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그 스물일곱번째(피재~댓재) 
지난 1월 21일 스물여섯 번째 백두대간 길을 다녀온 이후 2월 한 달 내내 대간 길은 개점 휴업 상태다. 설날, 폭설, 회사 행사, 집안 모임이 연달아 주말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4주간이나 대간에 못 들어가고 있었다.
산의 정기(精氣)를 못 받아서 그런지 매사에 짜증만 나고 회사 업무도 영 풀리지가 않는다. 인간관계도 배배 꼬이고 이곳저곳에서 딴지가 들어왔다. 연세 많은 점잖은 낚시 동호회 선배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태클이 들어오기도 했다. 온 라인(On line) 인간관계의 속성 중 하나인 옳타쿠나! 맞장구치는 사람까지 있다.
안팎으로 일이 꼬이니 나 역시 남들에게 고약해진다. 사소한 일에도 사무실 직원들에게 맨날 짜증 부리고 꾸중하게 된다. 자연 사무실 분위기는 싸늘해진다. 직원들은 내 눈치만 보고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워한다.
"허허... 이래선 안 된다. 아무래도 기(氣)가 빠졌나 보다. 백두대간에 들어가서 푸르디푸른 백두대간의 氣를 보충해야겠다! 마눌! 짐 싸라! 백두대간의 품에 뛰어들자!"
2월 25일. 토요일. 월 마감에 쫓겨 부득이 주말 근무를 해야 했다. 또 한 번 원칙을 허무는 순간이라 기분은 영 더럽지만, 목표 달성이라는 더 큰 원칙이 있으니 별수있나? 직원들도 이런 사정은 잘 이해하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마눌은 거실에 산행 짐을 잔뜩 늘어놓기는 했지만, 영 가기 싫어하는 눈치다. 4주 동안이나 빼 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스트레스 잔뜩 받은지라 나 역시 저녁 먹고 났더니 자동으로 쇼파에 드러 누워지고 TV 리모컨에 저절로 손이 간다. 한 시간여 게으름을 피우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나 샤워하고 짐을 챙겼다.
마눌은 정말 가기 싫었는지 이번 한 주만 더 쉬자고 애걸한다. 그렇게 산에 가고 싶으면 오늘 저녁 수리산에 가서 텐트 치고 야영하자고 한다. "안 된다. 이번에 또 빠지면 정말 앞으로 못 가게 된다. 출발합시다!!!"
마눌 끝까지 한마디 한다. "대간 들어가서 두고 봅시다. 냅다 내달려 버릴 거니까. 못 따라 오기만 해봐요!" "그럽시다. 그런 오기가 있어야 하오. 5주 만의 대간 길이잖소!"
 5주 만의 대간길!

