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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그 첫걸음(여원재~사치재) - 백두대간 그 첫걸음 본문

1대간 9정맥/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그 첫걸음(여원재~사치재) - 백두대간 그 첫걸음

강/사/랑 2007. 6. 21. 21:04
 [백두대간]그 첫걸음(여원재~사치재)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우리 전통 지리관(地理觀)의 중심 개념이다. 우리 옛사람들은 이 땅의 산줄기를 백두대간과 거기서 갈라져 나온 한 개의 '정간(正幹)', 그리고 열세 개의 '정맥(正脈)'으로 구분하였다.


이 대간과 정맥의 분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 아래 구별되었다. 산자분수령이란 산이 스스로 물길을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산길은 물길을 건너지 않고 물길은 산길을 넘지 않았다.


산길과 물길이 서로 상응하여 흐르는 그곳에 우리 옛 선인(先人)들은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 산길과 물길에 순응하여 삶을 꾸려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산자분수령은 우리 민족 인문지리(人文地理)의 대원칙이고 백두대간과 아홉 개의 정맥은 우리 산줄기의 근간(根幹)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념을 우리는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고 잘못된 지식을 진리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왜인(倭人)들의 조선 침략 야욕에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이다.


고토 분지로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지질학자이다. 그는 1900년 대원 여섯 명, 당나귀 네 마리로 구성된 초라한 답사대를 이끌고 군산을 출발하여 14개월간의 답사로 우리 땅 산줄기 조사를 마쳤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태백산맥을 비롯한 열네 개의 산맥으로 구성된 '조선산악론(朝鮮山岳論)'이다.


비록 그의 연구가 이 땅 최초의 지질 탐사 기행이었고 우리나라 지질학사의 주요 분기점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나, 당시의 왜국은 조선 강점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때이니 그의 연구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 결과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의 산줄기 지식은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과 같은 '산맥(山脈)'개념에 묶여 있다. 왜인이 조선 침략과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구분한 산맥을 우리 아이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양 외우고 있는 것이다.


고토 분지로가 창안한 산맥은 땅속의 지질구조선(地質構造線)을 기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 지형을 반영하지 못한다. 땅속 지질이 땅 위 지형과 일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산맥이 강을 사이에 두고 단절된 채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아이러니도 생긴다.


원래 우리에게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과 '백두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이라는 우리 땅의 산줄기 개념이 있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억눌려 오래 숨어 있었을 따름이다.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의 저서로 추정되는 '산경표(山經表)'의 발굴은 그동안 잊혀 있던 백두대간을 세상 속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산경표는 우리 땅의 산줄기를 열다섯 개로 분류하고 족보(族譜) 기술 식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속에 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을 분류하고 다시 기맥(岐脈)으로 가지 쳐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이 모든 산줄기가 조종(祖宗)인 '백두산(白頭山)'을 중심으로 갈래 치도록 구분하였다. 즉, 하늘님이 백두산을 잡아당기면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마치 벼리(綱)를 따라 그물이 둥글게 당겨지듯 하나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따라 물줄기와 산줄기가 서로 침범치 않고 호응하며 흐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이 땅 대간과 정맥, 그리고 기맥이 물줄기와 호응하는 그 언저리에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산경표의 출현은 잊혔던 산줄기의 재인식과 더불어 새로운 기준과 목표의 제시였다. 기준이 똑바로 서니 해야 할 행동이 뒤따른다. 이제 우리는 산경표를 기준으로 태백산맥이나 소백산맥이 아닌 백두대간과 정맥을 공부하거나 걸을 수 있다. 그로써 이 땅의 참 산줄기를 파악함은 물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인간세의 모습도 함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노력의 일환이 '백두대간 종주(白頭大幹 縱走)'이다.


'종주(縱走)'는 산맥의 끝과 끝을 이어 걷는 것을 말한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줄기이다. 도상 거리 1,625km의 길고 긴 흐름이다. 이 땅의 등뼈이자 그 길고도 넓은 품속에 한민족의 삶을 오천 년 세월 오롯이 안고 한민족과 함께해온 민족의 생명줄이다.


