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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세번째(답운치~애미랑재)-금강송, 미인송, 적송, 춘양목, 황장목!! 본문

1대간 9정맥/낙동정맥 종주기

[낙동정맥]세번째(답운치~애미랑재)-금강송, 미인송, 적송, 춘양목, 황장목!!

강/사/랑 2007. 10. 11. 14:37
 [낙동정맥]세번째(답운치~애미랑재)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더불어 살아 왔다. 아이가 태어나면 고추나 숯과 함께 새끼줄에 소나무 가지를 꽂아 귀한 자손이 태어났음을 세상에 알리고 잡귀(雜鬼)의 침범을 막았다. 출생과 더불어 소나무와 첫 인연(因緣)을 맺는 것이다.


옛 시절의 우리는 곤궁하였다. 보릿고개 닥치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질긴 목숨을 연명하였다. 이때 목피는 소나무 속껍질이다. 부드러운 소나무 속껍질을 그냥 씹어 먹거나 보릿가루와 섞어 쪄먹었다.


소나무는 끈적한 송진을 생산한다. 송진이 옹이에 엉겨붙어 굳으면 관솔이 된다. 관솔은 훌륭한 조명이다. 우리 옛 동자들은 관솔불 밝히고 그 불빛 아래 공부하였다.


집을 짓는 목재도 소나무가 최고였다. 송진은 나무가 썩는 것을 막아 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뒤틀림이 적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옛 사람들은 소나무로 대들보를 올린 집에서 소나무로 만든 가구들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소나무로 만든 관에 담겨 소나무 숲에 묻혔다. 그야말로 온 생애(生涯)를 소나무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소나무를 나무의 왕(木中之王)으로 보았고, 선비의 지조(志操)와 절개(節槪)의 상징으로 삼았다. 추사(秋史)가 세한도(歲寒圖)에서 노래한 "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겠노라!)" 란 말도 우리 선조들이 소나무를 얼마나 사랑했나 알 수 있는 생생한 웅변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 온 소나무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이 바로 '금강송(金剛松)'이다. 금강송이란 이름은 금강산 일대에서 많이 볼 수 있어 얻은 이름이다.


금강송은 다른 소나무에 비해서 생육 속도가 더뎌 목질이 치밀하고 강도가 강하다고 한다. 또한 송진이 많아 잘 썩지 않고 곧게 자라 거목(巨木)으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궁궐이나 사찰의 건축재로 사용되었다.

금강송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미인처럼 쭉쭉 뻗어 곧게 자란다고 해서 '미인송(美人松)', 나무 표면이 붉어 '적송(赤松)', 경북 봉화군 춘양에 모여 실려 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속이 치밀하고 누른 빛을 띤다고 해서 '황장목(黃腸木)'으로도 불린다.

현재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소나무 에이즈라고 불리는 제선충병 때문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나마 첩첩산중인 경북 울진, 봉화 일대의 금강송 숲은 아직은 제선충 피해 없이 그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네 곳의 금강송 숲이 일반인 출입금지의 봉산(封山)을 풀고 해금(解禁)되어 일반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영덕군 영해면 창수리'가 바로 그 곳이다. 모두들 이 땅에 남은 마지막 오지들이고 또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지나는 곳들이다.


강/사/랑의 낙동정맥 종주 세 번째 걸음은 금강송 울창한 통고산을 넘는 길이다. 홀로 걷는 산길 외롭고 어려워도 하늘 높이 곧고 바르게 자란 금강송의 기운을 받는다면 그 길이 외롭지도 어렵지도 않으리라. 그런 기대로 낙동으로 스며들었다.


금강송, 미인송, 적송, 춘양목, 황장목!!


