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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7코스/태화강전망대~염포삼거리-조화(調和)의 강, 태화강(太和江)!! 본문

길이야기/해파랑길

[해파랑길]7코스/태화강전망대~염포삼거리-조화(調和)의 강, 태화강(太和江)!!

강/사/랑 2018. 11. 26. 12:08
 [해파랑길]7코스/태화강전망대~염포삼거리


   

강(江)은 인류 문명의 모태(母胎)이다. 인류는 어머니의 강에 의지해 문명을 꽃피웠다. 깨끗한 물을 공급받아 생명을 유지했고 관개를 통해 농업을 이루었으며 물산을 바탕으로 촌락을 형성했다. 그야말로 아낌없는 모성(母性)의 베품이다.


홍수는 강의 숙명(宿命)이다. 홍수가 나면 강은 범람한다. 범람한 강은 터전 파괴라는 가혹한 시련을 주기도 하였고 상류의 풍부한 토사를 퇴적시켜 비옥한 농토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토지 비옥하니 소출이 증가하고 물산 풍부하니 자연히 파괴를 딛고 일어선 새로운 문명(文明)이 생겨났다.


강은 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천 리 물길을 이룬 강은 상·하류의 촌락을 이어주는 교통로의 역할을 하고 바다로 연결되어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교역로가 되기도 하였다. 문명의 확장이었다. 그리하여 큰 강은 빛나는 문명의 발상(發祥)이 되었다.


한반도의 여러 강도 그러하였다. 이 땅에 뿌리내린 한민족의 여러 갈래는 제각기 알맞은 강을 선택해 그 강에 의지해 저마다의 문명을 이루었다.


한반도의 동쪽 끝 바다와 잇닿아 있는 너른 들판에도 굽이쳐 흐르는 강이 있었다. 그 출발은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쌀바위이기도 하고 능동산 배내고개이기도 하며 고헌산 외항재 혹은 백운산 탑골샘이기도 하다.


여러 출발지에서 시작한 강의 흐름은 언양, 범서를 거치며 몸집을 늘린 후 태화, 학성, 염포를 거쳐 동해와 합일(合一)한다. 길이 47.54km이고 유역면적 643.96㎢로 그 이름은 '태화강(太和江)'이다. 


원래 이 강이 흐르던 고장의 이름은 '굴아화촌(屈阿火村)'이었다. 삼국사기에 그 기록이 있다. "河曲縣 曲一作西 婆娑王時 取屈阿火村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하곡현 곡일작서 파사왕시 취굴아화촌치현 경덕왕개명 금울주 ; 하곡현은 곡(曲)을 서(西)로도 쓴다. 파사왕 때 굴아화촌을 빼앗아 현을 설치한 곳인데, 경덕왕이 임관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울주이다)"


'굴아(屈阿)'란 굽었다는 뜻이다. 강이 구불구불 굽어 흐르는 곳에 있는 고을이란 의미다. 강이 굽이쳐 흐르다 하류에 이르러 너른 들을 이룬 곳이니 문명을 이루기에 알맞아 삼한(三韓) 시대에 이미 촌락을 이루어 부족국가의 형태를 가졌던 것이다.


'태화(太和)'란 이름은 신라 선덕왕 때 고승(高僧) 자장율사(慈藏律師)와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자장이오대소수사리백립 문안어주중 병통도사계단 급대화사탑 이복지용지청 대화사아곡현남 금울주 역장사소창야 ;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립을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과 대화사 탑에 더불어 나누어 모시니, 이로하여 지룡(池龍)의 부탁을 들은 것이다. 대화사는 아곡현 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울주이니 이 또한 자장율사가 창건한 곳이다)"


대(大)는 곧 태(太)이다 대화사는 태화사의 같은 이름이다. 태화사(太和寺)는 선덕여왕 12년인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할 때 중국 태화지(太和池) 곁에서 신인(神人)의 계시를 받아 창건한 절이다.


