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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올레 - 등짐 내려놓기!! 본문

길이야기/제주 올레길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올레 - 등짐 내려놓기!!

강/사/랑 2017. 9. 27. 17:58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올레



제주 올레길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2013년 시월이었다. 계절은 가을이었지만, 명목은 여름 휴가였다. 뒤늦은 휴가를 올레길 걸으며 보낼 생각으로 입도(入島)하였다. 그때 나는 장경인대염(腸脛靭帶炎)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산악자전거를 너무 무리하게 타다 양쪽 다리 모두에 장경인대염이 걸린 것이다.


제주 올레는 바닷가를 중심으로 조성된 길이라 높낮이가 적다. 부상 당한 다리로도 충분하리라 여겨졌다. 하지만 야영에 대한 열망은 버리지 못해 아픈 다리 무릅쓰고 야영 짐을 지고 걸었다. 다리가 버텨주기는 했지만, 무게의 부담은 내내 있었다.


처음 올레길에 나선 날 우리는 어두운 밤중에 1코스 출발지인 시흥리에 도착했다. 캄캄한 시골길이라 이마에 등불 밝히고 올레를 시작했다. 두산봉(頭山峰) 아래에 있는 작은 정자가 목적지였다. 밤이 꽤 깊어서 그곳 정자에 도착하고 헝겊집 한 채 세운 후 야영하였다. 밤새 노루 울음소리 요란했다.


그런데 우리가 야영한 두산봉 입구는 꼭 1년 전에 살인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올레길 개설 이후 발생한 첫 강력사건이라 온 나라가 시끄러웠고 1코스가 잠정 폐쇄되기도 했었다. 마눌이 알면 놀랠까 봐 비밀로 하였다가 1코스 다 걷고 나서 알려주었다. 원망 조금 들었다.


이듬해 오월에 다시 올레길에 나섰다. 3코스인 온평리로 가기 위해 700번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 버스는 동일주(東一周)가 아니라 서일주(西一周)버스였다. 온평으로 가기는 하지만, 제주도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아야 하는 것이다. 좌우 구별을 못한 초보 버스기사의 실수였다. 덕분에 3코스가 아니라 예정에 없던 12코스를 걸었다.


엉뚱한 코스를 걷기는 했지만, 수월봉에서 만난 월봉낙조(月峰落照)는 환상 그 자체였다. 그 밤 수월봉 정상에서의 야영도 좋았다. 문제는 뒷날이었다. 그날은 제주의 허파인 곶자왈을 걸어 모슬포까지 가는 11코스를 걸었다. 곶자왈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보에 없던 비라 우리는 비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처음에는 동네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종이박스를 뒤집어쓰고 걸었다. 하지만 종이가 비에 오래 버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윽고는 농장에 버려진 비닐을 주워 임시 비옷을 만들었다. 왜국(倭國)의 몰락한 사무라이 같이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비에 흠뻑 젖어 모슬포에 도착했다.


그해 구월에 여름 휴가를 받아 다시 올레길에 섰다. 이번에는 정확히 확인하여 3코스 온평리로 갔다. 태풍의 영향으로 제주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3코스는 코스 길이가 22km다. 아주 긴 코스다. 구간 삼 분의 이 정도는 오름이나 중산간 지대이고 나머지는 해안 길이다.


제주의 해안에는 어디나 조망 좋은 쉼터나 정자가 있다. 그런 곳 나타나면 야영할 작정이었다. 해안 길 들어서기 전에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야영을 위해 마을 슈퍼에서 식수를 충분히 챙기고 음식물도 잔뜩 구입했다. 어두운 온평리 바닷가에 도착하여 야영지를 찾았다.


그런데 온평리 해안은 전부 광어양식장뿐이었다. 쉼터도 정자도 없고 캄캄한 바닷가에 양식장 건물만 나래비를 서 있었다. 결국, 표선까지 내처 걸었다. 중간에 야영할 작정이어서 물 무게와 음식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 무거운 등짐 지고 캄캄한 밤길을 6km나 걸었다. 표선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힘든 밤이었다. 뒷날은 23km를 걸었다. 그 가을 올레는 힘든 기억이 전부였다.


