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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명산]36(청량산/淸凉山)-퇴계(退溪)와 청량(淸凉)!! 본문
何處無雲山 하처무운산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마는/ 청량산이 더더욱 청절하다네/ 정자에서 매일 먼 곳을 바라보면/ 맑은 기운이 뼈까지 스며든다네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望山(망산)'
세상에는 명산(名山)이 허다하다. 명산은 산이 높아서만 골이 깊어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명산이 명산이기 위해서는 '선기(仙氣)'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선기 어린 산은 그 선기를 받고 자란 사람을 키워낸다. 이른바 '명인(名人)'이다. 산은 명인을 키워내야 비로소 명산의 품격(品格)을 완성한다. '남명(南冥)'을 키워낸 '지리산(智異山)'이 그렇고 '퇴계(退溪)'를 있게 한 '청량산(淸凉山)'이 그러하다.
남명 '조식(曺植)'과 퇴계 '이황(李滉)'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이다. 1501년은 신유년(辛酉年)으로 연산군 재위 7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 후기 영남 사림(士林)의 태두(泰斗) 두 사람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늘이 조선에게 허락한 축복이다.
이 동갑내기 두 사람은 낙동강을 경계로 한 경상도의 우도(右道)와 좌도(左道)의 합천 삼가(三嘉)와 예안 온계(溫溪)에서 태어나 각각 지리산과 청량산의 품에서 스스로의 학문을 키웠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이 땅 유학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지리산은 큰 산이다. 이 땅 백두대간의 종점이자 상징이다. 1,915m에 달하는 주봉인 천왕봉 외에도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된다. 3개 도 5개 시군에 이르는 그 폭은 45km나 된다.
남명은 지리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다. 높고 깊으며 험준한 지리산을 닮아 그의 기질은 강의직방(剛毅直方)하였다. 직선적이고 준엄한 성품의 그는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지리산 자락에 머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반면 청량산은 그 높이가 870m에 불과하여 지리에 비길 것이 못 된다. 백두대간에 포함되지도 못하였고 낙동정맥에서도 빗겨나 있다. 하지만 청량산은 깍아지른 암봉이 연꽃처럼 활짝 피어 있는 선기(仙氣) 어린 산이다.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명호를 거쳐 청량산을 휘감으며 연꽃이 자랄 물을 공급해 주고 있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된다"고 했다. 높지 않고 깊지 않지만 선풍(仙風) 넘치는 산이다. 따라서 명인을 키워내기에 충분한 명산이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을 무척 사랑하였다. 벼슬길에 나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고향인 경상도 예안(禮安)의 온계(溫溪)에서 평생을 살았다. 온계는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은혜리를 말한다.
온계는 낙동강과 청량산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퇴계는 평생 청량산에 기대어 살았다.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칭하고 청량산을 노래한 시가 50여 편이 넘었다. 그만큼 청량산을 사랑하였다.
그의 청량산 사랑은 큰아버지 이우(李堣)에게서 비롯되었다. 이우는 상청량산암(上淸凉山庵)에 머물렀다. 열두 살 때부터 퇴계는 큰아버지 이우에게 가서 글을 배웠다. 글공부를 위해 청량산을 오르내리면서 퇴계는 청량산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리하여 스스로 청량산인이라 부르며 그 산자락에 머물다 그 산자락에 묻혔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안동(安東)의 청량산(淸凉山)은 모두 36봉(峯)으로 태백산(太白山)에서 낙맥(落脈)되어 예안강(禮安江) 위에 이르러 우뚝 솟았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토산(土山) 몇 봉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으나 강을 건너 동부(洞府)에 들어가 보면 4면(面)에 석벽(石壁)이 둘러졌는데 그 둘레가 4장(丈)쯤 되고 돌들이 기괴하고 험악하여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안에는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곧 최고운이 거기에서 바둑을 두던 곳으로 바둑판과 똑같은 돌이 있고 또 연대사(蓮臺寺)가 있는데 거기에는 신라 김생의 친필로 된 불경(佛經)이 많으며 다른 사찰(寺刹)에도 그 친필이 있다.” 하였다. (安東淸凉山 有三十六峯 自太白下野 而結峙於禮安江上 自外望之 只土巒數朶耳 渡江入洞府 四面石壁 周回皆丈尋 山石奇險 不可名狀 內有爛柯臺 卽崔孤雲奕棋處 有石如方罫 有蓮臺寺 寺多新羅金生親筆所書佛經 其他寺刹 亦有之云)
밖에서 보면 토산 몇 봉우리에 불과하나 안을 들여다보면 깎아지른 암봉으로 이뤄진 험산(險山)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품을 갖춘 산이다. 그 성품에 반해 최고운(崔孤雲)과 김생(金生)은 이 산에서 머물렀고 퇴계는 평생을 함께하며 그 성품을 이어받았다.
