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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곽길-역사는 반복된다! 본문

산이야기/일반 산행

[일반산행]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곽길-역사는 반복된다!

강/사/랑 2018. 6. 19. 18:26

[일반산행]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곽길 



인조 15년 1월 18일 무오(戊午).
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上)이 대신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群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大臣稟定文書 上引見大臣 下敎曰 "製書人亦令入來" 上覽書訖 招崔鳴吉進前 勘定未穩處 / 鳴吉遂以國書 退坐備局 更加點竄 禮曹判書金尙憲自外入來 見其書 痛哭而裂破之 仍請入對曰 "名分旣定之後 賊必責我以君臣之義 不免出城之擧 一出城門 則亦難免北轅之辱 群臣爲殿下謀誤矣 誠如議者之言 終脫二聖於重圍 則臣亦何敢妄陳所見哉 裂破國書 旣犯死罪 請先誅臣 更加深思" 上歔欷良久曰 "上而爲宗社 下而爲父兄 百官 不得已爲此擧 非不知卿言之正大 而實出於無奈何也 所恨者 不能早死 以見今日耳


인조 15년 1월 18일 무오.

삼사(三司) 및 이식(李植)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문자에 타당하지 않은 곳이 많이 있으니, 우선 내일을 기다렸다가 사람을 보내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최명길이 화를 내어 꾸짖기를,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다투고 분변하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치욕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 삼사는 단지 신(臣)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그 가부만 논하면 된다. 사신을 언제 보내느냐 하는 것은 곧 묘당의 책임으로서 그대들이 알 일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경석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三司及李植等請對 李景奭曰 "文字多有未妥處 姑待明日 送人無妨" 鳴吉怒叱曰 "君等每爭辨小曲折 致此危辱 不然 豈有今日乎 三司只論臣字之可否而已 至於送使遲速 乃廟堂之責 非君所可預知" 景奭不敢言


인조(仁祖) 즉위 14년인 1636년 겨울. 호로(胡虜) 즉, 청나라 오랑캐 무리가 한양을 침범하였다. 병자년(丙子年) 그해에는 변고가 잦았다. 정월부터 경상도 산음현(山陰縣)에서는 고목에 벼락이 쳤고 대구(大邱)에서는 큰 황새 무리가 남북으로 패를 갈라 서로 싸웠다.


또 고성현(固城縣)에서는 돌이 스스로 움직여 자리를 옮겼고 안산군(安山郡)에서도 바다에 있던 돌이 뭍으로 나왔는데, 돌이 지나간 곳에 40여 보(步)의 길이 만들어졌다.


무릇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하늘이 먼저 징조(徵兆)를 보였다. 병자년에도 그러했다. 유성(流星)이 곳곳에서 목격되었고 태백성(太白星)이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여러 징조의 끝에 호로의 침공이 있었다.


인조와 백관들은 처음 강화도로 피난처를 잡았다. 그러나 오랑캐의 무리는 영리했으며 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고려조(高麗朝)부터 북침에 대한 이 땅의 대비란 것이 늘 강화로의 도망이었던지라 미리 강화의 길을 가로막았다.


임금과 조정은 부득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47일간 조선의 조정은 포위된 성안에서 북적(北敵)인 청나라가 아닌 내부의 전쟁을 치렀다. 이른바 주화(主和)와 척화(斥和)의 논쟁이었다.


작가 김훈은 명저 '남한산성'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라고 절규하는 김상헌의 서슬 시퍼런 분노(憤怒)와 "만백성과 더불어 살아남아 치욕을 이겨내고 훗날을 도모하자"는 최명길의 슬픈 의지(意志)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실록에서는 김상헌이 최명길의 항복 문서를 찢고 왕에게 죽기를 청하였다 적었을 뿐 명길의 대응은 상헌이 아닌 다른 척화론자에게 꾸짖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에는 최명길이 찢어진 화의 교서를 주워 모았다고 적고 있다.


