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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앵자봉/鶯子峰-금슬지산(琴瑟之山)! 본문
삼십여 년이 다 되어 가는 옛이야기다. 나는 그때 낚시꾼이었다. 낚시에도 여러 장르가 있는데 그때 내가 주로 하던 낚시는 우리 고유의 낚시 방법인 견지낚시였다. 견지는 파리채처럼 생긴 작은 낚싯대를 가지고 강물 한가운데 들어가서 여울 속의 물고기를 낚아내는 전통낚시이다. 강물 속에 들어가는 낚시라 깨끗한 강물과 물살 빠른 여울이 필수다. 주로 남한강이나 북한강, 또는 금강과 섬진강 등 아직 수질 깨끗하고 여울 살아있는 강계(江界)가 주 대상지이다. 어느 해인가 장마가 오래 계속된 때가 있었다. 장마철에는 흙탕물이 지고 수량 많아 여울이 사라진다. 그래서 큰 강의 강계에서는 낚시를 못 하고 지류를 찾게 된다. 그때 대부분의 강은 범람 수준이어서 양평의 흑천(黑川)에서 마눌 대동하고 견지낚시를 했다. 큰 기대를 안고 흑천을 찾았는데 지류라고 해서 장마에서 자유롭지는 않아 흑천에도 수량이 너무 많았다. 오전에 서너 시간 강물 속에 들어가 견짓대 들고 시침질을 했지만, 조과가 영 시원찮았다. 결국 반나절 만에 포기하고 낚시는 접었다. 대신 인근에서 좀 놀다 가자 했는데, 강하면 쪽 강변도로 타고 가다가 퇴촌으로 가기 전에 '천진암(天眞菴)'이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천진암이면 사찰일 테고 사찰은 대부분 산속에 있거나 계곡을 가지고 있을 테니 저곳에 가서 좀 쉬었다 가자 싶었다. 그때는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휴양 문화가 지금처럼 일반화되지 않아 천진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퇴촌 관음리의 계곡을 따라 깊게 들어가니 우산리가 나오고 그 끝에 천진암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하고 사찰 구경하러 나섰다가 우리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천진암이 사찰이 아니고 천주교 성지(聖地)였던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싶었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그것이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좀 쉴 곳이 필요했는데, 계곡도 없고 공사로 어수선하기도 해서 차 돌려 내려오다가 관음리 어느 계곡에서 좀 쉬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천진암과의 첫 조우(遭遇)였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천진암 앞을 지나다녔지만, 따로이 인연을 맺을 기회는 없었다. 세월 흘렀다. 강산이 세 번은 변할 만큼 시간이 잘 흘렀다. 나는 산꾼이 되었고 이 땅 구석구석 여러 산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눈 내리는 겨울 여주 '양자산(楊子山)' 잣숲에서 하룻밤 잣향기 맡으며 야영하였다. 그리고 뒷날 길 없는 산 사면을 치고 올라 양자산 정상에 올랐다. 무거운 등짐과 쌓인 눈 때문에 힘든 등정이었다. 눈 덮인 겨울 산하는 쨍하게 강렬하였다. 산줄기는 흰 눈을 뒤집어쓰고 하얗게 뻗어 나가고 마루금에서 갈라지는 능선은 희고 검은 색이 대비를 이루며 강인한 근육을 자랑하였다. 그때 주어재 너머 광주 방향으로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눈에 들어왔다. 양자산과 나란한 '앵자봉(鶯子峰)'이었다. 한남정맥에서 갈래친 앵자지맥이 지나는 산이라 언젠가는 저 능선을 걷지 싶었다. 그때를 대비해 자료 준비하는데, 산 그 자체보다는 그 품속에 '천진암(天眞菴)'이라는 천주교 성지를 품고 있는 것으로 더 유명하였다. 18세기 세계는 근대화와 시민 사회의 시기였다. 1776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시민사회의 기초가 되었다. 1772년 제임스 쿡 선장은 남극권 항해를 했고 1796년 제너는 종두법을 완성했다. 이 시기 중국은 건륭제(乾隆帝)가 60년 장기 재위에 있으면서 중국 최후의 대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뤘고 일본은 에도 막부 중기로 중상주의를 표방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증대하고 그 결과 난학(蘭學)이 융성하였다. 이렇게 세계만방(世界萬邦)이 근대화와 신문명을 일궈나가는 동안 조선은 여전히 주자학적(朱子學的) 세계관에 사로잡혀 소중화(小中華) 의식과 실용 없는 명분(名分)에 집착하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젊은 선각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쇄국의 땅 조선에도 신문명에 깨어난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청나라를 통해 전해진 신문명에 학문적 열정으로 집중하였다. 