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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정맥]다섯번째 걸음(덕목재~양정고개)-황산벌을 굽어보다! 본문

1대간 9정맥/금남정맥 종주기

[금남정맥]다섯번째 걸음(덕목재~양정고개)-황산벌을 굽어보다!

강/사/랑 2012. 9. 3. 15:51
 [금남정맥]다섯번째 걸음(덕목재~양정고개)

 

 

“험지(險地)에 의거해서 진영을 설치한 것은 知(지)요, 싸움에 임해서 무리하게 맹세한 것은 信(신)이며, 네 번째 싸워 이긴 것은 勇(용)이요, 관창(官昌)을 잡았다가도 죽이지 않은 것은 仁(인)이며, 두 번째 잡았을 때 죽여서 그 시체를 돌려보낸 것은 義(의)요, 중과부적(衆寡不敵)해서 마침내 한 번 죽은 것은 忠(충)이다. 삼국 때에 충신(忠臣)과 義士(의사)가 물론 많았지만, 史傳(사전)에 나타난 것을 갖고 말한다면 마땅히 '계백(階伯)'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화려한 인물평(人物評)은 조선 후기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한 안정복(安鼎福)의 백제 장수 '계백(階伯)'에 대한 평가이다. 계백 장군은 무너져가는 나라의 마지막 운명을 걸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꾀하다 장렬히 전사한 비운의 장수로서 우리 역사가 두고두고 칭송하는 충신(忠臣)의 표상이다.

 

세월 흘러 세계 최고의 역사 기록물이랄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선조 대에 이르러 전대(前代)의 충신인 신라의 김유신, 김양, 백제의 성충, 계백, 고려의 강감찬, 정몽주 등의 무덤에 봉분(封墳)을 만들고 나무하고 소 먹이는 것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靑史(청사)에 빛날 충신으로 기려지고 있다.

 

하지만 충신으로서의 숭상(崇尙)은 뒷날 역사의 이야기이고, 나당연합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인 660년 당시의 계백은 타락한 왕과 기울어가는 사직 앞에 홀로 칼자루 움켜쥐고 역사의 풍파에 맞서야 했던 외롭고 버림받은 비운의 장수일 따름이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이미 전투에 나서기 전에 나라의 패망과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그 피 묻은 칼로 적군과 싸우기 위해 전장으로 나섰다.

 

5천의 결사대로 그 열 배가 넘는 5만 명의 신라군을 맞아 옛날 월왕(越王) 구천(勾賤)이 5천의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물리친 고사(故事)를 병사들에게 들려주고 죽을 각오로 전쟁에 임(臨)하니 네 번의 전투를 크게 이겨 신라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라의 어린 화랑(花郞)들의 목숨을 건 임전태세(臨戰態勢)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수적 열세 때문에 결국 다섯 번째 전투에서 대패하여 5천 결사대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니 이 모든 것이 지금으로부터 천사백여 년 전 황산벌에서의 이야기다.

 

황산벌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서 고려조에 연산군(連山郡)이란 지명을 얻은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벌곡면, 양촌면, 계룡시 등과 접하였고, 논산천에 이르러 금강과 합류하는 여러 지류(支流)가 흐르고 있으며, 계룡산에서 천호산,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준령(峻嶺)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분지(盆地) 형태의 고장이다.

 