구간 : 낙동정맥 제 4구간(답운치~애미랑재)
거리 : 구간거리(12.1 km), 누적거리(37.4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07년 9월 22일. 흙의 날.
세부내용 : 답운치(13:00) ~ 묘지 ~ 헬기장(13:10) ~ 무명고개 ~ 730봉(13:25) ~ 갈림길 ~ 폐헬기
장/810봉(14:05) ~ 830봉(14:45) ~ 889봉(15:00) ~ 임도(15:25) ~ 갈림길 ~ 통고산(16:17)/휴식 ~ 갈림길 ~ 1030봉 ~ 임도(17:10) ~ 벌목지~  937.7봉(17:30) ~ 헬기장(17:40) ~ 960봉/길주의 구간 ~ 950봉/길주의 구간 ~ 애미랑재(19:10).

총 소요시간 6시간 10분.


9월 22일 흙의 날. 추석 연휴 닷새의 시작이다. 고향 진주엔 선산과 농토 일부만 남아 있고, 차례를 모시는 큰형댁이 서울이라 남들처럼 귀성 행렬에 끼일 일이 없는 지라 추석前 이틀 동안 산에 가기 딱 좋은 찬스이다.

낙동정맥 석개재~답운치 구간은 길이가 25km로 비교적 긴 편이고, 건강 때문에 가능하면 하루 산행 시간을 7시간 이내로 제한하기로 작정한 지라 야영 준비를 해서 중간에 일박하고 솔방솔방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다.

간밤에 야영장비 모두 꺼내놓고 짐을 꾸렸는데 무게가 20kg에 육박한다. 아이구야~ 이래서야 제대로 걷기나 하겠나? 기상청 예보에 토욜날 "울진 봉화지역 한 때 비"라고 예보를 해서 우의까지 챙겼더니 배낭이 빵빵하다. 그나마 일요일은 날이 갠다니 일단 출발하자!

07:00. 마눌의 걱정스런 배웅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려 하니 이미 귀성 정체가 시작되어 영동고속도로는 트래픽이 곳곳에 있다. 얼른 차 돌려 우회길을 선택하여 수원, 용인 거쳐 양지나들목으로 돌아서 고속도로에 올라 섰다.

그런데 수원에서부터 간간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방울이 고속도로에 올라 서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차량이 많아 속도가 떨어지는데 비까지 내리니 진행은 더욱 더디다.

만종 거쳐 중앙고속도로에 올라 원주,제천,단양으로 내려가는데, 이제는 여름날 장맛비처럼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차를 돌릴까? 단양으로 빠져 남한강에서 우중 낚시나 즐겨볼까? 별 생각이 다 들지만 일단 목적지인 석개재까지는 가 보기로 했다.

풍기 나들목을 나와 36번 국도 타고 울진 방향으로 계속 가다가 현동삼거리에서 좌측 태백 방향으로 좌틀하여 구불구불 가면 육송정 삼거리가 나오고 직진하여 석포면으로 들어 간다. 석포면에 접어들자 가는 비가 내리고 있어 기대를 가지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올라 갔다.


석개재 오름길 좌우엔 고랭지 채소밭이 쭈욱 이어진다. 석포천을 따라 위로 고도를 높혀 올라 가는데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12:00. 집에서 출발한지 5시간 만에 석개재에 올라 섰다. 그런데 석개재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짙은 안개 속에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아이고~~ 이 일을 우짜노?


통고산/通古山

경북 울진군 서면 소재. 높이는 1,067m.울진구역의 낙동정맥의 주맥으로 동쪽으로는 불영사 계곡과 왕피천의 주요 수맥이 되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상류천에 해당된다. 한국토종 소나무 자생군락지로 유명한 불영사 계곡을 잉태하고 있는 곳이며 주위에 왕궁목재로 이용되던 황장목 보호구역이었던 곳도 있으며 울창한 산림을 이용 개발한 통고산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각종 나무마다 팻말이 붙어있는 등 가족단위로 나들이 하기엔 안성맞춤이고 산장들은 통나무로 지어져 있고 이름도 '머루랑', '다래랑' 등 자연 그대로의 분위기를 살린 곳이며 삼림욕장 개장과 동시 임산 도로의 개설로 접근이 쉬워진 산이기도 하다. 왕피천은 수량도 풍부하고 1급수로써 어종이 다양하며 특히 은어가 유명. 또한 왕피천 하류에는 경북 내수면 연구소가 소재하며 여기서 방류된 연어, 치어들이 저멀리 태평양 알라스카를 돌아 모천인 이곳으로 돌아오는 연어회귀 하천으로 유명하다.

