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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15코스/한림고내 올레 - 일붕(一鵬)과의 소인연(小因緣)!! 본문

길이야기/제주 올레길

[제주올레길]15코스/한림고내 올레 - 일붕(一鵬)과의 소인연(小因緣)!!

강/사/랑 2017. 9. 26. 20:54
 [제주올레길]15코스 - 한림고내 올레


 

금북정맥(錦北正脈) 종주를 할 때이니 십 년쯤 전 얘기다. 예전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길목인 연기군의 전의(全義)에서 구간 종주를 시작했다. 그날 내내 천안과 공주 정안 경계의 산줄기를 더듬다가 해질녘에 천안에서 공주로 완전히 넘어가는 삼남길 최고(最高)의 교통로인 '차령(車嶺)고개'에 도착했다.


계절은 늦가을이었다. 금북의 산줄기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만드는 꽤 까다로운 산맥이다. 그런 오르내림의 산길에 기름진 참나무 낙엽이 무릎 깊이로 쌓여 있었다. 하루종일 낙엽 헤치고 걸었더니 차령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무거운 발걸음 이끌고 차령에 도착하여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살피는데, 산 아래 터널이 뚫리면서 짓다 포기한 휴게소 건물 위쪽에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상당히 특이한 필체의 글씨로 '평화통일기원일붕시비(平和統一祈願一鵬詩碑)'라 적혀 있었다. 필체에 힘이 넘치고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조화가 있었다.


힘든 상태여서 그냥 대충 둘러보고 지나쳤다. 다음 주에 차령에서 정맥을 이어갈 때도 그냥 눈으로만 스쳐 지났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삼남길(三南大路) 종주하면서 차령을 지났다. 삼남길은 예전 삼남의 사람들이 한양으로 오가던 큰 길이다. 남대문에서 해남 땅끝까지 이어진 먼 길이다.


근래 그 삼남길을 걷고 있는데 십 년 전 금북정맥 산길 걸으며 가로로 지났던 차령을 이번에는 삼남길 걸으며 세로로 교차하며 지나게 되었다. 차령은 늘 힘이 드는 고개다. 이번에는 산속에서 뜻밖의 비를 만나 고생하였다. 비에 젖어 차령에 내려서니 역시나 일붕시비(一鵬詩碑)가 서 있었다. "저 글씨체 참 멋진데 많이 본 글씨다." 고만 생각하고 역시 지나쳤다. 


그리고 두 달 뒤 제주올레길 15코스를 걷다가 그 글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복덕개포구의 '청호사(靑滸寺)'란 작은 사찰 앞에 같은 필체의 글씨가 있었던 것이다. 연달아 만나게 되니 이번에는 관심을 가지고 살펴 봤다. 자료도 찾아 봤다. 역시나 유명한 분의 글씨여서 방송 매체나 출판물을 통해 여러 번 봤던 글씨다. 그것은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스님의 글씨였다.


일붕(一鵬)은 대한민국 불교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업적도 많았던 인물이다. 외국어에 능해 64년 미국 컬럼비아大에서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한국불교를 미국에 알리는데 공헌하였고 157개국을 돌며 포교 활동을 하였다. 69년에는 미국 템플大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 외에도 철학, 정치학, 고고학, 환경우생학, 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어 126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고 1,042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외에도 통일기원비 757개 건립, 선필(禪筆) 50만 점, 최대 석굴 법당 건립 등 다섯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거대한 업적을 남긴 스님의 이름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주류(主流)가 아닌 아웃사이드였기 때문이다. 정치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종교계에서도 비주류(非主流)가 설 자리는 별로 없다. 대한민국 불교의 주류는 '조계종(曹溪宗)'이다.


일붕(一鵬)도 원래는 조계종의 원로였다.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와 대학장을 역임했고 불국사 주지와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88년 '일붕선교종(一鵬禪敎宗)'을 창종(創宗)하여 종정(宗正)이 되었다.


