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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1구간(숭례문 ~ 남태령역)-새로운 길!!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1구간(숭례문 ~ 남태령역)-새로운 길!!

강/사/랑 2016. 11. 2. 17:36
  [삼남길]1구간(숭례문 ~ 남태령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란 말이 있다. 천년제국(千年帝國) 로마는 본토 로마를 중심으로 식민지 전체에 이르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로망(道路網)'을 건설했다. 그 도로를 통해 본국과 식민지는 네트워크(Network)로 연결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천년제국을 유지했다.


로마 시대 도로망을 표현한 지도를 본 적이 있다. 대동맥, 정맥, 모세혈관으로 갈래 치는 인체의 혈관망 같기도 하고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을 통해 빅데이터(Big Data) 분석할 때 그려지는 데이터 연결망 같기도 한 복잡한 그림이 그곳에 있었다.


도로망의 연결은 식민지로의 신속한 공격과 지배력의 강화라는 이득이 있지만, 적의 기습로를 허용한다는 치명적 약점 또한 안고 있는 양날의 검(劍)과 같다. 로마군의 주력무기인 글라디우스(gladius)는 양날검이다. 길이가 60cm를 조금 넘어 일반적인 형태의 검에 비해 짧다. 하지만 찌르기 전용인 이 검은 방패와 함께 사용되어져 밀집 대형의 근접전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양날의 검으로 지중해(地中海)를 넘어 고대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로마는 양날의 검처럼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안고 있는 도로망의 건설을 통해 본국과 식민지와의 네트워킹을 이루었고 그를 통해 번영을 구가했다.


로마의 길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우리 선조들도 도로망의 중요성은 일찍 깨달았다. 로마처럼 반도를 넘어 세계로 뻗는 길은 아니어도 한양을 중심으로 팔도 전역을 연결하는 간선망(幹線網)을 유지하였다. 이런 간선망의 탄생은 상품유통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고 시기적으로 18세기 이후에 확립되었다.


조선은 원래 한양을 중심으로 '6대로(六大路)'를 건설했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道路考)'에 그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다. 도로고는 조선 초 지지(地志)의 기록과는 매우 다르게 변모 발전한 전국 교통 및 시장 등의 상황을 실제 조사 문의하여 정리 기술한 지리서(地理書)이다.


도로고(道路考)에 의하면 조선은 모두 여섯 개의 간선도로(幹線道盧)를 가지고 있었다. 6대로(六大路)는 한양에서의 원근(遠近)대로 차례가 매겨졌다. 그리하여 '의주(義州)' 第1路, '경흥(慶興)' 第2路, '평해(平海)' 第3路, '동래(東萊)' 第4路, '제주(濟州)' 第5路, '강화(江華)' 第6路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19세기 전반 서유구(徐有榘)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이르면 한양에서 태백산(봉화/奉化)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되었으며, 19세기 중엽에는 9대로, 그 후기에는 10대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기록된 고산자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조선의 대로(大路)는 모두 열 개로 확대되는데, 제주로 이어지던 대로가 해남으로 변경되고 전주 삼례에서 남원, 운봉, 진주를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과 신창, 신례원을 거쳐 '충청 수영(忠淸 水營)'으로 연결되는 길, 그리고 수원 화성의 축조와 더불어 '수원로(水原路)'가 새로이 편입되었다.


이렇게 이어진 조선 10대로(十大路)는 행정, 군사적 소통을 기본으로 물자와 상품의 원활한 이동을 통해 문화와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10대로 중 가장 중요한 도로는 '의주로(義州路)'였는데, 이는 그 길이 사행로(使行路)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대(事大)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사행로인 의주로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야 했다. 개성, 평양, 안주를 거쳐 의주로 이어졌다. 이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연결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도로는 '동래로(東萊路)'이다. 용인, 충주, 조령, 대구를 거쳐 동래로 이어지는 영남축(軸)은 조선시대 내내 정치, 경제적으로 중심을 이룬 곳이다. 이 지역은 인구가 가장 조밀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중요도가 높았다. 동래에서는 바다 건너 왜(倭)와 교역이 이어졌으므로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 길을 따로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렀다. 총연장은 907리(里)이다.


