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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명산]39(화악산/華岳山)-춘산 화악(春山 華岳)!! 본문
인간 문명의 역사는 짧다. 46억 년 지구의 나이 중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출현한 것은 4만 년 전의 일이고, 이 생각하는 인간 종족이 제대로 된 현대 문명을 확보한 것은 1~2백 년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시 나약한 존재이다. 날카로운 이빨, 강력한 근육, 뾰족한 뿔도 없이 연약한 이 종족은 자연 앞에 늘 취약하였다.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 문명을 구가하는 오늘날에도 자연재해(自然災害)는 괴멸적(壞滅的) 피해를 인류에게 입힌다. 태풍, 홍수, 지진, 화산폭발, 쓰나미 같은 대형 재난은 아직도 인류 문명 최대의 위협요소이다. 문명 발달한 지금 시점이 그럴진대 기술 문명 저급했던 전근대 시절에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위협하며 몰아닥치는 자연재해는 인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괴멸적 자연현상은 인류로 하여금 외경심(畏敬心)을 갖게 만든다. 외경심은 곧잘 신앙(信仰)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단을 만들고 천지신명께 제를 올려 삶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우리 조상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랜 기록에 의하면 태초에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은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壇樹) 아래였다. 그는 그곳에 신시(神市)를 차려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우리 민족의 근원은 하늘이고 산은 하늘과 인간세의 통로이다. 그곳에서 산악신앙은 출발한다.(降於太白山頂神壇樹下 謂之神市 ; 三國遺事) 신라는 도참사상(圖讖思想)의 영향으로 산악신앙이 특히 성(盛)하였다. 중국 당(唐)나라의 국정(國政)과 제반 제도에 대한 연혁(沿革)을 항목별로 분류 편찬한 책인 당회요(唐會要)에 "신라는 즐겨 산신을 제사 지낸다.(新羅好祭山神)"고 적혀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종(景宗) 때 삼산오악신(三山五岳神)을 제사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삼산은 중국의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를 따왔는데, 실제로는 경주 나력산(奈歷山)과 영천 골화산(骨火山) 그리고 청도 혈례산(穴禮山)을 말한다. 오악(五岳)은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으로 토함산(吐含山), 계룡산(鷄龍山), 지리산(智異山), 태백산(太白山), 부악산(父岳山)을 가리킨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나라이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문묘(文廟) 등의 제사가 국가 제사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산천제 역시 그 명맥은 여전히 이어졌다. 다만 고려조에 부여되었던 산천신과 성황신에 대한 봉작이 제거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종 19년 예조에서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한 기록이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강화부의 마리산(摩利山)은 단의 위판에 마리산 산천지신(摩利山山川之神)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산천’두 글자는 삭제할 것. 가평현(加平縣)의 화악산(華岳山)은 단이 현내(縣內)의 평지에 있어 이끌어 청하여 제사지내고 있고, 위판은 화악 호국지신(華岳護國之神)이라고 썼는데, 산기슭에 단을 설치하고, 또‘호국’두 글자는 삭제할 것.(江華府 摩利山壇位版 書摩利山山川之神 請削山川二字 加平縣 華岳山壇在縣內平地 引請行祭 位版書華嶽護國之神 請於山麓設壇 且削護國二字)" 등으로 되어 있다. 