2015년 2월. 한라산 심설산행(深雪山行)을 위해 제주로 들어갔다. 특별히 휴가를 얻은 것도 아니고 그냥 주말 이틀을 이용했다. 토요일 일찍 제주에 도착하여 공항 근처 올레를 한 코스 걷고 뒷날 일요일에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이월의 제주는 온화하였다. 이미 봄이 온 듯하였다. 쾌적하게 한 코스 걷고 제주 시내 찜질방에서 하룻밤 묵었다. 뒷날 일찍 일어나 한라산으로 향하는데, 간밤 한라산에는 폭설이 내렸고 한라산으로 향하는 모든 길은 통제 중이었다. 뜬금없는 폭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올레길을 다시 이었다. 하지만 올레에도 어제와는 달리 눈보라 가득하였다. 하루 사이로 봄과 겨울이 교차하였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해 오월에 다시 연휴가 생겼다. 올레길 걷기 좋게 된 것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짐 챙겨 공항으로 갔다. 가다가 검색하니 국내선 주차장은 만차이고 국제선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눌의 주장이었다. 국제선 주차장에 주차하고 등짐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김포공항 국제선과 국내선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셔틀이 있기는 해도 시각이 맞지 않았다. 무거운 등짐 지고 뛰었다. 땀 뻘뻘 흘리며 공항 발권소에 들어서니 우리 비행기는 이미 발권이 끝나 있었다. 티켓 취소하고 수소문하니 바로 뒤 비행기에 좌석 하나가 있고 두 시간 뒤에 다시 빈 좌석 하나가 있었다.


마눌 먼저 비행기 태워 보내고 나는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다가 제주공항에서 재회(再會)하였다. 항공여행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두려움이 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렇게 나눠타고 다니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했더니 다들 비웃었다.


이번에는 공백이 길었다. 2014년 올레길을 시작한 이후 6개월 정도의 간격으로 올레길에 나섰는데, 2015년 5월 이후 2년 넘게 올레길에 갈 기회가 없었다. 여러 사연이 많았던 탓이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든 시절이 길었던 것이다.


그 시간을 보내고 다시 올레길에 나섰다. 올해는 처음으로 여름 햇살이 식기 전에 제주로 입도하였다. 제주의 여름 뙤약볕은 엄청났다. 종아리 화상과 사타구니 부상을 동시에 입었다. 그리고 해안의 올레길을 걷다 정강이에 꽤 심한 부상도 입었다. 


그런 스트레스 심한 몸 상태로 바람골에서 깜빡 졸았다가 심각한 저체온증도 겪었다. 하마터면 병원에 실려 갈 뻔한 심각한 상태였다. 거기다 마눌은 발바닥 모두에 물집이 생겨 걷기 어렵게 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부상병이 된 것이다. 올레길 최대의 위기였다. 무거운 등짐 포기하고 일정에 대한 욕심을 버려 해결하기는 했지만 아찔하였다.


가만 돌아보면 우리가 걸은 올레길은 남들과는 많이 달랐다. 우여곡절 많고 사건 사고 많았다. 남들은 놀멍쉬멍 편하게 올레길을 걷는데, 우리는 무슨 고행(苦行) 하듯 그 길을 걸었다. 남들에겐 가벼운 산책길인데, 우리에겐 고행의 순례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원칙과 욕심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 관광객 모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리 지어 다니거나 남이 짜놓은 스케쥴 따라 움직이는 것에 익숙지 않다. 그리하여 뭍에서 걸었던 산길과 들길, 그리고 사람 사는 동네 구경 대부분을 의식주 갖춘 등짐 지고 다녔다. 


