中國者 皆囚首蓬髮)"

만 리 먼 길 북경까지 가면서 조선의 사은사 일행은 말을 탄 일부 고위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걸어서 그 먼 길을 이동하였다. 등짐 지고 말의 걸음에 맞춰 걷느라 봉두난발 한 수행원의 모습에서 문명과 야만의 차이를 보았고 그는 자신 일행의 초라함에 부끄러웠던 것이다.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가 엄격했고 실용(實用)보다는 사변(思辨)이 앞선 도덕군자의 나라였다. 유학적 가치관이 지배한 조선에서 상업적 이익이나 물질적 욕망은 규탄의 대상이었지 고려할 여지가 없는 천한 가치였다.

그런 조선 지배층의 사상 때문에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수레는 조선에서는 극히 일부에서만 활용되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연경에는 여러 종류의 수레가 넓은 대로를 가득 메운 채 활발히 오가며 사람과 물류를 운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 박제가에게는 수레와의 만남이 각성(覺省)의 충격이었다. 그는 한탄하였다.

"수레는 하늘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땅에서 운행한다. 모든 것을 실을 수 있어서 그 이로움이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는 이용하지 않고 있다.(車出於天 而行於地, 萬物以載 利莫大焉, 而我國獨不行何也)"

청년 박제가에게 충격적 각성을 준 수레는 인류 문명에 획기적 발전을 초래한 바퀴의 발명에 기인한다. 바퀴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고고학적 흔적은 기원전 4천 년 경 역시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8천 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문명의 이기가 다른 세계에서는 생산, 이동 및 전투의 수단으로 활발히 활용되었는데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이다. 18세기 서양에서는 프로이센이 건국되었고, 영국의 제임스 쿡이 장거리 항해 끝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발견하여 자국령으로 만들었으며, 미국의 13개 주가 독립하였는가 하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즉위 같은 대사건이 있었다.

대포와 마차와 전차, 그리고 범선의 시대에 산업혁명의 불씨가 타오르는 시점이었는데, 이 나라 조선에서는 바퀴 달린 마차 하나 없이 등짐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이는 단지 바퀴의 발달 유무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산업과 경제를 대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근본적 의식 수준에 그 원인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아예 씨가 말라버린 운송 관련 산업의 부재에도 원인이 있었다.

수레는 기본적으로 도로의 발달에 관련된다. 수레가 움직이자면 단단하게 다져지고 평탄하게 넓혀진 도로가 필수다. 모든 문명은 길을 통해 이어졌다. 따라서 사통팔달한 도로망의 확보는 문명 발달과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에 필수의 과업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대 로마의 도로망이고 그들이 이룩한 문명이다.

조선은 그런 도로망과 수레의 필요성에 둔감했고 상공업의 발달과 교역 등에 무지했다. 그들은 중화(中華)에 사대(事大)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부국강병의 노력이나 경제발전, 백성들 삶의 질 향상 같은 문명적 가치는 고민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다만 그들도 중국에 사대하자면 사행로(使行路)가 필요하여 중원으로 가는 길을 개발하고 유지하기는 했다. 이 길은 개성, 평양, 안주를 거쳐 의주로 이어지는 길이라 '의주로(義州路)'라 불렀다. 의주로를 따라 조선의 사신들은 중화를 흠모하는 마음 가득 안고 국경을 넘었다.

또, 미약하나마 국제적 교역을 하기는 했다. 그 대상은 중국과 왜국이었다. 중국과의 교역은 사행길과 동시에 이뤄졌고 왜와는 따로 왜관을 통하거나 공식 무역이 있기는 했다. 그를 위해 왜와 연결되는 동래까지 대로가 개발되었다. 이 길은 왜와의 교역 때문에만 개설된 것은 아니었다.

예로부터 한양에서 용인, 충주, 조령, 대구를 거쳐 동래로 이어지는 영남축(嶺南軸)'은 조선 시대 정치 경제의 주류세력이었다. 이 지역이 인구가 가장 조밀하고 산물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 영남축을 아우르는 '동래로(東萊路)'가 필요했다. 이 길은 따로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렀다.

대로란 명칭이 붙기는 했어도 마차 다닐 정도의 넓은 신작로는 아니었다. 큰 고을 근처의 길이야 인마가 교행할 정도의 넓이를 갖기는 했지만, 많은 곳이 지게 지고 넘는 산길이거나 논두렁길, 그리고 문경새재나 추풍령 같은 가파른 고갯길이었다.