사람과 산이 모두 겉으로는 온화하고 포용적이나 안으로는 굳세고 강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은 그 품으로 명인을 키워냈고, 사람은 산의 품격을 오래오래 후세인들에게 이름 남게 만들었다.
청량산은 그런 산이다. 그 외유내강의 성품이 아름다워 100대 명산의 반열에도 올랐다. 품격있는 산이니 오래전부터 그 품속에 스며들고 싶었던 산이다. 다만 인연이 여의치 못해 청량과의 만남이 지지부진하였는데, 가고팠던 가을날이 아니라 이른 봄날에 기회가 생겼다.
인연이란 기회가 올 때 맺어야 하는 법이다. 얼른 괴나리봇짐 챙겨 청량의 진면목을 친견코자 길을 나섰다.
퇴계(退溪)와 청량(淸凉)!!
일시 : 2016년 3월 12일 흙의 날 세부내용 : 입석 주차장 ~ 청량사 갈림길 ~ 응진전 ~ 풍혈대 ~ 고운대 ~ 총명수 ~ 치원암터 ~ 어풍대 ~ 김생굴 ~ 경일봉갈림길 ~ 자소봉 ~ 탁필봉 ~ 연적봉 ~ 뒷실고개 ~ 하늘다리 ~장인봉 ~ 두들마을 ~ 청량사 ~ 입석 주차장.
홀로 산꾼들의 병신년 시산(始山) 모임이 소백산 죽령 언저리로 결정되었다. 나는 근래 이 모임에 한동안 격조하였다. 작년 7월 허리병을 얻고 나서부터이니 한 10개월 되었다.
오랜만에 산동무들 만나러 가는 길이라 많이 설레었다. 게다가 소백은 백두대간 이후 미방문이었으니 그 산향기 맡은지 무려 십 년이 넘었다. 때문에 하루 전날쯤 가서 소백 주능을 모두 밟아보고 그 산 속에서 하룻밤 머물 계획을 세웠다. 소백 종주도 하고 산동무도 만나면 일석이조가 따로 없을 터이다.
헌데, 바람결에 몇몇 산동무들이 청량산 산행을 계획한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청량산은 내가 오래 아껴둔 산이다. 작지만 뺴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곳이고 그 품에 보석 같은 산사(山寺)를 품고 있어 늘 동경하였던 곳이다.
다만 그 이름이 말하듯 맑고(淸) 서늘한(凉) 산이라 어느 늦여름이나 익은 가을에 찾을 작정이었고, 이왕이면 그 산정(山頂)에서 하룻밤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동무들이 시산 전야 산행으로 청량을 오른다고 해서 잠시 고민하였다.
하지만 답은 이내 나왔다. 가을밤 청량산정에서의 하룻밤은 얼마든지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오랜만의 해후(邂逅)에 반가워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하여 야영짐 외에 가벼운 당일 배낭 따로 챙겨 집을 나섰다.
청량산/淸凉山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먼 고장이다. 집에서 꽤 일찍 출발하였음에도 청량산 입구에 도착하니 시각은 이미 11시를 넘기고 있다. 낙동강은 이곳 청량을 휘감는 곳에서는 명호강이라 불린다.
