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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명산]42(덕숭산/德崇山)-선맥선풍(禪脈仙風)의 산!! 본문

산이야기/100대 명산

[100대 명산]42(덕숭산/德崇山)-선맥선풍(禪脈仙風)의 산!!

강/사/랑 2017. 9. 28. 17:58

[100대 명산]42(덕숭산/德崇山)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는 '2002년 세계 산(山)의 해'를 기념하고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100대 명산(名山)'을 선정 공표(公表)하였다.


모름지기 이 땅의 100대 명산이니 그 선정이 허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청(山林廳)에서는 학계, 산악계, 언론계 등 산악 관련 전문가 13명으로 선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3개월간 작업을 하여 100개의 산을 선정하게 되었다.


그 선정 기준은 국민의 선호도(選好度), 접근성(接近性), 역사성(歷史性), 문화성(文化性), 생태적 특성(生態的 特性), 규모(規模) 등으로 하였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추천받은 105개 산과 산악회 및 산악전문지가 추천하는 산, 인터넷 사이트에서 선호도가 높은 산을 대상으로 각 항목당 가중치(加重値)를 고려하여 선정하였다.


지역별로는 영남권이 28개로 가장 많고 강원권과 호남권에 각 21개씩이 포함되었다. 그중 충청권에는 계룡산과 대둔산을 비롯한 12개의 산이 선정되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우리나라 지형과 비교적 작은 편인 도(道)의 규모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100대 명산으로 선정된 충청의 산 중에 예산의 '덕숭산(德崇山)'이 있다. 높이는 495m로 낮은 편이나 지역 주민들이 '호서(湖西)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할 만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점을 감안하여 100대 명산으로 선정하였다. 백제 법왕(法王) 원년인 599년 지명 법사가 창건한 수덕사(修德寺)와 보물 제355호인 마애불이 있는 점도 고려되었다.


그런데 산 좀 탄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덕숭산에 오르면 우선 실망부터 한다. 기암괴석이 있어 소금강이라 불렀다지만, 막상 전국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정도의 소규모 두루뭉술한 암봉이 있을 뿐이고 품이 넓거나 골이 깊어 계곡을 골골이 품고 있는 큰 산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산의 규모가 적어 마음 먹고 속도를 올리면 단 두 시간 만에 정상을 왕복할 정도로 오르내림이 쉬운 산이기도 하니 싱겁다고 여기지 않음이 이상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이 명산의 대열에 속함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산이 품고 있는 '수덕사(修德寺)'의 존재에 있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 때 고승 '지명(知命)'이 창건하였다 전해진다. 천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다. 백제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講說)하여 널리 알려졌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重修)하였다.


수덕사는 역사만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이 사찰이 대한불교 조계종의 5대 총림(叢林) 중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의 위치에 있어 더욱 가치를 지닌다. 총림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을 갖추고 본분종사인 방장(方長)의 지도하에 대중(大衆)이 여법(如法)하게 정진하는 종합 수행도량(修行道場)을 말한다. 한마디로 불교적 학문과 수행의 모든 것이 집합된 사찰이라는 뜻이다.


즉, 수덕사가 관광객 불러모으는 역사 깊은 옛 사찰이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눈 푸른 불자(佛者)들이 화두(話頭) 하나 붙들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선(禪) 공부에 매진하는 수행의 도량(修行道場)이어서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시퍼렇게 날선 칼날 같은 의지로 화두와 경전 공부에 매진하는 승려들이 이 산 곳곳에 숨어 있으니 자연히 산에는 선맥(禪脈)이 흐르고 골에는 선기(仙氣)가 깃들어 산이 깊이와 넓이를 가지는 것이다.


