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을. 나는 낙남정맥(洛南正脈) 종주 중이었다. 낙남정맥은 우리나라 아홉 정맥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한 정맥이다. '정맥(正脈)'이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우리나라 산맥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를 말한다.
백두대간은 남녘땅에 아홉 개의 정맥을 거느린다. 그 정맥들은 이 땅의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갈래 쳐 나와 이 땅 곳곳의 뼈대 역할을 한다. 대부분 백두대간에서 출발해 북에서 남으로 혹은 동에서 서로 뻗어내려 바다나 강으로 잠긴다.
그러나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종착지인 지리산에서 출발해 하동, 진주, 사천, 고성, 함안, 마산을 거쳐 김해 동신어산을 마지막으로 찍고는 낙동강에 잠긴다. 지나는 고장이 가야의 옛땅이고 유일하게 서에서 동으로 동진(東進)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아홉 정맥 중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 같은 종주 산꾼이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의 종주를 할 때 제일 마지막으로 진행하여 1대간 9정맥의 최종 마무리하는 대단원의 역할을 맡곤 한다.
나 역시 10여 년 진행한 1대간 9정맥의 마무리 도전으로 남겨 두었다가 여러 사정 때문에 마무리는 금남정맥으로 남기고 조금 앞당겨 중주 길에 나섰던 정맥이다.
낙남정맥의 강역(疆域)은 따뜻한 남쪽 나라이다. 이 정맥은 시작점 인근인 하동 지역의 농장으로 변한 산 마루금을 일부 지나야 하는 어려움도 가지고 있다. 실거리 300여km로 거리도 짧은 편이라 농민들과 마찰이 없는 겨울 한 철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걸어내기에 딱 알맞은 산맥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2011년 가을빛이 익어가는 계절에 낙남정맥을 시작했다. 첫 구간은 지리산의 영신봉을 출발해 지리 남부 능선을 걷다가 삼신봉에서 하룻밤 야영한 후 고운동재에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3주일 후 다시 낙남길에 나섰다. 불과 3주일 차이인데 산길에는 이미 가을빛이 짙어 찬바람 일어나고 있었다.
아침 일찍 고운동재에서 산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곳의 산길은 온통 조릿대 산죽밭의 연속이다. 사람 키 높이만큼 자란 산죽을 헤치고 봉우리 대여섯 개를 연달아 넘으면 칠중대고지가 나온다. 빨치산 토벌 당시 칠중대가 주둔했던 곳이라 그런 이름을 얻은 봉우리다. 이곳까지의 산길은 좌우로 산청 시천과 하동 청암 및 옥종 세 고장을 경계한다.
칠중대고지에서 다시 50여 분 산길을 걸으면 584봉이 나오고 그 봉우리 넘어 아래로 내려가면 널찍한 고개 하나가 나온다. 화장실과 벤치 두어 개가 설치되어 있고 넓은 공터는 남북으로 제법 넓은 임도와 이어진다. 임도는 옥종의 궁항리와 청암의 하동호를 연결하는 오랜 길이다.
그곳이 '양이터재'다. 양이터재라는 이름은 이 고개 아래 옥종 궁항리 쪽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 양이터 마을은 궁항리 산속에 새 둥지처럼 깊이 파묻힌 작은 동네다. 예전에 양씨와 이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일으켜 양이터란 이름을 얻은 곳이다.
양이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하동 청암으로 넘어갔고 청암의 나본마을 사람들도 이 고개를 넘어 옥종이나 산청으로 넘어갔다. 낙남정맥의 주요 고개이고 고개 좌우로 물길이 일어나는 곳이라 우리나라 정맥의 주요 수분치(水分峙) 중 하나이다.
'수분치(水分峙)'는 물길이 갈라지는 곳이란 의미다. 이곳에 떨어진 빗방울은 그 방향에 따라 가는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좌측으로 깊게 떨어진 빗방울은 궁항리로 흘러 호계천을 이룬다. 이후 그 물은 덕천강에 합류하고 다시 남강이 되었다가 끝내는 낙동강을 이룬다.
우측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청암의 하동호로 모였다가 횡천강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 강물은 장차 하동 고전에서 섬진강이 되었다가 남으로 흘러 광양에서 바다가 된다.