그것이 서학(西學) 즉, 천주학(天主學)이었고 그 젊은이들은 권철신(權哲身),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 정약종(丁若鍾), 정약전(丁若銓) 등 이었다. 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처음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 천주학에 열중하였다가 이승훈이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또 차례차례 세례를 받으면서 천주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전통적 가치를 배격하고 유일신을 믿는 천주교는 용납될 수 없는 신앙이었다. 그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각자의 그 후 처신, 그리고 저마다의 다른 최후는 역사에서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이후의 과정과는 별개로 젊은 그들이 순수한 학문적 열정과 처음 눈 뜬 새로운 신앙에 감격하던 강학(講學)의 장소가 바로 '천진암(天眞菴)'이다. 현재 천진암에서 제공하고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 사찰은 원래 고조선 시대까지 연원이 올라가는 고대 신앙의 장소였는데, 이후 사찰이 건립되어 운영되다가 1779년 전후에 폐찰(廢刹)되었던 것을 이벽, 정약용 등이 은밀히 천주학 강학을 위해 이용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한 남종삼(南鐘三)의 손자인 남상철(南相喆)에 의해 절터가 확인되고 천주교 수원교구가 중심이 되어 이 일대를 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결국 은밀한 강학과 신앙의 장소이자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였던 천진암이 종교의 자유 만발한 현재에도 상징으로서의 처음 그 이름 그대로 존재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조선 후기 최고의 천재이다. 다산은 천진암 강학의 주요 멤버였다. 다산에 있어 천주교는 학문의 대상이자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변절로 인한 오욕의 과거였고 18년 유배(流配)의 원인이었고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그의 일생을 좌우한 이념의 잣대였다. 그의 기록에 천진암이 자주 등장한다. 다산의 기록에 등장하는 천진암은 교우(交友)의 장소이며 강학(講學)의 장소였다. 기록들은 이렇다.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走魚寺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석재기해동 강학우천진암 주어사 설중이벽야지 장촉담경 ;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눈 속에 이벽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새며 했다" "天眞菴賞楓 // 買酒花郞坊裏 停車鸎子峰陰 一夜??白雨 兩厓欇欇紅林(천진암상풍 // 매주화랑방리 정거앵자봉음 일야섬섬백우 양애섭섭홍림 ; 화랑방 안에서 술을 사서 앵자봉 그늘에 수레 멈추네, 밤새 부슬부슬 비 내리니 두 기슭 단풍들어 붉은 숲 되었네)" 두 번째 시에서는 천진암과 더불어 '앵자봉(鸎子峰)'이란 이름도 등장한다. 앵자봉은 바로 곁에 있는 양자산(楊子山)과 함께 광주(廣州)와 여주(驪州)의 옛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산이다. 두 산은 나란히 있으면서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하나로 묶여서 기록에 등장한다. 양자산이란 이름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그에 관련된 동여도(東輿圖) 및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 등에 등장한다. 반면 앵자산이라는 이름은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輿地圖)와 광여도(廣輿圖) 등에 등장하고 개인의 문집이나 옛 기록에도 앵자산 혹은 앵자봉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찾아진다.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이란 숙종과 영조 연간의 문인화가가 있다. 그는 1만권의 장서(藏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 조선 최고의 애서가(愛書家)였다. 그의 문집인 '두타초(頭陀草)'에 앵자산의 기록이 있다. 도자기로 유명한 분원(分院)에서의 도자기 제작과정을 노래한 시의 일부이다. "鸎子之北牛川東 南漢山城在眼中 江雲能作連宵雨 峽樹長吹十日風(앵자지북우천동 남한산성재안중 강운능작소우 협수장취십일풍 ; 앵자산 북쪽 우천 동쪽에 남한산성 눈에 보이는 곳, 강 구름은 밤마다 계속 비를 만들고 골짜기 숲에는 열흘 계속 바람이 부네)" 이렇게 기록으로 보면 앵자라는 이름이 먼저 등장하였고 양자는 뒤에 나타났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혼동되다가 1872년 고종 9년에 제작된 지방도에서 비로소 각자의 이름으로 함께 등장한다. 