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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열네번째(신의터재~화령재)-따로? 또 같이!!! 본문

1대간 9정맥/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열네번째(신의터재~화령재)-따로? 또 같이!!!

강/사/랑 2007. 6. 25. 19:18
  [백두대간]그 열네번째(신의터재~화령재)


 

1983년 여름이었나 보다. 당시 경남 남해에서 군 생활할 때인데, 마침 일요일이어서 점심 먹고 부대원들끼리 부대 아래 선착장에서 수영하며 놀고 있었다. 선착장이라고 해봐야 우리가 산에서 잘라온 통나무로 만든 간이부두였다. 그 통나무 선착장 위에서 다이빙하고 근처에서 수영도 하고 그러면서 일요일 오후를 즐겼다.

우리 부대와 인접한 부대는 물건항이란 커다란 C자형 만(灣)을 사이에 두고 툭 튀어나온 곶부리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직선거리로 약 3~4km 떨어져 있는데, 바다 지형이 그렇듯 손에 잡힐 정도로 눈앞에 빤히 바라다보였다.

 

그날 수영하다가 누군가가 반대쪽 부대까지 수영으로 갈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고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서 내기 비슷하게 갈 수 있다 없다로 편이 갈려 버렸다.

결국, 갈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증명하겠다면서 헤엄쳐 출발했는데,
무모한 그 대여섯 명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당시 50kg이 채 안 되는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어릴 때부터 수영엔 자신이 있었던지라 호기 넘치게 앞장섰다.

모두 자신 있게 출발은 했지만, 처음 도전하는 장거리 바다 수영이라 걱정이 많이 되었다. 때문에 
체력 아낄 목적으로 자유형보다는 평형으로 머리만 물 밖으로 내놓고 조심스럽게 헤엄쳐 나갔다.


그런데 물건만의 3분의 1쯤 갔을까? 
갑자기 물살이 가로로 빠르게 흐르면서 물이 차가워지는 것이었다. 당시는 8월이어서 수온이 한참 올라 있을 때였는데, 바다의 바깥쪽과는 달리 넓고 깊은 곳에는 빠른 냉수대가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물이 차가워지니까 당황한 데다 저온으로 인하여 체력 저하가 심해졌다.

넓은 만의 반쯤 수영해 갔을 때였다. 서울 출신의 이등병 녀석이 서서히 이상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 복서 출신이라 몸도 좋고 체력도 좋은 녀석이었는데,
생존 능력은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던 모양이다. 헤엄치는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힘겨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하고 수영에 자신 있었던 고참 한 사람 둘이서 번갈아 가며 녀석을 이끌고 호통도 치고 격려도 하면서 겨우겨우 조금씩 진행했다. 녀석도 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붙들고 악을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평소 눈에 빤히 보이던 그곳이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바다는 육지와 달리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실제 거리에 비해 눈에 보이는 거리가 가까워 보인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다 죽지 싶었다. 이런 무모한 짓을 왜 했나 싶고...

살아야 했다. 그러자면 대책이 필요했다. 정답은 정신력이었다. 결국, 군바리 특유의 '악으로 깡으로' 정신 앞세워 누구랄 것 없이 고함을 질러가며 구령에 맞춰 헤엄쳤다. 리듬에 맞춰 규칙적으로 손발을 내 저으니 훨씬 헤엄치기가 쉬워졌다.

두 시간 정도 헤엄을 쳤을까? 드디어 반대쪽 부대의 선착장이 100여m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가 고통의 절정이었다. 지금 내가 백두대간 하면서 매 구간의 마지막 1시간 정도 남겼을 때 느끼는, 이른바 姜某氏 작명(作名)의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 증후군"하고 같은 셈이었다.

어찌 어찌해서 건너편 해안에 도착하기는 했다. 엉금엉금 기어 그쪽 부대 선착장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모두 탈진하여 쓰러져 버렸다. 한참 동안 모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오래 누워 있다가 하나둘 정신 차리고 일어났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살기는 했는데 문제가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 살아나기는 했지만, 그곳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다시 우리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헤엄쳐 건너간 부대는 인적이 없는 바닷가 절벽 위에 있고 우리 부대까지는 산을 몇 개 넘고
마을도 세 개나 지나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바다로 헤엄쳐 건너왔지만,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체력도 시간도 없고.


대책은 걸어서 가는 방법뿐이었다. 그러자면 벌거벗은 몸으로 산을 넘고 다시 마을을 지나야 했다. 그래도 별수 있나? 빨리 부대로 귀대해야 저녁도 먹고 야간근무 투입도 하는데...

 

그 길로 우리 여섯 명은 흰색 군바리 사각팬티에 맨발 차림으로 산길을 걸었다. 젊은 남자 여섯 명이 흰색 속옷 바람에 맨발로 걸어가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중 몇 명은 매직 펜으로 팬티 옆에 나이키 그림까지 그려 넣었으니...^^*

두 시간 헤엄쳐 간 거리를 반은 구보로 반은 속보로 걸어왔는데, 꼬박 네 시간이 걸렸다. 돌아오면서 내가 '따로 또 같이'의 '맴도는 얼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전인권의 산짐승 울음 같은 보컬에 빠졌던 내 애창곡이었다.