 '山不在高 有仙則名(산부재고 유선즉명)'이란 말이 있다. "산이 높다고 다가 아니요, 仙風(선풍)이 있어야 명산(名山)이다."란 뜻이다.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나오는 싯귀이다. 유우석은 자를 몽득(夢得), 호는 여산인(廬山人)이라 하였다. 당나라 수도인 낙양(洛陽)에서 태어나서 덕종 정원(貞元) 9년인 793년 진사(進士)가 되었다. 스물한 살때 일이다. 이후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는 관직보다는 시인으로 더 이름을 알렸는데, 위응물(韋應物), 백거이(白居易)와 더불어 삼걸(三傑)이라 불렸으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들과 교류하였다. 뛰어난 시인이었던 그의 시는 호방하여 '시호(詩豪)'라 불리기도 했다. 시의 호걸이란 뜻이다.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元) 등과 정치 개혁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지방의 하급관리로 좌천되었다. 그때 쓴 시가 '누실명(陋室銘)'이다. '누실((陋室)'이란 누추하고 남루한 집이란 뜻이며 '명(銘)'이란 비석이나 쇠종에 새긴 글을 말한다. 즉 비록 누추한 집에 살지만 기개만은 드높다는 선비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산부재고 유선즉명 수부재심 유용즉령 :  산이 높다고 다가 아니요, 仙風(선풍)이 있어야 명산(名山)이다. 또, 물이 깊다고 다가 아니요, 용이 있어야 신령스럽다.)"


산이 높아 명산이 아니요, 물이 깊어야 대천이 아니다. 무릇 명산(名山)에는 선풍이 있어야 하고 대천(大川)에는 용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조건은 높이나 깊이가 아니라 그 산이나 물이 품고 있는 '기운(氣運)'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덕숭(德崇)이 그러한 산이다. 덕숭은 비록 495m의 낮은 산이나 그 품속에 한 송이 연꽃처럼 선맥(禪脈) 흐르고 선풍(仙風) 어린 유서 깊은 사찰을 품고 있다. 그 선맥(禪脈) 선풍(仙風)의 존재가 이 산을 명산으로 만든 것이다.


원래 산의 진면목은 그 산속에 파묻히면 제대로 보기 어려운 법이다. 덕숭산 건너편에 있는 '홍동산(弘東山)' 정상에 서면 수덕고개를 경계로 덕숭산이 온전히 건너다 보인다. 그 때 우리는 덕숭산이 너른 품을 벌려 한 송이 연꽃 피어 올리듯 수덕사를 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제서야 덕숭산이 높이로만 판단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큰 산임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그러한 덕숭산의 역설적 넓이는 10년 전 금북정맥(錦北正脈) 종주를 하면서 홍동산정(弘東山頂)에서 이미 느껴보았다. 다만 그때는 산 마루금을 더듬으며 장거리 산행 위주로 산길 걷던 시절이라 느긋하게 덕숭의 온기(溫氣)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이제 장거리 종주 산행에서 벗어나 산정(山頂)에 헝겊집 한 채 세우고 하룻밤 머물며 그 산의 선기(仙氣)를 느끼는 것으로 산행 방향을 바꾼 터라 덕숭의 산정에서 이 산 가득 흐르는 선맥(禪脈)과 선풍(仙風)의 기운을 함께 하고자 한다. 강/사/랑의 100대 명산 순례 마흔두 번째는 선기(仙氣) 높은 '덕숭산(德崇山)'이다. 



 

선맥선풍(禪脈仙風)의 산!!


일시 : 2017년 9월 23, 24일. 흙과 해의 날.
세부내용 :

 

수덕고개 ~ 철조망 ~ 전망대 ~ 전월사 갈림길 ~암봉 ~ 덕숭산/야영 ~ 금북정맥 갈림길 ~ 만공탑 ~ 소림초당 ~ 수덕사 ~ 수덕사주차장 ~ 수덕고개


우리 부부는 지난 여름휴가로 인해 시방 함께 부상 중이다. 이 년 만에 제주 올레길을 재개하였던 것인데, 마눌은 신발 관리를 잘 못해서 나는 해안길에서 넘어져 부상을 입었다. 무거운 대형배낭 메고 사 일 동안 먼 길 걸은 것이 부상을 초래하였다. 


덕분에 마눌은 양 발바닥 모두에 물집이 십여 개 잡혀 몇 주 동안 고생을 하였고, 나는 정강이에 제법 깊은 상처를 입어 계속 치료 중이다.


그리하여 두어 주 정도 산에 못가고 쉬어야 했다. 매주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한바탕 땀 흘린 후 어느 산정에서 헝겊집 한 채 세우고 별구경과 달구경을 하다가 두 주 정도 쉬었더니 몸이 근질근질 하였다.


