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삼남길]3구간(인덕원역~지지대고개)-인덕(仁德)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다!!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3구간(인덕원역~지지대고개)-인덕(仁德)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다!!

강/사/랑 2016. 12. 22. 16:20

[삼남길]3구간(인덕원역~지지대고개)


  
조선은 왕도(王都) 한양을 중심으로 열 개의 대로(大路)를 방사형(放射形)으로 건설하여 나라 안 곳곳은 물론이요, 바깥 세계와도 소통하였다. 도로망(道路網)이라는 것이 길만 닦는다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도로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교통지원시설이 필수이다. 옛시절 교통지원시설은 역참(驛站)이다.


역참은 역(驛)과 원(院)으로 이뤄졌다.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물(官物)이나 세공(稅貢)의 수송 및 관원 사행(官員 使行)에 대한 마필(馬匹)의 공급과 숙식 제공, 변방 군정(邊方 軍情)의 보고 등을 담당하였고 원(院)은 공용 여행자의 숙식 제공이나 빈객 접대를 위한 시설이었다.


역참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그 기원이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하지만 역참제도가 가장 발달하고 완성되었던 것은 몽골제국이다. 몽골은 유사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한 제국이었다. 그들은 제국 구석구석 교통의 요지에 역참인 '얌(Jam)'을 설치하여 통신전달망을 완성했다. 수만 개의 역참에는 수십 만 마리의 말이 항시 대기하였다. 그리하여 헝가리에서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8,000km 거리를 일주일만에 주파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역참은 삼국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고려조에 가장 왕성히 활용되었다. 고려가 오랜 세월 몽골의 영향을 받은 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조선의 역참은 이러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 발전시킨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540여 개의 역(驛)이 운영되었는데, 주요 도로에 30리 간격(12km)으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12km면 반나절 걸음 거리이니 한바탕 길게 이동한 후 휴식이 필요할 즈음을 기준으로 한 듯하다.


한편, 원(院)은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는데, 관용으로 운용되던 역과는 달리 토지만 관에서 지급하고 시설이나 사무는 지방의 유지를 원주(院主)로 정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은 사대(事大)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원은 중국으로 이어지는 사행길(使行路)인 의주로(義州路)에 주로 설치되었다. 중국에서 오는 칙사나 중국으로 사행하는 사신단의 접객이나 숙식의 제공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 경제와 정치의 중심축이었던 영남권과의 연결로인 영남대로와 곡창인 삼남지방과 이어진 삼남로에도 원이 골고루 분포하였다.


원은 애초에 관영(官營)과 민영(民營)이 혼합된 어정쩡한 모습으로 출발하였다. 그런 태생적 한계가 있으니 제대로 운용될 리가 없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이용자가 제한된 데다 관아에서 지급하는 초료(草料)도 원활치 못했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점막(店幕)이 활성화되면서 원은 피폐하게 되고 이름만 남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름으로 남은 원(院)에 조치원(鳥致院)·사리원(沙里院)·고막원(古幕院)·인덕원(仁德院)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 원은 애초에 교통 요지에 설치되었던 것이라 오랜 세월 흐른 지금도 원의 이름을 가진 고장은 모두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덕원(仁德院)은 안양에서 과천,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서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이다. 수도권 남부 위성도시인 성남, 수원, 군포, 의왕, 안양에서 서울로 들어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옛날 삼남대로를 거쳐 한양을 찾은 남도 사람들이 과천 남태령을 넘기 전 반드시 쉬어가던 곳이기도 하다. 천 리 먼 길을 걸어와서 이제 한양이 코앞이니 지친 몸을 쉬고 아픈 발도 주무르면서 마지막 힘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인덕원(仁德院)이란 이름은 내시(內侍)와 관계가 있다. 내시는 궁중에서 왕의 지근거리를 지키며 왕명(王命)의 전달, 수문(守門) 및 청소를 맡았다. 신분은 비록 비천하고 남성이 거세(去勢)된 몸이라 멸시받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권한과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절대권력의 지근거리를 지키고 있으니 주요 정보에 밝았을 것이고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에 관여하였으니 실질적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내시 중에는  막강한 권력으로 국정을 농단(壟斷)한 인물도 있고, 높은 벼슬과 막대한 부를 축적해 양자(養子)이긴 해도 후손으로 그 권력과 부를 이은 사례도 많다.