구간 : 백두대간 제 39,40 소구간(피재~구부시령~댓재) 거리 : 구간거리(26.1 km), 누적거리(558.24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06년 2월 26일. 해의 날. 세부내용 : 피재(06:10) ~ 10분 알바/피재(06:20) ~ 노루메기/임도 ~ 961봉 ~ 944.9봉(06:55) ~ 무명봉 ~ 새목이/공터(07:42) ~ 960.2봉 ~ 무명봉 ~ 무명봉 ~ 가짜 건의령(08:40) ~ 한반도 지형 ~ 건의령(08:55) ~ 902봉 ~ 푯대봉 갈림길(09:39) ~ 961봉 ~ 잘루목/목장지대(10:34) ~ 급경사 계단 ~ 1161.6봉(11:00) ~ 잡목지대 ~ 997.4봉 ~ 1017봉 ~ 1055봉(12:13) ~ 갈림길 ~ 잡목지대 ~ 구부시령(12:30) ~ 1007봉(12:46) ~ 새목이 ~ 덕항산(13:15) ~ 점심식사후 출발(14:05) ~ 전망대 ~ 쉼터/ 철계단(14:14) ~ 환선봉/지각산(14:58) ~ 헬기장(15:18) ~ 자암재(15:40) ~ 1036봉(16:10) ~ 광동댐 이주단지/배추밭 ~ 1058.6봉(16:55) ~ 임도 ~ 큰재(17:10) ~ 1062봉(17:40) ~ 1059봉/길주의 ~ 1105봉 ~ 무명봉/삼각점 ~ 황장산(19:19) ~ 댓재(19:40).
총 소요시간 13시간 30분. 만보계 기준 52,000보.
2월 25일 저녁 10시. 산본을 벗어나 동군포 IC로 영동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교통 정보에는 용인 부근 4km 구간이 정체라고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냥 진행했다.
그러나 용인까지 접근하는 동안 정체가 다 풀려 버렸는지 막힘 없이 여주휴게소를 지나고,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 타서 10여 분 달려 감곡IC를 빠져 나갔다. 다시 38번 국도 타고 제천까지 논스톱으로 달렸다. 영월까지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어 비행기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냅다 달렸다.
태백으로 가는 길은 지난번에는 석항리에서 우측으로 빠져 영월 상동 거쳐 화방재로 갔지만, 오늘은 석항리에서 그냥 직진해서 사북, 고한 거쳐 두문동재 터널 지나 태백으로 들어가서 35번 국도로 갈아타고 피재로 가면 된다.
석항리 지날 무렵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증산 쯤에서는 제법 비가 많이 온다. 일기예보에서는 일요일 오전 1cm 가량의 눈을 예보했었는데 예보보다 빨리 눈이 아닌 비가 내린다.
증산은 오래 전 우연히 민둥산 억새 산행을 한 후 홀딱 반해서 몇 년 간격으로 세 번이나 찾았던 곳이다. 이곳은 올 때마다 개발이란 미명 하에 얼굴에 분칠을 해 대더니 이제는 완전히 도시의 불야성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처음 민둥산 등산 왔을 때는 숙소가 없어 한적한 시골 간이역인 증산역에서 자판기 커피 한잔 마시고 조는 듯 인적 드문 마을 구경하다가 정선까지 나가 숙소를 잡아야 했던 조용한 곳이었는데...
약간 꿀꿀한 기분으로 사북으로 들어 왔더니 이곳은 한술 더 떠서 밤 12시가 넘은 시각인데 각지에서 몰려온 차들로 교통체증이 빚어지고 있다. 모텔, 안마시술소, 술집, 식당, 전당포들이 일확천금에 눈이 먼 불나방같은 사람들을 향해 유혹의 불빛을 번쩍이고 있다. 이곳에 카지노가 들어서고 나서 이곳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간 이익은 얼마나 될까? 그 이익이 과연 지역 주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긴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내리는 비 때문에 심란한 마음으로 태백 거쳐 피재에 도착했다. 피재 삼수령 정자 앞 주차장엔 서울 넘버의 흰색 코란도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아마도 대간꾼이 잠들어 있으리라. 그들 잠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우리도 취침 준비했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다. 새벽 한 시다.
 피재/三水嶺
강원도 태백시 적각동에 있는 한강·낙동강·오십천의 분수령. 높이 920m.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분기점이며 삼강(三江 : 한강·낙동강·오십천)의 발원지이다.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따라 황해로, 동쪽으로 흘러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르는 분수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이름이 전하는데, 삼척 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는 정자각과 조형물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을 통해 분수령목장을 지나 천의봉으로 등반할 수 있다. 주변에 검룡소, 금대봉, 용연동굴, 매봉산 등 관광명소가 많이 있다. 찾아가려면 태백시내에서 조탄·하장·임계행 시내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로는 황지교 사거리를 지나 화전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35번 국도변에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제 39, 40 소구간 피재 ~ 구부시령 ~ 댓재 개념도.(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첫 번째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03시 30분이다. 알람을 꺼 보지만 눈이 쉽게 떠지질 않는다. 15분 간격으로 두 번을 더 알람을 맞춰 두었으니 세 번째 알람이 울리는 4시에 일어나자!
자는듯 마는듯 하면서 기다리는데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시각이 아직 멀었나?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아뿔싸! 시각은 이미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알람이 두 번이나 더 울었는데 모르고 그냥 잔 것이다.
기상! 기상! 마눌 빨리 일어나라! 늦잠이다! 마눌 깨우고 차 밖으로 나와보니 간밤에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다행이다, 그런데 참 별이 많기도 하다!!!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잠이 덜 깬 팍팍한 위장에 준비해온 샌드위치와 두유를 먹어 주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간다! 아침엔 누룽지 끓여 먹는 게 최곤데...
먹었다 하면 반드시 내보내야 하는 정직한 위장을 가진 탓에 이런저런 준비로 어느새 시각은 6시. 스틱 펼치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들어 오더니 경상도 사투리가 찐하신 두 분이 내린다. 어제 화방재 ~ 피재 구간을 하고 오늘 우리와 같은 구간을 들어 간다고 한다. "그거 반갑습니다. 같이 갑시다." 이런저런 정보 주고 받으며 6시 10분에 출발했다.
# 피재에서 노루메기로 통하는 임도.

