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8구간(운리~덕산)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조선 후기 숙종과 영조 연간의 실학자(實學者)이다. 판서 집안인 명문가의 자손으로 안산 첨성리(瞻星里)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는데,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놀라운 학구열과 부친인 이하진(李夏鎭)이 연경(燕京)에서 사온 수천 권의 서적이 학문의 바탕이었는데, 대표적 저서로는 백과전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이 있다. 성호사설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의 다섯 가지 문(門)으로 크게 분류한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성호사설 제1권인 천지문(天地門)에 우리 동방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동방인문(東方人文)편'이다. 그에 의하면 조선의 대표적 인물은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이다.
"退溪生扵小白之下 南冥生扵頭流之東 皆嶺南之地 上道尚仁 下道主義 儒化氣莭如海濶山髙扵是乎文明之極矣(퇴계생어소백지하 남명생어두류지동 개영남지지 상도상인 하도주의 유화기즉여해활산고어이호문명지극의 ; 퇴계(退溪)는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南冥)은 두류산(頭流山)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또 같은 책 '백두정간(白頭正幹)편'에도 두 성현(聖賢)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원래 지리(地理)와 인물(人物)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백두산의 정기가 뻗은 이 땅의 지리는 그 품 속에 인물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백두정간편에 퇴계와 남명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退溪生扵大小白之下 為東方之儒宗 其流深㴠濃郁揖遜退讓文彩彪暎有洙泗之風焉 南冥生扵頭流之下 為東方氣莭之最 其流苦心力行樂義輕生利不能屈害不能移有特立之操焉 此嶺南上下道之有别也(퇴계생어대소백지하 위동방지유종 기류심함농욱읍손퇴양문채표영유수사지풍언 남명생어두류지하 위동방기즉지최 기류고심력행락경생리불능굴해불능이유특립지조언 차영남상하도지유별야 ; 퇴계(退溪)는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계통을 받은 인물들이 깊이가 있으며 빛을 발하여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학이 찬란하여 수사(洙泗)의 유풍을 방불케 하였고, 남명(南冥)은 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후계자들은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어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위험이 닥쳐온다 하여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여 독립적 지조를 가졌다. 이것은 영남 북부와 남부의 다른 점이다)"
퇴계와 남명은 동갑의 나이로 동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인물이지만, 두 사람의 길은 많이 달랐다. 퇴계는 비록 수십 차례 사직(辭職)과 고사(固辭)를 반복하기는 했어도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현실 정치 참여와 함께 평생 품었던 나름의 뜻을 펼쳤다.
반면 남명은 여러 왕의 초빙(招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고사하고 산천에 머물며 학문의 길에 매진하였다. 그것이 '인(仁)의 퇴계'와 '의(義)의 남명'을 가르는 갈림길이었다. 벼슬과 세속적 욕망을 마다하고 산림에 묻혀 오로지 학문의 숲에 기거한 선비의 삶이 남명을 올곧은 의(義)의 표상(表象)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
실록(實錄)을 조사해 보니 남명에 대한 기록이 무려 228건이 찾아진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신분이었는데도 그의 학문적 위상과 올곧은 선비로서의 위명은 나라 곳곳에 혁혁하였던 것이다.
실록의 첫 등장은 중종(中宗) 35년 7월의 기록이다. 그해 왕이 천하의 일사(逸士) 즉 숨어있는 선비를 천거하라고 명하여 수십 명의 다른 일사들과 함께 천거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후 계속된 천거와 벼슬 제수에도 그는 출사하지 않고 처가가 있는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명종(明宗) 10년에 왕이 그를 단성 현감(丹城 縣監)에 제수했다. 그러나 그는 부임하지 않고 조선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른바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乙卯辭職上疏)이다.
