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일반산행]독성산/禿城山-오산 독성 성곽길! 본문
세상 살다 보면 어느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전(全) 관심사를 그 일에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집중도(集中度)가 높으면 제법 괄목(刮目)할 만한 성과가 나오기도 하고 자질(資質) 있는 이라면 세상에 이름을 알릴 결과물을 생산하기도 한다. 나는 그다지 집중도가 높은 인물이 못되고 더더욱 자질도 없는 편이다. 그리하여 아직 이 나이 먹도록 세상에 이름 알릴 결과도 없고 남들이 눈 비벼 바라볼 괄목할 성과도 없는 삶을 살았다. 돌아보면 한심스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성정(性情)과 자질(資質)이 딱 그만큼 인 것을! 다만 그래도 몇 가지 소소한 집중은 있어서 꽤 오래 직장생활도 하고 취미생활도 몇 가지 즐기기는 하였다. 이 땅의 산길, 들길, 물길을 두루두루 섭렵(涉獵)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이 일은 밥벌이에 매몰돼 지친 심신(心身)을 리플래시 하고자 처음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 그리고 100개의 명산과 여러 테마길 등등으로 확대되며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되고 그 목표가 점점 확장되어 나중에는 두서없이 얽히고설킬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다. 원래 사람이란 동물은 싫증이 쉬운 편이고 안락함에 빠지기 쉬운 경향을 가진 족속이다. 나는 그런 경향 중에서도 그 정도가 심한 편에 속하지 싶다. 처음에는 나도 꽤 높은 집중력으로 이 일련의 일을 시작하기는 하였다. 한 십여 년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에 빠져 매 주말 전국 각지에 있는 오지의 산길을 꽤 열심히 헤매고 다녔고 다시 100대 명산과 야영 산행으로 몇 년을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산속으로 부지런히 스며들기도 하였다. 또 서남해에 흩어져 있는 섬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중간중간 자전거 바퀴 굴려 국토 종주와 4대강 물길, 그리고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여러 자전거 길을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문제는 권태(倦怠)와 게으름이었다. 그런 세월을 꽤 오래 반복하였더니 어느덧 권태라는 못된 버릇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따뜻한 침대에 파묻히고자 하는 안락한 게으름이 내 몸과 마음에서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핑계는 늘 있다.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이곳저곳 고장이 잘 나고 그 고장이 쉬 고쳐지지 않기도 하였다.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임계치에 가까워진 것도 이유이기는 했다. 올해는 유독 잔병치레가 많았고 예후도 명쾌하지 않았다. 또 어찌 된 것이 매 주말 이곳저곳 찾아가야 할 경조사가 빠질 때가 드물기도 하였다. 그런저런 핑계가 생기니 몸은 쉬 늘어지고 마음은 늘 도망갈 궁리만 하게 된다. 그리하여 올해 내 산길과 들길은 거의 개점휴업에 가깝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돈 버는 일이 아닐지라도 이렇게 늘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각성(覺醒)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런저런 와중에 이번 주도 토요일에는 결혼식 참석해야 할 일정이 또 생겼다. 나는 삼십여 년 직장생활 중 내 결혼식을 제외하고는 경조사가 생길 일이 없었다. 그 한 번의 품앗이 때문에 수백 차례의 경조사에 참석해야 했다. 억울한 마음 없는 것은 아니나 어쩌겠는가? 내 복이 거기까지다 생각하고 열심히 봉투 챙겨 남들 경조사에 참석하고 있다. 토요일에 결혼식이 있으니 이번 주도 산에 가기는 틀렸다. 마침 몸도 찌뿌드드하던 참인데 잘 되었다 싶었다. 다만 몇 달 연속 산에 못 갔더니 좀이 쑤셔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가볍게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동네 근처의 산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낙점된 것이 오산의 독성(禿城)이다. 오산 독산성은 권율 장군(權慄 將軍)이 왜란(倭亂) 때 주둔하였던 곳이다. 장군은 독산성에 은거하여 왜병과 대치하다 행주산성으로 옮겨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독산성은 오산벌 한쪽에 우뚝 솟은 독성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높이 208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은 고도이지만 오산벌에서 가장 높은 곳을 이루어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要衝地)였다. 