# 강을 건너 맑고 서늘한 산의 품으로 스며든다.
# 산동무들은 이미 한두 시간 전에 도착하였단다. 입석에서 출발하여 산속으로 스민지 한참이다.
# 입석주차장에 차량들이 꽤 서있다. 산동무의 낯익은 차량도 보인다.
# 안으로 잠시 더 올라가면 골짜기 우측에 있는 청량산성과 축융봉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 들머리 초입에 권성구(權聖矩)란 이의 시비가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인조 20년에 태어나 숙종 34년에 졸하였다. 66년간의 삶이었다. 호를 구소(鳩巢), 즉 비둘기 둥지라 하였다. 숙종 32년 그의 나이 64세 때 지인들과 자기 고장에 있는 청량산 산행을 하고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란 산행기를 썼다. 자료를 구해 내용을 읽어보니 산행기가 아니라 유람기이다. 청량산 입구까지는 말을 탔고, 산에서는 승려들에게 가마를 메게 했다. 예전 한량들은 승려들을 가마꾼으로 썼다. 그의 나이 64세 행적이니 그럴만 했다. 며칠 간의 산행 동안 수십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저 시비에 적힌 시도 그때의 작품이다. 옛사람들의 공부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산행 한 번에 시 수십 편과 책 한 권이 탄생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시 한 편도 감상해보자. 勝區寧獨往(승구녕독왕)/ 吾黨二三同(오당이삼동)/ 何處淸凉是(하처청량시)/ 忽看揷翠空(홀간삽취공)/ 명승지를 어찌 혼자 가리오?/ 우리들 몇이서 함께 하였네./ 어디에 청량산이 있는가?/ 갑자기 공중에 푸른 봉우리 보이네.
# 원효대사도 이곳 청량산에서 도를 닦은 흔적을 남겼다. 명산이니 여러 명인들의 흔적이 있다.
# 다른 산객들과 함께 들머리로 스며든다. 산동무들과는 한 시간 반 이상 뒤쳐저있다.
# 청량산은 동굴이 발달한 산이다.
# 한차례 올리면 갈림길이 나온다.
# 함께 출발했던 산객들은 청량사로 향하고 나는 우측길을 택해 자소봉을 향한다.
# 나무계단길이 길게 이어진다.
# 암벽 곳곳에 동굴이 산재해 있다.
# 청량사 기와장에 씌여진 만델라의 글이 좀 생뚱맞기는 하나 그 의미가 좋아 여러번 읽어 본다.
# 청량산 입구로 향하는 골짜기가 내려다 보인다.
# 명호강 건너편 관창리 만리산 자락의 고랭지 채소밭이 보인다.
# 두어차례 구불구불 모퉁이를 돌아 오르면 건너편 산자락에 암자 하나가 외로이 있다.
# 응진전(應眞殿)이다.
# 응진전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 건립되어 있다.
# 응진전은 외청량사(外淸凉寺)라고도 한다. 원효대사가 머문 곳이고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공민왕의 황후인 노국공주가 기도를 올린 곳이라 전한다. 금탑봉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자리하였다. 뒷쪽 벼랑 위에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는 동풍석(動風石)이 얹혀 있다.
# 두 개의 암자가 있는데 바깥 건물은 무위당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요근래 지어졌는지 목재가 새롭고 밝다.
# 하늘을 향해 곶추서 있는 절벽의 위용이 대단하다.
# 법당 앞에 한 뼘 넓은 조망처가 있다. 주세붕(周世鵬)이 경유대(景遊臺)라 이름 지은 곳이다.
# 진리에 응답하는 곳이다.
# 암벽을 휘감아 돈 바람이 풍경을 건드려 딸랑딸랑 맑은 소리 울려 퍼진다.
# 마음이란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 모양을 갖추는 것이라 한다. 말은 쉬워도 실행은 어려운 일이다.
# 운치있는 암자이다. 오래 머물며 그 우아한 경치를 감상하였다.
# 응진전을 돌아가면 고운 최치원이 공부하였다는 풍혈대가 있다.
# 맑은 바람이 샘솟는 동굴이 있는 모양이다. 응진전에서 시간 지체 심하여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 청량사 좌측에 연화봉이 우뚝하다.
# 바위 암봉이 연꽃송이처럼 피어 올랐다.
# 청량사가 온전히 건너다 보이는 이곳이 고운대이다. 고운은 명산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나중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 연꽃이 꽃잎 피어 벌어진 그 화심(花心)에 사찰을 앉혔다.
# 아름다운 산에 아름다운 사찰이 자리하였다.
# 청량사는 원효가 창건하였다는데 일설에는 의상이 세웠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원효는 617년생이고 의상은 625년생이다. 여덟살 차이의 선후배 승려 둘이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다가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대각(大覺)하여 돌아서서 저자거리로 들어갔고 의상은 당나라로 가서 화엄의 진리를 붙들었다. 신라 불교의 양대산맥으로 이 둘이 세웠다는 절이 우리나라 곳곳 없는 곳이 없다. 법력 뛰어났던 고승이니 축지법과 조화술을 부려 전국 팔도를 돌며 각각 수백 개의 사찰을 창건하였을 것이다.