10로 중 7로가 되는 '제주로(濟州路)'는 과천, 수원, 천안, 공주, 삼례, 영암을 거쳐 해남에 이르고 물길을 건너 제주 관덕정(觀德亭)까지 이어졌다. 물길을 제외하고 해남 이진진(梨津鎭)까지 950리에 이른다. 이 길은 충청, 경상, 전라 즉,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해서 '삼남대로(三南大路)'라고도 불렀다.


이 삼남대로가 근래 '삼남길'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신택리지(新擇里志)를 쓴 신정일이란 이가 있다. 그는 일찍이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 여러 옛길을 두 발로 걸었다. 그 발걸음의 흔적이 책으로 남았다. 그는 두 발로 쓴 책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내내 사람과 물자 이동의 중심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우리나라 교통망의 근간으로, 산업화시대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한 국토발전의 동맥 역할을 해왔다. 이에 반해 삼남대로는 질곡의 역사를 겪어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열었던 견훤과의 악연 때문에 호남 지역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았으며, 정여립의 난으로 일컫는 기축옥사(己丑獄死) 이후에도 차별은 계속되었다. 또한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남도의 섬이나 제주로 귀양을 떠나던 유배길이 바로 삼남대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암 송시열이나 조선 후기 대표적 지식인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도 이 길 위에 남아 있다.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는 남도에는 유독 수탈과 핍박이 많았다. 실의에 빠진 민중들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혁명의 방법으로, 여러 민족종교와 신흥종교에 마음을 담는 믿음의 방법으로 이런 역사의 상흔들을 감싸 안고 살아온 게 아닐까 싶다."


또, 손성일이란 이가 있다. 원래 산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산티아고 도보여행을 다녀온 뒤 해남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삼남대로에 주목했고, 그 옛길을 직접 두 발로 걸으며 삼남길을 복원했다. 물론 산업화의 결과로 길은 넓어지고 곧아지며 빨라져서 옛길 그대로 걸어갈 수는 없다. 그리하여 최대한 차도가 아닌 들길, 산길로 연결되도록 애를 썼다. 그는 현재 '(사)아름다운도보여행'이란 조직을 만들고 카페도 개설하여 활동하고 있다.


민간의 활동이 이러하니 관(官)에서도 호응을 하였다. 경기도는 도를 통과하는 삼남길 90km를 열 구간으로 나눠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고, 전남도는 해남에서 광주, 장성에 이르는 14개 코스 228km를 완성하였다.


이런 여러 노력들이 모여 삼남길 602km가 모두 이어졌다. 서울, 경기, 충남, 전북, 전남 등 다섯 개 광역자치단체를 거치고 총 45구간에 이르는 장거리 트레일이다. 물론 민간의 힘으로 이룬 길이라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 올레길처럼 여러 편의시설이나 안내시설을 완비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아름다운도보여행의 손대장 일행이 직접 두 발로 다니면서 페인트로 그린 안내 표식과 리본이 삼남길 안내의 전부이다. 하지만, 경기도 구간과 전남도 구간은 지자체에서 만든 편의시설이 있고 보도를 통해 홍보가 확대되고 있으니 곧 다른 지자체에서도 호응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먼저 깨우친 이의 헌신적 노력으로 이런 역사적이고 의미깊은 도보길이 재탄생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하고 박수 쳐 칭찬하며 호응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놀랍고 의미 있는 길을 알았으니 어찌 그냥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마침 허리부상으로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산길 찾아 나서기 어렵게 되어 서식지 주변의 소소한 산길, 들길, 물길을 찾아다니던 참인데 참 잘 되었다. 얼른 그이가 만든 카페에 가입하고 각종 정보를 수집한 뒤 작고 가벼운 보따리를 챙겼다.




새로운 길!!


구간 : 삼남길 제 1구간(숭례문~남태령역)
거리 : 구간거리(25km), 누적거리(25km, 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6년  5월 20일. 쇠의 날.
세부내용 : 숭례문 ~ 남산 ~ 응봉공원 ~ 한남나들목 ~ 잠수교 ~ 성모병원사거리 ~ 서리풀공원 ~ 방배역 ~ 백석대학교 ~ 매봉재산 ~ 불교방송 ~ 우면산 ~ 남태령역
.