산 갈증이 간절하였던 것인데, 마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럴 때는 산에 들어가서 땀 한 번 찐하게 흘려 줘야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 둘 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라 너무 높거나 험한 산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조건에 맞는 산이 덕숭산이었다. 덕숭산은 나즈막한 산이라 한 시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대 명산으로 이름을 올린 산인데, 그 산 속에 품고 있는 수덕사의 존재에 그 가치가 있는 곳이다. 수덕사와 덕숭산은 이미 여러 차례 다녀온 곳이기는 해도 그 산정에서 하룻밤 보내지는 못했으니 이번 주는 덕숭산정에서 달구경을 해볼 작정이다.


마침 알맞게도 기상청에서는 전국 어디서나 달을 볼 수 있게 맑은 날이 될 것이라 예보하였다. 기대 만발로 짐 챙겨 예산으로 길을 잡았다. 


덕숭산/德崇山


높이는 495m이다.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한다. 덕숭산은 호서(湖西)의 금강산(金剛山)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산 중턱에 수덕사가 있다. 수덕사의 대웅전은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수덕산은 기암괴석이 풍부하여 바위들이 사람의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지닌 절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절경으로는 원효봉과 석문봉, 덕숭산, 해태바위 등이 있다. 또한 수덕사를 비롯하여 정혜사, 만공탑, 여승당, 보덕사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충의사와 덕산온천 등 명소가 있다. 수덕산은 수덕사 등 사찰산행과 온천산행을 겸할 수 있다. 등산코스는 코스가 짧아 가족들의 나들이 코스로도 좋다.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大雄殿:국보 49호) 앞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대웅전 내부의 고려벽화를 비롯하여 정혜사로 가는 중에 만공이 건립한 25척의 석불로서 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과 만공을 추도하기 위해 세운 만공탑(萬空塔) 등이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덕숭산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덕숭산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고속도로 정체 심하지 않아 수덕고개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 이번에 우리는 덕숭산 산행 코스로 수덕고개를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덕숭산은 수덕사 입구에서 출발해서 정상 찍고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택한다. 그 코스는 너무 단조롭기도 하지만, 사찰 입구에서 받는 입장료가 짜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덕고개에서 출발해서 정상을 찍고 수덕사 방향으로 하산할 작정이다.




# 수덕고개는 예산에서 홍성으로 넘어가는 40번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금북정맥이 바로 이 고개를 통과한다. 금북정맥은 홍동산에서 수덕고개 거쳐 덕숭산을 넘고 나본들고개로 떨어졌다가 다시 가야산으로 치고 오르게 된다. 10년 전 홀로 금북정맥 종주할 때 그 코스를 지났던 곳이다. 수덕고개 정상은 수덕사를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식당이나 민박이 오래전부터 성업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달리 육괴정(六槐亭)이라 부른다. 여섯 그루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 수덕고개의 덕숭산 들머리는 긴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그 쪽 사면이 사유지라는 것은 이미 10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할 때 알고 있었고 그 때도 숲속에 작은 철조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해안가 대간첩 방어용 철조망 같은 무시무시한 철책은 상상 불가의 일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철조망을 우회하고자 고개 너머 덕산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 갔다. 




# 철조망 끝나는 곳에서 숲으로 올라갔다. 잠시 사면을 치고 오르면 산허리를 휘감는 임도를 만난다.




# 그 임도를 타고 다시 수덕고개 정상 쪽으로 올라 갔다.




# 고개 정상에서 철조망 때문에 갈등하느라, 들머리 찾느라, 고개 너머 갔다가 숲으로 올라가 다시 원위치 하느라 근 사오십 분 정도 허비하였다.





# 임도 따라 고개 정상부까지 올라 갔다가 그곳에서 우틀하여 사면을 치고 올라 정상을 향했다.




# 소나무가 성한 산이다. 그 솔숲을 따라 위로 올랐다.




# 잠시 후 암릉 구간에 도착했다.





# 규모가 아주 큰 암반으로 된 곳이다. 이곳은 맞은 편 홍동산에서 보면 수덕사를 감싸고 있는 하얀 꽃잎처럼 보인다.





# 암릉 구간이라 한정적이나마 조망이 열리는 곳이다.





# 수덕고개 방향으로 조망이 열렸다. 바로 앞에 수덕고개 육괴정이 보이고 뒷쪽의 산은 홍동산(洪東山)이다. 더 뒷쪽의 산은 백월산(白月山)이다. 이 산줄기가 금북정맥(錦北正脈)이다. 좌측 중앙 뒷쪽의 암봉은 홍성의 진산인 용봉산(龍鳳山)이다.