같은 삼국유사에 다른 기록도 있다. 낭지승운 보현수(朗智乘雲 普賢樹)편의 기록이다. "山之東有大和江 乃爲中國大和池龍植福所創 故云龍淵(산지동유대화강 내위중국대화지 용식복소창 고운용연 ; 영취산 동쪽에 대화강이 있는데, 이는 중국 대화지룡의 복을 심기 위해 만들었기에 용연이라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지통(智通)과 더불어 낭지대사(朗智大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자주 찾아뵙고 예를 드린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태화강의 이름이 중국 대화지에 그 유래가 있다는 것이다.


'태화(太和)'는 원래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태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太和 陰陽會合沖和之氣(태화 음양회합충화지기 ; 太和는 陰과 陽이 합쳐져서 조화를 이룬 기다)" 


'태(太)'는 지극해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상태이고 '화(和)'는 희노애락이 발현되어 절도에 맞으며 노래와 소리가 서로 어울리는 것(音聲相和)을 말한다. 그러므로 '태화(太和)'는 지극한 조화로움을 의미하는 말이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신라 28대 왕이다. 그녀도 태화와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眞德王立 名勝曼 眞平王母弟國飯 葛文王之女也, 秋七月 改元太和(진덕왕립 명승만 진평왕모제국반 갈문왕지여야 추칠월 개원태화 ; 진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 국반의 딸이다. 가을 칠월에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삼국 시기의 세계는 당(唐)나라가 중심이었다. 정치·경제·문화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당이었다. 따라서 당나라에 이웃한 나라들은 모두 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하지만 여왕이 다스린 신라는 비록 당에 예를 표하기는 하였어도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변방의 소국이지만 자주 의식은 굳건하였던 것이다. 그 자주 의식의 표현이 '태화(太和)'였다.


이상이 태화강의 역사이고 태화라는 이름에 얽힌 의미들이다. 역사 깊고 의미 또한 깊은 강이다. 그 깊이 간직한 강은 굴아화촌(屈阿火村)을 포함한 우시산국(于尸山國)이 하곡현(河曲縣)이 되고 임관군(臨關郡)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조에 울주군(蔚州郡)이 되고 다시 울산(蔚山)이 되도록 백이십 리 물길을 유장히 흘렀다. 


우리네 인간의 역사는 세월 흐르고 문명 발달하였어도 고(古)와 금(今)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그리는 역사의 무늬는 그 무리가 뿌리내린 고장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아무리 문명이 진보했다 해도 먹고 사는 일에 다를 바 없기에 인간의 무늬는 고금이 비슷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울산의 풍속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尙武藝 好商賣 稟性剛毅 可以興文而易化(상무예 호상매 품성강의 가이흥문이이화 ; 무예를 숭상하고 상업을 좋아한다. 타고난 품성이 굳세어서 문풍을 일으켜 쉽게 교화할 수 있다)"


울산 지역 사람들이 무예를 숭상하였음은 이곳이 군사도시인 탓이다. 조선 시대에는 울산에 경상좌도의 병마절도사영과 수군절도사영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자연히 문반보다는 무반으로 출세하는 것이 빨랐다.


상업이 성했던 것은 이 고장이 무역항을 가졌기 때문이다. 항구를 가졌으니 해산물의 유통이 활발했고 가까운 염포에 왜관이 있어 왜국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세월 흘렀어도 그 맥락은 변함없었다. 산업화 시대에 울산은 대한민국 중화학 공업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후장대(重厚壯大)한 산업화가 이뤄지니 도시와 공단은 크고 넓어졌으며 그 속을 채운 사람들은 억세고 거칠었다. 


