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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3구간(판교역~구성역)-낙생역길 본문

길이야기/영남대로

[영남대로]3구간(판교역~구성역)-낙생역길

강/사/랑 2020. 6. 7. 23:47

[영남대로]3구간(판교역~구성역)

小憩樂生驛(소게낙생역)

誰噵樂生驛(수도낙생역)
吾今一惘然(오금일망연)
山高疑蔽日(산고의폐일)
木老欲參天(목로욕삼천)
庭院堆寒雪(정원퇴한설)
村墟鎻暮煙(촌허쇄모연)
何當霑聖化(하당점성화)
復見太平年(복견태평년)

누가 나를 낙생역으로 이끌었나 / 나는 지금 망연할 뿐인데 / 높은 산은 해를 가릴 것 같고 / 해묵은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하네 / 역원 마당에는 찬 눈이 쌓여 있고 / 마을 빈터엔 밥 짓는 연기가 자옥하네 / 어느 때면 성군의 왕화에 흠씬 젖어 / 다시금 태평성대를 보게 되려나 

위 시는 '인재유고(麟齋遺稿)' '남행록(南行錄)'에 수록된 '낙생역에서 잠시 쉬며(小憩樂生驛)'란 시다. 인재(麟齋)는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이종학(李種學)의 호(號)다. 이종학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등을 지냈다. 

 

아버지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이성계 일파와 맞섰던 인물이다. 따라서 탄핵과 유배를 여러 차례 당했다. 이종학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목은의 탄핵과 유배와 더불어 유배를 거듭하다 조선 창업 이후 정도전 일파에게 유배 도중 살해당했다.

이 시가 수록된 남행록은 이종학이 1389년(공양왕1) 29세 때 권근(權近)․이숭인(李崇仁)․하륜(河崙)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순천부(順天部)로 유배 가던 도중의 소회와 유배지에서의 참담한 심사를 일기식으로 쓴 시집이다.

"누가 나를 낙생으로 이끌었나? 나는 지금 망연하네"란 글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국망(國亡)의 위기에 대한 절망감이, "성군의 출현과 태평성대의 도래"를 꿈꾸는 마지막 연에서는 버리지 못한 미래에 대한 희망의 편린(片鱗)이 엿보인다.

이종학이 유배 도중 잠시 쉬었던 '낙생역(樂生驛)'은 경기도 광주부(廣州府)에 위치한 역참이다. 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의 역을 정비하면서 여러 역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 도를 나누었는데, 이때 낙생역을 비롯한 경기도의 23개 역이 경기좌도 찰방의 관할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그 기록이 보인다. "左道忠淸道程驛察訪所管驛(良才, 樂生, 駒興, 金寧, 佐贊, 分行, 無極). (좌도(左道) 충청도(忠淸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驛)은 일곱이다. 양재(良才)·낙생(樂生)·구흥(駒興)·김녕(金寧)·좌찬(佐贊)·분행(分行)·무극(無極)이 그 역이다.)"

조선의 역참 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했다. 고려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전국을 22역도(驛道) 525 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는데 낙생역도 그때 광주부에 속한 역으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안업역(安業驛)'이었다. 나중에는 달리 '돌마역(突馬驛)'이라고도 불렀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에서는 역마 5 필과 역노비 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재역과 낙생역을 잇는 길은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제4대로'에 위치하였다. 제4대로는 하삼도(下三道)의 진상품이 올라오고 일본 사신이 왕래하는 주요 대로 중 하나였다. 이른바 '영남대로(嶺南大路)'이다.

중국 사행로인 의주로와 더불어 조선 교통의 중심축인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역이라 태종에서 성종 연간에 왕이 강무(講武)를 행하거나,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을 참배할 때 낮수라를 먹는 장소인 주정소(晝停所)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교통의 중심축이었던 만큼 중요도 높아 실록에 38회나 등장하고 있다. 첫 기록은 태종실록 13권에 나온다. 태종 7년 2월 13일의 기록이다. "講武于廣州 上詣德壽宮告行  遂次于樂生驛前郊(광주(廣州)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임금이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서 행차를 고하고, 드디어 낙생역(樂生驛) 전교(前郊)에서 머물렀다.)"

하삼도로 내려가는 길목이라 임금의 행차뿐 아니라 그 임금에 반(反)하였던 이들의 유배길 역시 이 길을 따라야 했고 낙생역에서 쉬어야 했다. 이종학(李種學) 역시 그러해서 이곳 낙생역에서 잠시 쉬며 암울한 소회(所懷)를 시로 표현했던 모양이다.

국망(國亡)과 창업(創業)의 회오리바람 휘몰아치는 역사의 파란만장(波瀾萬丈) 속에 한 조각 나뭇잎처럼 휩쓸렸던 문인(文人)이자 정치인이었던 인물의 운명이 안타깝고 절절한 그의 시에 녹아 있다.

