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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7구간(원균 묘~안성천교)-올바른 위정자 김육(金堉)과 대동의 법(大同法)!!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7구간(원균 묘~안성천교)-올바른 위정자 김육(金堉)과 대동의 법(大同法)!!

강/사/랑 2017. 3. 21. 10:38

[삼남길]7구간(원균 묘~안성천교)


 
子曰, 大道之行也, 與三代之英, 丘未之逮也, 而有志焉.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棄於地也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 <禮記-禮運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대와 삼대(三代)의 영명(英明)한 군주들은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가지고 있다. 대도(大道)가 행해졌던 시대에는 천하가 모든 이의 소유였다. 어질고 유능한 자를 가려서 왕위를 물려주었고 사람들은 신의를 추구하고 서로 간의 화목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과 친한 사람만을 친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늙은이들은 천수를 누리게 하였고 장년들은 각자의 능력을 펼치게 하였으며 어린이들은 제대로 양육되도록 하였고 또 홀아비, 홀어미, 고아, 폐질에 걸린 사람 등 사회 소외 계층으로 하여금 모두 부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남자들은 각자가 직무를 가지고 있었고 여자들은 각자 시집을 가서 자신의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미워하기도 했거니와 또 꼭 자신에게 간직되기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힘이 있으면서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미워하기도 했지만, 또 그 힘을 꼭 자신을 위해서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음모(陰謀)는 폐기되어 발생치 않았고 도둑질과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요, 그래서 대문을 밖으로 열어두고서 닫지 않았던 것이니 이를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예기-예운편>


'공자(孔子)'는 동양철학의 태두(泰斗)이자 그 철학을 종교적 영역까지 확대한 유교의 시조(始祖)이다.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인류의 4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의 사상은 동양 세계의 전범(典範)이었고 그는 동양 사상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간난신고(艱難辛苦) 그 자체였다.


공자는 일생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하였다. 하지만 공자의 시대는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던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시대였다. 권력과 무력(武力)이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에 극기(克己)하여 복례(復禮)하자던 그의 사상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공자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대와 삼대(三代)의 재현(再現)이었다. 일러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는 요순(堯舜)의 시대이다. 요순의 시대에 천하는 모두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질고 유능한 자를 뽑아 천하를 맡기고 그 자리는 선양(禪讓)을 통해 계승하였다.


삼대는 하ㆍ은ㆍ주(夏殷周)나라 시대를 말한다. 대도의 시대보다는 못하지만, 예(禮)를 기강(紀綱)으로 삼아 군신(君臣)의 관계를 확립하였다. 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성왕(成王)ㆍ주공(周公) 등이 삼대의 천자들이다. 예를 기반으로 한 안정된 사회가 이어졌는데 이 시대를 '소강(小康)'이라 불렀다.  


공자 말씀하신 대동(大同) 세상은 이후 동양 사회의 이상향(理想鄕)이 되었다. 춘추 이후의 무수한 유학자들은 공자의 대동을 국가가 실현할 최후의 모습으로 여겼다. 그런 사상의 흐름은 근세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청말(淸末)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강유위(康有爲)'다.


캉유웨이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 늙은 공룡 청(淸)을 개혁하기 위한 변법자강(變法自彊)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저서(著書)인 '대동서(大同書)'에서 남녀평등, 가족제 폐지, 계급철폐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국가를 역설하였다. 대동의 중국판 근대화였다.


대동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활발히 계승되었다. 조선 선조 22년(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원인이 되었던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은 양천(良賤)을 망라한 신분 제약이 없는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하였다. 평상시 학문과 무술연마를 하며 끈끈한 친목을 가졌던 이 조직은 서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난(亂)을 일으켜 정여립이 자결함으로 최후를 마쳤다.


일제강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애국계몽 활동의 일환으로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 기초한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였다. 그의 대동은 세계평화주의(世界平和主義)였다.


대동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세월 흘러 이 땅에 공화정이 수립되고 명목상의 민주주의가 구현되었지만, 정치는 군부독재의 그늘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 시절 전국 각지의 대학은 합법적 집회를 누릴 자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향락적 소비가 주류였던 대학축제를 민주화 집회로 쉽게 결집할 수 있는 '대동제(大同祭)'로 바꾸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사상의 제련소(製鍊所)였다. 어떤 사상이든 일단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원본의 복제(複製)나 아류(亞流)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뛰어넘는 순수성(純粹性)과 교조성(敎條性)을 가지고 확대 재생산된다.


