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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9코스/일산해변~정자항-남목마성 단상(南牧馬城 斷想)!! 본문

길이야기/해파랑길

[해파랑길]9코스/일산해변~정자항-남목마성 단상(南牧馬城 斷想)!!

강/사/랑 2019. 3. 3. 20:14
[해파랑길]9코스/일산해변~정자항



말(馬)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한 가축이다. 날렵하고 민첩한 데다 힘까지 갖추고 있어 승용(乘用)과 역축(役畜)의 용도로 가축화가 되었다. 승용은 사람의 이동수단의 역할이고 역축은 농사를 짓거나 수레를 끄는 사역의 용도이다.

말의 가축화 역사는 소나 양 같은 다른 가축에 비해 비교적 늦은편이다. 소가 1만 년 전에 가축화된 것에 비해 말은 약 6천~5천 년 전에 가축으로 길들여졌다. 그 시작은 유라시아 스텝의 서쪽 지역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서부, 카자흐스탄 지역인 유라시아 스텝의 야생마가 가축으로 길들여진 후 점차 다른 지역으로 사육 범위를 넓혀 갔던 것이다.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은 말의 속력과 견인력을 전쟁에 활용하였고 이 압도적인 전투력은 남쪽 정주민들에게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목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교역이나 약탈을 통해 식량을 확보했다. 가을이 되어 스텝의 풀들이 마르고 식량이 떨어질 무렵 유목민들은 말발굽 소리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남쪽으로 처내려 왔다.

수천 년 중국 역사에서 외침(外侵)의 대부분은 북쪽 유목민의 남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이 만리장성이었다. 그들 유목민은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 등의 기마민족이었고 그 정점에 몽골이 있었다.

몽골은 유럽과 아시아, 중근동 전역을 그들의 말발굽으로 장악하여 유사 이래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넓은 정복지를 확보했다. 그 정복지에 고려도 포함되었고 고려 말기의 역사는 몽골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목민의 기마 전략은 현대의 전차부대 같은 위력을 가졌다. 그들은 바람같이 빠르게 침입하였다가 바람보다 먼저 빠져나갔다. 정주민들에게 유목민의 말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벽을 세워 말의 속도를 억지하고 유목민의 목축 기술과 기마술을 익혀 같은 전략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도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 북쪽을 향한 산맥의 곳곳에 산성을 쌓아 북방 기마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전국 곳곳에 목장을 세워 말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가 늘 성공한 것은 아니어서 북방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국토가 유린되고 왕조가 섬으로 몽진한 땅에 남은 백성들의 비명소리 가득한 역사도 여러 차례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이래 고구려의 수당(隋唐)과의 오랜 전쟁, 고려의 중원 세력과 북방 민족, 특히 몽골과의 치열했던 투쟁, 조선이 왜란과 호란으로 겪은 국난의 고초가 그 오랜 투쟁의 역사를 말해준다. 그래도 은근과 끈기의 민족성으로 축성(築城)과 목축(牧畜)을 유지하여 끝까지 저항하고 간혹 선제공격하기도 하면서 국맥(國脈)을 오래 이었다.

우리 민족이 국가의 체제를 갖춘 이후 북방의 침공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 대한 대응은 생존의 필수였다. 그 과정에서 말을 기르고 기마술을 익혀 전쟁에 활용함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대응책이었다.

그 출발은 삼국시대였고 대표는 고구려였다.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로 대별되는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기마민족이었다. 강력한 기마군단을 갖춘 고구려의 무력은 남쪽 백제와 신라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와 더불어 수백 년 투쟁한 백제 신라 역시 기마 전술은 주요 전투력이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국통(國統)을 이었다 자부하였으나 기마 전통은 허술하였다. 주력 부대가 보병인 관계로 여진 정벌에 번번이 어려움을 겪었다. 1104년 고려 숙종 때 윤관(尹瓘)은 북방 정벌을 위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였다. 그 별무반 조직에 ‘신기군(神騎軍)’이 있었다. '말 탈 기(騎)’가 있으니 기마병을 말한다. ‘여진 정벌’을 실패한 이유가 기마병의 부재라 판단한 까닭이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목장을 만들어 군마를 기르게 하고 관리를 파견하였다. 마축자장별감(馬畜滋長別監), 축마점고사(畜馬點考使), 방목관(放牧官), 애마·자장관(愛馬.慈長官), 제령(提領)등으로 불리던 감목관이 그들이다.

