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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5구간(배양교~은빛개울공원)-독성(禿城)과 충장공(忠莊公)!!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5구간(배양교~은빛개울공원)-독성(禿城)과 충장공(忠莊公)!!

강/사/랑 2017. 2. 6. 18:16

[삼남길]5구간(배양교~은빛개울공원)



몇 해 전 거주지를 수원(水原)으로 옮겼다. 우리 동네는 수원이라고 해도 수원과 의왕의 경계선에 있어 생활권은 의왕이나 안양에 더 가깝다. 하지만, 행정구역상 엄연히 수원인 바 수원 주민으로서 고장 입성 신고(入城 申告)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도를 펼쳐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왕송호수(旺松湖水)를 기점으로 산길, 들길, 물길이 제법 여러 갈래 이어지고 있다.


그 여러 길을 차례로 밟아 보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황구지천(黃口池川) 라이딩'이다. 황구지천은 우리 동네 왕송호수에서 출발해서 수원 서쪽을 남북으로 길게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다. 수원, 화성, 오산, 평택을 따라 흐르다 평택(平澤) 서탄(西炭)에서 진위천(振威川)과 합류하고 이후 고덕에서 안성천(安城川)과 합류한 후 아산만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강은 아니지만 제법 유장한 그 흐름이 좋아 자전거로 달려보기로 하고 마눌 앞세워 물줄기 따라 바퀴를 굴렸다. 앞서간 사람도 없고 정보도 없어 도중에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공군비행장 때문에 융건릉(隆健陵) 쪽으로 잠시 우회하였다가 안녕리(安寧里)에서 황구지천변에 다시 올라섰다.


긴 우회로를 벗어나 황구지천을 다시 만난 터라 강둑에 자전거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강둑 멀리 세마교(洗馬橋)가 있고 강 건너로 산 하나 우뚝한데, 산 정상부를 성곽이 빙 두르고 있다. 지도 확인하니 오산의 '독산성(禿山城)'이다. 독(禿)은 '대머리 독'이다. 그러므로 독산은 대머리산, 즉 민둥산이란 뜻이다.


오산(烏山)은 평택(平澤)과 더불어 원래 들이 넓고 물이 많은 고장이다. 산이라고는 대부분 이백 미터에도 못 미치는 야트막한 야산(野山)일 뿐이다. 그나마 이곳 독산이 높이 208m로 오산들에서 가장 높은 산이니 이곳에 산성(山城)을 세운 모양이다.


옛날 삼남(三南)의 인물과 물산(物山)은 조치원(鳥致院), 진위(振威)와 이곳 오산(烏山)을 거쳐 수원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남태령을 넘어 한양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물산이 움직이는 길이니 외부 적군의 길이 될 수도 있다. 독산은 오산 평택의 넓은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산이라 적의 길목을 차단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게다가 황구지천 물길이 뒤쪽을 휘감아 도니 천연 해자(垓子)가 되어 적의 발길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천혜의 장소에 어찌 고금(古今)의 차이가 있겠는가? 자료를 찾아보니 역사가 자못 깊어 고대 백제(百濟) 창업(創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三國史記 百濟本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始祖溫祚王 十一年 秋七月(시조온조왕 십일년 추칠월). 設禿山拘川兩柵 以塞樂浪之路(설독산구천양책 이새락랑지로 ;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온조왕 11년의 이야기이니 BC 7년, 무려 2천 년이 훨씬 넘은 옛날의 일이다. 이후 삼국쟁패기(三國爭覇期)의 신라 기록에도 독산성이 거론된다. "新羅本紀 奈勿尼師今 十八年(신라본기 내물이사금 십팔년). 百濟禿山城主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백제독산성주솔인삼백래투 왕납지 분거육부 ;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 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신라 17대 내물왕 때 독산성주가 귀순(歸順)하였는데, 이후 백제 왕이 항의하며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백성은 원래 돌보아 주는 곳으로 가게 마련이라며 거절하여 백제왕이 승복하였다는 기록이 뒤따른다.


이후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도 독산성의 중요성은 여전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조사하니 독산성에 관한 언급이 80여 차례나 된다. 대부분 선조와 정조 때 기록이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과 정조의 화성 축조와 관련된 내용이 주여서 그렇다.