# 용봉산을 가까이 줌인하였다. 저곳 정상에서 하룻밤 머물렀었다. 암봉의 조망이 기가 막히는 곳이다.




# 금북정맥을 줌인. 홍동산과 백월산. 10년 전 겨울에 저 산길을 걸었다.



# 윗쪽으로 고개를 들면 가야 할 덕숭산 정상이 보인다.




# 한참을 그 암릉에서 조망 감상하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 부상에서 아직 덜 회복된 상태라 무거운 대형배낭의 압박이 심하였다. 습도가 높아 무더운 날이기도 하였다. 중간중간 자주 휴식하였다.




# 윗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진다.




# 한 차례 올려 묘지를 통과했다.





# 오랫동안 이 무거운 등짐 지고 산길을 걸었지만, 아직 우리는 이 무게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다. 도시민의 허약한 체력과 생활방식에 적합지 않은 채비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이 고통을 즐길 따름이다.




# 소박한 암릉구간도 통과.





# 암릉 발달한 다른 악산(岳山)에 비하면 걸음마 같은 수준의 암릉이지만 이 산에서는 나름 암릉길이다.





# 제법 땀을 한 바탕 찐하게 흘린 후 전월사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전월사가 나온다. 전월사(轉月寺)는 근현대 고승인 만공(滿空)이 정진했던 수행처이다. 관광객 넘치는 수덕사와는 다른 고요한 수행처라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산할 때 들렀다 가야지 했는데 뒷날 젖은 짐 걱정 때문에 그냥 지나쳤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 다시 정상을 향해 출발!




# 바위 하나 우뚝한 봉우리 사면에 도착했다. 짐 없으면 바위 타고 올라 조망 감상이 가능한 곳이다. 




# 조금 더 오르면 정상이 나온다. 너무 싱겁게 도착해 버렸다.




# 10년 만의 재방문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너무 싱겁게 도착해 아직 정상이 아닌 줄 알았다. 정상의 풍경도 많이 변하였다. 예전에는 정상석도 없고 안내판도 없었다. 오룩스 맵 확인하니 정상이다.




# 노을 질 시각이다. 적당한 시각에 도착했다. 부상 중인 몸으로 오르기에도 적당하였다.




# 10년 전에는 없던 정상석이 서 있다. 덕숭산의 규모에 어울리는 아담한 크기라 부담이 없다.




# 어느 방향으로 가든 수덕사까지 2km 이내의 거리다.




# 예전 기억으로 덕숭산 정상에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지 싶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모두 경사가 져 있다. 




# 정상 너머 금북정맥 방향으로 등로가에 딱 텐트 한 동 칠 공간이 있다. 그곳에 우리 빨간 야외집을 세웠다.



# 지금 덕숭산의 숲에는 물안개가 가득하다. 일기예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 산에서 진행하는 우리 일정은 늘 한결같다. 집 짓고 살림 정리하고 물티슈 목욕하고 새옷 갈아 입고 저녁 만찬!




# 빨갱이 우리 이동 주택에 불을 밝혔다.




# 오늘 우리 만찬 내용은 간만에 '소고기 꾸버 묵기'다. 술은 벌초하러 갔다가 진주에서 공수해 온 명석 막걸리다.




# 어따~ 괴기 맛나고 술도 맛나다! 흐뭇한 밤이다!



# 저녁 먹고 밖으로 나오니 숲속엔 물안개가 더 짙어졌다.



# 물안개가 어찌나 짙던지 헤드렌턴을 바위 위에 놓았더니 하늘로 치솟는 탐조등 불빛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 새벽녘에 문득 깨었는데 텐트 위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밖으로 나와보니 밤새 물안개는 더 짙어졌고 나뭇가지에 맺힌 물안개가 비가 되어 떨어지고 있다. 그냥 두면 텐트가 완전히 물구덩이가 될 태세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잠자다 깨어 귀찮은 일이기는 해도 가장의 의무를 피할 수는 없다. 타프를 꺼내 지붕을 올렸다. 한 바탕 일을 끝내고 텐트 안으로 들어와 몸에 젖은 물기 닦아내는데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보에 없던 비다. 타프 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 타프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불안하긴 했지만, 피곤하여 곧 다시 잠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그쳤지만 물안개는 여전히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



