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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6구간(은빛개울공원~원균 묘)-원균 맹장설(元均 猛將說) 유감(有感)!!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6구간(은빛개울공원~원균 묘)-원균 맹장설(元均 猛將說) 유감(有感)!!

강/사/랑 2017. 3. 2. 11:18

[삼남길]6구간(은빛개울공원~원균 묘)



90년대 초반의 일이니 한 이십 년도 넘은 옛일이다. 교보인지 종로인지 기억이 정확지 않은 어느 대형 서점(書店)에서 책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는 친구 만날 약속을 대형 서점 앞에서 많이 했었다. 지금처럼 1인 1휴대폰 보유가 일상인 시절이 아니어서 약속 시간과 장소가 분명해야 했고 전철역 가깝고 냉난방시설 좋으니 서점이 약속 장소로는 최고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즐기며 이 책 저 책 구경하다가 문득 눈에 확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원균(元均)에 대한 재평가!", "원균을 위한 변명" 등의 부재를 단 '고정욱'이란 이의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이란 책이었다.


고정욱(高廷旭) 작가는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모더니즘 계열의 실험소설 '선험'이 당선돼 등단했다. '원균 그리고 원균'은 1994년 작품이다. 아마도 신인 작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의 소설 세계에 대한 이해도 없었는데, 임란(壬亂) 최고의 무능한 장수로 알려진 원균에 대한 재평가라고 하니 관심이 갔던 것이다.


바로 구입하여 찬찬히 읽어보니 내용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균은 역사의 죄인(罪人)이다. 풍전등화의 조선을 왜적으로부터 구한 구국의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모함하였으며, 이순신의 투옥과 파직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여 조선 수군을 괴멸케 하였고, 그 역시 왜적에게 목이 잘린 무능한 장수의 대명사이다.


그런 원균이 사실은 굉장한 맹장(猛將)이었으며 특히 육전(陸戰)에서 탁월한 전략과 용맹을 겸비한 장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책에 의하면 원균은 처음 무과에 등과(登科) 한 후 북방 여진족 토벌에 활약하였는데, 얼마나 용맹스러웠는지 여진족들이 원균의 말만 들어도 "엉규이"라고 하면서 벌벌 떨었다고 적혀있다. 원균이란 이름을 그들 식으로 "엉규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칠천(漆川)의 패전은 조정에서 너무 재촉하여 준비가 부족하였고 이순신 부하들의 비협조도 한몫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그 아들까지 모함한 졸렬(拙劣)한 인물이었다는 기록이었다.


한마디로 원균은 이순신 영웅화(英雄化)의 피해자이고 고금(古今) 집권세력의 지배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한 비운(悲運)의 명장(名將)이었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놀라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세상사 서 있는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달라 보이기 마련이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말았다. 그런데 십여 년 뒤에 공영방송인 KBS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란 역사드라마를 방영하였는데, 그 드라마에서 원균을 우직하고 용맹스런 캐릭터로 묘사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자료 찾아보니 이 드라마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불멸'의 내용을 상당 부분 도입하였다. 특히 김탁환의 불멸의 내용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런데 불멸의 내용이 상당히 놀라운데, "이순신과 원균이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고, 이순신이 전쟁놀이에서 진 앙금 때문에 나중에 원균을 음해했으며 원균의 패배는 이순신 부하의 비협조와 권율 때문이다" 등등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실제로 드라마에서도 불멸의 그러한 이순신 졸장부설(拙丈夫說)이나 원균 맹장설(猛將說)이 상당 부분 방송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른바 '원균 맹장론(猛將論)'의 또 다른 주장이고 확산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꽤 여러 계층에서 수 차례 이뤄졌던 모양이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야 역사가 남긴 기록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철저히 검증된 사항인데,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 궁금해서 확인해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다.


우선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기록(記錄)이 있다. 원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순신, 권율(權慄) 등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策錄)되어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追增)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선무공신이란 임진왜란에서 왜군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와 명군(明軍)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한 관리들에게 지급된 훈공(勳功)이다.


또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撰)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김간은 박세채(朴世采)와 송시열(宋時烈
)의 문인으로 예설(禮說)에 조예가 깊어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남긴 원균 행장에는 원균 맹장론의 뿌리가 될 만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다.


선조(宣祖)는 우매(愚昧)한 왕이었다.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던 왜적의 침입에 아무런 방비도 없다가 잘 훈련된 왜적의 침입에 파죽지세로 밀리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중국을 향해 도망친 군주이다. 그러면서 유일하게 왜적에 대해 연전연승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에게 현지 사정을 고려치 않은 무리한 공격 명령만 내렸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전투 중인 장군을 추포(追捕)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씌운 죄명은 모두 네 가지이다. 그것은 '欺罔朝廷無君之罪(기망조정무군지죄: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縱賊不討負國之罪(종적불토부국지죄: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奪人之功陷人於罪(탈인지공함인어죄: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無非縱恣無忌憚之罪(무비종자무기탄지죄: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이다.