이러한 지형조건 때문에 나당연합군이 수도 사비(泗沘)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는 백제 최후의 방어선이 이곳 황산벌 일대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성(山城)들에 설치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황산벌전투에서 신라, 백제 양군 5만 5천 명의 피와 땀이 흘러넘쳐 냇물을 이루었기에 황산벌과 황령재로 이어지는 벌곡면 일대의 세 골짜기를 나중에 한삼천(汗三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칠백 년을 이어온 역사 깊은 나라가 망하는 것이 말년에 실정(失政)을 일삼았다는 의자왕(義慈王)이나 그를 둘러싼 몇몇 간신의 우매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覇權國)이었던 당나라의 정복 정책과, 삼국이 정립(鼎立)하던 힘의 균형(均衡)이 백제의 팽창 정책으로 깨지면서 전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삼국이 너무 오래 유지되어 오면서 제각각 그 내부로부터 붕괴의 균열이 생긴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무너져가는 백제의 대들보를 어깨에 둘러메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마지막 승부에 나선 계백의 중과부적으로 느꼈을 장수로서의 참담함과, 올바르게 준비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역사에 대한 분노, 사직(社稷)과 백성을 향한 안타까움 등이 황산벌이 내려다 보이는 금남정맥의 함박봉에 선 나그네의 가슴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역사(歷史)란 돌고 돌아 백제의 흥망이 오늘날에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 없으니 올바른 지도자, 역사의식 있는 국민들이 옛일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느끼는 바 있어야 한다는 생각 간절하나, 속없는 필부(匹夫)일 따름인 우리 만고강산 금남종주대는 옛사람들의 피와 땀이 냇물을 이뤘다는 한삼천의 어느 계곡에서 알탕으로 폭염속 산행 후 흠뻑 젖은 땀을 씻어내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더란다.



황산벌을 굽어보다!


구간 : 금남정맥 제 5구간(덕목재~양정고개)
거리 : 구간거리(16.4 km), 누적거리(85.1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2년 9월 1일. 흙의 날.
세부내용 : 덕목재(08:20) ~ 요양시설 ~ 깃대봉 ~ 임도 ~ 함박봉(09:55)/휴식 ~ 황령재(10:50) ~ 212봉 ~ 정
자 봉우리 ~ 대목재 ~ 천호산(12:35)/점심후 13:50 出 ~ 304.8봉 ~ 윗대실고개 ~ 278봉 ~ 천마(15:15) ~ 팔각정/금바위/오랜 휴식 ~ 양정고개(16:20)            


총 소요시간 8시간.


 

2012년 8월 31일. 쇠의 날. 우리 만고강산 금남종주대에 집합 사발통문이 돌아 지난 구간 마쳤던 덕목재 인근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해리님 내외는 미리 내려가서 하룻밤 머물 곳을 챙기시고, 나와 뚜벅은 저녁 9시를 넘겨 석수역 앞에서 조우했다.

 

그런데 퇴근 무렵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온 견지낚시 동호회 선배의 부친상 소식이 들려와 뚜벅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단 조문을 하기 위해 분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향소가 있다는 분당 서울대 병원을 아무리 뒤져 봐도 상주인 선배의 이름이 없다. 그래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분당 서울대 병원이 아니라 분당 제생병원이라네??

 

아이쿠, 이제 하다하다 장례식장 찾는 일도 알바를 하는구나! 장례식장 두 군데 들러 조문하는 바람에 출발 시각이 많이 늦어 마음이 급한데, 다행인 것은 늦은 출발 때문에 주말 고속도로의 정체를 비껴날 수 있어 마음껏 속도를 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과속을 해서 경부, 호남 고속도로를 거쳐 선발대가 미리 도착하여 하룻밤 잠자리를 마련해 둔 벌곡중학교에 도착하니 시각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다. 폐교되어 인적 끊긴 중학교의 중앙 현관 테라스 아래 얼른 헝겊집 한 채 지어 놓고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파산적과 재회의 막걸리 잔을 돌렸다.


