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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4구간(지지대고개~배양교)-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이상향(理想鄕), 화성(華城)!!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4구간(지지대고개~배양교)-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이상향(理想鄕), 화성(華城)!!

강/사/랑 2017. 1. 23. 16:32

[삼남길]4구간(지지대고개~배양교)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을 발표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군인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노태우는 정상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었고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에 부응하고자 했다.


8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하였다. 비록 정권교체에는 실패하였으나 직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치적 민주화도 이루었다. 민주적 정치체제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민주화의 욕구를 동반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득분배의 개선, 복지정책의 증대 등과 함께 안정적 주거 환경의 개선이 국민적 관심으로 대두하였다.


주택 200만호 건설은 그런 사회적 욕구에 대한 대응정책이었고 노태우 정권의 선택은 신도시(新都市)의 건설이었다. 강남, 목동 등의 개발 이후 서울에서는 더이상 대규모 택지개발을 할 용지가 부족하였다. 대안(代案)은 개발제한구역 외곽의 신도시 건설밖에 없었다. 그로써 탄생한 것이 분당, 일산, 산본, 평촌, 중동의 1기 신도시이다.


이들 신도시는 업무, 주거, 상업, 공용의 청사, 체육시설 및 공원과 녹지 등 생활편익시설을 갖춘 도시로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건설되었는데, 6년간의 건설 기간을 거쳐 주택 29만 2천호, 인구 116만의 우수한 주거 환경을 갖춘 신도시가 탄생하였다.


이후 수도권의 과밀 해소와 주건 안정을 위해 성남 판교, 화성 동탄, 김포 한강, 파주 운정, 광교, 위례 등 열두 개의 2기 신도시가 건설되어 우리나라는 우수한 교통체계, 쾌적한 주거환경 및 자족 기능을 갖춘 신도시 건설에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외 신도시 건설에도 뛰어들어 빠른 산업화를 필요로 하는 자원 부국과 신흥 개발국에 한국형 신도시 건설 기법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유엔 도시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까지 세계 도시인구가 약 29억 명 가량 늘어나, 해마다 인구 30만 명 규모의 신도시 250개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신도시 건설은 우리나라의 문제만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이자 요구이고 새로운 시장의 탄생인 것이다. 한국형 신도시를 이들 신흥 개발국의 도시 건설에 수출한다면 중동 건설 붐에 못지않은 블루오션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신도시 건설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데에는 옛 전통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역사상 가장 체계적이고 자족적(自足的) 기능을 갖춘 신도시 건설은 '화성(華城)' 신도시를 들 수 있다.


화성(華城)은 조선 22대 왕 정조대왕(正祖大王) 필생의 역작이다. 정조대왕 이산(李蒜)은 영조의 둘째 아들인 비운의 사도세자(思悼世子 ; 장헌세자(莊獻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752년 生이니 올해가 탄생 265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 초에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있다면 후기에는 개혁 군주(改革 君主) 정조대왕이 있다고 할 정도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왕(君王)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조선 후기는 노론(老論), 소론(少論), 시파(時派), 벽파(僻派) 등 붕당(朋黨)으로 분화된 정치세력간 당쟁의 극성기(極盛期)였다. 정조의 일생은 그러한 당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헤쳐나간 기록의 연속이다.


때문에 정조는 정치적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았고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여 균형적 정치체제를 이루었다. 안정적 정국을 바탕으로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 규장각(奎章閣)을 통한 학문의 장려와 신학문의 도입, 북학파(北學派)의 등용과 같은 신분 탈피의 인재 육성, 통공정책(通共政策)을 통한 상업정책의 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개혁 군주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理想)의 정점(頂點)으로 화성(華城) 건설을 택했다. 흔히 화성은 정조가 비운의 사도세자를 화산(花山) 현융
원(顯隆園)에 모시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배후도시로 건설한 효심(孝心)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화성은 단순히 효심의 표현이 아니라 정조가 품었던 정치적 이상의 총결집이다. 정치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 문화 중흥과 경제 발전 등 계몽 군주로서 그가 품었던 이상을 화성(華城)이라는 신도시에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향의 실천인 것이다.