이렇게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방울이 양 방향으로 갈라져 전혀 다른 물길을 이룸을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부른다. "물길은 산길을 넘지 않고 산길은 물길을 가른다."는 뜻이다. 이 산자분수령은 우리나라 산맥(山脈)의 구성 원칙이다. 한반도의 모든 산맥은 이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의해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으로 나뉜다.
양이터재는 낙남정맥이 지나는 고개다. 이 고개를 지나는 낙남정맥은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물길을 건너지 않는다. 물길은 산길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개에서 시작된 물길은 양 방향으로 갈라져 하나는 낙동강을 이루고 다른 하나는 섬진강을 이룬다. 산길이 물길을 가르기 때문이다.
그런 수분치여서 양이터재는 여러 모로 의미 깊은 고개다. 그런데 여러 해 전 지리산 둘레길이 생기면서 지리산의 품 안에 있는 삼 개 도, 다섯 개 시군, 팔십여 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순례길이 탄생했고 그 길이 지리의 품을 돌아돌아 양이터재를 넘게 되어 있다.
그로써 양이터재는 동서로 낙남정맥을 잇던 오랜 역할에 남북으로 둘레길을 잇는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무릇 고개는 산과 산 사이에 있어 산길 걷는 이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주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어 고개를 넘는 이에게 시원한 바람 안겨 땀을 식게 해 준다.
그야말로 보시(布施)의 전형이다. 보시는 대승불교에서 행하는 중생의 구제이자 목적 없는 베품을 말한다. 일러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한다. 양이터재는 길과 길 사이에, 산과 산 사이에 있으면서 이 고개를 찾는 이에게 걸림 없고 머무름 없는 휴식을 제공한다. 보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아낌없는 베품이 곧 보시다.
나는 10여 년 전 낙남정맥 종주를 할 때 낙동강을 향해 동진하면서 이 고개를 지났고, 다시 오늘 하동을 향해 남진하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 산길을 잇는 일과 고개를 넘는 일은 제법 고되고 힘든 길이다. 둘 다 비 오듯 땀나고 말 달리듯 숨 가쁜 일이다. 그 땀나고 숨 가쁜 도중에 바람 좋은 고개를 만나면 꿈결같은 휴식과 활력을 얻게 된다.
양이터재는 그런 고개다. 그 보시의 고개를 십 년 전에는 동서로 낙남정맥을 하면서 지나고 오늘은 남북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넘었다. 양이터재의 바람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맑고 시원하여 잠시 그 바람 쐬자 이내 땀 식고 기운 솟아 났다. 좋은 인연(因緣)의 고개다. 이 인연 다시 이어질 날 있을지 기대된다.
낙남정맥과 둘레길의 만남!!
구간 : 지리산 둘레길 10구간(위태~하동호)
거리 : 구간거리(11.5km), 누적거리(129.2km, 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20년 5월 2일. 흙의 날
세부내용 : 위태 ~ 지네재 ~ 오율마을 ~ 궁항마을 ~ 양이터재 ~ 나본마을 ~ 하동호
덕산 강변에서의 두 번째 야영이다. 덕산은 내 은퇴 희망지 1순위의 장소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의 야영은 언제나 깔끔하고 편안하다. 간밤도 그러했다. 간혹 운동 나온 사람들의 시선이 약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잦지는 않았다.
고요하고 편안하게 잘 보냈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화장실과 수도시설도 있어 여러가지로 좋았다. 언제나 야영지의 불편한 여건 때문에 걱정 많은 마눌도 이곳 덕산 강변은 대만족이라 한다.
혹시 아침 일찍 움직이는 주민들께 방해될까봐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자동차 시동 걸어 위태로 향했다. 어제 오늘 덕산 일대의 동네 구경은 참 잘한다. 구불구불 산길 돌아 위태에 도착했다.
지리산 둘레길 10구간(위태~하동호)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와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를 잇는 11.5km의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구간은 낙동강 수계권에서 식생이 다양한 섬진강 수계권인 지리산 남쪽을 걷는 길이다.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물들이 북쪽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은 섬진강이 된다. 걷다가 만나는 숲의 모습도 다르다. 남명 조식선생과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자주찾았던 오대사터가 있는 백궁선원도 스친다. 지리산 자락의 큰 댐인 하동호도 만난다.