 

황산벌전투/黃山伐戰鬪 

 

황산벌 전투는 660년 음력 7월 9일 무렵에 황산벌(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었다.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 합하여 18만의 군사가 백제로 쳐들어갔다.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강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편과 지연작전을 써야 한다는 편이 나눠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5천 정예병을 뽑으면서 "한 나라의 군사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스스로 가족들을 죽이고 전열을 다졌다. 음력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렸다. 당시 달솔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계백은 가족들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나섰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옛 월왕 구천은 5천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용기를 다하여 싸워 국은에 보답하자"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과연 백제군은 사기가 올라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격파하였다. 이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투입하니, 반굴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반굴이 죽자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은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을 시켜 선봉에 서게 하였다. 관창을 붙잡은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며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탄식하며 돌려보냈다.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한 후 또다시 백제군에 쳐들어 갔다. 결국 계백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었다. 관창의 죽음에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계백은 죽었다. 이때 백제군은 모두 전멸한 것이 아니라 일부 좌평 충상, 달솔 상영 등 20명이 살아남아 신라의 포로로 잡혔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김유신에게 약속 기일이 늦은 것을 문제삼아 독군 김문영(金文穎)을 참수하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노하여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기일이 늦은 것만 책망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당할 수 없다. 먼저 당군과 결전을 치른 후 백제를 공략하겠다."라며 군문에 나서니 소정방은 김문영을 풀어주었다. 이후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어, 사비성 공방전을 치르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백제군의 저항은 계속되어 20여 성이 저항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이 친정하여 이례성(尒禮城)을 치니 저항군은 항복하였다. 11월이 되어 전공을 논할 시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최대한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그에 걸맞은 관직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기타 백제인들에게도 백제 시절의 서열을 고려하여 그에 걸맞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흑치상지 등의 백제 부흥 운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군이 백제 땅을 신라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점, 김유신과 소정방의 갈등 등이 이후 나, 당간의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금남정맥 제 5구간 덕목재~양정고개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폐교되어 연수원으로 변신했지만, 그나마 간판만 달았지 운영이 되지 않고 있는 벌곡중학교.

 

 

 

두어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아침 끓여 먹고 자리 정리했다. 허술하나마 화장실까지 있어서 이 폐교는 우리 같은 떠돌이 나그네가 하룻밤 쉬어 가기엔 딱인 곳이다. 깨끗이 주변 정리하여 다녀간 흔적을 없애고 벌곡면 한삼천리를 지나 덕목재로 향했다.

 

덕목터널을 지나 호남고속도로와 나란한 지방도로를 길게 올라 가면 덕목재가 나온다. 고개 너머에 주차하기 좋은 공터가 있어 그곳에 차 세우고 산행 준비를 했다.

 

 

# 3개월 만에 다시 서는 덕목재.

 

 

 

제각기 하루의 일용할 양식과 준비물들을 짊어지고 뒷목마을로 연결되는 임도를 따라 길게 올라갔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하루 엄청 무덥고 대기 불안정으로 한때 소나기를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습도가 높아 출발하자마자 땀이 삐질삐질 솟기 시작한다.

 

한차례 올라 고개에 이르면 우측에 짓다만 노인요양시설이 있다. 주인이 매어 두고 간 개들이 마구 짖어대다가 가까이 가자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인적 끊긴 곳에 버려져 외로웠던 것이다.

 

 

# 만고강산 중주대, 다섯 번째 금남길.

 

 

# 수 년째 공사가 중단되어 을씨년스럽게 낡아가는 요양시설.

 

 

 

요양시설을 뒤로 하고 숲으로 스며든다. 계단식으로 너댓 차례 오르면 깃대봉이 나온다. 깃대봉은 황산벌 전투 당시 주요 산성이 있던 곳이라 현재도 무너진 성터가 사면에 방치되어 있다. 

 

제법 가파르게 위로 치고 오르다 9부 능선쯤에서 우측으로 우회로가 나 있어 모두들 그 방향으로 진행하길래 "아니, 정상을 찍지 않고 그러면 안되지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몸은 나도 모르게 우회로를 걷고 있다~

 

이후 고만고만하게 오르내리며 길게 진행하게 되는데, 나타나는 봉우리 두어 개에도 우회로가 있어 편하게 진행한다. 그러다 내리막길을 내려 서면 '임도'가 눈 앞에 나타난다.