 

마음에 병이 들어 몸에 병이 따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몸에 병이 들어 마음의 병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근래 1년여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불편하니 의욕도 떨어지고 새로운 도전도 망설여진다. 그렇게 꽤 여러 달을 시름시름 하였다. 마눌 등쌀에 병원도 열심히 다녔는데 별 차도가 없다.


예전 같으면 이럴 때 짐 꾸려 지리산으로 들어가 여러 날 쓰러질 만큼 힘들게 산속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다. 그 자발적 힘든 고행으로 몸과 마음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나면 새로운 활력 얻어 속세로 돌아올 기운이 생기곤 했다.


하지만 올봄엔 데미지가 컸던 것인지 의욕이 떨어진 것인지 먼 곳으로 길 떠날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된다 고민하던 차에 새로 개척되었다는 삼남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저 길이다. 지금 내 몸과 마음 상태로는 저 정도의 길이 딱 알맞다. 마침 내 서식지 주변의 경기도에서 그 삼남길을 완비하였다 하니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기도 좋다. 해남 땅끝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서울과 경기권 삼남길이라도 걸어보자!"


그렇게 삼남길을 시작했다.



삼남길/三南路


조선시대에 전국을 연결하였던 여러 길 중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지방을 이었던 길을 흔히 '삼남대로'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이었던 이 길을 통해 삼남의 물산이 오갔고, 삼남의 젊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다. 이몽룡이 남원으로 가던 길도 삼남대로이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격전이 벌어졌던 곳도 삼남대로이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과거의 길은 이제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사람이 걷던 길은 이제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길로 변했거나 그 흔적이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삼남대로의 원형을 고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문화탐방로인 삼남길을 새롭게 개통하였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조선 9대로. 18세기 후반의 지도라 10대로가 아닌 9대로가 표현되었다.



# 삼남길 전체 개념도. 내가 저 길을 따라 해남 땅끝까지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 종주를 할 때의 열정이라면 이런 의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질문이다. 하지만 오랜 길 위의 삶이 반복되면서 열정이 많이 사라졌다. 열정이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에너지이다. 그 열정 다시 살아나길 기대하면서 일단은 서울과 경기도 구간만 목표로 하고 있다.



# 삼남길 1구간 개념도. 숭례문을 출발해 남산을 지나고 매봉산, 한남을 거쳐 한강을 건넌다. 이후 서초, 방배를 거쳐 우면산을 넘는다. 이윽고 남태령 아래 남태령 전철역에서 삼남길 서울 구간은 마무리 된다.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삼남길 서울 구간은 내가 이 길을 시작하기 며칠 전 (사)아름다운도보여행 손대장 일행이 직접 페인트통을 들고 걸으면서 완성하였다. 이런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우리네 뒷사람들은 쉬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들 노력의 혜택을 내가 제일 먼저 보는 듯하다. 



# 삼남길의 출발은 숭례문이다. 국보 1호인 저 문화재는 혼란의 대한민국을 웅변한다. 자신의 재산상 불만을 나라의 보물에 불을 질러 표현한 독한 노인과 천 년을 물려주어야 할 보물을 몇 년 만에 졸속으로 복원한 정신나간 당국, 그리고 그 소중한 역사를 충실치 못하게 복원한 전문가. 이런 총체적 난국의 현재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 숭례문을 나와 우측 길을 택한다. 그 길로 남산공원을 향해 올라 간다. 햇살 뜨겁다.




# 아도행의 손대장 일행이 며칠 전 완성한 삼남길 표식. 저 시그널의 머리 방향으로 가면 된다.




# 남산육교를 통과.




# 도동삼거리에서 소파로를 따라 올라간다. 길가에 중국 관광객들이 타고 왔을 듯한 관광버스들이 나래비를 서 있다.




# 오르막 전방으로 남산타워가 올려다보인다.




# 잠시 후 예전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 지금은 서울시 과학전시관 앞을 지난다. 그 곁에 남산 계단이 있다. 수십 년 전에도 사람들은 저 계단에서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며 올랐고 , 지금도 그러하다.