그런 취약한 도로이기는 했지만, 국가 운영의 기본 질서는 필요하여서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방사형으로 가르는 9대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0대로(대동지지/大東地志), 6대로(도로고(道路攷) 등으로 구분된 도로망을 유지하고 이용하였다.

이제 세월 흘러 문명 발달하고 경제 또한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더 이상 우리는 오랑캐의 침입이 두려워 도로를 외면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지키느라 상공업과 외부와의 교역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문명 발전의 기초이자 물자는 물론 지식과 문화, 그리고 기술의 운송과 전파의 수단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 관리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나 도로가 뚫리고 그 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어 자동차 씽씽 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명의 시대에 오히려 나처럼 산길, 들길, 물길을 스스로 찾아나서 걸어내려는 이들도 간혹 있다. 그것은 그들의 남다른 취미(癖) 때문이기도 하고 불과 백여 년 전까지 이어져 오던 암울한 옛이야기 속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생각의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의 옛길을 홀로 걷고자 하는 나의 발걸음은 삼남길에 이어 영남길로 이어졌다. 삼남길은 숭례문에서 해남 땅끝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영남길은 숭례문에서 부산 동래까지 연결된 길이다.

나의 삼남길은 서울, 경기, 충청을 거쳐 전북 여산 입구에 이르렀다.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니 들머리 접근이 예삿일이 아니다. 게다가 구간 종료 후 다시 귀경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아 자꾸 게으름이 난다. 때문에 2016년 5월에 시작한 삼남길이 이제 겨우 15구간에 불과하고 도착지는 여산에 이르러 이제 겨우 호남지방 입구에 도착했을 따름이다.

대안이 필요했다. 삼남길은 나중에 시간적 여유가 풍부할 때 몰아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집에서 가까운 다른 길을 새롭게 시작해보자 싶었다. 그 선택이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는 애초에 삼남길을 시작하기 십여 년 전부터 계획했던 참이다.

백두대간 남진, 해파랑길, 제주올레길, 주요 기맥, 섬산행, 그리고 각종 자전거 여행길 등 그동안 무수히 벌여 놓은 내 테마길에 또 다른 길을 새로이 시작한다는 것이 부담되기는 하지만, 새로운 도전 거리가 생겼다는 흥분 역시 만만치 않다.

이런 나의 남다른 취미나 행위에 대해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선생께서 일찍이 '백화보서(百花譜序)'에 남긴 말씀이 있다. 내 심성의 정곡을 찌르는 말인 데다 조선의 야만을 깨치고 문명화를 꿈꿨던 실학자의 말이라 울림이 크다.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癖)’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이루어져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뜻이다. 벽은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 (人無癖焉 棄人也已 夫癖之爲字 從疾從辟 病之偏也 雖然具獨往之神 習專門之藝者。。。嗚呼 彼伈伈泄泄 誤天下大事 自以爲无病之偏者)"



영남대로(featuring 박제가/朴齊家)!!


구간 : 영남대로 제 1구간(숭례문~양재역)
거리 : 구간거리(16 km), 누적거리(16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20년 5월 17일. 해의 날
세부내용 : 숭례문 ~ 후암로 ~ 녹사평역 ~ 이태원 ~  한남대교 ~ 신사역 ~ 논현역 ~ 신논현역 ~ 강남역 ~ 양재역



영남대로에 새롭게 도전하기로 했다. 현재 걷고 있는 삼남길로의 접근 거리가 점점 멀어져 먼 길 나서기 망설여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영남길이야 십수 년 전부터 도전한 작정을 세운 길이기에 큰 갈등은 없었다.

올해는 여름이 아주 빠르다. 오월 중순에 불과한데 날씨는 이미 한여름이다. 이런 날씨도 먼 삼남길보다는 영남길로의 새로운 도전을 부추기는데 한몫했다.

더운 날 도심지 길 걷는다고 잔소리 던지는 마눌의 배웅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 타고 길게 북상하여 서울역으로 향했다. 전철 속은 에어컨 작동으로 시원한 상태다. 책 좀 읽다 보니 어느새 서울역이다.