실직국/悉直國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던 삼국시대 초기의 소국. 실직곡국(悉直谷國)이라고도 한다. 102년(파사이사금 23)에 경상북도 안강(安康) 지역에 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영역 문제로 다투어 종주국인 사로국(斯盧國: 신라)에 해결을 요청하였는데, 음즙벌국이 사로국과 대립하다 멸망되는 것을 보고 사로국에 자진 항복하였다. 그후 105년에 다시 사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주민들이 모두 사로국 남쪽으로 강제 사민(徙民)되었다. 실직국은 사로국이 진한(辰韓) 연맹체의 맹주로서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병존할 때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나, 사로국이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시키며 세력을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독립된 정치세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소멸되었다. 삼척 지역은 고구려와의 국경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신라는 이후 이 지역에 최초로 주(州)를 설치하여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광비/廣比

자미리에서 1.5km 지점인 이곳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있으며, 복수박과 토종꿀을 생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100여 년 전만해도 오리숲의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아낙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상하였다고 하여 광비라 부르며, 독자골, 뱀골, 홈당골, 큰성지골, 여름나무골, 구슬골, 곰배들골 등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낙동정맥 제 4구간 답운치~애미랑재 지형도.




석개재 임도 입구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짙은 안개 속에 비바람이 휘몰아 치고 있어 도저히 산행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기온이 낮아 추워서 얼른 차안으로 대피했다.

일단 차 안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상황을 지켜 보기로 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 가기엔 이 먼 낙동까지 달려온 정성이 아깝고, 추석 연휴가 너무 억울하다.

30여 분을 기다려 봤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이고 초조함만 더해 간다. 그래서 일단 답운치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생각하고 차 돌려 석개재를 물러 났다.



# 짙은 안개 속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석개재.




# 이 날씨에 송이따러 간 사람들이 있나 보다.



석개재,육송정,현동으로 돌아가 36번 도로 따라 답운치로 올라 갔다. 어? 그런데 답운치는 의외로 가는 안개비만 내리고 바람도 없이 평온한 모습이다. 돌길을 연 석개재(石開峙)엔 비바람 구름이 가득하고, 구름을 밟고 서야 하는 답운치(踏雲峙)는 오히려 평온하다니...

그래서 원래 계획인 석개재 ~ 답운치의 일박 산행을 포기하고 짧은 구간인 답운치 ~ 애미랑재 구간을 앞당겨 하기로 결정했다.

배낭에서 야영 장비와 먹거리 등을 모두 쏟아내고 우의, 간식, 여벌 옷만 남겼다. 수낭의 물도 1.5리터만 남기고 쏟아버렸다. 출발이 늦으니 틀림없이 어두워져서야 애미랑재에 도착할테니 등불은 필수품이다. 가뿐해진 배낭 둘러메고 답운치를 출발했다.(13:00)


# 이름과는 달리 구름없이 평온한 답운치.



천천히 워밍업을 하며 고도를 높여 올라가니 묘지가 나타나고 곧 '헬기장'에 올라 선다. 헬기장엔 쑥부쟁이 등 야생화가 빗방울을 달고 하늘거리고 있다.



# 비에 젖은 첫 번째 헬기장을 만났다.



# 빗방울 매달린 쑥부쟁이.




# 가을의 대표 주자 구절초.



# 구절초인데, 이 넘은 특이하게 분홍빛 옷을 곱게 차렸다.




#  정영엉겅퀴.




# 투구꽃.




#  짙은 코발트색의 산열매.





헬기장을 지나 아래로 내리자 묵은 고개가 하나 나온다. 옥방터로 내려가는 옛고개인가 보다. 옥방(玉房)이란 이름은 1913년 1월 15일 일본인 아부오랑조와 한국인 김상순이란 사람이 문암계곡에서 옥석을 발견한 뒤부터 옥이 많은 곳이라 하여 옥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후 옥은 발견하지 못하고 중석광산을 개발했는데, 중석 광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정착하여 많을 때는 1,200세대가 거주하였다고 했다.