이른바 자기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반드시 죽여야 할 죄라는 것이다. 이렇게 괘씸죄로 눈 밖에 난 이순신을 대체할 인물이 선조가 보기에는 원균이었다. 원균은 명문 원주 원씨(原州 元氏) 가문의 무신이고 평소 그가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다. 원균의 발탁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애초에 누군가 '대체 가능한' 역할의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원균은 칠천량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초래했다. 그런 사람이지만 선조의 입장에서는 원균을 등용한 자신의 인재 등용의 정당성과 이순신에 대한 끝까지 버리지 못한 미움이 더해져서 원균을 이순신과 똑같은 선무 1등 공신으로 책봉하도록 고집을 부리게 되었다.


김간의 원균 행장에 원균의 용맹함과 임란 시의 전과가 왜곡되어 기록된 것은 그 글의 성격이 '행장(行狀)'이기 때문이다. 행장은 죽은 사람의 생전 행실(行實)을 문생(門生)이나 친구, 자손들이 기록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평전(評傳)'과 같은 성격의 글이다.


지금의 평전은 객관성을 갖고자 어느 정도 노력이라도 하지만, 옛 시절의 행장은 주인공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만큼 칭송하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김간 역시 그런 성격의 글을 써서 원균의 생전 행실을 칭송한 것이다. 자연히 없던 사실이 들어가고 있던 허물은 기록치 않았다.


그렇다면 이 느닷없는 원균 '재평가' 혹은 '맹장론'의 등장은 누가 어떤 의도로 주도하는 것일까? 우선, 그의 후손인 '원주 원씨(原州 元氏) 문중의 재평가 활동'이 있다. 원씨 문중에서야 아무리 역사적 평가가 최악인 인물이라도 자신들의 선조이니 숭모(崇慕)할 근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음은 '지자체의 장이나 지역민들의 생각'이다. 원균은 평택 도일동 사람이다. 도일동은 원주 원씨의 집성촌(集姓村)이었고 현재도 상당한 인구 비율을 보이고 있는 곳이다. 게다가 원주 원씨 후손이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4선이나 했고 집권당 원내대표까지 지냈으니 원균에 대한 재평가에 목말라할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세간의 이목 집중에 목마른 사람들의 전략'도 뺄 수 없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홀로 "노"라고 말하면 당연히 주목을 받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 내내 성웅(聖雄)으로 추앙받아 왔고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유례(類例)가 없는 불패(不敗)의 영웅이다. 반면 원균은 철저하게 이순신의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던 인물이다. 이런 아웃사이드에 대한 재평가는 당연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된다. 관심은 곧 '돈'이다.


다음은 '진보사학계의 시각'이다. 이순신 장군은 박정희 정권 당시 역사적 평가를 공고히 했고 숭모 사업도 활발히 이뤄졌다. 그들에게 박정희 정권은 악(惡) 그 자체이다. 박정권에 의해 추앙(推仰)받고 있으니 이순신도 배척(排斥) 대상이다. 이순신이 배척 대상이면 대척점에 있는 원균은 재평가받아 마땅한 인물인 것이다.


그 일환의 작업이 공영방송 KBS가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이다. 제목만 보면 불패의 명장 이순신의 불멸의 업적을 기리는 드라마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이순신에 대한 폄하(貶下)와 원균에 대한 정당성 부여(正當性 附與)가 그 드라마의 핵심이었다.


불멸의 이순신은 당시 KBS 사장으로 막 취임한 모(某)씨가 기존에 계획되어 있던 고려사(高麗史) 무인정권(武人政權)의 완결판을 전격 취소하고 기획한 드라마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이 공영방송 장악을 위해 임명한 사람으로 동아일보와 한겨레 신문을 거친 인물이었다.


한겨레 논설위원 재직 당시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아들 병역문제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던 사람인데, 정작 그의 두 아들도 국적 포기와 미국 시민권 획득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치 않았다. 이런 모순적 인물이 편향된 의도로 기획한 드라마가 불멸의 이순신이었던 것이다.


어쨌건 이런 여러 이유들이 모여 원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그로 인해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폄훼(貶毁)가 불가피하게 가해지고 있다. 그 시도가 하도 광범위하고 끈질겨서 그래도 혹시나 싶어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는데, 파고들면 들수록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높아만 가고 원균의 무능함은 깊어만 간다.


몇 년 전에 모모(某某)씨라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특이하게도 어느 야당 의원이 후보자를 가리켜 파도 파도 미담(美談)만 나오는 사람이라 칭찬한 일이 있다. 나중에 그는 내연녀와 혼외자녀 문제로 온갖 망신만 당하고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판 것'이다.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이제 그만 하여야 할 것 같다. 파면 팔수록 미담보다는 악담(惡談)만 자꾸 나오니 원균을 재평가하려다 오히려 더 욕보이는 결과만 나오겠다.