고려조의 기록에는 독산성의 존재가 없다. 고려는 견훤(甄萱) 세력, 신라의 잔여(殘餘) 세력과 각축(角逐)하다가 창업하였으며 거란이나 몽골과의 전투, 왜구(倭寇)와의 전투가 오백 년 역사의 전쟁 기록이다. 따라서 독산지역은 주전장(主戰場)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록이 없는 까닭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 전체가 전장터가 되기까지의 조선조에도 독성산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전쟁 발발(勃發) 후 곧바로 독성에 군사가 주둔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 꾸준히 관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독산성의 위치가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당장 전투가 없더라도 전략적 중요성은 여전하였던 탓이다. 그 관리가 고려조, 조선조를 쭉 이어왔기에 가능하였던 일이다.


독산성 역사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육전(陸戰)의 명장 권율(權慄)이다. 권율은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진주대첩(晋州大捷)과 함께 임란 삼대첩(壬亂 三大捷) 중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 승리의 주장(主將)으로 오늘날 육군참모총장 격(格)인 도원수(都元帥)를 지냈다.


애초에 권율은 광주목사로 용인전투에 참전하였다. 용인전투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삼도의 근왕병(勤王兵) 십만을 이끌고 북상하였다가 왜군 1,600명에게 대패하여 일패도지(一敗塗地)한 전투이다. 이 전투 이후 육지에서 조선의 전투력은 괴멸하였고 회생불능이 되었다.


다만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퇴각하였고, 이후 병력을 추슬러 배티(梨峙)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공으로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가 되었다. 이후 도성 수복(收復)을 위해 북진하였는데, 용인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무조건 진격하지 않고 수원 독성(禿城)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곳에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으로 적을 괴롭히다가 한양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기습하여 피해를 입혔다. 이후 불시에 이동해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모두가 잘 아는 행주대첩의 대승을 거두게 된다. 행주대첩의 대승에는 독산성 전투라는 교두보(橋頭堡)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 때의 문신(文臣)이자 학자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는 독성을 다녀와서 독성기(禿城記)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城居廣野之中 無險阨之阻 有山斗起於道傍 又無樹木 望之童童 然故名禿城。人視之尋常 不以爲奇 壬辰倭寇大至 都元帥權慄 轉鬪入據于玆 屢却賊兵。於是 人知玆城之得形便 爲國中要衝也 (성거광야지중 무험액지조 유산두기어도방 우무수목 망지동동 연고명독성。인시지심상 부이위기 임진왜구대지 도원수권률 전투입거우자 루각적병。어시 인지자성지득형편 위국중요충야 ; 성(城)이 넓은 들 가운데 있어서 험애()의 막힌 곳이 없이 길 곁에 높은 산처럼 우뚝 서 있는데 그 산에 수목이 없어서 바라보면 민숭민숭하다. 그런 까닭에 이름이 독성(禿城)이다. 사람들이 심상하게 보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더니, 임진년에 왜구가 크게 침입하였을 때 도원수 권율(權慄)이 여기저기서 싸우다가 이곳에 들어가 의거하여 여러 번 적병을 격파하니, 그제서야 사람들은 이 성의 지형이 이 나라의 요충인 것을 알았다."


낮은 산의 작은 성이라 크게 대접받지 못하였지만, 전란을 맞아 위력을 발휘하니 비로소 사람들이 나라의 요충(要衝)임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왕조(王朝)가 여러 차례 바뀌어 중요성에 밀렸음에도 어느 정도라도 관리는 꾸준히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외침(外侵)을 당해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산성의 위치가 삼남길 상의 주요 길목이기 때문이고, 넓은 오산과 평택 들판에 숲 울창하여 전망(展望) 막히지 않게 민둥산으로 우뚝하였던 탓이다.


지금은 수풀 울창하고 푸른 빛 가득하여 붉은 민둥산의 분위기는 없다. 그러나 황구지천(黃口池川) 휘감아 도는 물길 어귀에 우뚝 솟아 너른 오산벌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위용은 여전히 위풍당당(威風堂堂)하다.


강/사/랑의 삼남길 다섯 번째 걸음은 권율장군의 무훈(武勳)이 서린 오산 독산성(禿山城)을 넘게 된다. 그 성벽 위에 홀로 서서 420여 년 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분투하였던 충장공(忠莊公) 권장군의 부릅뜬 눈에 눈높이를 가만히 맞춰본다.