이제 세월 흘러 역사의 승자였던 인물도 사라지고 그들에게 밀려났던 패자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의 흔적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게 전해지는데, 자동차 발달한 이 시대에 두 발로 옛길을 더듬던 나그네의 발길이 낙생역에 이르게 되고 그 역을 노래한 옛사람의 싯귀절 하나 그 길에서 줍게 되었다.

같은 역, 같은 길을 걷는 그와 나 사이에는 천년의 세월이 이격(離隔)되어 있지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꿈꾸는 마음은 한 가지로 일치한다. "제발 좋은 세상이 오기를!" 옛사람의 싯귀절에 이 시대의 희망을 걸어본다.

 

낙생역길

구간 : 영남대로 제3구간(판교역~구성역)

거리 : 구간 거리(14km), 누적거리(45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20년 6월 7일. 해의 날

세부내용 : 판교역 ~ 대왕판교로 ~ 낙생고등학교 ~ 궁내동 ~ 금곡동 ~ 동천역 ~ 풍덕천 ~ 구성역

 

1주일 만에 다시 영남길에 나섰다. 요즘 우리나라는 완전히 아열대성 기후가 된 듯한 날씨를 보이고 있다. 아직 초여름에 불과한데 기온은 30도를 넘어 한여름의 기온을 보이고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아 잠을 설치게 만든다.

 

무도한 자들이 권력을 훔친 후 무도(無道), 무법(無法), 무자비(無慈悲) 한 짓을 서슴지 않으니 기후조차 수만 년 반복되던 법칙에서 벗어나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런 길 잃은 날씨에 숲 그늘 없는 영남길에 나서겠다 하니 마눌의 걱정이 하늘을 찌른다. "걱정 마시오. 햇볕 철저히 차단하고 조심해서 다니겠소. 힘들다 싶으면 어디든지 그곳에서 멈추겠소!"

 

걱정 가득한 마눌의 배웅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낙생역(樂生驛)

조선시대에 지금의 성남시 분당 지역에 설치되었던 역참(驛站). 낙생역은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한양에 이르는 주요 길목에 설치되었다. 현재 성남시 분당구 수내 2동에 위치한 중앙공원 앞의 수내로와 돌마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인 역말 광장 일대와 수내동 푸른 마을 주변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낙생역이 있었던 이 도로는 일찍이 삼국시대 이후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에서 삼남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주요한 교통로의 구실을 하였다. 고려시대에 설치된 안업역(安業驛)이 조선 초기에 낙생역으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돌마역(突馬驛)으로도 불린다. 낙생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조에서 판교원(板橋院)과 같이 '주(州)의 남쪽 45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경기도읍지』의 『광주부읍지』에서는 '낙생역은 주(州)의 남쪽 40리 돌마면(突馬面)에 있다'고 하였다.

 

 

# 영남대로 3구간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우리 동네의 성대역에서 전철 탄 후 수원역과 미금역에서 각각 갈아타고 판교역에 도착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훅 덤벼든다. 출발이 많이 늦었다. 판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점심시간이다. 역 근처에서 점심 해결했다.

 

 

# 1주일 전 멈췄던 화랑공원에서 3구간 순례를 시작했다. 햇살 뜨겁다. 시각이 지날수록 기온은 무섭게 오르고 있다.

 

 

# 경기옛길에서는 분당중앙공원 뒤쪽의 산길을 걷게 트랙을 구성했다. 나는 원 영남대로의 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목표는 판교 용인 방향이다.

 

 

# 시작부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판교 IC의 나들목이 앞을 가로막는다. 건널목이 없다. 지도는 곧장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차량 흐름 없을 때 잽싸게 도로를 건넜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큰 곤경에 빠졌다. 이제는 인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도로는 화랑 지하차도로 내려가서 경부고속도로 우측으로 나란히 내려가는 모양새다. 이 길로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구조다.

 

지도 확인하니 길 건너편으로 운중천이 휘감아 흐르고 있다. 애초에 판교역에서 길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남하하면 되었을 길이다. 문제는 차량 통행 많고 엄청나게 넓은 도로를 가로질러야 한다는 점이다. 한참 동안 차량 흐름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린 끝에 겨우 건넜다.

 

 

# 운중천을 건너는 원너머교가 있다. 그 우측에 자전거 도로가 천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 무덥고 뜨거운 날임에도 휴일을 즐기러 나온 이들이 많다. 그 잔차족들과 함께 남하했다.

 

 

# 그런데 그곳에 영남길 표식이 서 있다. 경기옛길에서 주장하는 영남길은 이곳 운중천 부근이 아니라 분당 뒤쪽 탄천과 불곡산을 잇게 그리고 있다. 이곳에 서있을 안내목이 아닌 것이다. 경기옛길 측에서도 줄 긋기에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다.