그런데 이 분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정확한 들머리는 '삼수령 정자' 뒤에 있는데 말이다. 지도를 확인하니 노루메기에서 이 임도가 마루금과 만나기는 한다.
우리가 정확한 마루금 만을 주장하는 원칙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주 만에 시작하는 대간길의 첫시작을 이럴 수는 없다싶어 원위치하기로 했다. 그 분들은 계속 진행했다. 임도를 따라 다시 올라 오는데 많이도 내려갔었네... 피재로 돌아오니 6시 20분이다. 시작부터 10분을 까먹었다.
오늘 구간은 열두세 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있는데 늦잠을 자서 한 시간이나 늦었고, 시작점을 잘못 잡아 다시 10분을 허비했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다시 이마에 등불 밝혀야 되겠구나!!
'삼수령 정자'와 '빗물의 운명 조형탑'을 지나니 표지기가 무수히 달려 있다. 그래, 이렇게 들어 와야지! 숲길을 잠시 걸어 완만한 봉우리를 하나 넘어가니 임도가 대간길을 가로 지른다.
이곳이 '노루메기'다. 임도를 통해 이곳으로 와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노루메기란 지명은 아마도 흔한 지명 중 하나인 '노루목'의 변형인 듯하다.
임도를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좌측 숲속으로 진입하였다. 이내 가파르게 오르게 되고 '961봉'인 듯하다. 어느새 날이 희뿌옅게 밝아와 이마 등불을 껐다. 우측으로 임도와 연결되는 끝부분에 마을인 듯 가로등 불빛이 여럿 보인다.
오늘 대간길 상태는 산 전체의 90% 정도는 눈이 없고 나머지 10% 정도만 눈이 남아 있다. 그 10%도 주로 산 정상부근, 마루금의 움푹 파인 등로 속, 내리막길의 응달진 곳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고 대부분 딱딱하게 얼음으로 변해 있어 특히 내리막에서는 조심해야 하는 상태다.
얼음 박힌 내리막을 힘들게 내렸다가 안부에서 다시 한바탕 치고 올라야 한다. 등로 우측을 따라 전기철조망이 길게 이어져 있고 저 아래로 목장이 보인다. 아침 기온이 영상 5도로 높아서인지 이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오르막의 끝은 삼각점이 있는 '944.9봉'이다.(06:55)
944.9봉에서는 지난 번에 지나온 매봉산 배추밭이 한눈에 조망된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풍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배추밭을 뒤덮고 있던 눈도 다 녹았는지 맨땅만 보인다.
잠시 진행하는데 오른쪽 숲 너머로 일출이 시작된다. 숲에 가려 온전한 일출의 전경은 볼 수 없지만, 붉게 솟아 오르는 불덩이가 감동 그 자체다. 마눌과 둘이 그 불덩이를 향해 두 팔을 쭉 펴고 펄떡이는 태양의 정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음~~
내리막은 등로 중간에 얼음이 단단히 박혀 있어 봅슬레이 경기장을 연상케 한다. 무릎 때문에 아이젠은 생략하고 다리를 넓게 벌리고 스틱으로 중심을 잡으며 엄거주춤하게 내려갔다.
이곳은 중간중간 갈림길이 많아 야간이나 악천후 시에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안부를 지나 무명봉을 향해 오르는 중간에 세 갈래 길이 나오고 대간길은 직진해야 한다. 봉우리를 넘자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두 곳 모두 표지기가 달려 있다. 좌측길은 하산하여 35번 국도와 연결되는 길인데, 누가 그 쪽으로 표지기를 붙여 두었는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 세 갈래 길을 만나 직진한다.

# 다시 갈림길. 우측길이 대간길.

편안한 길이 계속 이어지고 얼음만 없다면 달려도 될 듯하다. 그렇게 편안하게 내려가자 갈림길이 있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은 지도상 '새목이'로 표시된 곳이다.(07:42). 넓은 공터엔 야영을 했는지 불을 피운 흔적이 있고 쓰레기가 사방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 넓은 공터가 있는 새목이. 좌측으로 35번 도로와 연결된다.

새목이에서 다시 봉우리 하나를 치고 올라가면 '960.2봉'이 나온다. '무명봉 두 개'를 연이어 짧게 오르내린다. 두 번째 무명봉부터는 가짜 건의령까지 길게 내려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얼어 있어 시간 지체가 많다.
평소 내리막에서 힘들어 하는 마눌은 오늘도 겁을 잔뜩 먹고 조심조심 내려오지만 결국은 한바탕 벌러덩 슬라이딩을 한다. 오늘도 왼쪽으로 넘어졌다며 투덜투덜 거린다. 징크스는 계속 이어져서 대간 시작 이후 마눌 엉덩이엔 멍이 사라질 날이 없다.
투덜거리는 마눌 달래서 안부에 내려서니 이곳이 '가짜 건의령'이다. 지도에는 공터로 나와 있다.(08:55). 자동차가 다녀도 좋을 만큼 넓은 길이 길게 이어지고 누군가 장판지에 인쇄된 글씨로 이정표를 만들어 두었다. 다른 곳엔 전혀 없는데 유독 이곳에만 이런 형태의 이정표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 가짜 건의령 가는 내리막. 저 사진 찍고 직후에 벌러덩...

# 누구의 작품일까?

# 좌측으론 상사미동으로, 우측으론 정리로 내려가게 된다.

가짜 건의령에서 잠시 완만한 오름을 오르자 갑자기 전망이 툭 트인 곳이 나오고 좌측으로 '한반도 지형'을 꼭 닮은 곳이 나타난다. 전방의 가덕산(1078.2m)에서 흘러 내린 산줄기가 반도 모양으로 튀어 나와 있고 35번 도로와 냇물이 산줄기를 휘감아 돌아 나간다.
이런 지형은 영월 서강의 선암마을이 아주 유명하다. 이곳은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일한 한반도 모양을 보이고 있다. 멋진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쪽에서 동쪽으로 강풍이 휘몰아쳐 서 있기가 힘들다. 이후 내도록 좌측에서 마루금을 넘어 가는 바람 때문에 왼쪽 뺨만 얼얼해진다.
# 한반도 지형을 닮은 곳.