법령으로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목감양마법, 문종 25년(1071)에 섬에 설치한 목장 관리 규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섬 지방의 목장으로 대표적인 곳이 여몽연합군이 주둔하였던 탐라국이었다. 고려 원종 14년(1273) 여몽연합군에 의해 탐라 항파두리성 일대에서 삼별초군을 평정한 후 그곳에 일본 정벌을 위한 군마(軍馬) 공급지를 만들었고 관리를 위해 몽고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복시(司僕寺)에서 마필 관련 행정을 주도했다. 사복시는 병조에 소속된 기관으로 한성부 중부 수진방(지금의 수송동 146 번지)에 있었는데, 말 사육 및 전국의 목장, 왕의 가마 등을 맡아 다스렸다. 조선 전기에 국가의 기강이 확고할 때는 그 규모가 제법 탄탄하였다. 전국에 159개의 국영 목장이 있었고 관리한 마필의 수다 4만 마리에 달했다. 이때의 그 마필의 용도는 관원들의 교통수단과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은 중기를 거쳐 후기로 갈수록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신분제도는 더 악화되었으며 중국에 의지하는 사대의 기운은 고착화된 혼돈의 나라였다. 왕은 혼미하였고 관리는 부패하였으며 백성은 무기력하였다.

마정(馬政)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국초에 그나마 계획적으로 관리되던 전국의 목장은 사회기강이 허물어지면서 많은 곳이 폐허로 변했고 기르는 말들은 비루하고 허약했다.

실록을 찾아보니 마정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이 각지의 목장에 흉년이 들어 구휼하였다는 내용으로 연속되고 있다. 이항복의 상(上)의 하문에 답한 내용에는 국초에는 잘 관리되던 목장과 마필의 수가 줄었다는 보고로 되어 있다.

그 결과가 왜란(倭亂)의 참패였고 호란(胡亂)의 치욕이었다. 왜란 당시 전쟁의 방향을 결정지은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의 주력은 기마병이었다. 그러나 장마로 뻘이 된 들판에서 왜군의 작전에 휘말린 조선의 기병은 괴멸하였고 이후 조선의 기병은 사라졌다.

더 큰 패배는 '용인 전투'였다. 용인 전투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참패한 전투다. 이때 왜군의 기마병은 10기에 불과했는데 철가면을 쓴 적의 출현에 장수부터 겁을 먹고 도망을 가면서 조선군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듯 서로 밟혀 죽었다.

최고의 치욕은 병자호란 '쌍령 전투'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동안 경기도 광주부 쌍령에는 조선의 근왕병 4만 명이 주둔했다. 장수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이었다. 그리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된 총병이었다. 나름 신무기를 갖춘 신식 군대였다.

조선군 4만을 공격한 청군의 수는 300명의 기병이었다. 3,000명도 아니고 단 300명 기병의 돌격에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의 4만 명은 겁에 질려 도망가다가 적의 칼에 맞아 죽기보다 서로 밟혀 죽었다. 기병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전투이고 무능한 장수와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의 숫자가 아무 의미 없음을 여실히 증명한 전투라 할 수 있다.

말은 고대 전투의 최고 무기이고 교통의 주요 수단이었다. 말이 보유한 속력과 견인력은 국력 그 자체였다. 평화시에는 물류의 이동이나 농사에 이용하고 전시에는 막강한 전투력으로 변신하는 말의 존재는 국력의 바로미터였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훈련된 기마병을 갖춘 국가는 정복전쟁을 통해 제국의 모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문명 발달한 현대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고대의 축성과 목축이 현대에는 경제력과 무력의 확보로 이어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준비된 대응책과 현명한 리더의 존재,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한 국민의 의식 수준은 고금을 통틀어 공통적으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이루는 힘의 바탕이다.

