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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두번째(사치재~복성이재)-나제(羅濟)의 격전지 아막성터! 본문
강/사/랑의 백두대간 종주 도전은 '어느 날 문득!' 시작되었다. 평생 낚시꾼으로 강여울 속에서 '비린내' 풍기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진로를 바꿔 '땀 냄새' 가득한 산길에 들어서면서 도전은 시작되었다. 원래 모든 초보들은 겁이 없기 쉽다. 그들의 특징은 무모함이다. 무지(無知)는 무모함을 불러오고 다시 겁 없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나의 백두대간 종주 역시 그에 다름없다. 이렇게 겁 없이 시작한 초보 산꾼의 백두대간 종주. 지난주 그 첫걸음으로 여원재 ~ 사치재 구간을 무사히 마친 이후 왠지 모를 자신감이 마구 솟음을 느낀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던 대간 종주. 그 특별한 도전에 내가 뛰어들었고 그 첫걸음을 무사히 마쳤음이 스스로 특별하게 여겨진 탓인가 보다. 이런 행동은 금연(禁煙)하는 사람들이 많이 취하는 방법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금연 사실을 알림으로써 그들을 감시자로 삼고 자신에게는 공개적 의지의 평가를 받게 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려 감시자와 평가자를 충분히 확보하였다.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공개적 다짐인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 모두 알게 된 '백두대간' 종주 두 번째 길은 남원 아영면의 산길이다. 아영면(阿英面)은 전북 남원의 북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같은 전라도의 장수, 인월과 경상도의 함양에 접한 곳이다. 인접한 고장이 모두 지리산 기슭의 동네란 공통점이 있다. 아영면에는 오랜 역사의 허물어진 성터가 있다. '아막산성(阿莫山城)'이다. 아막산성은 삼국시대까지 그 기원이 올라가는 오랜 역사의 산성이다. 이곳 아막산성에서 신라와 백제가 경계를 이뤘다. 602년 8월 이곳에서 양국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막성전투(阿莫城戰鬪)다. 당시 백제는 무왕(武王), 신라는 진평왕(眞平王)이 재위에 있었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대내외적 발전을 이룬 군왕이고,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은 54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신라 국운을 꽃피우고 삼한통일의 기틀을 세운 왕이다. 이런 야심가 두 명의 격돌이니 아막성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전투는 원래 백제, 고구려, 왜 삼국이 연합하여 신라를 치기 위한 동맹(同盟)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돌궐(突厥)의 내전과 수(隋)나라의 팽창정책, 왜는 실권자 성덕태자의 동생 내목황자의 발병(發病)으로 군사행동이 지연되었다. 결국, 백제는 단독으로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다. 삼자 동맹의 공격에서 단독공격으로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으니 원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선제공격이라 초기에는 일정한 성과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백제는 초기의 승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4만 대군 대부분을 잃는 대패(大敗)를 하게 된다. 이 전투는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대회전(大會戰)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전투로 양국의 존망이 즉시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백제군 4만 명이 투입될 정도의 대규모 전투여서 이후 삼국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우선 승리자 신라의 변화가 아주 컸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왜 삼국의 협공이라는 국제 정세와 백제 대군의 침공을 맞아 수세적 입장이 아닌 적극적 공세를 취해 승리함으로써 삼한통일(三韓統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백제는 비록 전투에서 패배해 무수한 병사를 잃기는 했지만, 전투를 지휘한 것이 귀족 세력의 주장인 좌평(佐平) 해수(解讐)였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패배가 절대적 손실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초보 대간꾼 강/사/랑 부부가 두 번째 대간길에서 남원 아곡을 출발해 복성이재를 향하는데, 그곳 산길에서 허물어진 성터를 만나게 되었다. 삼국시대 성터의 특징인 잔돌로 쌓인 성벽은 허물어져 일부만 형태를 유지하고 산 사면 곳곳에 돌무더기 가득하였다. 그 허물어진 성벽 위에 서니 남원의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봄볕 따스하고 솔바람 서늘하였다. 발아래 인간세는 봄빛에 조는 듯 고요하였다. 아막산성은 핏빛 역사의 장소이다. 치열한 전투의 기억이 성돌 하나하나에 스며있다. 역사의 기억을 조금은 아는 이의 시각으로 그 성벽 잔해 위에 서니 고요함이 단순히 고요함만은 아니게 된다. 한 줄기 바람 볼을 스치는데 문득 작은 전율이 함께 느껴진다. 따스한 봄볕 아래 사위는 조는 듯 고요하지만, 한 줄기 바람 속에 차가운 전율이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은 희미한 아우성이었다. 옛 전쟁터에서 울부짖던 병사들의 고함소리였다. 천사백여 년의 세월을 건너온 고함소리는 은은하지만 또렷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들은 무명(無名)의 병사였다. 명예도 권세도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승리도 패배도 그들과는 무관하였다. 다만 그들은 동원되었고 내몰렸고 죽어갔다. 4만 명의 병사라는 무리 속 숫자로만 존재하는 병사로서 싸우다 산화하였다. 진평왕과 무왕처럼 역사에 이름도 남기지 못한 그들은 왕의 이름을 역사에 남겨주기 위해 이 산자락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른 후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스러져 갔다. 그것이 이름 없는 그들의 운명이었다. 세월 흘러 그들의 전장에 스쳐 가는 나그네로 무너진 성벽 위에 섰다. 따스한 봄볕 아래 천지가 고요하였다. 그러나 옛일을 아는 이로서 마냥 무심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그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잠시 고개 숙였다. 편히 쉬시기를! 구간 : 백두대간 제 6 소구간(사치재 ~ 복성이재)
4월 2일. 오늘은 3년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세째 형의 기일이다. 그날은 회사 일로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인천공항에 돌아 오는 날이었아. 공항에서 집으로 도착 전화를 하는 순간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랬던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상처만 남겨 두고 그해 봄 세째 형은 그렇게 떠났다. 세월 참 빠르다. 벌써 3년이 흘렀다니... 아막산성/阿莫山城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사치재 ~ 복성이재 구간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대간길 출발하려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그곳 화단에 산수유꽃 만발하였다. 산수유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이다.