역사는 '기록의 산물(産物)'이다. 조선은 여러 면에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국가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뿌리 깊은 사대주의(事大主義),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구조, 실용보다는 명분(名分)에 집착하는 사상 풍조 등등. 하지만 이런 조선이 전 세계에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록문화(記錄文化)'이다. 그중에서도 왕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낱낱이 기록한 '실록(實錄)'과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 유산이다.


'사관(史官)'은 왕의 국사와 행차 모두에 배석하여 왕으로부터 이뤄진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비록 군왕일지라도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엄격함을 갖춘 기록에 전 세대를 거쳐 거짓이 사실로 둔갑하여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 어디에도 원균 옹호론자(擁護論者)들이 주장하는 상세한 공적의 내용은 찾을 길이 없다.


사관은 문과에 급제한 인물 중 '삼장지재(三長之才 )' 즉, '재주(才)'와 '학문(學)'과 '식견(識)'를 갖추고 가문에 문제가 없으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진 그야말로 가리고 가려서 뽑은 인물로 구성되었다. 재주 외에 인간관계까지 고려한 것은 어느 한 당파에 편향되지 않은 중립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 사관이 원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臣曰 閑山之敗 元均可磔 而將卒皆無罪焉 何也 均之爲人 乃麤暴一無知人也 初與李舜臣爭功 百端構捏 逐舜臣而自代 外爲大言 有若 一擧而殲賊者然 及智窮兵敗 捨船登陸 使士卒盡爲魚肉 當時之罪 誰執其咎 閑山一敗 湖南繼沒 湖南覆沒 而國事不可更爲矣 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사신왈 한산지패 원균가책 이장졸개무죄언 하야 균지위인 내추폭일무지인야 초여이순신쟁공 백단구날 축순신이자대 외위대언 유약 일거이섬적자연 급지궁병패 사선등륙 사사졸진위어육 당시지죄 수집기구 한산일패 호남계몰 호남복몰 이국사불가경위의 목격시사 흉욕렬이골욕소야 ; 사관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 4월 2일.


왕의 언행(言行)과 역사적 사실만 기록하던 사관이 피를 토하는 논평(論評)을 남긴 것이다. 그 사관의 평에 모든 사정이 들어 있다. 원균의 행위는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을 원통함을 역사에 남긴 것이다. 더이상 파고들어 욕된 이름에 또다시 덧칠을 시킬 이유가 없다. 그냥 두어라. 그것이 원균을 그나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다.


 


원균 맹장설(元均 猛將說) 유감(有感)!!


구간 : 삼남길 제 6구간(은빛개울공원~원균 묘)
거리 : 구간거리(23.7 km), 누적거리(107.9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2월 25일. 흙의 날.
세부내용 : 은빛개울공원 ~ 궐리사 ~ 오산천 ~ 오산 맑음터공원 ~ 야막리 들 ~ 가곡리 ~ 무봉산고개 ~ 진위면사무소 ~ 진위향교 ~ 삼봉로 ~ 마산2리 교차로 ~ 소백치 ~ 지산로 교차로 ~ 부락산쉼터 ~ 대백치 ~ 덕암산 정자 ~ 원균 묘 ~ 내리 교차로.



작년 5월 삼남길을 처음 시작한 후 진행이 내도록 지지부진하였는데, 해를 넘기고 몸 상태 어느 정도 안정되자 큰 간격 없이 진행하게 된다.


높다란 산길 아니고 무거운 등짐 아니니 마눌의 걱정도 줄어들어 홀로 길 나서도 별 제지가 없다. 그리하여 삼남길 여섯 번째 걸음을 위해 짐을 꾸렸다.


이번 구간은 오산을 떠나 진위로 넘어 가고 궐리사와 진위 향교, 소백치와 대백치라는 옛 고개, 그리고 원균 묘를 만나게 된다. 거리는 23.7km로 제법 먼 거리이고 산악 지역이 끼어 있어 상당히 힘든 구간이다.



진위/振威


경기도 평택지역의 옛 지명. 본래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 또는 金山縣)이었고, 백제 때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 하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 진위로 고쳐 수성군(水城郡 : 지금의 水原)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그대로 따르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고 뒤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1398년(태조 7) 충청도 관할에서 경기도로 이속시켰다. 1895년(고종 32) 진위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수원군의 일부와 평택군을 병합하였으며, 1938년 평택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949년에 진위면이 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부산(釜山)의 부의 훈(訓)이 솥을 뜻하고 송촌활(松村活)은 뭍이 되어, ‘솟을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진위는 이 말의 뜻을 바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성천(安城川)의 지류인 장호천(長好川)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북으로 진산인 부산을 등지고 있었다. 남쪽에 해창(海倉)이 있어 남양만을 통하여 서울로 세곡을 운반하였다. 평택에서 이곳을 거쳐 용인ㆍ수원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6구간(은빛개울공원~원균 묘)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전철 편으로 오산대역에 도착했다. 이번 구간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이 용이하다.