해파랑길 아홉 번째 걸음은 일산해변에서 정자항까지다. 총길이 20여 km의 이 해파랑길은 울산 동구의 일산해변을 떠나 울산미포 국가산업단지와 현대중공업 앞을 지난 뒤 장승 삼거리에서 주전봉수대가 있는 봉대산을 넘은 후 주전항을 향한다.

봉대산(峰大山)은 주전봉수대(烽燧臺)로 인한 이름이다. 동해 남부 해안은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따라서 해안의 여러 산을 이어 봉수를 연결하였다. 봉대산도 그런 흔적의 하나다. 다만 지금 이름은 '봉화 봉(烽)' 대신 '봉우리 봉(峰)'을 쓰고 있다.

해발 189.8m의 야트막한 산이라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는데, 정상의 봉수대는 흔적만 남았고 산의 남쪽으로 허물어진 옛 성터가 휘감고 있다. 남목마성(南牧馬城)의 흔적이다.

마성(馬城)은 말의 방목을 위한 울타리 개념의 성채다. 1469년 기존의 경상도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방어진에 둘레 47리의 목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1749년 편찬된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에도 마성의 기록이 전한다. 이들 모두가 함께 전하는 마성이 울산의 남목마성이다. 원래는 봉대산을 빙 둘러 성을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염포동과 성내 경계에서 미포에 이르는 일부 구간만 허물어진 채 옛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는 현재의 교과서이고 미래의 예언서다. 역사의 기록은 말(馬)을 이용한 전투력의 증대와 교역량의 확보가 국력의 지표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세월 흘러 더 이상 말이 전투력이나 교통의 수단으로 소용이 없는 시절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여전히 가치 높은 지침이다. 축성과 목축은 전시에 대비한 평시의 노력이었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 없다.

올바른 리더의 솔선수범과 국민들의 단합된 애국심, 거기에 굳건한 물적 경제적 토대를 갖추면 그 힘으로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오래 누릴 수 있다.

무릇 평화는 힘을 가졌을 때 비로소 온전할 수 있다. 준비 없는 평화는 허망하고 힘 없는 평화는 모래성에 다름 없다. 의지 없고 힘 없는 통치자의 보여주기 위한 말(言)의 쑈는 허망한 거짓의 향연일 따름이다. 2020년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러하다. 허망한 일이다.

해파랑길 아홉 번째 걸음으로 울산의 마성을 만나 문득 스친 길 위의 생각이다. 그 길 걷는 내내 가슴 답답하였다.

 

남목마성 단상(南牧馬城 斷想)!!


구간 : 해파랑길 9코스(일산해변~정자항)
거리 : 구간거리(20.2km), 누적거리(188.5km)
일시 : 2019년  3월 1일. 쇠의 날.
세부내용 : 일산해수욕장 ~ 방어진순환도로 ~ 찬물락사거리 ~ 현대중공업 ~ 한국프랜지 ~ 안산삼거리 ~ 남목생활공원 ~ 남목마성 ~ 봉대산 ~ 망양대 ~ 미포산업로 ~ 주전캠핑장 ~ 주전마을 ~ 주전몽돌해변 ~ 당사항 ~ 강동축구장 ~ 우가산 ~ 제전마을 ~ 판지항 ~ 정자항.


부산 사무실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부산행을 했다. 옛 직원들 만나 업무 처리하고 이것저것 다른 볼일도 보았다. 1년여 보낸 부산 생활의 마무리라 나름 감회가 복잡하였다.

볼일 모두 보고 시청 근처 어느 찜질방을 찾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찜질방은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다. 그리고 이날 부산 시청 근처의 찜질방에는 거의 정신병 수준의 아이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이뤄진 이놈들은 온밤을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몰려다니며 법석을 떨었다. 꾸짖어도 달래도 그때 뿐이었다. 내 살다살다 그런 통제불능의 아이들은 처음 보았다. 아이들을 저렇게 키웠고 또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부모들의 얼굴이 궁금하였다.