 

 


독성(禿城)과 충장공(忠莊公)!!


구간 : 삼남길 제 5구간(배양교~은빛개울공원)
거리 : 구간거리(15 km), 누적거리(84.2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2월 4일. 흙의 날.
세부내용 : 배양2리 ~ 수원성감리교회 ~ 용주사 ~ 안녕초등학교 ~ 만년제 ~ 황구지천 ~ 세마교 ~ 독산성 ~ 보적사 ~ 독산성남문 ~ 오산어린이천문대 ~ 봉담동탄고속도로 지하도 ~ 애기바위 ~ 어계산 ~ 고인돌공원 ~ 은빛개울공원.



삼남길 순례는 요 근래 나의 다른 순례길이 그렇듯 띄엄띄엄 진행하게 된다. 서울과 경기 구간은 집 근처에 있어 접근이 용이함에도 그렇다.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진 탓일 것이다. 예전에 백두대간이나 아홉 개의 정맥에 미쳐있을 때는 단 한 주라도 빠지면 안절부절 못하고 애를 태웠는데, 이제 세월 흘러 몰입도 떨어지니 가까이 있는 길도 가다말다 진행속도가 느리기만 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인데 마음은 느긋하기만 하다. 이럴 때는 그냥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내 마음 바람같으니 그 바람 부는대로 움직이면 될 일이다. 그렇게 작은 바람 한 줄기 분 날에 가벼운 짐 챙겨 길을 나섰다.


이번 길에는 독산성을 넘게 된다. 독산성은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의 대승을 거두기 전에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머물렀던 산성이다. 그 성벽 위에 서서 권율 장군의 눈으로 오산벌을 둘러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독산성/禿山城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이 왜적을 물리쳤던 산성이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았던 성이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던 곳으로, 도성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1593년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이 근왕병(勤王兵: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군사) 2만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만에 백성이 합심하여 수축을 하였다. 이와 같은 독산성의 예는 이웃에 모범을 보여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이어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성(婆娑城)으로까지 퍼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1602년(선조 35) 변응성(邊應星)이 수축하고, 1796년(정조 20) 수원성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세마대지(洗馬臺)의 전설이 남아 있어,‘독산성 및 세마대지’로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즉 1593년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위로 올려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올려 흰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성에는 석축 약 400m가 남아 있고 4개의 성문이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5구간(배양교~은빛개울공원)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지난달 석양 지고 땅거미 내릴 즈음 도착했던 배양2리 삼거리에 다시 섰다.




# 오늘은 마눌이 이곳까지 자동차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 집에서 이곳 배양리까지는 차로 20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오늘 내가 걸을 삼남길 5구간은 경기도 삼남길 제6길인 화성효행길과 제7길인 독산성길이다. 두 길을 합해서 15km쯤 되는 길이고 독산성이 핵심 포스트이다. 배양교 주변은 공사로 파헤쳐지고 표지판도 모두 사라져 세마교에서 찍은 팻말 사진을 처음으로 옮겼다.




# 도로 이름이 기배로이다. 자동차 통행 거의 없는 한적한 길을 따라 길게 진행한다.




# 오늘 구간 일차 포스트는 용주사이다.



# 도로 끝나는 곳에서 우틀하여 배양리로 들어간다.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이 동네는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이 많다. 이 겁 많고 덩치 작은 넘은 자기 두려움을 울부짖음으로 표현한다. 이 넘은 덩치 작아 걱정이 없었는데, 잠시 후 아주 큰 대형견이 목줄과 입마개도 없이 골목에서 뛰어 나온다. 주인이 곧 따라 나와 제압하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 삼남길은 마을 안쪽으로 깊이 올라간다.