그가 왜 조계종을 떠나 새로운 종파를 창종하였는지는 내가 과문(寡聞)하여 정확한 사유는 알지 못하나 이후 그의 행적으로 조금 짐작은 가능하다. 일붕선교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을 종지(宗旨)로 하고 국태안민(國泰安民)과 남북 평화통일 기원 만등불사(萬燈佛事), 국군장병 및 사회복지시설 위문 및 지원사업, 종도단합 및 국운 융창기원법회등 각종 법회와 사회사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붕은 1992년 '세계불교법왕청(世界佛敎法王廳)'을 창립하여 153개국 5,300여 단체에서 추대돼 스리랑카 찬다란다 스님과 공동 초대법왕에 취임했다. 법왕청은 로마교황청과 비슷한 기능의 불교 조직으로 세계평화와 불교중흥을 목적으로 그해에 설립되었다.


아마도 그가 평생 해외포교에 열중하면서 조계종의 분파주의나 좁은 국내의 주류라는데 만족하는 분위기에 반감을 가지고 한국불교의 세계화와 세계불교의 통합을 꿈꿨던 모양이다. 과히 그의 법호(法號)처럼 대붕(大鵬)의 날개짓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넓게 날개를 펄치고자 하였던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법왕에 취임한 4년 뒤인 1996년 일붕은 세속 나이 83세, 법랍(法臘) 64세로 열반(涅槃)에 들게 된다. 그의 열반 이후 세계법왕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활동 상황은 알려진 바가 적다. 아마도 특출한 지도자가 사라지니 세계불교 통합(統合)을 꿈꿨던 그의 꿈도 함께 사라진 모양이다.


그리고 그가 주류인 조계종의 그늘을 스스로 걷고 나가 비주류가 되어 버렸으니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꿈꿨던 그의 행적이 찬양되거나 그의 뜻이 확대보급되기 어렵게 된 듯하다. 그가 조계종의 이름으로 통일과 통합을 추진했다면 성철스님 못지 않은 선승(禪僧)으로 추앙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의 선택은 아웃사이드의 길이었고 그로인해 그의 뜻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데, 그가 이룬 역사가 워낙 컸으니 그의 흔적은 그가 지나간 이 세상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하여 나처럼 산길, 들길, 물길을 헤매고 다니는 나그네의 발길에 이런저런 인연(因緣)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곳이 금북의 차령이고 제주올레의 복덕개포구다.


그 인연 헛되지 않게 틈틈이 그의 글씨나 말씀을 새겨볼 참이다. 1996년 제자들이 기켜보는 가운데 입적하면서 그는 세상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蛇化登龍一角生 松潭風雨萬人驚 南城春至魔雲盡 北嶺夜來禪月明 (사화등용일각생 송담풍우만인경 남성춘지마운진 북령야래선월명 ; 뱀이 화하여 용이 되어 뿔 하나가 났는데, 송담에는 풍우(風雨)가 크게 일어나 만인이 놀랐다. 남쪽 성에 새봄이 오니 마운(魔雲)이 다 없어지고 북쪽 고개에 밤이 되니 선월(禪月)이 밝아온다.)"


 

 


일붕(一鵬)과의 소인연(小因緣)!!


구간 : 제주 올레길 15코스(한림~고내)
거리 : 구간거리(16.5km), 누적거리(303.5km, 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9월  1일. 쇠의 날.
세부내용 : 한림항 도선대합실 ~ 대수포구 ~ 수원리 마을 ~ 수원리 사무소/ A,B코스 갈림길 ~ 켄싱턴리조트 ~ 한수풀해녀학교 ~ 해조수산 ~ 귀덕포구 ~ 청호사 ~ 금성포구 ~ 금성천 ~ 금성교 ~ 곽지해수욕장 ~ 애월해안산책로 ~ 한성수산 ~ 애월환해장성 ~ 애월항 ~ 고내포구


  

전날 겪었던 부상과 무서운 저체온증 때문에 야영 대신 모텔에서 숙박하였다. 무섭도록 춥고 떨리며 정신 혼미하였는데, 뜨거운 물에 몸 담그고 편안한 침대에서 잤더니 뒷날 깨끗하였다.