완전히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시는 부산의 찜질방에 묵을 일은 없을 예정이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잠 못자 멍한 상태로 찜질방을 나섰다. 잠시 걸어가자 지하철 역이 나온다. 첫 지하철 타고 노포동으로 갔다.

 

 

해파랑길 9코스

일산해변에서 출발해 정자항까지 총 19.3km로 6시간 30분 소요된다. 자연과 산업화된 도시가 어우러진 울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대표 코스다. 울산의 대표적인 기업인 현대중공업이 만든 현대예술공원과 봉수대를 복원해 놓은 봉대산 주전봉수대, 울산 12경 중 하나인 주전몽돌해변,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목마성을 만날 수 있다.

교통편
- 울산고속버스터미널에서 133번 버스 이용, 일산해수욕장 정류장에서 하차 후 약 440m 도보 이동
- 121, 411번 시내버스 이용
- 일산해변, 주전봉수대, 주전해변, 정자항에 화장실이 위치해 있다.
- 식수 보급처가 없으므로 일산해변과 정자항에 위치한 매점에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해파랑길 9코스 일산해변~정자항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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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 편으로 노포동으로 갔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 정신이 몽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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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 노포동터미널은 이른 시각임에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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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 편으로 울산 방어진에 도착했다. 소박한 모습의 방어진 버스터미널

 

# 터미널 인근 편의점에서 점심과 간식을 준비한 후 방어진항으로 내려갔다. 항구의 화장실에서 화장도 마쳤다.

 
# 어부들의 아침 조업 준비가 한창이다.

 

# 방어진항에서 도보로 일산해변까지 걸었다. 자동차를 타기에는 가깝고 걷기에는 좀 먼 곳이었다. 걸어서 20여 분 걸렸다.

 

# 대왕암 공원 방면의 해안선. 저 해안선의 구불구불한 해변길을 따라 지난 8구간을 걸었다.

 

# 일산해수욕장 중앙에 있는 화분 모양 조형물에 도착했다. 8구간과 9구간의 시종점이 바로 이곳이다.

 

# 저 이는 원투대 두어 개를 해수욕장 너머 바다로 던져두고 있다. 요즘 해수욕장에서 원투 낚시를 하면 무슨 고기가 나오려나?

 

# 스탬프 도장 찍어 구간 출발을 인증하였다. 그동안 거리 공연을 준비하던 이 고장 나이 지긋한 노인 두 분이 싸움이 붙었다. 나이 든 사람들의 욕지거리 소리 듣기 거북해 얼른 자리를 떴다.

 

# 동백꽃 붉게 피었다. 이 넘은 동백 중 겹동백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검붉은 통꽃의 동백과는 빛깔도 모양도 다른 넘이다.겹동백은 일반 동백의 개량종으로 꽃잎이 여러장 겹쳐있어 마치 장미꽃을 연상시킨다.

 

#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3월 첫날에 벌써 쑥이 쑥쑥 올라와 있다. 한잎 뜯어 냄새 맡아 보니 쑥향 그윽하다.

 

# 방파제 너머로 대왕암공원의 돌출부가 건너다보인다. 대왕암을 가리키는 저 조릿대 대나무 막대는 좀 전 방어진항을 출발해서 솔바우산 좌측 언덕을 넘으며 길 가 대숲에서 주운 것이다.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동네 개들을 쫒기위한 타구봉이기도 하고 지팡이 용도이기도 하다. 가볍고 단단해 하루종일 잘 썼다.



