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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2구간( 남태령역 ~ 인덕원역)-눈에 보이지 않았던 길!!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2구간( 남태령역 ~ 인덕원역)-눈에 보이지 않았던 길!!

강/사/랑 2016. 11. 2. 17:45
  [삼남길]2구간(남태령역 ~ 인덕원역) 


  

'남태령(南泰嶺)'은 과천(果川)과 서울 사당을 잇는 긴 고갯길이다. 이름 그대로 '남쪽의 큰 고개'란 뜻이다. 예전 삼남(三南)의 사람들이 한양을 가자면 천안, 평택, 수원을 거쳐 북상하다가 과천 관문(官門)에서 높고 긴 고개 하나를 꼭 넘어야 했다. 그 고개가 바로 남태령이다.


고개에 올라서면 사당벌과 동작나루, 그 앞에 가로 흐르는 한수(漢水) 그리고 우뚝 솟은 삼각산(三角山)이 눈에 들어오고 비로소 한양 근처에 왔음을 실감하였다. 한양의 입성 관문인 것이다.


순조 때 사람인 이재의(李載毅)가 쓴 '등고망경(登高望京)'이란 시가 있다. 고개에 올라 한양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行登南太嶺 北望畵圖開 三角文明氣 當前直射來(행등남태령 북망화도개 삼각문명기 당전직사래 ; 남태령에 올라서니 북쪽 조망이 그림책을 펼친 듯하다. 삼각산에 어린 밝은 기운이 이곳까지 곧바로 쏟아지는구나)"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는 다산(茶山)과의 인성논쟁(人性論爭)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경학(經學)에 밝았으나 시문(詩文) 역시 좋아하여 명승(名勝)을 찾아 시 짓기를 즐겨하였다. 위 시도 남태령에 올랐을 때의 감흥을 노래한 것으로 당시 남태령의 조망을 짐작게 한다.


남태령은 삼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으나 그 명성에 비해 고갯길은 수레가 다니지 못할 좁은 고갯길에 불과하였다. 암산(岩山)인 관악산이 육산(肉山)인 우면산으로 낮게 가라앉는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남북으로 산자락이 길게 이어지고 암산에 연이어 있어 길을 뚫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깊고 험하니 여우도 많고 도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우고개 즉, '호현(狐峴)'이라 불렀다.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野談集)인 '어우야담(於于野譚)'에 호현의 여우가 행인에게 소머리를 씌워 소를 만들어 놀린 이야기가 나온다.


여우고개가 남태령으로 개명한 것은 효심 깊은 정조(正朝)의 화성 능행차(陵幸次)와 관련이 있다. 인근 지자체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정조가 화성으로 능행차를 갈
때 노량진 나루를 건넌 후 여우고개를 넘어갔다. 구불구불 긴 고갯길이 험하고 넘기 어려웠다. 주위에 고개의 이름을 물었더니 길잡이 하던 과천 이방(吏房) 변씨란 사람이 남태령이라 아뢰었다. 여우고개란 본 이름을 두고 남태령이라 순간 작명(作名)한 것이다. 그 까닭은 여우고개란 요망한 이름을 감히 임금에게 아뢰기 어려웠던 탓이다. 어쨌건 이후 여우고개(狐峴) 대신 남태령(南泰嶺)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디에서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누군가의 입에서 비롯된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퍼져나가 기록으로 남게 되고 그를 근거로 또 다른 기록이 확산되어 드디어는 정설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최초의 기록은 찾을 길 없다.


그래서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을 뒤져보니 근거가 될 만한 비슷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왕의 동정이나 국정을 기록한 '일성록(日省錄)' 중 정조 13년(1789년) 9월 18일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京畿監司 徐有防以三邑斥堠伏兵存減數爻馳啓(경기감사 서유방이삼읍척후복병존감수효치계 ; 경기 감사 서유방이 3개 읍(邑)의 척후병(斥堠兵)과 복병(伏兵)을 그대로 둘 수효와 감할 수효에 대해 치계(馳啓)하였다). 自津頭由狐峴至官門 雖爲十五里 路最險巇且 川渠交錯橋梁相續(자진두유호현지관문 수유십오리 로최험희차 천거교착교량상속 ; 나루에서 호현(狐峴)을 거쳐 관문(官門)까지는 15리(里)에 불과하였으나 길이 가장 험하고 가팔랐으며, 내와 도랑이 교차하고 교량이 서로 이어졌습니다.)"