"抑殿下之國事已非 邦本已亡 天意已去 人心已離, 比如大木 百年蟲心 膏液已枯 茫不知飄風暴雨 何時而至者久矣。在廷之臣 非無忠義之士 夙夜之良也 已知其勢極而不可及 四顧無下手之地。小官嬉嬉於下 姑酒色是樂 大官泛泛於上 唯貨賂是殖, 河魚腹痛 莫肯尸之 而且內臣樹援 龍挐于淵 外臣剝民 狼恣于野 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臣所以長想永息 晝而仰觀天者數矣 噓唏掩抑 夜以仰看屋者久矣。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 只是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 何以當之 何以收之耶 川渴 雨粟 其兆伊何 音哀服素 聲像已著。(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으며,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龍)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정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내렸으니 그 조짐이 어떠합니까? 음악 소리가 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요약하자면 "왕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없어졌다. 하늘의 뜻은 떠났고 민심은 이반되었다. 벼슬아치들은 주색에 빠지거나 재물 긁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책임지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이때 명종은 갓 스물의 어린 나이였고 모친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다. 왕의 권위가 없어 외척(外戚)인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고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조정이 이러하니 안으로는 임꺽정 같은 도적이 발호하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남명은 국정 혼란의 근본인 그 상황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과 대비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대비는 구중궁궐에 깊이 들어있는 과부에 불과하고 왕은 나이가 어린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에 왕조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임금과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문정왕후를 직접 거론하여 비판한 것이다.
이는 가히 목숨을 돌보지 않은 강직한 상소였고 나라의 존망(存亡)을 염려하는 충신의 의로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왕은 어리고 무지하였다. 남명의 그러한 깊은 심중을 헤아릴 덕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남명의 상소가 군신(君臣)의 의리를 모르고 공손하지 못하니 처벌할 것을 전교하였다.
그러나 사관이 상소의 내용이 격절(激切)하고 강직(剛直)하다 하여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화를 불러온다고 막아 처벌되지는 않았다. 이후 남명은 조선 정계의 문제적 인물로 대두되었고 재야 사림(士林)의 영수로 자리매김 되었다.
주역(周易) 문언전(文彦傳)에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 경의립이덕불고 ; 군자는 경건하여 마음을 곧게 하고 마땅한 의리를 행하여 바깥을 반듯하게 한다. 경과 의가 바로 서면 덕은 외롭지 않게 된다)"란 해설이 나온다.
남명은 주역의 '경(敬)'과 '의(義)'를 평생을 좌우할 실천적 지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몸에 늘 차고 다니던 칼에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 ;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글귀를 새겨 스스로를 경계했다.
1561년 그의 나이 61세 때 남명은 지리산 아래 산청(山淸)의 덕산(德山)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 산천재(山天齋)라는 독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냈다. 남명이 지리산 자락인 덕산을 노후의 거처로 삼은 것은 그의 지리산 사랑함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백두의 산맥이 뻗어내린 산이다. 일러 두류(頭流)라고 불렀다. 한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추앙받아 역사의 기록은 물론 민간의 생활 깊숙이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평생 산림처사였던 남명에게 지리산은 정신과 사상의 지표였다. 그리하여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덕천강(德川江) 가에 산천재를 지어 매일 상봉(上峯)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생애를 통해 열두 차례나 지리산 등정을 하였다. 특히 58세 때인 1558년 초여름 진주목사 김홍 등 지인들과 하동의 쌍계사와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새긴 '경의검(敬義劍)' 외에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 방울의 이름은 '성성자(惺惺子)'였다. 성(惺)은 '사물의 도리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성성자는 방울 소리를 통해 스스로 경계하고 깨닫기 위한 방안이었다.
남명이 지리산을 올랐을 때도 성성자를 매달고 갔을 것이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소리 영롱하게 울렸을 것이다. 남명 일행의 수는 이삼십 명이 넘었다. 그들 모두의 귀에 남명과 함께 한 이십오 일 동안 방울 소리 내내 울렸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방울 소리가 시끄럽다 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남명의 의도처럼 스스로 경계하고 깨닫고자 하였을 것이다.
