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그 스물여덟번째(댓재~원방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 슈타른 버거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다.
- T.S 엘리엇 황무지(荒蕪地) 일부
황무지는 어려운 시(詩)다. 원래 영시(英詩) 자체가 운율에 맞춰 리듬감 있게 작시(作詩)되고 감상해야 해서 단순히 영어 번역하듯 하면 영시의 참 의미를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황무지는 거기에다 영국인들도 알지 못할 서양 고전어인 라틴어와 헬라어의 인용문을 비롯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까지 인용하였고 성서, 단테, 세익스피어, 보들레르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그 내용을 더욱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그저 우리 같은 주입식 교육의 경험자들은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규정하고 해설한 내용을 글자 그대로 달달 외워 겉모습만 이해할 따름이다.
"엘리엇은 제 1차 세계 대전 후 유럽 사회의 정신적 황폐를 불모(不毛)의 땅, 황무지(荒蕪地)로 상징적으로 표현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황무지에 단비가 가까웠음을 암시하여 절망의 끝에서도 언제나 구원은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황무지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이다. 그리고 그 시에서는 단 한 소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이 구절만 기억하고 매년 4월이면 "4월은 잔인한 달. 어쩌구 저쩌구..." 되뇌일 따름이다.
나 역시 그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황무지 전문에 대한 이해는 없이 매년 4월이면 잔인한 달로서만 운을 뗄 뿐이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김없이 4월은 왔고 그 4월에 일어난 여러가지 곤란한 일을 상기하며 한 마디 꺼집어 낸다. "4월은 잔인한 달!".
그렇다. 올해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모시고 살던 장모님과의 이별, 이런저런 인간관계의 갈등, 뜻대로 풀려 주지 않는 회사일, 느닷없이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온 대지가 푸른 새싹으로 뒤덮혀 가는 이 생명의 계절에 불모(不毛)의, 불임(不姙)의 가슴으로 흙먼지 뒤집어 쓰는 아이러니라니.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냥 방치하기 곤란한 일이다.
음~~~ 반전이 필요하다. 이 침체를 한번에 날려 버릴 생명의 기운이 필요하다. 가자! 대간의 품속으로! 가서 이 땅의 뜨거운 참 기운을 가슴 가득 안고 오자! 그리하여 잔인한 4월을 지워버리고 구원의 단비로 황무지에 새싹을 키워내자!!

4월은 잔인한 달!