1980년대 초 고지도(古地圖) 연구가인 '이우형(李祐炯)'씨에 의해 산경표가 발굴된 이후 의식 있는 여러 산꾼들이 백두대간 종주에 뛰어들었다. 잊혔던 산맥을 종주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산맥 개념과 그 흐름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눈 밝고 다리 튼튼한 산꾼들의 발길 이어지니 여러 사연이 누적되고 경험이 축적된다. 십수 년의 세월 흐른 지금은 그들이 땀과 정성으로 축적한 여러 자료와 기록이 백두대간의 존재와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은 백두대간 전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백두대간은 남녘 구간 640km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고성의 진부령까지다.


북녘땅이 제외되었다 해도 그 거리와 여정은 실로 멀고 험하다. 실제 거리는 800여 km에 이른다. 구간으로 구분하면 29개 구간, 55개 소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50여 개 소구간으로 나눔은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하루 치 걸음걸이를 감안한 것이다. 따라서 당일 혹은 1박 2일 산행으로 따져 매주 간다고 해도 1년이 걸리고, 한 달에 두 번 간다고 했을 때 2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다.


그 길 멀고 험하여 산 좀 다닌다는 산꾼 중에 아무나 쉽게 도전할 수 없고, 도전한 많은 사람 중에서도 온전히 끝까지 마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백두대간 종주이다.

그 백두대간 종주를 올해 들어 문득 결심했다. 선배 산꾼들의 종주기를 읽어보면 백두대간에 뛰어든 사유로 모두 대단한 인생의 각오를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정말 내세울 만한 대단한 이유가 없다. 그냥 그러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대간 종주의 소회(所懷)를 피력한다면 이렇다.

"어느 날 문득"

이 한 마디이다.

어느 날 문득, 참 늘어진 고무줄 같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
어느 날 문득, 정신에 때가 참 많이도 묻어 있구나 하는 생각.

어느 날 문득, 이대로 늙어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나를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산으로 들기 전 지금까지 나는 여가의 대부분을 낚시에 빠져 지내왔다. 내 고향은 경남 진주(晋州)이다. 그곳엔 남강(南江)이라는 큰 강이 있다. 그 강의 상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자란 나는 아주 어린 꼬맹이 때부터 낚시를 하였다. 이 취미는 학생이 되어서도, 군대를 다녀온 뒤 취직을 하여서도 계속되었다.


낚시꾼으로서 나의 모토는 '섬세하고 우아하게!'였다. 섬세하게 영점(零點) 조절된 단출한 채비로 단 한 마리를 낚더라도 우아하게 낚시하자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수십 년 온몸에 비린내 폴폴 날리며 이 땅의 수많은 저수지와 맑은 강계(江界)의 여울을 찾아다녔다. 


어릴 때부터 수십 년 이어졌으니 이제는 무뎌졌을 법도 하지만, 아직도 매주 물가에 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고 물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는 열정의 상태이다. 낚시 경력이 오래되다 보니 몸담고 있는 동호회도 두어 개가 된다. 만약 내가 백두대간 종주한다고 하면 낚시동호회 회원들이 배신했다고 난리일 것이다.

 

그런 평생 낚시꾼인 내가 백두대간 종주를 하겠다고 나섰다. 지리산 자락에서 자랐지만, 지리산이라고는 중산리에서 친구들과 닭백숙만 먹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고, 가끔 동네 뒷산이나 오르는 정도의 산행 수준인 사람이 백두대간 종주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결심하였으면 바로 실행하여야 한다. 2005년 유난히 길었던 설 연휴 동안 매일 가까운 수리산과 관악산을 오르며 생각을 다졌다. 그러다 태백산을 필두로 지리산, 소백산, 광교산을 4주 연속 오르면서 준비운동도 마쳤다. 그동안 선답자들의 종주기를 읽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장비도 하나씩 구입했다.

결심과 실행 준비를 마친 것이 3월 초이다. 이제 지리산으로 스며들면 된다 싶었는데, 확인해보니 국립공원들이 산불방지 기간으로 주요 구간들을 폐쇄하였다. 지리산 천왕봉부터 제대로 출발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5월 초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다.