♠ 안내센터
하동센터 - 경남 하동군 하동읍 중앙로 52-4 / 055-884-0854
삼화실안내소 –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촌길 21-2 / 055-883-0858
♠ 구간 찾아가기
위태(버스정류소) - 경남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783
하동호(하동호관리사무소) - 경남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219-2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지리산 둘레길 10구간(위태~하동호)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우리는 간밤에 위태 인근의 여러 장소를 돌며 야영지를 찾다가 이곳 덕산 강변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몇 해 전 산청 일대를 돌며 귀촌지 탐색할 때 이곳 덕산 강변에서 야영한 이후 두 번째 야영이다. 그때도 오늘도 대만족이다.
덕산은 이름처럼 덕이 충만한 곳이라 나그네에게도 포용적이다. 편안히 잘 쉬고 아침을 맞았다. 그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
# 덕천강 물소리 밤새 들었다. 강 건너 천평리 송하마을에 아침 안개 드리웠다. 오늘도 엄청 더울 모양이다.
# 지리산은 아침 안개에 가려 뵈질 않는다.
# 흔적없이 주변 정리하고 덕산을 떠났다.
# 위태 마을회관 앞 공터에 주차하였다. 어느 모임에서 둘레길 순례에 나선 모양이다. 10대 아이들 이십 여명이 인솔자들과 단체로 왔다. 아이들 특유의 발랄함과 소란스러움이 위태마을을 뒤덮었다.
# 저 팀과 동선이 겹치면 하루종일 소란에 시달려야 할 판이다. 얼른 짐 꾸려 위태를 떠났다. 오늘도 나홀로 순례다. 위태와 하동호의 대중교통도 연결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눌은 하동호로 가서 주변 탐방하기로 하고 나 혼자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위태마을의 상촌제 저수지 윗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 위태마을은 '갈대 위(葦)', '별 태(台)'를 쓴다. 지명유래를 찾아보니 원래 '갈티골(葛峙谷)'이던 마을을 일제시대에 위태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갈티'라고 할 때의 '갈(葛)'은 본래 처사들이 사는 곳을 명지라고 하여 흔히 써왔는데 일제가 처사가 살지 못하게 위태로 작명하여 불렀다는 것이다.
참 우리나라 수준 대단하다. 일제시대 일본의 악행을 열거한 것을 보면 일제는 거의 전지전능한 신적(神的)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제시대 당시 지리산 골짜기 갈티골 정도는 인구도 없고 산업도 없고 농토도 없어 가치가 제로에 가까운 곳이었을텐데 이런 산골짜기까지 행정력을 동원해 마을 이름을 바꿀 정도의 능력치를 가졌다는 얘기다.
그리고 처사가 무슨 일을 했기에 식민지 관리를 위해 마을 이름을 바꾼단 말인가? 옛부터 산림처사는 산천에 파묻혀 세상사 모두 잊고 음풍농월하던 사람들인데 그 처사 못 살게 하겠다고 마을 이름을 바꾼다고? 무슨 이익을 얻자고 그랬을꼬? 도대체 개연성이라고는 1도 없는 주장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갈티는 고갯길이 칡넝쿨처럼 구불구불 구부러진 동네란 뜻이다. 위태마을 뒤 중태고개 곁에 실제로 가파른 갈티재가 지금도 있다. '갈티골'은 발음상 '갈대골'로 들리기 쉽다. 일제 때 이름이 바꼈다면 어느 공무원이 갈티골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갈대골로 잘못 알아듣고 갈대를 한역하여 '위태 (葦台)'로 잘못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길은 갑자기 가팔라지면서 크게 휘감는다. 그곳 언덕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다. 이 동네사람들은 지금도 매년 이곳 느티나무에서 당제를 지낸다 한다.
# 뒷쪽 산골짜기를 향해 곧장 치고오른다.
# 길은 이내 좁은 산길로 바뀐다.
# 숨은 그림찾기. 지금 이 사진 속에는 커다란 살모사 한 마리가 숨어 있다. 길가에 간간이 취나물이 보이길래 무심코 손은 뻗었는데 내 손끝 바로 앞에 커다란 살모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하마트면 독사를 만지고 그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취나물 욕심내다가 큰일 치를 뻔했다.