남명은 일평생 산림에 거하며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추구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남명 같은 그릇이기에는 터무니 없으나 남명 같아지기를 바랄 수는 있다. 그리하여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그의 올곧은 정신과 사상을 껍데기나마 느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 8구간은 남명선생의 유적지인 산천재가 있는 덕천강 가에서 마무리된다. 구간 곳곳에 남명의 발자취 어린 곳이다. 그의 발자취 따라 산길 걷는 내내 방울소리 귓가에 어른거렸다. 성성(惺惺)!
남명(南冥)과 지리(智異)!!
구간 : 지리산 둘레길 8구간(운리~덕산) 거리 : 구간거리(13.9km), 누적거리(108.0km, 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8년 05월 21일, 달의 날 세부내용 : 운리 ~ 원정마을 ~ 임도 쉼터 ~ 참나무군락지 ~ 백운계곡 ~ 마근담 ~ 사리마을 ~ 산천재 ~ 선비문화연구원 ~ 덕산.
전날 둘레길 7구간을 마치고 운리 탑동에 내려서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택시 불러 성심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회수한 이후 우리는 원지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음식물만 구입하라 작정이었으나 원지 강변의 데크가 생각나서 그대로 원지에 머물렀다. 강변 데크는 고요하고 안온하였다. 평안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잠자리 평안하여 컨디션도 좋았다. 그 기분 살려 즐거이 다음 구간을 잇고자 하였다.
지리산 둘레길 8구간(운리~덕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마을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까지 걷는 13.9km의 지리산 둘레길. 운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걷다보면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따라 걷는 길에서 백운동 계곡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 이 길은 나무를 운반하는 운재로였다. 임도 아랫부분에 너른 길이 울창한 참나무 숲속에 남아 있다. 참나무 숲을 걷다보면 너들도 만나고 작은 개울도 지난다. 좁아진 길을 지나 백운계곡을 만나고 백운계곡에서 마근담 가는 길은 솔숲과 참나무 숲을 지난다. 남명조식선생이 머물렀던 산천재가 있는 사리에서 바라보는 덕천강과 천왕봉은 아름다움과 굳센 기상을 담고 있어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의미있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 안내센터 산청센터(성심원) – 경남 산청군 산청읍 산청대로 1381번길 17/055-974-0898 중태안내소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송하중태길 280/ 055-973-9850 ♠ 구간 찾아가기
운리(운리마을회관)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515 덕산(덕산터미널 or 남명조식기년관) – 산청군 시천면 사리 923-10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지리산 둘레길 7구간(성심원~운리)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우리가 전날 이곳 원지에 야영 자리를 잡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깔끔하고 고요하였으며 편안한 밤이었다.
# 양천강 건너 엄혜산 절벽이 우뚝하다. 이 양천강은 흘러 곧바로 남강에 합류한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이라 둔치가 발달하였다. 아침에 보니 우리 말고도 저멀리 둔치 넓은 주차장 근처에 캠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원지는 예전에는 아주 한적한 시골 동네였는데 지금은 제법 어느 도시에 못지 않은 시가지와 각종 인프라를 갖추었다. 이 동네가 진주와 지리산, 그리고 외부 세계를 잇는 교통 요지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그동안 고향에 벌초 가거나 시제 모시러 갈 때, 혹은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진주에 있는 숙박업소를 이용하기 보다는 이곳 원지의 숙박업소를 이용했다. 원지 강변에 숙박업소가 여럿 성업 중이고 맛난 어탕이나 매운탕을 하는 식당이 있어서 그랬다. 그때 이 동네의 발달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랬는데, 오늘 이렇게 야영을 하고 보니 휴양이나 산책 공간에게도 놀라게 된다.
# 원지에서 아침 끓여 먹고 짐 정리한 후 운리로 다시 돌아갔다. 운리의 넓은 주차장에는 우리 차밖에 없다. 어제 7구간 종료 후 이곳 운리 주차장 정자에서 야영할까도 생각했는데, 음식 준비가 부족하여 부득이 원지로 갔다가 그곳에 머물고 말았다.
