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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다섯번째(고치령~박달령)-소백의 고갯길들! 본문

1대간 9정맥/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다섯번째(고치령~박달령)-소백의 고갯길들!

강/사/랑 2007. 6. 21. 23:09
[백두대간]그 다섯번째(고치령~박달령)



2005년 3월 26일. '어느 날 문득' 백두대간 종주에 뛰어들었다. 청춘을 비린내 폴폴 날리며 낚시꾼으로 살아왔던 강/사/랑이 '어느 날 문득' 산꾼으로 변신하여 백두대간에 스며듦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놀라움은 내 스스로 혹은 나를 바라보는 주변사람들에게도 공히 느껴진 감정이었다.


'섬세하고 우아하게!'를 모토로 빠알간 찌를 응시하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우리 산하(山河) 두 발로 느끼기!'를 새로운 모토로 삼아 산길을 걷게 되었으니 그 변신이 주변을 놀라게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변신은 출발이 계획대로 순조롭지는 않다. 그것은 국립공원이 '봄철 산불방지 기간 입산금지'라는 대국민 명령(命令)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기관은 상당히 독선적인 데가 있는 기관이라 '금지', '통제', '단속'. '벌금 부과' 등 권위주의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단어와 친숙한 기관이다.


어쨌거나 그 명령에 의해 이 어설픈 대간꾼의 백두대간 종주는 그 출발점인 지리산 천왕봉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그들의 위수구역(衛戍區域) 밖인 남원의 여원재에서 출발해야만 했다.  그 이후 솔방솔방 걸어 사치재, 복성이재, 중재를 거쳐 육십령까지 5개 소구간을 마쳤기는 했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육십령에 이르러 또다시 국립공파의 위수구역(衛戍區域)인 덕유산(德裕山)을 만나 더이상 진행이 어렵게 되었다. 아직 높은 기관의 대국민 명령 기간이 끝나지 않은 탓이다. 세상 모든 일은 처음 시작 단계가 상당히 중요하다. 시작 단계에서 추동력을 얻어 집중하여야 그 일의 진행이 탄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지'와 '통제'의 명령이 이 시작 단계의 탄력을 가로막은 것이다. 이럴 때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법이다. 금지와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곳을 찾아 추동력에 손실이 없도록 조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고민의 시간 중에 마침 사무실 직원이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건네준다. 그런데 결혼식 장소가 경북 영주이다. 영주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오랜 역사의 동네이다. 그렇다면 국공파의 위수구역 바깥에 있는 소백의 외곽 구간을 걸으면 될 듯하다. 일부는 그들의 위수구역에 접할지라도 그들도 나도 그 정도는 용인 가능하리라 짐작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혼식도 참석하고 백두대간 종주도 진행하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영주는 오륙 년 전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고장이다.
그때도 직원 결혼식이 영주에서 있어서 그 도시를 방문하였다. 당시는 중앙고속도로가 제천까지만 개통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제천까지는 갓 개통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제천에서 단양을 거쳐 옛 죽령길을 넘어 갔었다.


가을날이었다. 구절양장의 죽령 고개를 굽이굽이 휘감아 올라갔다. 서늘한 가을 바람 소슬한 죽령고개에는 단풍 예쁘게 물들었고 단풍 색깔을 닮은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그 시절 우리는 백두대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죽령이
백두대간의 중요 요충지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무심히 화장실만 이용하고 그 고개를 지나쳤다.

역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소백의 고갯길들!


구간 : 백두대간 제 35 소구간(고치령 ~ 박달령)

거리 : 구간거리(24.4 km), 누적거리(83.04 km)
일시 : 2005년 4월 23일.
세부내용 : 고치령(08:00) ~ 950봉 ~ 877봉 ~ 잡목지대 ~ 미내치(09:19) ~ 854봉 ~ 공터 ~
헬기장(10:26) ~ 춘양목지대 ~ 마구령(11:20) ~ 894봉 공터 ~ 1057봉 ~ 1057 암릉(12:18) ~ 헬기장(12:33) ~ 점심식사후 출발(13:33) ~ 934봉 ~ 갈곶산(14:55) ~ 늦은목이(15:25) ~ 선달산(17:00) ~ 1236봉 ~ 1246봉 전 갈림길(18:05) ~ 1246봉 ~ 박달령(19:30) ~ 임도 이용 탈출(20:30)

 

총 소요시간 12시간 30분. 만보계 기준 4,4000보.


