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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이야기/견지낚시

[스크랩] 견지낚시 역사(송우님의 글)

강/사/랑 2007. 7. 28. 13:26

이 글은 일평생 우리 고유의 낚시 견지를 지켜가시다 일전에 타계하신 故 송우선생님의 글입니다. 님의 사이버 기념관에서 무단으로 퍼 왔으나 견지의 역사를 널리 알리는 것이 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다 사료되어 여기에 올립니다.

 


견지낚시 최고(最古) 문헌(文獻) 발견

 

송우, 한국견지낚시클럽 대표



나는 최고(最高)니 최초(最初)니 하는 말을 잘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 위수(渭水) 김홍동(金洪東) 옹(翁)의 전화를 받고 감히 '최고(最古)'라는 말을 쓰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견지낚시의 유래와 어원과 효시

 

나는 그 동안 견지낚시의 어원(語原)과 유래(由來)와 효시(嚆矢)를 찾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견지라는 단어를 별이별 한자 표기로 다 쓰고 주장하던 것은 한자 말이 아닌 순수 우리말이라는 것을 찾아 밝혔고, 그 유래는 길삼하는 여인들이 실을 감아 놓는 생활 도구인 '견지'의 가운데 자루를 길게 만들어 고기를 낚시 시작한 것이 견지낚시의 유래라는 것도 규명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견지낚시의 효시에 대해서만은 엉거주춤한 상태이다. 한형주 선생의 전언에 의하면 고려시대라 하고, 어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 초기라고 하나 그에 대한 명백한 문헌(文獻)을 발견하는데는 실패했다.

 

한 때 나는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고서화(古書畵)를 즐겨 찾아다녔다. 우리나라의 서화에는 산수(山水) 풍경(風景)에 대한 것이 많고, 혹시 그 중에 견지낚시를 하고 있는 옛글이나 옛그림이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탐구의 폭과 깊이가 郪고 깊지 않은 탓에 실패한 상태이다. 앞으로 고서화에 대한 데이타 베이스가 확충되고, 고대 문헌에 대한 전산 작업이 진전되면 지금보다는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찾아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가 찾았던 최초(最初)의 문헌은 스웨덴의 아더그립슨 기자가 로일전쟁 취재차 한양땅에 왔다가 1905년 경에 한강에서 겨울철 3봉 견지낚시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고, 이 사진이 내가 발견한 최초의 고증(考證) 견지낚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이미 졸저 견지낚시에 복사되어 출판되었다. 나의 이런 견지낚시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고 계신 분 중에 올해 83세 이신 김홍동 선생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걸쳐 한강 배견지에 심취했던 분이고, 일본 낚시 잡지에도 견지낚시글을 기고할 정도로 견지낚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오늘 노옹은 즐거운 음성으로 걸어 왔다. 아침 전화를 왔다. 전에 어는 일본 책에서 견지낚시 기록을 본 일이 있는데, 그 문헌을 찾았다는 말씀이셨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홍동 옹의 전화 내용

"

소화(昭和) 1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0 여 년 전에 일본에서 발행된 송기명치(松奇明治)라는 일본인이 저술 출판한 '조기백과(釣技百科)'라는 책에 견지낚시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송기명치는 한양과 평양을 두루 돌아다니며 한국의 낚시 행태를 기록으로 남긴 유명한 일본 낚시 저술가이다. 이 책에 의하면 견지낚시는 '200여년 전에 평양에 살던 홍(洪) 씨라는 분이 견지낚시를 발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낚시 줄을 감는 바디는 세로가 8촌(寸)이고 가로가 4촌(寸)이며, 길이는 2척(尺) 3촌(寸)이다'라고 되어 있다. 견지낚시대의 재료는 조선(朝鮮) 특산(特産) 단목(丹木)과 중국산 적목(赤木), 그리고 죽(竹)견지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내가 송군에게 전해 주려고 일부러 찾아 번역했으니 참고 하라."

 

300년 역사, 1700년 전후의 평양 홍씨가

 

견지낚시 문헌 발굴의 쾌거였다. 책이 출판할 당시에 '200 여 년 전'이라고 기원(紀元)을 이야기했으니, 지금으로부터 따지면 약 300년 전인 1700년대까지 견지낚시의 역사가 문헌상으로 올라간 셈이고, 거기다가 창안자(創案者)가 홍씨라고 실명까지 확인 기록되었으니, 심증적으로 고려시대니 조선시대니 하는 것보다는 더욱 정확한 근거가 되고, 내가 찾았던 노일전쟁 당시 한강 견지보다 무려 2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문헌이다. 김홍동 옹에게 감사하고, 이 소식을 견지낚시 열애가(熱愛家)들에게 전하는 기쁨을 같이한다. 앞으로 이러한 작업에 동참하는 후학(後學)들이 많고, 더 오래된 기록을 있으면 찾을 날이 오기를 기약해 본다. 아울러 김홍동 옹은 한국의 낚시에 대하여 항상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고유 전통 낚시들

 

한 마디로 한국의 낚시는 현재 사라져 가고 있는 견지낚시 이외에는 하나도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낚시가 없다고 한탄(恨歎)하였다. 현재 한국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대낚이 한국 낚시인줄 알지만, 그것은 일본 대낚을 전수(專修)한 일본풍의 낚시이며, 진짜 한국의 대낚은 1950년대에 사라진 통대낚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조차 자기들의 전통적인 낚시는 대낚을 치지 않고 '덴끼라'라는 1 미터 정도의 통대를 사용한 계류 낚시를 들고 있다. 이 점과 아울러 나는 세계 릴 낚시의 원조(元祖)라고 일컬어 지고 있는 중국의 조차(釣車) 또는 주자(走子)라고 불리우는 세계 유일 중국 고유 낚시를 상기하고자 한다. 현재에도 중국의 칭따오(靑島) 같은 곳에 가면 낚시인의 80% 이상이 고유 전통 낚시인 '조차'를 사용하고 있고, 그 중의 상당 부분이 현대화한 것이나, 아직도 고가(高價)의 '조차'는 정교(精巧)하게 통대로 만든 조차이다. 한국의 견지낚시도 고풍(古風)스런 옛맛에 현대화를 가미하여 세계 낚시인들이 널리 사용하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
글쓴이 : 강병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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