# 그래도 한 겹 타프가 우리 텐트를 훌륭히 잘 보호하였다.





# 밖으로 나와보니 물안개 가득하여 시계는 제로 상태다.




# 비 내려 약간 꿉꿉하긴 해도 편안히 잘 보냈다.




# 신발을 비닐 봉지 안에 넣어 두었더니 우중에도 뽀송보송하였다.




# 혹시나 싶어 정상으로 가봤다. 역시나 조망도 일출도 불발이다.




# 집으로 다시 돌아와 아침 끓여 먹고 싸이트 정리했다.




# 짐 모두 정리한 후에도 숲속은 여전히 물안개 속이다.




# 전망대 위에 서 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 하룻밤 잘 보낸 숲속 공터에 작별하고 정상으로 갔다.




#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두어 팀 정상을 다녀 갔다. 하지만 조망 없으니 모두 곧바로 내려 가버리고 정상은 고요하고 한가하다.




# 덕숭산은 원래 삼덕(三德)의 중심이다. 삼덕은 예산 덕산면 덕숭산의 수덕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 이름 '덕숭(德崇)', 절 이름 '수덕(修德)', 마을 이름 '덕산(德山)'이 삼덕이다. 삼덕의 산 덕숭산 정상에서 정상석 어루만져 수덕하기를 기원하였다.




# 나는 이곳 덕숭산이 세 번째 방문이다. 나름 삼덕(三德)한 셈이다.



# 덕숭 정상과 작별하고 길을 나섰다. 하산길은 수덕사 방향이다. 하산길 우측 마루금으로 가면 금북정맥 길이다. 이 산 능선 끝에 나본들고개가 있고 그 너머에 가야산이 있다. 이후 금북정맥은 서산, 태안을 거쳐 안흥진으로 흘러 간다. 십여 년 전에 나 홀로 걸었던 산길이다.




# 수덕사는 관광객 많이 찾는 절이다. 그리고 그 절을 찾은 이들은 쉬 덕숭을 오른다. 이 날은 일요일이다. 덕숭을 찾은 산악회가 많다. 주로 연세 드신 분들의 산악회가 많이 왔다.




# 가을 깊어졌으니 산길에 가을꽃 자주 보인다. 구절초.




# 참취도 국화를 닮은 하얀 꽃을 피웠다. 봄날이었으면 향긋한 취나물 향기 가득하였을 것이다.




# 야생 밤도 많이 보았다. 입 벌어진 넘을 까보니 윤기 흐르는 밤이 들어 있다. 다만 야생밤이라 크기가 아주 작다.




#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 거북바위로 불리지 싶다.




# 여러 팀의 산객들과 계속 만나게 된다. 산책하듯 오르는 그들과 산더미 같은 짐을 진 우리는 아주 대조적이다.




# 크게 힘들 것 없는 하산길이다. 콧노래 부르며 내려간다.






# 길게 내려가자 넓은 공터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전월사 갈림길이다. 저곳으로 가면 전월사 거쳐 어제 우리가 올라갔던 길과 만나게 된다. 전월사(轉月寺)는 만공(滿空) 스님이 손수 짓고 공부하다 입적한 암자이다.




# 사찰에서 짓는 듯한 농장이 있다.




# 관리하는 집도 있다. 혹시 개인이 운영하는 것인가? 건물의 모양이 절집과는 연관이 없어 보여 개인 소유의 농장일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수덕사처럼 부유한 사찰에서 저렇게 직접 농사를 짓겠는가 싶기도 하고.




# 바로 아래에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 공부하는 곳이라 대문이 닫혀 있다.




# 등산로를 한쪽으로 돌려야 정말 고요히 공부에 정진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 순간 안하무인(眼下無人), 후안무치(厚顔無恥), 예의실종(禮儀失踪)이 된다. 이 산은 단체 산객이 많이 찾는 산이다. 사찰의 공부하는 분위기를 배려할 마음의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 정혜사 돌문.



# 조금 아래에 있는 만공탑(滿空塔)을 만났다. 이 탑은 만공선사(滿空禪師)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47년에 세운 것이다. 만공은 1871년 전북 정읍 출생의 근대 고승이다. 1883년 공주 공학사(東鶴寺)에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의 지도를 받았는데, 1901년 양산 통도사 백운암(白雲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그의 오도송(悟道頌)은 이렇다. "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원차종성편법계 철원유음실개명 ;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 생애 대부분을 덕숭산에 머물며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 서산 간월암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일제의 왜색불교에 대항하여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지킨 고승이었다. 말년에 덕숭산 정상 아래 전월사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하다가 1946년 입적하였다.