역사적 흐름의 연결이고 이 고장 풍속의 이어짐이다. 상무예(尙武藝)하고 호상매(好商賣)하였던 것이다. 덕분에 울산은 공업 도시의 이미지와 전국 제일의 GDP를 자랑하는 부자 도시의 자부심을 마음껏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사 명(明)이 있으면 암(暗)이 따르는 법이다. 공업화와 산업화의 빛나는 영광으로 모두 들떠있던 사이에 도시는 썩어가고 강은 죽어가고 있었다. 공장에서 뿜어내는 공해 물질이 대기를 채우고 공단과 도심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오·폐수가 강을 오염시켰던 것이다.


산업화 시기의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의 관심사였다. 당장의 개발과 이익을 위해 환경이나 삶의 질 등은 늘 무시되었다. 1962년 울산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각종 공단이 건설되고 인구 유입도 엄청나게 급증하였다. 하지만 공해방지 시설이나 하수처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990년대 태화강은 전국 최악의 수질을 가진 죽음의 강이 되고 말았다. 1996년 태화강은 생물학적산소요구량(BOD) 11.3ppm으로 환경부 수질 환경기준 최하위등급인 5등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시커멓게 썩은 강은 악취를 풍겼고 물고기들은 집단 폐사하였으며 사람들은 강변에서 멀어졌다.


비상상태였다. 더이상 강을 방치했다가는 생태계 전체가 공멸할 지경이었다. 대책이 필요하였다. 최악의 환경 재앙을 맞아 민관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울산시와 시민단체, 그리고 지역 업체들이 함께 힘을 모아 강을 살리기 위한 '태화강 마스터플랜'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생활하수의 유입을 막기 위해 하수와 우수를 분리하여 처리하고 하수처리시설을 강화하였으며 축산농가와 공단의 폐수를 차단하고 강바닥에 퇴적된 오염물질을 정기적으로 제거하였다. 수변공간을 생태공원으로 꾸며 사람들을 불러 들이고 민간단체와 지역업체가 적극적으로 정화 활동에 동참하였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강이 되살아 난 것이다.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폐사하여 충격을 주었던 죽음의 강에 물고기들이 증가하고 물고기를 따라 조류들도 몰려들었다. 5급수 이하의 수질을 보였던 강은 2017년 1.2ppm으로 1등급의 강이 되어 하천 환경 복원의 최우수 사례로 주목받게 되었다. 


십여 년 동안 하수관거 정비와 퇴적 오니 준설(汚泥 浚渫), 수중·수변 정화사업 등 27개 사업에 총 6584억 원을 투입한 결과이고 민관이 합심하여 강 살리기에 매진한 결과이다. 강을 되살리자는 분명한 목표 아래 물적·인적 자원을 집중적이고 효과적으로 집결시킨 성과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인구 집중된 현대의 강은 필연적으로 오염되기 마련이다. 날이 갈수록 강바닥은 높아지고 오염 물질은 쌓여간다. 아무리 조심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해결책은 분명한 목표의 공유와 자원을 집중시킨 관리뿐이다.


현대의 강은 그냥 두면 자연 상태의 생태 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강이 되고 만다. 그것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따른 필연(必然)이다. 그래서 잘 계획된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태화강이 그 원리를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화(太和)는 조화(調和)의 지극한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생명의 강은 강과 사람을 조화롭게 만든다. 해파랑길 7코스는 태화강변을 따라 남북으로 걷는 길이다. 잘 관리된 강물은 맑고 풍부하였다. 강물에는 물고기 떼를 이뤘고 수변공간에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화로웠다.




조화(調和)의 강, 태화강(太和江)!!


구간 : 해파랑길 7코스(태화강전망대~염포삼거리)
거리 : 구간거리(17.1km), 누적거리(155.8km)
일시 : 2018년  11월 25일. 해의 날.
세부내용 : 태화강전망대~ 구삼호교 ~ 태화강둔치 체육공원 ~ 십리대숲 ~ 십리대밭교 ~ 태화루 ~ 태화교 ~ 태화강체육공원 ~ 번영교 ~ 학성교 ~ 동천강/내황교 ~ 억새군락지~ 아산로 ~ 성내삼거리 ~ 염포삼거리.