또 이년 뒤인 정조 15년(1791년) 1월 19일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命果川前縣監 洪大榮分揀(명과천현감 홍대영분간 ; 전 과천 현감 홍대영(洪大榮)을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敎曰 雖以擧行之怠忽處分 今番往來輦路見之 南泰嶺內外治道 無異鑿山通塗非比衿川 設有些少不勤 勞足掩罪 果川前縣監 洪大榮罪名特爲分揀(교왈 수이거행지태홀처분 금번왕래연로견지 남태령내외치도 무리착산통도비금천 설유사소불근 로족엄죄 과천전현감 홍대용죄명특위분간 ; 전교하기를, 거행이 태만하고 소홀하여 처분을 했지만 이번에 연(輦)을 타고 오가는 길에 보니, 남태령(南泰嶺) 안팎의 치도(治道)는 산을 뚫고 길을 소통시킨 것과 다름이 없어서 금천(衿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설사 다소 부지런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수고한 것이 죄를 덮기에 충분하니, 전 과천 현감 홍대영의 죄명을 특별히 용서하라).”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으로 능행차(陵幸次)를 자주 했다. 그 행차로는 처음에는 노량진 배다리를 건너 사당, 남태령, 과천, 인덕원을 거치는 '과천로(果川路)'를 이용했다가 나중에는 노량진 배다리에서 장승백이, 시흥, 안양, 의왕을 거쳐 수원에 이르는 '시흥로(始興路)'를 이용하였다.


능행길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과천로가 거리상 가깝기는 하지만, 남태령이 높고 험했기 때문이다. 위의 일성록에 나오는 과천현감 홍대영(洪大榮)이 파직되었다가 나중에 용서받은 것은 화성 행차를 위한 남태령 도로 관리를 소홀히 한 죄를 물었다가 나중에 왕이 직접 넘어 본 이후에 고갯길이 험하고 가팔라 수고가 많았음을 참작한 내용이다.


그런데 같은 일성록의 기록에 고개 이름이 처음에는 호현(狐峴)으로 나왔다가 나중에는 남태령(南泰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기록을 찾아보니 정조 이전에는 호현으로 정조 이후에는 남태령으로 되어 있다. 결국, 정조년간에 호현과 남태령이 혼용되다 이후 남태령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고개의 유래로 전해지는 전설이 마냥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여우 자주 출몰하던 남태령은 일제 강점기에 차량 통행이 가능한 넓은 신작로로 바뀌었다. 그리고 세월 흘러 지금 남태령은 자동차 씽씽 달리는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가 되었고 그 고개를 통해 과천, 의왕, 안양 등 수도권 위성도시와 서울을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가 그렇듯 늘 차량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나는 명절 때면 고향을 찾아 먼길 떠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울로 향한다. 큰댁이 삼각지에 있기 때문인데, 보통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명절을 쇠러 간다. 코스는 시간 여유가 있거나 땀을 좀 많이 흘리고 싶을 때는 안양천 자전거 도로와 한강 자전거 도로를 이어 한 50km 쯤 돌아가고 바쁠 때는 의왕, 과천을 거친 후 남태령을 넘어간다.


남태령길은 가깝기는 해도 자동차들과 함께 긴 고갯길을 치고 올라야 해서 매연에 시달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자주 찾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난 추석에는 과천에서 출발해서 걸어서 남태령을 넘어갔다. 다리 부상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 없어서 걷기를 택했고 시간 관계상 수원이 아니라 과천에서 출발하였다.


관문사거리에서 긴 고갯길을 꺼이꺼이 올라 가는데, 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인도(人道)이기는 해도 오르막 차량들에서 내뿜는 매연의 공격에서 자유롭지가 않았다. 버프를 눈밑까지 끌어 올려 매연에 대항하면서 남태령을 올랐다.