다리의 상처는 약 바르고 두꺼운 붕대로 감았고 사타구니는 바셀린 바르고 무봉재 사각 드로즈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종아리 화상 입은 곳은 화상연고 바르고 긴 바지로 햇볕을 차단했다. 꼭 이렇게까지 하고 올레길을 걸어야하나 싶지만 제주도 한 번 오기 쉽지 않은 일이라 좀 무리하더라도 예정했던 구간은 마치고 싶었다.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심했던 나는 이렇게 보수(補修)하였더니 웬만해졌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눌의 발바닥이었다. 마눌은 이번에 국산 경등산화를 신고 왔는데, 처음부터 발 볼이 좀 좁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동안 당일 산행이나 1박 정도의 야영에서는 큰 문제없이 잘 신고 다니던 신발이다.


그런데 어제 아침부터 발이 불편하고 발바닥이 뜨겁다고 말하더니 코스 다 걷고 모텔에서 확인한 결과 양쪽 발바닥에 대여섯 개의 큰 물집이 잡혀 있다. 아니 이렇게 심하도록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니까 좀 불편하기는 해도 이런 줄은 몰랐단다. 급한대로 물집 터뜨리고 상처 모두에 밴딩하였다. "일단 좀 걸어보고 상태 봐서 조치를 강구합시다!"


그렇게 졸지에 부상병으로 변한 우리는 다시 올레길을 잇기 위해 짐 챙겨 숙소를 나섰다.

 

고내항/高內港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에 위치한 어항이다. '고내포구'라고도 한다. 2004년 9월 23일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되었다. 효종 4년에 이원진 목사가 엮은 탐라지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26년에 동서로 현촌이 설치되었는데 서쪽으로는 귀일, 고내, 애월, 곽지, 귀덕, 명월이 있고, 동쪽으로는 신촌,함덕 김녕, 남쪽으로는 호촌 홍로 예래 산방 차귀등이 있었으며, 대촌에는 호장3인과 성상 1인을 두고, 중촌에는 호장3인과 성상 1인을 두고, 중촌에는 호장 2인, 소촌에는 호장1인을 두어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내성창은 대략 고려 원종11년(1230)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따르면 당시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서 귀일촌에 항바드리성을 쌓아 이를 근거지로 삼았고 외곽성으로 애월에 목성을 구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애월에 인접한 고내리 해안에 환해장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940년대에는 15톤급 화물선이 드나들기도 했지만 성창의 규모는 열악하다. 고내리 바다는 ‘요강터’라고 한다. 애월리와 신엄리 경계지역인 ‘강척코지’에서 ‘개구미’에 이르는 바다 바닥은 요강처럼 움푹 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내성창 정면에서는 ‘고돌이왓’이 시작된다. 근해어장으로서는 1km 가량 쭉 뻗어나가 있어 매우 큰 편이다. 밀물을 타고 고기떼가 들어오면 영락없이 잡힌다고 할 만큼 황금어장이다. 고내리 사람들의 삶도 누대로 이 ‘요강터’에 모아졌다. 방파제 공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포구 왼쪽 '가막여'를 타고 7m의 방조제를 축조했다. 이어 1975년에 30m가 축조되었고 1991년,1992년에 23m의 방파제를 축조하는 등 현재까지 방파제 115m, 선착장 193m가 축조되어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제주 올레길 15코스 한림고내 올레 개념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짐 챙겨 밖으로 나왔다. 몇 가지 물품 구입하려 한림읍 시내를 둘러 봤다. 작고 아담한 동네다. 그런데 마눌의 발바닥이 예사롭지 않다. 물집을 터뜨리고 밴딩하기는 했지만,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오는 모양이다. 이런 상태로 올레길을 걸을 수는 없는 일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자동차를 하나 빌리기로 했다.