금요일.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11시 30분. 씻고 정리하고 잠자리에 드니 12시 30분이다. 10분 간격으로 다섯 개나 맞춰 놓은 시계가 최초로 고함을 지른 것은 2시 30분이다.


겨우 두 시간 눈 붙이고 가벼운 요기와 그에 따르는 일련의 행사 치르고 집을 나선 시각이 네 시이다. 영동고속도로 ~ 내륙고속도로 감곡 나들목 ~ 38번 국도 제천 ~ 중앙고속도로에 다시 진입해서 단양휴게소에 들어섰다. 6시. 배고프다는 마눌 보고 혼자 식사하라고 하고 잠깐 20분 정도 꿀맛같은 잠을 청했다. 단 20분이지만 몸이 한층 개운해지는 것을 느낀다.

졸린 눈을 비비고 휴게소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뭔가 길죽한 물체가 앞을 가로 막는다. 화들짝 놀라 보니 길죽한 말(?), 아니 가수 이문세씨가 앞에 서 있다. 얼결에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니 같이 "안녕하십니까!" 답례를 해준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까 관광버스와 SUV차량에 라푸마라고 로고 프린팅이 된 차량들이 서 있다. 이문세씨가 히말라야까지 갔다 올 정도로 준전문 산악인이라더니 아마도 어느 기업체와 스폰서해서 대간 종주를 하는가보다. 풍기나들목을 나와 소백산을 바라보니 지난 3월초 칼바람 속에 순백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연화봉, 천문대, 비로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백의 줄기를 왼쪽에 거느리고 순흥, 소수서원을 거쳐 단산면쪽을 달려갔다.


순흥을 지나오는 동안 내내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옛 여성으로는 드물게 기골이 장대하시고 술 드시면 온 동네를 들었다 놨다 하시던, 40에 시작하신 하루에 소주 한 됫박 드시기 생활습관이 돌아가시던 87세까지 무려 47년이나 계속 되셨던, 그동안 마신 소주가 1년이면 365되, 47년이면 17,155되. 웬만한 저수지는 채울만한 양을 드셨던, 그러나 세상에서 소주를 가장 맛있게 드셨던, 소주잔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방울조차 맛있게 드셨던, 고집 하나로 버텨 온 진주 강씨(晉州 姜氏) 집안에 시집와 강고집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온 생애동안 증명하셨던 우리 할머니. 그 할머니께서 바로 여기 순흥을 본관으로 하는 '순흥 안씨(順興 安氏)'이셨다.

고치령은 단산면 좌석리의 1000년은 넘게 살아 왔다는 큰 은행나무를 두 개 지나고 옥대저수지를 끼고 한참을 달려도 나타나지를 않는다. 좌석리 마을 끝에 도착하니 아까 휴게소에서 본 관광버스와 차량들이 막 주차를 하고 있다. 아마 이들도 오늘 우리와 같은 구간을 들어 왔나 보다.

실전 백두대간에 의하면 고치령은 일반 자동차로는 올라 가기가 어렵게 험한 비포장이라는데 작년에 대부분 포장이 이뤄졌다고 한다. 버스는 못 올라 오지만 나는 차를 몰아 열심히 고개를 향해 달려 올라갔다. 상당히 먼 거리를 달린 끝에 산신각이 서 있는 고치령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타이어에서 고무타는 냄새가 난다.