나라 안 여러 산의 번잡한 봉작을 삭제할 것을 주청하였고 상(上)이 윤허하였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고려조에 주어졌던 산천의 봉작을 제거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백두산(白頭山), 지리산(智異山), 계룡산(鷄龍山), 치악산(雉嶽山), 무등산(無等山) 등 전국 각지의 명산대천 수십 곳에 단묘(壇廟)와 신패(神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경기 지방에는 자연도(紫燕島), 영흥도(靈興島) 등의 섬과 함께 감악산(紺嶽山), 화악산(華岳山) 등 명산의 단묘가 유명하였다. 그중 화악산에 단묘가 세워지고 화악호국지신(華岳護國之神)이란 신패(神牌)가 모셔짐은 이 산이 경기 지방 제1의 산이기 때문이다. 화악은 강원 화천면과 가평 북면을 경계 짓는 산이다. 높이가 1,468m로 경기에서 가장 높다. 한북정맥(漢北正脈) 도마치봉 자락에서 분기하여 석룡산과 몽덕, 가덕, 북배, 계관을 거쳐 보납산에서 가평천 거쳐 북한강으로 잠기는 화악지맥(華岳支脈)의 주봉이기도 하다. 원래는 백운산(白雲山) 혹은 백작산(白作山)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화(華)는 곧 화(花)이다. 그러므로 화악(華岳)이라는 이름은 꽃 같은 산이란 뜻이다. 화악은 주봉인 화악산을 중심으로 동쪽 매봉, 서쪽 중봉이 꽃잎처럼 활짝 피어있는 산이다. 꽃산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얻어졌으리라 짐작해 본다. 어느 자료에서는 화악의 정상을 달리 설봉(雪峰)이라 불렀는데, 봄날 산 중턱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어있어도 정상은 하얗게 눈이 쌓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다. 그 말이 맞다면 눈 덮인 하얀 산 정상이 꽃 핀 듯하여 화악이라 불렀을 수도 있겠다. 화악은 경기 제1의 산이니 경기 북부 지방 어느 산에서나 쉽게 조망된다. 정상에 군부대가 있어 더욱 눈에 잘 띈다. 하지만 높은 산에 군부대까지 있어 눈에 확 띄는 데 반해 그 군부대 때문에 정상은 출입금지이다. 정상에 갈 수 없으니 산을 찾는 재미가 덜하다. 그리하여 산꾼 된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화악은 오래 미상봉(未相逢) 상태였다. 다만 주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여러 산정(山頂)이나 명지산, 연인산에서 건너다보거나 바로 곁의 석룡산과 조무락골에서 야영하며 머물렀을 뿐이다. 그렇게 오래 화악과 미상봉으로 지냈으나 눈에 자주 띄는 만큼 늘 동경의 대상이기는 하였다. 특히 이 산의 영험함이 오랜 역사를 가져 예로부터 나라에서 단묘와 신패를 모시고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린 신령함을 가졌으니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이 산의 봉작(封爵)은 화악호국지신(華岳護國之神)으로 호국(護國)의 산이다. 지금 이 산정에 군부대가 주둔하여 나라를 지킴은 이 산의 영험함이 고(古)에서 금(今)으로 면면이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산이다. 그 산을 너무 오래 미상봉으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정유년 봄날이 깊어갈 무렵 등짐 챙겨 첫 대면의 화악을 찾았다.
춘산 화악(春山 華岳)!!
화악터널 ~ 실운현 ~ 화악군용도로 ~ 중봉갈림길 ~ 중봉/야영 ~ 중봉갈림길 ~ 화악군용도로 ~ 건들내갈림길 ~ 중봉골 ~ 기도원 갈림길 ~ 건들내/왕소나무 ~ 화악터널
벌써 몇 주째 야영산행을 계획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이번 주는 그냥 보따리 챙겨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렇게 말했지만, 그 길을 가로막는 여러 장애와 투쟁하느라 무작정이 아주 길었다. 그러다 보니 집을 나선 시각이 오후 두 시를 넘겼다. 걱정 많고 핑계 많은 마눌은 집을 지키라 하였으니 홀로 산행인데, 때문에 음식준비를 전혀 못 했다. 봄날 날씨 좋고 봄기운 좋으니 고속도로에는 차량이 가득하다. 긴 정체를 겪은 후 가평읍내를 벗어나고 목동사거리에서 실운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비로소 도로가 한가하다. 