"김공상헌(金公尙憲)이 화친하는 글을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는데, 공은 그것을 주워서 다시 맞추며 말하기를 "글을 찢는 자도 없어서는 안 되고 글을 주워 맞추는 자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金公尙憲裂和書痛哭 公拾而補之曰 裂書者不可無 而補書者亦宜有)"


주화와 척화의 싸움은 병자년 남한산성 안에서 시작하여 조선조 내내 이어졌고 개화기를 거쳐 민주공화국 수립되고 세계화 이룬 현재까지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죽음으로 의리를 바로 할 것이냐? 치욕을 이겨 백성을 살릴 것이냐?


척화파의 죽음을 불사하는 기개와 의리는 조선조 내내 숭상의 대상이 되어 주류(主流)를 형성하였다. 반면 주화파는 비록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을 택했으나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비난을 오랫동안 받았다. 그러다 개화(開化) 이룬 후 성리학의 맹목적 명분(名分)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주화론의 현실적 책임감이 재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오랜 논쟁은 참으로 허망하고 슬픈 다툼이다. 척화파는 언뜻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와 의리, 그리고 명분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죄 없는 백성의 목숨을 도외시한 자신들만의 이기심이었고 그들의 의리는 우리 백성과 나라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상국(上國)인 명나라에 대한 의리였다. 그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명나라가 왜란 당시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를 주었다는 것이다.


주화파 역시 역사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 역시 주자학적(朱子學的) 세계관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었고 두 차례의 왜란(倭亂)과 정묘년의 호란(胡亂)을 겪었으면서도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왜(倭)의 발흥과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읽어내는 안목도 없었고 호전적(好戰的) 대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내일을 대비하는 준비성도 없었던 나라였다. 그러면서 어줍잖은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빠져 신흥 강국인 왜(倭)와 청(淸)을 마냥 오랑캐 취급이나 하다가 임금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하고 애꿎은 백성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역사는 늘 반복된다. 왕조 사라지고 민주적 절차에 의한 공화제(共和制)를 이뤘으며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자부하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변한 것이 없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호전적이고 이기적인 강대국들이 힘겨루기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자들은 그들의 신념을 위해 국가의 미래와 국민들의 안위(安危)는 관심 밖이다.


여전히 그들은 대국(大國)을 섬기고자 하고 그 대국에 기대어 소중화(小中華)를 이 땅에 이루고자 꿈꾸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실패가 확인된 낡은 이념(理念)의 깃발을 고집스레 내걸고 결과가 훤히 보이는 암울한 미래로 국가를 이끌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주자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허망한 일이다. 그리고 슬픈 일이다.


아래는 2017년 12월 15일 국빈(國賓) 방문한 나라에서 혼밥 먹기 수모를 겪은 어떤 사람이 베이징대(北京大)에서 한 연설이다. "중국이 법과 덕을 앞세우고 널리 포용하는 것은 중국을 대국(大國)답게 하는 기초입니다. 주변국들로 하여금 중국을 신뢰하게 하고 함께 하고자 할 것입니다.... 중국은 단지 중국이 아니라 주변국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그 존재가 빛나는 국가입니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국몽(中國夢)이 중국만의 꿈이 아니라 아시아 모두, 나아가서는 전 인류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을 함께 할 것입니다."


400여 년 전 이 땅의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 대신(大臣)이 명나라 황제 앞에서 머리 조아리며 바쳤을 듯한 찬사(讚辭)의 내용이라 가슴 섬뜩하였다. 중국몽은 중국이 세계와 더불어 조화(調和)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어 주변을 다스겠다는 시대착오적 야망(野望)이다. 그 중국의 야망에 굴복하여 함께 소중화가 되겠다는 비굴한 아부의 찬사를 그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한국 지도자의 이름으로.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문명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우리가 유사(有史) 이래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력을 갖췄는데 역사 상 처음으로 중국과 대등하거나 앞선 진보(進步)를 이뤘는데, 이 땅의 지도자란 인물들은 수백 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중국의 눈치를 보고 중국 바라기를 하고 중국의 힘에 빌붙어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힘에 굴복했다기 보다는 그들이 믿고 숭상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종주국(宗主國)이 중국이라 생각한 까닭일 것이다.