1981년 중석광산이 폐광된후 모두 떠나고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자료를 찾을 수 있다. 고개를 지나 두어 번 오르내리더니 한차례 길게 밀어 올린다. 묘지를 지나자 '730봉'에 오른다.(13:25)




# 멧선생이 금방 지나간 자리. 비가 오는 데도 흙이 뽀송뽀송하다.




# 금강송 군락지 답게 쭉쭉 뻗은 금강송들이 즐비하다.






# 쭉쭉 뻗어 올랐다. 기개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 적송이란 이름이 붙은 나무답게 피부가 바알갛게 홍조를 띄고 있다.





# 군더더기 없이 쭉쭉빵빵하다. 저렇게 곧으니 궁궐의 기둥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 이 숲에는 솔향기 가득하다. 그 향긋한 솔향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차례 길게 내리고 그만큼 또 올린다. 작고 편하게 오르내리다 길게 밀어 올려 마루금을 탄다. 이곳은 편하게 진행한다. 쭉쭉 뻗은 금강송들이 등로 주변에 도열해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스스로 잔가지를 떨궈내며 하늘 높이 키를 키워 올린 금강송의 기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금강송들 사이로 솔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그 바람 타고 솔향기 가득하다. 하지만 비가 오는데다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매우 춥다. 다만 수풀에 매달린 빗물을 강한 바람이 털어버려 걷기는 편하다.

한차례 올려 잠시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아랫쪽으로 표지기들이 잔뜩 매달려 있어 직진은 마루금이고 표지기 있는 쪽이 우회로인가 보다하고 표지기를 따르는데, 아래로 내려가던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표지기들도 보이지 않는다. 알바닷, 빽!!

다시 위로 올라가 보니 우회하자마자 바로 좌로 꺾여 직진길과 합류한다. 그리고 누군가 골탕먹이려고 그랬는지 직진길의 표지기를 떼어서 숲속에 버려 두었다. 고도를 높이며 오르니 '폐헬기장'이 나온다. '810봉'이다.(14:05)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가 다시 위로 오르는데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억지로 헤치며 올라가자 '멋진 금강송이 있는 무명봉'이 나온다. 좌측으로 꺾여 내리는데 건너편에 889봉이 숲 너머로 보인다.


아래로 내렸다 다시 위로 올려 무명봉 하나를 오르는데 역시 잡목을 헤치고 올라야 한다. 무명봉에선 다시 작게 조망이 트여 우측으로 정맥에서 갈라져 나간 산줄기가 보인다. 역시나 잘 생긴 금강송들이 즐비하다.




# 889봉이 건너다 보인다.




# 정맥에서 갈라져 나간 산줄기. 이런 조망도 오늘은 감지덕지다.




889봉은 계단식으로 밀어 올려 가야 하는데, 빗물을 잔뜩 머금은 수풀이 앞을 빽빽이 가로막고 있다. 금세 온 몸이 물구덩이가 된다. 비가 좍좍 오는 것이 아니라서 배낭 커버만 하고 비옷을 입지 않았더니 잘못 생각했다. 한 순간 짙은 개스가 숲을 가득 채운다.




# 개스 가득한 숲속.




개스를 헤치고 낑낑 올라 아무 특징없는 봉우리 하나를 오른다.(14:45). 이곳이 889봉인가 하고 고도계 확인하니 '830'이 찍힌다.

다시 조금 내렸다가 봉우리 하나를 우회하더니 빡세게 한차례 밀어 올리니 비로소 '889봉'이 나타난다.(15:00). 역시 아무 특징 없고 조망도 없이 개스만 가득하다.


아래로 길게 내려 안부에 이르자 우측으로 조금 트이며 작은 조망을 허락한다. 다시 길게 위로 올라 조금 진행하자 정맥을 가로 지르는 '임도'가 나온다.(15:25)


임도 바로 위 절개지 위에는 잘생긴 금강송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백두대간 도래기재~화방재 구간의 초입 구룡산 가는 길에 있는 임도에도 이와 같은 모습의 금강송이 서 있다. 금강송을 기준으로 절개지를 올라가야 한다. 절개지 사면엔 구절초가 지천이다.