힘들게 고개 정상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우측에 남태령 옛길이란 못 보던 표지석이 서 있다. 그 표지석 따라 우측으로 들어가보니 고개 아래쪽으로 숲을 따라 구불구불 옛길이 내려가고 있다. 난 그때까지 옛 남태령 길 그 자체를 넓혀 도로를 개통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옛길이 아직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그동안 수백 차례 이 고개를 넘었지만, 자동차나 자전거를 이용하여 도로를 따랐을 뿐 걸어서 넘은 것은 한두 차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매연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숲길을 걸을 수 있는 옛길이 있는 줄 모르고 매연을 호흡하며 고개를 넘나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늘 바빴고, 몰랐고, 관심 없었던 탓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바빠서 몰라서 관심 없어서... 그러나 길은 그곳에 있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눈에 보이지 않았던 길!!


구간 : 삼남길 제 2구간(남태령역~인덕원역)
거리 : 구간거리(11km), 누적거리(36km, 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6년  10월 23일. 해의 날.
세부내용 : 남태령역 ~ 남태령 ~ 남태령옛길 ~ 관문사거리 ~ 과천성당 ~ 온온사 ~ 과천향교 ~ 과천시청 ~ 찬우물 ~ 율곡어린이집 ~ 인덕원역
.


 

지난 5월 무더웠던 날에 삼남길 첫 출발을 한 이후 이 순례길은 꽤 오래 격조하였다. 그동안 내 주변에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던 탓이다.


시간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산길도 들길도 쉬 발을 디디지 못하고  허송세월하였다. 이러다 삼남길 다시 걸을 날이 해를 넘기겠다 싶어 가을이 한창 깊어갈 무렵 삼남길을 위해 길을 나섰다.


오랜만의 삼남길 순례이다. 이번에는 마눌을 대동하였다.



 

남태령/南泰嶺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南峴洞)과 경기도 과천시 관문동(冠門洞)을 잇는 고개. 해발고도 183m, 길이 6㎞이다. 관악산(冠岳山)과 우면산(牛眠山) 사이에 있다. 예부터 서울과 수원을 잇는 도로로 이용되었다. 18세기 말 정조(正祖)가 수원에 있는 장헌세자(藏獻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다닐 때 지나던 길이다. 정조가 이 고개를 넘을때 고개 이름을 묻자 신하들이 남태령이라고 답하자 그 후부터 남태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남태령은 서울 관악구 남현동과 과천시 관문동을 잇는 큰 도로이지만 옛날에는 한 두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일제강점기 때 길을 넓히면서 서울 쪽 반절은 사라졌고 과천 쪽 일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과천시가 이곳에 남태령 옛길을 복원시켰다. 옛길은 과천시 관문 사거리에서 서울쪽 오른편에 현재의 남태령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좁은 길이다. 1㎞도 채 안되는 짧은 거리지만 옆으로 작은 계곡이 있고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다. 도로와 만나는 입구에는 남태령 옛길 표지석을 세웠다. 지하철 4호선과 서울에서 안양·의왕·군포·수원까지 가는 버스가 지난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2구간 개념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이번 구간은 남태령역을 출발해서 남태령을 넘고 과천을 길게 통과한다. 온온사와 과천향교, 찬우물을 거쳐 인덕원까지 이어진다. 이백오십 년 전 정조대왕이 화성으로 능행차 가던 길 그대로이다.





# 전철 타고 남태령 역에 도착하였다. 출발지가 전철역이서 접근이 용이하여 좋다.




# 오늘은 비소식이 있는 날이다. 하지만 이번 구간은 오르내림도 없고 잡풀의 걸리적거림도 없는 구간이다. 비를 맞아도 좋을 구간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눌도 싫은 기색없이 흔쾌히 동참하였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시작부터 우산을 펼쳐야 했다.