남한산성 성곽길 돌다 어느 그늘진 성곽에서 이끼 긴 성돌 어루만지자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죽어서 살자는 이들과 살아서 내일을 보자는 이들의 다툼. 그들이 공통적으로 저지른 역사적 죄악. 그리고 지금도 중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려는 자들과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의 모습이 파노라마 되어 성벽에 펼쳐졌다.


허망하였다. 슬펐다. 우리가 오랜 세월 이룬 역사가 우리가 피땀 흘려 쌓아 올린 문명적 진보가 한낱 여름날 뜬구름이었나 싶었다. 그런 무거운 마음 안고 남한산성 성곽을 한 바퀴 돌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일시 : 2018년 6월 10일. 해의 날.

   

나는 지금 부산 사람이다. 평일에는 부산에 거주하고 주말에만 집에서 지낸다. 팔자에 없는 주말 부부 생활을 직장 생활 말년에 하게 된 것이다.


매주말 KTX편으로 광명까지 돌아 오는데 KTX가 빠른 교통 수단이기는 해도 워낙 먼 거리라 피로감이 꽤 깊다. 때문에 토요일은 늘 늦잠을 자게 된다. 주중에 밀린 잠을 몰아 자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계속 해오던 야영 산행을 할 여력이 없다. 그런 생활이 서너 달 넘게 계속 되었다. 야영을 못가니 먼 곳의 산을 찾는 일도 안하게 된다. 그렇다고 산에 미친 사람이 산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 자연 다른 대안을 찾게 된다.


그런 대안으로 수도권에 있는 여러 성곽을 돌아볼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지난 초봄에 첫 번째로 오산의 독산성을 한 바퀴 돌았고 이번에는 성남의 남한산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가까운 곳이니 느긋하고 한가하게 준비하여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남한산성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외곽순환도로 타고 가다가 성남나들목으로 나와 3번 국도를 탔다. 갈마터널 가기 직전에 국도를 벗어나 성남으로 들어갔다가 남한산성 길을 따라 올라 갔다. 주말이라 산성을 찾는 나들이 차량들이 꼬리를 물었다.


차량들 따라 올라 가다가 남문 가기 전에 갓길 주차장이 있어 그곳에 주차하고 산행 준비를 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갈 작정이었는데, 도로 아래로 못 보던 길이 나있다. 남한산성 둘레길이 새로 생긴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위로 올라 갔다.




# 숲길 따라 올라가니 자동차 매연에 시달릴 일 없어 좋다.




# 산성 터널을 만났다. 예전에 자전거 타고 남한산성을 업힐 했을 때는 저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 터널 우측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남문이 나온다.




# 남문은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의 출입문이다. 호란(胡亂) 당시 인조는 이 남문을 통해 산성으로 피신했다. 선조 때 동문과 함께 수축(修築)했다는 기록이 있다.




# 지화문(至和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정조 때 성곽을 개축하면서 지화문이라 불렀다는 기록이다. 조화와 화합을 이룬다는 뜻인 듯한데, 척화와 주화의 화합을 꿈꾸었나 보다.



# 이 느티나무는 너무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이제는 부축을 받아야 하늘을 바라보고 땅에 뿌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나이를 파악 못해 이 나무가 전란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남문 우측에 누비길이란 팻말을 단 등로가 열려 있다. 지도 열고 확인하니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인데 그늘로 되어 있는 듯하여 일단 그 길로 가보기로 했다.




# 과연 성벽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이곳 성벽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옛날 호란 당시의 성돌인 듯하였다.