구간 : 백두대간 제 41,42 소구간(댓재~연칠성령~백봉령-우천으로 원방재로 탈출) 거리 : 구간거리(29.1km - 진행 22.5 km), 누적거리(587.49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06년 4월 23일. 해의 날. 세부내용 : 댓재(04:00) ~ 햇댓등(04:15) ~ 934봉 ~ 명주목이 ~ 무명봉 ~ 1028봉 ~ 1021봉 ~목통령(05:45 ~ 1243봉 ~ 두타산(07:10) ~ 박달령(08:15) ~ 문바위(08:22) ~ 갈림길 ~ 청옥산(09:15) ~ 연칠성령(09:56) ~ 망군대(10:08) ~ 고적대(12:37) ~ 갈림길 ~ 갈미봉(12:37) ~ 전망대(13:08) ~ 1242.8봉 우회 ~ 점심식사/휴식 ~ 개간지 ~ 898봉 ~ 이기령(14:40) ~ 가짜상월산(15:14) ~ 상월산(15:45) ~ 원방재(16:15) ~ 우천으로 임도 통해 가목리 거쳐 군대로 탈출.
총 소요시간 12시간 15분. 만보계 기준 48,000보.
4월 21일. 쇠의 날. 회사일이 영 뜻대로 되질 않아 퇴근이 늦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밥 먹고 나니 이미 시각이 12시를 넘어 버렸다. 보따리는 이미 다 챙겨 두었지만 지금 출발하면 빨라도 아침 5,6시는 되어야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댓재 ~ 백복령 구간은 대간길 중에서 대피소가 있는 국립공원 구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긴 구간이고 험난한 구간이다. 보통 14시간 정도를 예상하니 우리 산행 방식으로는 16시간은 최소로 잡아야 한다. 그러자면 새벽 3~4시에 산행을 시작해야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 올 수 있다.
마눌 표정 보니 어떡하든지 뒤로 미루고 싶은 표정이고, 나 역시 잠 한 숨 자지 않고 그 긴 구간을 해 낼 자신이 없다. 몸 상태도 마눌은 아직 기침감기가 완치되기는 커녕 오히려 나에게 옮겨 주어 목하 두 부부가 동시 패션으로 콜록콜록 대고 있는 실정이라... 1주일 넘게 고생을 시킨 식중독이 겨우 잠잠해지니 이번엔 기침감기가 달려든다. 좋다,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오후에 출발하자!
4월 22일. 흙의 날. 출발하려고 배낭을 짊어 지는데 허리가 휘청한다. 며칠 전 강원도에 폭설이 왔다고 해서 다 녹았으리라 짐작을 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우모복과 아이젠을 챙기고, 현재 중부 이남 지역엔 비가 온다고 하니 역시 혹시 해서 우비도 챙기고 했더니 배낭 무게가 15KG을 훌쩍 넘어 버린다. 아이구야, 이래 가지고 제대로 걸을 수나 있으려나?
영동고속도로에 차를 올리니 중간 중간 지체가 있기는 하지만 토요일 오후치고는 무난하게 진행을 할 수 있고 강릉에서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옥계 나들목으로 나갔다.
한일 시멘트에서 외국계 라파즈로 바뀐 시멘트 공장을 좌측에 두고 꼬불꼬불 강원도 산길을 귀가 멍멍해 지도록 올라가는데 중간중간 산불 감시초소가 있고 빨간모자들이 근무 중이다. 백복령 정상엔 목책이 있는 다음 구간 들머리 쪽에 서울 넘버의 흰색 SUB차량이 한 대 주차 중이다. 아마도 삽당령 구간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집에서 출발하면서 카운트하기 시작한 자동차 거리계가 정확히 300km를 가리킨다. 참으로 먼 길이다.
이번 구간은 이곳 백복령에 주차를 하고 동해나 삼척으로 내려가서 찜질방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댓재로 올라가 산행을 시작할 생각이다. 마침 하루에 두 번 있다는 15-1번 버스가 오길래 타고서 자리가 없어 선 채로 동해까지 위태롭게 흔들리며 내려 왔다. 동해에서 택시 타고 찜질방 있는 곳에 데려 달라고 하니까 마침 삼척에 있는 온천찜질방에 데려다 준다.
찜질방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내일 점심으로 먹을 삼각 김밥을 사고 마침 택시가 있길래 댓재까지 20,000원에 가자는 가격 흥정과 새벽 2시에 전화하겠노라 약속도 했다.
삼척의 온천 찜질방은 규모가 굉장히 크고 토요일이어서인지 수백 명의 이용객으로 붐빈다. 찜질방은 난생 처음 와본다. 그동안 마눌이 몇번 같이 가 보자고 했지만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데다 남녀가 얇은 옷 한 장씩 입고 땀 흘려 가며 같은 공간에서 드러 누워 있는다는 것이 영 이상하게 느껴져 한번도 가 보질 않았다.
난생 처음 가 보는 찜질방, 그것도 토요일 밤의 찜질방, 이거 영 난장판이다. 도저히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큰 휴게실은 백여 명의 사람들로 왁자지끌해서 한 층 위의 작은 휴게실에 갔더니 이곳은 연속극 본다고 전부 TV를 틀어 놓아 역시 1시간 만에 탈출. 다시 1층을 올라 가니 입구에 "어린이, 유아 절대 출입금지"라고 써 있고, 넓은 휴게실에 아무도 없고 조용하길래 옳타쿠나! 여기서 자자!
그러나 그 평화가 깨지기까지는 5분을 넘지 않았다. 이내 한팀 두팀 들어 와서는 TV를 켜더니 박지성 응원하느라 박수치고 난리가 아니다. 나도 박지성 선수를 좋아하고 활약을 기대하지만 오늘은 이게 아닌데...
2시간 만에 프리미어 리그 축구가 끝났다. 양해를 구하고 TV를 껐다. 좀 잘만 하니 이번에 애들을 무더기로 데리고 올라온 사람들이 또 난리다. 여긴 아이들은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아래쪽에 아이들 놀이터도 있는 큰 휴게실이 있으니 그리 가시죠.
한 팀 내려 보내고, 좀 잠이 들만 하면 또 한 팀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종업원 불러서 통제를 부탁하고 억지로 잠을 청해본다. 시각이 이미 12시를 넘어 가고 있는데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내일 산을 가지...
칼날같이 날카로와져 있는 신경을 억지로 누그러뜨리고 잠을 청...하...고... 양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구백 구십 아홉마리...세는데, 옆 자리 아저씨가 콧구멍 속으로 탱크 두 대를 몰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한다. 으아, 미치겠다!!! 다시 세자! 양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드르렁 쿠카 푸하 컥컥컥... 이번엔 앞쪽의 아주머니까지 둘이서 화음을 맞춰가며 코를 골아 재낀다.
포기, 포기! 도저히 잠자기는 틀렸다! 마눌! 내려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결국 밤새 잠 한 숨 못자고 신경만 곤두세우다 찜질방을 나섰다. 간밤에 예약한 삼척 택시를 불렀더니 한참만에 나타난 이 기사 양반. 지금 댓재에서 내려오는 길인데 거리가 멀어서 미터기로 25,000원이 넘게 나오더라고, 어제 말한 20,000원으론 도저히 못 올라 가겠단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댓재에서 오는 길이란 말은 순 거짓말인데... 거짓말하는 것이 너무나 표시가 나는데... 그래도 할 수 없이 5,000원 더 주기로 하고 출발.
아니나 다를까 댓재 가는 길도 헷갈려 하고 미터기도 17,000원이 채 안 나온다. 그래도 일요일 새벽부터 거짓말 하느라 고생했다 싶어 25,000원 지불하고 빠이빠이!

두타산/頭陀山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남서쪽에 있는 산. 높이는 1,353m이다. 산이름인 頭陀는 불교용어로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동해시 삼화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10.2km 떨어져 있다. 북쪽으로 무릉계곡, 동쪽으로 고천계곡, 남쪽으로는 태백산군, 서쪽으로는 중봉산 12당골이 있다. 4km 떨어져 있는 청옥산(靑玉山:1,404m)을 포함하여 두타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척시의 영적인 모산(母山)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예술의 연원(淵源)이라 하여 오십정산제당(五十井山祭堂)이 있고,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을 잇는 의가등(衣架嶝)은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佳景을 이룬다.
청옥산/靑玉山
이기령맥이 남으로 뻗은 것인데 높이가 1,403m, 무릉계곡의 주산으로 두타산과 백복령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이며, 임진왜란 당시 유생들이 의병정신이 불사한다는 뜻에서 청옥산이라 정하였다 한다. 청옥산 정상 밑에는 주목 군락지가 있으며 연칠성령을 지나 능선에 오르면 고적대(1,352m)가 있다. 특히 청옥산 정상 주변은 넓은 언덕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곳에는 약초와 산나물이 많이 난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제 41,42 소구간 댓재 ~ 연칠성령 ~ 백봉령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댓재엔 찬바람이 씽씽 불고 있다. 고도가 갑자기 높아진 데다 기침감기가 심해 머리 속에 물 한 통을 담아 둔 기분이다. 댓재 휴게소 2층엔 누군가 간밤에 민박했다가 산행 준비를 하는지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이 들린다. 마눌과 간단히 스트레칭하고 댓재 산신각 앞에 서서 무사산행을 기원했다.
# 댓재 산신각. 이마 등불 때문에 약간 귀곡산장 분위기가 난다.