내시는 궁 안에 거주하는 장번(長番)과 궁궐 가까이 거주하면서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으로 신분이 나뉘는데, 왕을 근시(近侍)하는 장번내시가 더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중 궁에 출퇴근하던 내시들은 주로 궁에서 가까운 효자동(孝子洞)에 많이 모여 살았다. 내시는 화자(火者)라고도 부른다. 불 화(火)는 점이 두 개이다. 점 두 개가 없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효자동의 원래 이름이 내시 동네, 즉 화자동인데 나중에 효자동으로 변음되었다는 설(說)도 있다.


현직과는 달리 은퇴한 내시들은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인근에 모여 살았다. 정상적인 성생활은 불가능했지만, 내시들도 결혼을 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가정을 이루었다. 부와 권력을 가졌으나 다른 사람들의 눈총에는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인지 그들은 자신들만의 집단 거주지를 이루고 살았다.


파주 금촌의 고자새말, 용인의 궁촌(宮村), 안양의 인덕원(仁德院)이 대표적인 곳이다. 모두들 교통의 요지이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부와 권력이 있었으니 살기 좋은 곳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덕원에 거주하던 내시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부(富)를 잘 활용하였던 모양이다. 옛 시흥군지(始興郡誌)에는 인덕원에 거주하던 내시들이 평소에 어진 덕을 많이 베풀어 인덕(仁德)이란 마을 이름을 얻었고 교통 요지에 원(院)이 들어서 인덕원(仁德院)이라 불렀다 적고 있다.


군지에서 주장하는 것 외에 혹시 옛 기록으로 남아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전해진 말일 뿐 기록은 없다. 다만  세조 실록(世祖 實錄)에 왕이 인덕원에 들렀다는 기록은 나온다. 甲戌, 駕幸果川, 至仁德院東. 相魯穆, 安孝禮等所言山勢曰; 左右龍虎回抱, 規模頗佳 (갑술 가행과천 지인덕원동 상노목 안효례등소언산세왈 좌우용호회포 규모파가 ; 갑술년에 거가(車駕)가 과천(果川)에 거동하여 인덕원(仁德院) 동쪽에 이르니, 노목(魯穆)·안효례(安孝禮) 등이 말한 곳의 산세(山勢)를 살펴보고 이르기를, "좌우에 용호(龍虎)가 돌아 안은 것이 그 규모가 자못 아름답다.")


세조 때에 이미 인덕원이라 불렀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이곳에 거주하였던 내시들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들일 것이다. 기록이 세조 3년 1457년으로 조선이 창업한 1392년에서 65년 된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풍운(風雲)이 난무하던 시대를 산 사람들이 욕망보다는 인덕(仁德)에 치중하였다는 것이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흔히 금지된 욕망(欲望)은 다른 욕망으로 변화 확대되어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풍선효과이다. 남성으로서의 욕망이 거세된 내시들은 비정상적으로 권력이나 부에 집착하기 쉽다. 역사적으로 부와 권력을 남용하여 말썽을 일으킨 최고 권력자의 측근이 끊임없이 이어진 이유이다.


우리가 역사(歷史)를 공부함은 과거를 돌아보아 오늘을 올바르게 살자는 의미이다. 그것이 옛 성현이 말씀하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사상이다. 하지만 역사의 의미를 망각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가 보다. 아무리 왕조가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기를 꽃 피고 지듯 하여도 최고 권력자 주변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욕망에 빠진 내시 같은 작자들의 행렬은 끊김이 없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열흘 붉은 꽃이 없음을, 남의 권력에 빌붙어 저지른 일이 칼날 되어 돌아옴은 필연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인덕원에 살던 내시들은 피바람 부는 세월을 살면서도 인덕(仁德)을 잃지 않았는데, 문명 개화된 21세기를 살면서 그리도 무지하고 어리석더란 말인가?