# 지역 택시 전화번호와 요금이 기재되어 있다.
# 운리 마을 뒤로 웅석남능선의 흐름이 장쾌하게 흐르고 있다.
# 산행 준비 마친 후 운리 주차장을 떠났다.
# 감나무 심겨진 길을 따라 산쪽으로 접근했다.
# 노란 감꽃이 피었다. 우리는 어릴 때 저 감꽃을 감똘개라 불렀다. 감똘개를 주워 실에 꿰면 승려의 염주같은 긴 목걸이가 된다.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다가 배 고플 때 하나씩 따 먹곤 했다.
# 주변 풍광 찍느라고 무심코 마눌의 뒤를 따랐는데 그녀는 그냥 길을 따라 위로 올라 가기만 했던 모양이다. 농로 따라 위로 오르다보니 운리 마을 깊숙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때 동네 분과 말씀 중이던 할머니 한 분이 둘레길이 아니라고 돌아 내려가라 하신다. 그분 아니었다면 더 깊이 올라 갈 뻔 했다.
# 이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원정마을로 가야 하는데 산쪽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 정확한 둘레길에 복귀했다. 원정마을이다.
# 시작은 편안한 농로이다.
# 길가에 예쁜 꽃이 만발하다.
# 살펴보니 작약꽃이다. 작약(芍藥)은 뿌리를 약재로 쓴다. 위염, 위장장애, 이질은 물론 부인병이나 간염에도 효염이 있다 한다. 우리가 감기 몸살 걸렸을때 감기약과 함께 마시는 쌍화탕의 주재료가 작약뿌리이다. 약성 좋은 것이라 이렇게 다량으로 키우는 모양이다.
# 편안한 길이다. 둘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걸었다.
# 그 길에 찔레꽃 향기 가득했다.
# 때죽나무 꽃향기도 지지 않는다.
# 이 동네는 물이 좋은 곳이다. 길가 도랑에 흐르는 농사용 물도 아주 맑다.
# 가끔은 언덕 길도 나타난다.
# 깊은 산속이 아니어서 휴대폰 잘 터진다. 그러니 속세의 연락에 단절되지 못한다.
# 마눌은 업무에 관련된 전화 받느라 자꾸 뒤처진다.
# 자! 이제 속세 일은 잊고 솔방솔방 걸어봅시다!
# 약간 어설프게 사방 공사한 곳을 지난다.
# 편안하게 가던 길이 우측으로 휘며 산 위로 향하는 곳에 쉼터가 있다.
# 바람 좋은 곳이라 짐 내리고 쉬었다.
# 웅석봉, 청계 방향이 돌아다보인다.
# 웅석남릉의 산줄기.
# 운리 우측의 석대산과 저멀리 둔철산이지 싶다.
# 좋은 포토 포인트 있다.
# 오래 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 예전에는 이 산자락에서 질 좋은 고령토를 많이 생산하였다 한다. 지금 이 길은 그때 고령토를 실어 나르던 길이다.
# 임도는 곧장 고령토 채석장으로 이어지고 둘레길은 그 임도를 버리고 좌측 숲으로 올라 간다.
# 숲 향기 가득한 길을 따라 위로 올라 갔다.
# 이 숲속에도 갈림길이 자주 나타난다.
# 기가 막힌 소나무 숲이 우리를 반긴다.
# 솔향기 그 숲속에 가득하였다. 기분 좋은 길이다. 콧노래 부르며 솔방솔방 걸었다.
# 이윽고 지도에 참나무숲이라 기록되어 있는 참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이 숲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한편 등로 주변에는 취나물이 쉼없이 나타난다.
# 숲향기 맡으며 가끔 취향기 맡으며 그 길을 걸었다.
# 참나무 군락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이 둘레길 중 참나무가 가장 많은 곳이라 한다.
# 멋진 숲이다. 좋은 기분으로 숲향기를 즐겼다.
# 우측에 작은 지계곡이 있고 물줄기가 가는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있다.
# 너덜지대 통과.
#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후 이윽고 바위 위에 몸을 얹혀 한 세월 살아왔다.