산신각 오른쪽에 구간 들머리가 있어 나도 표지기 하나 달고 산행을 시작했다.(04:00). 시작부터 가파른 오름이 이어지고 아직 준비가 덜 된 몸이라 입에 단내가 난다. 지속적으로 가파르게 오르다 보니 어느새 '햇댓등'에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동쪽을 내려다본다. 멀리 삼척시내의 불빛이 잡힐 듯 들어온다. 주위는 아직 캄캄한데 밤새 한 마리 음산하게 울면서 주위를 맴돈다. 저녀석 옛날 혼자서 밤낚시 할 때 밤새도록 옆에서 울어대서 오싹하게 만들더니 이곳 백두대간까지 따라왔구나!
'햇댓등' 이란 이름이 참 특이하다. '해뜨는 것을 조망하기 좋은 댓재의 등성이' 쯤으로 해석하면 될라나? 아직 해는 멀었고 초승달과 쏟아질 듯 별들이 총총하다.
# 햇댓등 이정목.

# 청타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 겸 이정표석.

햇댓등은 지도 상의 대간길 마루금 모양이 꼭 여자의 가슴을 닮았다. 대간길은 다시 좌측으로 가파르게 떨어져 내린다. 올라온 것을 완전히 다 까먹게 내려가서야 안부에 도달한다. 완만한 능선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공터 갈림길에 도착한다. 아마도 댓재에서 햇댓등으로 통하지 않는 우회로인 듯하다.
다시 오름이 이어지다 산의 사면을 휘감아 돌아 내려간다. 아마도 934봉은 우회하는 모양이다. 자꾸만 내려가서 걱정이 슬슬 되기 시작하는데, 통골 7km, 햇댓등 9km라고 적힌 이정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곳이 '명주목이'인가 보다. 누군가 펜으로 통골 2.7km. 햇댓등 0.9km라고 고쳐 놓고 "장난치지 마삼" 이라고 적어 두었다.
장난을 치지 않겠다는 건지 이후 길이 아주 가파르게 치고 올라간다. 마눌은 이쯤에서 너무나 힘들어 한다. 두 달 동안 운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여러 일들을 치르내느라 계속 무리한 뒤탈이 오는 것이다. 게다가 식중독에 폐렴 초기 증세까지 겹쳐 고생을 했으니...
그래도 어깨 두드려 격려하고 가파르게 올라서니 잘생긴 소나무가 있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정상 4.5km 라고 적힌 나무 팻말이 바위 위에 누워있다.(04:54)
이후 고도계에 1,100 ~ 1,200m가 찍히는 무명봉을 몇 개 연달아 오르내리다 한순간 앞이 툭 트이는 전망대가 있는 봉우리에 오른다. 아마도 '1028봉'으로 추정된다.(05:10). 삼각점 설치를 위해 사계청소를 해 둔 모양이다.
# 가야 할 대간길. 바로 앞의 1021봉, 너머의 1243봉, 두타산이 조망된다.

어느새 날이 희뿌옅게 밝아와 이마 등불을 끄고 지지배배~ 쪼로롱~ 시끄럽게 아침인사를 하는 새소리를 들으며 전진한다. 지난 번 피재~댓재 구간할 때만 해도 완전히 겨울이라 새소리는 꿈도 못 꾸었는데,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깊어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의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조금만 더 있으면 검은등 뻐꾸기의 "홀딱 벗고"라는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듯하다.
1021봉 내리막에서 뒤따라 오는 세 사람의 대간꾼을 조우했다. 이럴 때는 걸음 느린 우리는 언제나 길 한 쪽으로 비껴서서 양보한다.
"안녕하세요?" 인사 하는데, "저 혹시 작년에 버리미기재에서 만난 분 아닙니까?" 라며 아는 체를 한다. 자세히 보니 작년 가을 버리미기재 계곡가에서 점심 먹다가 만나 막걸리 한 잔 나눠 먹은 분이다. 원주의 무슨 산악회 간부이신데 땜빵하는 대원들 안내하신다더니 오늘도 똑같은 목적으로 두 분의 회원들과 같이 오신 모양이다. "아이구, 반갑습니다. 이곳에서 또 이렇게 만나는 군요." 반갑게 악수하고 안부도 묻는다.
'1021봉'을 길고 가파르게 내리다가 다시 무명봉을 오르는데 우측 잡목숲 위로 어느새 아침해가 불쑥 올라 있다. 아차차! 일출을 놓쳤네. 원래 계획은 3시 이전에 산행을 시작해서 두타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자고 했었는데... 찜질방에서 잠 못자고 신경 날카롭게 뒤척이느라 출발이 늦어 일출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갓 떠오른 싱싱한 오늘의 태양을 향해 크게 양팔을 벌리고 마음껏 그 기운을 받아 들인다. 흐흐흡!!!!!!흐흐흡!!!! 무명봉을 올랐다가 내려서 안부에 도착하니 이곳이 '통골재'다.(05:45).
# 통골재. 지도에는 목통령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좌측으로 통골로 내려가는 하산길이고 대간길은 키 작은 산죽밭 사이로 이어져 있다. 1243봉 오르는 길은 엄청나게 가팔라서 아주 힘이 든다.
300km를 운전하고, 간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잔 데다, 마눌에게서 얻은 기침감기가 심해 계속 기침을 하고 왔더니 목이 따갑고 배까지 땡겨 죽을 지경이다. 게다가 배낭까지 15kg이 넘으니...
마눌은 거의 사색이다. 더이상 못가겠다며 자기는 댓재로 돌아 가겠단다. 야 이 사람아, 여기서 헤어지면 어쩌자는 거야? 당신 혼자 어떻게 돌아 가며 또 거기서 백복령까지는 어떻게 갈 거야? 게다가 여기서 멈춰버리면 이 구간 땜빵은 또 혼자서 어떻게 할 것이고?
힘들어 하는 마눌 격려하며 다시 진행하는데, 가다 보면 조용해서 돌아보면 오질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또 가다가 한참을 기다리기를 반복한다. 이거 오늘 이러다가 해지기 전에 백복령 내려서기는 틀렸다!
# 작년 버리미기재에서 만났던 원주 산악회분들. 세상 좁다. 그들을 오늘 이곳 두타 산길에서 다시 만났다.