그 내시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들을 죄다 인덕원 사거리에 세워 두고 거세(去勢)를 한 후 내시 묘역에 큰절이라도 시켜야 알아차리려나...?

 


인덕(仁德)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다!!


구간 : 삼남길 제 3구간(인덕원역~지지대고개)
거리 : 구간거리(18.2 km), 누적거리(54.2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5년 12월 17일. 흙의 날.
세부내용 : 인덕원역 ~ 옛인덕원터 ~ 학의천 ~ 학의천 청계천 합수부 ~ 백운호수 ~ 뒷골삼거리 ~ 임영대군사당 ~ 능안마을 ~ 능안고개 ~ 오메기마을 ~ 지구촌어린이집 ~ 산들길 ~ 명가만두 ~ 경수산업도로 ~ 골사그내 마을 ~ 한남정맥 ~ 지지대비 ~ 지지대쉼터.



5월 무더워지기 시작하던 날 처음 시작한 삼남길을 다시 나선 것은 가을이 한창 깊은 지난 시월이었다. 가을비 차갑게 내리던 날 마눌 앞세워 옛길 따라 남태령을 넘고 과천을 지나 인덕원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다시 삼남길은 뒤로 밀리기만 했는데, 요즈음 내 몸과 마음이 모두 황망(慌忙)하였던 탓이다. 마음이 갈피를 못 잡으니 몸 역시 그러하여서 삼남길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 단 두 번의 삼남길 행 이후 해 넘기겠다 싶어 마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짐 챙겨 길을 나섰다. 황망한 세월 속에 계절은 이미 깊은 겨울로 달려가고 있는 날이었다.



인덕원/仁德院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 2동(冠陽2洞)에 위치한 옛 인덕원 자리로 조선 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경기도 의왕시·안양시·과천시의 분기점으로 교통망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통한다. 조선 중기까지 원(院)이 설치되어 여행자들의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원이 폐지된 조선 후기부터는 자연적으로 가겟집들이 생겨나 주막거리로 불릴 만큼 이용자가 많았다. 오래 전부터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원(院)이란, 조선시대 공무 여행자들의 숙박시설로 일반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가겟집과 함께 장거리 여행자들에게는 필수적인 편의시설이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 2동(冠陽2洞)에 해당한다. 현재 이곳에는 옛 인덕원 자리를 알려주는 표석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인덕원 사거리에서 흥안로를 따라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인덕원터(인덕원 내시마을)’이라는 표석이다. 그리고 이 표석을 등지고 남쪽으로 20m 정도 가다보면 ‘인덕원 옛길’이라는 두 번째 표석이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3구간(인덕원역~지지대고개)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지난 구간과 마찬가지로 전철역이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 인덕원역에 도착하니 옛 인덕원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다. 인덕원은 예로부터 교통이 발달한 고장이다. 지금도 안양, 의왕, 성남, 과천으로 사통팔달하고 있다. 예전에는 원(院)이 있어 사람들이 쉬어 갔고 지금은 전철역, 광역버스 정류장 등이 있어 유흥업소가 성업 중이다.





# 전철역 밖으로 나와 본격적인 삼남길 순례에 들어섰다. 꽤 쌀쌀한 날씨이다. 역 근처 커피점에 들러 따뜻한 커피부터 한 잔 마셨다.




# 무단 주차된 자동차들이 많아 신경을 바짝 세워 걸어야 한다.




# 전봇대에 삼남길 표식이 그려져 있다. 인덕원 상가 골목길을 따라 길게 진행한다. 이 동네는 유흥업소가 많아 십수년 전 옛 직장 동료들과 자주 놀던 곳이다.




# 안양시의 지명 유래가 적혀있다. 안양(安養)은 불교식 지명이다. 불국정토(佛國靜土)를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상당수는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따온 경우가 많다. 중국 허난성에도 안양이란 고대 도시가 있다. 다행히 중국의 안양은 한자로 安陽이라 쓴다.