 

 

# 자전거 가지고 왔으면 순식간에 끝날 구간이다. 부상 후유증으로 자전거 못 탄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내 자전거는 바람 빠진 채 하나는 현관에 하나는 장비 방에 매달려 있다.

 

 

 

# 운중천 자전거 길은 곧바로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라 한다.

 

 

# 요즘 같은 계절에는 다리 아래 그늘이 최고의 쉼터다.

 

 

# 운중천은 판교 안으로 들어가 북서진하여 안양과의 경계인 하오고개 쪽으로 가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징검다리를 건너 운중천과 이별한다.

 

 

# 천을 건너 올라가면 낙생고등학교가 나온다. 낙생고교는 예전에 농구가 유명했던 학교다. 사립인데 분당 근처에 있어 아이들 공부는 많이 시키는 모양이다.

 

낙생(樂生)은 역사가 깊은 동네다. 고려시대에 이미 낙생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것은 이곳이 남도에서 한양이나 개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 낙생에는 역(驛)이 있었다. 양재역의 찰방이 관리하던 역 중 하나다.

 

역이 있으면 사람과 물산이 모여들게 된다. 낙생은 남도와 중앙을 잇는 교통요지로 관리나 상인 등 여행객의 왕래가 잦았다. 낙생역의 위치는 낙생고등학교가 있는 판교 일대나 근처 분당 수내동 일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 낙생고등학교 정문이 있는 23번 도로를 따라 남하한다.

 

#

 

 

# 내가 가지고 있는 트랙에는 이곳 백현 교차로 근처에 낙생역이 있었다 표시하고 있다.

 

 

# 궁내동 표지석이 나온다. 길 건너에 궁내동 톨게이트가 보인다. 궁내동에는 중종의 다섯째 아들인 덕양군 이기(李岐)의 묘와 영희군부인(永禧君夫人) 권씨가 묻힌 무덤이 있다. 정희사(靖僖祠)라는 사당을 지어 왕족의 무덤을 관리했는데 궁내(宮內)라는 이름은 거기에 유래한다.

 

 

# 궁내동 톨게이트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요란하다. 예전에 고속버스 타고 서울로 귀경할 때 이곳을 지나면 서서히 짐을 챙기기 시작하곤 했다.

 

 

# 조금 더 내려가면 금곡동 표지석이 나온다. 쇳골이라 부르던 동네다. 과거에 금광이 있어 쇳골이라 불렀다는데 금광의 흔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유래가 있을 터이나 아는 이는 없다.

 

 

 

# 금곡교차로 통과. 이 교차로 통과도 쉽지 않다. 차량 통행이 많고 인도는 없는 탓이다.

 

 

# 자동차 씽씽 달리는 갓길을 따라 걸었다. 인도가 없는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위험하고 재미없다. 다음 코스부터는 트랙을 따르되 흙길이나 우회로 등 대안로를 미리 탐색해야겠다.

 

 

# 수도권에서 규모가 크기로 꽤 유명한 캠핑용품점을 만났다. 1층과 지하층에 넓은 전시장을 갖추고 있다. 백패킹 위주의 산행을 하는 나에게는 적합지 않은 장비들이지만 요즘 캠핑 트렌드를 감상하고 무엇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리워 안으로 들어갔다. 캠핑에 관심이 많은 젊은 부부들이 아주 많다. 오래 쉬며 용품들 구경했다.

 

 

# 동막천에 접근하며 성남과는 작별한다. 이제부터는 용인시 구역이다.

 

 

# 동막천(東幕川)을 건넌다. 이제부터는 용인시 수지읍이다. 동막천은 광교산과 발화산에서 발원하여 탄천으로 유입하는 지류하천이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원자천(遠子川) 혹은 원우천(遠于川)으로 1872년 지방지도에는 험천(險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 옛말에는 험하다는 뜻의 '머흐다'란 말이 있다. 험한 냇물이란 뜻으로 '머흔천'이라 부르던 이름이 한자로 '험천'이 되었고 다시 속음이 탈락하여 '머내'가 되기도 했다. 이를 한역한 것이 원자천 혹은 원우천이다. 현지의 다리에는 '머내'라고 적혀 있다.

 

 

# 신분당선 동천역을 만났다. 높은 건물이 있어 그늘이 형성되어 있고 바람도 좋았다. 간식 먹으며 그 그늘 아래 오래 쉬었다.

 

 

# 동천역 아래로는 길 가에 거리 공원이 길게 이어진다. 그늘 찾아 그곳으로 걸었다.

 

 

# 꽃향기 강렬하다. 가까이 가보니 겹황매화를 닮은 하얀 꽃이 꽃향기를 풍기고 있다. '만첩빈도리'다. 말발도리 종류이다. 산에서 나는 매화말발도리와 관상용으로 심는 빈도리 등이 비슷한 종류다. 속이 비어 '빈'이 들어갔고, 꽃이 겹으로 피어 '만첩'도 들어갔다. 결국 '꽃이 겹으로 피는 속이 빈 말발도리'란 뜻이다.