대동사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위에 열거한 여러 대동(大同)의 예 외에 서민 경제에 가장 파급효과가 컸고 사람들 생활에 밀접했던 것은 '대동법(大同法)'이다.


조선의 조세제도는 토지세(土地稅), 역(役), 공납(貢納) 세 가지였다. 국망(國亡)이 가까워지면 제일 먼저 국가 기강이 허물어지고 관리들은 사리사욕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조세제도를 악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한다. 조선은 세 가지 조세 중 '공납(貢納)의 폐단(弊端)'이 가장 심했다.


공납은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고 현물로 수취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제도이다. 공납은 원래 재산이나 소득에 대한 부과가 아니라 인두세(人頭稅)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부담이 불공평하였고 공납을 대신해주는 공인(貢人)의 등장과 방납(防納)의 폐단이 극심하였다. 방납은 대납(代納)을 말한다. 자연히 고리대금처럼 몇 배의 이자가 붙어 일반 백성들의 짐이 되었다.


공납의 폐단이 심해지자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한 도망 유민(流民)이 증가하였고, 도망민의 공물을 친척이나 이웃이 다시 짊어져야 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하였다.


대동법은 이런 공납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그 법령의 주된 내용은 지역 특산물로 납부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한 것이다. 특산물을 대납하던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방안이었고 일반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춘 개혁 법안이었다. 


대동법은 처음 율곡 '이이(李珥)'가 그의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쌀로 공납을 대신하자는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던 것을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류성룡(柳成龍)'에 의해 토지 1결에 쌀 2말씩을 징수하도록 한 대공수미법으로 전국에 시행된 것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징수한 쌀의 양이 매우 적고 수시로 현물로 징수하는 일도 많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이후 광해군 시절 한백겸(韓百謙)·이원익(李元翼) 등이 그 내용을 보완하여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고 인조 때에도 확대 실시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양반 지주들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무산되었다.


이 법이 효종조(孝宗朝)에 대동(大同)의 이름으로 본격 시행된 것은 '김육(金堉)'의 공이 크다. 김육은 가평군 잠곡 사람으로 1580년생이다. 자를 백후(伯厚), 호를 고향 이름을 따 잠곡(潛谷)이라 했다.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웠던 수재(秀才)였다. 24세 때인 1604년 사마 초시(司馬 初試)와 회시(會試)에 급제하고 성균관시 수석(首席)을 차지했다. 1611년 별시 초시와 증광 별시(增廣 別試)에 합격하였지만, 대북파(大北派)가 득세하던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잠곡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다.


10년간의 은신(隱身) 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곧바로 출사하여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마흔넷의 늦은 나이였지만 그의 능력과 행실을 올바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163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그가 직접 10년 간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뼈저리게 느꼈고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使行)을 통해 시야를 넓힌 덕분이다.


무수한 반대에 부딪혔던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효종(孝宗)의 즉위와 함께 김육이 우의정이 되면서이다. 삼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효종 2년인 1651년 충청도, 7년 뒤 1658년에 호남지역에 대동법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숙종년간(肅宗年間)에 경상도, 함경도, 강원도 등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시행이 이뤄지게 되었다. 대동법은 그 근본이 공납의 폐해를 없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애민(愛民)의 정책이다. 시행 과정에 부수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 본래의 취지를 훼손치는 못했다.


그리하여 육백년 조선 역사 상 손꼽히는 애민 정책으로 평가받았고 백성들의 호응도 높았다. 대동법은 김육에게 일생일대의 과업이었다. 한 위정자의 올바른 판단과 집념의 정책 추진으로 온 백성의 삶에 온기가 돌게 된 것이다. 이에 충청의 백성들은 돌을 세워 비석을 만들고 글을 새겨 김육의 공을 후세에 남겼다.


이른바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이다. 정식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이다. 홍문관 부재학을 지낸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吳竣)이 글씨를 새겼다.


효종 10년인 1659년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비를 세웠는데, 지금의 평택시 소사동이다. 삼남길 길목에 있으니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이는 누구나 이 비석을 보게 된다. 백성의 삶을 보살필 좋은 정책과 그 정책을 목숨 걸고 집요하게 추진하는 올바른 위정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는 이 비석이 후세인들에게 묵묵히 웅변(雄辯)하고 있다.


 


올바른 위정자 김육(金堉)과 대동의 법(大同法)!!