# 수원 백씨(水原 白氏)의 중시조인 백천장 선생의 묘지 곁을 지난다.




# 길은 남수원골프장 울타리를 따라 위로 올라 간다. 어느 교회의 수양관 곁을 지나면 좌측으로 갈라진다.



# 대형견의 공격을 받고 나니 대비책이 필요하였다. 마침 길가에 곧은 나무가 버려져 있다. 껍질 벗기고 다듬어 막대기를 만들었다. 이른바 타구봉(打狗棒)의 등장이다. 타구봉은 개방(丐幇)의 방주 구지신개(九指神丐) 홍칠공이 들고 다니던 막대기이다. 용도는 이름 그대로 개를 때려 쫓는 막대기이다. 구지신개는 김용(金龍)의 무협소설에 나오는 중요 인물이다. 개방은 중국 강남지방 거지들의 무협 집단이다. 거지는 평소 동냥으로 호구지책을 삼는다. 그런데 거지에게는 개가 천적이다. 낯선 거지에게 친절할 개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지들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지팡이로도 삼고 개를 쫓을 때도 쓰고 뱀을 걷어 낼 때도 사용했다. 오늘 내 타구봉은 우선 방향 지시용 모델로 사용된다.




# 수원 고색동에서 오산으로 넘어가는 신설 도로가 우측에 있다. 그 도로와 공장들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길 건너편에 화산(華山)과 그 품에 있는 융건릉이 있는데,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다.



# 잠시 후 용주사를 만났다. 용주사(龍珠寺)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절이다. 원래 이 자리에 신라시대에 세워진 갈양사(葛陽寺)란 절이 있었는데 고려때 소실되어 정조가 다시 세웠다. 낙성 전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사찰 안에 여러 보물들이 있고 주련의 글씨도 볼만한 모양인데 입장료를 받고 있다. 나는 입장료 받는 사찰은 근처에도 가기 싫은 사람이라 입구에 있는 스템프 도장만 찍고 돌아 나왔다.




# 조지훈의 승무(僧舞)가 탄생한 사찰이란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돈 받는 절집을 멀리서 눈으로만 돌아 보았다.




# 그런데 사찰 입구가 엄청나게 소란하다. 자세히 보니 신도 단체에서 이 사찰 주지의 비리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사찰 토지의 매각문제, 처자식을 숨겨 둔 문제, 그로 인한 갈등, 폭행사건 등이 뒤죽박죽 섞혀 있는 모양이다. 청정한 수행도량이어야 할 유서 깊은 사찰이 세상 온갖 더러운 추악함의 집합체가 되어 있다. 현 상황은 신도측은 차량에서 고성능 스피커로 규탄의 방송을 반복하고 사찰측은 맞은편에 대형 스피커를 달아 불경을 또 반복해서 틀고 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 그 소란함에 놀란 용이 여의주를 토해내겠다.




# 아수라장 용주사를 벗어나 송산동 마을 길을 길게 걷다가 안녕초등학교 앞에서 도로를 건넌다.




# 이 인근에는 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 중이다. 화성태안3택지개발지구이다. 대한민국 곳곳에 저렇게 엄청난 밀집도의 공동주택을 끝없이 지어대는데 아직도 집 없는 사람들이 있단다. 한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해서 그럴 것이다.




# 안녕 들판 너머로 독산(禿山)이 건너다 보인다.




# 솟대 세워진 쉼터가 있다.





# 그곳에 만년제(萬年堤) 안내판과 저수지가 있길래 이 저수지가 정조가 축조하게 한 만년제인줄 알았다. 나중에 자료 찾아보니 만년제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메워진 채 방치되어 있는 모양이다. 만년제는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과 함께 이 도시를 자족도시로 만들 목적으로 행한 권농정책(勸農政策)으로 조성한 저수지 중 하나이다. 만년제는 남쪽에 건설되어 남지(南池)라고도 불렀는데,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현융원(顯隆園) 근처에 있어 중요성이 남달랐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이 방치하여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다.


실록에 만년제의 기록이 있다. 萬年堤成 萬年堤在顯隆園洞口 上謂筵臣曰 今番華城萬年堤役 可謂不費一民之力 而不日告完 誠大幸也(만년제성 만년제현융원동구 상위연신왈 금번화성만년제역 가위불비일민지력 이불일고완 성대행야 ; 만년제(萬年堤)를 완성하였다. 만년제는 현륭원(顯隆園)의 동구(洞口)에 있다.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이번 화성(華城)의 만년제 공사는 백성 한 사람의 힘도 쓰지 않고서 몇 일만에 완성했으니, 참으로 큰 다행이다.)




# 쉼터 나무의자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3천냥 짜리 다있소 상점産 스마트폰 삼각대 덕분에 내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독산을 정면에 두고 안녕 들판을 길게 걸었다.