# 만공탑 아래에 향운각(香雲閣)과 관음보살입상(觀音普薩立像)이 있다. 이 입상은 1924년 만공스님이 세운 것으로 자연암벽을 깎아 조성하였다.




# 높이 2.7m의 이 관음상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두 손에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정병(淨甁)은 청정한 물을 담는 병으로, 중생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감로수와 통하여 감로병이라고도 한다.




# 정혜사부터는 계단길의 연속이다. 이 돌계단은 모두 1,080계단으로 되어 있다. 덕숭총림 2대 방장(方丈)인 벽초(碧超)스님이 직접 쌓은 계단이라 한다. 벽초는 노동으로 선(禪)을 실천한 스님으로 만공의 법맥을 이어받아 수덕사를 일군 고승이다.




# 암벽 너머로 소림초당(小林草堂)이 보인다. 소림초당은 만공스님이 1925년 직접 지은 암자인데 덕숭산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았다 한다.




# 초당은 문이 잠겨있어 멀리서만 보았다. 다만 초당 가까이 가면서 갱진교(更進橋)라는 작은 돌다리는 건넜다. '갱진(更進)'은 갱진일보(更進一步) 즉,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곳이 백척간두(白尺竿頭)이다. 백척간두 진일보(白尺竿頭 進一步), 백척간두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디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그 경지를 '갱진일보(更進一步)'라 하는 것이다. 죽을 각오가 필요한 공부이다.




# 어느 산악회이든 산 정상보다는 산 입구에서 술만 먹다 돌아가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남쪽 지방에서 온 저 산악회도 예외는 아니다.




# 바위를 세우고 사면으로 부처님을 새겼다.




# 이윽고 수덕사에 도착했다.




# 견성암은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으니 오늘은 생략.




# 수덕사 경내로 들어섰다.




# 수덕사 대웅전을 만났다. 국보 제49호이다. 1308년에 건립되었다. 고려시대 건물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네 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단청 없는 소박한 모습이 정감 넘친다.




# 수덕사 대웅전 부처님.



# 산중턱에 이렇게 너른 공간을 확보하여 절집을 올렸다. 건너편에 홍동산이 보인다.



# 대웅전 앞마당에 삼층석탑이 서있다.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되었고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 전해진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양식의 고려초기 석탑으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었다.




# 휴일을 맞아 수덕사를 찾은 사람들이 많다. 간편한 복장의 그들 앞에 우리는 낯선 이방인이다.



# 역사 오랜 사찰이니 나무들도 고색창연하다. 수덕사 경내 소나무는 사찰 만큼이나 당당한 풍모를 지녔다.



# 그 자태 하 당당하여 팔 벌려 오래 안았다. 이 나무의 기상이 내게로 흘러 들기를!






# 대웅전 마당에 있는 샘물 한 잔 마시고 고개 드니 오래 된 건물 하나가 가로로 보인다. 승려들의 요사채인 청련당(靑蓮堂)이다. 그 건물에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만공의 친필이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라는 말로 민족이나 국가에 걸림없이 전 인류가 하나 되는 세상을 상징한다. 만공은 진정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즉 세계인이었던 모양이다.



# 대웅전 뒤로 덕숭산 정상과 나본들 고개 너머 가야산으로 흘러가는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보인다.



# 경사진 산 사면에 건립된 사찰이라 건물들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커다란 건물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 황하정류(黃河精樓)라 적혀 있다.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寺勢)를 안정시키는 전위누각(前衛樓閣)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황하의 정신이 어린 건물이란 뜻인 모양이다. 황하란 특정 지명이라기 보다는 불법(佛法)의 큰 흐름이라는 뜻일 것이다.



# 아래로 내려가면 포대화상(布袋和尙)이 동자들과 함께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포대는 중국 오대(五代) 시대 후량(後梁)의 고승이다. 본명은 계차(契此)이고 호는 장정자(長汀子)이다. 긴 눈썹에 배가 불룩 나온 비대한 몸을 가졌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고 긴 막대기 하나와 포대를 메고 다니며 동냥하였다. 탁발한 음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음식 먹은 자들이 병이 낫고 복을 얻었다 한다. 포대화상이란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미륵보살의 화현으로 알려져 있고 민간에서는 칠복신(七福神) 중 하나로 받들었다.