 

 

# 태풍 볼라밴이 쓸고 지나간 뒤라 등로는 온통 부러진 나뭇가지 잔해로 가득하다.

 

 

# 맨 뒷쪽의 깃대봉까지는 너댓 차례 계단식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

 

 

# 매서운 강풍을 동반했던 볼라밴은 숲속의 뿌리 얕은 나무들을 상당수 넘어뜨렸다.

 

 

# 깃대봉 이후는 비교적 편안한 길이 길게 이어진다.

 

 

# 그러다 만난 임도.

 

 

 

아이구야~ 임도파가 임도를 만났으니 당연히 임도길 탐방을 하려고 지도를 꺼내고 GPS를 확인하고 난리인데, 아무래도 이 임도는 생긴 모양이 정맥길과는 멀리 달아날 뽄새다.

 

그러나 기냥 앞장 서 가는 젊은 두 산적넘 때문에 털래털래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우려가 현실이 되어 임도는 점점 고도를 낮춰가며 정맥 마루금과는 멀어지는 형상이고 지도의 등고선도 우측으로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다.

 

결국 해리님 GPS로 위치 확인하고 임도가 마루금과 가까워진 곳을 어림잡아 사면을 치고 오르기로 했다. 임도를 벗어나 길 없는 사면을 치고 오르니 급한 경사와 미끄럽고 무른 사면의 비탈이 앞을 막아 엄청나게 힘이 든다. 바람 한 점 없는 숲속은 습하고 무더워 금세 온몸이 땀범벅으로 변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잡목이 있긴 해도 앞을 완전히 가로막는 수준은 아니고 가시덤불이 아니어서 잡아채거나 할키지 않아 그나마 조금은 나은 편이라는 것이다. 임도길 주장한 산적넘들 원망을 하며 힘들게 비탈길을 치고 오르니 다행히 정맥의 마루금이 나타난다. 이후 우틀하여 한차례 가파르게 오르자 해발 404m의 '함박봉'이 정상을 허락한다.

 

 

# 임도를 따르는 바람에 길을 잃고 길 없는 비탈길을 치고 오른다.

 

 

# 한차례 된통 혼이 난 이후 정맥길에 합류한 후 다시 한차례 밀어 올렸다.

 

 

# 함박등.

 

 

# 산불감시시설이 있다.

 

 

# 길 주의 구간이다. 정맥은 정상 입구에서 좌틀!

 

 

# 지나온 정맥길.

 

 

 

함박봉은 한자로 '다 咸(함)', '후박나무 朴(박)' 자를 쓰는데, 한자 이름은 그냥 한자로 음차된 것이고 크게 밝은 산봉우리라 '한밝봉'이라 부르다 음차되면서 변음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태백산(太白山)이 '대박산', 즉 '한밝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고 그와 맞은 편의 함백산(咸白山)이 역시나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니, 이 함박봉도 그러한 유래를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 유추가 의미가 있는 것이 함박봉 정상에 서면 정면으로 논산 연산면의 연산리, 신암리, 신양리의 넓은 들이 눈 앞에 펼쳐 지고, 그 들판을 둘러 싸고 있는 산군(山群)들 중 인근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기 때문이다.

 

눈 아래 펼쳐지고 있는 저 연산면 일대의 들이 바로 계백장군과 5천 결사가 무너져 가는 백제의 마지막 명운을 건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였던 황산벌이다. 아마도  당시에 이 봉우리에도 성곽이 있었을 것이고 척후병이나 별동대가 이 봉우리에서 피로 물들어 가는 황산벌을 굽어보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 흘러 산경표 따라 이 땅의 산길을 걷고 있는 우리 만고강산 종주대의 길 없는 사면 치고 오르느라 지친 귀에도 그 날의 함성과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아따~ 이 일을 으짜야 쓰까잉~?" "워메 워짠디유~~?" "나라가 망할랑가 보네유우~~"

 

그러나 그날의 비극이 신라의 삼한일통(三韓一統)으로 이어지고,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국맥(國脈)이 형성되었으니, 그것이 역사의 대승적 귀결이고 'Poetic Justice(시적 정의)'로 이어졌다 하면 너무 역사를 승자의 시각으로만 본 것일까?