#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하다. 조금 전에 독사 때문에 그 난리를 치렀는데 다시 취나물을 만나니 나도 모르게 숲으로 들어가게 된다.
# 길은 점점 더 가팔라진다.
# 이윽고 숲으로 들어가는데 솦속은 계단식 논 흔적 사이를 지나게 된다. 이곳까지 예전에는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던 모양이다.
# 산죽밭 사이 가파른 길을 따라 꾸준히 올라간다.
# 그 오르막의 끝에 안부 갈림길이 있다.
# 첫 번째 오름치고 꽤 가팔랐다. 모든 고개는 바람이 넘어가는 바람골이다. 이곳 역시 그렇다. 오르막 치고오르며 흘렸던 땀을 충분히 식힐 바람이다.
# 이 고개는 '주산갈림길'이다. 지도에는 '지네재'라고 적혀 있다. 이 고개에 지네가 많았든지 아니면 지네처럼 구불구불 했든지 둘 중 하나이리라.
주산은 해발 831m의 꽤 높은 산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출발하여 하동 옥종, 진주, 고성, 함안, 마산, 창원, 진영을 거쳐 김해 낙동강으로 잠기는 낙남정맥에 연결된 산이다. 낙남정맥 상의 산은 아니지만, 고운동재와 칠중대고지 등의 낙남정맥에 바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지리산의 아들'이라고도 부른다.
옥종에는 '옥산'이라는 산이 있다. 역시 주산처럼 낙남정맥과 연결된 산이다. 이 산이 지리산 산신령의 부름을 받고 가다가 옥종의 처녀가 "어? 산이 간다!"라고 외치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주산이 지리산의 아들이라면 그 옥산은 지리산의 딸이라 불러도 좋은 산이다.
# 하산길은 지네가 지나간 듯 등로에 깊은 골이 생겼다.
#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곳곳에 대밭이 푸르게 형성되어 있다.
# 작은 계곡이 나타난다. 이 계곡물이 모여 산 아래 궁항지를 이룬다.
# '광대수염'을 오랜만에 만났다. 광대수염은 꿀풀과로 들깨를 닮은 잎과 입을 벌리고 서있는 듯한 꽃이 특징이다. 꽃에는 잔털이 많다. 한방에서는 '야지마(野芝麻)'라고 부른다. 해열, 타박상 및 여성질환에 효능이 있다 한다.
# 숲을 벗어나면 좋은 산책로 같은 임도가 나온다.
# 산 속에 위치한 오율마을을 만난다.
# 오율마을은 봄이 가기 전에 이미 가을 냄새가 난다. 골짜기 속에 파묻힌 마을 뒤를 단풍나무 숲이 둘러쌓다.
# 마을 길을 휘감아 내려가다가 갈림길을 만난다. 둘레길은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 산길로 오르라고 한다.
# 언덕 길을 올라 가는데 전방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이 내려온다. 친구끼리 둘레길 순례에 나선 모양이다. 중년의 여성들이 친구끼리 있으니 소녀 감성이 샘솟는 듯 재잘재잘 수다꽃이 피었다.
# 잠시 올라가다가 다시 좌측으로 꺾어 산길을 올라야 한다.
# 가파른 길이라 초입에는 밧줄까지 준비되어 있다. 햇살 좋은 곳이라 곳곳에 취나물이 산재해 있다. 취나물에 빠져 가파른 줄도 모르고 올랐다.
# 취 따느라 정신 없는데 아래쪽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저이는 일 주일 정도 둘레길을 야영하며 연속 종주하는 중이다. 아침에 위태에서 나보다 먼저 출발하는 것을 보았는데 중간에 내가 추월하였다가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 가파른 고개다. 고개 위에서 바람 샤워 한 번하고 고개를 넘어갔다.
# 5월의 신록이 숲 가득하다. 그 숲향기 맡으며 긴 산길을 이어갔다.
# 그러다 숲을 벗어나 포장된 임도에 내려섰다. 이 쯤에서 회사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불쾌한 내용의 전화라 한참동안 마음 다스리느라 애먹었다.
# 임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궁항리가 나온다. 저멀리 가야 할 양이터재가 있는 잘록한 고개가 보인다.
# 동네 이름인 '궁항(弓項)'은 '활목'이란 뜻으로 이 동네의 지형이 활처럼 휘어진 형태이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인근에 활촉산이라는 산도 있다.