이때 함께 등장하면서 '앵자'와 '양자'의 비슷한 이름으로 나타났다. 이런 예는 흔한 일이다. 금북정맥(錦北正脈) 태안에도 같은 예의 산이 있다. 그 고장에는 '간대산(艮大山)'이란 아담한 산이 있다. 그런데 그 바로 곁에 양대산(良大山)이라는 산이 또 있다. 간대산은 산의 위치가 풍수지리학 상 '간(艮)괘'에 위치해 얻은 이름이다. 반면 양대산은 특별한 유래가 없다. 오랜 세월 속에 누군가 간대산 곁에 있는 산에 '간(艮)'자와 비슷한 '양(良)'자를 넣은 산 이름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간(艮)'을 '양(良) '으로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지은 것일 수도 있다. '앵자(鶯子)'와 '양자(楊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앵자의 곁에 양자가 새로이 탄생한 것이다. 앵자(鶯子)는 꾀꼬리이다. 그리고 양자(楊子)는 버드나무이다. 원래 꾀꼬리는 버드나무에서 노니는 법이다. 앵자와 양자의 나란한 등장이다. 물론 전해지는 말처럼 앵자는 산의 모양이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산이어서 얻은 이름이고 양자산은 버드나무 우거진 산이어서 이름이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 땅 곳곳을 두 발로 누비고 다니면서 다양한 산 이름의 유래를 귀동냥한 내 짐작으로는 두 이름의 유사성(類似性)에서 빚어진 일이라 여겨졌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뒷사람들은 앵자와 양자의 나란한 두 산 이름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꾀꼬리가 버드나무에서 노닐고 있으니 두 산이 '부부(夫婦)의 산'이라 풀이하였다. 꿈보다 해몽인 셈이다. 그래서 나쁠 일 없다. 좋은 해몽은 꿈을 가치 있게 만든다. 일부의 주장처럼 천진암이 진짜 천주교의 발상이 아닐지라도 그곳에 드라마틱한 한국 천주교 탄생의 의미를 부여하여 뒷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면 충분한 것처럼 앵자와 양자가 부부를 상징함으로써 이 땅의 많은 부부가 그 산들을 찾아 손 잡고 함께 땀 흘려 부부의 정이 돈독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다. 그리하여 앵자와 양자는 '부부 금슬(琴瑟)의 산'이다! 금슬지산(琴瑟之山)! 일시 : 2018년 6월 17일. 해의 날.
먼 곳 야영산행 못 가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집에서 TV 리모컨 붙잡고 뒹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먼 곳 다니느라 소홀했던 가까운 경기도 일대의 산을 검색하였다. 그러다 문득 앵자봉이 떠올랐다. 몇 해 전 마눌과 양자산 잣숲 야영하면서 양자산 정상에서 앵자봉을 모았던 기억이 생각난 것이다. 그때 주어재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산이 부부의 산이니 언젠가 꼭 저 산도 함꼐 오르자 다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앵자봉은 앵자지맥의 상징적 산이니 나중에 지맥 산행한다면 또 한번 지나가야 할 산인 것이다. 토요일 하루 느긋하게 게으름도 피우고 도서관에서 책도 좀 보고 대형마트에서 시장도 마눌과 함께 보았다. 특히 시장보면서 내일 산에서 함께 나눌 먹거리 장만에 신경 쓰기도 했다. 앵자봉은 접근이 좋은 곳에 있다. 외곽순환도로 타고 가다가 성남나들목에서 3번 국도로 갈아탔다. 다시 광주에서 퇴촌 거쳐 관음리와 우산리로 들어가면 천진암 주차장이 나온다. 집에서 한 시간 이십여 분 걸렸다. 앵자봉/鶯子峰 경기도 광주시의 동부 퇴촌면 우산리(牛山里)에 위치한 산이다(고도:670m). 실촌읍과 여주군 산북면, 양평군 강하면의 경계이다.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산세'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양자산(楊子山)이, 서쪽으로는 무갑산(武甲山)과 관산(冠山)이 내려다보인다. 북쪽으로는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天眞庵)이 자리하고 있다. 『중정남한지』에 '양자산은 퇴촌면에 있으며 일명 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 앵자산(鸎子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에는 앵자산이 용진(龍津:북한강) 강변에 천진암, 분원 지명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앵자산이 상우산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산(蘇山)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전한다.