# 넓은 도로를 만났다. 건널목이 우측 위쪽에 있어 건넜다가 다시 맞은편으로 원위치 해야 한다.




# 도로를 건너니 요즘 대로변에 자주 보이는 타이어 판매점이 있는데 그 집 앞에 말을 탄 장수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서 있다.




# 폐타이어를 이용한 설치 작품이다. 이 정도면 완전한 예술작품이다. 길게 이어 붙인 타이어 조각이 말의 근육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재주로 타이어나 팔고 있다니 안타깝다.




# 들판길을 길게 걸어 오산화성고속도로에 접근한다.




# 황구지천과 다시 만났다.




# 갈대가 지난 가을을 추억하며 강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 황구지천 건너로 서오산톨게이트가 있고 그 뒤로 독산성이 우뚝하다. 처음 수원으로 이사와서 마눌과 자전거로 황구지천 라이딩을 할때 바로 이 자리에서 저 독산성을 발견했었다. 물론 그 이전에 자동차로 백여 차례 이상 이 근처를 지나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없애므로 독산성을 올려다 볼 일은 없었다. 속도버리고 자전거로 혹은 도보로 길을 걸으니 비로소 눈에 들어온 풍경인 것이다.




# 자전거 라이딩 당시 저 삼남길 표석을 보고 왠지 이 길을 걸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었다.



# 강둑을 길게 걸어 세마교에 도착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세람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細籃橋 在府南十五里(세람교 재부남십오리 ; 세람교는 부의 남쪽 십오리에 있다.) 란 기록이 있다.



# 독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흰 쌀로 말을 씻어 물이 넘쳐남을 위장하였던 전설에서 유래된 세마(洗馬)란 이름이 이 낡고 볼품 없는  다리에도 붙여졌다.




# 세마교 위에서 황구지천 상류를 올려다 보았다. 우측 고속도로에 차량 소음 많지만 오리떼들은 물 위에서 한가하다.




# 좁은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면 독산성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이 도로는 갓길이 없는 편도 일차선의 도로이다. 차량 통행도 많은 편이다. 내리막 끝의 도로인 지라 차량 속도도 높다. 그만큼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다. 모자를 벗어 흔들어 차량 운전자들에게 경고 신호를 보내며 재빨리 통과하였다.




# 위험한 도로를 지나면 사거리가 나오고 삼남길은 길 건너 숲으로 이어진다. 짧은 거리였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 얼른 숲속으로 들어갔다.




# 폭 좁은 잣나무 숲이 길게 위로 이어진다.




# 길이 2m짜리 널빤지 하나 눕혀놓고 신선교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이건 좀 심했다.




# 발 아래 밟히는 잣솔갈비의 푹신한 감촉이 좋다. 그러나 우측 가파른 도로를 오르는 차량에서 나오는 매연이 이 숲속까지 영향을 미친다.




# 한차례 길게 오르면 산허리를 휘감는 포장 임도가 나오고 삼남길은 그 임도를 따른다.




# 이 임도는 응달진 곳이라 길이 모두 얼어 있다.




# 올 겨울은 눈이 드물어 난 오늘 아이젠을 생략하였다. 이 타구봉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큰 곤란을 겪을 뻔했다.




# 타구봉을 지팡이 삼아 조심조심 발걸음 옮겨 임도를 올라 갔다.




# 임도 좌측 아래에 숲속 쉼터가 있다.




# 미끄러운 임도를 조심스레 길게 오르면 독산성 오르는 포장도로와 만나게 된다. 그곳에 넓은 공터가 있어 자동차로 오른 사람들이 그곳에 주차하고 독산성을 오르고 있다.




# 가파른 포장길이 길게 위로 이어진다. 자동차를 가지고 왔지만 조금이나마 걷고자 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주차하고 걸어 오르고 걷기 싫은 사람들은 그냥 차를 몰고 끝까지 올라 간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 곳에서도 자동차 매연을 맡아야 했다.