낮은 산에 있는 작은 성이라 물이 부족한 곳이었다. 왜병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포위를 오래 하면 물이 부족해 저절로 무너질 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전을 하고자 하였다. 장군은 그런 취약점을 번뜩이는 기지(機智)로 해결하였다. 적군이 잘 보이는 성벽에 말을 세우고 흰쌀로 목욕을 시키게 하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물로 말을 씻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마실 물이 남아돌아 말까지 씻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적은 장기전이 의미 없다 여겨 포위를 풀었다. 그 결과 행주대첩(幸州大捷)의 대승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 이후 독산성에서 흰쌀로 말을 씻었던 언덕을 세마대(洗馬臺)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독성과 세마대는 몇 년 전 삼남길 걸으면서 겨울에 지난 곳이기도 하다. 마눌에게 이런저런 얘기 들려주며 함께 독산성을 올랐다.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곳이라 그녀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다리 부상 완치되지 않은 나에게도 적합한 곳이었다. 독산성은 그런 곳이다. 오산 독성 성곽길! 일시 : 2018년 3월 11일. 해의 날.
예년 같으면 벌써 여러 차례 동계 야영을 다녀왔을 시기인데 올해는 단 한번도 동계 야영을 가지 못했다. 일단은 내 다리 부상이 원인이었고 마눌의 여러가지 걱정이 두번째였다. 세번째는 매주 날아드는 이런저런 경조사 알림장에 있었다. 늘 산길 걷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동네 주변에 가볍게 다녀올 곳이 없나 살폈다. 그 와중에 오산 독성이 생각났다. 작년초 삼남길 걸으면서 홀로 넘어갔던 곳이고 낮은 산에 위치한 산성이라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갈증(山渴症) 달래기엔 그만이다 싶어 마눌 앞세워 집을 나섰다. 워낙 가까운 곳이라 집에서 채 삼십 분이 걸리지 않아 독성 아래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독성산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오산 독성은 북동쪽 보적사 방향으로 오르는 길과 남서쪽 산림욕장 방향으로 오르는 길 두 가지가 있다. 우리는 오늘 남서쪽에서 출발점을 잡았다. 세마교에서 오산쪽으로 넘어가는 산길 좌측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차 세운 후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까운 거리라 채 이십 분이 되지 않아 성벽 아래 도착할 수 있다. # 소나무 한 그루 비탈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 있다. '홀로 獨'이라 독성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지만, 이곳 독성의 독은 '대머리 禿'이다. # 주차장에서 올라가면 서문(西門)이 나온다. 작은 규모의 성이라 누각 없이 그냥 성벽으로만 문을 만들었다. # 독성은 둘레 1,100m의 작은 규모이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으로 산정식(山頂式) 산성이다. 다른 말로는 테뫼식이라고 한다. 뫼의 정상을 테 두르듯 성곽을 둘렀다는 의미이다. # 독성은 비록 규모가 적지만 드넓은 오산벌을 앞에 두고 뒤로는 황구지천을 두르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또 이 성이 위치한 곳이 삼남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이곳만 제대로 지키면 수원과 한양으로 향하는 적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있어 백제 때 이미 성을 쌓았다 전해진다. 성벽 위에 올라서 보면 과연 남쪽 방향으로 일목요연하게 조망을 할 수 있다. 적군이 이 독성을 피해 한양으로 향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우리는 오늘 서문을 출발해서 독성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다. # 성곽이 우측으로 휘감는 곳에 북쪽으로 조망이 트였다. 좌측으로 황구지천이 흐른다. 황구지천은 우리 집이 있는 왕송호수에서 출발해서 수원과 화성을 남북으로 흘러내려 안성 입구에서 진위천과 합류한다. 이후 안성천이 되어 서해바다로 향한다. 북쪽으로 수원시가 보이고 그 너머의 산은 광교산이지 싶다. 좌측 앞에는 칠보산, 그 뒤에는 수리산이 될 것이다. # 햇살 좋은 날이다.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기 좋은 코스다. 전방에 성곽이 볼록한 곳이 북문(北門) 자리이다. # 성곽이 북쪽으로 완전히 휘감는 곳에 보적사 아래 주차장이 있다. 