# 도로를 건너 마을 안으로 곧게 이어진 길을 따라 올라간다. 도로 건너편 동네는 음지말이다. 지나온 주산쪽 동네는 양지말이다.
# 어린아이 주먹만하게 큰 민들레 홀씨가 길가에 솜방망이처럼 서 있다.
# 음지말을 오르며 지나온 주산 방향을 돌아본다. 양지말이다. 내 느낌에는 양지말보다 음지말이 햇볕이 더 잘 드는 것 같다.
# 길가에 황토벽돌로 지은 전원주택이 있다. 조망 좋고 햇살 좋은 곳에 자리했다. 주말주택인지 대문이 잠겨 있다.
# 길은 저멀리 양이터재를 향해 길게 이어진다.
# 길게 오르다 경사가 급해지는 곳에서 길은 좌측으로 꺾인다.
# 돌아보면 주산이 우뚝하다. 산동네이기는 한데 넓고 완만한 터에 자리잡았다.
# 고도가 높아지자 길옆 양지쪽에 취나물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 산길이 크게 휘감는 곳에 양이터마을이 있다. 숲속에 푹 파묻혀 산과 하나가 된 듯한 동네다. 지금이야 문명 발달하여 외부 세상과 늘 소통하며 살겠지만 예전에는 산짐승들과 동무하고 살았을 법한 동네다. 마을 이름인 양이터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들어온 양씨와 이씨 집안 때문이라는 유래가 전해지는 곳이다.
# 길은 다시 숲을 벗어나 넓고 평탄한 동네로 이어진다. 이곳은 집은 두 채 뿐이고 꽤 넓은 밭으로 되어 있다.
# 둘레길 나들이 나선 한 가족과 지나쳤다. 저 가족은 건강한 웃음소리 남기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 잠시 오르면 길가에 자전거 하나가 누워있다. 자세히 보니 예술작품의 탈을 쓰고 있다. 영화 이티에서 이티와 엘리엇 형제가 달속으로 우주선처럼 타고 날던 자전거를 묘사한 작품인 모양이다. '우주사고'라는 작품 이름표도 달고 있다. 내 눈에는 그냥 동네 아파트 입구에 버려진 자전거와 별 차이 없어 보였다.
# 조금 더 올라 만나는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방향을 잡는다.
# 한차례 낑낑 오르면 양이터재가 나온다.
# 양이터재를 두 번째로 만났다. 첫 번째는 2011년 11월 낙남정맥 종주할 때였다.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 분성산 거쳐 동신어산 아래 낙동강으로 잠기는 산맥이다. 그 때는 지금보다 공터도 좁고 화장실과 벤치만 있는 상태였다.
# 근 10년만의 만남이다. 그때도 혼자였고 오늘도 혼자다. 그때는 산마루금을 따라 가로로 산을 오르내렸고 오늘은 산길을 따라 세로로 이 양이터재를 넘는 차이가 있다. 어쨌거나 내가 이 땅의 산길, 들길, 물길을 나홀로 더듬어 돌아다니다보니 이렇게 같은 장소를 가로와 세로로 교차하여 지나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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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없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바람 좋은 곳이다. 배낭 내리고 오래 휴식했다. 마눌이 챙겨준 간편식으로 점심도 해결했다.
# 양이터재는 이제 완전히 운동장처럼 넓어졌다. 바람 좋아 거풍도 즐기고 오래 쉬었다. 한참 뒤에 오율에서 만났던 순례꾼이 햇볕에 벌겋게 달아 올라온다. 이번 구간은 고개가 세 개나 되어 무거운 박배낭 메고 오르내리기에 벅찬 구간이다. 나도 처음 둘레길을 시작할 때 야영으로 전 구간을 끝낼 계획이었고 절반 이상을 야영짐 지고 진행했기에 저 심정을 잘 안다.
그나저나 그이는 하루 더 야영할 예정인데 비 소식도 있고 먹을꺼리 준비도 못해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나도 준비가 적어 그 걱정 덜어주지는 못하고 간식 조금 나누는 것으로 마음만 나눴다. 이윽고 그와 작별하고 먼저 양이터재를 떠났다.