# 오산대역은 오산대학보다는 물향기 수목원에 인접해 있다. 이 수목원은 경기도에서 조성한 도립수목원이다. 지난 2006년에 문을 열었는데 총 10만평의 부지에 1,600여 종 42만 5,000여 본의 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마눌과 함께 찾았는데 자연의 향기 맡으며 산책하기 알맞게 잘 꾸며 둔 곳이었다.




# 수목원 울타리를 따라 1km 정도 걸어 시작점으로 향했다. 겨울 수목원은 약간 을씨년스런 느낌이다.




# 저 사거리 우측이 은빛개울공원이다.




# 은빛개울공원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번 구간 전반은 경기 삼남길 8길이고 이름은 오나리길이다. 오나리란 이름이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참 싱거운 이름이다. 오산의 시화(市花)가 지금은 매화이지만 예전에는 개나리였던 모양이다. 오산의 '오'와 개나리의 '나리'를 합쳐 오나리라고 이름 지었단다. 재미없다.




# 택지개발지구 펜스를 따라 고개를 오른다. 교차로에서 준비하는 동안 저 아가씨가 오더니 안내판을 읽고 삼남길을 따라 앞서간다. 삼남길 순례객인 줄 알았다.




# 무심코 그 아가씨를 따라 고개를 넘었다. 고개 넘어 한참을 가다가 기분이 이상해 지도를 확인하니 삼남길을 벗어나 있다. 고개에서 육교를 건너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지나친 것이다. 산책 나온 지역 주민을 삼남길 순례객으로 착각한 것이다. 고개 위로 다시 돌아 갔다.




# 이 산길은 물향기 수목원 남쪽 울타리와 접해 있다. 산길을 길게 진행하는데 산책 나온 지역 주민들이 많다.




# 중간에 약수터가 있어 물 한 잔 마셨다.




# 산길이지만 큰 오르내림 없어 편안하다. 푹신한 솔갈비 깔려 있어 발바닥도 편하다. 




# 야트막하지만 봉우리도 몇 개 넘는다.




# 산길을 약 2.5km 정도 걸어 산을 벗어났다. 그곳에 궐리사(闕里祠)가 있다. 절 寺가 아닌 사당 祠를 쓴다. 사찰이 아니라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조선 중종 때 공자의 후손인 공서린(孔瑞麟)이 후학 지도를 위해 세운 곳이다. 나중에 정조대왕이 사당을 세우게 하고 궐리사라고 친필 사액(賜額)하였다. 궐리란 이름은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의 마을 이름이란다.




# 안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문이 잠겨 있어 담 넘어 겉모습만 구경하였다.




# 궐리사를 나와 삼남길로 복귀했다. 방앗간 골목길로 간다.




# 도로를 건넜다가 작은 개천을 만나 그 길을 따른다.




# 개천 우측으로 오산대학교가 건너다 보인다.




# 잠시 후 오산천을 만난다.




# 이후 오산천 둔치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길게 진행한다.




# 예전에 이 오산천이 서해바다로 이어져 바닷배가 들어왔다고 적혀있다. 오산천이 진위천에 모이고 다시 안성천으로 합쳐졌다가 아산만으로 이어지니 바닷배가 들어 올 수는 있었겠다. 문제는 배가 다닐 만한 수심과 수량이겠지.




# 오산천 산책로는 넓고 한산하다.




# 이 하천은 이제 이름이 신갈천으로 통합되었다. 길게 내려갔다가 천을 건넌다.




# 하류쪽으로 맑음터공원의 탑이 보인다.




# 한가하고 고요한 길이다.




# 편안히 걸어 오산 물맑음터공원에 도착했다.




# 공원 안내소 건물 안에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전망대와 하천 환경 관련 전시를 하고 있다. 이이들 데리고 견학 온 젊은 부부들과 소일차 나온 어르신들이 간혹 오간다.




# 이곳은 하수처리시설을 공원으로 꾸며 각종 휴식시설을 만들고 캠핑장까지 조성하여 시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혐오시설이라고 기피되는 곳을 이렇게 가꾸어 놓으니 시민들의 삶의 질이 올라 간다. 잘하는 일이다. 주말을 야외에서 보냈을 캠핑족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 나도 한뎃잠을 좋아하지만 저렇게 집을 통채로 옮겨 온 캠핑은 아니고 땀 흘려 산을 오르고 그 속에서 최소한의 장비로 머물기를 지향한다.




# 맑음터 공원에서 간식 먹으며 휴식하였다. 제 8길 오나리길 구간이 끝나고 이곳부터 경기삼남길 제 9길 진위고을길이 시작된다. 17.4km 면 꽤 먼 거리가 남아 있다.



# 공원을 떠나면 곧 야막리 들을 만난다. 이곳부터 행정 경계는 오산에서 평택으로 넘어간다.




# 전봇대 나래비 서있는 농로를 따라 길게 진행한다.




# 진위(振威)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들판이 유명한 곳이다. 들판 넓으니 채소 농사가 성(盛)하였다. 옛 신문을 뒤적이니 채소값 폭락, 혹한과 폭설로 채소 농사 피해 등등 채소와 관련된 소식이 나올 때면 늘 평택군 진위면을 배경으로 뉴스가 전해진다. 안내판을 보니 오이와 애호박이 유명한 모양이다. 오이와 애호박 모두 키우는데 물이 많이 필요한 채소이다. 폭 넓은 진위천이 흐르고 있어 가능한 농사이다. 