기다리다 갖가지 핑계에 지게 될까 봐 쇠뿔을 단번에 뽑는 기분으로 일단 지리산 구간은 5월로 미뤄 두고 국공파의 간섭이 없는 지리산 다음 구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첫걸음은 제 5 소구간인 여원재 ~ 사치재 구간이다.


백두대간 그 첫걸


구간 : 백두대간 제 5 소구간(여원재 ~ 사치재)
거리 : 구간 거리(15.77 km)
일시 : 2005년 3월 26일.
세부내용 : 여원재 출발(08:40) ~ 김해김공종수지묘(11:00) ~ 고남산정상(11:40) ~ 고남산 임도/점심(13:10) ~ 유치재(1:59) ~ 매요휴게실(15:08) ~ 유치삼거리 ~618봉 ~ 사치재(17:00).


총 8시간 20분 소요.


토요일 새벽 2시30분 휴대폰 2개, 자명종 1개에 맞춰 둔 알람이 10분 간격으로 차례대로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주섬주섬 일어나 마눌 깨우고 뜨거운 샤워 물줄기를 뒤집어 쓰면서 잠을 털어냈다. 겨우 두 시간 눈 붙인 셈이다.

마눌 깨우고 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느라 출발은 4시 되어 겨우 이뤄졌다. 산본에서 출발해 영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대진고속도로, 다시 88고속도로까지 총 네 개의 고속도로를 연결해 남하하였다. 그러다 지리산 IC에서 나와 24번 국도를 탔다. 인월과 운봉 거쳐 오늘 구간의 출발점인 여원재(女院峙)에 도착했다.
 


백두대간/白頭大幹

우리의 전통 지리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백두대간은 이 땅을 동과 서로 크게 갈라 놓은 산줄기의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산줄기는 각각 1개의 대간(大幹)과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인식되었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 지었다.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 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 이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곧 분수령이다. 따라서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이라는 원리를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초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어 왔으며, 18세기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의 영향을 받은 이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이후 19세기에 고산자 김정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동여지도>는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지도라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 이르러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까지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로 , 이 땅을 대륙과 이어주는 뿌리이자 줄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총 길이는 1625여km이며, 백두산과 지리산의 사이에 북쪽의 2000m급 고봉들과 금강산,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품고 있다.(우리가 배웠고 우리의 자손들이 배우고 있는 지리 지식에 따르면 마천령 산맥 일부-함경산맥 일부-낭림산맥 일부-태백산맥 일부 -소백산맥 일부를 잇는 선에 해당) 이 가운데 남한 구간은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약 690km에 이른다.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어 각지의 언어, 습관, 풍속 등과 부족국가의 영역을 이루었고,삼국의 국경을 비록한 조선시대의 행정경계가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연스러운 각 지방의 분계선이 되었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이 땅의 지세(地勢)를 파악하고 지리를 밝히는 근본이 된다. 현재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은 1990년대초부터 일기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 열기로 대부분이 답사가 되어 많은 자료들이 쌓여 가고 있다. 학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간에는 1326종 식물과 희귀 야생동물들의 살고 있어서 꼭 보존해야 할 생태계의 보고라 한다. 이렇게 쌓인 자료와 조사를 바탕으로 한 여러 환경 단체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정부 부처(환경부, 건설부 등)에서도 생태의 보존과 보호에 우선적인 배려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한 상황이다. 백두대간의 출발점이 백두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분단의 장벽으로 인해 북한 쪽의 구간을 답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너무도 크다. 『산경표』의 지은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여암 신경준이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 설과 1800년대 초기에 어떤 이가 여암 신경준이 지은 책을 참고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 최근 『한글 산경표』를 펴낸 이에 따르면 "『산경표』는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누군가 편찬한 것이며 그 시기는 1800년 이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여원재 ~ 사치재 구간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여원재(女院峙)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옛 전설이 있는 고개이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와 싸울 때 운봉으로 들어오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 그때 지리산 성모(聖母)가 현신해 무운(武運)을 빌어주었다. 그 결과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성계는 지리산 성모의 은덕에 대한 보답으로 고개 이름을 여원재라 칭했다.


현지인들은 '연재'라고 부른다. 지금은 운봉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24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고개 위에는 이곳의 해발고도가 470m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버스정류소가 있다. 그 도로표지판 뒤에 있는 전봇대 뒤가 여원재 구간 들머리이다. 