# 공원 한쪽에 인덕원 옛길 표석이 서있다.




# 자동차들이 어지러이 주차되어 있어 표지목을 잃어버렸다. 이 골목 저 골목 여러 곳을 헤맸다. 그러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 안내목을 발견하고 정확한 길을 찾았다.



# 인덕원 유흥업소 골목을 벗어나 학의천을 만났다.




# 학의천(鶴儀川)은 백운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의왕을 거쳐 안양 비산동에서 안양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이후 성산대교 아래 한강으로 흘러 간다. 날씨 제법 쌀쌀한데도 산책 나온 주민들이 많다.




# 다리에 문제가 생겼는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 산책 나온 어르신들 틈에 끼어 길게 북상한다.






# 의왕시는 수도권 남부의 여러 위성 도시 중에 개발이 가장 늦은 축에 속한 도시이다. 아직도 농촌 지역을 다수 포함하고 있고 산악이나 호수 등 자연환경도 풍부한 편이다. 예전에야 그런 것이 취약 조건이었겠지만 지금은 생활환경이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 그리하여 산책하고 운동할 공간이 타 도시에 비해 많은 편이다.




# 다만 청정하게 보존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이 학의천도 백운산과 청계산에서 시작한 맑은 물이 상류의 인간세를 거치면서 이렇게 탁한 빛으로 오염되고 말았다. 갈수기 영향도 있을 터이지만 치열한 관리가 필요한 일이다.




# 삼남길이란 테마로 걷고 있는 이 길은 예전에 자전거 타고 수십 차례 다녀간 길이다.





# 청계산에서 시작한 청계천과 학의천이 합류하는 합수부를 지난다.



# 이 인근은 예전엔 화훼농가들이 아주 많았던 곳이다. 관엽식물이나 각종 화초, 난 등을 길러 판매하는 화원이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철수하고 빈집이 많다. 아마 이 지역도 택지로 개발되는 모양이다.




# 외곽순환도로 램프가 골리앗의 다리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삼남길은 그 아래를 지난다.




# 이곳으로 외곽순환도로와 과천 봉담간 고속도로 두 개가 교차한다.




# 백운호수 둑 아래 주차장에 화장실과 삼남길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경기 삼남길 3구간 모락산길이 시작된다.




# 12.6km 거리인데 시각은 이미 깊어 노을이 지려고 한다. 그래도 모두 아는 길이라 예정대로 가기로 한다.




# 백운호수 둑으로 노을이 드리우고 있다. 이 호수는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53년에 준공한 인공호수이다. 예전에는 모터보트와 수상스키를 타기도 했다. 주변에는 매운탕집과 닭 사육 농가가 많았다. 자연히 수질은 엉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 처음 서울로 이주해서 직장에 다니던 쳥년시절. 나는 수도권의 여러 저수지를 탐방하며 낚시를 다녔다. 이곳 백운호수도 그렇게 내가 찾아 다니던 낚시터 중 하나이다. 당시는 자동차가 없어서 인덕원에서 택시를 타고 왔었다. 그때 이곳엔 우리나라 호수나 강계 중 최초라고 할 만큼 낯선 외래종 물고기인 베스가 유입되어 있는 곳이었다. 함께 낚시하던 동네주민 말로는 미군들이 풀어 둔 것이 자랐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 붕어낚시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붕어는 포기하고 생미끼 달아 베스를 낚았던 기억이 난다.




# 베스는 이 무넘기 주변에서 잘 잡혔다. 당시 우리에게 낯선 물고기였던 베스는 세월 흘러 우리나라 강계나 호수 대부분에서 먹이 피라미드 최상위를 차지하는 포식자로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 백운호수 우측으로 진행한다.



# 휴일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 호수 주변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하다.  




# 십 몇년 전부터 호수 주변을 정리하고 환경정화를 해서 호수는 많이 깨끗해졌다. 매운탕집과 보신탕집만 여럿 있던 호숫가는 라이브 카페나 일반 음식점으로 업종이 바껴 성업 중이다. 예전 이곳 억새밭 주변에는 일년 365일 상주하면서 잉어를 낚던 릴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 할아버지들인데 엄청난 크기의 떡밥을 뭉쳐 릴을 고사포처럼 던져 넣었다. 그들도 수질 오염원 중의 하나였다. 바라산과 바라재, 발화산의 산그림자가 호수에 그림으로 떠있다.