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앵자봉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광여도(廣輿圖) 광주부 지도. 앵자산이 천진암과 분원 그리고 우천 등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 천진암 주차장이 아주 넓다. 천진암은 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데, 오후 다섯 시면 문을 닫는다고 적어 두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오후 한 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세 시간 반 이내에 산행을 마쳐야 한다는 얘기다. # 천진암 성지 너머로 앵자봉이 올려다보인다. 거리가 꽤 멀다. 세 시간 이내에 돌아 올 거리가 아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출발했다. # 우리가 산행 시작하는 이 시각에 다른 팀들은 벌써 하산 완료하고 있다. 우리가 참 늦기는 하다. # 주차장 우측에 갈림길이 있다. 경기도 청소년야영장 방향이다. # 앵자봉까지는 5.1km 거리다. 올라가는 데만 두 시간 반이라는 얘기다. # 청소년 야영장은 청소년만 야영 가능한가? # 경사진 도로 따라 위로 올라가다가 청소년 야영장 입구에서 우측 길로 갈라졌다. # 개인 사유지임을 알리는 경고판과 철조망 대문이 있다. # 이 산은 곳곳에 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과 철문이 많다. # 길이 우측으로 꺾이는 곳에 이정표가 있다. # 이 길로 올라가면 능선 갈림길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앵자봉 방향과 관산, 다시 무갑산으로 갈라지게 된다. # 능선을 목표로 계속 오르다 잠시 쉬면서 오룩스 맵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미리 담아온 트랙과는 많이 벗어나 있다. 가만 살펴보니 내가 담아온 트랙은 야영장 뒤 계곡길로 오르는 코스이고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능선길이다. # 트랙따라 걷기로 하고 왔던 길을 도로 내려 갔다. 좀 전에 지나쳤던 이정목 뒤로 등로가 열려 있다. #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이 숲속에 들어가자 뚜렸하다. # 숭실대학교 연습림 표식이 서 있다. # 참으로 철문이 많은 산이다. 무얼 그렇게 막고 차단하려나? # 계곡길이라 햇볕에서 벗어나 한결 낫다. 다만 체온 오르니 땀범벅 되는 것은 능선이나 계곡이나 마찬가지다. # 잠시 길이 헷갈리는 곳도 있었다. # 작은 계곡을 지났다. # 먹을 수 있는 물은 아니다. 정수를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 잣숲도 있다. 경사가 있어 야영자리로는 마땅치 않았다. #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아 한참 우회해야 하는 곳도 있다. # 꾸준히 올라 능선에 도착하니 거대한 송전탑이 기다리고 있다. # 드디어 능선 갈림길에 도착했다. # 그곳에서 오늘 첫 산객을 만났다. 저들은 갈림길에서 한참 의논하더니 그냥 능선 따라 내려 갔다. # 우리는 정상을 향해 진행했다. # 잔봉이 꽤 여러 있었다. # 물박달나무. 백두대간 소백구간에 있는 선달산 정상부에도 물박달이 아주 많았던 기억이 있다. # 잠시 후 잘록한 고개를 만났다. 박석고개이다. # 청소년 야영장 쪽으로 내려가지 못 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 정상까지는 아직 1.36km 남았다. # 송전탑 통과. 정맥이나 지맥에는 송전탑이 많다. 송전탑을 건설할 때 시도 경계나 산줄기를 참조하는 모양이다. # 한 차례 길게 밀어 올린다. # 그 오르막 끝에 작은 탁자로 된 쉼터가 있다. 우리는 정상에서 쉬기로 하고 통과했다. # 다시 오르막 경사의 시작이다. # 계단식으로 두어 차례 밀어올리는 형태이다. 숲 그늘이지만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 땀이 비오 듯하였다. # 꾸준히 밀어올리자 정상이 나왔다. # 제법 넓은 공간을 갖춘 정상이다. # 제대로 규모를 갖춘 정상석을 가지고 있다. 건너편 양자산은 검은색의 얇은 대리석 정상석을 가진데 반해 이곳은 화강암 재질의 정상석을 세워두었다. # 조망 안내도와는 달리 박무때문에 앞 줄의 관산, 무갑산, 소리봉 정도만 구별이 가능하다. # 근거 없는 앵자봉의 유래가 적혀 있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설(說)이 있다고만 했으니 책임은 없는 셈이다. 각시봉이란 말도 전설이라고 했으니 마찬가지다. 뭐, 그래도 좋다. 꿈보다 해몽이다. 이 말 믿고 이 산을 찾은 부부들이 금슬이 돈독해진다면 그것으로 되는 일이다. # 햇살 너무 뜨거워 오래 머물지 못했다. 배도 고팠고. 주어재와 양자산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 정상 바로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곳은 바람골이다. 