 

함박봉 정상에서 황산벌을 굽어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뙤약볕 강렬하여 동무들은 모두 그늘 찾아 아래로 내려가기 바쁘다. 역사의 감회는 머릿 속의 이야기이고 지치고 힘들어 허기진 배 채우는 일은 뱃 속의 일인데, 후자가 더 강렬하고 직집적이어서 나도 얼른 일행들을 따랐다.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정상 바로 아래 그늘에 짐 내리고 막걸리통 꺼내 흔들기 바쁘다! "어서 먹세!"

 

 

# 함박봉은 정면으로 황산벌을 마주하고 있다. 조망이 박무 짙어 깨끗하지는 않다.

  


# 660년 당시 피 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 지금은 눈산군 연산면이다.

 

 

# 안주 꺼내기 전에 이미 한 순배 돌아 간다.

 

 

# 빛깔 고운 꽃무릇.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주연(酒宴)은 오래 이어져 남들 벌써 산봉우리 몇 개 넘을 시간을 보낸 이후에야 겨우 짐 꾸려 다시 길을 나섰다. 가파른 계단길을 길게 내려 가는데, 중간에 지난 태풍에 떨어진 밤송이들을 대량으로 만난다.

 

아직은 알밤이 들어 찰 시기라 아니라 큰 기대 않고 몇 개를 열어 보는데, 풋밤이기는 하지만 알알이 굵은 밤들이 가득하다. 다들 달려 들어 밤 까기에 정신이 없다. 그 순간 정맥길은 그들의 관심에 없다.

 

"안돼! 이러다가는 산길 가지도 못해!" 억지로 손 털고 일어선다. 떨어진 밤송이의 채 2, 30%도 못 깟지만 모두들 주머니가 불룩하다. 다시 가파르게 길게 떨어져 내리면 앞이 툭 트이며 넓은 포장도로가 지나는 '황령재'에 내려 서게 된다.

 

 

# 계단길 따라 길게 내려 간다.

 

 

# 태풍에 떨어진 밤송이가 등로에 가득하다.

 

 

# 황령재.

 

 

# 황산벌 전투 당시 신라군은 이 고개를 넘어 황산벌로 넘어 갔다.

 

 

# 김유신의 삼로(三路)이다.

 

 

황령재는 그 옛날 김유신이 백제를 치기 위해 진격했던 삼로(三路) 중 하나로 신라군은 이 고개를 넘어 황산벌로 진격했다. 고개 한 켠 넓은 공터에는 이곳이 황산벌 격전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고 화장실도 갖춰져 있다.

 

뙤약볕 강렬한 고개를 넘어 벌곡면 방향으로 넘어가면 좌측 길 건너에 들머리가 나타난다. 숲으로 들어가 한차례 올리면 벤치가 있는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벤치에 앉아 간식 먹으며 휴식했다.

 

 

 

# 2차선 포장도로가 넘어가는 황령재.

 

 

# 황령재 들머리.

 

 

# 익산 파산적.

 

 

# 오랜만에 만난 계요등. 덩굴성으로 거담, 거풍, 이질 등에 약재로 쓰인다.

 

 

# 한차례 올려 만난 봉우리의 벤치에서 휴식.

 

 

이후는 고만고만하게 오르내며 잔잔히 진행했다. 그러다 한차례 밀어 올리면 정자가 있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낙뢰 피해가 있었는지 낙뢰를 주의하라는 팻말이 매달려 있다.

 

정자에 앉아 한참을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로프가 설치된 급경사 내리막길을 깊게 떨어져 내리는데, 그 내리막의 끝이 '대목재'이다. 그 고개를 넘어 다니는 사람이 이제는 없을 법 하지만, 이정목은 양쪽 마을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 잔잔히 진행하다가 한차례 밀어 올리면,

 

 

# 정자가 있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 지도에는  322봉으로 나와 있다. 초반에 알바하면서 진을 뺀 이후 모두들 많이 힘들어 했다. 엄청 무덥기도 하고.