  

일시적 부산 시민인 나는 매주 금요일 오후에 부산을 떠난다. 전철로 부산역까지 다시 KTX로 광명역까지 그곳에서 마중 나온 마눌 차편으로 귀가한다.


아무리 교통 발달한 세상이라고 해도 너댓 시간은 족히 걸리는 여행이라 늘 지치고 힘이 든다. 일 년 가까이 매주 이런 일정을 반복하다보니 힘에 부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번 주는 귀경을 한 주 쉬기로 했다. 마침 주말에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부산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토요일 하루 업무 보고 나니 일요일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코딱지 만한 숙소에 혼자 있어봐야 그다지 할 일이 없으니 이런 날에는 해파랑길 한 구간 이어가기 딱 알맞다. 마눌에게 연락하여 일정을 알리고 짐 챙겨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울산의 태화강변이다.

 

해파랑길 7코스

 

울산을 상징하는 태화강을 따라 흐르듯 걷다가 바다를 만나는 코스다. 태화강을 따라 다채로운 산책길이 어우러지며, 특히 울산의 자랑인 십리대밭길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강 둔치로 봄꽃들이 만발할 때 태화강의 경치는 절정을 이룬다.


교통편

- 7코스시작점: 태화강전망대
   울산고속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시내버스 337번 이용. 태화강 전망대정류장 하자.
- 시내버스: 407,337번 이용.


택시
- 울산택시 052-216-6999 /학성택시 052-261-7874
- 울산고래콜택시 052-700-1000 /언양콜택시 052-254-4545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해파랑길 7코스 태화강전망대~염포삼거리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사무실과 숙소 사이에 동해선 센텀역이 있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거리인지라 센텀역까지는 한 걸음이다. 휴일이라 역을 이용하는 사람 적다.




# 동해선 열차는 부전역을 출발해 포항까지 가는 코스이다. 이 열차로 울산 가기는 처음이다. 




# 책 좀 읽다가 주변 경치 구경하다가 잠깐 졸다가 하는 사이에 태화강역에 도착했다. 어느 모임에서 단체 여행가는지 고교생 한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열차에 오르고 있다.





# 역 광장이 넓다. 광장 바깥에 버스들이 나래비를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30여 분 기다린 후 태화강변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337번 버스이다.




# 주유소 앞에 정류장이 있다.




# 주유소 좌측에 강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




# 대숲 사이로 샛길이 있고 그곳에 태화강전망대가 있다.




# 강의 수질을 회복한 후 강의 친수(親水) 기능을 살려 이런 전망대를 설치하였다. 산책이나 운동 외에 다양하게 강을 즐길 수 있으니 찾는 이 많다.




# 옛날엔 이곳에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옛나룻배를 재현해 두었는데 실제로 운행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 옛 유물인 나룻배와 신 문명인 마천루가 십리대밭을 배경으로 공존하고 있다.




# 쭉쭉 뻗은 대숲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나오고 있다.




# 벤치에 배낭 벗어두고 잠시 스트레칭으로 몸 풀었다.




# 강 건너 십리 대숲이 우람하다.




# 전망대를 뒤로 하고 해파랑길 7코스를 출발한다. 오늘 구간은 전망대를 출발해 강의 남쪽을 따라 서진한 후 강을 건너고 다시 강의 북쪽을 따라 동진하는 형태이다. 결국 건너편 저 대숲 앞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강 기슭에 수억만 마리의 물고기뗴가 헤엄치고 있다. 자세히 보니 황어 치어 떼이다. 황어는 바다와 민물을 오가는 물고기이다. 성장기를 바다에서 보낸 황어는 연어처럼 모천(母川)으로 귀환해 산란한다. 이 넘들은 강 상류에서 부화한 황어 치어 무리들이다.