마눌과 한참을 실갱이를 벌이다 오름을 오르는데 원주분들이 과일을 드시고 계시다가 한 입하라고 권한다. "벌써 참외가 나왔군요. 감사합니다." 참외 한 쪽 맛있게 얻어 먹고 그 분들과 헤어졌다.
# 두타산 전 안부.

1243봉 오름엔 너덜길이 나타나는데, 자연석의 모임이 아니라 잘 정렬되어있는 것이 아마도 산성의 흔적인 듯하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두타산성이 맞다. "두타산성은 무릉계곡의 학소대를 지나 철다리를 건너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있는 석성으로 멀리 신라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삼척 부사였던 김맹손이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적과 항쟁하던 곳이라 전한다." 고 자료에 나와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자꾸만 쳐지기만 하는 마눌을 데리고 가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사람이 힘들기는 정말 힘이 드는 모양이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백두대간을 같이 시작한 이후 거의 모든 구간에서 나보다 훨씬 더 산을 잘 내달려 왔는데, 오늘은 거의 엉금엉금 기는 수준이다.
작년 여름 아주 무더웠던 날 화령재가는 길에서 한번 이렇게 하더니... 이 두 달 동안 견디기 힘든 여러 일들을 겪었으니...
두타산 오름에서 한참만에야 나타나더니 드디어는 두 손을 들어 버린다. "나 도저히 더이상 못가겠어요. 이대로 계속 진행하다가는 당신까지 오늘 안에 백복령 내려서기 힘들고, 또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나는 그만 댓재로 돌아 갈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상태로 계속 데리고 간다는 것은 무리다. 지금까지 벌써 1시간 이상을 초과해 버렸으니... 그렇다고 나까지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혼자서 돌아 갈 수 있겠느냐고 몇 번이나 다짐한 후, 지도 보여 주며 돌아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댓재에서 삼척, 동해 거쳐 백복령으로 돌아 가는 요령도 알려 주고. 댓재 도착해서 전화하고, 동해, 백복령에 도착하면 반드시 전화하시오. 댓재 휴게소 봉고차 타고 가면 제일 편할 것이오.
마눌과 포옹으로 작별하고 각기 반대 방향으로 출발했다. 허허, 그것 참!!!!!!!!!!!!!!!!!!!!!!!!!!!!!!!!!!!!!!!!
# 두타산 오름에서 배낭 벗어 던지고 힘들어 하는 마눌.

마눌과 헤어져 혼자서 두타산 오름을 오른다. 두타산 오름은 온통 키 작은 관목숲으로 빽빽하다. 자세히 보니 전부 철쭉밭이다.
한참을 낑낑오르니 좌측으로 '전망대'가 나온다. 지나온 대간길과 가야 할 길이 한눈에 조망된다. 댓재로 돌아가고 있는 마눌 찾느라 지나온 길을 전부 훑어 보지만 잡목숲에 가려 뵈질 않는다.
# 두타산 전망대에서 바라 본 지나온 대간길.

# 가야 할 대간길. 두타 너머 청옥산과 고적대, 우측으로 갈미봉이 조망된다.

전망대 바로 위에 '두타산' 정상이 있다.(07:10). 해발 1,352.7m이다. 자꾸만 처지는 마눌과 실갱이 벌이느라 1시간이나 오버 했다.
두타산 정상엔 넓은 공터와 헬기장이 있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본대로 오래된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사연이 있는 무덤이라 했다.
헬기장 한켠에서는 원주산악회분들이 식사를 하시다가 내가 사진찍고 기록하는 동안 짐 싸서 출발한다. 헬기장 우측에도 표지기들이 많이 붙어있지만 무릉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이고 대간길은 정상석 좌측 뒤쪽으로 나 있다.
# 오래된 무덤이 있는 두타산 정상.

# 정상석. 두타란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법 수행(佛法 修行)을 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두타행(頭陀行)이라 표현한다. 
두타산 내리막은 또다시 올라온 그만큼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오늘 구간은 무조건 정확하다. 올라 왔으면 그만큼 다시 내려간다.
로프가 중간중간 매여 있고 아주 가팔라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 올라갔던 높이를 완전히 다 까먹은 후 안부에서 오름을 유지하며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우측으론 무릉계곡으로 이어지는 천길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등로 한 쪽에 배낭 벗어 두고 아침식사를 했다. 혼자서 행동식으로 식사를 하려니 영 맛이 없다.
해가 어느새 머리 위쪽으로 올라와 쟈켓을 벗어 배낭에 집어 넣고 출발했다. 배낭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마눌 걱정 때문에 영 싱숭생숭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꺼이꺼이 올라가니 작은 돌탑 두 개가 있는 '박달령'이 나타난다.(08:15)
# 박달재. 우측으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박달재를 지나 오름은 계속 유지되고, 너덜길이 나타나서 무릎을 팍팍하게 만들더니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저것이 문바위인가? 사진 한장 찍고 바위를 지나가니 거대한 바위가 군집해 있는 문바위재가 있다.(08:22). 문바위재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번천리로 탈출하는 길이다.
# 문바위인가?