# 들판 가운데 마을이 있다. 어느 집 담장 위로 목련이 가지를 벌리고 있다. 겨울 눈으로 혹한을 견뎠을 목련은 곧 꽃을 피워내기 위해 마음껏 부풀어 오르고 있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 마을을 벗어나는데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강아지가 많다. 겁 많은 놈들이 직접 덤비지는 못하면서도 계속 주변을 맴돌며 발악하듯 짖어댄다.





# 지난 구간 독산성 넘으며 길에서 주웠던 나무 작대기를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갔다. 그날 목줄 없이 다니다 덤비는 개를 쫓을 때와 독산성 오를 때 빙판길에 지팡이로 잘 썼기 때문이다. 우둘투둘한 옹이 깎아내고 불에 구워 똑바로 폈다. 사포질하여 표면을 다듬고 기름 먹였더니 훌륭한 지팡이가 되었다. 가볍고 작아 휴대하기 편하다.




# 마지막으로 타구봉(打狗棒)이란 제 이름을 적어 주었다. 개(狗)를 때리는(打) 막대기(棒)이다. 중국 무협세계에 개방(丐幇)이란 거지 집단이 있다. 그 집단의 방주(幇主)가 구지신개 홍칠공(九指神丐 洪七公)이다. 구지신개는 타구봉을 가지고 다니며 개를 쫓기도 하고 뱀을 걷어내기도 하였다. 타구봉은 지팡이이면서 무기이다. 구지신개의 무술은 타구봉법(打狗棒法)이다. 개방의 방주에게만 전해지는 무술이다. 나도 타구봉으로 진위 고을의 개들을 쫓아냈다.




# 야막리 개들과 한바탕 소란을 겪은 후 하북리로 가는 18번 도로를 따라 걷는다.




# 그러다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사리 고가교를 통해 경부선 철길과 1번 국도 위를 지난다. 고가 위에서 보니 멀리 진위역이 보인다. 현지 표지기는 내가 걸은 이 길로 안내하였는데, 나중에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니 이곳 사리 고과교가 아니라 야막리에서 곧바로 야막 고과교를 넘어 공장지대와 가곡리 안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다시 가곡1리 입구사거리에서 만나게 되지만, 현지의 표지기와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코스는 2km 정도 차이를 보인다.




# 롯데 공장을 좌측에 두고 진위면소재지 상단을 휘감아 돈다.




# 진위중고등학교를 멀리 보면서 마을을 벗어나 농로를 따라 골짜기 안으로 올라간다.




# 들판 넓은 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이 삼남길 좌측에 있다. 넓은 들 사이에 야트막한 야산이 있고 그 야산에 기대어 드문드문 집들이 있다. 언덕 제일 높은 곳에는 어김없이 아담한 시골 교회가 있다.




# 한가로운 시골길의 풍취를 마음껏 즐기며 길을 걷는다.




# 고라니 한 마리가 골짜기 또랑에서 물을 마시디가 나 때문에 놀라 뒷쪽 산으로 도망을 친다. 너의 평화를 깨서 미안타.




# 지금 이곳의 길은 해빙기를 맞아 온통 질퍽한 뻘밭이다. 곧 신발이 흙투성이가 된다.




# 골짜기 농로를 따라 깊게 올라 가다가 축산 농가를 돌아 나가자 도로와 공장지대가 나온다.




# 길가에 편의점이 있길래 간단한 음식으로 마음에 점 하나 찍었다. 막걸리도 한 잔 하면서 오래 쉬었다.




# 가곡1리 입구 사거리이다. 건널목을 건너 가곡1리로 들어간다.




# 배농사를 많이 짓는 동네이다. 과수원이 즐비하다. 뒷쪽 산줄기가 무봉산 줄기이다. 무봉산(舞鳳山)은 208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들 가운데 있는 산이라 진위 고을의 진산(鎭山) 대접을 받는다. 좌측 너머에 수련원이 있다. 십몇 년 전 워크숍 참석차 하룻밤 머문 기억이 있다.




# 가곡1리에 있는 어느 농가이다. 옛집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 모습 범상치 않아 사진으로 남겼다.




# 가곡리 마을은 인기척 없이 쥐죽은 듯 고요하다. 주민은 단 한 명도 못 만났는데, 제법 큰 개 두 마리가 목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인기척이 나자 자지러지게 짖으며 달려든다.