# 이곳에서부터는 차량들과 작별하고 남산둘레길을 따른다.




# 서울살이 삼십 년이 넘었는데, 남산 구경은 모두 서너 차례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 두 차례가 요근래이다. 




# 불과 얼마전 마눌과 함께 걸었던 길이다. 목멱산방 앞을 통과.




# 조지훈 시인의 시비 앞에서 잠시 시의 향기에 젖어본다. 조지훈은 지조(志操)의 시인이었다. 올곧은 선비의 표상인 그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靑鹿派)로 활동하였다. 그의 고향인 경북 영양 외에 전국 여러 곳에 지훈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남산에 그의 시비가 세워진 연유는 알 길이 없다. 삼남길 걷던 나그네는 다만 그의 싯구절 가만히 읊어 볼 뿐이다.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 숲 그늘 좋아 어느 사찰 문앞에서 한숨 돌렸다.




# 좌측으로 조망이 열린 곳이 나온다. 명동의 빌딩들이 우뚝하다. 그 뒤로 북악산, 또 그 뒤로 삼각산이 보인다.



# 길가에 금낭화 요염하게 피었다. 금낭화는 꽃이 비단(錦) 주머니(囊)를 닮아 금낭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 고루 잘 자란다. 꽃이 예쁘고 오래가 관상용으로도 많이 심는다.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어요'.




# 그 곁에 창포 노란꽃 피어 올렸다. 곧 단오가 다가오니 그 꽃향기 진하다.




# 평일임에도 남산둘레길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 햇살 따가운 날이라 운동 하자면 자외선 차단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 가끔 부는 바람에 단풍잎이 박수 치듯 애기 손바닥 같은 나뭇잎을 흔들고 있다.



# 삼남길 표식은 순방향과 역방향이 색갈이 다르다.




# 구불구불 길게 남산둘레길을 돌아내리면 국립극장이 나온다. 그 앞 사거리에서 건너편 골프연습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 잠시 후 삼남길은 반얀 트리란 호텔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예전 타워호텔이 있던 자리이다. 그 호텔의 경영권이 외국계 호텔 체인에게 넘어간 모양이다. 반얀 트리는 벵골 보리수나무를 가리킨다.




# 호텔내 분수 물줄기가 시원하다.




# 분수대 곁에 호텔 바깥으로 나가는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 뒷쪽에 남산이 올려다보인다.




# 서울 성곽길이 이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 무심코 그 성곽길을 따랐다. 조금 가다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지도 작동하여 트랙 확인하니 벗어나 있다.




# 삼남길은 팔각정 방향으로 가야 한다. 팔각정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냥 통과했다.



# 남산 자락에 이런 길이 있는 줄은 몰랐다.





# 병아리꽃나무가 하얀 꽃을 피웠다. 이 나무는 찔레꽃을 닮은 꽃 생김새에서 보듯이 장미과이다. 네 장의 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병아리를 닮아 그런 이름을 얻었다.




# 가막살나무도 꽃을 피웠다. 가을이면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까마귀가 그 열매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까마귀가 먹는 쌀이란 뜻으로 가막살이라 불렀다 한다.




# 덜꿩나무. 덜꿩은 가막살나무와 구별이 쉽지 않다. 덜꿩은 들에 있는 꿩이 좋아하는 열매라 해서 덜꿩이라 불렀다.




# 다산로를 가로지르며 남산권역을 벗어나 매봉산으로 들어간다. 삼남길은 매봉산 산책로를 따른다.




# 제법 오르내린다. 원래 삼남으로 가는 길이 이 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산업화로 사람 발길 보다 자동차 바퀴에 익숙해 진 대로(大路)를 버리고 아직 흙냄새 남아 있는 소로(小路)를 연결한 결과이리라.




# 그 산책로 중간에 전망대가 있다. 전방으로 조망이 훌륭하다. 좌측부터 구룡산, 청계산, 우면산이 누워있다. 12시 방향 가장 높게 보이는 것이 청계산이다. 그 우측에 짙은 색깔로 낮게 소처럼 누워있는 우면산을 넘어가야 한다.



# 좌측 우면산, 높게 보이는 관악산 그리고 우측으로 삼성산과 호암산이 보인다. 호암산 우측에 광명시가 있고 그곳에서 몇 년 살았다.



# 한남동 언덕배기 동네가 건너다보인다. 서울, 그것도  한강과 남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저런 동네가 아직 있다. 저 동네는 사람사는 공간이 골목골목 미로처럼 얽혀있는 모양이다. 도깨비 시장도 있다 한다. 재정비촉진지구이니 몇 년 뒤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 한남대교 방향으로 내려간다.