따라서 화성은 단순히 방어를 위한 성곽과 임금이 머물 행궁 외에도 관아(官衙), 향교(鄕校), 군영(軍營)과 도로, 상점 등의 도시기반시설을 갖추었다. 무엇보다 정조는 화성을 자족적(自足的) 신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장안문 북쪽 뜰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규모 농업시설을 가꾸었다. 이는 대유둔(大有屯:北屯)과 축만제둔(祝滿堤屯;西屯) 등 대규모 둔전(屯田)의 설치 등을 통하여 도모되었다.


농업 경영을 위해서는 수리시설(水利施設)이 필수이다. 이를 위해 화성 외곽 동서남북 사방에 대규모 저수지가 축조되었다. 축만제(祝滿堤), 만석거(萬石渠), 만년제(萬年堤) 등이 바로 그 저수지이다. 이들 대규모 저수지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 혹은 유적으로 남아 있다.


저수지를 동서남북으로 건설한 것은 안정적 수자원의 확보를 위한 지역적 안배는 물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동지(東池)는 현재 지동 근처에 있었다 하는데 형체를 알 수 없고 서지(西池)는 축만제(祝萬堤), 남지(南池)는 만년제(萬年堤), 북지(北池)는 만석거(萬石渠)를 말한다.


그중 서지(西池)인 축만제(祝萬堤)는 원형 그대로를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도 농촌진흥청 및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정조가 수원을 화성으로 이름 지은 것은 이 도시를 그가 품은 이상(理想)의 실천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조의 생각은 실록(實錄)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정조 18년 갑인(甲寅 ; 1794년). 화성 축조에 대해 하명하다.
園所花山也 此府柳川也 取華人祝聖之意 名此城曰華城 花與華通 花山之義 蓋以八百峰巒 拱護一岡 圓正如花瓣之謂也(원소화산야 차부유천야 취화인축성지의 명차성왈화성 화여화통 화산지의 개이팔백봉만 공호일강 원정여화판지위야 ;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요(堯)임금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이다. 그의 시대는 태평성대(太平聖代) 하여 길에 귀한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던 고귀한 시대였다. 결국, 정조는 화성(華城)을 요순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의 강역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삼남길 네 번째 걸음은 조선조 최고의 개혁 군주 정조대왕의 꿈이 실현된 화성(華城)의 도시 수원과 자족적 신도시의 원천인 서호(西湖), 즉 축만제를 지난다.


그 축만제 둑에서 노을 진 호수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꿈꾸었던, 그 꿈이 꿈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 공간이 되는 신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정조의 고결(高潔) 하면서도 강인(强靭)한 지도력을 우르러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이 시대가 조선 후기에 못지않은 당쟁(黨爭)과 정쟁(政爭)의 혼란기이고 그 혼란을 탕평(蕩平)해 줄 지도자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이기 때문이리라. 어둡고 슬프다. 정녕 정조 임금처럼 시대적 소명(召命)을 이끌 탕탕평평(蕩蕩平平)의 참 지도자는 없는 것인가?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이상향(理想鄕), 화성(華城)!!


구간 : 삼남길 제 4구간(지지대고개~배양교)
거리 : 구간거리(15 km), 누적거리(69.2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1월 8일. 해의 날.
세부내용 : 지지대쉼터 ~ 영동고속도로 지하도 ~ 해우재 ~ 수원서광학교 ~ 밤밭청개구리공원 ~ 서호천 ~ 서호공원입구 ~ 서호둑길 ~ 항미정 ~ 서둔동주민센터 ~ 중보교 ~ 옛 수인선 철길 ~ 평리교 ~ 배양교 ~ 배양2리.