#  해수욕장을 따라 잠시 걷다가 골목길로 접어들어 세 블럭 걸으면 방어진순환도로가 나온다. 이제 이 넓은 대로를 따라 동진하여 남목삼거리로 가야 한다.

 

# 이 길 우측은 내내 현대중공업 공장 담벼락을 따르게 된다.

 

# 이 동네 이름은 전하동이다. 예전 죽고 못살던 친구녀석이 학교 졸업 후 곧장 현대에 취업하여 이곳 전하동에서 살았다. 군대 시절 주고받던 편지 주소로 익숙한 동네 이름이고 친구 만나러 한 차례 놀러 오기도 했던 곳이다.

 

# 현대중공업 정문을 통과.

 

# 잠시 더 걸어가면 언덕이 하나 나온다. 안산사거리다. 계속 가면 길은 좌측으로 크게 휘어 염포산 언덕을 따라 내려가 염포에 이른다. 앞 구간인 8구간 출발지가 그곳에 있다. 해파랑길은 이곳 안산사거리에서 우틀하여 바다쪽으로 내려간다.

 

# 주전해안 방향이다.

 

# 잠시 내려가면 봉대산이 앞을 가로막고 산 아래로 터널이 뜷려 있다. 터널 앞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꺾는다.

 

# 길바닥에 남목역사누리길의 표식이 있다. 울산에서 만든 저 도보길은 해파랑길과 일부 겹친다.

 

# 특이하게도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 동부패밀리아파트 단지가 봉대산에 잇닿아 있는 까닭이다.

 

# 그곳에 남목생활공원이 있다. 남목마성이 있는 동네라 나무로 말 조형물을 만들어 두었다. 코르크 재질의 나무 조각을 여러겹 붙여 말의 근육을 표현했는데 꽤 볼만하였다. 

 

 

# 체육공원 좌측에 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가 있다.

 

# 마성에 관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야트막한 산이 바다쪽으로 넓게 누워 있어 목장지로 적합하였던 모양이다.

 

# 낮은 산이라 경사가 급하지 않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올라 갈 수 있다.

 

# 한번 걸리면 대책이 없어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소나무재선충은 전국적 재앙이다.

 

# 한차례 오르면 갈림길이 있는 고개가 나온다.

 

# 마성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작은 돌을 쌓아 성채를 만들고 그 안에 말을 방목했던 모양이다.

 

# 봉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경사가 서서히 급해진다.

 

 

# 산마루금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정면으로 봉대산 전위봉의 정상부가 보인다.

 

 

# 길은 정상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좌측으로 우회하여 휘감아 오르게 되어 있다.

 

 
#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보는 순간 예쁨을 느끼는 직관적인 아름다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 통신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정상은 생략하고 길은 너머로 이어진다. 그곳에 삼거리 갈림길이 있다.

 

# 해파랑길은 봉호사 방향이다.

 

# 인부들이 쉼터 작업 중이다.

 

 

# 길은 봉호사 입구에서 좌측으로 꺾여 떨어진다.

 

# 바다쪽으로 동백 울타리가 있다.

 

 

# 동백 울타리 너머로 현대중공업이 내려다보인다.

 

# 망양대 방향.

 

# 이런 전래동요가 있었나? 노랫말이 참 예쁘다. "아강아강 일어나요 앞 냇가에 빨래 소리 큰 한길에 통경 소리 정성마당에 딸랑기 소리 뒷동산에 토끼 소리 내 궁덩이 해돋았다. 어서 어서 일어나요"

 

# 망양대에 가보았다. 이 정자는 해파랑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 1872년 제작된 울산목장지도에 망양대가 표현되어 있다. 남쪽 봉대산에 마성이 바다쪽으로 이어져 있고 북쪽으로도 마성이 있다. 지난 구간의 대왕암은 이 지도에 대양암으로 기록되었고 슬도도 보인다. 가야 할 주전동은 우측 바다쪽에 있다.
 