구절양장의 고개를 올라 실운현 아래 화악터널에 도착하였다. 시각은 이미 오후 다섯시 반을 넘기고 있다. 화악터널 지나 화천 사내 쪽 간이 휴게소엔 저녁노을 지고 찬바람만 불고 있다. 화악산/華岳山 경기도 가평군 북면(北面)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史內面)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는 1,468.3m이다. 동쪽의 응봉(鷹峰:1,436m), 서쪽의 국망봉(國望峰:1,168m)과 함께 광주산맥(廣州山脈)의 주봉(主峰)을 이루며 경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가평천 계곡을 사이에 두고 명지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가평읍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져 있고 경기 5악 중 으뜸으로 친다. 화악산을 중앙으로 동쪽에 매봉, 서쪽에 중봉(1,450m)이 있으며, 이 3개 봉우리를 삼형제봉이라 부른다. 산의 서·남쪽 사면에서 각각 발원하는 물은 화악천을 이루며 이것은 가평천의 주천(主川)이 되어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38도선이 정상을 가르고 있어 제일 높은 화악산 정상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중봉을 지나 애기봉을 거쳐 수덕산까지 약 10㎞의 능선이 이어지는 코스가 산행에 이용되고 있다. 주능선에 오르면 춘천호를 굽어볼 수 있으며, 중봉 정상에서는 남쪽으로는 애기봉과 수덕산, 남서쪽으로는 명지산을 볼 수 있다. 산세가 중후하고 험하며, 산 중턱에는 잣나무숲이 울창하다. 화천군쪽으로는 수려한 삼일계곡, 용담계곡, 촛대바위, 법장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조선 현종 때의 성리학자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벼슬을 그만두고 정사(精舍)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하던 화천 화음동 정사지(華陰洞精舍址)가 있다. <이곳저곳>
# 화악산은 경기 제1봉이다. 오래 전부터 화악산정에서의 야영 산행을 꿈꾸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년 만의 야영 산행을 나서면서 그냥 이 산을 선택했다. 지도 없고 정보도 없다. 누군가 실운현에서 출발해서 정상, 중봉을 거쳐 다시 원점 회귀한 트랙이 있길래 오룩스맵에 깔고 그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왔다. # 경기 가평 북면과 강원 화천 사내면이 이 고개에서 경계한다. 터널 양쪽 모두에 화장실을 갖춘 간이 쉼터가 있다. # 실운현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열려 있고 그 앞에 정자가 있다. 한 무리의 군인이 작업복 차림으로 내려오더니 둘은 터널을 지나가고 나머지는 정자에서 휴식한다. # 화천 쪽으로 조망이 열려 있다. 저 멀리 복주산에서 상해봉 거쳐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산줄기가 보인다. # 사창리의 인간세. 이 지역에서 군 생활한 사람들에겐 추억의 고장일 것이다. # 여섯 시가 거진 다 되어 실운현을 출발했다. 늦은 시각에 무거운 등짐 지고 산속으로 들어가니 정자에서 쉬고 있던 군인 아이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 꽤 가파른 임도가 위로 이어진다. 1년 만에 무거운 등짐을 지었더니 허리가 휘청거린다. 오랜만의 야영 산행이라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 물을 너무 많이 챙긴 것이다. 마눌과 함께 다닐 때 감각으로 짐을 챙겨서 그렇다. 막걸리 포함한 물 무게만 6kg이 넘는다. # 실운현까지 직선거리는 가깝지만, 임도는 빙빙 돌리고 있다. # 해빙기엔 이렇게 낙석 사고가 자주 난다. 주의가 필요하다. # 호랑버들이 노랗게 꽃을 피웠다. 버드나무과인데 산지의 습한 곳에서 자란다. 가지와 잎은 말렸다가 두통과 관절염의 약재로 사용한다. # 20여 분 낑낑 올라 실운현에 도착했다. 좌측으로는 응봉, 우측으로는 화악산으로 갈라진다. 두 방향 모두 군부대가 정상에 위치해 있고 그곳으로 통하는 군사도로가 뚫려 있다. 이곳 군사도로는 불과 얼마 전까지 MTB 라이딩 코스로 유명했던 곳이다. 