# 이곳에서도 타구봉이 위력을 발휘했다. 눈 마주치고 호통을 치면서 타구봉법을 시전하니 금세 조용해진다. 짐승들은 두려움을 느끼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 마을 안에서 개들과 한바탕 소란을 겪은 후 우틀하여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다. 맞은 편 농장을 지나고 저 산의 고개를 넘어야한다. 가곡리에서 봉남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예전 이 마을사람들이 산 너머 마을로 마실 갈 때 넘어 갔을 법한 좁은 고개이다. 고개 이름은 알 길이 없다. 고개 아래 가곡리 쪽 골짜기 이름이 원골이니 원골고개 쯤 되려나?




# 고개를 넘어가자 조용한 전원주택 단지가 나온다. 봉남리는 남향을 한 아늑한 골짜기이다. 햇살 따스하고 북풍 없으니 전원주택단지로 그만이다. 그래서인지 기존 전원주택 외에도 신축공사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 봉남리는 아래로 내려 갈수록 넓어진다. 골 넓으니 바람이 달려든다. 그 바람 속에 노란 풍선 하나가 날아와 내 발 앞에 멈춘다. 노란 스마일 풍선이다. 그 웃음이 기분 좋다. 겨울왕국의 울라프를 닮았다.




# 꼬맹이 만나면 주려고 들고 갔는데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위초등학교 입구 전신주에 매달았다. 제일 먼저 발견하는 아이가 가져가겠지...




# 진위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예전 진위 관아가 있던 곳이다. 진위는 예전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장이었다. 들 넓은 곳에 바다로 이어진 물줄기까지 지니고 있으니 물산 풍부하고 교통 좋았던 곳이다. 자연히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어 지금의 수원인 수성군(水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평택군에 통합되면서 진위면으로 격하되었다.





# 면사무소를 나와 잠시 가자 진위 향교가 나온다.







# 안내판에 적어 두기를 전국 향교 중 풍수지리가 가장 으뜸이란다. 근거는 없다.




# 향교 바로 앞으로 진위천이 흐른다. 옛 이름은 장호천(長好川)이다. 앞의 들은 건는들이다. 이곳 향교도 인기척이 없다. 한바퀴 돌아보고 싶지만 문이 잠겨 있다. 화장실 이용하고 곁에 있는 사무처로 쓰이는 기와집 마루에서 한참을 쉬었다.




# 향교 앞에 있는 낮은 다리를 통해 진위천을 건넌다.




# 이 진위천은 우리 집 앞에 있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안성천을 이루고 이후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물줄기이다. 몇 해 전 처음 수원으로 이사와서 마눌 앞세워 자전거로 답사한 물줄기이다. 이곳에서는 이미 강에 버금가는 폭으로 품이 넓어져 있다.






# 건너편 강둑에서 향교를 돌아 보았다. 안내문에서는 이 자리가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적어 두었는데, 어느 풍수 모임에서는 명당이라기에는 부족하다 평가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쪽으로 왼쪽인 우백호의 끝이 벌어져 있어 기운을 감싸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전문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고, 다만 대명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왜소하고 주변의 풍광도 밋밋한 느낌이 든다. 꼭 산세 험하고 빼어난 절경을 가진 곳이 명당은 아니겠지만...  




# 건는들 중앙의 농로를 가로지른다. 농로 중간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 안에서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한창이었다.




# 306번 지방도와 만난다. 삼남길은 이곳에서 도로 건너편 버섯요리집 뒤로 가야 한다. 그런데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건너 갈 수가 없다. 삼남길 표지 설치 이후 공사를 한 모양이다. 지도를 확인하니 도로를 따라 우측 마산 사거리로 가서 좌측 길을 택해 계속 가면 삼남길과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냥 차량 통행 없을 때 중앙분리대를 뛰어 넘어 버섯요리집으로 바로 갔다.




# 버섯요리집과 철재공장 사이 야산에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산으로 올라 가는 줄 알고 길을 찾아보지만 산으로는 길이 없다.




# 대신 철재공장 뒤로 좁은 길이 있다. 삼남길은 저곳으로 이어진다.




# 중앙분리대를 넘으면 위험하니 도로를 따라 이곳 마산 사거리까지 와서 길을 건너는 것이 옳다.




# 마산리의 산길을 따라 이동한다.




# 모퉁이에 큰 정자나무와 정자 쉼터가 있다. 삼남길은 건너편 다리 쪽으로 이어지는데 이곳도 무슨 공사를 하면서 펜스를 쳐 갈 수가 없다. 따라서 그냥 도로를 따라야 한다. 얼마 돌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 안골마을에서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 마을 안을 통과하여 곧바로 산으로 올라간다.