얼른 짐 챙겨 밖으로 나갔다. 역광장에 나서자 훅하고 열기가 덮쳤다. 대단한 날씨다.



영남로/嶺南路

한성(漢城 :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간선로. 한성을 중심으로 뻗어 있던 조선 시대 9대 간선로 가운데 하나로 전체 길이는 약 960리였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분포하였던 주요 지선은 29개였으며, 이 도로가 지나는 유곡역(幽谷驛)에서 통영(統營)으로 가는 조선 시대 제5로가 분지(分支)하였다. 행정 구획상 경기도·충청도·경상도를 지나는 영남로는 시대에 따라 통과 지역이 변천하였다. 이들 도로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계를 따라 이루어졌으며,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된 서울∼부산 간 신작로의 모체가 되었고 현 교통망의 근간이 되었다. 주요 도시를 잇는 행정 통신로였으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내륙 지방에 위치하여 전략상 중요한 교통로였던 영남로는 정치·군사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각 지역에서부터 중앙으로 관물(官物)을 수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고, 교통의 요지, 화물의 집산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정기 시장의 분포와 이를 중심으로 상인들의 집결, 취락의 발달 등 사회적·경제적 기능도 지녔던 중요한 교통로였다. 영남로를 따라 분포하였던 통신 제도였던 봉수제(烽燧制)가 임진왜란 당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군사적인 목적의 통신 기능을 맡는 파발제(擺撥制)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을 지나는 파발로(擺撥路)는 남발(南撥)로 지칭되었으며, 역로(驛路)와 과거 봉수로(烽燧路)의 일부를 이용하여 성립되었다. 남발은 보발(步撥)로 급주졸(急走卒)에 의하여 중도 휴식 없이 중간연락식윤속연락방식(中間連絡式輪續連絡方式)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2일 이내에 연락이 가능하였다. 영남로에는 공무 여행자를 위한 역이 약 30리마다 하나씩 분포하였다. 그 밖에 10리마다 장정(長亭 : 쉬어가는 초막), 5리마다 단정(短亭)이 위치하였고 상인 및 일반 여행자를 위한 점(店)·주막(酒幕)·객주(客主)·여각(旅閣) 등의 주막촌이 발달하였다. 남발에도 30리마다 참(站)을 두어 모두 34참이 분포하였다. 새로운 교통 수단의 도입과 간선도로의 변화로 기존의 영남로는 쇠퇴하였으나, 정치적·군사적인 기능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영남로는 현 서울∼부산간 도로와 취락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영남대로 제1구간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1호선 전철 타고 길게 북상하여 서울역에 도착했다. 5월 중순인데 기온은 이미 여름날을 방불케 한다. 뙤약볕 강렬한 서울역 광장을 지난다. 이 더운 날에도 노숙자들은 이불 뒤집어 쓰고 길바닥 한쪽에 삼삼오오 누워 있다. 저들은 세상 무엇에 절망하여 저렇게 인생을 포기해 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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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블록 걸어가면 숭례문이 나온다. 몇 년 전 삼남길 시작하면서 이곳에 섰었는데 오늘은 영남길을 걷기 위해 다시 이곳을 찾았다. 햇볕 강렬한다. 감회에 젖어 주변 둘러보는데 숭례문 앞에서 절도 있는 구령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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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이다. 정식 명칭은 파수의식이다. 파수란 인정과 파루에 도성문을 열고 닫는 도성문 개폐의식과 순리의식등을 연결하는 조선시대 군례의식을 말한다. 외국의 의식을 흉내낸줄 알았는데 실제 행해졌던 의식인 모양이다. 나름 절도있게 교대식이 진행된다. 가까이서 보니 더운날에 치렁치렁한 관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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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좌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월로를 따라 올라간다. 길가에 삼남길 표식이 있다. 2016년 5월에 이 표식 따라 삼남길을 시작했었다. 세월 참 빠르다. 4년 세월이 금세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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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오르면 남산공원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삼남길과 영남길은 서로 갈라진다. 삼남길은 좌측으로 남산을 향해 올라가 서초동 거쳐 반포대교 아래 잠수교를 통해 한강을 넘고 영남대로는 우측으로 가서 이태원을 거쳐 옛 한강진 근처 한남대교를 건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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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성벽의 흔적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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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힐튼 호텔 앞 고개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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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화단에 냉이 종류로 보이는 희고 작은 꽃무리가 환하다. 출발이 늦어 금세 점심 때가 지났다. 길가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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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로를 따라 길게 내려가다가 용산고등학교 사거리에서 직진하였다. 내가 준비해 온 영남대로 트랙에서는 직진하여 녹사평역과 이태원으로 가라고 되어있었다. 아파트 이름이 특이하다. 방위사업청 관련 아파트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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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올라가자 미군부대가 앞을 가로막고 좌측에도 군부대가 있다. 위병에게 물으니 통과할 수 없는 길이란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트랙은 사람의 두 발로 그린 트랙이 아니고 지도 상에 줄을 그은 트랙인 것이다. 시작부터 헛질을 했다. 언덕을 다시 돌아내려 용산고등학교 사거리로 복귀했다. 20여 분 허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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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고등학교 좌측으로올라 갔다. 이후 후암동 골목을 구불구불 돌아 언덕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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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이 많은 후암동 길보다는 숙대입구역과 삼각지역 거쳐 녹사평으로 가는 길이 더 나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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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빙빙 돌아 재정관리단 앞 교차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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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남산타워가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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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사평대로를 따로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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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녹사평역이 나타난다. 직진하면 반포대교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이태원 거쳐 한남대교로 가는 길이다. 삼남길과 영남길이 바로 곁에서 한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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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사평역 언덕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녹사평(綠莎坪)은 '사초 사(莎)'를 쓴다. 구한말까지도 이곳은 잡초만 무성하고 사람은 살지 않던 땅이었다 한다. '푸른 풀만 무성한 땅'이란 이름이 유래한 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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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입구를 지난다. 이태원(梨泰院)은 이곳에 있던 옛 역원에서 유래했다. 원래 이태원역 자리는 좀 전에 내가 길을 잃고 헤맸던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 한다. 지금은 후암동 언덕을 넘어 이곳 언덕 일대가 이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태원은 한강으로 넘어가는 교통 요지라 역원을 두었던 곳이다.