가파른 업힐이 라이더의 등판 능력을 시험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군에서 MTB 통행을 차단하고 있다. # 화악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곧 차량 차단봉을 만난다. 내가 준비한 트랙은 차단봉 우측 산길로 올라 가 화악산 정상과 군부대 철조망 곁을 통과하여 중봉을 찍고 다시 하산은 이곳 군사도로를 따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벌써 시각이 여섯 시를 넘겨 곧 날이 어두워질 텐데 야간에 군부대 곁을 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군사도로를 따라 올라 갔다가 내일 하산길을 마루금 따라 하기로 했다. # 전체적으로 경사가 있는 도로이다. 배낭 무게가 어깨를 파고들어 힘이 든다. # 저쪽 산 위로 화악산정의 군부대가 보인다. # 그 아래 산허리를 휘감는 도로가 아득히 멀리 보인다. 저곳까지 언제 가나? # 군부대 규모가 아주 크다. 우리 동네 수리산에 있는 공군부대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 돌아보니 화악산의 부속산인 응봉이 보인다. # 응봉 역시 정상에 군부대가 있다. # 저곳 군사도로가 이곳보다 훨씬 더 가파르고 힘든 곳이다. MTB로 저 도로를 치고 오르면 극한을 경험하게 된다. # 멀리서 보았던 그 산허리의 도로 부분이다. 정말 힘들게 이곳까지 왔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 다시 산허리를 두어 구비 더 돌아 중봉 갈림길에 도착했다. 도로는 우측 위쪽으로 군부대를 향해 올라 간다. 군부대가 위치해 있는 저곳이 화악산 정상이다. # 이 공터 너머로 중봉 가는 산길이 시작된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배낭 내리고 잠시 정리한 후 이마에 불 밝혔다. # 화악터널에서 4.5km 정도 올라왔다. 중봉까지는 200m 만 가면 된다니 희망 넘친다. # 숲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위태로운 암릉길이 이어진다. 숲 바로 입구에서 길이 갈라지고 정규 등로는 윗쪽으로 올라 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온 트랙에서는 아랫쪽 길을 가리키고 있고 정말 그 방향으로 표지기들이 매달려 있다. 무거운 배낭때문에 암릉길이 위태롭다. 이곳도 등로는 맞는 듯 이정목도 있다. #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평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 듯하다. 잡목이 우거져 있고 줄곧 희미한 암릉길이다. 배낭 덩치가 커서 잡목에 자꾸 걸린다. 암릉길이라 바위 사이를 계속 오르내려야 한다. 대형 배낭을 1년 만에 멘 데다 날은 어둡고 길은 험해 무척 힘이 들었다. 고작 200m거리인데 다리가 후덜후덜 떨렸다. 길이 희미해 길 찾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정말 어렵게 중봉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작은 규모의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텐트 두어 동 치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군부대가 가까이 있고 바로 데크 앞에 전진 초소까지 있다. 만약에 야간 근무를 서는 병사가 있다면 엄청난 민폐가 아닐 수 없다. 주변을 살펴보니 정상 바로 아래 텐트 한 동 치기에 약간 모자랄 정도의 공터가 있다. 좁기는 하지만 바람 없어 아늑하였다. 얼른 짐 내리고 집 한 채 세웠다. 멀리 가평 쪽 인간세의 불빛이 휘황하다. # 땀에 절은 옷 벗고 물티슈 목욕했다. 새옷으로 갈아 입고 우모복 꺼내 보온도 했다. 동네에서 포장해 온 순대국밥 끓여 막걸리 한 잔 하였다. 마눌 없이 혼자 왔더니 산상 만찬이 부실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산상에서의 이 순간 난 행복하다. # 밥 먹고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군부대 근처여서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총총하였지만,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혹시 야간근무 서는 군인들에게 방해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눈으로만 감상하였다. # 좁은 공간이었지만 편안한 밤이었다. 