#  개스 가득한 889봉.





# 구절초와 금강송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이런 조망 정도가 오늘은 최고입니다.




# 멋진 금강송이 있는 임도에 도착했다.




# 임도 주변에 구절초꽃이 만발하다. 구절초를 찌고 말려서 국화차를 만들면 그 향이 정말 좋다.




# 절개지 위에서 둘러본 낙동의 산줄기들. 워낙 오지라 인간세는 볼 수 없다.




# 통고산은 비구름에 둘러 싸여 있다.



이제부터 통고산 정상까지는 고도를 250m나 올려야 한다. 한 차례 찐하게 밀어 올려 '910'이 찍히는 봉우리를 오르고, 편하게 가다가 다시 밀어 올려 '920', 이번에 아래로 내렸다 힘차게 밀어 올려 '945', 네 번째는 우회하여 올랐다. 그 끝에 통고산 등산로 팻말이 서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통고산 휴양림'으로 가게 된다.

이후 빡세게 위로 밀어 올리는데 헉헉 소리가 절로 난다. 빗줄기가 서서히 굵어져서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찐하게 밀어 올려 봉우리 하나를 오르지만 아직 정상은 아니다. '1055봉'이다.

정상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야 모습을 드러낸다.(16:17). 조금 더 올려 헬기장이 있는 '통고산 정상'에 도착했다.


# 짙은 개스 가득한 통고산 정상.




정상엔 헬기장이 먼저 짙은 개스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정상석은 그 뒤에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짙은 개스와 비 탓에 조망은 전혀 없다. 해발 1,067m이다. 오늘 내 고도계가 셋팅을 하지 않았는데도 정확하다.

통고산 정상석 껴안고 포옹 한번 하고 배낭 벗고 휴식을 취하였다. 정상석 뒷면에 통고산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다.

이 산은 서면 쌍전리에 위치한 해발 1067m의 백두대간 낙동정맥으로 산세는 유심웅장(幽深雄狀)하다. 전설에 의하면 부족국가시대 실직국(悉直國)의 왕이 다른 부족에게 쫓기어 이 산을 넘으면서 통곡하였다 하여 통곡산(通哭山)으로 부르다가 그후 통고산(通古山)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산의 동쪽에는 진덕왕 5년 의상대사가 부근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지어 불리워지고 있는 천축산이 있고 산 기슭에는 그 당시 창건한 불영사가 있으며 하류에는 불영계곡이 있다. 이 표주석은 관광 울진, 환경 울진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7만 군민의 정성어린 뜻을 담아 육군본부 항공대 헬기 지원으로 이곳에 세우다. 1998년 11월 23일 울진군수

자료를 찾아보니 실직국(悉直國)은 삼한시대 초기에 삼척지방에 있던 소국(小國)이었다. 실질곡국((悉直谷國)이라고도 불렀다. 102년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에 사로국(斯盧國) 즉 신라(新羅)에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정상석 앞에 앉아 간식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뒤쪽 숲 너머에서 여자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계속 들린다. 비오는 날 통고산 정상에서 여자 울음소리를 들으니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든다. 스틱 들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상 뒷편에 있는 무인 산불감시탑이 강한 바람에 스치며 꼭 여자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통고산 정상에서 야영했다는 사람들이 많던데, 저 소리 듣고 잠 자노라면 밤새 가위에 눌릴 것 같은 기분이다. 15분간 휴식하고 다시 출발했다. 이미 흠뻑 젖어 버렸지만 카메라 보호를 위해 판초우의를 뒤집어 썼다.