# 공사 중인 다리 통과.




# 강 중앙에 가마우지 무리가 사냥 중이다. 가마우지는 원래 철새이다. 중국 이강에서 물고기잡이에 사용되는 사냥의 명수들이다. 그런데 몇해 전부터 우리나라 곳곳에 아예 터를 잡고 눌러앉아 텃새가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는 두 무리의 가마우지 조직이 있다. 하나는 팔당댐 아래에 머무는 팔당파(派)이고 나머지는 수원 서호에 있는 서호파이다. 이들은 원래 잠수의 귀재라 탁월한 물고기 사냥 솜씨를 자랑하는 녀석들이다.




# 수크령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 길게 걸어 구삼호교로 접근하자 각종 물새들이 무리지어 쉬거나 사냥 중이다.




# 청명한 가을날이다. 홀로 콧노래 부르며 길게 서진하였다.





# 새 삼호교가 생기면서 오랜 옛 다리는 구 삼호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4년에 건설된 태화강 최초의 현대식 다리였다.




# 황어 치어가 어찌나 많은지 그야말로 물반 고기반이다.





# 강을 건너 북쪽 강변을 따라 동진하게 된다.  건너편 산줄기가 6코스 때 걸었던 삼호산 줄기이다.




#노거수 한 그루 역광을 받고 우뚝하다.




# 하얀 억새꽃이 가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 강을 깨끗하게 관리하였더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강변으로 나왔다. 치수가 잘 되면 이수와 친수가 저절로 잘 되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좌빨들은 강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한다. 자연하천으로 되돌리자고도 한다. 문명 세계의 강은 원시 자연의 강이 아니다. 내버려두면 똥물이 되고 마는 법이다. 관리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제발 무식한 소리 하지말고 그냥 그대들이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정치이야기에 집중하였으면 한다.




# 태화강은 대한민국 최악의 수생태계를 가진 강이었다. 울산은 경제개발 시절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과 자동차 산업의 메카였다. 경제 발전하니 인구가 늘어가고 각종 공장과 생활하수가 무분별하게 강으로 흘러들었다. 그 결과 강은 썩은 오물로 가득한 죽음의 강이 되었다. 물고기도 사람도 모두 강을 떠났다.


옛말에 유항산(有恒産)이면 유항심(有恒心)이라 했다. 경제 개발로 환경이 오염되었으나 경제 개발이 되니 사람들의 마음도 차원이 높아지게 되었다. 살림살이 나아지니 환경이나 삶의 질에 자연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민도(民度) 역시 높아져 썩은 물을 안은 채 살고 싶지 않게 되었다. 지역 사회 전체가 합심하여 오염원을 차단하고 강을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강은 다시 생명의 강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태화강의 환생에는 관의 노력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도 큰 몫을 했다. 이 날도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강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열심히 청소중이던 저 분은 셔트 소리 들리자 잠시 허리 펴고 고개를 돌리신다. "수고 많으십니다!" 인사드렸다.




# 둔치 체육공원을 지나면 새 다리 공사 현장을 만난다.   




# 공사 현장의 다리를 지나며 지나온 구간을 돌아보았다.




# 십리대숲의 시작점이 나온다. 정자와 데크 쉼터가 있다.




# 커다란 캔버스 안으로 대숲이 들어왔다.




# 대숲 가에 키를 낮춘 정자가 있다. 만회정(晩悔亭)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안내판을 보니 박취문(朴就文)이란 이가 세운 정자이다. 박취문은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태어나 인조 22년인 1644년 갑신(甲申)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72위로 합격하여 관직에 나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만든 이 만회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온돌방을 갖춘 형태였으나 근래 복원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만든 모양이다. 덕분에 좋은 가을날 어느 산악회 모임인지에서 단체로 잘 즐기고 있다. 만회(晩悔)는 뒤늦은 후회란 뜻인데 박취문은 돌이켜 후회스럽다는 것인지 늦은 후회를 하지 말자는 것인지 어느 뜻으로 자신의 호를 지었을까?