탕파에 물 끓여 안고 잤더니 포근하였다. 요즘 같은 봄날엔 5시 4, 50분 정도가 일출 시각이다. 그 시각 맞춰 밖으로 나왔다. # 야영사이트 바로 뒤에 있는 정상에 올랐다. 화악산은 이곳 중봉이 실질적 정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데크에서 야영하면 딱 좋을 곳이지만, 바로 곁에 이렇게 전진 초소가 있어 근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다. 때문에 나는 간밤에 이곳 데크를 포기했었다. # 건너편 응봉 뒤 하늘이 벌겋게 물들고 있다. 방위 확인하니 그 방향이 동쪽이다. # 응봉 우측 화악계곡 방향은 아직 잠에 빠져 있다. # 정면 명지산, 연인산 줄기. 그리고 더 너머의 한북정맥 산줄기가 보인다. # 가평은 산악이 발달한 고장이다. 눈 돌리는 곳 모두가 뾰족뾰족한 산이다. # 찬바람 강하게 불었다. 정상에 서서 해 뜨기를 오래 기다렸다. # 응봉 하늘의 붉은 색이 점점 더 짙어진다. # 그리고 주변 산의 색깔은 점점 옅어진다. 제일 앞에 뾰족한 촛대봉. 뒤쪽의 산줄기는 몽덕산,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으로 이어지는 몽가북계의 산줄기이다. # 명지, 연인산 도립공원과 한북정맥 쪽 조망도 열리기 시작한다. # 맨 앞쪽부터 명지산 1,2 3봉. 뒤로 아재비 고개 너머 연인산. 그리고 정면 멀리 운악산이 보인다. # 찬바람에 떨며 기다리기를 얼마간. 문득 응봉 머리 우측으로 해가 솟기 시작한다. # 가까이 땡겨보니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다. #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 응봉 군부대 시설물이 불타는 태양 속에 들어있다. # 장관이다. 본격적인 일출로는 올해 첫 감상이다. 1월 1일 동네 언덕에서 일출을 보기는 했으나 짙은 미세먼지 때문에 흐릿했는데, 제대로 된 일출은 이곳 화악에서 처음으로 본다. # 태양의 뜨거운 기운을 가슴 가득 받아들인다. 감동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 둥근 저 태양처럼 뜨겁고 열정적이면서도 원만하기를! # 천천히 그러나 어느새 산 위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 그 태양빛을 받아 전방 가평의 산들도 붉게 빛나기 시작한다. # 한북정맥의 산줄기들도 잠에서 깨어난다. # 문득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삼각대 펴기 귀찮아 바닥에 돌 하나 놓고 그 위에 카메라를 고정했다. 타이머가 3초에 맞춰진 모양이다. 돌아서 가는데 찰칵 소리가 난다. # 다시 10초로 세팅. 겨우 역광의 사진 한 잔 남겼다. # 하룻밤 잘 보낸 내 아지트에도 아침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텐트로 돌아와 얼른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몸이 꽁꽁 얼었다. 잠시 몸 녹인 후 아침 챙겨 먹고 얼른 짐을 꾸렸다. 이 동네는 마냥 오래 게으름 피울 수 없는 구조이다. 군부대 가깝고 접근이 용이해 아침 일찍 산객 찾아 올 우려 있기 때문이다. # 내가 머물렀던 싸이트 바로 곁 숲속에 예전 정상석이 반토막으로 부러진채 버려져 있다. 새 정상석을 세우면서 예전 것을 버린 모양이다. 그냥 둘 다 둘 것이지 왜 저런 짓을 했나 모르겠다. 처음 저 정상석을 힘들게 세운 이들의 정성은 뭐란 말인가? 알 수 없는 행위이다. 이 산 곁에 있는 석룡산의 정상석도 누군가 저렇게 반토막을 냈더라. # 흔적없이 주변 정리하고 사이트를 떠났다. 좁고 비탈진 곳이었지만 홀로 보내기엔 나름 훌륭하였다. # 고도 높은 곳이라 얼레지가 이제서야 꽃몽오리를 부풀리고 있다. # 바로 위에 있는 정상을 다시 찾았다. 제대로 된 화악의 조망을 보아야지. # 이곳 화악이 자오선 기준 정중앙이란다. 강원도 양구도 국토 정중앙을 주장하던데 어디가 진짜인지는 내 관심 밖이다. # 명지, 연인, 운악 그리고 한북정맥의 흐름. # 저멀리 운악산도 내 다음 야영 후보지 중 하나이다. # 도마치봉, 백운산, 광덕고개,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흐름. # 광덕산의 기상레이더와 우측에 뾰족한 저 산은 상해봉이지 싶다. 우측에 정상부가 일부만 나온 산은 복주산이다. 예전 한북정맥 종주할 때 저곳 복주산 정상에 모자를 걸어두고 그냥 내려왔었다. 