이 동네 사람들 중 산길 좀 걷고 싶은 사람들은 산 아래 주차장에 주차한 후 서문으로 올라 가고 걷기 싫은 사람들은 이곳까지 차를 갖고 올라와 경치 구경만 한 후 그냥 내려 간다. # 독성의 제일 은밀하다 싶은 곳에 동문(東門)과 보적사(寶積寺)가 있다. 보적사는 백제 아신왕 10년인 401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전하기를 이 성곽이 백제 때 축성될 당시 같이 지어졌다고 한다. 보적이란 절 이름은 전설에 기인한다. 독성 아래 어느 고을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춘궁기에 먹을 것이 쌀 한 되 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낌없이 부처께 공양을 올린 모양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곳간에 쌀이 가득하였다 한다. 정성드린 공양에 부처께서 화답하신 것이다. 보물이 쌓인 절이란 이름의 유래다. 오늘날 교회에 십일조 열심히 바치라고 설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 약간 씁쓸하다. # 현재의 사찰은 80년대 후반에 중수한 것이다. 때문에 고풍스런 맛은 없다. 작은 성곽 안의 절이라 아담하다. # 보적사를 지나가면 성곽 바깥으로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곁에는 작은 규모의 치(雉)가 있다. 치는 성곽 바깥으로 돌출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는 장소를 말한다. # 치에 서면 오산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산 그늘 진 성곽 남동쪽을 따라 진행했다. # 그러다 성곽 안쪽 정상에 있는 세마대(洗馬臺)를 향했다. # 독성은 작은 성이다. 성이 작으면 골이 없어 물이 귀한 법이다. 권율(權慄) 장군이 주둔했던 임란 당시도 그러했다. 왜군들도 이 성에 물이 적음을 알고 있었다. 포위를 하고 장기전을 펼치면 저절로 항복할 상황이었다. 이 위기를 탈출할 묘책이 필요하였다. 장군은 흰쌀을 이용했다. 성벽에 말을 세워놓고 흰쌀을 이용해 가짜 목욕을 시켰다. 멀리서 보면 물을 붓는 듯하였을 것이다. 물이 풍부하다 못해 말 목욕을 시킬 정도란 의미다. 왜군은 포위를 풀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장군은 병력을 행주산성으로 옮겼고 행주대첩의 대승을 이뤘다. 세마대(洗馬臺)란 말 목욕을 시킨 곳이란 뜻이다. 이후 독성과 세마대는 호국(護國)의 상징이 되었다. # 세마대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이다. 서예(書藝)에는 문외한이지만 잘 쓴 글씨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글씨에 기상이 넘치고 균형이 잡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역사적 평가가 폄하(貶下)된 대표적 인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승만은 독재자이고 부정선거를 획책했으며 한국 동란 당시 서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그가 비록 독립운동을 했지만 오로지 욕심으로 똘똘 뭉쳐 자신 중심의 운동을 하고자 했다 알려졌다. 나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후에 사료를 확인하고 실상을 파악하니 사실과 달랐다. 그는 자유주의자이고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당시의 조선은 무능과 부패가 극에 달해 더이상 나라로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 조선의 선택은 왕정으로의 복귀나 공산주의로의 진입이 가장 쉬운 길이었다. 그때의 세계 조류가 그랬다. 그러나 이승만이 있었기에 우리의 선택은 자유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공화제 국가의 건국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번영은 우리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답은 명확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독재자이고 부패한 지도자로 알고 있다. 그것은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 되었을 국가의 정체성을 신념으로 하는 자들의 끈질기고도 악랄한 공격이 수십 년 동안 간단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승만이 미운 것이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 땅은 그들이 원하는 공산 사회가 되었을 것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그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승만은 물론 그가 1948년 수립한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부정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헌법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지우며 대한민국 건국을 1948년이 아닌 일제시대의 임시정부까지 끌어올리려고 획책한다. 