2016년 늦봄에 숭례문을 출발하면서 시작했던 삼남길 순례가 해를 넘겼다. 그동안 단 세 번의 삼남길 출정이 있었고 내 발걸음은 겨우 지지대고개에 머물고 있다.


몸도 마음도 깔끔하지 못했던 탓이고 무엇보다 삼남길에 대한 열정이 적었던 탓이다. 아무래도 예전 백두대간 종주할 때와 같은 몰입(沒入)은 생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사 모든 일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니 이 삼남길이 처음 의도처럼 해남 땅끝까지 이어지려면 스스로 도전의식을 자극할 계기가 필요하다. 두고 볼 일이다. 어떤 의미를 개발해 낼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원래 목표란 달성 가능하게 잘게 쪼갤수록 도전의식이 솟는 법이다. 그런 뜻에서 일단 경기도 구간만은 봄이 깊어지기 전에 모두 걸어볼 작정이다. 짐 꾸리자, 일단 지지대 고개를 출발해 보자!



축만제/祝萬堤


농촌진흥청 북서쪽 여기산(麗妓山) 밑에 있는 호수로,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농촌진흥청 및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축만제의 축조연대는 1799년(정조 23) 수원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한 것이다. 당시 수원성의 동서남북에는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를 말하는 것으로 1795년에 완성한 속칭 조기정방죽을 가리킨다. 또한 남지(南池)는 원명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축만제의 규모는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되어 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고목들이 서 있다. 보수관리는 축제 후 4년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하여 도감관(都監官)·감관(監官)·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고, 이에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하였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 같다. 또 이 지역의 동명이 서둔동(西屯洞)인 것도 국둔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축만제는 1906년 일제가 이곳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면서 현재까지 농촌진흥청이 관리하고 있고, 시험답을 비롯한 인근 농지의 관개용수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호수 남쪽에는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이 있다. 이 정자는 중국 항저우(杭州)의 것을 본떠 이름 지은 것이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4구간(지지대고개~배양교)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이번 구간은 우리 집에서 출발지도 종착지도 가까운 곳에 있다. 평소 내가 산책하던 길이 곧 삼남길인 탓이다.




# 지난 3구간은 마지막에 야간산행을 하는 바람에 꽤 힘들게 진행한 구간이다. 이곳 지지대 쉼터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이미 깊었고 겨울밤인데도 땀에 젖은 상태였다.




# 마눌 차편으로 지지대 쉼터에 도착했다. 이곳 지지대쉼터는 대중교통편이 아주 불편하다. 평소 나는 자전거 라이딩 하면서 이곳 쉼터를 자주 이용했다. 오늘은 바이크족들이 많이 찾았다. 이들은 지지대 고개 근처 산길을 저 오토바이로 누비고 다닌다. 당연히 굉음과 먼지가 난무한다. 등로의 파괴도 심하다. 무심코 산행 나온 사람들이 저들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는다.



# 가볍게 몸 풀고 지지대쉼터를 출발했다. 쉼터 주차장 뒤쪽에 들머리가 있다.




# 경기도에서는 이 구간 전반 서호까지의 길을 서호천길이라 이름지었다.




# 홀로 걷는 길이니 사진에 등장할 모델이 없다. 그리하여 내 손가락이 모델을 대신한다. 손가락 방향인 쉼터 뒤쪽 골짜기를 향해 출발이다.




# 그곳에 좁고 아담한 골짜기가 있다. 지지대 주변의 산길은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이미 여러 차례 돌아다닌 곳이다. 하지만 이 골짜기는 처음이다. 계단식으로 올라 가며 농장이 이어지고 주변 산 자락엔 잣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 규모가 크지 않지만 잣숲이 좌우로 형성되어 잣나무 향 그윽하다. 잣숲만 보면 야영 욕구가 치솟는다.




# 고개를 넘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쉼터에서 만났던 바이크족들이 굉음을 울리며 숲속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 지난 자리에 휘발유 냄새 가득하고 파헤쳐진 등로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숲이 몸살을 앓는다.