# 제주시로 가서 자동차를 하나 빌렸다. 짐을 차에 실어 놓고 가벼운 몸으로 걷기로 한 것이다. 제주에 나간 김에 몇 년 전 공항 곁 올레길 17코스 용담이호 해안도로를 걸으며 만났던 회국수집을 찾아갔다.




# 이 집은 우리가 제주에서 찾은 맛집이다. 우리 입에는 제주 제일의 맛집이었다. 자리물회나 일반 회도 잘 하지만 우리는 이 회국수가 제일 좋았다. 몇 년 만에 다시  맛보았는데 여전하였다.




# 한림항으로 복귀했다. 어제 오후 나에게 극심한 저체온증을 선사한 벤치에는 뙤약볕만 뜨겁다. 도선 대합실 화장실에 가서 어제 입었던 부상 부위를 다시 점검했다. 사각 드로즈 입고 바셀린 발라 사타구니 헐은 것 조치하고, 긴바지 입어 종아리 화상 대비하였다. 그리고 상처입은 정강이 밴딩 단단히 하였다.




# 해양경찰서 앞을 통과하면서 15코스를 시작했다. 오늘도 햇살은 뜨겁다. 하지만 오늘은 대안이 있다. 마트에서 싸구려 우산 구입하여 파라솔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대형 배낭을 차에 두고 가벼운 등짐에 비상약과 비상물품만 챙겼으니 몸도 가볍다.



# 한림항을 휘감아 나가자 검은 용암 흔적 가득한 해변길이 나온다. 멀리 대수포구와 뒤쪽의 평수포구가 겹쳐 보인다.




# 길게 해안길을 따르면 대수포구가 나온다. 대수포구는 한림읍 수원리(洙源里)에 있다. 이 동네는 올레바당 체험마을을 운영 중이다. 낚시나 제주 토속 뗏목인 '테우'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고 용천수 목욕체험장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는 '조물케' 라 불렀다. 한자로는 '잠수포(潛水浦)'라 적었다.



# 포구 우측에 바람 좋은 전망소가 있다.




# 포구 뒤쪽 삼거리에서 올레길은 바다를 벗어나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 올레길이 지나는 수원리 마을 우측 멀리 구름 모자를 쓴 한라산이 보인다.




# 수원리 안으로 들어가면 언덕위에 왕의 일산(日傘)처럼 생긴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삼국지를 보면 촉한을 세운 유비(劉備)는 탁현(涿縣) 누상촌(樓桑村) 출신이다. 그의 마을이 누상촌인 이유는 마치 왕의 일산처럼 생긴 뽕나무 한 그루가 크게 자란 마을이기 때문이다. 유비는 왕의 상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 왕이 되었다. 수원리 팽나무도 완전하지 않지만 우산처럼 생겼다. 수형(樹形) 잘 다듬어서 우산 모양을 만들면 이 동네 출신으로 귀한 신분의 사람이 탄생할 지도 모른다.  



# 수원리 마을 안으로 길게 들어갔다.




#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수원리 사무소가 있다. 제주는 특이하게 각 마을에 이런 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 수원리 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15코스는 A, B코스로 갈라진다. A코스는 귀덕리, 금성리, 남읍리를 거쳐 곽지의 과오름과 애월의 고내봉을 거쳐 고내포구로 가고 B코스는 해안길을 따라 애월항을 거쳐 고내포구로 간다. 처음 마을 올레와 두 개의 오름 때문에 내륙 코스를 개발했다가 곽지와 애월 바다의 아름다움을 버릴 수 없어 B코스를 개발한 모양이다.