# 억새와 갈대가 뒤섞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호수를 벗어나 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 호수를 떠난 삼남길은 모락산을 향해 올라간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모락산 터널을 지나 갈미(葛山)로 넘어간다. 갈미는 칡 葛을 쓰지만 칡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 한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분기점이라 갈라지다(分岐) 라는 동사의 첫음절 "갈"을 음차(音借)한 것이다. 갈림길이 있는 산자락인 "갈뫼" 가 나중에 갈미로 다시 변하였다. 갈미는 한양으로 향하는 교통요지라 원(院)과 주막(酒幕)이 있던 곳이다.



# 삼남길은 갈미로 향하는 도로를 벗어나 모락산둘레길 이정목을 따라 산자락으로 들어간다. 이곳 의왕시는 좀 억지스런 테마길을 많이 만들었다. 백두대간에서 차용한 의왕대간, 지리산둘레길을 차용한 모락산둘레길 등등...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창의력이 좀 부족한 듯하다.




# 뒷골에서 손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통과한다.





# 그 고개 바로 아래에 임영대군(臨瀛大君) 사당이 있다. 임영대군은 세종대왕의 4남으로 이름은 이구(李璆)이다. 젊은 시절 이구는 무인 기질이 있고 여색(女色)을 밝혔다. 대궐 내에서 여러 차례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대군 자격을 박탈 당하기도 했다. 1년 뒤 대군 자격을 회복하고 심기일전하였다. 금성대군과 함께 화포와 신기전(神機箭)의 개량화에 성공하기도 했다. 예종 1년에 졸(卒)하였다. 실록에는 "璆字獻之 世宗第四子 天性豁達 精曉物理 武藝絶倫 又涉文史 議論超越 (구자헌지 세종제사자 천성활달 정효물리 무예절륜 우섭문사 의론초월 ; 이구(李璆)는 자(字)가 헌지(獻之)이며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활달(豁達)하고 물리(物理)에 정통하며 무예(武藝)가 절륜(絶倫)한 데다가 또 문사(文史)를 섭렵(涉獵)해서 의논(議論)이 초월(超越)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 원래 모락산 자락의 고즈넉한 산골이었던 이 동네는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고요함과는 멀어져 버렸다.



# 의왕시에서 임영대군을 극찬하는 글을 새겨 두었다. 누군가 그 글에 밑줄을 긋고 "무슨 소리?" 라고 적어 두었다. 그럴만 하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이곳 글에는 임영대군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여 이곳 모락사 자락으로 숨어 들었으며 단종을 그리워하여 모락(慕洛山)이라 불렀다 적어 두었다. 洛은 물가를 뜻하지만 서울을 가리키기도 한다. 慕는 사모한다는 뜻이다. 합하여 서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 임영대군은 단종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의하고 협조하였다. 그리고 세조 집권 내내 많은 혜택을 받았다. 단종복위를 꾀하다 역적으로 몰린 사람들의 집과 여자들을 상으로 받은 기록이 실록에 여럿 등장한다. 거짓말을 전하면 안된다.





# 스탬프 찍고 다시 길을 나섰다. 능안말 길을 따라 진행한다. 능안말은 한자로 능내동(陵內洞)이라 부른다.



# 요새 이 동네는 노인 요양시설 건립 문제로 시끄럽다. 아마도 요양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리라 생각하나 보다. 하지만 고령화시대에 노인 요양시설은 필수이다. 그리고 이런 요양시설이 가까이 있으면 노년 설계에도 유익하다. 집값 떨어질 일이 아니고 반대할 일이 아니다. 도로를 따르다 전봇대를 기준으로 좌측 산길로 들어선다.