# 대숲에 푸른 기운 가득하다.




# 대나무는 원래 아열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수목이다. 따라서 이곳 울산 태화강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기 딱 좋은 곳이다.




# 십리대숲을 따라 동진하였다. 문득 대숲 안을 들여다 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대숲 안에서 훅 달려 든다.




# 출발점인 태화강전망대를 다시 만났다.




# 이곳이 옛 남산나루 자리인 모양이다. 건너편 산 위에 지난 구간 마지막에 태화강 조망을 즐겼던 전망대가 있다.







# 잠시 십리대숲 안으로 들어가봤다.




# 산책하기 좋게 꾸며 두었다. 어느 연세 지긋한 노부부가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대숲길을 걷고 있다.





# 다시 해파랑길 복귀. 강 건너 주상복합아파트가 거대한 성채처럼 우뚝하다.




#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십리대밭교.




# 강을 되살리니 도시 전체가 되살아 났다. 되살아난 강물 속에 인간세가 그림자로 어우러진다.




# 대숲이 끝나는 지점에 섰다. 이 좋은 대숲을 그냥 작별하기 아쉬워 대숲 뒤로 돌아가 그 그늘에서 한참 쉬었다.




# 대숲을 지나자 강은 크게 휘감아 돌며 넓은 소(沼)를 형성한다. 용금소(龍黔沼)이다. 자장법사가 중국 태화지에서 만난 용과의 인연이 있는 용연(龍淵)이다. 그런데 한자로는 '검을 검(黔)'을 쓰면서 한글로는 '금'이라 적고 있다.





# 태화루와 태화교가  태화강에 그림자로 함께 한다. 이 풍경은 마치 진주의 촉석루를 보는 듯하다.




# 용금소 가기 직전 갈림길에서 강변을 버리고 좌측 길로 올라 가라 한다.






# 공업도시 울산의 도심 한 가운데 이렇게 운치있는 옛 건축물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 태화루에 도착했다.




# 태화루 현판의 글씨는 각이 잡히고 힘이 넘치는 필체이다. 한 때 서거정(徐居正)의 작품이라 알려졌지만, 정확한 분석 결과 그의 시대와 맞지 않는 제작 연대가 측정되었다. 이 현판은 진남루(鎭南樓)라는 누각의 현판을 재활용한 것이라는데 대략적 제작 연대만 파악되었지 정확히 누구의 작품인지는 아직 분석중이다.




# 누각의 처마선이 날아갈 듯하다.




# 태화루 누각으로 올라가 봤다. 기둥들이 사열하 듯 반긴다.




# 누각 정면으로 태화강이 펼쳐진다.




# 태화루는 태화강이 바다를 향해 크게 휘감아 도는 절벽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이 지역의 옛 권력자들이 맛난 음식과 음악, 그리고 기생들 대동하여 풍류 꽤나 즐겼을 풍광을 가진 곳이다.




# 좋은 경치를 가진 곳이라 오래 머물며 그 경치 즐겼다.




# 내가 걸어온 산길, 대밭, 그리고 물길이 눈앞에 있다.





# 태화루에서 오래 쉰 후 다시 길을 잡았다. 오늘 나는 태화강의 큰 흐름 대부분과 함께 한다.




# 하류로 갈수록 강은 넓어지고 인적은 뜸해진다.





# 혼자 콧노래 흥얼거리며 늦가을 태화강의 풍취를 마음껏 즐겼다.




# 물닭 무리가 먹이 사냥에 여념이 없다.




# 번영교와 학성교를 지나자 억새숲이 나타난다.




# 강바람에 서걱이는 억새숲이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긴다.




# 낚시꾼 몇이 한가로이 세월을 낚고 있다. 조과는 별로 없다.






# 홀로 하류쪽에 낚시를 드리운 이 분은 그래도 황어 한 마리를 낚아 두고 있었다.





# 강태공들과 작별하고 다시 하류로 향했다.




# 동천강이 태화강과 합류하는 곳에 작은 체육공원이 있다.




# 울산시는 운동 나온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중간중간 이런 온수보급소를 만들어 두었다. 덕분에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늦은 점심 먹고 잠시 한숨 돌렸다.