소백의 고갯길, 마구령(馬驅嶺)과 고치령(古峙嶺)

남진하던 백두대간이 태백산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국토의 중앙부에 소백산이라는 명산을 펼쳐 놓았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로서 높고 험한 산맥을 이루고 있는 이 일대는 과거 삼국시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며, 이후로 험산준령을 넘는 여러 고갯길이 뚫렸고 그로부터 소백산은 장벽으로서가 아닌 영남과 경기, 충청의 문물교류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소백산을 넘는 고개로는 크게 3개가 있다. 제 1의 고개는 구비구비 '죽령'고갯길. 국토의 대동맥으로서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물류가 넘나들던 길이다. 그리고 소백산 동쪽,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옛 고갯길 두 곳이 고즈넉히 자리하고 있다. 마구령과 고치령. 현지 주민들은 메기재, 고치재라고 부른다. 마구령은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 지역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개로서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임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고갯마루의 높이는 해발 820m.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여 수많은 대간 종주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마구령으로의 접근은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대중교통편은 없고 일반 승용차로 오르기에는 만만찮은 비포장 흙길과 돌길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편, 마구령 서쪽으로 역시 소백산국립공원 구역내에 위치한 고치령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마락리~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해발고도는 마구령보다는 조금 낮은 770m 정도. 하지만 호젓함으로나 고즈넉함으로나 운치있는 가을 산책길로 마구령보다 한 결 낫다. 고치령이 생활도로로 왕성했던 것은 강원도와 기호지방(충청도와 영남)을 잇던 죽령길이나 마구령길에 비해 고치령은 순흥도호부와 영월을 잇는 최단거리 길이었다는 점이다. 강원과 충청 영남 등 기호지방을 드나드는 죽령과 마구령이 있지만 서낭당이 있는 곳은 고치령과 박달령 뿐. 게다가 이 서낭당은 단종대군을 태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 산신으로 모시고 있으니 이쯤되면 고치령 서낭당의 내력에는 뭔가 범상치 않은 것이 숨어있을 법하다. 사연은 세조 3년인 1457년으로 돌아간다.단종 임금이 영월로 유배될 무렵 조카를 보호하다 형인 수양대군의 눈밖에 난 금성대군도 순흥도호부로 유배지를 옮겨가는데, 이때 금성대군이나 밀사가 단종을 만나러 고치령을 넘어 영월에 다녔을 거라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목숨을 잃은 두 사람은 각각 태백과 소백을 지키는 신령이 되자 두 성산(聖山) 경계인 고치령에 서낭당을 세웠다는 게 요점이다. 1457년 금성대군이 부사 이보흠을 위시하여 순흥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전개하던 단종복위운동은 관노의 고발로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 돌아온 결과는 금성대군은 안동에서 부사 이보흠은 함경도 박천에서 단종은 영월에서 제각각 목숨을 잃는다. 복위운동의 근거지 순흥도호부는 폐부되고 순흥에 몰아닥친 살육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피가 안정면 피끝이 라는 곳까지 흘렀다 전한다. 순흥이 도호부가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226년 뒤. 순흥에서는 금성대군을 받든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백두대간 34소구간 고치령 ~ 도래기재 지형도. 원래 계획은 도래기재까지 였지만 일몰과 체력저하로 박달령에서 탈출.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고치령. 해발 760m에 위치하고 있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과 충북 단양군 영춘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예전에는 순흥도호부와 영월을 잇는 최단거리 길이었다. 따라서 생활도로로 왕성하게 이용되었다.

 


# 왕래하는 사람 많았으니 사건 사고도 많았을 것이고 그 사고로부터 무사안녕하기를 빌 일도 많았을 것이다. 고치령에는 그런 민초(民草)들의 소망이 담긴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오늘 구간은 산신각에서 출발하여 산신각에서 끝난다. 박달령에도 산신각이 있기 때문이다.




# 토속신앙에서 숭배하는 대상은 무가적(巫家的) 상징성이 있는 대상인 경우가 많다. 이 지역은 단종(端宗) 복위운동(復位運動)으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받은 고장이다. 그 애절한 사건의 주인공인 단종과 금성대군을 상징하는 듯한 태백천장(太白天將)과 소백지장(小白地將)의 장승이 서있다.