# 헬기로 실어 날랐다는 통고산 정상석. 덩치가 꽤 크다.




잠시 아래로 내려가자 이정목이 서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양 방향 모두에 표지기들이 매달려 있지만 정맥길은 우측길이다. 구불구불 빽빽한 수풀을 헤치고 진행한다. '1030봉'에서 한 순간 아래로 길고 가파르게 떨어져 내린다. 등로가 젖어 있어 미끄럽고 조심스럽다. 길고 길게 내려 역시 정맥을 가로 지르는 '임도'에 도착했다.(17:10).


임도를 지나 숲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벌목되어 있는 곳의 상단을 지나게 된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이곳을 지나자면 머리 벗겨지겠다. 한차례 꾸준히 밀어 올려 '937.7봉'에 오른다.(17:30)




# 갈림길, 정맥은 우측으로 간다.



# 두 번째 만나는 임도.




# 정맥을 가로질러 산을 넘어 간다.




#  삼각점이 있는 937.7봉




정맥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여 떨어진다. 잡목 터널 속을 통과해서 지나야 하므로 비 맞을 일은 없으나 잡목이 자꾸 잡아채며 갈길을 방해한다.

길게 내렸다가 다시 위로 올라 '묵은 헬기장'을 지났다. 아래로 내려 안부를 지나는데 멧선생들의 싱싱한 흔적이 가득하다. 가까운 거리에 집단으로 있는 모양이다. 스틱을 딱딱 부딪치며 진행했다.

길게 올라 '첫 번째 길주의' 지점인 '960봉'을 지나고 우측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후 힘들어 죽겠다 소리가 나올 만큼 몇 차례 오르내리다 길게 올라 '두 번째 길주의'구간인 '950봉'에선 좌측으로 떨어져 내린다.

급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가 길게 진행하는데 전방에 큰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아이구야 싶은데 다행히 좌측 사면으로 우회하여 간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서 이마에 불 밝혔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번엔 정말로 높은 산 하나가 떡 버티고 서서 앞을 가로 막는다.

설마 이 시간에 저길 올라 가라고? 걱정이 태산인데, 천만다행으로 정맥은 그 산의 좌측으로 꺾여 가다가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앞을 가로 막았던 그 산의 옆으로 떨어져 내리게 된다.

잠시 후 깎아지른 애미랑재의 절개지 위에 선다. 애미랑재 절개지는 우리나라 정책 결정자들의 의식 수준을 의심케 하는 현장이다. 어찌나 가파른지 절개지 사면을 스틱에 의지한 채 조심조심 내려 서지만, 몇 번이나 쭉쭉 미끄러져 휘청거리게 만든다. 폭우라도 내리면 절개지 붕괴하기 십상이다.


위험한 사면을 조심조심 내려 오늘의 목적지 '애미랑재'에 내려 섰다.(19:10)


# 깍아지른 절개지 사이의 애미랑재.




애미랑재는 '광비령(廣比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왜 애미랑재란 이름을 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어느 산행기에 고개가 하도 높아 주변 산과 구분이 되지 않고 애매하다고 해서 '애매랑재', '애미랑재'로 부르게 되었다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현동택시(011-501-7676)를 호출하니 한 30분 걸리겠단다. 칠흙같이 어둡고 인적 하나 없는 애미랑재에 앉아 택시를 기다리는데 약간, 아~주~ 약간 으스스한 기분도 든다.

이 비오는 날 이게 무슨 청승일까? 누가 시킨다면 이 일을 할까? 그냥 내가 좋아, 우리 山河가 좋고 그 산하를 두 발로 느끼는 것이 좋아 이 비오는 날 인적 하나 없는 캄캄한 고갯마루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이다.

우측 도로 바로 아래에 좋은 계곡이 있어 물이 철철 흐르지만,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냥 노래 흥얼거리며 택시를 기다였다. 꼬박 40분을 기다려서야 택시가 와서 남회룡, 옥방 거쳐 답운치로 복귀했다.

이렇게 원래 1박 산행으로 석개재~답운치 구간을 하려고 했던 계획이 비 때문에 다음 구간인 답운치~애미랑재로 바뀌어서 우중산행으로 마쳤다. 그러나 추석 연휴 첫날에 다섯 시간을 달려 와서 헛탕 치지 않고 짧은 구간이나마 산길을 걸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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