 

 

# 휴식 후 다시 가파른 내리막을 깊게 떨어져 내린다.

 

 

# 대목재.

 

 

# 다음 포스트는 천호산.

 

 

 

고개를 지나 곧장 위로 치고 오른다. 가파르게 내려왔던 것보다 조금 더 높게 치고 오르게 되더니 봉우리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또 떨어져 내리라고 한다.

 

이후 잔봉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무더위에 지쳐 다들 많이 힘들어 한다. 그러다 한차례 올려 봉우리에 이르면서 이곳이 천호산인가 헸지만, 정상은 아니고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한차례 더 올려야만 '천호산' 정상에 이를 수 있다. 12:35

 

 

# 353봉이라고 누군가 적어 두었다.

 

 

# 가야 할 정맥길. 우측의 봉우리는 구고운재로 정맥에서 갈라져 나간 399.7봉.

 

 

# 넓은 길이 나타나 방화선인가 했지만, 주위 확인하니 옛성터다.

 

 

# 무더위에 다들 지쳐서 헉헉거린다.

 

 

# 힘들게 도착한 천호산 정상.

 

 

 

천호산에서 짐 내리고 점심 식사를 하는데 더위를 먹었나? 입맛이 없어 밥은 조금만 먹고 막걸리도 한 잔만 마시고는 그만 두었다. 여전히 밥맛, 술맛 좋은 사람은 여러 잔을 연달아 마시고...

 

무려 한 시간 20분 간이나 오래 휴식한 후 다시 짐을 챙겨 길을 떠났. 정상을 넘어 아래로 내렸다가 한차례 오르더니 이후는 계단식으로 길고 완만하게 고도를 낮춰 갔다.

 

앞서 가던 뚜벅은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는 듯하더니 바람 없고 무더운 데다 모기들 덤벼드니 포기하고 다시 짐을 챙긴다. 아래로 내려 고개를 지나고 한차례 올리면 이후는 편안한 등로가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 앞이 툭 트이며 넓은 고개와 농장이 나타나고 그 너머로 천마산이 건너다 보인다. 이 고개는 이름이 없는 무명고개이다. 바로 우측에 윗대실마을이 있으니 지도에는 없지만 '윗대실고개'라 부르면 되겠다.

 

 

# 이정표가 수시로 나타난다.

 

 

# 어느새 참취가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 지도에 없는 고개.

 

 

# 앞이 툭 트이며 농장과 너머로 천마산이 보인다.

 

 

# 윗대실고개.

 

 

# 천마산까지는 서너 차례 계단식으로 올려야 한다.

 

 

# 배롱나무 꽃 그늘 곁으로 진행.

 

 

 

# 만고강산 종주대.

 

 

# 폐농장 건물 좌측으로 올라갔다.

 

 

 

천마산까지는 세 개의 봉우리를 연달아 올라야 한다. 살짝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고개가 나타나고, 곧장 위로 치고 올라 벤치가 있는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오늘 구간에는 봉우리마다 벤치가 설치된 곳이 많이 있는데, 그 벤치 만든 사람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만날 때 마다 앉아 주었다.

 

한숨 돌린 후 다시 그 각도 그대로 위로 밀어 올리면 로프가 설치된 오르막이 위로 이어진다. 헉헉거리지만 한숨에 올리면 천마산 전위봉인데, '두리봉'이란 지도에 없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래로 내렸다가 고개를 지나고 이번에는 길고 완만하게 고도를 올리면 '천마산'에 오르게 된다.