 

# 여원재에 있는 돌벅수. 운성대장군(雲城大將軍)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운성(雲城)은 운봉(雲峰)의 옛 이름이다. 운성이란 이름은 높고 험한 천혜의 수비성이란 뜻이다. 돌벅수 뒤쪽이 3, 4소구간인 성삼재 ~ 여원재 구간의 날머리다. 


 


# 여원재 구간의 들머리. 표지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앞으로 대간길 걷는데 이 표지기들의 도움이 절대적일 것이다. 대간길을 먼저 지나간 선배 산꾼들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 눈 덮힌 들길 걸을 때는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오늘 내가 걸어간 이 길이 뒷사람의 길잡이가 되리니).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선시(禪詩)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시(漢詩) 중 하나이다. 개척자들의 바른 생각과 바른 행적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워주는 시이다. 혹시 내가 걷는 오늘 이 길이 내 뒤에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똑 발라야 하는 것이다.


 

 

# 자, 이제부터 백두대간 대장정의 시작! 출발해 보이~입시다!  마눌 어깨 두드려 격려해 주고 이 머나먼 백두대간 종주길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다.




# 여원재에서 곧바로 숲길로 들어선다. 잠시후  561.8봉을 향해 올라간다. 정상 가는 길에 잠시 조망이 트인다. 앞 구간에 있는 수정봉 자락의 암봉이 건너다보인다. 


 


# 561.8봉 직전의 급커브 구간. 정상을 향해 오르던 대간길은 묘지 앞에서 우틀하여 꺽어져 내려간다. 길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표지기가 많아 주의만 기울이면 큰 문제는 없다.


 


# 그곳에서 재미있는 표지기를 만났다. 비실이 부부란다. 독특한 팀명이다. 지나간지 얼마 안된 듯 새것이다. 대간길 가는 도중에 계속 보인다.


우리도 저들처럼 팀명을 하나 짓기로 했다. 낚시꾼 시절부터 사용해 온 나의 오랜 닉 네임을 따서 '강사랑물사랑 솔방솔방 우리 산하(山河) 두 발로 느끼기'로 즉석에서 결정했다. '솔방솔방'은 경상도 방언으로 느긋하게 혹은 천천히 산책하듯 걷는 모습을 말한다. 쌩초보 산꾼인 우리 부부의 산길 걸음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 솔방울이 아주 많이 달린 소나무를 만났다. 다산(多産)의 상징인 듯하여 잠시 기분이 업되었다. 다산은 풍요를 의미하니 오늘 우리에겐 꼭 필요한 징조이다. 원래 소나무는 생육환경이 열악할 때 솔방울을 많이 달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생육환경도 좋아 보이니 아마 품종이 그런 넘인 듯하다.


 

 


# 등로 우측으로 잠시 조망이 트인 곳이 나왔다. 그 방향으로 운봉 쪽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 고개를 들면 정면으로 고남산 정상과 안테나가 올려다보인다. 고남산은 오늘 구간의 최고봉이다. 


 


# 고남산 우측 사면은 암봉으로 되어 있다. 고남산은 화강암 재질의 암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경사가 급하여 곳곳에 암석이 노출된 곳이 많은 편이다.


 


# 고남산 자락에서 '뫼 山' 字 형태로 자란 소나무를 만났다.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키우지는 않았을 텐데 스스로 햇볕 많이 맏아 성장하기 위해 저런 모습으로 가지를 키웠다. 백두대간 종주 첫날에 이런 산(山) 자 모양의 소나무를 만나다니 길조인 듯하여 기분이 좋다.


 

 

# 포토샵으로 주변을 흐리게 하면 '뫼 山' 자 모양이 확연히 드러난다.


 

 

# 고남산은 화감암 재질의 암릉이 발달한 산이다.


 

 

# 너른 운봉 들판에 고남산 홀로 이렇게 우뚝  솟은 모습이 독특하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이 고남산에는 산성(山城)이 설치되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실제 전투도 많이 벌어졌다.