# 문바위재.

청옥산까지는 아직 1.1KM를 더 올라가야 한다. 너덜지대가 계속 이어져 무릎에 부담을 주고 오름은 점점 가팔라진다. 오늘 산행엔 악재가 너무 많이 겹친다. 한달 내내 여러가지 일을 많이 겪었고, 몇 주 동안 아프다가 또 기침감기까지 걸렸고, 간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고, 배낭은 무겁게 꾸렸고, 또 마눌과 아침 내내 씨름하다가 결국엔 혼자서 산행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악재가 겹쳐 결국 청옥산 오름에서 사점(死點)이 왔다. 오후에 걷게 될 갈미봉이나 상월산 쯤으로 예상했는데... 한걸음 한걸음 올리기가 힘이 든다. 기침 감기가 심해 목에 염증이 생겨 잠시만 헉헉대면 목이 아프고 기침이 터져 워터백 호스를 계속 입에 물고 갔다.
청옥아! 너 얼마나 이쁜 얼굴을 보여 주려고 이렇게 힘들게 하냐? 헉헉! 낑낑! 증기기관차 화통소리 같은 숨소릴 내며 올라가는데, 젊은 대간꾼 네 사람이 따라 오다가 추월한다.
"힘드시죠? 저도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인사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드라마 다모(茶母))에 나오는 대사가 연상되어져서 허허 웃었다. 죽을 힘을 다해 오르니 '학등(鶴嶝)'이란 갈림길이 나오고, 곧이어 '청옥산' 정상이다.(09:15)
청옥산 정상 입구엔 샘터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어 내려가 보았다. 정상 입구에서 좌측으로 20여m 내려가자 파이프에서 물이 쉴새없이 나오고 있다. 젊은 산꾼들과 물을 나눠 마시고, 얼굴도 씻으며 호사를 부렸다. 물이 너무나 시원해서 워터백에 있는 물을 다 비워 버리고 샘물로 가득 채웠다.
청옥산 정상엔 헬기장과 이동통신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젊은 산꾼 중 한 분이 혹시 둥구리 아빠가 아니냐고 묻는다. "아이구, 둥구리는 벌써 대간을 졸업한 우리 선배이지요. 저는 강/사/랑입니다." "아, 산행기 본 적이 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인연이 여기서 또 한번 스치게 된다. 내가 둥글둥글하게 생겨서 둥구리 아빠로 착각하셨나? 둥구리 아빠는 전혀 둥글게 생기시지 않았던데...
# 등로 주변으로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

# 청옥산 정상. 젊은 대간꾼들을 만났다.

# 청옥산 샘터. 너무나 시원하다.

청옥산은 청옥이란 옥돌이 많이 나서 얻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청옥이란 나물이 많이 나서 얻은 이름이라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기록되어 있더니 강원도 소개 사이트에 들어가니 임란때 의병의 불사(不死)의 충절(忠節)을 청옥(靑玉)에 비유한 이름으로 나와 있다. 해발고도 1,403.7m이다. 오늘 구간중 가장 높은 곳이다.
사진찍고 기록하는 동안 젊은 산꾼들은 먼저 출발하고, 우측 이동통신 시설물 뒤로 대간길은 이어진다. 당연히 이곳도 올라온 만큼 줄기차게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게다가 온통 너덜길이라 쌍스틱으로 체중을 분산시켜 보지만 무릎이 시큰거려서 계속 인상을 쓰게 된다.
올라온 높이를 완전히 다 까먹은 후에 안부를 따라 무명봉을 다시 팍팍하게 치고 오르니 '연칠성령'이 나온다.(09:56)
# 연칠성령.

# 안내판의 한자가 두 개나 틀렸는데, 누군가 '嶺'자만 고쳐 두었습니다.

'難出嶺'이 어떤 연유로 '連七星嶺'으로 변했는지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다만, '무릉계의 칠성폭포로 이어져 있는 고개'라는 뜻은 아닐까 짐작만 해 본다.
지난 구간에서는 우측으로 천 길 떨어지는 환선계곡의 꼭대기를 휘감아 돌아갔는데, 오늘은 똑같이 천 길 아래 무릉계곡의 꼭대기를 휘감아 걷고 있다. 무릉계(武陵界)를 내려다 보고 걷고 있으니 가히 신선(神仙)의 경지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곳에서는 느긋하게 자리 깔고 누워서 막걸리 한 사발에 노래 한 소절이 제격이지만 시간에 쫓기는 대간길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잠시 10여 분 가파르게 오름을 오르자 전망이 너무나도 좋은 '망군대(望君臺)'가 나온다.(10:08).
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임금을 그리워하여 망경(望京)한 곳이라는 망군대는 좌, 우, 전방으로 조망이 너무나 좋다. 좌측으로 지나온 청옥산이, 우측으론 가야 할 고적대의 위압적인 자태가, 전방엔 골골이 갈라지고 구비쳐 흐르는 산하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고 있어 오래 서 있기가 힘들지만 너무나 훌륭한 조망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망군대에는 택당선생의 절개를 상징하듯 푸른 주목 몇 그루가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 있다.
# 망군대에서 바라 본 가야 할 고적대.