# 파란 이끼 낀 성벽에 손을 얹어 보았다. 호란 당시 이 성벽 위에서 성 아래 오랑캐 무리를 내려다보았을 군졸들의 참담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삭풍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 추위보다 몇 배나 더 컸을 공포와 두려움에 그들은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때의 곤난(困難)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전쟁을 불러온 지배층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주화와 척화로 나뉘어 무력한 임금 앞에서 내부 전쟁을 했다. 그것이 1636년 이 땅 조선의 모습이었다.




# 잠시 걷자 길이 우측으로 꺾이는 곳에 쉼터가 나온다.




# 제1 남옹성 앞에 있는 쉼터이다. 옹성(甕城)은 성벽에 접근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돌출부를 말한다.




# 그런데 누비길은 옹성을 지나자 바깥으로 멀어져 버린다. 그리고 그곳에 포장 도로가 나타난다.




# 지도를 확인하니 7암문으로 연결된 도로이다. 누비길을 버리고 도로를 따라 산성으로 돌아갔다.




# 남한산성에는 열여섯 개의 암문(暗門)이 있다. 이곳은 그 중 7암문이다.




# 이곳은 남한산성 남쪽 암문 중에 가장 활용도가 높았던 암문이다.





# 성안으로 들어가자 곧 성벽길이 나타난다.





# 원래 계획했던 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성벽길을 따르기로 했다.



# 성벽 위에는 뙤약볕 강렬하였다.




# 남장대가 다음 포스트이다.




# 금계국 노랗게 피어 배경이 되어 준다.




# 검단산이 건너다보인다. 저 산은 팔당에 있는 검단산과는 다른 산이다.





# 성남 은행동 일대의 인간세도 내려다보인다.




# 긴 오르막 위에 남장대가 있다.




# 남장대(南將臺)는 산성의 다섯 장대 중 남쪽에 있던 지휘소이다. 전쟁 당시에는 주요 지휘소였겠지만, 지금은 허물어지고 주춧돌만 남았다.






# 남장대 앞은 제2 남옹성이다.




# 남장대를 지나 다시 성곽을 따른다.





# 지금 남한산성 일대는 금계국 노란 꽃이 만발하다.




# 용마산, 검단산 거쳐 한강 이북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첩첩으로 겹쳐져 있다. 




# 9암문이다.





# 구불구불 산허리를 휘감는 성벽이 용틀임하듯 장대하다.




# 망월사가 건너다보인다. 산성 안에는 모두 열 개의 사찰이 있는데, 그 중 망월사가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곳의 불상과 경전 등을 옮겨 창건하였다 한다.




# 내리막을 길게 내려가면 동문이 나온다.




# 동문은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가장 큰 도로가 지나고 있다. 도로 이름은 남한산성로이다.




# 도로 뚫리면서 성벽은 끊어졌고 인마(人馬) 드나들었을 성문은 상징적으로만 열려 있다. 동문은 옛시절에는 가장 사용 빈도가 높았던 성문이다.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불렀다. 왕이 정사를 보던 행궁을 기준으로 좌측에 있기 때문이다.




# 동문 좌측 오르막을 따라 올랐다.




# 돌아보면 동문 건너 성곽은 수풀 우거져 트인 공간으로만 보인다.




# 동문 이후의 성벽은 경사가 급하여 숨이 가빠지게 만든다.



# 이곳은 지금 성벽 보수 중이다.




# 공사로 어수선한 곳에 송암정이라 적힌 팻말이 서 있다. 송암정(松岩亭)이니 소나무 우거진 바위 곁에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하기로는 정조대왕이 바위와 어우러진 소나무의 빼어남을 기려 옥관자를 붙여주라 하명하였다고도 하고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에서 수도하다가 팔도 유람에 나서 이곳을 지나다 자신을 희롱하던 한량들을 크게 꾸짖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그러나 자료 찾아보니 정조가 소나무에 대부송이라 벼슬을 내린 기록은 없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였다거나 김삿갓 처럼 팔도를 유람했다는 기록도 없다. 아마도 말 하기 좋아했던 뒷사람 중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 인 듯하다. 다만 지금은 정자와 소나무는 사라지고 바위만 그 자리에 남았다.