# 사단법인 아도행 사람들이 수고해 준 덕분에 저 표식만 잘 찾으면 길 잃을 일은 없다. 남태령 역에서 나와 남태령 고개 좌측 인도를 따라 올라간다.




# 연(輦)을 타고 넘었을 정조 임금조차 힘겨워했던 고갯길을 이제는 콧노래 부르며 허위허위 오를 수 있다.




# 한 걸음에 고개 정상에 도착한다.




# 이렇게 쉬운 길을 예전 과천 현감 홍대용(洪大容)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당해야 했다.




# 고개 이름의 유래가 한 쪽 구석에 적혀있다.




# 이 고개에서부터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에 접어든다. 경기도는 도를 통과하는 삼남길 전부를 잘 복원해 두었다. 그 경기도 삼남길의 첫 출발지가 이곳 남태령 고개이다.



# 과천쪽 고개 좌측에 옛길 표지석이 서있다. 이 고개를 자동차로 수백 차례, 자전거로 수십 차례 넘어 다녔는데, 여태 이 길의 존재를 모르고 지나다녔다. 그러다 지난 추석 걸어서 큰댁으로 추석 쇠러 가면서 남태령을 걸어 올랐는데 그때 이 옛길을 처음 발견하였다. 기계를 이용할 때는 몰랐던 길을 육체의 힘으로 걸으면서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 수많은 차량이 씽씽 내달리는 고개 안쪽으로 이렇게 한가한 옛길이 있다. 관심이 없는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길이다.




# 경기도 삼남길 전 구간의 개략도가 서 있다. 과천을 출발해서, 안양, 의왕, 수원, 화성, 오산, 평택까지 모두 일곱 개의 고을을 지나야 한다. 해남까지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경기도 구간을 마쳐두고 고민해 볼 작정이다.





# 경기도 구간에는 인증소가 중간중간 있다. 인증 스템프 찍는 재미도 있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 자전거 국토종주할 때 저 재미는 이미 느꼈었다.




# 도로 따라 계속 숲속으로 들어가면 헬기장이 나온다. 삼남길은 우틀하여 내리막으로 내려가야 한다.



# 계단이 없어 올라가지도 못하는 정자를 세워두었다. 돈 들여 쓸데없는 짓을 했다. 올라가지 못하니 올라 갈 수 있을 만큼의 높이까지만 낙서가 있다.




# 호젓한 옛길이 과천 관문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렇게 한가한 길이 있는줄 모르고 그동안 수십 차례 자전거 혹은 도보로 매연 가득한 신작로를 따라 남태령을 넘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좁은 길을 따라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었단 말인가? 행차도를 보면 2천명에 가까운 인원과 770여 필의 말이 동원된 대규모 행렬이던데, 이 좁은 길을 따라 그 많은 행렬이 지나가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고생도 많았겠다.




# 곧바로 관문동 양지마을이 나온다.





# 경기도 삼남길 표지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빨강은 남진, 초록은 북진이다.




# 마을을 지나 남태령 아래 과천대로를 건넌다.




#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 마눌과 둘이 가는 길이라 이런 촌스런 장난도 함께 해 본다.




# 원래 삼남길은 관문사거리에서 용마골로 들어가 고개 하나를 넘어 이곳 과천 중앙로 방향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비 피하느라 우산을 깊게 쓰는 바람에 표지기를 놓치고 말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니 용마골 들머리를 지나쳐 버렸다. 이곳 날머리를 만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길도 삼남길이 맞긴 하다. 날머리 안내도에 우리가 걸어온 길을 우천시 우회로로 적어두었다. 오늘이 비오는 날이니 시키는대로 바르게 온 셈이다.




# 잠시 내려가면 과천성당이 나온다.



# 성당을 지나 관악산길로 접어든다. 곧 온온사(穩穩舍)를 만난다. 얼핏 들으면 절 같지만 절 寺가 아닌 집 舍 자를 쓴다. 사찰이 아니라 인조 때(1649년) 건립한 객사 건물이다. 정조가 능행차할 때 이곳 온온사에서 쉬어갔다. 좁고 험한 남태령을 넘어 오느라 힘 들었을 것이다. 주위 경관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 하여 평온할 穩 자를 겹쳐 온온사(穩穩舍)란 사호(舍號)를 내렸다. 빗줄기 점점 굵어져서 우리는 그냥 입구에서 눈으로만 둘러 보았다.