# 햇살 따스한 산능선을 치고 오른다. 긴 줄무덤 좌측으로 길은 이어진다.




# 산길을 따라 꾸준히 오른다.






# 그러다 옛 고개 하나를 지나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차량 소음과 헤어져 좋기는 하다만 산길 오르내림 있으니 좀 힘은 드는 구간이다.




# 좀 전에 건너온 317번 도로가 앞을 가로 막고 숲 너머로 산 하나가 우뚝하다. 다시 저 산을 넘어야 하는 줄 알고 잠시 긴장하였다.




# 저 동물 이동통로를 통해 도로를 건너야 한다.




# 우측 멀리 평택 쪽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농사 준비하느라 소똥을 넓게 펼쳐두었다. 똥냄새 강렬하다.




# 동물이동통로를 통해 도로를 건넌다. 이곳이 소백치(小白峙)이다. 다음에 만날 대백치와 합쳐 흰치고개라 불렀다. 예전 산에 나무가 없던 시절 멀리서 보면 고개마루가 희게 보여 그렇게 불렀다 한다.  




# 맞은편 산으로 가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데, 삼남길 표식이 산이 아니라 우측을 가리키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 317번 도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 317번 도로가 지나는 교차로이다. 주변을 찾아보지만 이름이 없다. 지산로와 만나는 교차로이니 지산로 교차로라 나홀로 부른다. 그런데 이곳에서 삼남길 표지기가 양쪽 방향 모두에 매달려 있어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몰라 잠시 헷갈렸다. 지도 확인하니 네이버 지도에서는 도로를 건넌 후 평택 방향으로 가다가 터골을 통해 산을 오르게 되어 있고 그쪽으로도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또 하나는 도로를 건넌 후 317번 도로 따라 고개를 오르다 우측 산으로 질러가게 되어 있다. 그 방향에도 삼남길 표식이 그려져 있다. 나는 후자인 질러가는 방향을 택했다.




# 317도로인 삼남로를 따라 고개를 오른다. 




# 곧바로 우측 갈림길을 만나 SRT 수직구 관리소를 지나 산으로 접어든다.




#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길게 올라간다.




# 부락산 산책로와 합류한다. 좀 전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갔다면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 고개를 치고 올라간다.




# 고개 정상에 부락산 쉼터가 있다. 송탄 지역사람들 산책로인가 보다. 넓은 공터에 쉼터와 수도시설,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휴일을 맞아 산책 나온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곳에서 화장실도 쓰고 오래 쉬었다.




# 고개 위에서 좌측으로 가면 부락산이고 우측으로 가면 덕암산이다. 삼남길은 덕암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 아늑한 솔숲이 길게 이어진다.




# 그러다 다시 317번 도로를 만난다. 이곳에도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고개가 대백치(大白峙)이다. 부락산 자락에는 소백치가 덕암산 자락에는 대백치가 있고 두 고개 모두 삼남로가 통과하는 고개이다.




# 산악자전거로 임도라이딩을 즐기는 라이더가 종종 있다. 부럽다. 나는 지금 장경인대염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내 자전거 두 대는 모두 바람 빠지고 기름 마른 채 정물화가 되어 있다.




# 삼남로는 차량 통행이 많은 길이다.




# 소백치에서는 산을 오르지 않고 고개 건너자마자 도로를 따랐지만, 대백치는 곧바로 맞은편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명재상이다. 최영장군의 손자 사위로 충청도 온양 출신이다. 세종대왕 시절 황희와 함께 정사를 책임졌던 사람이다. 청백리(淸白吏)의 상징적 인물로 알려졌다. 맹고불의 공당문답(公堂問答)은 소탈하고 덕망 높은 그의 성품을 잘 드러낸 옛이야기이다. "그대는 어디 가는공?" "한양에 간당." "한양엔 왜 가는공?" "벼슬자리 구하러 간당." "한양가서 벼슬자리 줄 사람 있는공?" "없당." "그럼 벼슬자린 어떻게 얻으려고 하는공?"  "나도 모른당." "그럼 내가 벼슬 하나 줄공?" "바라지도 않는당." "자네, 나를 알아보겠는공?" "아, 알아보겠당."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떠한공?" "주, 죽고만 싶당."




# 바람 없고 햇살 따스하다. 산길이기는 해도 험악하게 높은 산이 아니라 느긋하게 갈 수 있는 길이다.





# 산행 나온 지역 주민과 발 맞춰 천천히 덕암산을 오른다.




# 잔봉을 너댓 개 넘어 길게 진행한다. 그러다 산불감시초소와 정자가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삼남길은 봉우리 9부 능선에서 우측으로 사면을 따라 우회한다. 이윽고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덕암산은 좌측길로 1km 정도 더 올라가야 하고 삼남길은 좌측 길로 이어진다.