구간 : 삼남길 제 7구간(원균 묘~안성천교)
거리 : 구간거리(14.5 km), 누적거리(122.4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3월 12일. 해의 날.
세부내용 : 원균 묘 앞 내리교차로 ~ 팔용저수지 ~ 평택제천고속도로 굴다리 ~ 옥관자정/갈원 ~ 평택신촌택지개발지구 ~반도유보라아파트 ~ 배나무근린공원 ~ 배다리저수지 ~ 대동법시행기념비 ~ 소사벌 ~ 안성천교.


날이 갈수록 기온이 올라가고 따스해지고 있다. 날씨 좋아지니 마눌의 걱정도 많이 줄어 들었다. 그리하여 이번 삼남길 순례에 기꺼이 동참하겠단다. 오랜만의 동반 여행이다.


집에서 가까운 동네를 걷는 길이니 오고 가는 교통편도 수월하다. 이번 구간은 거리도 14.5km 정도여서 솔방솔방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따라나서는 마눌의 발걸음이 가볍다.


동네 성군관대역에서 전철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평택 서정리역에 도착한다. 잠시 졸기도 책 읽기도 가까운 거리이다. 좋다. 이런 가벼운 기분으로 삼남길 7구간을 시작했다.


대동법/大同法


조선 시대 광해군 때 공납 제도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현물을 쌀로 납부하게 한 제도. 공납 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민호를 기준으로 현물로 납부하는 제도이다. 공납 제도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물로 납부하기에 수송과 저장의 어려움이 있다. 둘째, 민호를 기준으로 동일한 공납액을 부과하므로 부과가 불공평하다. 셋째, 생산되지 않은 물건을 부담시킨다. 넷째, 상인이 농민의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고 높은 이익을 챙기는 방납의 폐단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6세기에 조광조, 이이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1608년 광해군 때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적인 실시는 1708년 숙종 때이다. 대동법 실시 과정이 100년이나 걸린 이유는 지주와 대상인이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내용은 토지 1결당 쌀(포, 전) 12두를 납부하는 것이다. 현물을 쌀(포, 전)로 통일하였고, 기준을 민호에서 토지 1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물건을 부과하는 일은 없어지고, 방납의 폐단도 시정되었다. 대동법 실시 후 변화는 관청에 물품을 조달해 주는 상인으로 공인이 등장하였으며, 지주의 부담은 증가된 반면 소농의 부담은 감소되었다. 또한 국가 재정이 증가되었고, 화폐의 유용성이 인식되면서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어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별공과 진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므로 현물 납부는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7구간(원균 묘~안성천교)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서정리역에 도착하니 시각은 이미 점심때가 되어 있다. 역 근처에서 민생고를 해결한 후 택시 편으로 이동했다. 이번 구간 출발지인 도일동 내리사거리이다. 원균묘 혹은 저 앞에 보이는 갈비집이 포스트이다.




# 길 너머로 원균의 묘가 건너다보인다. 지난 구간 마무리할 때 저 묘역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역사에 기록되어질 위치에 있는 사람의 행적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역사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는 뒷사람의 시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 경기도에서는 이번 구간을 소사원길이라 이름지었다.




# 좌측 전방으로 팔용산을 바라보며 삼남길 소사원길 구간을 시작한다.




# 좌측 산자락엔 소규모 공장들이 있고 우측은 들판이다.




# 볼보 건설기계시험장이 나타난다. 삼남길은 볼보 시험장 좌측으로 이어진다.




# 나지막한 팔용산 자락의 들길을 따라 진행한다.




# 그러다 팔용저수지를 만나 그 둑방길을 따른다.




# 젊은 낚시꾼 셋이 베스를 노리고 있다. 아직 물고기들이 활성화되기에는 이른 시절인데 비린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소득은 없어 보였다.




# 이 일대는 안성원곡일반산업단지이다. 공장들이 많다.




# 청원로라 이름지어진 도로를 건넌다.




# 잠시 후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 나들목의 굴다리도 통과한다.




# 송탄 톨게이트 창고 뒤에서 우측 갈림길로 들어선다.




#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 본 도로 아래를 지난다.





# 고개를 하나 넘어 내려가면 송탄동이 나타난다. 그곳 길가에 옥관자정이 있다. 




# 인조가 남행(南行) 도중 이곳 갈원에서 우물물을 마시고 그 물맛에 반해 옥관자를 내렸다고 전한다. 옥관자(玉貫子)는 종1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망건에 달던 옥으로 만든 관자이다. 옥관자를 내렸다 함은 종1품 이상의 벼슬을 내렸다는 말이다. 인조는 재위 당시 세 번 피난하였다. 한번은 이괄의 난 때 공주로, 또 한번은 정묘호란 때 강화로, 나머지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난을 피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임금이 한가하게 우물에게 옥관자나 내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정말 그렇게 하였다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군주이다.