# 우리는 B코스인 해안 길을 택했다. 삼거리에서 좌틀했다가 수원리 저온저장고를 지나 길게 농로를 따랐다. 그 끝에 삼거리가 있다. 다시 좌측으로 갔다.




# 그 바로 앞 길 끝에 용운바다가 있다.




# 바람 좋은 해안길을 따라 진행했다. 우측에 켄싱턴 리조트가 있다.




# 리조트 정문 앞 정자에서 한 숨 돌렸다.




# 한림해안로를 따라 길게 진행했다. 이틀 동안 무거운 대형배낭에 시달리던 어깨가 무게에서 벗어나니 방긋방긋 웃는다.




# 귀덕 2리 포구에 도착했다. 그곳에 한수풀 해녀학교가 있다. 이 해녀학교는 체계적으로 해녀 수강생을 모집하여 교육하고 자격증까지 발급하는 민간 학교인 모양이다.




# 귀덕2리 통과.




# 전방 멀리 곽지 일대가 보인다. 그 뒤 산줄기는 A코스에 있는 과오름과 고내봉이 겹쳐진 것이다.




# 바닷가 돌담을 따라 진행한다. 무게 부담이 없어 그런지 햇살도 어제에 비해 약해진 느낌이다.




# 귀덕포구에 도착했다. 해녀학교가 있던 곳부터가 모두 귀덕리인데 1, 2, 3리로 나뉘어 있고 이곳은 귀덕 1리이다. 옛이름은 '모살개'다.




# 포구 내부가 잔잔하고 물빛 곱다.




# 전방에 보이는 바위가 '거북여'이다. 지금은 그곳까지 방파제를 연결하여 더이상 여가 아니게 되었다. 대신 거북등대를 만들어 두었다. 귀덕리는 예전에는 석천촌(石淺村)이라 불렀다. 화산암이 얕게 깔린 포구여서 그랬나 보다.




# 포구 곳곳에 예술 작품을 방불케하는 조형물이 서 있다. 제주에서 이 동네 포구를 옛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이 동네 설화와 관련된 여러 조형물을 설치한 것이다. 제주의 무속(巫俗) 신화에는 '영등신'이 등장한다, 영등은 바람을 관장하는 신(風神)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전승하지만 특히 제주의 영등할망이 잘 알려져 있다. 영등신은 음력 2월 초하룻날 찾아왔다가 보름날에 떠난다. 영등신이 온 기간에는 배를 타고 나가면 안된다. 그 기간에는 영등신이 바닷가를 돌면서 해산물의 씨를 뿌려주기 때문이다. 결국, 영등신은 바람신이자 풍요의 신이다.


비옷을 입고 있는 이 신은 영등우장(雨將)이다. 영등할망을 도와주는 영등신 중 비와 날씨를 예보하는 일관으로 영등날 비가 오면 "올해는 비옷 입은 영등우장이 왔다" 한다고 조형물 아래 적어 두었다.





# 포구안쪽에는 더 많은 영등신이 서 있다.




# 영등하루방. 북쪽 시베리아에 살며 영등할망에게 온갖 바람의 씨를 만들어 주는 근원의 신이라 적어 두었다. 영등신화에 씨앗생산자로서 영등하루방의 얘기가 있었나? 시베리아는? 내 사소한 기억에는 없는 얘기다. 자료에는 영등할망이 제주로 들어올 때 여러 식솔을 데리고 오는데, 그들이 영등하르방, 영등대왕, 영등별감, 영등좌수, 영등우장이라고 나온다. 




# 영등할망. 영등신화의 주인공이다. 영등신은 기본적으로 여신(女神)이다. 여성성(女性性)은 다산(多産)의 상징이요, 풍요(豊饒)를 의미한다. 따라서 영등신은 할머니다. 그리하여 뭍에서는 영등할머니, 제주에서는 영등할망이 된다. 원래 '강남천자국' 또는 '외눈박이섬(一目人島)'에 사는 신인데,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 제주를 찾아온다.