햇볕이 엄청나게 뜨거운 날이라 노출된 머리로 그냥 진행할 수 없어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2006년 일이니 십 년이 넘은 옛일이다. # 국망봉과 한북의 능선. # 명지산 쪽 조망. # 명지산 뒤로 운악산의 암봉이 하얗게 빛난다. # 화악 중봉애서 흘러내린 애기봉. # 한북의 강씨봉. # 해 높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박무가 점점 짙어진다. 그러면서 산줄기는 점점 수묵화가 되기 시작한다. # 강씨봉. 눈 내린 겨울. 저곳 잣숲에서 하룻밤 보냈었다. # 바로 앞에 있는 석룡산. 뒷쪽의 산줄기는 철원의 각흘산인 듯하다. # 희망찬 일출을 보여주었던 응봉. 응봉(鷹峰)은 매봉이라고도 한다. 유래 찾아보면 아마도 매와 관련된 전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매봉은 산을 의미하는 '뫼'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뫼봉이 매봉으로, 다시 한자말인 응봉으로 변한 것이다. # 거연과 현정. 그대들은 좋지 못한 이름을 남겼다. # 해가 많이 높아졌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중봉 정상에서 오래 조망 감상을 하다가 길을 나섰다. 산행 시작하면서 준비해 온 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 내가 야영했던 정상 바로 아래 사이트 좌측으로 향했다. 곧바로 암릉길이 이어진다. # 길이 꽤 험하다. 이때 나는 이 길이 어제 올라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군부대 철조망을 따르게 되는 줄 알았다. # 위험구간이 나타난다. # 배낭 무게 때문에 이런 암릉길이 부답스럽다. 조심조심 내려간다. # 봄이 깊어 박새 무리가 어느새 많이 자랐다. 수분 공급 충분하고 햇살 좋으면 배추통 만큼 자라는 녀석이다. # 제법 많이 위험한 암릉길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안면이 많은 갈림길을 다시 만났다. 간밤에 만났던 곳이다. 간밤에 나는 저 플래카드 뒤로 들어갔었다. 오늘 내가 하산한 이 등로가 중봉으로 가는 정규 등로이고 내가 간밤에 헤맨 길은 샛길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사전에 준비했던 트랙의 주인공은 같은 길로 오르내리기 싫어 길을 구분했던 듯하다. 덕분에 나는 캄캄한 밤에 무거운 야영배낭 메고 위험한 암릉길에서 고생을 했다. # 곧 숲을 벗어나중봉 입구 군부대 갈림길에 도착했다. # 화악 정상에 주둔한 공군부대. # 그곳 갈림길에서 중봉 등로가 시작된다. 정규 등로는 숲속에 들어가서 우측 위로 올라가야 한다. 간밤에 나는 좌측으로 산허리를 휘감았다 다시 위로 암릉길 따라 올랐었다. # 내가 준비해온 트랙은 저곳 군부대 가까이 올라가서 우측 산허리를 휘감아 돌게 되어 있다. 그러다 철조망 가까이 가서 마루금을 따르는 모양이다. 군부대 가까이 샛길이 있는 듯하다. 하산을 또다시 포장도로 따라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 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군부대 입구 도로 따라 위로 올라 갔다. 가면서 계속 우측 산 허리를 살폈다. 샛길을 찾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군부대 정문에 이를 때까지 샛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문 가기 전에 숲으로 들어가게 트랙은 가리키고 있지만 길은 없다. 아마도 잡목 헤치고 억지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모양이다. 무거운 야영배낭 메고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정문까지 갔을 때 초병들 눈에 띄고 말았다. 곧바로 싸이렌 울리고 방송 나온다. 길 잘못 들었다 사과하고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갔다. 헛걸음만 하였다. 꽤 긴 거리를 무거운 배낭 메고 왕복했다. # 입구로 도로 내려와 잠시 정비한 후 군사도로를 따라 하산하였다. 산모퉁이를 여러 굽이 돌아내려 가자 안내목과 표지기가 길 아래 숲속을 가리키고 있다. 간밤에는 어두워서 못보고 지나친 곳이다. # 지도 확인하니 건들내로 하산하는 길이다. 실운현보다는 2km 더 먼 길이다. 차를 실운현에 주차해 두었기 때문에 도로 따라 내려가는 것이 여러모로 편안한 일이지만, 오며가며 모두 포장도로를 따라 걷기는 싫었다. 그래서 건들내길을 택해 하산하기로했다. 화악산 숲속이 보고 싶었던 탓이다. 