# 옥관자정에서 한참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칠원동을 지나 잠시 가면 거대한 택지개발지구를 만난다. 평택의 신촌도시개발지구이다.




#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산길샘 지도에서 길을 벗어났다는 알람이 계속 울린다. 지도를 확인하니 삼남길은 공사 현장 한 가운데의 길을 지나게 되어 있다. 그 길로 갔더니 입구 경비가 제지한다.




# 어쩔 수 없이 공사 현장을 우회해야 했다. 지도 확인하여 제일 가깝게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 신촌부락 주민을 위해 통제하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을 택했다.





# 이 일대는 어마어마한 신도시 개발 지역이다. 나중에 이 신촌마을만 도심 속의 외로운 섬처럼 남겠다.




# 최대한 지름길을 택해 신촌마을을 벗어났다. 45번 국도 아래를 통과한다.




# 칠원동의 수촌들을 가로지른다. 이 일대도 나중에 모두 택지로 개발될 곳이다. 삼남길은 전방의 마을에서 다시 이어진다.




# 택지지구 공사장 때문에 멀리 우회했다가 이곳에서 다시 삼남길과 합류했다.




# 수촌마을 통과.




# 삼남길은 보아지들을 가로질러 저멀리 아파트 단지를 향한다.




#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굉장히 넓은 택지개발 현장이다. 우리나라처럼 아파트가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엄청나게 지었고 지금도 엄청나게 지어댄다. 나중에 슬럼화되면 어찌 대처할지 궁금타.




# 잠시 후 하천둑에 올라섰다. 표지기가 하천 우측 둑을 따르게 매달려 있다. 그런데 그 길로 잠시 가자 알람이 울리며 이 길이 아니라고 알린다.




# 지도 확인하니 하천 건너 둔치 도로를 따르게 되어 있다. 누군가 엉뚱한 방향에 표지기를 옮겨둔 것이다.




# 하천을 건너자 차량 통행금지 봉이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삼남길 표식이 그려져 있다.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다.




# 들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놈들하고 잠시 눈을 마주치는 순간 트랙을 벗어났다는 알람이 울린다.




# 이 차량통행 금지봉이 문제였다. 손으로 돌려보니 방향이 움직인다. 누군가 방향을 거꾸로 돌려 둔 것이다. 이 장소에서 두 번이나 표지기와 표식이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아무래도 누군가 고의로 한 짓인 듯하다. 




# 지도 확인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한다.




# 둔치 산책로에서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을 만났다.




# 잠시 둔치 산책로를 따르다 둑에 올라 서고 다시 들판을 가로지른다.




# 이 동네도 아파트단지가 참으로 많다.




# 곧 어느 해장국집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 도로를 따른다.




# 그러다 도로를 건너 반도아파트 단지를 향한다.




# 입주한 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반도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간식 먹으며 한참을 쉬었다. 




# 반도 유보라아파트단지 앞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아파트를 벗어나 정면 야산을 향해 진행한다.




# 이곳부터는 소사벌 택지 개발지구의 근린공원지역이다.




# 택지개발지구 안의 야산을 근린공원으로 단장하였다. 규모가 상당한 공원이다. 산책하고 운동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 배나무 근린공원이라 적혀있다. 이 동네는 예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배나무과수원을 많이 하였다 한다. 배나무골이란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 이 공원은 한바퀴 도는 것만으로 하루 분량의 운동량을 다 채울 수 있을 듯해 보인다. 잘 꾸며 두었다.




# 원래 수리관개용으로 있던 저수지가 호수공원이 되었다. 배다리저수지이다.




#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또다시 그만큼의 아파트가 다시 지어진다. 나중에 저 아파트들이 노후화 되었을때 뒷처리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




# 배다리저수지 사거리에서 도로를 건넌다.





# 기존 아파트단지와 신규 건설지 사이의 도로를 따라 길게 남하하였다. 







# 아파트단지가 끝나는 우측에 야산이 하나 보인다. 저곳이 아마도 소사동 선사유적지인가 보다.




# 소사2길을 따라 진행한다. 한가한 시골길이다.




# 겨울 추위를 이겨낸 청보리가 푸른 싹을 대지 위로 밀어 올렸다.





# 마을 중간 언덕 위에 대동법 시행기념비가 있다.




#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 소사(素沙)란 이름은 흰 모래란 뜻이다. 안성천 유역의 강변 마을이니 흰모래가 많았을 것이다. 안내 비석에는 평평하고 넓은 들이어서 소사라 불렀다고 적어 두었다. 그랬다면 平이나 坪이 이름에 들어갔을 것이다. 