# 내리막 중간에 벤치가 있길래 간식 먹으며 한참을 휴식했다.




# 길게 내려가면 산을 벗어난다. 꽤 긴 산길이었다. 산을 벗어나 만나는 동네는 도일동 내리마을이다.




# 산중턱에 조성된 마을이다. 산자락을 한바퀴 휘어감자 전방으로 경치가 훌륭한 묘역이 나온다. 




# 원균의 묘역이다. 그런데 역사의 죄인으로 알려진 원균의 묘역이 너무나 훌륭하게 조성되어 있다. 평소 전국의 산하를 두루두루 누비고 다니는 몸이라 이런 역사적 인물의 묘역을 접할 기회가 많다.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의 묘역이 너무나 초라해 가슴 아팠던 적이 허다한데, 평택의 원균 사랑은 지나친 감이 있다. 2010년 평택문화원에서 평택의 역사인물을 모델로 문화달력을 만들었다. 그런데 1월 인물이 원균이었다. 또 평택교육청에서 평택지역 위인 리더십자료를 발간했는데 또 원균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 역사는 기록의 산물이다. 기록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면 안되고 기록을 왜곡하여도 안된다. 원균이 여진족을 토벌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조산만호를 지냈다는 기록 뿐이다. 이순신과 함께 한 전투에서 항상 선두에 선 적도 없다. 전투보다는 적의 수급을 확보하는데 정신이 없었을 뿐이다. 애초에 나 역시 원균이 필요 이상으로 폄하(貶下)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비록 대패하여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전투 중에 죽었으니 순직은 맞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을 찾아보니 참으로 한심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깊어지기만 한다.





# 처음 전쟁이 났을 때는 적이 겁이 나서 전함을 모두 불태우고 자신이 타고 도망갈 단 한 척만 남겼고, 나중에 통제사가 되었을 때는 도망치다가 칠천량에서 함선을 모두 잃고 말았다. 수군 장수로서 그가 한 일은 배를 없애거나 잃는 일이었다.




# 원균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이 많다. 사망의 목격자가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록에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처벌을 논하는 내용이 나오다가 후대에 이르러 사망한 것으로 간주하여 기록하고 있다.


다만 그의 죽음의 근거로는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올린 글이 있을 뿐이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元均生死, 不得詳知)"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의 기록도 비슷하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시신은 없으나 무덤은 조성되었다. 그의 본향인 이곳 평택 도일동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그 무덤은 시신 없는 가묘(假墓)이다. 통영에 원균의 목 없는 묘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고도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 묘역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경치가 기가 막힌다. 흐르는 물은 아니지만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었다. 남향하여 따스하고 뒷산이 바람 막아주는 데다 전방으로 툭 트인 조망이 시원하다.




# 수백 년 세월 흘러 영욕(榮辱)도 잊혀져 고요히 쉬고 싶었을 그를 이 세상 복잡한 갈등 속으로 불러 낸 것은 후손들의 욕심이다. 개인적, 집단적, 금전적, 사상적 욕심이 그를 이 진토(塵土)로 다시 불러냈고 그의 이름을 다시 욕되게 만들었다. 이런 멋진 묘역이 다 무슨 소용인가? 잘 꾸며 주어서 고맙다고 그가 흡족해 할까? 안타까운 일이다. 그에게 술 한 잔 올려 위로하였다.  



# 묘역 아래 크지 않지만 맑고 은근한 저수지가 있다. 아직 바람 차고 물빛 맑아 물고기 움직일 시절이 아닌데 성질 급한 강태공들이 이곳저곳 자리잡고 앉아 찌를 응시하고 있다.




# 저수지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묘역이 아늑하다.






# 저수지 입구에 모선제(慕先齋)라는 원주 원씨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 원균 묘역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세상 논란에 나역시 휘둘려 혼란하였던 탓이다. 빈 묘에 술 한 잔 올려 망자를 위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내리저수지에서 도로 따라 조금만 내려오니 사거리가 나오고 삼남길 구간은 이곳에서 한 구간을 마무리 한다. 시간 지체하여 노을이 이미 지고 있다.




# 도일동 내리마을은 평택의 외곽이다. 따라서 대중교통이 띄엄띄엄 운행한다. 찬바람 강한 버스정류장에서 한 시간 가까이 떨며 기다렸지만 버스도 택시도 왕래가 없다. 포기하고 콜택시를 부를 순간 빈택시 한 대가 내려온다. 온 몸이 꽁꽁 얼었다. 그러나 늦게나마 나타난 택시 덕분에 편하게 서정리 전철역으로 이동했다.




이후 전철 편으로 쉽게 귀가했다. 그렇게 삼남길 6구간을 마무리했다. 이번 구간은 평택시에서 잘 조성해 둔 원균 묘역에서 구간이 종료되었다.  


평택시는 원균을 지역의 위인으로 높이고자 여러 무리수를 두고 있다. 그의 본향이 이곳 도일동이고 후손이 이 지역에서 4선 의원을 지내고 있으니 그러는 모양이다. 또 사회 일각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이순신 격하(格下)와 원균 재평가를 도모하는 시도가 끊이질 않은 탓도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그렇게 일부 세력의 의도로 왜곡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무리 지어 삶을 영위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들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그 기록은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적 행위를 뒷사람에게 영원히 알리는 것이라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자하는 생각은 인류 공통의 의지이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을 위한 당대 혹은 후대의 기록 조작이나 재해석의 유혹이 늘 이어져 왔다. 하지만 양(洋)의 동서(東西)나 시(時)의 고금(古今)을 모두 통틀어 단 한 차례도 그런 불순한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둑을 쌓아 막으면 언젠가는 둑을 넘어 본류를 회복하고 물길을 인위적으로 돌려놓으면 기필코 다시 본래의 바른길로 낮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만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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