자동차 회수가 걱정이기는 했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 길가에 있는 반사경 이용해 사진 하나 남겼다. 작년 봄 욕지도 야영산행 이후 1년만이어서 그랬다. # 곧바로 가파른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 스틱 의지해서 조심조심 내리막을 걸었다. 하지만 이 내리막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화악산은 경기 제1의 높이를 자랑하는 산이다. 그만큼 높고 험하다. 쉽게 보고 덤빌 하산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 잠시 편안한 길을 만났다. 그 길 가운데 사스레나무 한 그루 하얗게 옷 입고 서 있다. # 산 중턱부터는 얼레지 군락이 자주 눈에 띈다. 정상의 얼레지는 이제 막 꽃몽우리를 부풀리고 있었는데, 이곳은 만개하였다. # 꽃잎을 한껏 뒤로 젖힌 채 도도한 표정이다. 나 이뻐? 이뻐? 당돌하게 묻는 듯하다. # 진진이도 활짝 피었다. 산 아래에는 이미 모두 떨어졌는데 이곳은 이제서야 만개하여 꽃향기 가득 내뿜고 있다. # 꽃향기 좋으니 벌 나비 날아든다. #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생강나무도 아직 남아 있다. 화악의 고도가 높은 탓이다. # 내리막이 끝도 없다. 음식물 비워내어 한층 가벼워진 배낭이지만 기본 무게가 있으니 긴 내리막길이 부담스럽다. 바위에 걸터 앉아 오래 쉬었다. # 참으로 긴 하산길이다. 간만에 무거운 야영짐 짊어진 터라 무릎에 부담이 많이 갔다. #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현호색 보랏빛 은은히 짙어진다. #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 노란 괭이눈이 꽃을 피웠다. # 계곡 물소리 들리는 곳에서 비로소 가파른 비탈길이 끝난다. 긴 산행 후 본격적인 오르막을 만나 재정비하고 출발하는 부부 산객을 만났다. # 무릎 시큰거리게 내려왔는데 겨우 1km 좀 넘게 내려온 모양이다. 건들내까지 아직 4.2km나 남았다. # 이곳부터는 계곡길의 시작이다. 화악은 계곡이 좋은 산이다. 산 높고 품 넓어 그럴 것이다. # 물 맑고 그 소리 청량하다. 귀가 호사한다. # 노랑갈퀴 무리가 등로 가에 있는 바위를 점령하였다. # 계곡 물소리 들으며 길게 하산한다. # 경사는 줄어들었지만 길이 워낙 멀다. 다시 중간에 배낭 내리고 휴식했다. # 배낭 내린 바위에 자작나무 껍질이 엽서 한 장 크기로 떨어져 있다. # 실제로 예전에는 이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글을 썼다. 그 기분 느껴보려고 엽서 한 장 써 보았다. # 미치광이풀. 광대작약이라고도 한다. 뿌리를 동낭탕이라는 약재로 쓴다. 진통제와 진경제 원료로 쓰인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수전증, 옴이나 버짐에도 효과 있지만 중독성이 있어 주의가 필요한 약제이다. 미치광이란 이름은 그래서 붙여진 모양이다. # 피나물. 노랑매미꽃이라고도 한다. 양귀비과로 숲속 습기 많은 곳을 좋아한다. 말려서 관절염, 타박성 등에 약용으로 쓴다. 독성이 있지만 나물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처럼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한다. # 혼자 집에 있는 마눌 때문에 마음이 좀 급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계곡에 발 담그고 하루종일 머물렀을 것이다. # 지금 이 숲속에는 인공의 소리는 전혀 없다. 다만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가득할 뿐이다. 좋다. # 정말 먼 길이다. 힘들게 아래로 내리니 쭉쭉 뻗은 잣나무숲이 나온다. # 계곡을 벗어난 저 잣나무숲에 인기척이 있다. # 나물 채취하러 온 사람들의 차량이다. 4륜 구동은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이곳까지 이어져 있다. 저 잣숲 아래에 어느 종교단체의 수도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갤로퍼는 참 관리가 잘된 차량이다. 20년 가까이 된 차량인데 새차처럼 관리가 되어 있다. 한참을 구경하였다. # 나물꾼들과 환담하며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이후부터는 4륜 구동 차량 진입이 가능한 임도가 이어진다. # 길가에 돌배나무가 꽃을 피웠다. # 지금 화악에는 나물꾼들이 많다. 