# 한겨울 혹독한 추위에도 떨어지지 않은 산수유 열매.
# 세 개의 고속도로를 이어 달려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는 봄나들이 가시는 어르신들로 붐빈다. 오늘 우리는 이곳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간 길을 출발하려고 한다.
# 지리산 휴게소에 주차하고 장비를 챙긴 후 고속도로 옆 사면을 걸어서 사치재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힐끗힐끗 쳐다 본다.
# 곧장 697봉을 향해 오른다. 그 오르막에서 생강나무를 만났다. 생강나무는 산수유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다만 산수유는 꽃잎이 뾰족하고 생강나무는 오글오글하다. 또 하나는 인간세에 하나는 산 속에서 자라는 점이 차이이기도 하다. 둘 다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생강나무는 가지를 꺽으면 생강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수피는 한약재로 쓰인다.
# 697봉 사면은 몇 해 전 일어난 산불로 숲이 까맣게 그을렸다. 안타까운 광경이다.
# 불에 타서 흉칙하게 그을린 소나무들.
697봉에 오르니 간밤에 이곳에서 야영한 듯한 대간꾼이 떡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혼자서 3일 정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육십령까지 내쳐 주파할 작정인가 보다. 대단하다. 그리고 부럽다! # 697봉에서 바라 본 지난 주의 대간 길.
# 사치마을 앞산의 벌목 현장. 산을 홀라당 까 뒤집었다.
# 697봉에서 시리봉으로 향하는 대간 길. 몇 해 전 휩쓸고 지나간 산불로 황량한 모습이다.
# 능선 마루금을 따라 잠시 진행하였다. 한숨 돌리며 돌아 본 697봉과 너머의 사치마을과 매요리 인근의 산들.
# 산 아래로 우리가 출발했던 지리산 휴게소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 시리봉으로 가는 대간 길.
# 지리에서 백두까지 이어진 백두대간 마루금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마눌. 그렇게 우리 둘이 이 산줄기를 따라 끝까지 가 봅시다!
# 대간 길 무덤가에 핀 할미꽃. 왜 할미꽃은 항상 무덤가에 피는 것일까?
# 산불 피해 입은 고사목 한 그루 홀로 말라 간다.
# 황량한 마루금을 따라 길게 진행하였다. 어느 능선에서 칡넝쿨에 칭칭 감긴 어린 소나무 묘목을 만났다. 마눌은 지체없이 칡넝쿨을 걷어 내 소나무를 구했다. 대간길에 나선 이후 마눌은 극단적 자연보호주의자가 된 듯하다. 아무리 오르막이 가팔라도 나무뿌리를 밟지 않는다.
# 길게 걸어 새맥이재에 도착했다. 새맥이재는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연 봉대리를 이어주는 옛고개이다.
# 새맥이재에서 아곡리로 내려가는 길.
# 새맥이재에서 또다른 한 팀의 대간꾼들을 만났다.
# 시리봉 전방 봉우리의 숲에서 흐르는 땀을 식혔다.
# 시리봉 부근의 헬기장.
# 오늘도 대간길은 철쭉밭 사이로 나 있다. 이 일대의 산은 온통 철쭉밭이다. 철쭉꽃 필 때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다.
# 781봉.
# 흥부 전설로 유명한 성리마을이 내려다보인다.
# 선바위 근처에서 아까 만났던 대간꾼들을 다시 만났다.
# 781봉에 서면 오늘 구간의 종착지인 복성이재와 그 좌측에 있는 천문대가 내려다보인다. 저 천문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취미로 운영하는 사설 천문대이다.
# 천문대. 소백산 천문대와는 색다른 분위기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니 규모가 작고 높은 산 꼭대기가 아닌 야산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 멀리 아막성터와 그 너머로 치재 마을이 보인다.
# 781봉에서 뒤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오늘도 정상주는 막걸리.
# 781봉에서 아막성터로 내려가는 사면의 풍경.
#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민둥산의 분위기가 난다.
# 781봉에서 건너다 보였던 아막성터에 섰다. 삼국시대의 성은 이렇게 작은 돌을 켜켜이 쌓아 완성했다. 이렇게 가파른 산에서 큰 돌을 옮기거나 다룰 장비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1,400여년 전 양국 왕의 이름을 역사에 빛내주기 위해 싸우다 전몰한 수 많은 목숨이 어려 있을 돌들로 후세인(後世人)들은 돌탑을 쌓아 놓았다.
# 그 허물어진 성터에 서서 혼자 상념에 젖은 마눌.
# 무심한 세월이 흘러 성은 허물어지고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 허물어진 성터에 서니 바람결에 옛사람들의 함성소리 들리는 듯하다.
# 역광 속의 아막산성. 아막산성은 백제에서 부른 이름이고 신라에서는 모산성(母山城)이라 불렀다.
# 아막산성에서 바라 본 성리마을. 고요하고 평화롭다.
# 허물어진 성곽 끝에 복성이재로 향하는 길이 열려 있다.
# 길게 내려 복성이 뒷재에 도착했다.
# 지도에 복성이 뒷재란 표시가 없어서 여기가 복성이재인 줄 착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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