처음 올레를 준비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제주의 푸른 밤이었다. 등짐 지고 길을 걸으면 내 마음 내키는 어디든 집 짓고 쉬면서 제주의 푸른 밤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원칙(原則)은 올레 전 구간을 야영으로 마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영은 필연적으로 무게와의 싸움을 동반한다.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등에 짊어지고 다니자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의식주를 최대한 간소하게 하면 무게를 최소화할 수는 있다. 좀 춥게, 좀 배고프게, 좀 허름하게 준비하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좋은 주거 환경과 맛난 식도락을 포기 못했다. 아직 야외 생활 익숙치 않은 마눌을 위해서도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등짐은 언제나 부피 크고 무게 육중하다. 그 무게 온몸으로 전해지니 이런저런 문제가 늘 따라왔다. 그 결과가 그동안 우리가 겪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었다.


욕심 버리고 무거운 등짐 내려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평생 버리지 못하고 내리지 못하지 싶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어리석은!

 

 


등짐 내려놓기!!


구간 : 제주 올레길 16코스(고내~광령)
거리 : 구간거리(16.3km), 누적거리(319.8km, 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9월  2일. 흙의 날.
세부내용 : 고내포구 ~ 다락쉼터 ~ 신엄리포구 ~ 남도리쉼터 ~ 남두연대 ~ 애월 돌고래전망대 ~ 구엄포구 ~ 구엄동길 ~ 일주서로 ~ 수산봉 ~ 수산저수지 ~ 수산천 ~ 예원동복지회관 ~ 예원교차로 ~ 항파두성 ~ 항몽유적지 ~ 항몽유적지휴게소 ~ 인증소 ~ 고성6길 ~ 비버리힐스 ~ 제주 루터교회 ~ 광령초등학교 ~ 광령1리사무소.


  

금성리 정자에서의 밤은 환상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올레길 걸으며 확보했던 야영지 중 최고의 장소였다.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곶부리에 위치한 점, 올레길에서도 몇 발자욱 벗어나 있는 점, 난 바다를 향해 넓은 조망을 주는 점, 바람 부는 곳이었으나 미친 듯한 강풍 아니어서 모기 없고 시원하였던 점, 무엇보다 차갑고 깨끗한 민물이 샘 솟는 곳이란 점이 최고의 장점이었다.


다만 밤중에는 파도가 높아 샘 안으로 너울이 덥쳐들고 있었다. 알탕으로 땀을 씻고 싶었으나 파도 높아 이행하지 못했다. 겁이 났던 것이다. 그것만 제외하면 어느 하나 나무랄 곳 없었다. 마눌의 만족도 역시 아주 높았다.


멋진 장소이다. 나중에 자전거로 제주 일주할 때 다시 한 번 야영하고픈 곳이다. 찜해 두었다.


 

항몽유적지/抗蒙遺蹟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최후의 항몽유적지(抗蒙遺蹟址). 제주도 기념물 제28호. 현재 15리에 이르는 토성(土城)과 삼별초(三別抄) 군사들이 궁술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살맞은 돌’, 성의 건물 문지였던 ‘돌쩌귀’,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파여서 샘이 솟는다는 ‘장수물’, 삼별초 군대가 급수로 이용한 ‘옹성물’·‘구시물’, 옥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유적지는 1977년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총화단결을 다짐하는 뜻에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석성(石城)인 내성(內城)이 위치했던 9천여 평의 경내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는 등 성역화되었다.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 군대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0년(원종 11) 11월 3일 이문경(李文京) 부대의 제주 명월포(明月浦) 상륙이었다. 이문경 부대는 이미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관군(官軍)과 송담천(松淡川)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제주도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1271년(원종 12) 5월 김통정은 진도의 용장성이 무너지자,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갔다. 이 항몽유적지는 1273년(원종 14) 4월 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원장(元將) 흔도(忻都)가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제주 올레길 16코스 고내광령 올레 개념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우리가 하룻밤 보낸 금성리 정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제주에서 만난 수십 곳 야영지 중 단연 돋보이는 곳이었다. 길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고 난바다를 바로 정면으로 두었으되 바람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무엇보다 바로 곁에 맑은 민물이 솟아나고 있어 식수는 물론 알탕도 가능한 점이 최고의 야영조건이었다.




# 편안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동쪽 바다 멀리 아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 좌측 금성포구와 한림쪽 바다 위로도 아침 노을빛이 어렸다.