# 영등대왕. 영등나라를 지키는 외로운 왕이라고 적어 두었다. 영등할망 신화는 자연 재해 앞에 무력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는 옛 풍속이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재해의 제일 큰 원인은 큰 물과 바람이었다. 물과 바람이 온순하고 풍부하면 풍년이 들었다. 예측할 수 없는 기상현상에 대한 두려움은 영등신에 대한 숭배로 나타났고 그것은 강한 삶의 의지이기도 했다.


우리 고향에서는 영등을 '바람 올린다'고 표현했다. 음력 이월에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바람신께 올리고 종이를 태워 하늘로 잘 올라 가면 풍년이 든다 믿었다. 어릴 때 집에서 자주 보던 광경이다.



# 옛 설화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는 복덕개 포구. 복덕개는 귀덕포구의 옛 이름이다.  





# 바람과 풍요의 포구 복덕개를 지나 우측으로 해안길을 따라 돌았다. 그곳에도 돌비석 몇 개와 청동 흉상이 하나 서 있다. 그런데 돌에 새긴 글씨가 낯이 익었다.




#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스님의 흉상과 글이었다. 일붕은 세계 불교를 통합하고 선도하고자 하였던 대붕(大鵬)의 뜻을 가졌던 이다. 세계불교법왕청을 세우고 초대 법왕(法王)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주류인 조계종을 떠나 일붕선교종(一鵬禪敎宗)을 창종하여 비주류가 되어버렸다. 비주류가 세계 불교를 통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일붕도 잘 모르고 일붕선교종은 더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니 일붕은 정말 엄청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150여 개 국의 포교, 120여 개의 박사 학위, 1,000권이 넘는 저서, 750개가 넘는 통일기원비 등 숫자로 믿기 어려운 업적을 남겼고 기네스 기록으로 증명되고 있다. 한 인간이 남겼다 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깊은 내용이다. 대단한 업적이고 엄청난 열정이다.


이런 엄청난 업적이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고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비주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주류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자기 영역을 구축한 비주류라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양적으로 집착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가 일부러 추구하였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너무 양적으로 확대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냥 내 느낌이다. 내막은 정보 없어 잘 모른다. 





# 바닷가를 향해 돌담 두른 이 평범한 가정집처럼 생긴 집이 청호사(靑滸寺)이다. 일붕선교종은 전국에 천여 개의 사찰이 있고 이곳 제주에도 35개의 사찰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일붕스님의 흔적은 여전한 모양이다. 




# 금성포구는 금성천이 길을 갈라 두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금성교를 건너야 한다.




# 포구는 코발트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인공의 빛과 같은 색의 바다가 그 앞에 출렁이고 있다. 우측 돌출된 암반지대에 낚시꾼들이 한가롭다.




# 돌아보면 귀덕리 바다가 보인다.




# 낚시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구경하였다.




# 올레길은 해안의 좁은 길로 이어진다. 그 앞 돌출된 곳에 정자 하나 있다. 금성리 용머리이다.





# 그곳 용머리에서 남당암수를 만났다. 예전 이 동네 금성리의 식수원이었다 한다. 맑은 물이 쉼 없이 솟아오르고 있다.

 


# 서핑하는 이들이 장비 말리며 쉬고 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시원한 맥주가 입맛을 자극한다. 그런데 이곳을 가만 살펴보니 야영장소로 최적의 장소다. 마을과 떨어져 인적 드물고 바로 앞에 민물 솟아나는 샘까지 갖추고 있다. 점 찍어 두었다.



# 언덕을 넘어가자 곽지해수욕장이 나온다. 그 입구에 펜션 몇 동이 있다. 지나며 문득 안을 보니 요즘 TV에 자주 나오는 부산사투리 찐한 모델 겸 배우가 서 있다. 아마 서핑하러 온 모양이다.



# 과물노천탕이 있다. 과물은 곽지의 용천수 이름이다. 한라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땅속을 흐르다 이곳 모래사장에서 솟아 난다. 곽오름을 배경으로 솟는 감로수란 의미라 한다.