# 풍경은 멀리서 보아야 티끌을 생략하고 아름답게 볼 수 있다. 연꽃송이 같은 청량산의 모습과 꽃술 속에 자리한 청량사의 그림이 하 아름다워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그 자리에 오래오래 머물며 감상하였다. 동무들 산 꼭대기에서 기다리는데 혼자 저 경치에 취했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범종각이 오색 연등을 두르고 있다.
# 연꽃같이 아름다운 산과 사찰이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 총명수(聰明水)이다. 이 물을 마시면 총명해진다고 한다. 최치원은 원래 천재였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18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신라 말기 3최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유불선(儒佛仙)에 모두 통하였다. 그런 천재가 이 물을 마시고 더욱 총명하여졌으니 그 끝을 가늠키 어렵다. 종국엔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다. 아둔을 면하고 싶어 나도 한 잔 마셨다.
# 총명수 곁에는 고운의 이름을 붙였다는 치원암터가 있다.
# 퇴계가 이 바위벽에 글을 남겼다는데 지워지고 다른 이들이 글을 새로이 남겼다.
# 곁에는 어풍대(御風臺)가 있다. 바람을 제어하는 곳이란 뜻이다. 열어구(列御寇)가 바람을 타고 와서 열흘간 머물다 가서 어풍대라 불렀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열어구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정(鄭)나라의 사상가이다. 열자(列子)라고 불렀다. 도가(道家)의 대표적 인물이니 신선이 되었을 터. 청량산의 경치를 보고자 바람타고 왔을 법한 옛 이야기이다.
# 어풍대의 조망이다. 열어구가 열흘쯤 넋을 잃고 바라봤을 법한 경치이다.
# 청량사 우측 바위 절별 아래 산꾼의 집이 건너다 보인다. 달마도 명장이 사신다는데 가보지는 못하고 멀리서만 보았다.
# 자소봉, 연적봉, 탁필봉이 올려다 보인다.
# 봉우리 이름에 유불선(儒佛仙)이 모두 들어있다.
# 청량사로 건너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 경일봉 갈림길.
# 소나무 한 그루 청량사를 향해 몸을 굽혔다.
# 그 소나무 가지 넣어 사진 한 장 남긴다.
# 김생굴이다. 규모가 크다.
# 김생이 앉아 글씨를 썼을 바위벽 앞에 나무 한 그루 주인의 모습으로 서 있다.
# 응달진 곳이라 얼음이 아직 남아있다.
# 바위벽 앞에 홀로 선 나무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나무 껴안고 선기를 받아본다.
# 김생폭포. 옥홍횡음간중천(玉虹橫飮澗中泉). 폭포에 걸린 무지개가 폭포물을 마시는구나!
# 봄 가뭄 심해 폭포물은 말라 있다.
# 하지만 방울방울 떨어진 물방울이 동글동글한 얼음 구슬을 만들었다. 햇빛 좋은 날엔 무지개가 어릴 수도 있겠다.
# 김생굴. 김생(金生)은 통일신라 성덕왕때의 서예가이다.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왕희지(王羲之) 필적한 명필이었다. 입신의 경지에 이른 글씨라는데 불교에 관련된 글씨들이 지금껏 남아 있다. 호불불취(好佛不娶), 부처를 좋아하여 장가를 가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청량사가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글씨 공부를 하였다는 설화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 그런데 김생굴 벽면에는 김생의 글씨 대신 무속의 일월성신도가 새겨져 있다. 둥근 태양 둘레로 일월성신 산천후토(日月星辰 山川后土)란 글씨가 적혀 있다. 다만 돌이 떨어져나가 그런지 원래 없었는지는 몰라도 辰과 土는 보이지 않는다.
# 글씨 공부하기에는 좁아 보인다.
# 김생굴을 돌아 나가면 청량사의 옆모습이 보인다.
# 하얀 불탑의 모습이 멀리서도 경건함을 불러 일으킨다.
# 머리 꼭대기에 소나무를 얹은 암봉의 모습이 불두(佛頭)를 연상시킨다.
# 김생굴을 지나 본격적으로 자소봉을 향한다. 등로가 휘감는 곳에 옛 사찰의 흔적이 있었음직한 공터가 있다.
# 한차례 위로 올린다.
# 곧 이정목이 있는 능선에 올라 서게 된다. 이곳에서 우틀하여 곧장 자소봉으로 치고 오르게 된다.
# 봉화 영양 일대의 오래된 소나무에는 이렇게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항공유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라고 하는데, 해방후 6,70년대에도 송진 채취를 하였다고 하니 어느 시대 흔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 가파른 능선을 따라 길게 올라간다.