# 가야 할 대간길의 푯대봉.

길게 내리막을 내려가자 오늘 구간의 첫 번째 포스트인 '건의령'에 도착한다.(08:55). 건의령엔 넓은 비포장 도로가 대간을 가로질러 넘어 가고 있고 공사를 하다 말았는지 전봇대들이 쌓여 있다. '백인교군자당'이 있다 해서 찾아 보지만 잘 보이질 않더니 등로 우측에 다 쓰러져 가는 퇴락한 모습으로 위태롭게 서 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더니 그동안 신도들이 모두 없어진 모양이다. 아마도 무속인들이 세운 것 같다. 유래를 알고 싶어 자료를 뒤져 보지만 백인교나 백인교군자당에 관한 자료는 찾을 길 없다.
건의령에도 강풍이 심하게 불고 있어 오래 머물기가 힘들고 푯대봉을 향해 오르려고 하는데, 반대쪽 날머리에서 홀로 대간꾼이 내려오고 있다.
# 건의령 날머리.

# 건의령은 넓은 비포장 도로다.

# 퇴락한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 산길에서 흔히 만나는 당집일 텐데 그 유래는 알 길이 없다.

# 건의령엔 고려 유신들의 한맺힌 충절이 어려 있다.

# 큰재까지는 14.7km로 아직 7시간 정도 더 가야한다.

# 이곳에서부터는 등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이정표도 귀찮을 정도로 자세히 나와 있다.

건의령은 피재에서 구부시령 사이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구부시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푯대봉을 향해 오른다. 어제부터 대간 들어오기 싫어하더니 마눌은 오늘 영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하다. 푯대봉 오름부터 힘들어 하더니 급기야는 배고프다고 야단이다. 북서풍이 너무 강하게 불어 마땅히 쉴 곳을 찾기가 어렵고 등로 우측으로 내려가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삼각김밥으로 요기했다.
그동안 건의령에서 만난 홀로 대간꾼에게 추월 당하고 안산하시라고 인사를 건냈다. 간식 먹느라 배낭을 확인해 보니 물이 2리터 밖에 없다. 마눌은 요즘 날이 추워 지난 번에도 이 정도로 충분했다면서 걱정말라고 하지만, 그때는 보온병에 따뜻한 물도 담아 왔고 이온 음료도 여분이 있었는데... 어제 할인마트에 들렀을 때 막걸리를 챙기라고 했더니 그마저 잊어 먹어버리고... 아무래도 오늘 산행 중에 물 때문에 곤욕을 치를 듯한 느낌이다. 간식 먹고 충분히 쉰 후 다시 푯대봉을 향해 오른다.(09:39). '푯대봉 삼거리'가 나오고 대간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여 급하게 내려간다. 옛날엔 이곳에서 알바를 많이 했다는데 지금은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 푯대봉 삼거리.

푯대봉 갈림길에서 급하게 떨어져 내렸다가 안부에서 좌측으로 내린다. 잠시 우측으로 진행하다 마루금에 오른다. 갈림길이 곳곳에 나오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걱정할 것이 없고 정상에 참나무 군락이 있는 무명봉을 하나 올라 좌측으로 90도 꺾어 마루금을 진행한다.
이곳에서 남진하는 단체 산행팀을 조우하는데, 선두와 후미조의 시간차가 상당하다. 이 팀과 계속 만나면서 열심히 인사를 나누게 된다.
푯대봉에서부터 대간길의 지형은 전형적인 '동급서완(東急西緩)'의 형태를 띄고 있어 오른쪽으로 급격한 낭떠러지 위로 마루금이 지나간다.
# 마루금이나 내리막엔 희한하게 눈이 얼은 채 남아 있어 걷기가 힘들다.

# 등로 주변엔 수백 년은 족히 될 황장목들이 곳곳에 있어 나그네의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는 노거수(老巨樹)를 보면 꼭 끌어 안아주어 그 나무가 보낸 오랜 세월에 경의를 표한다.

961봉 하산길은 산의 사면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휘감아 돈다. 곧 넓은 안부를 지나 맞은 편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로 올라야 한다.
지도상 '잘루목'으로 여겨지는 이곳 안부는 김천의 우두령 너머 '바람재'를 연상시키게 좌측으로 넓은 '목장지대'가 펼쳐져 있다. 안부를 넘어 온 강력한 바람이 사람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곳이다. 앞서가던 마눌이 한순간 오른쪽으로 팩 처박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이 그만큼 강하게 불고 있다.
# 좌측으로 목장지대가 있는 잘루목. 좌측으로 내려가면 하사미동.