# 소백지장은 죽령 방향 날머리에 서있다. 




# 산신각 뒤로 올라간다. 한차례 밀어 올리면 첫 번째 헬기장에 도착한다. 대간길은 뒤쪽의 산마루금을 따라 가야 한다.



# 소백의 칼바람 탓인지 이 지역의 진달래는 이제야 시작 단계이다. 

 

 

# 대신 겨우살이들이 나목(裸木)들을 점령하고 있다.


 

# 그래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 양지바른 등로(登路)엔 작은 봄꽃들이 찬란하다. 노랑제비꽃.


 

# 원추리가 메마른 땅을 비집고 새싹을 내밀고 있다.

 


# 처녀치마. 이름이 흐뭇하다. 발레치마처럼 생겼다.



# 양지꽃. 봄 숲바닥은 노란색이 대세이다.



# 877봉과 잡목지대를 통과하여. 

 

 

# 해발 830m의 미내치(美乃峙)에 도착했다. 고치령에서 1시간 19분 소요되었다. 미내치에서 라푸마 팀의 선발대와 합류했다. 이곳에서 이문세씨를 다시 만났다. 선발대와 함께였다. 이분들 산행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그중에 맨발 산악회라는 표지기를 단 이는 이름처럼 아예 맨발로 내달린다.

 

 

# 미내치 이후엔 굴곡이 심한 능선길이 계속 이어진다. 854봉 지나 만난 두 번째 헬기장 공터.

 


  

해가 높이 솟아 오르면서 햇살이 강렬하고 기온이 올라 땀이 줄줄 흐른다. 출발하면서 입은 자켓을 벗지 않았더니 체온도 무지 올라간다. 머리띠를 했지만 땀이 눈으로 넘쳐 흘러 들어 눈도 따갑다. 그래도 다음 헬기장에서 쉬기로 하고 계속 진행했다.

이 구간의 등로는 온통 발목높이의 낙엽이 쌓여 걷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산악 토양의 산성화가 심해져 나뭇잎이 썩지 않는다는 뉴스를 봤는데 여기도 그런 것 같다. 낙엽이 발에 채여 걷기가 힘든 것도 있지만, 오르막에서는 나뭇잎 표면이 미끄러워 차고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다.

헉헉 대며 1096.6봉에 있는 헬기장에 도착했다. 이문세씨를 비롯한 라푸마팀의 선발대는 이미 도착해 있고 잠시 후 우리 다음으로 후발대도 도착했다.

쉬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했는데, 서로들 잘 모르는 관계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그 팀은 LG패션에서 이번에 론칭하는 라푸마란 브랜드의 이벤트 행사에 참여한 팀이란다. 아웃도어 패션과 장비 등을 시장에 론칭하면서 백두대간 행사를 기획하여 전문산악인이나 전국의 일반 애호가 중에서 추첨을 하여 구간별로 대간 종주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문세씨등 전문 산악인 수준의 유명인을 섭외하여 집중도를 높이기도 했다.

가수 이문세! 나보다 두 살이 연상이다. 음악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애들이 온통 TV를 점령하고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세태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지켜나가고 있는 멋진 음악인이다.

개나 소나 녹음 틀어놓고 춤만 춰대면서 콘서트한다고 난리할 때 독창회란 타이틀로 음악발표를 하는 사람이다. "시를 위한 시", "광화문 연가", "옛사랑", "난 아직 모르잖아요" 등은 학교다닐 때 항상 흥얼거리곤 했던 그의 대표작이다. 86년 남녀 공학 고교에 교생실습 나갔을 때 아이들이 하도 노래 불러 달라고 졸라서 "나는 행복한 사람"을 불러서 애들을 전부 뻑가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

쉬면서 이문세씨에게 싸인도 받고 얘기도 나눴는데, 상당히 털털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자기네 팀들과는 아직 교감이 덜 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마눌은 이문세씨의 한마디에 하루 종일 고무되었다. 이문세씨가 자기 더러 아가씨인 줄 알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외교적인 발언이었는데...