# 나무 울타리 쳐진 비탈길을 따라 땀 흘리며 올라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 자소봉은 조금 더 올라 가야하고 그 정상 찍고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한다.
# 자소봉은 봉우리도 뾰족하고 오르는 길도 뾰족하다.
# 정상은 촛대처럼 뾰족한 암봉이라 오르지 못한다. 다만 그 앞 암봉에 정상석이 서 있다. 자소봉(紫宵峰)은 원래 보살봉이라 불렸는데 주세붕(周世鵬)이 자소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 주세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풍기군수로 있을때 백운동 서원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뤘다.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는데 모두 풍기군수로 있을 때 일이다.
# 우측 너머로 문명산 자락에 위치한 산동네가 건너다 보인다. 지도를 보니 윗뒤실이라 적혀 있다.
# 행정구역으로는 명호면 북곡리이다. 동네 지붕을 모두 파란색으로 칠했다.
# 가야할 정상쪽 산봉우리는 능선 너머에 있다.
# 다만 정면 축융봉(祝融峰)으로는 조망이 열려 있다.
# 축융봉에는 청량산성이 있다. 저곳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던 공민왕의 흔적도 있다한다. 나중에 저쪽 능선도 한번 더듬어 보아야겠다.
# 자소봉 한 켠에 큰 바위얼굴이 있다.
# 갈림길로 돌아가 탁필봉을 향한다.
# 붓 한 자루 세워 놓은 듯한 봉우리이다.
# 탁필봉 바로 곁에 연적봉으로 오르는 철계단이 있다.
# 소나무 위태롭게 서 있는 좁은 정상에 정상석이 서있다. 탁필, 연적 모두 유교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주세붕이 유학자이니 그럴 것이다.
# 지나온 탁필봉이 건너다 보인다. 정말 붓 한 자루 세워둔 듯한 모습이다.
# 정상인 장인봉도 건너다 보인다.
# 새로 만들었다는 구름다리도 보인다.
# 소나무 가지 하나 넣어 청량산 그림에 맛을 더한다.
# 연적봉을 내려와 산동무들과 조우했다. 햇살 좋은 곳에 자리하여 점심상을 펼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의 만남이라 반가움이 컷다. 모두 내가 그동안 이 모임에 격조했던 탓이다. 반가운 마음에 오래 참았던 막걸리 몇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 긴 점심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었다. 간만의 만남이라 오고 갈 이야기가 많았다. 그렇게 긴 점심 마치고 다시 정상을 향해 길을 나섰다.
# 연화봉이 머리에 소나무를 얹고 우뚝 서있다. 산세가 진안 마이산과 여러모로 흡사하다.
# 청량사를 연꽃잎처럼 오무려 품고 있는 경일봉과 연화봉.
# 청량사 하얀 석탑이 꽃속의 수술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다.
# 봉우리 하나 넘어 가파른 철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 뒷실고개이다. 일부지도에는 두실고개라 적혀있다. 청량사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 자란봉까지는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자란봉 너머에 구름다리가 설치되어있다.
# 청량산 하늘다리라고 적혀있다.
# 2008년에 건설되었다니 8년쯤 된 신품 다리이다. 이곳 자란봉과 건너편 선학봉을 잇는 길이 90m로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이다. 지상고는 70m이다.
# 이 다리가 없을 때는 정상을 가기 위해 꽤 고생을 하였겠다.
# 윗두실마을이 바로 뒷편이다.
# 선학봉 좌측의 암봉이 역광 속에 그림처럼 솟아있다.
# 학 한 마리 날아 오면 그야말로 그림이 완성되겠다.
#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에 손을 댄 것이기는 하나 그로인해 자연이 좀더 인간과 가까워졌다면 감내할 만한 일이다.
# 옛사람의 그림에 나올만한 풍광이다.
#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 있다.