좋은 바람 놓치기 싫어 짐 내리고 아주 늦은 점심상을 차렸다. # 돼지고기 볶고 가오리 삶아 왔다. 막걸리 안주로 그만이다. 바람 좋은 곳에서 맛난 술 한 잔 나눴다. # 쉬는 동안에 오늘 산에서 만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산꾼이 지나갔다. "보기 좋습니다. 이 산은 부부 금슬이 좋아지는 산이랍니다." 이 말 남기고 술 한 잔 권할 기회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어쨌거나 이 산이 부부 금슬 좋아질 여러 여건 충분한 산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 하산길은 제법 가팔랐다. # 그러나 숲 건너를 보니 그냥 내려가기만 하는 산은 아니다. 저 능선을 다시 올라야 한다는 말이다. # 중간중간 잘록한 고개를 만난다. 대부분 고개는 좌측 천진암으로 연결되는 고개이다. 그런데 출입금지 안내판은 빠지지 않고 있다. # 숲 건너에서 보았던 능선을 향해 치고 오른다. # 꾸준히 올리면 넓은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한다. # 갈림길이 있다. 그러나 역시 좌측으로는 출입금지이다. # 다시 헬기장을 만났다. # 이정목이 서 있다. # 그 아래에 누군가 등산로 표식을 해 두었고 또 누군가 폐쇄라고 적어 두었다. # 다시 헬기장을 만났다. # 이정목에는 우측으로 우회하라고 표시되어 있다. # 이곳에서 길은 해협산 방향과 양자산 방향으로 크게 갈라지는 것이다. 양자산 방향으로 가면 중간에 주어재에서 주어리로 하산할 수도 있다. # 일단은 해협산 방향으로 하산한다. # 잠시 후 다시 갈림길을 만났다. # 이정목에는 해협산 방향과 좌측으로 등로 폐쇄가 기록되어 있다. # 일단은 등로를 따랐다. # 잠시 후 다시 능선 갈림길을 만났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온 트랙에는 이정표 방향이 아니라 폐쇄된 소로 방향으로 하산하라고 표시되어 있다. 또 그 길 방향으로 표지기도 매달려 있다. 지름길인 모양이다. 한편 우리는 지금 시각에 쫓기고 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자 천진암 측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다들 주차장을 떠났는데 우리 차만 서 있으니 전화를 한 것이다. 자기들 퇴근하니 차를 빼지 못할 수도 있다고 독촉이 심하였다. 얼른 뛰어 내려가겠노라 대답을 해 두었다. 그래서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 이 길로도 많이 다니는지 길이 잘 나 있었다. # 그러다 갈림길이 나오고 트랙은 좌측 사면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한다. # 그런데 그 길부터가 문제였다. 갑자기 숲속에서 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트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숲속에는 길이 없고 잡목만 무성한 것이다. # 길 없는 사면에서 한참을 헤맸다. 나 혼자면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헤쳐나가는데 마눌과 동행하고 있으니 걱정도 많고 마눌 다칠까봐 염려도 많다. 겁 많은 마눌은 어두운 숲에서 꽤 근심걱정하였다. # 그래도 어찌어찌 방향 잡아 하산하였다. 천주교 박물관 쪽으로 하산한 것이다. # 마지막에 길 없는 어두운 숲에서 꽤 고생하였다. 마눌에게 미안하였다. 트랙 무시하고 그냥 등로를 따랐으면 될 길이었다. # 늦은 시각이라 천진암 내에는 인적이 끊겼다. # 커다란 성모상이 서 있다. 무단으로 들어와 죄송하였노라 말씀드렸다. # 성모상 뒤로 우리가 걸은 앵자봉 능선이 길게 누워 있다. # 천진암은 굉장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 대규모 성전 건립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 주차장으로 하산 완료하였다. 예상대로 우리 차 말고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었다. 입구로 가보니 정문이 폐쇄되어 있다. 손으로 밀어보니 자동문이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어 산중에 있을 때 전화 주신 분에게 전화 걸었다. 하산 늦어 죄송한데 문 개방을 부탁드렸더니 당직자에게 연락 주겠노라 하였다. 잠시 뒤 당직자가 나와 매표소에서 원격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 미안한 일이었다. 당직자에게 번거롭게 만든 것이다. 사과하였다. 애초에 우리가 잘못 생각하였다. 이곳은 종교시설이니 설마 문을 잠그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 멀리 우리가 다녀온 앵자봉 정상에게 작별하고 천진암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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