# 전방으로 툭 트인 시야를 제공한다.

# 좌측으론 지나온 청옥산이 보인다.

# 고적대를 줌인해보면 위압감이 든다. 정상엔 벌써 젊은 산꾼들이 올라 서있다.

망군대를 지나 본격적인 고적대 오름이 시작된다. 멀리서 보면 날카로운 직벽의 낭떠러지가 정상 주변을 감싸고 있지만 대간길은 그 사이사이로 이어져 있다.
밧줄 구간이 나타나 오랜만에 낑낑 밧줄타기를 해본다. 청옥산 오름에서부터 이미 다리가 풀려버려 고적대 오름이 너무나 힘이 든다. 아이구, 죽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정상가는 길의 암봉들이 너무나 빼어나서 조금이나마 힘든 것을 잊고 올라 간다.
정상부에도 밧줄 구간이 있어 낑낑 올라서니 와~~~~~~ 소리가 절로 나게 전후좌우 조망이 뛰어나다. 오늘 구간 중 가장 조망이 훌륭한 곳이다. 청옥산, 망군대, 가야 할 대간길, 대간 주변의 산줄기들이 전후좌우 하나의 막힘도 없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좋다! 뛰어난 절경이다. 아름답다! 우리 산하!!! '고적대' 정상석은 몇 걸음 뒤에 세워져 있다.(10:50)
# 암릉구간을 낑낑 올라갔다.

# '고적대(高積臺)'란 높게 쌓여 있는 암봉이란 뜻이다.

# 깎아지른 암봉들이 있지만 그 사이로 대간길은 이어진다.

# 목을 빼낸 거북 한마리.

# 노래하는 암벽.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같다. 청~산~리~~ 벽~계~수~야~~~ 한자락 불러 재끼는 듯한...

# 오랜만에 밧줄도 타 보고.

# 정상부 암봉은 전망이 아주 훌륭하다. 청옥산에서 망군대를 거쳐 고적대에 이르는 지나온 대간길.

# 가야 할 갈미봉 방향 능선.

# 고적대 정상석.

고적대는 지리산 만복대와 더불어 '대(臺)'란 이름을 가진 산이다. '대(臺)'란 높이 솟은 암봉(巖峯)이란 뜻이다. 해발 1,353.9m이다.
고적대(鼓笛隊)와 한글 발음이 똑같아 선답자들이 종종 나팔 불고 북치는 이야기를 한다. 고적대는 두타산, 청옥산과 더불어 '해동삼봉(海東三峯)'이라고 한단다. 전망이 너무나 훌륭해 내려가기가 싫다. 배낭 벗어두고 정상석에 걸터 앉아 간식먹고 20여 분 푹 쉰다. 홀로 돌아간 마눌이 걱정되어 전화기를 꺼내 보지만 역시나 불통지역이다.
해동삼봉을 다 보았으니 오늘 산행은 이쯤으로 족하다 싶지만, 갈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 지도에는 고적대 정상에서 갈림길이 있고 길주의 구간이라고 표시해 두었지만 가야 할 길이 너무나 확연하여 길잃을 염려는 없다.
고적대 내리막 역시 틀림없이 올라온 만큼 내려 가야한다. 아주 경사지고 가파르게 올라 왔으니 당연히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고 위험하다. 게다가 등로가 해빙기 현상으로 질척거리고 미끄러워 상당히 주의해야 한다.
이곳 내리막 역시 철쭉밭 사이로 길이 나 있어 잔가지에 긁히고 붙들리면서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면서 가야 한다. 그러다 한순간 앞이 툭 트인 곳이 나타난다. 전방의 갈미봉으로 가는 능선이 한눈에 조망되고 우측으론 깎아지른 절벽, 좌측으론 완만한 경사의 전형적인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 잡목숲을 벗어나 한순간 이렇게 전망이 툭 트인다.

# 좌측 멀리 이기령, 원방재로 이어지는 임도가 보인다.

갈미봉 가는 길은 온통 키 낮은 철쭉 군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안부까지 철쭉가지에 긁히면서 내려가자 조금 전 툭 트인 전망대에서 봤던 암봉이 나타나고 목책으로 안전장치를 해 두고 나무벤치를 만들어 두었다.
# 나무벤치에서 본 암봉의 모습.

아래쪽으론 무릉계곡이 내려다보이고, 전방의 암봉을 피해 등로는 이어진다. 잠시후 '고적대 삼거리'가 나온다. 지도에는 '사원터 갈림길'이라고 적혀 있다.(11:45)
# 고적대삼거리. 백곰님의 표지기가 보인다.

곳곳에 이정목들이 세워져 있는데 모두 최근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하나 보다. 이후 암봉 하나를 낑낑대며 올라섰다.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 오름만 만나면 죽을 지경인데, 오늘 구간은 아무리 작은 오름이라도 올랐다 하면 반드시 그만큼 도로 내려간다.
다시 암봉 하나를 우회하여 진행했다. 봉우리를 우회하는 곳은 갈미봉 지나 1142.8봉 우회로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미 갈미봉을 지나 왔다는 말인가? 갈미봉은 육산으로 되어 있고 삼국지산악회에서 만든 팻말이 있다고 했는데...
지쳐 판단력이 떨어져선지 독도가 힘이 드는데 멋진 소나무가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도를 확인하니 갈미봉 지나 전망대가 나온다고 되어 있다. 그래 맞다! 갈미봉을 이미 지나왔다.
# 갈미봉으로 착각한 가파른 암봉.

# 암봉을 지나와서 돌아다 본 모습.

#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암봉.

# 고목 하나가 쓰러져 대간길을 막고 있다. 그러나 높이가 워낙 높아 구부릴 필요가 없다.

# 지도에 없는 이 전망대 때문에 갈미봉을 지난 것으로 착각.

전망대를 지나 안부를 지나고 완만하고 길게 이어지는 흙 비탈길을 낑낑 올라서니, 얼씨구? 삼국지 산악회란 다소 의아한 이름을 가진 산악회에서 매어둔 팻말이 있는 '갈미봉' 정상이 나타납니다.(12:37)
# 뒤늦게 나타난 갈미봉 정상.