         

# 헬기장에서 함께 휴식한 라푸마팀들. 


 

 

# 가수 이문세. 


 

# 상당한 수준의 산행 실력이었다. 산에서 펄펄 나는 수준이었다.

 

 

# 백두대간을 하다보니 이런 색다른 일도 생긴다.

 

 

# 이문세씨 싸인을 받았다.

 


# 헬기장을 내려 서면  


 

 

# 춘양목지대가 이어진다. 금강송, 적송, 황장목, 미인송으로도 불리는 최상의 소나무이다.


 

 

춘양목(春陽木)은 봉화, 울진, 삼척 등지의 태백산 일대에서 생산되는 우량 소나무이다.  일제 강점기 춘양역을 통하여 반출되어 비롯된 이름이다.

이 소나무는 보통 소나무보다 생장이 세 배 이상 느리고 곧게 자라며 나무의 가운데 부분인 심재(心材)가 붉다. 제재하거나 재목으로 사용하였을 때 뒤틀림이 거의 없다.  조선조에 궁궐에서 쓰이는 나무는 거의가 이 나무를 사용하였고 최근에는 유명 사찰이나 고궁의 보수 등에 사용하고 있으며 그 가격은 보통 소나무의 열 배 이상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춘양목의 구별 방법은 외피(外皮)가 거북등 같이 갈라져 있고 색깔은 암회색을 보이며 나무를 잘랐을 때 심재와 변재부분이 붉고 곧은 것으로 확실히 구분된다. 나이테가 좁고 치밀하게 보이는 점도 특징이다.

         

# 11시 20분. 마구령에 도착했다. 고치령에서 3시간 20분 걸렸다. 현지 주민들은 메기재라고 부른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임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고개 높이는 해발 820m이다. 너비는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넓지만 비포장길이다. 고개 한 쪽에서 한숨돌리는데, 마침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이상한 듯 힐끗거리며 간다. 자동차로 편하게 고개를 넘는 그들이 대간길 걷는 자의 기쁨을 알리가 없다. 

 

 

           

# 고치령에서 8km를 걸어 왔다. 등산화가 잘못되었는지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많이 아프다. 밴드로 테이핑을 하고 잠시 쉰 후 다시 출발했다.


 

 

# 894봉의 헬기장과 춘양목.


 

 

오늘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점점 체력이 떨어진다. 마구령에서 출발하여 1시간여 걸려 1057봉을 두 개 넘고 암릉지대에 도착했다.

라푸마팀은 그 암릉지대에서 점심식사와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 조별로 노래 자랑을 한다. 사람들이 요청이 있어 이문세씨도 '나는 행복한 사람'을 불렀다. 우리 보고 같이 놀자고 했지만, 평소 낯가림 심한 성격이라 사양하였다. 구경 조금 하다가 먼저 출발했다.

         

# 암릉 지나 만난 헬기장에서 점심식사를 했다.(12:33). 


 

# 지쳐서 입맛이 깔깔하다. 음식보다는 막걸리를 마셨다. 꽤 먹었는데 이문세씨를 비롯한 라푸마팀이 도착했다. 그 중 몇 분이 막걸리 좀 달라는데 얼마 남이 있질 않아 곤란했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목 축이게 드리기는 했다. 평소 큰 통을 가져 왔을 때는 아무도 만나지질 않더니, 오늘따라 중간 병을 가지고 왔을 때 이런 일이 있다. 라푸마팀에는 사보에 내려는지 취재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인터뷰 좀 하자고 해서 뜻하지 않게 카메라 보며 산상(山上) 인터뷰를 했다.