# 경기도 구간은 표지목이 중간중간 있어 길 찾기 쉽다. 고개 건너편의 이름없는 골짜기로 내려 간다. 양봉농가가 있다.




# 영동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 개인택시지부인지 개인회사인지 주변에 매달아 둔 삼남길 리본을 떼어와 자동차 차단봉 표식으로 매달아 두었다. 그러지 마~ 그 정도 헝겊 얼마나 한다고~.



# 어느 집 호기심 많은 강아지가 낯선 나그네에게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겁은 많아서 만져 주려니 꼬리 내리고 도망간다. 




# 도로를 만나 잠시 올라 가면 해우재가 나온다. 전 수원시장의 자택을 세계 유일의 화장실 공원으로 만들어 수원시에 기증한 것이다. 해우소(解憂所)란 옛말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이 공원을 처음 보았을 때는 무슨 화장실 공원이냐고 의아했는데, 가만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전국 곳곳에서 깨끗한 화장실을 사용하게 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다. 이 분처럼 공공화장실 문화를 선도한 이들의 공이 큰 것이다.




# 예전 우리나라의 공공화장실은 차마 발을 딛고 들어서기 무섭게 더럽고 악취 가득한 곳이었다. 그나마도 돈을 받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수원시처럼 앞서가는 도시의 화장실은 냉난방 시설에 온수 사용은 기본이고 카페처럼 잔잔한 고전음악이 흐르는 아늑한 곳으로 변하였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 어릴 때 들에서 놀다 응가 마려우면 저렇게 들판 한쪽에서 바지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뒷처리는 나뭇잎이나 돌덩이로 해결하였다. 그래도 똥꼬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위생상 불결하긴 했겠지만, 똥꼬만은 튼실하였다. 이제는 비데 없이는 볼일 보기 힘든 연약한 똥꼬로 변하였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문명의 이기가 편리는 한데, 현대인을 연약하게 만든다.




# 해우재를 나와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었다. 네이버 지도에서 제공하는 삼남길 코스는 해우재를 돌아나와 이목지하차도를 지나게 되어있다. 그런데 현지의 표지기는 해우재 뒤쪽 골짜기로 향하고 있다. 나중에 SK아파트 앞 서호천에서 합류하게 되지만, 현지의 삼남길은 고개를 넘어 안골과 밤밭 청개구리공원을 지나 밤꽃사거리를 지나게 되어있다. 현지의 길이 훨씬 많이 돌게 되어 있지만, 일단은 표지기를 따르기로 한다.