# 다리를 건너와 자란봉쪽을 돌아본다.
# 선학봉을 내려와 잠시 아래로 떨어지며 봉우리를 우회한다.
# 청량폭포 갈림길. 정상을 다녀와서 다시 이곳으로 복귀해야한다.
# 퇴계의 시가 현판에 걸려있다. 퇴계는 말년에 사람들에 의해 청량산이 개간되는 것을 한탄하였다.
# 갈림길 고개를 지나 정상을 향한다.
# 가파른 철계단이 마지막 진을 빼게 만든다.
# 청량산의 암봉은 대부분 역암(礫岩)으로 구성되어 있다. 풍화작용으로 인해 바위 내부가 팽창하면 역암을 이루는 자갈이 떨어져 나가 바위 표면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다. 이를 타포니지형이라 부른다. 진안 마이산이 대표적이다. 이곳 청량산의 암석구조 역시 마이산과 흡사하다.
# 드디어 청량산 정상이다. 정상부는 제법 넓다. 하지만 약간 경사가 져 있어 야영자리로는 마땅치 않다.
# 신라 제일의 명필 김생의 글을 집자(集字)하였다 한다. 글씨 보는 눈이 부족한 내 눈에는 천하제일인 이유를 잘 모르겠다.
# 뒷면에는 주세붕의 글이 적혀있다. 황학을 타고 신선세계로 가고싶다고 적어두었다. 고개 둘러보지만 내 눈에도 황학은 보이지 않는다.
# 정상에 이르렀으니 정상주 한 잔 나눠야한다. 저마다 홀로 산길 걷다가 이런 기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우리들이다.
# 청량산정의 감회를 모두 즐긴 후 하산길에 나섰다. 갈림길로 복귀해서 청량폭포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 이 하산길은 군더더기 없는 내리막 코스이다. 무릎이 팍팍해지도록 길고 가파르게 내리막을 내려간다.
# 그 내리막 끝에 '두들마'란 산골마을이 나타난다.
# 도대체 이 가파른 산비탈에 어떻게 마을을 만들었을꼬? 또 무엇을 먹고 살았을꼬? 아마도 아랫 세상 인간세에서 손바닥만한 땅 한 뼘도 갖지 못한 이들이 이 산속으로 밀려 들어왔을 것이다.
# 두들마에서 고개 들면 청량의 산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 먹고 살기는 힘들어도 호연지기는 충분하였겠다.
# 두들마 좌측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너가구가 살고 있는데 비어있는 집도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있는 집도 있다. 다만 어느집이나 인기척은 전혀 없다.
# 그래도 이런 손바닥 만한 땅을 확보한 집도 있다. 어느 집이나 우측 아래는 낭떠러지이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술버릇이 좋아야할 것 같다. 술 먹고 잠깐 비틀거리다가는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겠다.
# 술 먹지 않아도 경치가 훌륭해 늘 취해 있을 수 있겠다.
# 산비탈 작은 소로를 따라 산을 휘감는다.
# 돌아보면 뿌연 봄 대기 속으로 두들마가 아련하다.
# 이곳도 마을이라 느티나무 한 그루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너머로 낙동강이 굽이치고 있다.
# 빈집있고 경치 좋은 곳이지만 기회가 주어진대도 쉽게 선택하기 힘든 곳이다.
# 네 명에 불과하지만 이런 무리지은 모습이 내 산행기에 등장하기는 참 오랜만이다.
# 두들마여, 안녕!
# 산모퉁이를 돌아가자 제법 넓게 경작한 과수원이 나타난다. 비로소 두들마가 아직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 두들마는 어느곳에서나 청량산 육육봉이 모두 올려다 보인다.
# 선학봉과 자란봉을 잇는 하늘다리도 올려다 보인다.
# 두들마 산등성이에서 올려다 보이는 청량산 육육봉의 파노라마.(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두들마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참 복 받은 사람들이다. 과수원에서 농사 짓다가 허리 한 번 펴고 고개 들면 청량 육육봉이 눈 앞에 펼쳐진다.