목장지대를 지나자 경사가 아주 급한 계단길이 나온다. 아마도 실전 백두대간에서 "다람쥐도 눈물을 흘릴만큼 가파른 오름"이라고 표현해 둔 곳인가 보다. 다람쥐가 눈물을 흘리다니... 그 어휘력이 좋은 듯도 하고 황당한 듯도 하고 그렇다. 헉헉낑낑~~ 종아리가 팍팍하게 땡겨오고 숨이 턱턱 막힌다.
# 가파른 경사의 시작.

# 이 정도 경사면 다람쥐가 눈물을 흘린만 한가?

죽을 힘을 다해 경사를 치고 올라 '1161.6봉'을 지나자 가야 할 대간길이 북동쪽으로 뻗어 있다. 눈이 녹고 메말라 온 산이 갈색인데 마루금이나 정상 부근의 등로에만 눈이 남아 있어 꼭 하얀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인다. 이곳 역시 갈림길 마다 안내판이 있어 길잃을 염려는 없다. 그러나 이곳이 우리에게는 오늘 구간 중 결정적인 고비였다.
평소 산을 잘 타는 마눌이 오늘은 계속 컨디션이 나빠 힘들어 하고 나 역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너무나 힘이 들었다. 이럴 때는 재빨리 휴식을 취하고 영양보충을 통해 체력을 회복해야 하는데,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마땅히 쉴 곳이 없고 두 번째 포스트인 구부시령까지는 일단 가서 쉬자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계속 진행했다.
'1055봉'은 지친 몸에게는 너무 가팔라 엉금엉금 기어 가다시피 올라야 했다. 1055봉 내림길에도 어김없이 봅슬레이 경기장이 생겨 있고, 한순간 몸에 아무 중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이어 겨울잠 자던 다람쥐가 놀라 깰 만큼 크게 쿵! 하고 나가 떨어졌다.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이곳저곳 확인해 보니 다행히 부러지거나 피가 나는 곳은 없다. 엉덩이 살 덕을 봤나?
다시 20여m를 내려 갔을까? 또다시 미끌 하더니 쿠당탕탕!!! 연속으로 두 번을 슬라이딩 했더니 어안이 벙벙하다. 이번에도 다친 곳 없이 일어서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아홉 서방을 섬긴 여인의 한이 서린 '구부시령'에 도착한다.(12:30). 피재에서 6시간 20분이 걸렸다.
# 마치 머리띠를 두른 듯 마루금에만 흰눈이 남아 있다.

#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 수백 년 세월이 느껴지는 황장목.

# 좌측으로 꺾여 이어지는 대간길. 지친 마눌은 그냥 땅바닥에 주저 앉는다.

# 구부시령(九夫侍嶺). 기구한 팔자의 여성에 관한 전설이 있는 고개다.

# 전설 속의 저 여성은 왜 끝까지 서방을 둘려고 했을까? 한 사람 잃을 때마다 고통이 대단했을 텐데...

구부시령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 이곳에서 쉬지 못하고 일단 덕항산까지 가 보기로 했다. 덕항산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으니 그곳에서 바람을 피하자는 생각이지만, 쉬어야 할 순간에 쉬지 못하고 계속 진행을 해야 하니 체력소모가 너무 많다.
'구부시령의 안부' 역시 지도에는 '새목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구간에는 새목이란 이름을 가진 안부가 두 곳이나 된다. 구부시령에서 안부인 새목이로 내렸다가 힘들게 힘들게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더이상 못 가겠다는 소리가 나올 즈음 1070.7m '덕항산'에 올랐다.(13:15)
# 1007m 봉 직전 대간길은 좌측으로 꺾여 떨어진다.

# 덕항산 정상.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 덕항산은 환선굴을 품고 있다. 
덕항산 정상에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 부득이 '산불감시초소'로 올라 갔다. 좁은 초소 안은 둘이 앉으면 꼭 맞다. 바람이 그랬는지 유리창 하나가 떨어져 산산조각 깨져 있다. 깨진 유리창을 한쪽으로 치우고 발열도시락으로 산상 만찬을 준비했다.
막걸리 한 잔 없음이 너무나 아쉬워서 마눌을 타박했다. 그래도 두 다리 쭉 뻗고 벽에 기대니 너무나 좋다. 배불리 먹고 다리 주물러 피로도 풀고 하니 천국이 따로 없다.
밥 먹고 일어나 주변 경치를 보니 어머니나!!! 멀리 동쪽으로 동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남해 바다를 보고 시작한 백두대간 길이 한 번 두 번 나이테를 불려가다 드디어 이곳 덕항산에서 동해바다를 보게 되었다요. 음~ 벅찬 감동이 밀려 온다.
# 멀리 광동댐 이주단지의 배추밭이 보인다.