# 물소리 점점 크게 들리더니 백운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남명(南冥) 선생의 시가 적혀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그의 시는 고대 중국 한나라의 창업 공신인 장자방(張子房)의 고사를 읊은 시이다. 천하 통일 후 장량(張良)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공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유(留) 땅의 제후에 만족하였다. 창업 이후 공신들의 욕심이 화를 불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안 까닭이다. '재봉유(在封留)'는 그런 장자방의 무욕(無慾)과 혜안(慧眼)을 드러낸 말이다. 남명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자락에 머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남명 역시 세속적 욕망의 허망함을 잘 알고 일생 스스로 경계한 것이다.
# 남명의 얼이 녹아 있는 멋진 계곡이다.
# 물소리 맑고 청아하며 솔바람 시원하였다.
# 계곡으로 내려가 짐 내리고 쉬었다. 점심 먹고 막걸리도 한 잔 하였다. 이윽고 느긋하게 휴식하였다. 계곡물에 발 담그니 얼음같이 차갑다. 오래 걷느라 지친 발이 호강하였다.
# 멋진 계곡에서 오래 쉬었다. 좋은 곳이다. 둘레길과 무관하게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 계곡 곁에 장승 무리가 서 있다. 표정이 제각각 다른 얼굴이다. 누구 작품인지 모르지만 잘 만든 장승이다. 그 중 하나는 무한불성(無汗不成)이라는 글을 달고 있다. 땀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는 법이다.
# 오래 쉰 값을 하려는지 길은 위쪽으로 가팔라진다. 무한불성을 알려주려나 보다.
# 소나무 대문 통과.
# 솔향기 가득한 정상부가 나타난다.
# 둘레길은 그곳에서 좌측으로 구십 도 꺾인다.
# 그리고는 마근담을 향해 깊게 스며들게 된다.
# 가늘고 구불구불한 길이 길게 이어진다.
# 그 길 끝에 시멘트 길이 나타난다. 이 길 따라 위로 계속 올라가면 안마근담 마을이 나타난다. 마근담은 "막힌 담" 혹은 "막은 담"이란 뜻이다. 사리의 계곡이 마근담봉과 이방산, 그리고 감투봉 사이에 끼어 골무 속에 끼인 듯 더이상 올라 갈 수 없게 막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
# 둘레길은 좌측으로 가야 한다.
# 이 길 좌측엔 아주 질 좋은 취나물이 숲바닥에 가득하다. 아마도 누군가 개인 소유의 농장인 듯하다. 대신 우측 숲에는 자연 상태의 취나물이 많이 있다. 좌측 숲에 비해 억세고 품질 떨어지기는 하지만.
# 좋은 곳에 자리 잡으셨다. 부럽다.
# 자동차 회차로 같기도 하고 쉼터 같기도 한 광장에서 좌측으로 꺾는다.
# 꽤 큰 규모의 펜션이 있다. 저 객실 다 채우려면 애 좀 먹겠다.
# 이제부터는 마근담 길을 따라 덕산까지 길게 내려가는 코스이다.
# 골이 깊은 곳이라 골짜기 아래가 아득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햇볕이 부족하겠다.
# 길이 긴 내리막으로 되어 있어 자연스레 터벅터벅 걷게 된다.
# 계곡가 어느 가건물 곁에 평상이 놓여 있다. 때죽나무 꽃잎이 점령하고 있어 쉬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 골짜기에 펜션도 많고 개인 농장이나 전원주택도 여럿 있다. 길가 어느 주택은 정원의 모든 돌을 하늘 높이 새워 놓았다. 이 댁 주인은 남근숭배 사상을 가진 모양이다.