# 관악산로를 따라 위로 구불구불 올라가면 관악산 입구가 나온다. 그곳에 과천 향교가 있다. 관악산 산행 가며 수십 차례 들렀던 곳이라 그냥 패스했다. 저멀리 관악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 구세군 사관학교 앞에서 아파트단지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 경기도 구간은 저 표지를 잘 따르면 된다.



#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 과천 정부 청사 곁에서 점심을 먹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 막걸리 한 사발이 땡기는데, 말썽 많은 내 건강 때문에 마눌의 반대가 심하다. 입맛만 다셨다. 점심 후 다시 길을 나섰다.  과천 청사 앞에서 관악산을 올려다 본다. 정상은 운무에 싸여 보이지 않고 팔봉 능선이 올록볼록하다.




# 비 때문에 성가셔서 그렇지 전혀 힘들지 않는 구간이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는다.





# 갈현삼거리에서 찬우물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 여름날 정조대왕이 이곳에서 차고 맛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감탄하여 당상의 품계를 우물에게 내렸다 전한다. 우물 이름도 가자(加資)우물이라 적어 두었다. 가자(加資)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를 올리거나 이미 올린 당상의 품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가자라 통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록이나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을 찾아보아도 이와 관련된 기록은 없다. 물맛 좋다고 당상의 벼슬을 내렸다면 조선 팔도에 당상관 벼슬을 가진 우물이 넘쳐났겠다. 그리고 정조 일성록(日省錄)에 병조에서 정조의 능행차 도로를 보고하면서 이미 과천 냉정점(冷井店)의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냥 과장되어 전하는 말인 듯하다. 물이 끊겨 있어 물맛도 못 보았다.




# 찬우물 마을을 통과하여 작은 고개 하나를 넘는다.




# 관악산 팔봉능선이 올려다 보이는 이곳에 이렇게 한적한 동네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군부대 때문에 개발제한이 걸려 있는지 집들은 모두 나지막하다.




# 과천에 이렇게 고요한 시골길이 있는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 길도 남태령 옛길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  모르고 지나온 길이다. 세상 일이 모두 그렇다. 마음이 있어야 눈이 가고 눈이 가야 드디어 보이며, 보아야 행할 수 있고 행해야 마침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이 동네는 온통 화훼 비닐하우스로 가득한 화훼촌이다. 그런데 경기가 좋지 않은지 폐업한 곳이 많다. 지금 이 길 아래로 4호선 지하철이 지난다.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우르릉 먼 곳의 우뢰소리가 땅속에서 들린다.




# 비는 점점 더 많이 온다.




# 경기도 구간은 이런 표지기가 곳곳에 있어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다. 다만 도심지를 지날 때는 무단 주차된 자동차나 잡물에 가려 놓칠 때가 가끔 있다.




# 줄기차고 장하게 내리는 비를 뚫고 인덕원에 도착했다.





# 이곳부터는 이런 도시의 유흥가 골목길을 지나가야 한다.




# 원래는 인덕원을 거쳐 백운호수까지 갈 작정이었으나 차가운 가을비가 그칠 기미가 없어 인덕원에서 멈추기로 했다. 또 마눌에게 삼남길 첫 맛을 보여주는 길이라 너무 무리시키지 않는 것이 다음 번 길에 동행시키에 좋을 것이란 계산도 있다.



그렇게 삼남길 두 번째 길이자 경기도 삼남길 첫 코스를 마쳤다. 이번 길은 그야말로 사부작사부작 산책하듯 걸은 길이다. 옛 시절 정조대왕은 험하고 먼 산길을 힘겹게 올라 남태령을 넘었겠지만, 지금의 우리는 산책하듯 편하게 넘을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발전이 누적된 결과이다. 남태령 고갯길 관리를 소홀히 하여 임금을 힘들게 만든 죄목으로 파직되었던 천 현감 홍대영(果川 縣監 洪大榮)이 오늘 이 고갯길을 넘어 본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그는 나태하여 산길 정비에 소홀히 한 것일까, 아니면 백성들에게 가혹한 부역을 부과하기 꺼려 최소한의 길만 만든 애민(愛民)의 속마음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비 내리는 인덕원 사거리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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