 

 

# 고남산 정상 직전에서 암릉 구간을 만났다. 우리가 암벽 밧줄을 잡기 직전 위에서 하산하는 산꾼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우리 부부가 함께 대간 종주하는 모습을 많이 부러워하였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종주 첫날 출발 준비하면서부터 티격태격했다. 백두대간을 시작하느니 마느니 등등... 그러나 막상 산에 들어와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다 잊어버렸다.


 

 

# 마눌 인생의 첫 밧줄이다. 요령을 몰라 많이 어려워했다. 앞으로 백두대간 종주하면서 암벽에 붙어 밧줄 잡을 일 많을 것이다. 하나씩 배워 나가시게!


 

 

#  대간길은 바위옆으로 우회하도록 되어 있다.


 

 

#  정상 직전에 암릉 직벽이 있다. 조망이 트인 곳인데 오늘은 박무가 짙어 조망 감상의 기회는 없다.


 

 

# 한차례 길게 올린 그 끝에 고남산 정상이 있다. 고남산(古南山)은 무명의 산이었는데,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그 이름을 조금씩 알리고 있다. 근처에 지리산이라는 천하 명산이 있어 이름 알릴 기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남산은 846.8m 로 높이 면에서 만만치 않은 산이고 주변에 운봉의 너른 들이 있어 그 고도감은 더욱 뛰어나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님들은 이 산에 산성을 쌓아 외적에 대비하였다. 고려 말 태조 이성계가 황산 전투를 위해 주둔하였고 제단을 쌓아 산신제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렀다.


정상에는 전북산사랑회에서 세운 간소한 모습의 스테인레스 재질 정상목이 있다. 박무 짙게 깔려있는 날이라 조망은 좋지 못했다. 원래 고남산은 들판에 솟은 산이라 조망이 좋은 산인데 아쉬웠다. 여원재에서 3시간 소요되었다.


 

 

# 고남산 정상에서는 운봉과 남원 산동면 일대의 인간세가 박무 때문에 흐리지만, 어쨌든 눈에 들어온다. 이 산이 그 두 고을의 경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금 고남산 정상에는 통신시설물이 자리하고 있다.


 

 

# 정상 바로 아래에 넓은 헬기장이 있다.


 

 

# 헬기장에서 주변 둘러보고 있는데 산객 두 분이 올라온다. 잠시 후 헬기장에서 보니 한 분은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하고 있다. 대단하시다. 그리고 존경스럽다.


 

 


# 정상 우측으로 나가니 통신시설과 연결된 도로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그 도로 따라 가다가 바로 곁의 숲으로 들어가 짐 풀고 오후의 성찬(盛饌)을 즐겼다. 천지신명께 막걸리 한 잔 올려 대간길 무사안녕을 빌고 음복으로 우리 대간길 자축하기도 하였다. 


 

 

# 점심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잠시 도로 따라 내려가니 오랜 세월을 살아 왔을 나무 몇 그루가 길가에 서있다. 그 나무가 이겨왔을 세월이 감탄스러워 카메라 프레임에 담고 쓰다듬어 격려도 하였다. 그리고는 무심코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러다 기분이 이상하였다. 아뿔싸! 이 길이 아닌가베? 다시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와 보니 나무들 앞쪽에 표지기가 잔뜩 달려있다. 백두대간 길 최초의 알바이다. 앞으로 이런 알바가 얼마나 되풀이 될지...


 

 

# 고남산 하산길은 잡목들과 키작은 철쭉들이 등로에 빽빽해 걷기가 쉽지 않다. 복성이재 쪽은 훨씬 심하다 정보인데 다음 구간 할 때는 대비가 필요한 일이다. 길게 내려 유치재(柳峙)에 도착했다.


유치재는 남원시 운봉읍 임리와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를 이어주는 옛고개이다. 영조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예전에는 유명한 고개였다. 그곳 기록에 "유치는 황산에서 뻗어 나오며 관아의 북쪽 7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영남으로 통하는 길로써 관애를 만들어 방어할 만한 곳이라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지금 유치재는 수레 한 틀 지나기 힘들게 좁은 산길로 남아 있다. 격세지감이다. 여원재에서 5시간 20분 소요되었다.


