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헤 시청에는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의 그림 '캄비세스(Cambyses)의 재판'이라는 명화가 걸려있다. 브뤼헤 시의회는 정의와 공정의 상징으로 이 그림을 주문 제작하여 전시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캄비세스(Cambyses)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왕이다.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정복한 왕이지만 폭정을 일삼아 미치광이란 평가를 받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당시 페르시아제국에는 시삼네스(Sisamnes)라는 판관이 있었다. 그런데 이 판관이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결을 내렸던 모양이다. 이에 캄비세스왕은 불의한 재판관 시삼네스를 체포하여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처형했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을만한 옛 기록이지만 그 다음이 엽기적이기도 하고 교훈적이기도 하다.
왕은 시삼네스의 가죽을 잘 말려 재판관 의자의 깔개로 덮게 하였다. 그리고는 후임 재판관으로 죽은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Otanes)를 임명하고, 그 의자에 앉게 했다.
왕의 뜻은 분명했다. 재판을 할 때 네가 어떤 의자에 앉아 있는지 어떻게 판결해야 하는지 한시도 잊지 말라는 의미다. 이후 오타네스의 판결이 어떠했을지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지 의심에 여지가 없다.
2025년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불의한 재판관들이 부지기수다. 그들은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재판관의 원칙을 잊은 지 오래다.
그들은 낡은 이념, 특정 지역주의, 그릇된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쳐 카르텔을 형성하였다. 그리고는 5천3백만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고 제멋대로의 판결을 남발하고 있다. 위법한 영장, 자의적인 법해석, 견광부회의 법논리를 동원해 편파적이고 왜곡된 판결을 일삼더니 급기야는 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을 또다시 파면하기까지 하였다.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사법의 영역으로 판단하겠다 우기고, 주 소추 사유인 내란죄가 철회되었음에도 재판을 강행하고, 형사소송법 준용의 원칙은 제멋대로 어기고, 초시계를 동원한 희대의 악행도 마다하지 않고, 피청구인의 재판상 권리 정도는 개나 줘버리라 하는 등 그들의 위법 탈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들에게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국민들의 아우성은 개돼지의 울부짖음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저렇게 무도하고 오만하게 판결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명색이 헌법의 최후 보루라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행태가 이 모양이다. 이 땅의 사법 질서가 어찌하다 이렇게 개판이 되었단 말인가?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헌법개판소라 불러 틀리지 않을 노릇이다.
이제 저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캄비세스의 철퇴가 필요하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제 아비의 살가죽 위에 앉아 판결해야 하는 오타네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똑똑히 알려줘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야 할 것이다.
아, 2025년 4월 4일 나는 불의한 재판관들을 저주하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