"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 靑日覩人少 問路白雲頭(일발천가반 고신만리유 청일도인소 문로백운두 ; 바릿대 하나로 수 천 집에서 밥 빌어 먹으며 홀로 만리를 떠도네. 밝은 도 아는 이 없으니 길 묻는 사이 머리에 흰 서리 내렸네.)" 포대화상의 대표적 게송(偈頌)이다. 불도를 위해 천하를 떠돈 그의 삶이 느껴지는 노래이다.


916년 명주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 게송 하나를 남기고 열반하였다. "彌勒眞彌勒 分身百千億 時時示時人 時人自不識(미륵진미륵 분신백천억 시시시시인 시인자불식 ; 미륵불 중 진짜 미륵불  백천억 가지로 몸을 나누어 때때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 절집 건물이 경사를 따라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이 두 천왕은 탑을 쥔 서방(西方)의 광목천왕(廣目天王)과 용을 쥔 남방(南方)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맞은 편에는 검을 든 동방(東方)의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비파를 든 북방(北方)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있다.



# 일주문으로 가는 길에는 빠알간 꽃무릇 군락이 있다.



# 꽃무릇은 흔히 상사화(相思花)로 부르지만, 상사화는 분홍색 외에 노란색, 보라색, 흰색 등으로 피고 꽃무릇은 빨간색 유일의 꽃이다. 또 상사화는 여름꽃이고 꽃무릇은 가을꽃이다. 다만, 꽃무릇도 상사화의 일종이니 통상 상사화라 불러도 무방하다.



#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과 잎이 함께 하지 못한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인 것이다.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하면서 끝내 만나지 못하므로 상사(相思)라 불렀다. 꽃무릇은 꽃이 다 떨어진 뒤에 비로소 잎이 돋아 나고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나고 꽃이 나중에 핀다는 설도 있는데 확실한 지는 잘 모르겠다.



# 우리나라에서는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등 사찰의 꽃무릇이 유명하다. 우리나라 절집에서 꽃무릇을 많이 심은 이유가 무엇일까? 자료를 찾아보니 꽃무릇의 알뿌리에는 맹독성 알카로이드인 라이코린(lycorine)성분이 들어 있어 사찰의 불화나 단청 등에 벌레가 꾀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서는 불경 제본이나 탱화를 제작하자면 접착제가 많이 필요한데 꽃무릇에 양질의 전분이 많아 접착제의 재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나온다.



 # 꽃무릇 구경하며 내려가니 일주문이 나온다.




# 수덕사 매표소를 통과하며 덕숭 산행을 마무리했다. 하산길에 매표소를 통과하여 입장료 시비에서 벗어났다.




# 수덕사 관광단지를 지나 주차장으로 갔다. 이틀 동안 굶었던 커피 한 잔 마시며 차편을 알아 보았다. 그런데 수덕고개로 가는 대중교통편이 꽤 간격이 있다. 지도 꺼내 확인해보니 수덕고개까지는 1km 조금 넘는 거리이다. 배낭 내리고 수덕고개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마눌은 배낭 지키고 나 혼자 걸었다.



# 40번 도로 따라 고개를 길게 올라 가서 수덕고개에 복귀했다. 휴일 나들이 나온 차량들이 많다.



# 수덕고개 화장실 앞에 어느 식당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홀로 외로이 묶여 있다. 산에서 먹지 않고 남겨온 간식을 주었더니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 차 회수해서 수덕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수덕고개 올라가는 고개 한 쪽에 그늘 좋은 공터가 있길래 간밤 덕숭산 정상에서 비 맞아 젖은 장비를 말렸다. 쉰 김에 라면 끓여 점심도 해결했다. 그동안에 장비는 좋은 가을 햇볕에 짱짱하게 말랐다.



그렇게 덕산(德山), 덕숭(德崇), 수덕(修德)으로 이뤄진 삼덕(三德)의 산행을 마무리했다. 무릇 덕(德)이란 하나만 갖춰도 일생(一生)을 감당할 만한 덕목은 갖춘 셈이다. 하물며 삼덕을 갖췄으니 덕산면 덕숭산 수덕사의 덕(德)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하겠는가?


이제 그 삼덕(三德)의 중심(中心)에서 하룻밤 머물며 덕의 향기를 마음껏 맡았으니 우리에게도 덕(德)의 그림자 한 조각쯤은 조금이나마 생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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