# 귀퉁이 전원주택의 삽살개가 무섭게 짖어댄다.




# 걷기 편한 산길이 나타난다.




# 그곳 마을 외딴 집의 이 강아지는 언덕위에 앉아 지나가는 나그네를 가만히 살펴본다.





# 농장 갈림길에서 우측 산길로 길게 올라간다.





# 나무를 심어둔 농장 위에 고개가 있다.




# 좌측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 참나무 낙엽 무성한 산길로 올라가면,




# 능안고개이다. 능안말과 오매기마을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 그곳 벤치에서 한숨돌리고 휴식한 후 고개 아래로 내려간다.





# 농장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오매기마을이 나온다.




# 이 동네는 외부에서 전입 온 전원주택과 원주민들의 옛 주택이 공존하는 동네이다.




# 의왕시는 이 나무에 하트나무란 이름을 지어주고 표지판을 세웠다. 뭔가 이야기 거리를 찾으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기는 하나 너무 억지스럽다. 이건 그저 오래된 밤나무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 백운호수에서 넘어오는 자동차길을 다시 만난다. 그 앞에 가겟집이 하나 있고 삼남길 쉼터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날 어둑하여 그냥 지나쳤다.




# 자동차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쉼터 가게 앞에서 마을길로 접어든다.




# 마을을 한바퀴 돈 후 계곡가의 논길로 내려간다.




# 주유소와 어린이집이 있는 곳에서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올라간다.




# 날이 어둑해지고 있어 마음이 아주 급했다.




# 과천봉담 간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




# 그곳에 의왕시에서 만든 산들길이 있다. 산들길은 우리집이 있는 왕송호수와 백운호수를 이은 길이다. 의왕시가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한 도보 여행길이다. 한번쯤 걸어 볼 만한 길이다. 산들길을 따라 내려가면 고속도로 의왕톨게이트곁을 지나게 된다.




#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몇차례 들른 적이 있는 명가만두집을 지난다. 원래 삼남길은 이곳 명가만두 전 톨게이트 근처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지금 이곳으로 통하는 길이고 하나는 고천동으로 들어가 사근행궁터를 보고 의왕시청을 거쳐 사그내로 가는 길이다. 나는 날 어두워져 마음이 급하였다. 그래서 사근행궁터 가는 길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표지기 가리키는 대로 직진하여 산들길을 따랐다.




# 날 어두워져 이곳에서 길을 잠시 잃고 헤맸다. 표지기를 따라 무심코 걸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갔던 길을 다시 걷고 있더라. 통미교회 근처에서 지도 확인하고 길을 정확하게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후 다시 한번 더 길을 잠시 잃었다.




# 어렵게 경수대로(京水大路)에 도착했다.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1번 국도가 지나는 길이다.




# 육교를 건너 경수도로를 통과한다.




# 저쪽 위에 오늘 목적지인 지지대 고개가 보인다. 그 옛날 정조대왕은 이 고개를 오르며 행차가 너무 늦음(遲)을 탄식했다. 지금은 넓은 도로가 곧장 고개 위로 향한다.




# 경수대로를 따라 그냥 올라가면 간단할 길을 옛길을 따르느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 마을은 가로등이 없다. 준비해 간 헤드랜턴 밝혀 이마에 매달았다.



# 이 동네 이름은 '골사그내'이다. 한자로는 곡사근천(谷沙近川)이라 적는다. 사그내는 이곳 의왕시 고천동의 옛지명이다. 사그내란 이름은 '마른내'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정진원 문학박사). 이 동네 냇물이 비올 때만 흐르는 건천(乾川)이었기 때문이다. 건천인 마른내가 '마른(삭은)내>삭은내>사그내' 로 변화되었다는 주장이다. 사그내는 우리 가족과도 인연이 있다. 오래전 이곳에 있는 사찰에 부모님 위패를 모셨던 적이 있다. 그 사찰에서 부모님을 위한 제(祭)를 올리느라 몇 번 찾았던 기억이 있다.