# 성벽은 경사로를 따라 길게 위로 이어진다.




# 성벽 우측으로 남한산 정상이 건너다보인다.

 



# 성벽은 잠시 도로와 나란해진다.




# 이 도로는 장경사 주차장으로 이어진 도로이다. 장경사는 인조 당시 산성을 수축할 때 승군들의 숙식과 훈련이 이뤄지던 군막 사찰이었다.




# 장경사를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바람 좋은 쉼터가 있다. 짐 내리고 한숨 돌렸다.





# 시원한 바람으로 거풍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가파른 오르막이 길게 이어진다.




# 오르막 중간에 제2암문이 있다. 이곳 암문은 진짜 암문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작고 은밀한 곳이다.





# 성벽은 산 위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공제선(空際線)에서 산줄기가 우측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 우측 끝이 남한산 정상이다.






# 공사 때문에 이곳의 성곽도 약간 어수선하다.




# 경사 가파르다. 제법 힘이 들게 만든다.




# 그 경사 끝자락에 군포지가 있고 보수 공사로 길을 막아 두었다.




# 군포(軍舖)는 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초소이자 숙소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 한다. 실록을 보니 포(舖) 하나에 다섯 명 정도의 군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 다시 조금 오르면 성곽이 좌측으로 꺾이는 봉우리가 나온다. 동장대터(東將臺址)이다. 수어청 소속의 5영 중 좌영장이 지휘하던 곳이라 한다.





# 산성은 이곳에서 바깥으로 거대한 옹성 모양의 외성을 거느리게 된다. 남한산성의 외성은 남한산의 벌봉을 중심으로 한 봉암성과 한봉까지 이어진 한봉성으로 되어 있다. 동쪽 성벽과 봉암과 한봉 사이에 들어온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하기 위한 구성이다.


그러나 호란 당시에는 이 외성이 없었다. 외성 중 봉암성은 숙종 12년에 쌓았다. 벌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이름지어진 벌봉은 남한산성보다 높다. 벌봉 정상에서는 산성이 내려다 보인다. 호란 당시 청군은 이곳 벌봉에 홍이포(紅夷砲)라는 대포를 설치하여 산성 안으로 포탄을 발사하였다. 송파 들판을 가득 메운 적병 보다 벌봉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이 더 컸다. 때문에 인조와 조선은 항복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조선의 항복을 불러온 홍이포가 청나라 무기가 아니라 조선의 무기라는 사실이다. 청나라 군대가 임금이 도망친 한양 도성에 들어가 살피니 창덕궁에 홍이포 20문이 보관되어 있었다. 도망가기 바빠 결정적 무기를 내버려 두고 간 것이다. 이래저래 조선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였다.





# 여장은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쏘기 위한 구조이다. 그런데 시멘트로 어설프게 복원하였고 그나마도 낡아 허물어지고 있다.




# 동장대부터 성벽은 북쪽을 향하게 된다.




# 동장대 바로 곁에 제3암문이 있다.




# 3암문을 통해 외성으로 연결된다. 남한산 정상을 가보기 위해 암문을 나섰다.






# 봉암초암문을 통과했다. 산성에 있는 열두번 째 암문이다.





# 이곳 외성은 찾는 이가 잦지 않은 모양이다. 길이 좁고 수풀 우거져 있다.




# 잠시 수풀 헤치고 가면 벌봉 정상이 나온다. '남한산'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 민둥산이었을 예전에는 산성 안이 한눈에 들어 왔을 테지만, 산림 우거진 지금은 산성쪽 조망은 없고 성 바깥으로만 조망이 열려 있다.