시간 지체가 심해 거리 계산에 실패했고, 몇 군데 독도 어려운 지형을 희망섞인 예견으로 지레짐작으로 판단을 해서 갈미봉을 지나온 것으로 착각했나 보다. 지도를 믿어라! 마음 먹고 싶은 대로 판단하지 마라! 는 백두대간 수칙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갈미봉은 지도상에 길주의 구간으로 나와있는데, 정상 팻말 뒤쪽으로도 길이 있지만 그 길은 수병산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나간다.
오늘 구간의 특징대로 또다시 가파른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올라갔던 높이를 다 까 먹었다 싶을 때쯤 안부를 잠시 진행하다 다시 오름이 시작된다. 그 오름 중간에 좌측으로 툭 트인 전망이 나오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이 지도에서 '전망대'로 표시한 곳이다.
# 갈미봉 안부에서 전방의 무명봉과 그 뒤의 1142.8봉

# 전망대에서 바라 본 갈미봉 능선. 우측으로 뻗은 능선이 수병산으로 이어진다.

전망대가 있는 무명봉을 올랐다가 다시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다. 내리막길은 군데군데 통나무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완전히 내렸다가 다시 1142.8봉의 오름이 시작되려는 순간 대간길은 산의 좌측 사면으로 우회하게 되어 있다.
옳타쿠나! 편하게 한번 가 보자! 그러나 이 사면길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아서 긴 너덜길이 계속 이어진다. 무릎이 시큰거려서 막 짜증이 난다. 무릎보호대를 찰까? 귀찮다, 일단은 좀 더 견뎌 보자!
사면이 아주 길게 이어지다 산의 주 능선과 합류하고 다시 아래로 계속해서 떨어져 내린다. 너덜길을 계속 걷다가 내리막을 내리자니 무릎이 너무 아파서 견디기 힘들다. 곧, 나무벤치 두 개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가 나온다. 아이구! 반갑다! 벤치에 배낭 벗어 놓고 점심식사를 했다.
# 1142.8봉 내리막의 쉼터.

간밤에 사 두었던 삼각김밥과 한라봉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지치고 혼자서 먹는 밥이라 영 맛이 없어서 반쯤 먹다 말고, 스프레이 파스 꺼내서 종아리와 아킬레스 건에 칙칙 뿌려주었다.
아이고! 오늘은 참으로 힘든 날이다. 평소 체력이 부실하고 산 타는 실력이 없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40여분 푹 쉬고 출발해 보지만 회복이 되질 않는다.
쉼터에서 이기령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나 길고 먼 길이다. 숲을 벗어나자 산의 좌측 사면으로 넓은 개활지가 나오고 하얀 자작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는 지도상 '개간지'가 나온다.
개간지 너머엔 쭉쭉 뻗은 잘생긴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소나무 군락을 지나고, 하얀 돌로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어 둔 곳도 지나게 된다. 참 특이한 광경이다. 이 길을 대간꾼들 외에 또 누가 걸을 것이라고 이렇게 단장해 두었을까? 이후 편안한 오르내림을 이어 '838봉'을 지나 '이기령'에 도달했다.(14:40)
# 잘 생긴 소나무들의 위용.

# 돌을 깔아 구불구불한 하얀 길을 만들어 두었다.

# 이기령.

뜨거운 햇볕이 가득한 이기령엔 좌측으론 개간지에서 시작된 임도가 내려와 만나게 되고 우측으론 이기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져 있다. 넓은 공터엔 백두대간 안내판과 벤치가 만들어져 있다. 전방에 상월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임도를 따라 원방재까지 우회해 버릴까하는 유혹이 생긴다.
이기령엔 햇볕이 너무 뜨거워 서둘러 970.3봉 오름으로 들어섰다. 오름은 가파르지 않으나 참으로 길고도 먼 길이다. 등로가 곧게 정상을 향해 이어지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조금씩 고도를 높이고 있다. 솔바람이 숲속 가득 불고 있어 시원하고 아주 좋다. 정상 부근 가파르게 한번 차고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있는 '970.3봉'에 오른다.(15:14)
어라? 그런데 이곳에 상월산이란 이정목이 세워져 있네? 아마도 선답자들이 '가짜 상월산'이라 부르는 곳인가 보다.
# 970.3봉/가짜 상월산.

헬기장 우측으로 이어져 있는 대간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 이내 내리막길이 나타나는데, 가파르기가 장난이 아니다. 길고 편안하게 올랐던 오름을 이곳에서는 급하고 가파르게 내려가는 것으로 상쇄한다.
중간에 목책으로 우측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 둔 곳이 나오더니 다시 급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려 안부에 닿는다. 이곳도 우측으론 천길 낭떠러지가 펼처져 있고 목책으로 막아 두었다.
내려온 길을 올려다 보니 까마득하다. 정말 오늘 구간 대단하다. 그동안 대간을 하면서 마루금이 오르내리기가 예사이지만 대부분 한번 오름을 오르면 오른 그 높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바닥까지 떨어져 내렸다가 다시 올랐다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 구간은 한번 올랐다 하면 반드시 그 높이만큼 떨어져 내리고 다시 그 높이만큼 올랐다가 틀림없이 오른만큼 떨어져 내린다.
# 우측 가짜 상월산 내려온 길과 그 앞의 암봉.

안부에서 다시 상월산을 향해 오르는 길은 무지무지한 급오름이다. 한걸음 한걸음 올릴 때마다 낑낑 소리가 절로 난다. 막판엔 코가 땅에 닿을 지경이다.
상월산 정상 근처쯤 오니 갑자기 우측 동해 방향에서 짙은 해무가 밀려 오더니 강풍이 불어 재끼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10여 분 전에 햇볕이 너무 뜨거워 모자를 눌러 썼는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상월산 정상에 이르자 급기야 몸을 가눌 수 없는 강풍이 몰아친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모자의 목끈을 꽉 조여 놨더니 모자가 바람에 뒤로 젖혀져서 끈이 목을 조여 캑캑~ 소리가 나게 만든다.
그런데 상월산 정상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상월산의 상징인 고사목이 뿌리채 뽑혀서 대간길을 가로막고 드러 누워있다. 할 수 없이 옆으로 돌아서 '상월산' 정상에 올라갔다.(15:45)
# 상월산 정상의 고사목이 뿌리채 뽑혀 입구를 막고 있다. 아마 오늘 강풍에 넘어진 듯하다.