 

# 세월 흘러 길 희미해졌고 다니는 사람 없어 숲 그늘 짙어졌다. 고개 좌우를 둘러보니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어디선가 여우 한 마리 재주를 팔짝 팔짝 뛰며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 매요리 가기 직전에 삼각점을 만났다. 일반적으로 삼각점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특이하게 등로가에 있다.


 

# 잠시후 숲을 벗어나 매요리에 내려 섰다. 봄농사 준비가 끝난 매요리의 밭. 농심(農心)은 이미 시절을 앞서 있다.


 


# 매요리(梅要里) 고개에 내려 섰다. 매요리는 운봉읍에 속한 마을이다. 원래 지세가 말 허리를 닮아 마요리(馬腰里)라 불렀다. 왜란 후에 사명대사가 산천유람길에 이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에 매화의 정기가 감돌아 매요리로 바꿔 불렀다는 이름 유래가 전해진다. 여원재에서 6시간 30분 소요되었다. 


 

 

# 대간꾼이라면 누구나 들른다는 매요휴게실에 우리도 지나치지 않았다. 음료수 한 잔과 간식도 사먹었다. 휴게실 할머니와도 인사하였다. "아이구, 이 힘든 일을 왜 하시나?" 할머니의 질문에 허허허! 그냥 웃음으로만 대답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성격이 천상 여자이다. 마실 온 동네 할아버지를 보고 연신 "오빠!" 라고 부른다. 연세 드신 분들이 오빠 동생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렇다.



 

# 매요휴게실에 대간꾼들이 남긴 흔적들. 부춘산악회 라고 적은 한자 글씨가 균형이 잡혔다.


 

          

# 휴게소를 나와 매요리를 통과하였다. 매요마을 교회와 느티나무 있는 언덕을 지났다.


 

 

# 잠시후 유치삼거리에 도착했다. 삼거리에는 목공소가 있다.


 

 

# 목공소의 강아지가 적의를 품고 계속 따라오며 이빨을 드러낸다. 평소 강아지들의 호의적 반응을 받는 편인데 이 넘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사실 이번 산행에 우리 강아지도 데려 오려고 했었는데, 몸이 약한 편이라 집에서 쉬게 하였다. 저녀석 끝까지 따라오며 발악을 한다. 완전무장하고 고글까지 착용한 모습이 낯설었나 보다.


 


# 유치삼거리에서 다시 숲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홀대모 초은님의 표지기를 만났다. 이 분은 높은 연세에도 홀로 백두대간 종주를 하시는 대단한 어른이시다. 


 

 

# 유치삼거리에서 사치재까지는 618봉을 넘어야 한다. 봉우리 오르막에 좌측으로 조망이 트였다. 산 아래로 사치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집들이 전부 기와집으로 단장되었다. 역사 오랜 고장이어서 그런가 보다.


 

 

#  618봉 사면은 온통 벌목작업 중이다. 나무 베는 자동톱소리가 요란하다. 


 

 

# 아깝다.  최소한 30년 이상은 된 것 같다.


 

 

#  618봉 가는 길의 대간길은 벌목한 나무들로 마루금이 막혔다. 따라서 마루금 아래의 잡목을 헤치고 걸어야 한다.


 

 

# 618봉을 넘어 사치재를 향해 하산하였다. 하산길 중간에 돌무더기 지대가 나온다. 가만히 살펴보니 무너진 옛 성터이다. 자료 확인하니 사치산성(沙峙山城)이다. 


장수군 번암면 사치마을 앞산에 있는 이 성은 3층으로 축성된 것이다. 내성(內城)은 토석(土石)을 혼합하여 축성했고 외성(外城)은 1층과 2층을 토성으로 축성했다. 삼국시대 성으로 추정되는 성이다. 이 지역이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너진 성돌을 모아 돌탑을 쌓아 두었다. 우리도 돌 하나 더하여 무사한 대간길을 기원했다.