# 공장과 고물상, 주택들 사이로 올라 간다.




# 수원서광학교 우측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인 모양이다.




# 고개까지 제법 길게 걸어 올라야 한다.




# 고개를 넘어 안골로 넘어갔다. 안골은 아직 논과 농장이 많이 있고 비닐하우스 주택도 있는 시골분위기 나는 골짜기이다. 작년에 미친 듯이 집 근처 일대를 산책다닐 때 여러 차례 다녀 간 곳이다.




# 길게 내려가 율전약수터를 만났다. 시원하게 약수 한잔 마셨다.




# 안골 아래는 밤밭 청개구리공원이다. 크고 화려하진 않으나 이 동네 주민에겐 좋은 휴식처로 활용된다.




# 정월 한겨울인데도 물이 얼지 않았다. 그만큼 올겨울은 큰 추위없이 지나 갈 모양이다.




# 공원 앞에 있는 식당에서 청국장 찌개로 민생고를 해결했다. 찬이 깔끔하고 맛도 웬만하였다. 그 집에서 오래 쉬었다.




# 밤꽃사거리는 지하도를 통해 통과한다.




# 저 멀리 SK아파트 단지까지 가면 서호천이 있다. 손 모델 재등장.




# 잠시후 서호천에 도착. 본격적인 물길 여행이 시작된다.




# 엄동설한은 아니어도 겨울날이라 서호천엔 산책나온 사람들이 적다.




# 서호까지는 3km 정도 더 가야 한다.



# 수원은 갈비가 유명하다. 특히 이 근처 이목동에 대형 갈비집이 여럿 있다. 예전 수원에 근무할 때 회식하러 여러 번 찾았던 곳이다. 




# 서호천 물길도 얼지 않고 잘 흐른다. 관리 잘 이뤄지니 물이 맑다.




# 수양버들 갈라진 줄기 안에 삼남대로 표식이 매달려 있다. 삼남대로를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표식이다.




# 한가롭고 편안한 길이 길게 이어진다. 마을 산책하듯 여유롭게 허위허위 서호천변을 걷는다.




# 하얀 백로 한 마리 먹이를 찾아 물속을 성큼성큼 걷고 있다. 건너편 산책객의 발걸음이 백로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저절로 느려진다. 나도 가만히 숨 죽이고 그 모양을 살펴본다. 우리 셋의 호흡이 맞춰지는 순간이다.




# 원래 화산(花山)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현융원 자리의 산을 말한다. 이 동네의 산도 꽃뫼라 불렀는지 모르지만 수원 화산이라 할 때의 산은 이곳이 아니다.



# 수원 화성의 엠블럼이 길 바닥에 그려져 있다.




# 서호천 우측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다 갈림길을 만났다. 삼남길 표식이 좌측으로 누워있다.




# 징검다리를 건너라는 얘기이다.



# 서호천 좌안을 따라 산책객들과 더불어 진행한다. 모녀가 데리고 나온 강아지 이뻐 눈 한번 맞추고 안아주었다.




# 길게 걸어 서호(西湖) 입구에 도착했다. 삼남길 안내판이 서 있다. 수원, 오산, 평택으로 내려 가는 길이다.




# 정조대왕이 조성하신 서호를 만난다.




# 지나치게 넓지도 그렇다고 너무 협소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호수이다. 서호의 정식 명칭은 축만제(祝萬堤)이다. 정조 23년인 1799년에 정조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 3만냥으로 조성되었다. 면적 0.19 제곱킬로미터, 둘레 1.9킬로미터이고 저수량은 67만 8천톤이다.




# 호수 중앙 섬의 나무에는 가마우지 떼가 엄청난 무리를 지어 앉아 있다. 저 정도 무리라면 서호 물고기들 완전히 바닥이 나겠다. 가마우지의 고기잡이 실력은 물새 중 으뜸이다.



# 논병아리, 물닭 등 덩치 작은 새들은 갈대섬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 남향하여 겨울 오후 마지막 햇살이 내려쬐는 수면에는 청둥오리떼가 자리했다.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는지 엄청나게 시끄럽다.





# 도심에 위치한 흔치 않은 수변 공간이라 산책 나온 사람들이 아주 많다. 저수지의 건설은 제방의 설치가 중심이다. 그래서 서호의 이름도 축만제이다. 조성 당시 길이 1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으로 건설되었다.




# 제방 아래로 넓은 경작지가 있다. 저곳이 옛날 정조대왕이 건설케 한 둔전(屯田)인 서둔(西屯)이다. 둔전은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군량을 충당할 목적으로 만든 토지를 말한다. 군량 및 식량 확보 목적의 토지이다. 서호는 저곳 서둔 일대를 몽리면적(蒙利面積)으로 하였다. 몽리면적이란 저수지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면적을 말한다. 서호의 몽리면적은 2천 107ha이다. 저 길죽하고 반듯한 토지는 농촌진흥청 시험장이다.




# 좌측 뒷쪽의 산이 여기산(麗岐山)이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축만제를 따라 진행한다.




# 정조대왕이 축만제를 조성할 당시 심어졌을 노송들이 도열해 있다.







# 둑 한쪽에 축만제 표석이 서있다. 힘찬 글씨체가 돋보인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정조가 이 축만제 건설에 그렇게 공을 들였으니 그의 작품이 아닐까?