# 용마산과 검단산이 건너다보인다.





# 산줄기는 검단산으로 이어져 검단지맥을 이룬다. 오랜 산동무인 초은 어르신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얼굴 뵌지 오래인데 표지기나마 반갑기 그지없다.




# 성벽은 지맥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 정상 바로 아래 숲속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막걸리 한 잔 마시며 한숨 돌렸다.




# 기와 파편이 숲 이곳저곳에 널려있다. 외성 축조 이후 것일 테니 숙종조 무렵의 기와일 것이다.




# 간식 먹으며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 왔던 길 그대로 돌아 산성으로 돌아갔다.




# 봉암초암문 다시 통과.




# 산성으로 복귀하여 북쪽 성벽을 따라 진행했다.




#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서어나무 한 그루가 울끈불끈한 근육질 몸매를 선보이고 있다.




# 잠시 그 나무와 교감하였다.




# 성벽이 아래로 내려 가는 길목에 조망이 열리는 곳이 있다.




# 바로 아래 하남과 멀리 송파와 잠실 일대의 인간세이다.





# 성벽은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져 내린다.




# 그 경사 끝자락에 제4암문이 있다.




# 이 암문은 북암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 성벽은 다시 멀리 이어진다.




# 산 정상부를 구불구불 길게도 이어놓았다. 정말 이곳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이다. 호란 당시 임금과 중신들이 제대로 준비하고 단합하였다면 절대로 함락되지 않았을 곳이다. 





# 북문을 포스트로 길게 진행하였다.




# 제1군포터. 산성 내에 125개의 군포가 있고 각 군포 당 5명의 군사가 번을 섰다면 상시 600여 명의 병사가 수어청이나 장대, 그리고 각 문과는 별개로 경계 근무를 섰다는 얘기다. 




# 전방으로 하남시가 내려다보인다.





#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성벽을 지키고 있다.




# 긴 내리막 아래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전승문(戰勝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문을 따라 한강의 수운을 통해 옮긴 세곡을 성 안으로 지어 날랐다.




# 북문을 지나면 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 예상 외로 긴 성벽이라 마눌은 조금 힘들어 하였다.




# 잠시 허리 편 후 다시 기운내어 성벽을 따랐다.




# 오르막 끝에 흔적만 남은 북장대가 나온다.





# 북장대 이후의 성곽길은 넓은 신작로 수준의 길로 바뀐다. 길 순하고 넓으니 자동차 편으로 산성에 놀러온 관광객들도 많이 만난다.




# 그들과 뒤섞혀  편안하게 잠시 진행하였다.




# 그러다 다시 길은 둘로 나뉜다. 편안한 길과 가파른 성곽길로.




# 우리는 우측 성곽길을 택했다.





# 가파른 계단길이 길게 이어진다.




# 그 오르막 끝에 제5암문이 있다.






# 이 암문을 통해 연주봉 옹성이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고 그 너머로 금암산 거쳐 하남으로 이어진다.




# 성벽의 북쪽 끝을 향해 출발.




# 조망이 잠시 트인 곳이 나오고 잠실벌이 내려다보인다.




# 그곳에 매탄터가 있다. 숯을 묻은 곳이란 뜻이다. 숯은 오래된 주요 열원(熱源)이었다. 숯을 확보해야 조리와 난방이 가능했다. 일반 군졸이나 백성에게 난방이 허락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 성벽은 매탄터에서 서쪽으로 구십 도 꺾인다.




# 전방으로 잠실 일대의 시가지가 조망된다.




# 우측으로는 옹성에서 이어진 금암산 줄기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 조망 감상하는 이들이 많다.




# 성벽 아래에는 조망 좋은 데크가 있다.




# 오랑캐 무리 빽빽했을 들판에 세월 흘러 성냥곽 같은 아파트 물결 넘쳐난다. 제2롯데월드 건물은 서울 어느 곳에서도 조망되는 상징 탑이 되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탑 같기도 하고.