# 덕항산 산불감시초소에서는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이 조망된다.

배 불리 먹고 체력 회복하고 동해바다 감상으로 감동까지 가득 채우고 덕항산을 떠났다.(14:05). 이곳 덕항산에서부터 광동댐 이주단지가 있는 1058.6봉까지의 마루금은 천길 낭떠러지 아래 환선굴 계곡을 C자 형태로 안고 이어진다. 동급서완의 지형이 너무나 확연하다.
이 지역은 등로가 너무나 잘 관리되어 있다. 위험한 낭떠러지에는 말뚝을 박고 밧줄로 차단을 해 두었고 경사지엔 어김없이 계단을 조성해 두었다. 아마도 동굴엑스포를 하면서 관리해 둔 듯하다. 덕항산 내리막을 잠시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환선굴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있는 '쉼터'에 도착한다.(14:14)
# 쉼터. 환선굴 갈림길이 있는 곳이다.

# 오늘 구간엔 아름드리 황장목이 많다.

오른쪽으로 천길 낭떠러지가 이어진 마루금을 걷자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몸이 우측으로 끌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멀리 아래로 환선굴 계곡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어느 해인가? 여름 휴가때 환선굴 구경을 왔다가 높다란 절벽 중턱에 동굴이 있는 것을 보고 그곳까지 걸어 올라 가기 싫어 너와집, 굴피집, 물래방아만 구경하고는 송어횟집에서 회만 먹고 멀리서 경치 구경만 했었다. 그땐 장마철이라 천길 절벽 곳곳에서 긴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꼭 동양화속 풍경 같았는데, 마눌더러 산중턱까지 걸어 올라가기 싫어 안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좋은 경치는 멀리서 바라 봐야 제맛이 난다는 핑계를 댔었다.
그때는 산중턱까지도 가기 싫어 했었는데, 그 아래에서 볼 때 까마득한 절벽 꼭대기이던 대간의 마루금을 오늘은 걸어 가고 있다. 고개를 전방으로 돌리면 멀리 광동댐이주단지의 배추밭이 화산의 분화구처럼 보인다. 천길 낭떠러지의 산꼭대기를 저렇게 개간할 생각을 누가 했을까?
무명봉 하나를 낑낑 올랐더니 대간길은 정상 직전에서 우회하고 이내 '환선봉'에 도달한다. 환선봉은 '지각산'이란 또다른 이름을 갖고 있고 고도는 1,079m다.
# 환선굴 계곡이 한눈에 들어 온다. 
# 줌으로 당겨보니 관광객이 없는지 주차장이 텅 비어 있다.

# 저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배추밭을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 로프로 막아 두었지만 아주 위험한 우회로를 돌아 진행한다.. 
# 환선봉. 지각산이 원래 이름인 듯하다.

환선봉은 환선굴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은 듯하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지각산으로 나온다. 그나마 지도에는 이름도 없고 1,079m란 높이로만 존재한다.
환선봉 하산길은 북서쪽을 향해 있어서인지 오늘 구간 중 잔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눈이 깊고 얼어 있어서 시간 지체가 심하다. 등로는 선답자들이 꾹꾹 다져 놓아 꽁꽁 얼어 붙어 있어 등로 위쪽의 신설을 러셀하며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눈이 물기가 빠져 푸석거리는 상태고 위쪽은 얼어 있는 상태라 그냥 다리로 밀어부쳐 버렸다.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빠지는 곳도 있다. 내리막이 끝나는 부분에 키 작은 억새로 뒤덮여 있는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은 햇살이 따스해 포근하다. 다시 무명봉 하나를 치고 오른다. 무명봉 정상에서 대간길은 북동쪽으로 꺾이고 한참을 내려 '자암재'에 도착한다.
# 산의 사면을 우회. 등로보다는 위나 아래로 걸어야 편하다.

# 억새밭 헬기장.

# 자암재.

자암재는 환선굴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는 곳이다. 명칭이 혼란스럽게 사용되는지 한쪽 이정목에는 자암재로, 다른쪽에는 장암재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에는 자암재로 기록되어 있는 걸로 보아 장암재는 오기(誤記)인 듯하다.
자암재에서 '1036봉'을 넘자 눈앞에 광동댐 이주단지의 광활한 '배추밭'이 펼쳐진다. 귀네미골로 알려진 이주단지는 산그림자 속에 조용하고 개짖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지난 구간의 매봉산에서 수십 만평의 배추밭을 이미 본 적이 있지만, 이곳은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배추밭이 형성되어 있어 그 규모나 위치 등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곳은 선답자들 사이에 길찾기에 애먹는 구간으로 알려져 있어 진행이 조심스럽다. 준비해 온 물이 이곳에서 드디어 다 떨어져 버렸다. 마을로 내려가서 물을 구해 오자고 했지만, 마눌은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그냥 참고 가자고 한다. 난 물 없으면 안 되는데...
마을로 들어가서 물을 구하고 그냥 산꼭대기에 있는 '하얀 물탱크'를 목표로 직선으로 치고 올라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이곳에서 길 잃고 헤맨 사람들이 많다는 얘길 들은 마눌이 기어코 표지기 따라 가자고 고집한다.
배추밭 가장자리를 따라 무명봉 하나를 넘으니 오른쪽으로 환선굴 계곡으로 바로 떨어져 내리는 암봉이 조망되고 길을 배추밭을 따라 시멘트 도로와 연결된다.
# 산그림자 속에 조는 듯 누워 있는 이주단지.