# 대동법(大同法)은 조선 백성들의 엄혹했던 생활에 내린 한 줄기 빗물같은 정책이었다. 양란(兩亂) 이후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은 질곡 그 자체였다. 김육(金堉)은 공납(貢納)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건 사람이다.


"왕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습니다.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이를 부른 탓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賦役)에 시달려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참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인군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반성하는 데에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밖에 별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대동법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였어도 경기와 강원에서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습니다. 이를 양호(兩湖) 지방에 확대 실시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롤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김육은 효종과 현종 연간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일생을 백성들 삶의 질을 높이는데 헌신하였다. 대동법과 관련하여 김집, 송시열 등 당시 주류 세력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며 왕에게 상차(上箚)한 윗글에 그의 애민(愛民)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 이 비석은 효종 10년에 호서지방 대동법 시행과 성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 대동법 기념비각에서 오래 머물다 다시 길을 나섰다. 소사들로 접어들었다. 소사천에 노을빛이 내려 앉았다.




# 너른 소사벌이 눈 앞에 펼쳐진다.




# 그 넓은 들판을 따라 진행한다.




# 소사벌싸움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하지만 정작 정유재란 당시 이곳 소사벌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이곳 소사벌은 명군이 주둔하였던 곳이고 전투는 이곳보다 아래인 직산에서 벌어졌다.




# 소사벌 한 가운데 농로를 따라 길게 진행한다.




# 커다란 식당과 유천 1동 마을을 지난다.




# 저녁 땅거미 내려 앉고 강바람 일어나니 한기 밀려든다.




# 들 건너편에 안성천 강둑이 보인다.




# 길게 걸어 안성천 둑에 올라 섰다.




# 왜놈들은 오랜 역사 동안 끊임없이 이 땅을 넘봤다.





# 강둑에서 돌아보면 소사 들판 너머 평택 시가지가 보인다. 




# 찬바람 강하게 부는 안성천. 이 강을 경계로 경기와 충청이 나뉜다.




# 강바람 강하게 불어 갈대밭에 갈대 춤추는 모습과 몸 비비는 소리 요란하다.







# 안성천교에 올라 서서 오늘 구간을 마무리 한다.




# 이곳까지가 경기 삼남길이다. 이후는 충청 삼남길이 이어진다. 




# 찬바람 부는 날 들판 걷느라 고생한 마눌과 경기삼남길 종료 기념촬영하였다. 




# 삼남길 경기 구간 마무리는 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교통편이다. 이곳은 평택은 물론 경기도의 끝 경계이다. 안성천 다리를 오가는 내부 교통편이 잘 없다는 얘기이다. 삼십여 분 찬바람에 벌벌 떨면서 대중교통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다 지쳐 택시를 호출하려는데 마침 강둑에서 작은 트럭 한 대가 올라 온다. 부친의 농장 일을 거들고 귀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친절 덕분에 평택역까지 한 번에 도착했다. 감사한 일이다. 




# 평택역 앞에 맛집으로 유명한 곰탕집이 있다. 찬바람 쐬면서 걷느라 고생한 마눌 치하할 작정으로 찾았다. 수요미식회에서 소개한 집이라는데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집이었다. 손님이 많아 줄 서서 기다리다 먹었다. 국물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소문처럼 전국 최고인 이유는 잘 모르겠는 맛이었다. 주인과 종업원이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삼남길 일곱 번째 걸음으로 경기 삼남길의 마무리를 하였다. 이후 삼남길은 충청도 지역으로 넘어가 성환, 직산, 천안으로 이어진다. 전체 600여 km중 122km를 걸었으니 5분의1쯤 걸은 셈이다.  


애초 삼남길은 내 허리부상 때문에 선택되어진 순례길이다. 오랜 세월 산길 누비던 종주 산꾼이 갑작스레 찾아온 부상 탓에 산정에 서지 못하게 되자 대안으로 선택한 부상 극복용 순례길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해남 땅끝까지 완주할 목적 보다는 집에서 접근거리가 가까운 서울 구간과 경기 구간만 일단 먼저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제 솔방솔방 걸은 그 길이 이곳 안성천교에 이르면서 1차 목표였던 경기 구간을 마치게 되었다. 이후 해남 땅끝까지 이어진 길을 계속 걸을지 여부는 아직 미결정(未決定)이다. 내 마음이 어떻게 흐를 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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