이태원 이름의 유래는 몇 개로 갈린다. 배밭이 많아 '梨'자를 썼다는 말도 있고, 왜란 때 이태원 운종사에 왜군이 들어와 비구니들을 겁탈하였는데 왜군이 떠난 후 인근에 토막을 짓고 왜군의 아이를 낳아 길렀으므로 이태(異胎)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이 동네는 외국인과 인연이 깊다. 일제 때는 식민통치를 위한 군사기지를 용산에 두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역사는 늘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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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 후 이태원은 경기가 폭삭 망가졌다. 곳곳에 빈 상가가 보이고 임대를 알리는 문구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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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청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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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도 중국발 코로나 검역을 하고 있다. 고생들이 많으시다. 중국은 전세계인에게 진 저 빚을 어찌 갚을 생각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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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청 지나 아래로 내려가다가 미군부대를 지나고 갈림길이 나와 대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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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는 용산과 이태원답게 골목 좌우가 온통 외국 대사관 건물로 되어 있다. 튀니지, 방글라데시, 모로코, 이란, 루마니아, 카자흐스탄, 헝가리, 투루크메니스탄 등의 나라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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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동의 장문로를 따라 길게 한강으로 접근하였다. 원 영남대로는 한강진(漢江津) 나루에서 배를 타고 도강하게 되어 있었다. 건너편은 현재 신사동인 사평나루였다. 한강진은 송파진, 노량진과 더불어 한강 삼진(三津) 중 하나로 왕래가 가장 빈번한 나루였다.