 

 

# 이름없는 고개.

 

 

# 천마산 전위봉. 지도에 없는 두리봉이란 이름표가 매달려 있다.

 

 

# 천마산은 의외로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 돌탑이 있는 천마산.

 

 

 

정상에 벤치가 있으니 또 쉬어야지! 오늘 참으로 많이 쉰다. 짧은 거리에 오르내림 적은 구간이라 부담없이 마구 쉬어 주었다. 정상을 지나 잠시 가면 송전탑을 지나게 되고 잠시 더 진행해서 '금바위'와 '팔각정'에 이르게 된다. 이곳 팔각정은 계룡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 아예 짐 다 풀고 남아 있는 막걸리 모두 비울 요량으로 오래 휴식했다.

 

 

# 이제 거의 다 왔다.

 

 

# 팔각정.

 

 

# 계룡시.

 

 

# 금바위.

 

 

 

 

팔각정에서 길게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는 정말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아, 언제나 그렇듯이 한차례 올려 주는 곳도 있긴 하다. 편안하게 가다가 한차례 올려 248.3봉'을 넘어 아래로 내리면 오늘의 목적지인 계룡시에 있는 '양정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16:20

 

 

# 248.3봉.

 

 

# 양정고개.

 

 

# 계룡 시내로 연결된다.

 

 

 

양정고개는 곧바로 계룡 시내로 연결된다. 날머리 앞에 경찰 지구대가 있어 그 그늘에서 몸에 묻은 먼지 털어내고 스틱을 접었다.

 

오늘 구간은 짧고 완만한 구간이라 남들은 대여섯 시간 만에 주파하는 곳이지만, 우리는 다들 오랜만에 정맥길에 나선데다 엄청나게 무덥고 습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산행 처음에 길 없는 사면 치고 오르느라 진을 뺀 탓도 있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쉰 까닭이기도 하다.

 

그래도 내일 산행을 연속으로 하지 않고 오늘 하루만 하기로 중간에 약속한 지라 느긋하게 여유부리며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길 건너 가겟집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고 택시 불러 덕목재로 복귀해서 차량 회수했다. 이후 지난 번에 봐 두었던 한삼천리 계곡으로 가서 땀에 절은 몸을 씻어 냈다.

 

 

# 한삼천리 계곡.

 

 

# 황산벌 전투 당시 이 계곡은 피와 땀으로 냇물을 이뤘다고 한다.

 

 

# 휴가철 지나 한산하다.

 

 

# 사진찍는다고 하니 다들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

 

 

# 한삼천 물가에 하룻밤 잘 자리를 마련.

 

 

# 잡어 매운탕 끓여 놓고 뒷풀이를 했다.

 

 

 

섭외력 뛰어난 우리 팀, 한삼천 계곡가에 있는 음식점을 섭외해서 매운탕 팔아 주는 조건에 하룻밤 쉴 곳을 허락받고 산행의 피로를 시원한 알탕과 술 한 잔으로 풀었다.

 

땅거미 찾아들고 술잔이 여러 차례 돌 무렵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지나가는 소나기인가 했지만 오래도록 많이도 퍼붇는다. 이쯤되면 내일 산행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 훌륭한 선택이었음을 서로들 공치사하기 바쁘고, 간만에 기상청이 天氣(천기)를 잘 읽었다고 칭찬도 쏟아진다.

 

오래오래 술잔 돌리다가 지쳐서 먼저 텐트로 들어 갔는데, 젊은 뚜와 파는 밤이 이윽도록 술잔을 나누었고 먼저 잠 잔다고 한참을 곁에서 난리를 피우지만 어찌나 피곤했던지 일어나지 않고 그냥 계속 잠이 들었다.

 

뒷날 일찍 일어나 짐 꾸려 길을 나섰다. 금강변에서 맛있는 매운탕 먹으려다 실패하고 해리님 고향인 공주에서 맛난 아침 먹은 후 각자의 서식지로 돌아 갔다.

 

 

# 물안개 가득한 비단강.

 

 

# 금강은 한 주일 사이에 자전거로, 다시 발길로 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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