<질문>백두대간하면서 좋은 점은?
<답변>산에서 먹는 막걸리 맛이 너무 좋다^^;


 

 

# 점심 후 다시 길을 나섰다. 한차례 올려 갈곶산(966m)에 도착했다. 14:35분. 라푸마팀 장기자랑 구경과 점심, 인터뷰 등으로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고치령에서 6시간 35분 소요되었다. 갈곶산은 봉황산과 갈라지는 삼거리 길이다. 대간길은 좌측으로 늦은목이를 향해 내려가며 이어진다. 


 

 

# 표지기 이름이 재미있다. "소나무와 돌쇠".


 

 

# 무릎 통증 때문에 내리막길이 훨씬 어렵다. 길게 내려 늦은목이에 도착했다. 15:25분. 총 7시간 25분 소요. 늦은목이는 봉화 물야면과 영주 단산면을 잇는 옛고갯길이다.


 

라푸마팀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진행하고 야영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도래기재까지 진행을 해야 하는데, 시간도 지체되었고 체력도 떨어져 걱정이다.

늦은목이에서는 다른 산악회 분들이 선달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도래기재에서 남진해서 오는 모양이다. 갈곶산까지 올라 갔다가 와야 빠진 구간을 다 마치는 모양인데, 올라 가는 사람은 가고 그냥 하산하는 사람은 하고 대충 갈음하고 있다.

날씨가 너무 더워 물 소비량이 많았다. 늦은목이 아래에 샘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샘은 없고 그냥 계곡 물이다. 그래도 물이 모자랄 것 같아 몇 병 보충했다. 덕분에 다시 30분 지체했다.

늦은목이에서 선달산까지는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늦은목이는 해발 800m, 선달산은 1,236m, 436m의 표고차이지만 1시간 30분 동안 평지 하나 없이 끝까지 오르막 뿐이다. 지친 몸으로 낙엽 가득한 등로를 차고 오르려니 숨이 턱턱 막힌다. Heart Break! 정말 심장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다.

        

# 엄청나게 힘들었던 오르막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구간이다. 선달산 정상(17:00).  고치령에서 9시간 소요되었다.


 

 

# 선달산 정상부는 빽빽한 물푸레나무 군락이다.


 

 

# 자 이제 박달령으로 출발해 보자!


 

# 1236봉, 1246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 두 개를 연달아 지났다. 어느새 석양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 1시간 30분동안 걸었는데 등로에 배달린 이정표에는 박달령까지 아직 1시간이나 더 가야 한다고 적혀 있다. 선답자인 홀대모 최중교님의 산행기에 선달산에서 박달령까지는 거저 먹기라고 써 있었는데, 우리에겐 먹기가 아니라 토할 지경이다. 


 

# 석양빛에 예쁘게 물든 대간길. 주변 경치는 좋은데 정작 나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봉우리 하나를 또 헉헉대며 올라간다.



백두대간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매 구간마다 마지막 코스는 왜 그렇게 길기만 한지?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서 이제는 끝이겠지 하면 또 봉우리가 하나 나타나고 그 봉우리를 넘으면서 이제는 끝이겠지 하면 또 봉우리가 하나 있고...

백두대간 첫 번째인 사치재 가는 길도 그랬고, 특히나 육십령 직전의 깃대봉에서 육십령코스도 끝도 없이 길었고, 이제 여기 박달령가는 길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어느듯 해가 지고 대간길 앞쪽으로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맞다! 오늘이 보름날이지. 3월 열닷새. 마눌 생일날인데. 마눌 생일날 좋은 음식에 멋진 생일 선물을 안겨 주기는 커녕 이렇게 고생이나 시키고 있으니... 그래도 마눌이여! 세상 어느 남편이 이런 멋진 산길과 이런 멋진 보름달을 생일선물로 줄 것인가?


# 드디어 朴達領(박달령) 도착(19:30)했다. 고치령에서 11시간 30분이 걸렸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다. 인적 끊긴 산정의 박달령엔 헬기장과 산신각만 덩그러니 있다.
 