# 광활한 배추밭. 산꼭대기의 물통을 기준으로 올라야 한다.

# 배추밭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한다.

# 환선굴 계곡 쪽의 암봉.

첫 번째 시멘트 도로에서 위로 올라가면 두 번째 시멘트 도로와 만나게 된다. 배추가 자랄 때는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올랐다가 우회하여 윗도로와 합류해야 하지만, 오늘은 그냥 배추밭을 가로질러 위로 치고 올라가면 된다. 누군가 그 방향으로 표지기도 달아 두었다.
세 번째 도로에서 다시 정상의 하얀 물탱크를 기준으로 하여 치고 오른다. 이곳 역시 농사철에는 도로를 따라 진행해야 한다. 정상에 있는 물탱크는 규모가 아주 크고 이곳이 지도상 '1058.6봉'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배추밭 일대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에 조망되고 가야 할 대간길은 그대로 밭을 넘어 다시 도로와 합류해서 큰재로 넘어가면 된다.
위에서 전체적으로 보니 마을을 통과해서 가도 큰 무리가 없고 도로를 따라 그냥 배추밭의 사면을 우회하여 큰재 쪽으로 넘어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만일 악천후 시나 야간에 지나게 되더라도 배추밭 제일 윗쪽의 도로, 하얀 물탱크, 산 너머의 배추밭 속 나무 한 그루를 기준으로 진행하면 큰무리가 없을 듯하다.
물탱크 있는 1058.6봉을 넘어 배추밭 가장자리를 따라 도로와 다시 합류하고, 세 번째 기준점인 '나무 한 그루'를 지나 배추밭이 끝나는 지점의 '고개'를 넘어 간다. 큰재로 이어지는 길은 눈녹은 물로 질척질척하고 일부는 도로 아래로 작은 물줄기를 이루어 떨어지지만 마실 수는 없는 물이다.
도로를 따라 산의 사면을 우회하고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니 다시 갈림길인 '큰재'가 나온다.(17:10). 원래 계획보다는 두 시간이, 아침 출발 계획에서는 한 시간이 오버됐다.
# 산을 벗어나 첫 번째 시멘트 도로와 만난다.

# 농사철에는 우측으로 돌아가서 도로를 따라 두 번째 도로와 만나야 하지만, 오늘은 그냥 밭을 가로질러 위로 치고 올라가면 된다.

# 물통이 있는 1058.6봉을 넘어 나무를 기준으로 계속 진행하면 큰재로 가는 고개가 나온다.

# 큰재. 이제 마지막 포스트인 황장산을 향해 출발. 
큰재에서 댓재까지는 두 시간 정도 예상되니 결국 오늘도 이마에 불 밝혀야 할 모양이다. 그래도 걱정이 하나도 안되니... 단지 물이 없는 것 만이 조금 걱정될 뿐이다. 이왕 늦은 것 좀 쉬어 가기로 하고 간식도 먹고 지나온 대간길 구경도 한다.
큰재에는 떼거지로 몰려와서 놀다 갔는지 쓰레기가 이곳저곳 쌓여 있고 소주병, 맥주병 등이 지천이다. 에라이~~ 나쁜 놈들아!!!!
# 가야 할 1059봉