# 캄캄한 밤길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진행한다. 농장들 사이로 길게 올라갔다. 농장 이곳저곳에서 개 짖는 소리 요란하다. 혹시 목줄 없이 밤길 뛰어다니는 놈 있을까봐 바짝 긴장했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밤길이라 길도 한차례 잃었다. 삼남길은 계속 산으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그 산 자락에 박정희 전대통령 식목일 기념 조림지가 있다.




# 1978년 4월에 이곳에서 식목(植木) 행사를 했다는 기록이다. 그의 노력 탓에 이곳은 지금 울창한 숲이 되었다. 박통은 공(功)도 많고 과(過)도 많은 사람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호오(好惡)가 갈리지만, 그의 열정적인 지도력과 애민(愛民)의 마음만은 모두 인정하는 바 크다. 이제 세월 흘러 그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딸은 아비의 발끝에도 못 미쳐 곧 그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빠졌다. 이런 기가 막힐 사정을 박통은 알고나 있을까?




# 삼남길이 들길을 외면하고 산길로 계속 인도한다. 캄캄한 어둠을 뜷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런 곤란한 상황은 예전에 백두대간과 아홉 개의 종주 산행을 할 때 자주 겪었던 일이다.




# 잠시 후 능선 마루금에 도착했다. 이 산능선은 한남정맥이 지나는 길이다. 수원시의 경계이기도 하다. 한남정맥 종주할 때와 수원둘레길 걷기 할 때 이미 지난 길이다.  그외 자전거 타고 산길 다닐 때도 여러번 지난 길이다. 




# 야간엔 걷지 말라고 팻말에 적혀있다. 하지만 나는 하지 말라고 하는 야간 통행을 하고 있다.





# 밤중에는 거리 감각이 급격히 떨어진다. 늘상 다녔던 길인데도 찬바람 강하게 불고 지쳐 체력 떨어진 후라 방향 감각이 많이 헷갈렸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저 수원둘레길 표지와 삼남길 리본이 없었다면 많이 곤란했을 것이다.




# 봉우리를 한두어 개 넘자 갈림길이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 숲 위로 고압전선이 지난다. 저 멀리 지지대 고개 직전의 산능선이 보인다. 저 봉우리 넘어 내리면 지지대 고개이다. 현재 이 캄캄한 산 속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다.




# 전방 봉우리를 꾸준히 올리면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으로 방향 꺾어 내려가면 지지대 고개이다.




# 정조대왕의 효심이 어린 지지대 비각을 만났다. 지지대고개 정상부에 있다.





# 계단 걸어 지지대고개에 도착했다.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의 묘소에 능행(陵行)을 자주 다녔다. 그때마다 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수천 명의 인원이 포함된 능행차 행렬에게는 너무나 높고 먼 고개였다. 더딘 행렬에 왕은 자주 짜증을 냈다. 그리하여 이 고개는 사근현(沙近縣)에서 지지대(遲遲臺) 고개가 되었다. 遲는 '더딜 지'이다.




# 1번 국도가 지나는 지지대 고개.




# 수원 방향으로 내려가면 지지대 쉼터가 나온다.




# 그곳에서 삼남길 세 번째 길을 마무리했다.


 

힘든 길이었다. 출발이 늦었던 탓에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일정을 마쳤다. 때문에 마지막 두 시간 정도는 캄캄한 밤길을 걸어야 했다. 어두운 밤길 걷느라 길도 몇 차례 잃었다.


옛생각 소록소록 나는 일정이었다. 예전 백두대간 종주와 아홉 개의 정맥 종주할 때는 이렇게 야간 산행으로 구간 마지막 산길을 걷기 일쑤였다. 하지만 삼남길은 편안한 들길이 대부분이라 야간 산행을 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 구간 순례길에 야간산행을 해야 했다.


이마에 매단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어둔운 산길을 홀로 걷자니 힘들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했다. 춥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으며 재미남을 느낀 것은 동일한 옛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 일이란 것이 그렇다. 힘들고 어려운 길도 누적된 경험과 앞 길에 대한 예측이 있으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러하다...

 

 

 

*아래 배너를 클릭하면 강사랑물사랑의 다음 블로그 "하쿠나마타타"로 이동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