#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몸을 씻는 사람은 없고 셀카에 심취한 여성들만 여럿 있다.




# 해수욕장 근처 편의점 그늘에서 오래 쉬었다.




# 해수욕장과 캠핑장 등을 지났다. 곽지해수욕장도 꽤 유명한 곳이라 피서객이 많았다. 길게 진행하자 애월 한담 해안산책로가 나온다.




# 이 길은 곽지에서 애월까지 이어진 산책로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바다 가까이 조성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길이다. 이 날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곳 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 백악기에 살았던 트리케라톱스를 닮은 바위가 있다.




# 이런 뙤약볕이 아니라 노을 질 때 이 길을 걸으면 기가 막히겠다.




#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많다.




# 파도 좋은 곳에서는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다.





#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나온 이들이 많다. 다정한 그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즐비하다.



# 저 멀리 희미하게 비양도가 보인다.




# 입에서 불을 내뿜는 괴수의 모습 같다.




# 강아지나 여우의 모습 같기도 하다.



# 풍광이 아주 아름다운 산책로이다. 추천하고픈 길이다. 기회된다면 석양 무렵에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싶다.




# 오르내림 없으니 힘들 일도 없다.




# 이곳을 신선명상지라 적어 두었다. 아늑한 만(灣)의 형태이기는 한데 명상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파노라마로 찍어 봤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이 언덕이 꽤 훌륭한 조망지이다.




# 이 바위를 창문바위라 적어 두었다. 왜?




# 관광객들은 사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저 가족을 보면 우리 나라 일반 가정의 표준형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딸은 예쁜 짓에 사진 찍는 것 좋아하고, 사춘기 왔을 법한 아들은 매사 시큰둥하여 사진 보다는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 언덕을 올라서면 멀리 애월까지 이어진 길이 오목조목 남아 있다.



# 투명한 카약을 타고 뱃놀이 중이다.



# 카약 출발지.




# 애월바다가 이렇게 풍광 다양하고 예쁜줄 몰랐다.




# 긴 산책로가 끝났다.




# 그 끝에 코딱지만한 한담해수욕장이 있고, 꽤 많이 알려진 카페가 있다.



# 이 집은 제주 애월에 사는 여자 연예인이 등장하는 TV프로에 나온 이후 명소가 된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는지 카페에 들어가는데, 번호표를 발부하여 차례대로 입장시키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인생을 살고 자기 느낌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인생, 남이 제시하는 느낌으로 살아 무엇하려고 그러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 제주에 흔하게 있는 여러 언덕 중 하나이지만, TV에 등장한 그것도 효리가 앉았던 곳이라 더 유별나 보이는 모양이다.



# 이곳은 이번 나흘 간의 올레길 중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곳이었다. 사드 때문에 중국인들 입도가 거의 사라졌다는데, 이곳에서는 중국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여러 사람이 모인 만큼 여러 쓰레기 같은 일도 많다. 산책로 곳곳에 그들이 버린 커피컵과 과자 봉지가 산재해 있다. 한심스러워 최대한 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 언덕을 돌아 나가면 거짓말처럼 인적이 없다. 그 연예인이 이곳까지 걷지는 않았나 보다.




# 이곳은 양식장이 많은 곳이다. 제주는 우리나라 최대의 섬이지만, 우리나라 최대 육상 광어 양식장이기도 하다. 양식장 배수구 앞에 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양식장에서 나오는 물에 사료 찌꺼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 먹으러 오는 바다물고기를 노리는 것이다.




# 대형 양식장이 십여 곳 이상 있다. 제주 생산 품목 1위가 바로 넙치, 즉 광어다 





# 인적없이 한가한 길을 걸어 애월로 향했다.




# 이 지역은 원래 애월 환해장성(涯月 環海長城)이 있던 곳이다. 환해장성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제주 특유의 석재 성곽이다. 그냥 돌담 수준이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김상헌(金尙憲)이 제주 안무어사로 있으면서 쓴 일기책인 남사록(南槎錄)에는 환해장성을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적고 있다. 아마도 제주 해안선 전역에 환해장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평리, 동복리 등 14곳에만 남아 있다. 이곳 애월의 환해장성은 양식장이 많이 생기면서 훼손이 심하게 되었다 한다.