# 숲길을 벗어나 자동차 씽씽 달리는 문명의 길로 들어섰다.



# 한남대로를 건너 도로를 따르다 한남역 삼거리에서 한남나들목을 통해 한강으로 내려간다.



# 지하도 안은 서늘하다.




# 그 터널 너머 한강의 강바람이 불어오는 탓이다.



# 강북 자전거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간다.



# 강북 자전거 도로는 강남쪽에 비해 한산한 편이다.




# 한강의 흐름은 넓고 고요하며 유장하다.



# 강변을 따라 1.5km 정도 내려가면 반포대교와 그 아래의 잠수교가 보인다.



# 잠수교를 통해 한강을 건넌다. 이 잠수교는 자동차나 자전거로는 여러 번 건넜지만, 이렇게 걸어서 건너는 것은 처음이다.



# 강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시원한 그 바람이 강물 위에 바람의 길을 여러 개 그려 놓았다. 저 멀리 하남의 검단산이 보인다.




# 하얀 배 한 척 강심을 가르고 있다. 수상택시인가? 반포 수상택시 정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반포대교 교각에 삼남길 표식이 그려져있다.



# 한강의 폭은 1km가까이 된다. 반포대교 남단으로 나와 육상으로 올라선다.



# 남쪽으로 가야 하니 직진이다.



# 성모병원 사거리에서 고가도로를 건넌다. 가톨릭대 성모병원으로 들어가 재정비하고 좀 쉬었다.



# 병원 좌측에 서리풀 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다.



# 누에다리 방향으로 간다.



# 이 동네는 서리풀 공원과 서리풀 길이라 이름 지었다. 서초동은 상서로울 瑞, 풀 草 자를 쓴다. 서리풀은 서초동이라는 지명을 우리 말로 풀어 놓은 것이다.



# 이곳에 이런 야산과 공원길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 나무 그루터기에 삼남길 표식을 그렸다.



# 누에다리를 만났다. 이 다리는 반포에서 서초로 넘어가는 반포대로 언덕 위에 누에 모양으로 만들어진 고가육교이다. 한강 이남 서초, 반포, 잠실 일대가 예전에 누에 농사를 짓던 곳이고, 이곳에 조선 시대 양잠기관인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있던 곳이라 누에 형상의 다리를 만들었다 한다.



# 큰댁이 용산에 있어 우리는 제사나 명절 때 늘 이 길을 이용한다. 매양 자동차로 고개를 넘으며 봐 왔던 누에다리를 이제서야 걸어서 지나본다.



# 다리를 건너가자 누에 조형물이 있다. 누에는 인류 문명에 큰 기여를 한 아주 유용한 곤충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실물을 보면 꽤 징그럽게 생긴 녀석이다.



# 누에다리 건너편은 몽마르뜨 공원이다. 원래 이곳은 아까시나무 울창한 야산이었다. 그 야산을 단장해 공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프랑스인이 많이 사는 인근 서래마을을 인용해 몽마르뜨라 불렀다.



#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의 시가 적혀있다. 순박한 아내를 갖고 싶은 것은 전 세계 모든 남자의 공통된 소망이다.




# 몽마르뜨 공원을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건너편에 다시 서리풀 공원이 나타난다. 두 공원은 서리풀 다리로 연결된다.



# 도심에 이런 녹색 생태축을 가졌다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잘 가꿔야 할 일이다.




# 이 길 역시 원래 삼남대로와는 무관한 길일 것이다. 자동차 씽씽 달리는 빠른 길이 아니라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옛 길을 복원하기 위해 이렇게 생태축을 연결하여 길을 이었을 것이다.



# 산딸나무 하얗게 꽃을 피웠다. 나중에 저 꽃 중앙에 빨간 딸기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그래서 산딸이라 불렀다.



# 방배동쪽으로 내려왔다. 이 편한세상 아파트가 보인다.



# 방배역 쪽으로 잠시 내려가니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묘역이 나온다.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승려가 되었던 효령대군의 휘(諱)가 이보(李補)인 것을 처음 알았다. 최고 권좌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불도에 몰두하였으니 마음이 편안하였나 보다. 효령대군은 세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오래 살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이 바뀌는 것을 볼 정도로 장수했다.