# 축만제 여수로에 물이 콸콸 넘친다. 여느 폭포에 못지 않다.



# 여수로를 돌아 나가는 곳에 항미정(杭眉亭)이 있다. 소동파(蘇東坡),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등 등장하는 구절은 화려한데 막상 정자는 밋밋하였다. 아픈 다리 좀 쉬어갔으면 했는데 정자 마루에 중년 남녀가 다정히 식사 중이라 잠깐 앉는 시늉만 하고 떠났다.





# 정자 현판은 더 밋밋하다. 정자를 지을 때 붙인 것이 아니라 근래 새로 제작한 듯하다. 글씨 보는 눈이 어둡다만 명필은 아닌 듯하다.




# 곧 서호천에 복귀하였다. 서호의 물을 받아 흐르는 개천이니 수량이 상류보다 많다.




# 이곳부터는 경기도에서 구분한 경기 삼남길 5길이고 이름은 중복들길이다.




# 아직 지난 가을을 잊지 못한 억새가 꽃술을 다버리지 못했다.





# 저 거대한 수양버들은 지난해 황구지천과 서호천을 이어 걷기 할때 야간에 쉬어간 곳이다. 오늘도 그곳에서 쉬고자 했지만 선객이 있어 그냥 지나쳤다.




# 왜가리 한 마리 물고기 가까이 올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 손가락 모델 등장!




# 보 아래 물길 머무는 곳이 있다. 겨울철 비린내 못맡아 손이 근지러운 강태공들이 이 작은 물에 찌를 세웠다.




# 예전 낚시에 미쳐 전국을 떠 돌때 물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기는 했지만, 나름 품격(品格)을 중시했던 사람이라 이런 물에 낚시를 드리운 적은 없다. 맑고 큰 물에서 섬세하고 우아하게! 




# 길게 걸었다. 그 길 끝에 서호천 산책로가 끝나고 둑 위로 올라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 개천 둑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평고교를 만난다. 아주 오래 된 다리이다.




# 또 조금 더 내려가면 중보교가 있다. 중보교는 6차선 도로인 43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그래서 건널목이 없고 다리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이 인근에는 중고 자동차 매매단지가 많이 있다.



# 이곳은 수원시 남부 외곽지역이다. 그래서 수원 둘레길이 이 길과 겹쳐진다. 처음 수원으로 이사 와서 수원둘레길을 걸었는데, 그때 마눌과 함께 지났던 길이다. 고물상이나 버스 회사들이 산재해 있다. 저 앞에 수인선 협궤 열차가 지나던 철교가 있다.





# 철길은 1,435mm를 표준궤(標準軌)로 한다. 그 보다 좁은 철길을 협궤(狹軌)라고 하는데, 수인선은 762mm 였다. 수인선이 없어지기 전에 한두번 탔었는데 앞사람 무릎이 닿을 지경으로 좁다.





# 철길 일부가 아직 남아 있어 두 발 벌려 서 봤다. 편안히 발을 벌리고 서 있을 정도의 넓이다.




# 인천 방향의 레일은 걷어 내었다.




# 수원둘레길을 따라 남하한다. 서호천 건너로 공군비행장이 보인다.




# 수원 둘레길과 삼남길이 공존하는 이 길 주변은 온통 여러 종류의 공장이 난립해 있다. 주로 고물상, 작은 제조업체의 공장들이다.




# 갈림길에서 둘레길과 헤어져 우측 길로 접어든다.



# 그러다 도로 건널목도 지난다. 나중에 다시 수원둘레길과 합쳐질 길인데 안쪽으로 구불구불 휘감게 길을 그렸다.




# 고색동에 있는 이 공원을 구경시켜 주려고 길을 돌린 모양이다.




# 제법 규모가 있는 공원이다. 깨끗한 화장실도 두 곳이나 갖추고 있다. 난방 잘 되어 있고 따뜻한 물도 잘 나온다. 추위에 얼었던 몸이 그 따뜻함에 잠시 녹는다. 수원시는 곳곳에 화장실을 잘 관리하고 있는 도시이다. 우리 같은 나그네에겐 수원시의 화장실은 잠자리로 삼아도 될 정도이다.