# 지나온 대간길. 가운데 배추밭 정상 물통이 작게 보인다.

충분히 휴식하고 완만한 오름으로 길게 올라가는 1059봉 가는 길을 오른다. 이곳은 지도상 잡목지대로 나오는 곳이다. 대간길은 숲속으로 이리저리 어지럽게 올라가는데, 숲속이라 눈이 아주 많이 남아 있어 등로는 원래 등로와 일치하기도 하고 선답자들이 새로이 눈길을 내놓기도 하고 그렇다. 그러다보니 가끔 표지기를 놓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발자국을 확인하기도 해야 한다.
중간중간 목이 말라 눈을 파 먹었다. 눈 표면은 각종 이물질로 더럽지만 딱딱하게 얼어 있는 겉눈을 걷어내면 외관상 깨끗해 보이는 하얀 눈이 나온다. 물론 이 눈이 깨끗하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따질 여유가 없다.
눈덩이를 입에 넣으면 금방 얼음처럼 뭉쳐져서 입안이 얼얼해지면서 차가운 물이 입안 가득 찬다. 흙냄새가 약간 나는 것이 뒷맛이 나빠 비법인 '사탕 물고 눈 먹기'를 했다. 달콤한 사탕맛이 가미된 얼음보숭이라고나 할까? 마눌은 더럽다고 처음에는 안 먹더니 나중에는 목이 마른지 시키는대로 잘도 따라 먹는다.
길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꾸준히 올라가니 '1059봉'이 나온다. 삼각점 때문인지 주변 나무를 잘라 사계청소를 해두었고 저무는 산하가 보이지만 마음이 급해 잠시 쉬고 이내 출발했다.
1059봉 하산하면서 완만한 내리막으로 길게 이어진 눈길을 따라 무심결에 진행하는데, 마눌이 길이 좀 이상하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눈길을 따라 내려간 발자국은 어지럽게 있는데, 멀리 내다봐도 표지기가 없다.
다시 빽! 정상으로 도로 올라가니 대간길은 '우측'으로 꺾여 급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게 되어 있다. 지도를 확인하니 직진길은 하장면 번천리 '황정막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눈 때문에 등로가 사라져버려 헷갈리게 만드는 곳이다. 이런 곳은 표지기가 많이 필요한 곳이지만 여긴 별로 눈에 띄질 않는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소량이라도 표지기를 제작해서 갖고 다녀야 할까 보다.
이후 봉우리를 두 개를 넘는 동안에 어둠이 짙어졌다. 마눌 이마에 등불 달아주고 미끄러운 등로를 조심스레 진행했다. 세 번째 봉우리를 힘겹게 올라가니 '1105봉'이다. 아무 표지도 없어 지도상 짐작만했다.
목이 마를 때마다 사탕 물고 눈 먹기를 하며 갈증을 달래는데, 어둠이 짙어지면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오늘 구간은 첫 포스트인 건의령까지는 아주 편하게 갔고, 둘째 포스트인 구부시령까지는 너무나 힘겹게 진행하고, 점심 후 큰재를 지나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좋은 컨디션으로 왔는데, 어두워지면서 갑자기 힘이 많이 든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에 크게 걱정은 안 되고 마눌 역시 지난번 태백산에서 16시간 넘게 헤맨 이후 웬만해선 겁도 내질 않는다. 그래도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황장산 오름에선 헥헥 낑낑 소리가 절로 났다. 마지막 길고 가파른 오름을 억지로 올라가니 '삼각점과 삼각점 안내판이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이 황장산인가 보다. 마눌에게 수고했다 격려하고 시간 체크를 하려고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황장산에는 정상석이 있다고 했는데, 이곳은 정상석은 없고 삼각점만 있다. 지도를 확인해봐도 황장산 이전에 봉우리가 나오지 않고, 등불을 비춰 보지만 눈발이 간혹 섞인 안개가 워낙 자욱하게 깔려 있어 불빛이 흩어져 버려 시정이 몇 미터를 넘지 못한다.
마눌 얼굴에 실망한 빛이 가득하다. "괜찮소, 다왔다 시간적으로 충분히 도착할 시각이니까 바로 앞에 있을 거요." 마눌 달래 진행하니 다행히 바로 앞에 '황장산 정상'이 있다. 황장산 정상은 이중 봉우리인가 보다.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석과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19:19)
# 중간중간 이정목이 많이도 세워져 있다.

# 전위봉에서 황장산이 아닌 걸 알고 황당하고 허탈해하는 마눌.

# 황장산. 청타산악회에서 세운 작은 정상석이 있다.

저 아래로 댓재로 오르는 도로의 불빛이 보이고 이제는 다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황장산 하산길은 아주 급하고 꽁꽁 얼어 있어서 무지무지 위험하다. 다행히 등로를 따라 말뚝과 밧줄을 매어 두어 밧줄에 의지하여 조심조심 내려갔다. 가파른 내리막이 끝나자 산죽밭이 이어지고 댓재의 불빛을 기준으로 꾸불꾸불 노래도 불러가며 내려갔다.
(19:40)드디어 오늘 구간 종점인 '댓재'에 도착했다. 댓재 주차장엔 강력한 댓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고 특이한 모양의 조형물이 불빛 속에 홀로 서 있다.
# 댓재에 있는 조형물. 로켓 모양인데 동굴이나 댓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대나무와 대잎을 형상화 한 건가?

댓재 휴게소에 들러서 마눌은 콜라를 나는 이온 음료를 마음껏 들이켰다. 그래도 갈증이 계속 나서 아이스크림 한 개와 생수 한 병을 또 마셨다. 식사는 곤란하다고 해서 일단 피재까지 차량 지원만 부탁드렸다. 댓재휴게소 아주머니는 급가속, 급회전의 운전 기술을 보이며 피재까지 직통으로 데려다 주었다. 댓재휴게소 봉고택시비는 25,000냥.
피재에는 아침에 보았던 코란도 차량이 그대로 주차되어 있다. 낮에 산에서 만났던 홀로 대간꾼이 차안에서 식사 중이다. 우리 도착하는 것을 보고 내리더니 아침에 우리와 같이 산행 시작했던 경상도 분들이랑 같이 17시 30분에 하산했다면서 우리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중간에 구부시령 근처에서 많이 쉬고, 밥 먹느라 많이 쉬고, 경치 구경하느라 늦었노라 말씀드리고 시간 지체에는 이력이 나서 이 정도는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고 말씀 드렸다.
그렇긴 해도 오늘도 13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아마 이 상태로 대간을 졸업하고 나면 시간 지체가 가장 심한 종주자로 기록을 세우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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