# 파도 잔잔하고 바람 없는 아침이다.




# 정자 바로 곁에 이렇게 맑은 물이 솟아 나고 있다. 간밤에는 파도가 높아 저 샘물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간밤 알탕이 아쉬웠는데 이 아침 파도 잔잔하여 바닷물에 잠깐 몸 담근 후 민물에 풍덩 뛰어들어 알탕을 즐겼다. 단물이었다. 




# 제주 최고의 야영지인 이곳 정자는 이렇게 생겼다.




# 바닷가 바로 곁에 야영지를 잡아 바람 걱정 때문에 가이로프를 꽁꽁 묶었지만, 전혀 필요가 없었다. 간밤 바다에는 바람이 꽤 불었는데 이곳은 바람의 영향권 밖이었다.





# 떠나기 싫은 곳이라 짐 정리하고도 오래 머물며 쉬었다.





# 이곳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는 또 오늘 하루의 일정이 있는 몸이다. 가볍게 스트레칭하여 몸 풀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





# 우리는 이 고생 보따리 둘러메고 산길은 물론 이곳 제주의 올레길도 함께 걷고 있다.





# 최고의 쉼터에게 작별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 찜해 두었다. 나중에 자전거 일주할 때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 더 머물 작정이다.




# 16코스 출발지인 고내 포구로 이동하였다. 16코스는 이곳 고내를 출발하여 애월의 해안길을 걷다가 구엄 포구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하였다. 이 해안도로는 고갯길처럼 고도를 높여가며 오르게 되어 있다. 그곳 해안가에 항몽기념비가 서 있다.




# 삼별초의 항몽(抗蒙) 흔적이 이곳에도 있다.




# 고내포구와 그 일대의 해안을 돌아본다.




# 난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해안절벽이다.





# 제주 일주 자전거도로 인증소가 있다. 나중에 자전거로 다시 저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언덕 위에 정자가 있다. 이곳은 다락쉼터라 부른다. 다락같이 높은 곳에 있는 쉼터란 말일 것이다.




# 난바다를 향하고 있어 바람이 아주 거세다.




# 바다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다.




# 이 도로는 하귀애월 해안도로이다. 올레는 계속 이 도로를 따른다. 이쯤에서 마눌이 손을 들었다. 마눌은 진작에 양쪽 발바닥 모두에 물집이 대여섯 개 생겼었다. 물집 터뜨리고 약 바른 후 밴딩해 주었는데, 어제는 어찌어찌 걸었지만 오늘은 도저히 못걷겠는 모양이다. 그래서 마눌은 고내포구로 돌아가 자동차 운전하여 종점으로 미리 가있기로 하고 이 코스는 나 혼자 걷기로 했다.



# 해안도로를 돌아 내려가자 멀리 신엄리포구가 보인다.




# 시간이 갈수록 햇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 바닷가라 시원한 바람은 불어주고 있다.




# 신엄리 포구에서 올레길은 도로를 벗어나 해안가 산책로를 따르게 되어있다.




# 신엄리(新嚴里)는 '새엄쟁이'의 한자 표기이다. 예전에 엄장이 마을이 있었는데 세 개로 갈라져 구엄쟁이, 중엄쟁이, 새엄쟁이로 분화되었다 기록되어 있다. 엄쟁이가 무슨 뜻일까 궁금하였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염(鹽)쟁이' 즉 소금에서 나온 말이다. 이 동네는 예전에 제주 특유의 돌염전이 있던 마을이었다. 엄쟁이는 '소금 염'에서 변형된 말이었다.