저 사람들은 산더미 같은 내 배낭을 보더니 나물 엄청 많이 캤나보다고 부러워 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라 저들 눈에는 산에 있는 사람 모두가 나물꾼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취나물도 냄새 맡아야만 구별이 가능한 사람입니다요... # 멀다. 정말 멀다. 그래도 걷다보니 숲을 벗어난다. # 이 동네 사람들은 세상 근심과 떨어져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 수 있겠다. # 인간 세상과 만났어도 화악의 계곡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다. # 다리가 휘청휘청 할 무렵 건들내에 도착했다. 정말 어마무시하게 먼 하산길이었다. 힘들었다. # 봄물이 계곡 가득하여 길 위에 넘쳤다. 물 깊이가 발목을 넘는다. 신발 벗기 귀찮아 그냥 달렸다. 다행히 방수가 되는 신발이라 신발 안에 스미지는 않았다. # 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길가에 있어도 바람소리 물소리 가득 안고 도시로 돌아 갈 수 있는 곳이다. # 길가에 왕소나무가 있다. 이 지역 포스트이다. 그 그늘 아래 짐 내렸다. 긴 하산 끝에 산행을 마쳤지만, 이제부터는 고개 위로 올라가 차를 회수하는 문제가 남았다. 버스 정류소가 있기는 한데, 하루에 몇 대 있지도 않고 그나마도 실운현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윗동네까지 갔다가 가평으로 도로 내려가는 것이다. 지나는 버스나 택시 있을까봐 30여 분 넘게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다. 모바일로 확인해 봤지만 버스는 없다. 카카오 택시 앱을 다운 받아 택시 요청했지만 응답하는 택시가 없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지쳐 최후의 수단으로 히치를 시도했다. 운전자 홀로 탄 차량을 집중 시도했지만 대부분 쌩 내달려버린다. 20여 대 가까이 헛질 하였는데, 오래된 SUV 차량 한 대가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 준다. 선하게 생긴 젊은 부부가 아이 데리고 가평과 춘천 봄나들이 나왔단다. 짐이 많아 좁은 차안의 공간을 기꺼이 허락해준다. 감사한 일이다. # 젊은 부부의 감사한 친절 덕분에 무사히 실운현으로 복귀했다. 실운현 쉼터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다. # 바이크나 자전거로 고개를 넘는 이들도 많다. 나도 몸 정비해서 마눌과 함께 자전거 타고 산딸기 익을 즈음에 다시 한번 올 계획이다. 가평에서 실운현을 넘고 춘천으로 가면 될 듯하다. # 어제 오후에는 내 차 혼자 있었는데 주변에 차량이 많다. # 저 캠핑카의 주인은 60대 부부인데 매주 저렇게 전국 각지를 다니는 모양이다. 자전거 매달고 다니면서 라이딩과 캠핑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어제 저녁 내가 실운현을 떠난 직후에 도착했다 한다. 밤새 홀로 서 있는 내 차 주인의 존재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관심을 표하신다. 잠시 환담하였다. # 실운현엔 햇살과 바람이 아주 좋다. 간밤에 젖은 야영 장비 모두를 말렸다. 순식간에 뽀송뽀송 잘 마른다. # 날씨 맑으니 사창리 쪽 조망도 좋다. 고개 위에서 오래 쉬었다. 이후 가평, 대성리 거쳐 집으로 돌아 갔다. 약간 정체가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쉽게 귀가했다. 그렇게 1년만의 야영산행을 마무리했다. 역시 나는 산에 들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오랜만의 야영산행이라 몸 적응이 어려웠고 무거운 배낭 탓에 야간 산행과 긴 하산길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힘들어 하는 몸과 달리 마음이 너무나 깨끗해졌다. 그 깨끗해진 마음으로 다시 도심에서의 한 주일을 버티기에 충분해진 것이다. 좋다. 그렇게 산의 기운 보충해 가며 한 세상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산꾼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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