정상 앞쪽으론 천길 낭떠러지인데 목책으로 막아 두었지만 강풍이 워낙 거세 자칫하다가는 아래로 날려 갈 기세다. 아래로 떨어진다면 올 겨울 쯤에나 바닥에 닿으려나? ^^*
강풍 때문에 잠시도 정상에 있을 수가 없다. 서둘러 한 손으로 모자를 눌러 잡고 정상을 빠져 나왔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비가 더 오기 전에 원방재까지 일단 도착할 생각으로 속도를 높인다.
좌측으로 꺾여서 능선길을 내려 가다가 다시 오르내림을 몇번 반복하는데, 강풍은 점점 거세지고 빗줄기 역시 점점 굵어진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는데... 시어머니 변덕같은 봄철 날씨라는 옛말을 증명할려나?
좌측으로 내려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꺾여서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숲속엔 해무로 뿌옅게 시야가 흐리고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숲을 벗어나자 원방재다.(16:15)
# 해무로 뿌옅게 흐려진 소나무 숲속.

# 원방재. 표지기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좌측 임도로 탈출했다.

배낭에서 쟈켓 꺼내 입고 후드모자 뒤집어 쓰고, 비닐봉지로 카메라와 지도 등을 감싸고 배낭커버도 씌운다. 다행히 채비를 다 갖추고 나니까 비가 좍좍 쏟아진다.
휴대폰을 꺼내 보지만 안테나가 전혀 잡히질 않는다. 앞으로 백복령까지 3시간 30분 정도 더 걸린다면 8시 가까이 되어야 백복령에 내려 설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빗속을 뚫고 산을 오르 내릴 자신이 없다. 게다가 산 정상쪽엔 강풍까지 불고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하는 미련에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고민을 하다가 지난번 하늘재 모임때 Dalane님이 오늘 구간이 마지막까지 바닥까지 내렸다 오르기를 반복해서 너무 힘들더란 얘기를 들은 생각이 났다. 결국 이곳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원방재에서부터 임도는 대간길과 멀리 떨어져 부수베리까지 갔다가 가목리를 거쳐 군대까지 내려가서 42번 국도와 만나게 되어 있다. 거리가 6.75km쯤 되니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면 도착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방재에서 대간을 벗어나 임도에 내려섰다. 빗줄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원방재 임도 곁 수로엔 물이 어느새 콸콸 흘러 내리고 있다. 만약 야영을 한다면 이곳이 적격일 거란 생각이다.
뛰다시피 속도를 높혀 임도를 걸어 내려 가는데 임도 좌측으로 맑은 계곡물이 절경의 바위 반석들 사이로 콸콸 흘러 내리고 있다. 여름철 휴양지로 그만인 것 같다.
부수베리를 지나 한참 내려가자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철조망으로 완전히 도로를 차단해 두었는데, 다행히 누군가 한쪽을 터 놓아 빠져 나갈 수 있다. 가목리쯤 가자 우측으로 그림같은 전원주택들이 몇 가구 보인다. 음~ 이런 곳에 집을 갖춰 사는 것도 좋겠다!!!
어느새 비가 그치더니 하늘 한쪽이 트이고 햇살까지 조금씩 보인다. 이게 뭐야? 무슨 날씨가 이 모양이야??? 이렇다면 그냥 대간길을 진행하는 것이 옳았다는 얘기 아냐? 우와~~ 미치겠다!!!!
지도 꺼내 확인하니 대간길에 복귀하자면 계곡으로 올라가서 대간길의 1022봉 너머 안부로 진입해야 하는데 길도 없는 숲속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아이구, 그만 두자. 다음에 정확하게 땜빵을 하자!
가목리 마을 있는 곳에 거의 오자 비로소 휴대폰이 터진다. 백복령에 있는 마눌과 연락이 되어서 군대분교가 있는 쪽으로 오라고 전했다. 잠시 후 군대분교 앞 다리있는 곳에서 마눌과 접선했다.
백복령 휴게소에 있었는데 아침에 만났던 원주산악회 분들은 5시 좀 지나 내려와서 같이 있었고 젊은 산꾼들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분들은 비 맞고 계속 진행해서 백복령에 접근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그냥 진행했어야 하는데... 그러나 상월산 정상의 강풍이 너무나 무시무시했고, 원방재에서는 비가 쫙쫙 내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눌 당신 아침에 탈출하기 정말 잘했다. 같이 끝까지 진행했다가 저 비를 만났다면 폐렴이 심해져 틀림없이 입원해야 했을 거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나는 그날 비 맞고 1시간 반 동안 걸은 덕분에 목의 염증이 심해져 병원 다니며 주사 꽉꽉 맞고 있다.)
쟈켓이 고어택스가 아니라 생활방수 수준이어서 상의는 흠뻑 젖어 버렸다. 차에서 여벌 옷으로 갈아 입고 덜덜덜 떨리는 몸을 침낭 속에 집어 넣었다. 마눌! 아무래도 운전은 당신이 해야겠다.
임계 거쳐 정선으로 가다가 진부로 올라가 영동고속도로에 합류해서 가다가 정체가 심한 여주에서 탈출해서 국도로 이곳저곳 거쳐 집에 들어오니 자정이다. 출발할때 체크해둔 자동차 거리계는 정확히 600km를 가리키고 있다.
그나저나 남아 있는 원방재 ~ 백복령 구간은 도대체 어떻게 땜방 한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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