# 아래로 내려 갈수록 계곡의 수량이 풍부해진다.
# 계곡 건너 저 댁은 감나무 농장을 하고 있다. 이 골짜기는 대부분 저 댁처럼 곶감농사를 위한 감나무 농장을 하고 있다. 내 노후의 지향점 중 하나가 이 동네 근처로 내려와서 곶감농사 짓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저런 풍경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 길가 어느 감나무 농장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포장된 딱딱한 내리막 길을 오래 걸었더니 무릎과 발바닥 모두에 부담이 많이 갔다.
# 먼 길이었다. 마근담에서 5km 정도 걸어 내려 왔다. 그곳에 사리마을이 있다. 물 좋은 곳이라 아직도 동네 빨래터가 있다. 손 씻고 몸에 묻은 먼지도 좀 털어냈다.
# 길가 어느 집 창이 예술작품에 다름없다.
# 덕산 사리마을 큰 길에 내려섰다. 잠시 우측으로 내려가면 남명기념관이 있다. 둘러보러 갔더니 휴일이라 문이 잠겨 있다.
# 도로 건너 산천재로 갔다. 산천재(山天齋)는 이미 여러 차례 다녀간 곳이다.
# 남명은 뜻이 하늘처럼 높은 분이셨다. 그리하여 지리산 천왕봉처럼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 경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 오랜만에 산천재를 다시 찾았다. 그 붉은 기둥 어루만지고 재회하였다.
# 남명매(南冥梅)도 다시 만났다. 어제는 정당매(政堂梅)를 만났고 오늘은 남명매를 만났다. 산청삼매(山淸三梅) 중 2매를 만난 것이다. 이제 원정매(元正梅)만 만나면 되는데, 나중에 매화꽃 필 때 삼매를 모두 찾아봐야겠다. 3월 중순이 절정이라 하니 그때를 기약해본다.
# 산천재를 나와 다시 길을 이었다.
# 햇살이 굉장히 뜨겁다. 그 햇살 온몸으로 맞으며 덕산 시장쪽으로 걸어갔다. 한국 선비문화연구원이란 큰 건물을 지난다. 재작년 봄에 지리산을 찾았다가 덕산 일대에서 선비문화제를 하길래 저 건물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에 도착했다. 이곳 덕산은 지리산을 가기 위해 자주 들렀던 곳이다. 역사 깊은 곳이고 자연 환경 좋은 곳이다. 나는 이곳 덕산 주변에서 뿌리 내릴 날을 기대하고 있다.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덕산시장 입구에서 지리산 둘레길 8구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덕산택시 타고 운리로 돌아갔다. 우리 배낭안에는 어제처럼 취나물이 제법 들어있다. 굳이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둘레길 걷는 길가에 취나물이 가득했다. 욕심 부리지 않아도 허리만 굽히면 두어 번 먹을 양은 순식간이었다.
# 둘레길 순례 마치고 곧장 귀경하지 않고 다시 원지를 찾았다. 원래 우리는 이번에 지리산으로 내려오면서 어버이날 지난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부모님 산소에 가보자 했었다. 그러자면 진주 근처에서 하룻밤 더 묵을 곳이 필요했다. 여러 곳을 궁리했지만, 최고의 장소는 어젯밤 묵었던 원지 강변이었다.
# 다시 어제 그 장소에 집 한 채 올렸다. 원지 지역 마트에서 이것저것 시장 보고 저녁상 차렸다. 오늘 산에서 몇 주먹 딴 취나물 씻어서 쌈 싸고 막걸리 한 잔 나눴다. 좋다! 맛나다!
# 원지 강변의 밤은 오늘도 안온하였다.
# 좋은 야영 장소이다. 앞으로 진주나 지리산 근처에 올 때면 종종 이용할 예정이다.
이후 고향 진주에 가서 부모님과 선조들 산소에 술 한 잔 올리고 어버이날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부모님 산소 주변에도 취나물이 아주 많았다. 나중에 우리 형님들께 얘기했더니 원래 많았단다.
나는 수십 년 그곳을 오르내렸음에도 우리 선산에 취나물이 있는 줄 몰랐다. 아마도 예전에는 취나물이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탓이리라. 역시나 세상은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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