 

# 난바다 쪽으로 조망이 열렸다. 바람 시원하다. 다만 박무가 짙어 깨끗한 조망은 아니다.

 

 

# 배낭 내리고 간식 먹으며 한참을 쉬었다. 방어진에서 주운 조릿대 지팡이의 모습이 이채롭다.

 

# 망양대에서 오래 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잠시 가다가 산속 습지를 지났다. 봄 햇살 좋은 습지 안에 개구리 알과 도룡뇽 알이 가득하였다.



# 잠시 산길을 따르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 해안을 달리는 미포산업로와 만난다. 도로 아래 지하통로를 통과한다. 

 

# 곧장 다시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 해변 넓은 공터에 캬라반 캠핑장이 있다. 

 

# 캠핑장 화장실 뒤로 옥빛 바다가 열렸다.

 

# 이제 해파랑길은 온전히 바다 곁으로 북상하는 모습을 보인다.

 

# 주전동 바닷가 풍경 감상하며 계속 북상하였다.

 

 

 

 

# 주전마을에서 몽돌시인이라는 분의 작품을 감상했다. 생활 속 시인이신 모양이다.

 



# 주전마을은 2019년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가보고 싶은 마을'로 선정된 곳이란다.

 

# 아기자기한 볼 것이 많은 동네라 그렇게 선정되었을 것이다.

 

# 주전마을은 무엇보다 저 검은 몽돌해변으로 유명한 곳이다.

 

# 물빛이 정말 고운 곳이다. 멀리 정자항 너머 진리해변이 건너다보인다.

 

# 따스한 봄볕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 동글동글한 몽돌을 굴리는 해조음(海潮音)이 차르르 차르르 해변가에 가득하다. 나는 군대 생활 삼 년 동안 저 소리를 내내 듣고 살았다. 그래서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옛 기억의 소리다.

 


# 내 취향에 딱 맞는 조형물을 설치해 두었다.

 

# 주전해변 몽돌 구르는 소리 듣기 좋아 짐 내리고 한참 쉬었다. 노란 바위 곁에 자리잡은 저 팀들은 삼겹살 파티가 한창이다. 맛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삼겹살 한 점에 쏘주 한 잔 했으면 딱 좋겠다.

 

# 좋은 동네다. 추천하고픈 곳이다.

 

# 구암마을 통과

 

# 주전 일대의 해변은 온통 검은 몽돌밭이다.

 

# 길가 어느집 정원에 매화꽃 만발하다.

 

# 강동해변 방향으로 북상한다.

 

# 어물방파제 통과. 멀리 바다쪽 암초와 연결된 다리가 보인다.

 

# 길가 볼록렌즈에 담긴 내 모습을 찍었다. 대화 나눌 상대 없으니 이런 혼자놀기 장난도 해본다.

 

# 지나온 해안을 돌아본다. 멀리 대왕암의 모습.

 

# 당사마을 주민들이 바다에서 뜯어온 돌미역 말리기에 여념이 없다.

 

# 당사마을은 마을 앞에 있는 암초인 큰넘섬과 작은넘섬을 다리로 이어 관광지를 만들었다.

 

# 당사마을. 이 동네도 아름다운 동네로 선정되었다 한다.

 

# 이름이 거창하다. 당사 스카이워크. 요금을 징수하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넘섬이라는 암초와 연결한 다리다.

 

# 용 조형물이 있다. 용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한다. 옥황상제에게 쫓겨난 용이 다시 하늘로 승천하면서 돌이 둘로 쪼개져 큰넘섬과 작은넘섬으로 되었다는 전설이다.

 

# 지나온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 낚싯꾼들이 요금을 내고 저 다리 끝으로 가서 낚시를 하는 모양이다. 이곳도 물빛은 정말 곱다.

 

# 용의 얼굴은 중국 만화책 속에 나오는 캐릭터를 닮았다. 용의 위엄은 찾아보기 어렵다.

 

# 이곳의 돌미역은 귀하고 맛이 뛰어나 고가로 팔린다 한다. 돌미역이란 것이 대량으로 양식되는 미역과는 달리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라 맛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미역이 바위에 잘 착상되도록 매년 갯바위 닦기를 한다.