# 해파랑길은 동천강을 가로지르는 내황교 위로 올라 가야 한다.




# 아직 갈 길이 6km나 남았다.




# 내황교를 통해 동천강을 건넌다.




# 동천강은 울산공항 쪽으로 올라 간다. 그 발원은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이다. 길이 27.1km의 작은 강이다.




# 내황교를 지난 후 곧바로 강변 둔치로 다시 내려 간다. 그곳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억새밭이 기다리고 있다.




# 공식명칭은 태화강 억새군락지이다.




# 규모가 큰 억새밭이라 그 속에 파묻히면 무슨 일이 있는지 아무도 모를 곳이다.




# 좋은 억새밭이라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잠시 지체하였다. 그리고 억새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도로 위로 올라가게 된다.





# 울산은 현대그룹의 도시이다. 한때 정주영 회장은 울산의 비공식적 족장이었다. 한 사람의 뛰어난 기업가로 인해 도시 전체가 산업화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그 혜택을 공유하였다. 나아가 국가 경제의 큰 축이 되었다. 이 도로는 정주영 회장의 호를 따서 '아산로'라 이름 지어졌다.




# 멀리 태화강이 바다와 합일하는 곳에 울산항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 아산로를 따라 동진하였다. 차량 행렬 많고 바람도 거셌다. 도보 여행에 적합지 않은 코스다.




# 나 말고는 지나는 이 아무도 없다.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걸었다. 울산항과 울산대교, 그리고 일대의 공단이 가는 내내 우측 전방에서 가까워진다.




# 저 배들은 바닥에 내린 갈고리 그물을 끌어 조개를 잡고 있다.




# 울산대교의 위용이 당당하다.




# 현대자동차 선적장을 통과했다. 수출을 위해 선적을 기다리는 자동차들이 수천 대 나래비를 서 있다. 깔끔한 새차들이라 절로 탐이 났다. 저렇게 많은데 나 한 대 안 주나?




# 성내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건널목을 건너라 한다.




# 잠시 도로 따라 올라가면 오늘 구간 종착지인 염포삼거리가 나온다.




# 염포(鹽浦)는 소금밭이 많아 '소금나는 갯가'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종 8년인 1426년 부산포(釜山浦), 제포(薺浦)와 함께 왜관(倭館)을 설치한 곳이다. 왜국과 가까운 곳이니 왜인들의 출입 잦았고 그로 무역과 외교의 통로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은 특별한 기념물은 없고 비석 하나 세워져 이곳이 염포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 구간 종료를 증명하고자 인증소를 찾는데 아무리 돌아보아도 인증소가 없다. 다음 구간 할 때 찾기로 하고 부산으로 돌아갈 궁리를 했다. 자료 찾아보니 굳이 태화강역으로 돌아갈 필요없이 방어진에서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이곳 염포삼거리에서 한번 쉬어간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 버스가 서는 정류소를 찾기 쉽지 않다. 처음 염포초등학교 쪽 번듯하게 생긴 버스정류소에서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삼거리로 돌아가 주변을 살피니 현대자동차 기술교육원 정문 곁에 시설물은 없고 동그란 버스 간판 하나 서 있는 정류소가 있다. 이곳이 방어진 해운대간 시외버스 정류소이다.


시간이 적절히 맞아 곧 버스가 도착한다. 덕분에 해운대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중간에 약간 지체가 있긴 했지만 갈아타거나 기다릴 필요없어 아주 좋았다. 해운대에서 다시 전철로 갈아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파랑길 7코스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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