# 양이터재 이후의 길은 평탄한 임도로 이어진다. 조망 트인 임도는 걷기에 참 좋다. 시선을 멀리 두고 유유자적 걷는다.
# 서너 차례 산허리를 휘감던 길은 바위 하나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숲으로 내려 가라 한다.
# 갈림길 주변에는 고사리가 아주 많다. 순식간에 한 웅큼 손에 쥘 수 있다.
# 숲길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길은 계곡과 함께 아래로 나란하다. 계곡 옆에 오래 묵어 생을 다한 나무가 있다. 나무는 죽어서도 꼿꼿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섰다. 게다가 죽음 이후에도 노란꽃 달린 피나물이 자기 몸에 뿌리내리게 허락하였다.
# 아주 맑은 계곡이다. 규모가 적어 수량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사철 끊김 없다.
# 이곳에도 묵정밭의 흔적이 있다.
# 규모가 아주 큰 대나무숲을 지난다. 대숲은 햇볕 들지 않아 서늘하다.
#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숲이 있다. 그 아래 벤치가 있어 잠시 쉬었다.
# 이윽고 숲을 벗어났다. 임도가 크게 휘감는 곳에 산불감시원의 자동차가 서 있다.
# 큰꽃으아리. 어린아이 손바닥 만한 큰꽃으아리는 미나리아재비과이다. 동북아시아에 널리 분포한다. 뿌리는 위령선(威靈仙)이라는 약재로 쓰며 사지마비, 요통, 타박상 등에 사용한다.
# 지칭개. 엉겅퀴를 닮은 지칭개는 겨울이나 이른봄에는 냉이를 닮은 잎으로 지내다 봄에 줄기를 밀어 올려 꿏을 여러 개 피운다. 엉겅퀴와의 차이는 가시의 유무로 구별이 쉽다. '즈츰개'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식물 전체를 약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찾아보니 거의 만병통치의 약이다. 항암, 간기능 보호, 소염, 소독, 청혈, 이뇨로 고혈압 동맥경화에 탁월하다고 한다.
# 숲을 벗어나면 전방으로 하동호의 푸른 물결이 보인다.
# 길게 내려 나본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넓은 테크 쉼터가 있다.
# 둘레길은 좌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본마을을 따라 가던 길은 곧 하동호 곁에 만든 데크 길로 연결된다.
# 오동나무가 보랏빛 꽃을 피웠다. 저 오동나무 꽃이 피면 이제 봉황이 날아와 앉게 된다. 예로부터 오동의 봉황의 나무로 알려졌다. 오랜만에 만난 오동나무 꽃이 신기해 한참 구경하였다.
# 하동호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묵계천과 금남천의 물길을 막아 댐을 만든 곳이다. 1984년 착공하여 1993년 완공하였다. 물 맑은 지리산의 물길을 막은 터라 처음에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던 댐이다.
# 넓은 하동호를 완전히 반바퀴 돌아 가는 형태라 길이 멀고 무릎에 부담도 많이 된다.
# 댐의 둑을 지나 우측 리조트 앞까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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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의 계곡을 막아 댐을 만들어서 아랫동네에는 물길이 끊겼다. 이 댐 아래에는 횡천이 있다. 횡천은 '가로 橫', '내 川'을 쓴다. 맑은 시내가 마을을 가로지른다는 얘기다. 수십 년 전 둘째누님이 횡천에 살았다. 자형이 횡천중학교 교사를 한 까닭이다. 고교시절이었는데 누님댁에 자주 놀러 갔었다. 나는 동네 안으로 흐르는 냇물이 그렇게 맑은 곳은 평생 본 적이 없다. 횡천을 그런 동네였다. 지금은 이 댐 때문에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 댐 중앙에서 호수 전체를 조망했다. 시원한 풍광이다.
# 지친 모습으로 댐을 걷는 모습 보고 나인줄 알고 마눌이 마중나왔다.
# 몸에 묻은 먼지 털어내고 둘레길 10구간을 마무리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행사 뒤풀이 중이다. 경치 좋은 곳이라 어느 온라인 모임에서 답사를 나왔다. 인터넷 문화 발달하면서 사람 사이의 만남이 참으로 다양해졌다.
# 하동호 관리사무소 화단에 양귀비 예쁘게 피었다. 그 색깔이 하도 붉어 검붉은 빛 짙고도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