이제 촛불을 앞세워 대통령을 탄핵하고 교육, 문화, 언론은 물론 정권까지 틀어잡았으니 그들의 목표가 바로 코앞에 다다랐음이 현실이다. 이런 무서운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들이 장악한 교육과 문화와 언론에서 반복적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우남(雩南)의 글씨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백번을 양보해 그가 독재자에 부패한 인물이었다 해도 그가 건국한 이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 민주공화국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애국자로 충분하다. 그 선택 덕분에 오늘 우리의 번영이 있기 때문이다. 세마대는 1956년에 중건되었다. 이 대통령은 1875년생이다. 1956년이면 만 81세의 고령이다. 81세의 노인이 쓴 글씨라기에는 그 기상이 자못 늠름하다. 글씨체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단번에 써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상에 감탄하였다. # 세마대에 서면 사방으로 조망이 훌륭하다. 남쪽으로는 오산벌이 넓다. 오산 세교택지 지구의 개발지가 넓게 보인다. # 삼남길은 저 산자락을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작년에 걸었던 길이다. # 오산은 발전이 아주 빠른 도시다. 어느새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 세마대를 나와 성곽에 복귀했다. 오산 시내를 바라보며 아래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당시 저 벌판 가득 왜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 성에 갇힌채 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병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기약없는 희망과 패망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전쟁과 가난, 그리고 죽음의 절망을 모르는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 풍요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다시는 이땅의 사람들이 독산성에 갇혀 구름같이 에워싸고 있는 적병을 바라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풍요를 허물려고 하는 자들이 밉다. # 성곽은 다시 남서쪽으로 휘어진다. 이 길은 삼남길 걸을 때 지난 길이다. # 그 내리막 끝에 남문(南門)이 있다. 삼남길은 이곳 남문으로 이어진다. # 이곳에 건축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커다란 주춧돌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 그 곁에는 복원공사를 위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 남문 쪽을 돌아 보았다. # 아직은 찬바람 부는 계절이라 찾는 이 적다. 한적한 길을 오붓하게 걸었다. #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었다. #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암문(暗門)을 지났다. 독성에는 네 개의 성문과 한 개의 암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 황구지천(黃口池川)이 길게 남으로 내려가고 있다. 처음 수원으로 이사와서 저 황구지천을 따라 자전거여행을 했었다. # 쉬엄쉬엄 성곽 위를 걸어 서문에 복귀했다. 작은 성곽이라 금세 한 바퀴 돌 수 있는 거리다. # 성벽 밖으로 나가니 찬바람 훅 하고 덤벼든다. # 올라왔던 길 그대로 걸어 주차장으로 복귀했다. 독산성(禿山城)은 호국(護國)의 상징인 성곽이다. 성곽이란 것이 원래 호국을 위한 것이지만, 이곳 독산성은 그 위치나 역사적 역할이 워낙 컸던 곳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권율은 임란 당시 독산성에서 흰쌀로 말을 씻으며 적을 속였다. 이윽고 그 기세를 몰아 행주(幸州)에서의 대승(大勝)을 이루었다. 이승만은 육이오 동란 이후 세마대를 중건하였다. 그리고 직접 세마대(洗馬臺)란 글씨를 현판에 적었다. 이윽고 4년 뒤 하야(下野)하였다. 그가 자유민주공화국으로 건국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자리에서 도약하여 번영을 거듭하였다. 이른바 시궁창에서 연꽃을 피운 것이다. 이제 그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연꽃을 꺾어 다시 시궁창을 만들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착잡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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