# 매연을 가지고 올라온 사람들을 위한 주차장이 성 바로 아래에 있다.




# 성벽의 치(雉)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 보적사 주변의 풍광이 흰 눈과 역광속에 어우러져 흑백사진으로 표현된다.





# 해탈의 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들어 갔다. 해탈은 너무 멀고 이해 정도는 가능하길... 




# 국가의 명운이 위태로웠던 전쟁을 겪은 성곽 안에 사찰만이 제일 온전하게 남아 있다.




# 요사채 기둥 주련(柱聯)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구절이 적혀 있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한량없는 은혜를 가르친 불교 경전이다. 이 사찰이 정조때 중건한 것이니 정조의 효심을 표현하고자 했나보다. 그 내용은 이렇다. "母年一百歲 常憂八十兒 欲知恩愛斷 命盡始分離 (모년일백세 상우팔십아 욕지은애단 명진시분리 ; 어머니 연세 백 살이라도/ 늘 팔십 된 자식을 걱정하시네/ 그 은혜 끝날 때를 알고 싶은가/ 목숨이 다하실때 비로소 끝난다네)"




# 보적사를 둘러보고 방향을 좌측으로 잡는다. 해우소에서 잠깐 쉬어가기도 하고.




# 아름드리 정자나무 한 그루 성곽을 지키고 있고 그곳에 치(雉)가 있다.




# 치(雉)는 성곽 밖으로 돌출하여 적을 관측하거나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당연히 조망이 훌륭한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박무가 심하여 조망은 흐리다. 임란 당시에는 넓은 오산벌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보적사를 뒤로 하고 성곽을 따라 내려간다.




# 휴일을 맞아 삼삼오오 성곽 구경 온 사람들이 제법 많다. 이렇게 한바퀴 돌면서 옛 역사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돌아가면 그것도 좋은 공부이다.




# 권율 장군 올라서서 전장을 굽어 보았을 커다란 바위 뒤에 넓은 공터가 있고 세마대(洗馬臺)란 비석이 서있다.




# 올라보니 특별한 사적은 없고 다만 넓은 공터만 있다. 높은 곳에 있는 넓은 대(臺)이니 바깥으로 조망은 훌륭하다. 왜적에게 물이 많음을 속였을 그 장소에서 성곽 너머 오산벌을 굽어본다. 그런데 전설로 전해지는 임진왜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왜적들은 참으로 멍청한 놈들이다. 노적봉 바위에 짚단을 둘러 놓으면 식량이 많은 줄 알고 도망가고, 세마대에서 흰 쌀로 말을 씻으면 물이 많은 줄 알고 철수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멍청한 놈들에게 순식간에 국토 대부분을 유린 당한 조선은 또 얼마나 멍청하였던 것인가? 우리 장수의 지혜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각색했을 이야기가 너무 분칠을 많이 하다보니 반대로 우리가 더 어리석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 달리 생각하면 전설이 옳을 수도 있다. 왜적들이 속은 상대는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이다. 두 장수 모두 왜적들이 벌벌 떨 무용과 전공을 가진 분들이다. 따라서 왜적들은 두 분의 이름 만으로도 겁을 먹었을 수 있고 지형지물이나 눈속임을 이용한 작전에 쉽게 휘말렸을 수도 있다.




#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삼도근왕병(三勤王兵) 10만으로 왜병 1,600명에게 대패한 용인전투에 권율장군도 함께 했다. 대부분의 조선군이 죽거나 도망하였지만, 권율 휘하의 병사들은 장수를 중심으로 질서있게 퇴각해 병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병사로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승리하였고 전라감사가 되어 근왕(勤王)을 위해 북상하다가 이곳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 권율 장군은 이곳 독산성에 주둔하면서 성을 포위한 왜병을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으로 괴롭히다가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여 행주대첩의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독산성에 주둔할 당시 육전(陸戰)에서 조선군은 왜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압도적 전투력을 가진 적군이 오산벌을 가득 메운채 공격해 올 때 고립된 산성에 농성하며 전장을 책임진 장수로써 권율 장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지도자는 그러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군사들을 단합시켜 전투력을 올리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투의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충장공(忠莊公)의 선택은 세마(洗馬)로 적을 속이고 아군의 사기를 높였으며, 성을 굳게 지킴과 동시에 유격전을 통해 전면전의 위험을 피하며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전략이었다.