 

박달령에 도착하여 도래기재까지 계속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탈출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도래기재까지는 1,242m인 옥돌봉을 넘어야 하고 앞으로 2시간 10분을 더 가야한다. 체력도 문제이지만 도래기재에 도착하면 10시인데 우리 차를 고치령에 세워 뒀기 때문에 고치령까지 다시 돌아갈 일이 만만치 않다.


도래기재에서 고치령까지 택시로도 1시간 이상이 걸린다는데... 도래기재에 내리면 얼른 탈 수 있게 영주 부석 택시에 전화하려고 하니 휴대폰 불통지역이다. 헬기장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겨우 연결이 되었지만, 금방 끊어져 버린다.

결국 오늘 구간은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억지로 도래기재까지 진행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야영준비가 되어있으면 여기서 야영하고 내일 아침 일찍 나머지 구간 마치면 되는데...

그러나 대간길에서 탈출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전화가 된다면 여기서 부르면 되겠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일단 915번 지방도까지 내려 가야 한다. 박달령에서 산길로 내려가면 2km, 40분 거리이고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4km, 1시간 반 거리이다.

랜턴을 켰지만 어두운 산길을 본 마눌은 겁 먹고 넓은 임도로 가자고 한다. 임도를 한참 내려오다 전화를 시도하니 드디어 연결이 된다. 그런데 부석택시는 길도 잘 모르는 것 같고 요금도 7만원이나 요구한다.

마침 선답자들의 산행기중에 본 전화번호가 있어 혹시나 해서 고치령 민박집 서사장님과 전화 연결을 시도했는데, 40분 뒤에 도착하시겠다 한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어두운 임도에서 그냥 기다리고 있기가 뭐해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터덜터덜 랜턴 불빛만 바라보며 걸었다. 1시간을 걸어 내려 가서야 서사장님이 몰고 온 트럭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분 엄청난 분이다. 운전하시는 것이 거의 전투 수준이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날 듯이 달려 1시간 30분 걸린다는 고치령까지를 1시간이 못되어 도착해버린다.

차에서 내리니 손에 땀이 흥건하다. 속도 때문에 내내 긴장을 했더니... 그래도 이렇게 쉽게 올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다음 죽령~고치령구간할 때 다시 뵙기로 하고 고마운 인사를 드렸다. 트럭 택시비는 30,000원.

고치령에 외롭게 서 있는 우리 자동차 몰고 다음날 결혼식이 있는 영주로 향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30분까지 총 12시간 30분 동안 백두대간의 품속에 있었다.

 

 


       

# 일요일 결혼식이 오후 2시여서 오전 시간 동안 소수서원(紹修書院) 구경을 하기로 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으로 유명하다. 紹修(소수)란 이름은  旣廢之學 紹而修之(기폐지학 소이수지 ; 이미 무너져가는 교학을 다시 계승해서 그를 닦는다)에서 유래한다. 

            

 

# 소수서원 주차장의 오래 된 벚나무. 


 


# 소수서원에는 잘 생긴 춘양목들이 오랜 세월 그 기상을 닦아 왔다.

 


 


# 소나무 아래엔 금낭화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 나비 한 마리 달콤한 꿀맛에 빠져있다.


 


# 溪邊孤松(계변고송). 계곡가에 소나무 한 그루 빼어나다.


 


# 景濂亭(경렴정). 이 정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울 당시에 건립된 것이다. 景濂(경렴)은 염계(濂溪) 주돈이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주돈이는 중국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현판의 글씨는 이퇴계(李退溪)의 글씨이다.



#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직방(直方)은 깨어 있는 마음을 곧게 한다는 뜻이다.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이다. 일신(日新)은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일반 교수의 집무실 겸 숙소로 쓰였다.



#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松竹을 건물곁에 심었다. 



#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 목판본. 죽계별곡은 고려 충숙왕때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이다. 서원이 있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라 그의 글이 소수서원에 걸려 있다.

 


# 계곡 경자 바위에 새겨진 "敬(경)". 이 글씨는 주세붕이 이 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이다. '경(敬)'은 선비의 지침으로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다.


 

#"백운동"이란 글자는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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