 

 

#  거대한 공룡알(?)이 세 개 있다.


 

 

#  티라노가 들었나?


 

 

# 사치재 가는 마지막 오르막 전 안부에서 연리지(連理枝)를 만났다. 연리지는 서로 다른 뿌리에서 자란 두 나무가 중간에 만나 하나로 융합된 것을 말한다. 하늘이 맺어 준 부부 관계를 의미하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같은 의미로 '비익조(比翼鳥)'가 있다. 비익조는 암수가 각각 한쪽 날개만 달고 있는 새이다. 그래서 반드시 암수 한 쌍이 나란히 붙어야 날 수 있다. 둘 다 부부의 인연을 말한다. 대간길에 있는 이 나무는 완전한 연리지는 아니고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두 줄기가 중간에 다시 하나로 합쳐진 경우이다.


七月七日長生殿 夜半無人和語時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天長地久有時盡 次恨綿綿無絶期(칠월칠일장생전/ 야반무인화어시/ 재천원작비익조/ 재지원위연리지/ 천장지구유시진/ 차한면면무절기 ; 7월 7일날 장생전에서/ 깊은 밤 남모르게 한 약속/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였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이내 정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 長恨歌(장한가)


장한가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뜨거운 사랑을 읊은 시이다. 백거이는 중당(中唐) 시대 대시인이다.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했다. 백거이는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장한가를 지었다.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은 나라를 잃어버릴 정도의 열렬하고 과격한 그러면서 파멸의 사랑이었다. 사랑을 찬양할 나이인 젊은 백낙천은 그 둘의 역사적 사랑을 연리지, 비익조, 천장지구와 비유하여 노래하였다.


 

 

# 먼 길 걸어 종착점인 사치재에 도착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출발하여 복성이재까지 가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첫 걸음부터 너무 무리하지 말자는 생각과 다음 구간이 애매하게 남을 것 같아 오늘은 여기에서 끝내기로 했다. 중간에 휴식을 너무 오래 한 이유도 있다.


 

 

# 사치재(沙峙)는 이제 고속도로가 지나는 길이 되었다. 사치재 표지판도 88고속도로 길가에 세워져 있다. 표지판 아래로 지하통로가 나 있다. 그런데 표지기들은 대부분 88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조금만 걸어 올라 가면 되는데 위험하게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할 이유는 없다.


  

8시 40분에 여원재를 출발하여 17시 정각에 사치재에 도착했다. 총 8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중간에 점심 식사하고 매요휴게실에서 할머니와 얘기하며 쉬느라 1시간 30분여 소모한 것을 따지면 조선일보 간(刊) 실전 백두대간에서 계산한 시간 내에 들어 온 셈이다.

애초에 연속종주를 계획한 것도 아니고 전투하듯 앞만 보고 내달리는 종주가 아니라 마눌과 얘기도 하고 주변 경치 구경도 하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가며 쉬엄쉬엄, 사부작사부작, 솔방솔방, 허위허위 다니자고 계획한 대간길이니 만큼 시간에 너무 얽메이지 말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여원재에 자동차를 두고 왔기 때문에 택시든 버스든 차를 탈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사치재는 고속도로에서 끝이 나버리니 수 많은 차가 씽씽 내달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다. 고속버스 기사가 우릴 보더니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고 씽~ 지나간다. "감사합니다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응원이 아니라 자동차라오!"

지도 확인하니 근처에 아곡리가 제일 가까워보인다. 그곳에서 대중교통 이용할 생각으로 논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지리산 휴게소 아래 '아곡리'로 들어갔다.

         

# 아곡리(阿谷里). 남원시 아영면의 동네이다. 통일신라 때 달성 서씨가 터를 잡은 아영면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인 아막성(阿莫城)의 성역이라 '아실'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번역하면서 아곡((阿谷)이 되었다.



# 역사 오랜 동네 특유의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좋은 동네이다.

 

 

#  운치있는 마을이다.

 

 

들일 하시는 분들이 계시길래 버스나 택시편을 물었더니 방금 버스가 들어갔는데 곧 돌아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버스가 여원재로 간단다. 이렇게 좋을 수가!!!

애초에 인월택시를 부를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버스 시간과 맞아 한시름 덜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물 마시고 쉬다가 손님이 아무도 없는 버스를 타고 가산리, 신기리, 운봉 거쳐 여원재에 복귀했다. 18시16분.

이로써 백두대간 1,600KM의 55분의 1을 마쳤다. 아니 800KM는 마친 셈이다. 시작이 반이니까! 그런 각오의 백두대간 종주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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