# 충장공 권장군이 독산성 성벽 위에서 느꼈을 시국의 암담함과 그것을 뚫고 나가야만 하는 지도자의 숙명에 공감(共感)과 무한한 경의(敬意)를 표하며 독산성을 떠났다.




# 삼남길은 독산성 남문으로 이어진다. 원래 남문에는 누각과 성문이 있었을 터인데 복원이 잘못되었는지 알고도 그러했는지 구멍만 뚫어두었다.




# 독산성은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성벽으로 두른 형태로 산악국가인 우리나라에 특히 많이 축성되어 있다. 산의 정상부를 산성으로 만든 터라 수원(水源) 확보가 어려워 장기 농성에는 취약하였다. 독산성은 대표적인 테뫼식이다. 따라서 이곳도 수원확보가 어려웠고 세마대의 전설도 그런 이유로 생겨났을 것이다.




# 독산성은 둘레가 1,400m이다. 대충 계산해보면 넓이가 10만 제곱미터쯤 된다. 평수로는 3만평 내외이다. 충장공 농성 당시 1만명 병사였다니 민둥산에 축성된 작은 성 전체에 병력이 빼곡하였을 것이다.




# 산 전체를 온전히 내려가는 길이라 꽤 길게 하산하였다. 산을 완전히 내려오자 그곳에 보적사 일주문이 있다. 대문은 산 아래에 사찰은 산 꼭대기에 있는 것이다.




# 일주문 근처에 막걸리를 무한 제공한다는 국밥집이 있다. 그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막걸리는 딱 한 잔만 마셨다.




# 독산성로를 건너 산길로 접어들자 동탄어린이천문대가 나온다. 시각이 오래되어 관람을 마친 차량들이 연신 나오고 있다.




# 길은 봉담동탄간 고속도로에 접근한다. 지도에는 이 주변을 집팽골이라 적어두었다.




#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통과.




# 잔설이 남아 있는 임도를 따라 산으로 올라 간다.





# 가벼운 고개 하나 넘겠지 싶었는데 길은 점점 산 꼭대기 방향으로 올라 가고 있다. 숲 너머로 우뚝한 산이 보인다. 아마도 저 산을 넘지 싶다.




# 예감이 맞다. 길은 점점 그 산꼭대기를 향해 고도를 높인다.




# 그러다 좌측으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나오고 화장실 표시가 되어 있다. 삼남길 걷다가 화장실 생각나면 고속도로 휴게소로 내려가라는 얘기이다.




#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가 산 아래에 있다. 저곳까지 내려가는 동안에 바지에 쏟을 지경이다. 이 화장실 안내 표식 매단 이후 단 한명이라도 그 안내 따라 화장실을 이용한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 다시 한차례 밀어 올려 능선마루금에 오른다. 애기장수의 전설이 있는 애기바위와 정자가 있다.





# 우리 옛이야기 속 애기장수는 나라를 뒤엎을 혁명적 인물이 될 운명을 타고 난다. 따라서 왕조시대에 애기장수란 역모의 씨앗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애기장수의 등장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그런데 이 곳의 애기장수는 왕조가 아니라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 애기바위에 서니 독산성 곁에 있는 서량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 잠시 더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정상이 나온다.




# 여계산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닭의 벼슬을 닮아 여계산(如鷄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청명지맥이 지나는 곳이다.




# 여계산을 넘어 내리면 오산 시내에 접근하는데, 길은 계속 나지막한 야산으로 이어진다.




# 주공에서 오산세교지구란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였는데 삼남길은 그 아파트단지 곁의 야산을 계속 잇는다.




# 잠시 후 오산 고인돌공원에 도착한다. 시각은 이미 석양을 넘어 어둠이 깔리려고 한다.




#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거석문화(巨石文化) 유산이다. 전 세계 고인돌 중 가장 많은 고인돌 집단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 유달리 격식을 찾는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그 기원이 이렇게 깊다.





# 고인돌공원과 은빛개울공원은 잇닿아 있다.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대규모 공원시설을 갖춘 것이다. 그곳 은빛개울공원 사거리에서 삼남길 5구간을 마무리했다.




이후 오산대역쪽으로 두어 블록 걸어가 그곳에 있는 홈플러스에서 손 씻고 양치했다. 잠시 후 마눌이 그곳까지 와주어서 집으로 편안히 귀가했다. 동네 근처에 있는 길이라 이런 편안함이 있다.

 





                                                  # 다있소 상점 産 3천원짜리 삼각대로 들길과 산길 걷는 내 뒷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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