한강진역 표지석은 한남역 인근에 있다는데 한남대교 진입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느라 직접 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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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교 해태상. 머리는 키가 너무 높아 몸통만 어루만져 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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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동 언덕배기가 건너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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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아주 강렬하다. 한남대교 위애서 서쪽 하류 방향을 조망했다. 바람 시원하였다. 반포대교 쪽에서 요트 한척이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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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대를 갖추고 있는데 정작 배는 기계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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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중앙에 전망 공간을 만들어 두고 있다. 오랜만에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참이라 오래 그 자리에 서서 조망을 감상했다. 한강 다리 위에는 곳곳에 CC TV가 설치되어 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강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수상했든지 이내 한강수상구조 보트가 사이렌 울리며 접근했다. 손 흔들어 그들을 안심시키고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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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 이정표에 부산이라는 방향 표식이 있다. 내가 시작한 이 영남대로의 종착지가 바로 저곳이다. 980리 이 길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아직은 가늠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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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대교를 건너자마자 도보길은 방향 잡기가 어려워져 버린다. 이 땅의 길들은 대부분 차량 중심으로 설계가 되어 있어 도보길은 멀쩡히 이어지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한남대교를 건너면 한남IC가 나온다. 그 길은 도보 불가의 길이다. 우측 램프로 내려와서 조금 우측에 있는 건널목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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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원롯데캐슬 좌측 담벼락을 따라 가는데 갑자기 도보길이 끝나버린다. 이 길의 끝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문으로 막혀 있다. 한참 방황하는데 이 아파트 주민이 외출나왔다 그 문으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간다. 함께 들어가며 길을 물으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한참 돌게 되므로 밖으로 나가 IC의 램프 아래로 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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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 아래에 이렇게 길이 숨어 있다. 이 길은 강남대로와 연결되어 있다. 한남대교에서 강남대로까지 연결되는 곳 길 우측에 도보길이 있었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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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강남대로를 따라 곧장 남하하면 된다. 조금 가면 신사역이 나온다. 서울에는 신사동이 두 곳 있다. 하나는 은평구 신사동, 나머지는 이곳 강남 초입의 신사동이다.

남산 남쪽의 물줄기를 고려 때에 사리진(沙里津)이라 불렀고, 그곳 모래섬을 사평도(沙平島)라고 했다. 모두 한강의 모래밭과 관련 있는 이름이다. 신사동은 일제 때 행정구역 획정하면서 새말(新村)과 사평리를 통합하여 신사라 이름지은데 유래한다.

신사동 리버사이드호텔 나이트클럽이 예전에는 유명했는데... 오늘 그 앞을 지나면서 보니 결혼식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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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통행 많은 강남대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 쉽지 않다. 다만 코로나 영향으로 인적이 드문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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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역 통과. 1989년 내 인생 두 번째 회사가 이곳 논현동에 있었다. 그때 나는 안양에 살고 있어서 출근시간만 두 시간이 걸렸다. 버스 두 번, 전철 두 번을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었다. 그때의 전철은 숨 쉬기도 힘든 콩나물 시루같이 사람으로 가득 차 출근하면 이미 녹초가 되었다. 참 오랜 옛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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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하고 부패한 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 우리나라 경제가 시나브로 폭망하고 있다. 이태원의 여러 공실된 상가는 영어로 강남의 여러 상가는 한글로 임대가 비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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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근처에 도착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중국발 코로나 정도는 별로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골목 골목 젊은 남녀로 넘쳐난다. 이러다 다시 한 번 대규모 전염이 일어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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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한컨에서는 페미니즘 시위가 요란하다. 갈등 공화국의 민낯이다. 우파 좌파, 지역, 계층, 세대 등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남녀로 구분하여 싸우자고 한다. 한심한 일이다. "여자라서 당했다"가 저들의 구호다. 여자라서 당한 것이 아니라 미친 자가 미친 짓을 한 것이고 불행히 그 자 근처에 있어서 피해를 입은 것 뿐이다. 남자여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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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지를 통과하는 길이라 중간중간 목마름 해소나 화장실 사용하기는 편하다. 옛길 걷는 재미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길게 남하하여 양재역에 도착했다. 출발이 늦은 데다 중간에 여러 차례 길을 잃어 시각이 많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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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역은 예전에 말죽거리라 부른 곳이다. 제주에서 진상한 말을 이곳에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외에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 가면서 말 위에서 유생들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뒤에서 먹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병자호란 때 청군의 병참기지로 말죽을 이곳에서 먹인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이곳은 양재역(良才驛)이 있던 곳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양재역 7번 출구 앞 화단에 표지석이 있다 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 찾을 길이 없다.

 

양재역에서 영남대로 1구간을 마무리했다. 무척 더운 날씨여서 도심지 통과하는 길을 걷기 쉽지 않았다. 차량의 매연과 함께 걷는 것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중간중간 도보 길이 사라져서 곤란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길에 도전하였음은 설레는 일이고 이 길에서 마주칠 여러 이야기들이 기대되어 기분 좋았다.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기대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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