# 훗날 영조대왕은 이 사당을 지어 그를 기렸고, 정조대왕은 청권사(淸權祠)란 편액을 내렸다. 청권(淸權)이란 말은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 나오는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이 이야기는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연 무왕(武王)과 관련된 것이다.  주 무왕은 세종처럼 주 태왕(太王)의 3남이었다. 태왕의 장남, 차남인 태백()과 중옹() 역시 자질이 뛰어난 삼남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남만(南蠻)으로 떠났다. 그 결과 무왕은 은나라의 폭정을 멸하고 주나라 시대를 열었다. 논어에서는 "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은거방언 신중청 폐중권 - 숨어 살며 기탄없이 말했지만 몸가짐이 깨끗하였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권도에 맞았다.)"고 이를 평했다. 최고 권력을 동생에게 양보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가는 역사가 증명한다.


# 방배역 사거리에서 백석대학교 방향으로 간다.



# 도심에서는 차단봉에 표식이 그려져 있다.



# 다시 도로를 건너 백석대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예술 전문대학교인가 보다. 이 대학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이 참 많다.




# 캠퍼스라 부르기 민망하게 작은 학교이다. 학교 뒷쪽에 작은 공터가 있고 이제 여고생 티를 갓 벗은 듯한 여자아이 몇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예술을 하자면 담배 정도는 피워줘야 하는 모양이다. 내 정서에 맞지 않는 모습이라 얼른 학교 뒷쪽 숲으로 올라갔다.



# 백석대는 매봉재산이란 작은 야산에 잇닿아 있다.



# 약수터가 있길래 물 한 잔 마셨다.



# 제법 가파르게 한 차례 위로 올린다.



# 정상은 작은 공터로 되어 있다. 운동 나온 주민들이 작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



# 비둘기가 누군가의 작은 배려 덕분에 배를 채우고 있다.




# 산을 내려가자 불교방송국이 나온다.



# 차량 통행 많기로 유명한 남부순환도로를 건넌다. 이 길은 도로를 건너 우면산으로 올라간다.




# 우면산은 높이가 293m에 불과하지만 도심의 산으로는 꽤 높은 산이다. 몇 해 전 산사태 때문에 난리가 난 곳이기도 하다. 소(牛)가 누워자는(眠) 모습을 닮아 우면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전에 남산 자락에서 바라볼 때 길게 누워있는 소의 모습을 인지할 수 있었다.



# 막바지에 이 산을 넘는다 생각하니 걱정이 앞서는데, 다행히 산 정상을 넘는 것이 아니라 우측으로 우회하더니 정상보다는 낮은 우측으로 넘게 된다. 잣나무 숲을 따라 올라간다.




# 약수터가 나온다. 음용부적합이라 적혀 있지만 목이 너무 말라 몇 모금 마셨다.



# 이 곳에서 삼남길은 서울 둘레길과 동행하게 된다. 저 길도 진작부터 한번 걸어보겠다고 지도를 준비해 두었다.



# 산의 사면을 넘고 나서부터 길은 순해진다.



# 성뒤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난다. 도둑이 많이 살았었나 보다.




# 고개를 넘어 길게 내려가자 남태령 전원마을이 나타난다. 2, 30여 작은 블록의 마을이다. 서울에 이런 조용한 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이들 뛰어노는 놀이터에서 한숨 돌렸다.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먹고.



# 이 동네 끝에 있는 남태령역에서 삼남길 서울구간을 마무리했다. 전철역 입구에서 몸에 묻은 먼지 털었다. 긴 거리의 도보 여행 후라 먼지 자욱하게 날렸다.



이로써 삼남길 첫 구간 입문(入門)을 완료했다. 25km 거리이니 첫 길치고는 꽤 긴 거리이다. 무더운 날씨에 오르내림도 제법 있는 편이어서 쉽지 만은 않은 구간이었다.


그렇지만 숭례문, 남산, 한강, 청권사, 우면산 등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자연과 문화 유산을 고루 느낄 수 있어 의미 있었고, 무엇보다 삼남길이라는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를 올려놓았다는 것이 더욱 뜻깊었다.


이 도전이 열정(熱情) 식어가는 내 길 위의 삶에 새로운 도화선이 되어 줄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그 시작도 끝도 모두 나의 의지에 달려 있을 터이니 나중의 결과는 온전히 나의 몫일 것이다.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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