# 실제 장성의 형태라기 보다는 양식장 담장이나 허물어진 돌담 같은 느낌이다.




# 철수한 전경부대 통과. 제주 전역에 이런 전경부대 흔적이 있다.




# 산책로라 적어 두었지만 이곳은 양식장 건물들이 많아 산책 여건은 좋지 않다. 특히 여성 홀로 걷기는 조금 위험해 보였다.




# 난바다를 향한 곳에 넓은 공터와 정자가 있다. 다녀간 관광객이 얼마나 많았는지 쓰레기 모아 둔 마대자루가 한가득이다.




# 애월은 방송을 통해 꽤 많이 알려진 동네라 곳곳에 개발이 활발하다. 그런데 건물이나 항구 등은 개발되었는데, 오가는 사람은 잘 안 보인다.





# 애월항은 규모가 크다. 올레길 곳곳에 만나지는 작은 포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300톤급 화물선 네 척이 동시에 접안 가능한 연안항이다.




# 항구 깊숙한 곳에는 예전부터 이 동네 어민들이 배를 정박하고 생활하였던 포구가 있다. 다리 때문에 높이 있는 배는 이 안에 못 들어오겠다.




# 애월항을 지나 해안을 한바퀴 휘감아 돌아 가면 오늘 구간의 종착지인 고내포구가 나온다.





# 고내포구는 '요강터'리 불렀다. 마을이 요강처럼 오목한 모양이다.




# 포구 외곽으로는 난바다가 연결된다. 그 쪽 물빛 짙고 푸르다.





# 포구 뒤쪽으로 다음 16코스로 넘어가는 언덕길이 보인다.




# 고내포구 우측 삼거리가 구간 종착지다. 우측 골목으로 A코스가 이어진다. 올레 15코스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이다. 힘든줄 모르고 산책하듯 걸었다. 등짐 가벼운 탓도 있겠지만 길 자체가 산책로 수준이다. 조망은 최고였고.




# 16코스를 조금 걸은 후 하루 분량의 올레를 마쳤다. 이윽고 차 회수하러 한림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제 저체온증 때문에 애써 찾은 맛집의 해물탕 맛을 보지 못했다. 보기에는 맛있어 보였지만 구토가 나고 의식 흐려져서 시켜 놓고 한 숟갈도 못 먹었다. 그것이 억울해 그 집을 다시 찾았다. 대신 오늘은 포장을 했다. 시장에 들러 회도 한 접시 구입했다.



# 한림항 너머로 노을 진다.



# 그리곤 낮에 봐 두었던 금성리 용머리에 있는 정자로 갔다. 이곳은 마을과 올레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한가롭고 고요한 곳이다. 바로 곁에 맑은 물까지 갖추고 있어 야영지로는 최고의 장소다.




# 금세 밤이 찾아왔다. 제주의 푸른 밤을 우리 빨간 텐트 불빛이 밝히고 있다.





# 수평선 너머로 갈치잡이 배들의 불빛이 휘황하다.




# 한림항구의 불빛도 밝다. 셔터를 길게 열어 두었더니 밤하늘을 지나는 비행기 불빛이 길게 줄을 그었다. 좋은 세상이다. 휴대폰으로 야간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 제주 바닷가의 만찬이다. 한림항에서 준비한 회와 어제 못 먹어 한이 맺혔던 해물뚝배기로 탕을 준비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최고의 맛을 즐겼다. 막걸리 맛도 좋다!




# 술기운 살짝 올랐다. 시원한 바닷바람 좋고 절벽을 두드리는 파도소리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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