# 신엄리 포구 안쪽 바다. 물빛이 아주 맑다.



# 이곳에도 민물이 솟아나는 용천수가 있다.



# 제주 전통 배인 태우를 복원해 두었다는데 너무 허술하여 진짜 원형대로 복원하였는지 의심스러웠다. 




# 햇살 강렬한 해안 길을 따라 진행하였다.





# 해안 길이 끝나고 올레는 다시 언덕 위로 올라 가게 되어 있다.




# 다행히 차도로 걷는 것이 아니라 풀숲 속으로 길이 나있다. 




# 언덕 위는 조망이 좋은 곳이다. 돌아보면 지나온 해안이 한 눈에 들어온다.




# 간간이 산책 나온 사람들이 그늘에서 쉬고 있다.




# 이 언덕 위의 사람들은 일년 내내 강렬한 햇살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 것 같다.




# 난바다 쪽으로 완전한 일자의 수평선이 펼쳐진다.




# 이 바다 너머에 추자도가 있다.




# 희미하게 섬들이 보인다. 아마도 추자도 인듯하다. 정면에 보이는 저 섬은 추자와 제주 사이에 있는 대관탈도이지 싶다.





# 난바다를 보고 있는 언덕이니 침입하는 적을 관찰하기 위한 망루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언덕 끝에 남두연대가 있다.




# 내가 걸어 내려가는 언덕 길을 자전거 탄 부부가 올라 가고 있다. 부인이 언덕에서 힘들어하자 남편이 손 내밀어 밀면서 그 언덕을 극복하고 있다. 보기 좋은 광경이다. 우리도 이 올레길 끝나고 나면 다시 자전거로 제주 일주를 해야 한다.




# 시원한 바닷바람 불고 있지만 햇살은 아주 강하다.




# 구엄포구 쪽 조망이 시원하다. 올레길은 구엄포구까지 계속 해안길을 따라 이어진다.




# 신엄리 바닷가에 화산 지형의 전형적인 형태를 가진 해안절벽이 있다.



# 이곳은 애월 돌고래 전망대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제주 해안, 제주 바다의 전형이다. 햇살 강하고 바람 강한 그곳에서 오래 경치 구경하며 쉬었다.





# 주로 산이나 들에서 피는 무릇이 이곳 제주 해안에 꽃을 피웠다.




# 언덕 위에는 이국적 풍경의 호텔이나 리조트가 즐비하다.






# 애월 해안로 길게 걸어 구엄포구에 도착했다. 규모 작지만 어선들 풍랑 피해 피항하기에 적합해 보였다.




# 올레길은 이곳 구엄포구에서 해안을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가게 된다.




# 이정표에 구엄4길이라 적혀 있다. 올레는 구엄리 안쪽 마을 길을 구불구불 이어간다.




# 마을 안쪽 언덕 위에 우산 모양의 나무 한 그루 특징적이다.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劉備)는 탁현 누상촌(樓桑村) 출신이다. 누상촌이란 이름은 동네에 우산 모양의 뽕나무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이 동네에도 높게 될 인물이 날 모양이다.




# 똑 같은 모양의 주택이 도로 양쪽으로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주택 건설업자가 다른 듯하다.



# 마을이 끝나는 곳에 오름 하나가 우뚝하다. 넘어야 할 수산봉이다.




# 제주 북일주도로인 1132번 지방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교통신호 기다렸다가 건널목 통해 길을 건넜다.




# 수산봉 우측으로 올레길은 이어진다.




# 오름 바로 앞에 포장도로가 있다. 이 포장도로가 산을 완전히 한 바퀴 휘감고 있다.




# 도로 따르면 금방이겠지만, 오름을 올라 봐야지!





# 주의사항이 많다.




# 숲이 햇빛을 막아 주어 숨 쉬기가 편하다.





# 정상은 금방이다. 제일 꼭대기에는 통신시설이 있다. 체육시설과 휴식공간을 만들어 두었는데 관리가 잘 안되어 깔끔하지는 않다.





# 곳곳에 시를 새긴 돌비를 세워 두었다. 최문자 시인의 '닿고 싶은 곳'이란 시이다.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 종종거리다가 /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 아름다운 듯 서 있다. /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최문자 시인은 서울 출생이다. 그의 시가 이 먼 곳 제주의 작은 오름에 비석으로 서 있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시어처럼 살아 있어 서 있고 참을 수 없는 무게로 정신의 땀을 흘린다는 말에 공감할 따름이다.