# 공원 구경하고 따뜻한 화장실에서 몸도 녹였으니 다시 외곽으로 나간다.




# 공원을 벗어나 다시 수원둘레길과 합류한다.




# 공군예비군 훈련장 입구 다리를 건너고 곧 바로 서호천 좌측 둑길을 따라 간다.





# 황량하고 인적 끊어진 이 길에 여성 두 분이 뭔가를 들에서 채취하여 돌아오고 있다.






# 보(洑)가 있던 들이라 중복들이라 불렀다.예전에는 서호천 물이 이 들을 흠뻑 적실 만큼 풍부하였나 보다.



 

# 들이 넓기는 하다. 이렇게 들이 넓으니 비행장이 들어섰을 것이다.



# 중복들을 길게 내려가면 황구지천과 서호천이 만나는 합수부가 나온다. 수원 둘레길은 저 합수부 위쪽으로 휘감게 되어 있다. 합수부에는 수원시 위생처리장이 있고 기안교와 빨간 아치 교각을 가진 고색교가 있다. 우리 집과 가까워 도보여행과 자전거 여행으로 많이 지나 다닌 곳이다. 




# 합수부 근처에서 강둑이 사라져 버렸다. 이 인근은 모두 공사 구간이다. 지금이야 땅이 꽁꽁 얼어 지나기에 큰 불편은 없지만 해빙기나 장마철에는 아예 지나다니기 힘들겠다.





# 공사 구간을 힘들게 지나면 오늘 일정의 종점인 배양교가 나타난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간다.




# 배양교에서 황구지천 상류를 돌아본다. 꼭 알맞게 구간 마무리를 했다. 끝날 시각에 맞춰 날이 저문다. 




# 배양교 근처도 공사중이다. 공사 구간을 우회해야 한다.




# 버스를 타기 위해 배양2리 쪽으로 간다. 이 길도 삼남길이다.




# 삼남길 구간 종료 인증샷 한 방 날렸다.




# 배양리 삼거리에서 구간 마무리를 했다. 이곳은 수원시를 벗어나 화성시 배양동이다.




# 버스 정류소는 우측으로 잠시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서 버스를 무작정 기다리는데 건너편을 지나던 마을버스 기사님이 차를 세우고 자기 차를 타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한 시간여 지나야 버스가 오니 다른 버스 오는 곳으로 태워다 주시겠단다.  




# 서너 정류장을 이동하여 기안동 입구에서 하차하였다. 이곳에서 마을버스를 타니 수원역으로 바로 데려다 준다.



친절한  배양동 마을버스 기사님 덕분에 수원역까지 무사히 잘 갔다. 수원역에서 전철 두 정류장만 가면 우리 동네이다. 그렇게 삼남길 4구간을 마무리했다.


이번 4구간은 내가 살고있는 수원시 서부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구간이다. 따라서 평소 내가 산책하던 길이고  자전거 타고 라이딩 하던 곳이다.


게다가 그 길이 조선조 최고의 개혁군주(改革君主) 정조대왕의 능행로(陵幸路)를 따르게 되어 있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특히 화성(華城)을 자립 방어가 가능한 신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꿈과 이상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 공부의 장(場)이자 그 역사 현장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어 의미 깊은 길이다.


노을 진 축만제(祝萬堤) 둑에 서서 서호의 푸른 물을 바라 보며 성리학적 원칙(原則)과 실학적 실용(實用)을 현실에서 구현코자 했던 정조대왕의 이상(理想)에 가만히 눈높이를 맞춰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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