 

# 당사항.

 

# 당사에서 해파랑길은 다시 해변을 벗어나 산쪽으로 접근한다.

 

# 마을 안을 통과.

 

# 동해안로는 우측으로 꺾여 다시 바다로 나가고 해파랑길은 좌측 산길로 올라간다.

 

# 강동축구장이란 팻말을 보고 위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 잔듸 구장이 있다. 울산현대 축구팀의 연습구장인 모양이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외국 어느 팀의 연습장으로 쓰였다 한다.

 



# 축구장 주차장 뒤로 길이 이어진다. 강동사랑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 갈림길에서 좌측길로 올라간다. 이 산의 이름은 우가산이다.

 

# 산길이 아주 길게 이어진다. 강동사랑길이란 이 길은 이 동네 사람들의 산책로인 듯하다.

 

# 아기자기한 맛이 나는 산길이다. 간혹 산책 나온 마을 사람들과 지나친다.

 

# 우가산 전위봉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갈림길 통과.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긴 도보여행으로 지쳐 정상은 생략했다.

 

# 이곳이 우가산 정상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해파랑길은 계속 임도를 따른다.

 

# 저곳이 정상이었지 싶다.

 

# 길게 이어지던 임도를 버리고 우측 숲속으로 들어가라 한다.

 

# 정자항, 미역바위 방향으로 내려간다.

 

# 제법 가파르게 올라온 길이라 내려가는 길도 가파른 편이다.

 

# 내리막 도중에 옹녀나무라는 야릇한 이름표를 단 나무 두 그루를 만난다. 두 나무가 나란히 나무 줄기를 두 갈래로 갈라지게 벌리고자라나서 그런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 붉고 화려한 홍매화가 꽃을 피웠다.

 

# 농사 준비로 바쁜 농장들 사이로 내려가면 해안도로를 다시 만난다.

 

# 도로를 건너 바다로 향한다.

 

# 제전항. 아담한 마을 전용의 항구다.

 

# 주민 한 분이 긴 장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잡아내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군소다. 나는 보랏빛 물이 줄줄 흐르는 저넘을 도저히 먹어낼 수가 없더라. 남들은 삶아놓으면 쫄깃하게 맛나다고 하더라만...

 

# 이 동네는 눈길 가는 곳곳이 아기자기하게 볼 것 많은 곳이다.

 

 

# 아파트처럼 생긴 리조트 건물 앞으로 해안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 손바닥 만한 판지항.

 

# 판지항을 돌아나가면 본격적인 난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섬처럼 독립된 방파제를 세워 난바다로부터 밀려드는 큰 파도를 막아내고 있다.

 

# 정자항은 규모가 큰 항구다. 큰 도시처럼 아파트 단지 즐비하다.

 

# 항구 초입에 캬라반 캠핑장이 있다. 국민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레저 활동이 활성화된다.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는 저런 캠핑카나 요트 등의 고급 장비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 목적지인 정자항에 도착했다. 20여 km에 이르는 꽤 긴 거리였다. 몸에 묻은 먼지 털어내고 구간 종료했다.

 

# 그런데 코스 인증소는 항구밖 공터에 설치되어 있다. 인증도장 찍고 마무리했다.

 

# 이후 버스편으로 울산 방향으로 가서 다시 시외버스로 울산역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KTX 편으로 상경했다. 먼 동네다.

 

이렇게 해파랑길 9구간을 마무리했다. 해파랑길은 내가 일시적 부산 시민으로 있을 때 가까운 곳의 테마길 여행으로 시작한 순례길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부산 시민이 아니다. 따라서 동해남부의 먼 이곳 해파랑길로 접근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오고 가는 길이 이렇게 멀어서야 어찌 쉬 이 길에 나서겠는가?

하지만, 그동안 백두대간을 비롯한 무수한 테마길 순례에 나서면서 다 거쳐왔던 일이니 어찌어찌 해결할 방법은 있을 것이다. 내 삶의 시간이야 아직은 꽤 쓸만큼 남아 있고 그 길을 걸어낼 다리 힘도 아직은 남아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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