# 그 경치 살피다 보면 어느새 허리 아픈 것도 잊어지겠다.
# 이렇게 보니 암봉의 형태가 진안 마이산과 흡사함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전방으로 금탑봉과 청량산 계곡을 바라보며 진행하였다.
# 금탑봉(金塔峰)은 산의 형태가 정말 삼 단의 탑을 쌓아 둔 것처럼 생겼다.
# 청량폭포는 두들마을에서 아래로 내려가야 했던 모양인데 우리는 청량사를 보고자 이 방향으로 왔다.
# 청량사로 올라가는 도로에 내려섰다. 이곳에서 하산할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산냄시님과 둘이서만 청량사로 향했다.
# 포장도로가 위로 이어진다. 경사가 가팔라 제법 헉헉 소리가 나는 길이다.
# 금탑봉에 오후의 햇살이 머문다.
# 청량사 오르막이다.
# 기와로 물길을 만들어 두었다. 이런 소소한 생각이 전체의 이미지를 좌우한다. 예쁜 생각이다.
# 절집 입구에 청량수라는 약수가 있다. 시원하게 한 잔 마셨다. 오늘 이곳 청량산에서 총명수와 청량수를 함께 마셨다. 내 삶이 총명하고 맑아졌으리라 기대해 본다.
# 청량사는 비탈진 곳에 절집을 올렸다. 그래서 아랫쪽에서부터 하나하나 더듬어 올라가면 된다.
# 안심당(安心堂)이란 찻집 앞에 바람같은 글이 하나 걸려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청량산인이란 이는 그것이 궁금했나 보다. 바람은 꽃을 만나 소리를 만들고 잎을 만나 소리를 만들 터이다. 그 소리는 바람의 소리일까? 잎과 꽃의 소리일까? 나는 바람소리의 근원이 궁금했다.
# 안심당 추녀에 걸린 풍경(風磬)이 바람을 만나 소리를 만들고 있다.
# 통나무를 잘라 물길을 만들었다. 그 단차 때문에 물도 소리를 만들고 있다. 청량사에서는 만물이 모두 바람을 만나 소리를 만들고 있다.
# 초파일 아직 멀었는데 연등꽃은 이미 만발하다.
# 연등 너머로 심우당(尋牛堂) 현판이 보인다. 오늘 나는 이곳 청량에서 잃어버린 소(牛)를 찾을 수 있으려나.
# 절집 앞 마당 높은 곳에 너른 대(臺)가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불탑이 세워져있다. 오전에 산을 오르면서 보았던 하얗고 밝게 빛나던 석탑이다.
# 불탑과 마주보는 자리에 금강송 한 그루 불탑보다 더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불교신자들은 불탑에 기도 올려 소원을 빌고 범신론자(凡神論者)인 나는 이 금강송 안고 기를 받으며 소원을 빌었다.
# 아담한 규모의 가람이 자연에 의지하여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다.
# 좋은 산에 자리한 좋은 사찰이다.
# 청량사의 중심 건물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신 전각이다. 약사여래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의 준말인데 중생의 질,병을 치료해주고 우환을 없애주시는 부처님이다.
# 유리보전 처마 앞에 서서 노을빛 물들어가는 청량사와 청량산의 모습을 오래오래 감상하였다.
# 사찰 뒤 숲속에 불상을 닮은 바위 하나가 우뚝하다.
# 그 아래 사찰 담벼락엔 미륵보살이 반가사유(半跏思惟)하고 계신다.
# 금탑봉과 불탑, 그리고 금강송이 함께 그림이 되었다.
# 와송은 부처손이라고도 부르니 절집에 잘 어울린다.
# 아주 오래 청량사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떠나는 발길에 미련이 남는 사찰이다.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곳이다.
# 내리막길에 있는 작은 물길에 나뭇잎 하나 띄워 다음을 기약해 보았다. 나뭇잎 물길에 흘러가듯 흐르다보면 다시 이곳과 인연이 닿을 수도 있으리라.
# 구불구불 내리막을 길게 걸어 청량사 일주문을 나섰다. 그곳에서 산동무들과 다시 만나 시산제 장소인 죽령을 향했다.
# 청량산을 사랑하여 스스로 청량산인이 된 퇴계는 여러 편의 시로 청량산을 노래했다. 일주문 앞에 그 중 하나가 돌에 새겨져있다.
퇴계선생의 노래처럼 청량산은 정말 청절(淸絶)한 산이었다. 비록 하루를 꼬박 채우지 못한 수박 겉핥기의 머뭄이었지만 청량산의 청절한 기운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
이제 청량과의 첫 만남이 있었으니 그 맑은 기운 뼈 속 깊이 새기기 위해 다음 기회를 기약해 보아야겠다. 바람처럼 물결처럼 흐르고 흐르다 보면 어느 가을 색 깊은 날에 다시 찾을 날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인연(因緣)은 기대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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