# 좋은 이 공간을 그냥 방치하지 말고 관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한 바퀴 휘감아 위로 오르면 정상이다. 그리고 올레길은 곧바로 아래로 떨어진다.




# 조망 없는 수산봉을 넘어 아래로 내려 갔다.




# 오름을 내려서면 오히려 조망이 열린다.




# 수산저수지가 나타난 것이다. 아담한 오름과 그만큼 아담한 저수지가 서로 잘 어울리는 곳이다.




# 구엄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곧바로 이 저수지로 통하고 있다. 따라서 소금기 머금은 바람 가득하다.




# 우측 멀리 한라산이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 날틀 한 대가 그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고 있다.




# 경치 좋은 곳이다. 다만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늘 견뎌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 그래서인지 좋은 자연환경에 비해 주변이 황량한 느낌이다. 원래 북풍은 환경을 황량하게 만든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찬바람 강한 동네를 종종 만난다. 그런 곳은 종종 바람과 관련된 이름을 가졌다. 바람재, 바람머리 등등... 그런데 그런 곳은 대부분 농장이나 마을이 폐허만 남고 황량해진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강한 바람골이 풍요롭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 이 집도 인적 끊어진지 오래여서 사람 사라진 곳을 담쟁이가 차지하고 있다.




# 수산저수지를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수산1교가 있다. 그 다리 우측에 수운교 수산지부가 있다. 수운이라면 최수운(崔水運), 즉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崔濟愚)를 말한다. 천도교 외에 수운교가 또 있었나? 자료를 찾아보니 일제시대인 1923년 경주 출신인 이상용(李象龍)이란 이가 창립한 동학계의 신종교라고 나와 있다.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가 개칭하여 재탄생토록 한 것이 1905년이니 천도교가 활동하고 있는 와중에 새로이 수운의 재생과 부활을 외치며 포교한 종교인 모양이다.




# 이 동네에는 수산봉 위에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시비가 곳곳에 서 있다.




# 수산리 일대의 마을 길과 들길을 구불구불 휘감아 돌았다.




# 그러다 예원교차로를 만났다. 1136번 지방도가 올레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 도로를 건너 야산 아래로 접근하자 '장수물'이라 적힌 팻말이 있다. 장수물은 고려때 항몽투쟁을 한 삼별초(三別抄)의 김통정 장군의 발자국에서 솟은 샘이란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올레는 장수물 쪽이 아니라 좌측으로 산길을 따르라고 한다.




# 올레길은 도로 가까이 접근하자 곧장 다시 우측 산속으로 들어가라 한다.




# 




# 작은 고개를 넘자 '항파두성'이 나온다. 항파두성(缸坡頭城)은 삼별초가 항몽 전쟁을 위해 쌓은 토성이다. 성이 있는 동네라 이곳의 주소는 애월읍 고성리이다.




# 항파두성은 저수지 둑처럼 생긴 토성이다.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린 김통정(金通精)장군은 고려 원종 12년인 1271년 5월 이곳 애월 고성리에 항몽을 위한 성을 쌓았다. 내성은 사각형의 석성이었고 외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구축한 토성이었다. 그 길이가 15리이고 성안의 면적은 30만평 정도 되었다.




# 토성 끝 무렵에 우측 산 위로 올라 가는 길이 열려 있다.




# 수풀 우거진 데크 길이 고개를 넘게 되어 있다.




# 고개 정상에는 정자 쉼터가 있다.




# 정자에서 돌아보니 멀리 애월 바다가 보인다.




# 고개 너머에는 항몽유적지가 있다.




# 이곳 유적지는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 항몽유적지는 발굴 작업 중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길 건너 항몽유적지 휴게소에 잠깐 들러봤다.




#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私兵)으로 출발했다가 경찰과 전투 등 공적 조직으로 발전한 군대이다. 1270년 고려가 몽고에게 항복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 진도(珍島)를 본거지로 삼 년 동안 싸우다가 제주로 넘어갔고 1273년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휴게소 벽에 삼별초의 전투 장면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물 마시고 한 숨 돌리며 휴식하였다. 이윽고 길을 나서는데 넓은 코스모스 화원이 길손을 반긴다.