 

 

 

# 풍덕천 사거리 통과. 이곳은 예전에 우리나라 최악의 교통체증 구간 중 하나였다. 이전 회사에서 수원지점을 맡고 있을 때 분당에 있는 본부에 회의가 있으면 항상 이곳 풍덕천 사거리를 지났다. 그럴 때면 두어 시간 넉넉히 여유를 가지고 출발해야 했다. 잘못 걸리면 여지없이 지각을 면키 어려웠다.

 

 

# 지상의 도로와 고가도로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어 길 찾기에 한참 애먹었다. 수지농협 곁에 길이 있다.

 

 

# 풍덕천 자전거도로를 따라 진행했다. 우측 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와야 한다.

 

 

 

# 풍덕천(豊德川)은 한자 뜻이 너무나 좋은 하천이다. 포은 정몽주의 묘소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나는 한자 이름 그대로의 뜻풀이가 마음에 든다. 풍요로운 동네라는 뜻이 얼마나 좋은가? 이름 덕분인지 풍덕천이 흐르는 수지읍은 신도시가 건설되어 살기 좋게 되었다.  이 물길은 광교산에서 발원하였다. 수지읍을 동진한 후 탄천으로 유입된다.

 

 

# 다리 아래 그늘이 서늘하다.

 

 

# 풍덕천의 교통난은 여전하다. 휴일인데도 차량들이 잔뜩 밀려 거북이걸음이다.

 

 

# 왜가리 한 마리가 먹이 사냥을 위해 잔뜩 집중하고 있다.

 

 

# 풍덕천 하나를 건너는 일이 정말 어렵다. 길 찾느라 한참 고민하였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여 건너편 고가 위로 올라가야 한다.

 

 

# 23번 지방도에 합류한다. 신갈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 그런데 이 길도 갓길이 없다. 고속화도로에서 23번 도로로 합류하는 구간이라 그렇다.

 

 

# 차량들과 더불어 탄천 위에 있는 보정교를 통과했다.

 

 

# 탄천 산책로에 합류해야 하는데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질 않는다. 그냥 둑을 따라 내려갔다.

 

 

# 경기옛길과 다시 만났다. 경기옛길에서 만든 영남길은 판교역을 출발해서 분당 중앙공원을 지나고 이후 불곡산을 넘은 후 죽전에서 멈춘다. 그리고 3코스는 이곳 탄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구성역을 지나고 법화산을 넘은 후 기흥의 동백 호수공원으로 이어진다.

 

 

# 이 동네는 예전 보수원(寶樹院)이라는 원과 정자 때문에 보정리라 부른 곳이다. 원이 있었다면 주막도 있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보수원은 후일 변음된 것이고 원래는 '보시원(普施院)'이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보수원에 주막이 있다고 나온다.

 

 

# 뙤약볕 강하고 무더운 날임에도 운동 나온 사람들이 많다.

 

 

# 경기옛길에서 만든 영남길은 동백 호수공원까지 이어진다. 3코스이다. 신갈까지는 함께 동행하게 된다.

 

 

# 이쯤에서 내 고질인 고관절이 말썽을 일으켜 중간중간 스트레칭하며 걸었다.

 

 

# 화장실도 갖추고 있다.

 

 

# 구성 1교가 보인다. 무심코 저 다리까지 갔는데 다리 우측에 구성역이 있다. 전철역이 바로 곁에 있어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 강둑으로 올라갔다. 연원마을 사거리다. 예전에 연못이 있고 연꽃 만발해 연원(蓮院)이라 명명했다 한다. 지역 사람들에게는 '열원'으로 구전된다.

 

 

# 구성역으로 가기 위해 탄천을 건넜다. 탄천은 '숯 炭'을 쓴다. 유래를 찾아보니 성남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살았던 곳이라 炭자가 유래했다는 기록도 있다.

 

탄리는 '숯골'의 한역이다. 우리 옛말 '숯'은 숯을 굽던 동네라기보다는 '높다'는 뜻의 '숫'이나 '솟'의 변음인 경우가 많다. 이곳 숯골은 성남의 태평동, 수진동, 신흥동 등에 해당한다. 남한산성 기슭의 산속 마을인 것이다. 결국 숯골은 고지대의 동네란 뜻이고 그것이 탄골, 즉 탄리가 되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지만...

 

 

# 휴일 탄천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 구성역에서 영남길 3구간을 마무리했다. 이후 전철 두 번 갈아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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