# 관악산과 청계산이 구름 아래 우뚝하다.




# 한강 너머 삼각산과 도봉산, 그리고 우측에 수락산, 불암산도 보인다.




# 우측 멀리로는 천마산, 축령산, 서리산 일대의 산줄기도 보인다.





# 시원한 조망에 끌려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다.




# 다시 성벽을 따르면 서문이 나온다.




# 서문은 우익문(右翼門)이라 불렀다. 송파나루로 내려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인조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러 삼전도로 내려갈 때 이 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떠났다. 우익문이 아니라 치욕의 문이라 불러야 할 곳이다.




# 서문의 조망이다. 청계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 서문을 지나 내려가면 북장대 지나 헤어졌던 넓은 길과 다시 만난다.




# 그 언덕 위에 청량산과 수어장대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의 중심 장대인 서장대의 별칭이다. 행궁 바로 뒤에 있는 청량산 정상에 있다.




# 수어장대는 예전에 여러 차례 다년 간 곳이다. 좌측으로 몇십여 미터만 가면 나올 곳이지만, 마눌이 너무 힘들어 해 그냥 멀리서 눈으로만 보았다.





# 여섯번 째 암문인 서암문 통과.




# 성곽길은 전체적으로 고도를 낮추고 있다.




# 그러다 다시 고도를 높인다.





# 그 오르막 위에 영춘정이란 정자가 있다.





# 산성의 남쪽 성곽과 검단산이 건너다보인다.





# 다시 출발이다.




# 남한산성은 마냥 쉬운 코스만은 아니다.




# 성남과 분당의 인간세, 그리고 그 너머로 광교산, 청계산, 관악산이 건너다보인다.






# 전방의 막인 데 없는 조망 감상을 한참 하였다.




#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




# 산성의 남서쪽 성벽을 따라 길게 내려갔다.





# 그 끝에 단풍나무 숲이 있다.




# 그 안쪽은 소나무 숲이다.




# 그 숲에 잇닿아 남문이 나온다.




# 남한산성 성곽길 출발지였던 지화문으로 복귀한 것이다. 전체 7,545m 길이의 성곽을 온전히 한 바퀴 돈 여정이었다. 





# 지화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




# 남한산성의 오욕을 함께 겪었을 정자나무와도 작별하였다.




# 산성길로 복귀.





# 도로 아래에 있는 둘레길로 다시 내려섰다.




# 주차장으로 돌아와 남한산성 성곽길 순례를 완성하였다.



그렇게 오산의 독산성에 이어 남한산성 성곽길을 걸음으로써 성곽길 두번 째를 완료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함은 역사의 반복성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에 굴복해 임금이 항복하고 적국의 수괴 앞에 머리를 조아린 치욕의 역사 현장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치욕은 외세의 탓이라기 보다는 우리 내부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작도 과정도 마무리도 모두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가 불러온 참화(慘禍)였던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실질 보다는 명분에 집착했고 국제적 흐름에 무지하였으며 스스로 자강(自彊)하기보다는 명나라라는 대국의 그늘 아래 있고자 하였고 단결하기보다는 무리지어 분열하였다.


역사는 늘 반복된다. 문명 발달하고 진보 이뤄내어 유사 이래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력을 가졌다 자부하는 오늘에도 우리는 400여 년 전 그날의 남한산성의 혼란과 내분처럼 분열되어 있으며 위태롭다.


민초는 원래 죄가 없다.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문제였다. 그들의 무능과 무지와 오만함과 왜곡된 세계관 때문에 나라는 늘 위태로웠고 그 피해는 항상 백성의 몫이었다. 사백 년 전에는 준비없고 분열된 무리들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고 지금은 무능하고 이념적으로 왜곡된 무리들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그 피해는 온전히 국민의 몫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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