# 젊은 커플이 코스모스 화원에서 웨딩촬영 중이다. 그 모습 예뻐서 한참 구경했다.




# 우아한 귀부인 풍의 코스모스도 있다.




# 스템프 찍는 곳이 있어 빈 종이에 스템프 확인했다.




# 도로를 건너면 숲속으로 올레길은 이어진다.



# 잠시 진행하면 넓은 콩밭과 경계를 이루는 토성이 다시 나타난다.




# 토성을 따라 남동진하였다.




# 토성 위에 뿌리 내린 저 소나무는 얼마 동안이나 저곳에 서 있었을까?




# 토성이 대문처럼 열려 있는 곳을 통해 넘어갔다.




# 성곽은 우측으로 계속 가고 올레는 밭 가장자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 멀리서 바라보니 성곽의 위용이 대단하다. 저 정도 높이와 규모이면 얼마든지 농성(籠城)이 가능해 보인다.




# 수풀 우거져 어두운 숲길도 통과했다.




# 이윽고 농장들 사이에 있는 농로를 따라 여러 차례 구부러졌다.





# 농로가 여러 갈래여서 길 찾는데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 마을 안길을 따라 길게 남하하였다.





# 비버리힐스란 주택단지를 지났다. 그곳 길가에 앉아 한숨 돌렸다.




# 광령2리로 넘어가는 도로를 건넜다. 우측 멀리 한라산이 올려다보인다.



# 농로를 따라 길게 가다가 다시 쉬었다. 햇살이 뜨겁고 땀이 많이 났다.



# 한라산의 위용이 대단하다. 겨울 눈 많이 내린 날 꼭 다시 올라 볼 작정이다.




# 청화마을 통과




# 이 지역은 길이 갈라지는 곳이 많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길 잃기 십상이다.




# 제주루터교회 통과. 이 교회가 주요 포스트이다.




# 교회 아래 언덕을 내려 간다.




# 올레길은 이제 광령리 마을 안으로 들어 간다.



# 그러다 광령초등학교를 만나 좌측 골목으로 나간다.




# 잠시후 광령리를 통과하는 지방도에 도착한다. 그곳에 16코스 종점인 광령1리 사무소가 있다. 몇 해 전 한라산 산행을 마치고 이곳으로 하산하여 어둑해질 무렵 광령리 사무소를 출발하여 17코스를 걸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17, 18, 19코스를 걸었으므로 이제 20과 21코스만 걸으면 된다. 




# 광령리 사무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마눌과 재회하였다.




# 몸에 몯은 먼지 털어내고 올레길 16코스를 마무리 했다. 이후 제주 동문시장으로 이동했다. 동문시장에는 수요미식회에서 추천한 갈치조림으로 유명한 맛집이 있다. 수요미식회 추천 집이니 찾는 이가 많았다. 줄을 한참 선 후 겨우 자리 하나 잡았다. 찬이 깔끔하고 갈치조림 맛도 웬만하였다. 국물을 달게 만들어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춘 듯했다. 그런데 가격에 비해 갈치의 크기도 작고 양도 너무 작았다. 손님이 많으니 불친절하기도 했다. 그동안 수요미식회 추천집을 여러 곳 다녀 보았는데, 대부분 방송에서 극찬한 것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편이었다. 이 집도 긴가민가 했다.




# 제주 동문시장. 식사 후 한 바퀴 돌며 몇 가지 필요한 것을 구입했다.




# 비행기 시각이 많이 남아 용연계곡으로 나들이 갔다. 이곳은 올레길이 지나는 곳이라 이미 예전에 다녀 간 곳이다. 그래도 그때 못 본 것들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 용연 구름다리도 다시 걸어봤다.



# 용연계곡은 용암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다.




# 이스타항공이었나? 야간 비행으로 귀경하였다. 하늘에서 바라보니 인간세의 불빛이 별빛처럼 아련하였다.



# 이후 전철 타고 멀리 이동해 귀가했다. 그로써 우여곡절 많았던 여름 제주 올레길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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