전우들도 듣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노래가 좋다고 가르쳐 달라고 해서 모두 한 소절씩 따라 불러가며 돌아왔다. 나중엔 모두 합창으로 크게 부르며 구보로 뛰었다. 남들이 보면 특수훈련을 받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맴도는 얼굴

 

한 여름날 그늘 밑에 번 듯 누워 하늘을 보면 / 내님 얼굴 잠자리처럼 맴도네 맴도네 맴 / 한 여름밤 자다말고 문뜩 깨어 별들을 보면 / 내님 얼굴 유성기판처럼 맴도네 맴도네 맴 / 피할 길 없네 님의 사랑 / 끊을 수 없네 나의 마음 /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말못하고 / 그때 사연만 뱅뱅 도네

 

여름가고 산들바람 선뜻 불어 가을이 오면 / 내님 얼굴 풍뎅이처럼 맴도네 맴도네 맴 / 보름달이 둥실 뜨고 귀뚜라미 호르륵 울면 / 내님 얼굴 유성기판처럼 맴도네 맴도네 맴 / 피할 길 없네 님의 사랑 / 끊을 수 없네 나의 마음 /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말못하고 / 그때 사연만 뱅뱅 도네

 

- 노래 '따로 또 같이'


 


따로? 또 같이!!!


구간 : 백두대간 제 19 소구간(일부)(신의터재 ~ 화령재)
거리 : 구간거리(10.55 km), 누적거리(308.28 km)
일시 : 2005년 8월 5일. 쇠의 날.
세부내용 :

신의터재(05:35) ~ 329.6봉(05:54) ~ 소로 갈림길 ~ 소로 갈림길 ~ 소로 갈림길 ~ 무지개산 갈림길(07:18) ~ 437.7봉(09:05) ~ 윤지미산(09:42) ~ 가파른 내림길 ~ 인삼밭 ~ 임도(10:36) ~ 삼각점(10:43) ~ 고속도로 공사구간 ~ 화령재(11:00).

총 소요시간 5시간 25분. 만보계기준 22,800걸음.


8월 5일 금요일. 9일 간의 길게만 느껴졌던 여름 휴가도 이제는 3일 밖에 안 남았다. 휴가기간 중 최소한 4일 이상은 대간 속에서 보낼려고 계획했는데, 마눌 성화 때문에 할 수 없이 겨우 하루 밖에 산행을 못했다.


오늘도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당일 산행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긴 매일 매일 수은주가 년중 최고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실정이니... 일기예보에서는 오늘도 년중 최고기록을 예상하고 있다. 서울 예상 기온 35.7도이다.

더운 날씨를 피할 겸 일찍 산행을 하기 위해 4일 저녁에 미리 출발하였다. 영동,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황간 휴게소까지 졸린 눈을 부비며 달렸다. 황간 근처에 가니 도저히 더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다. 마눌은 옆에서 잘도 자고 있다. 황간 휴게소에 주차하고 시트 뒤로 젖히고 피곤한 몸을 눕혔다.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데다 모기떼 극성 때문에 더이상 자기가 힘들어 일어나니 새벽 1시. 두 시간 정도 잔 모양이다. 마눌 깨워서 간단한 요기하고 버리고 씻는 원초적 행위 마치고 황간을 출발하였다. 시각은 새벽 두시다.

황간IC에서 나와서 모동면쪽으로 방향을 잡아 올라 갔다. 캄캄한 시골길엔 인적도 차량통행도 없고 우윳빛 안개만 자욱했다. 오늘 또 얼마나 더울려고 이러나? 모동에서 다시 모서면 쪽으로 방향을 잡는데 이정표가 분명치 않아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신새벽에 물어볼 데도 없고...

그래도 억지로 이소면까지 잘 왔다. 이제 신의터재로 가는 고갯길만 찾으면 되는데, 이정표 어디에도 신의터재란 표식은 없다. 상주 방향이라는 표지도... 사거리에서 대충 방향을 잡아 가 보기로 했다. 한참을 달려가는데 신의터재가 벌써 나와야 하지만 아직도 고개는 나올 생각을 안 하고 벽돌공장이 나오더니 고속도로 건설 현장이 나온다. 이런 이 길은 화령재 가는 길이 아닌가? 조금 있다 보니 신봉 사거리가 나온다.

아무래도 이소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다시 U턴해서 이소리까지 돌아와서 아까 간 길과는 반대쪽으로 가 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쉼터가 있고 김준신 의사비가 있는 신의터재가 나온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김준신 의사

김준신의사는 청도人으로 상주 판곡(板谷)에서 태어났는데 판곡은 고려조 이후로 청도 김씨 세거지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사는 32세의 나이로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소집하여 솔령장(率領將)이 되었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칠곡 석전까지 전진하였다가 다시 상주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 사수에 분전하여 많은 왜적을 도륙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임진년 4월 25일 장렬히 순국하였다. 당시 의사의 활약에 분노한 왜적들이 판곡을 찾아 김씨 일문을 멸하려 하자 죽어도 왜적의 손에는 죽을 수 없다 하여 낙화담에 투신 자살한 김씨문 節婦들의 넋도 오늘까지 낙화담을 밝히고 있다.
이에 노산 이은상선생이 1973년에 낙화담의적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로 그들의 의기를 찬양하였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 절사곡(節士谷)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 설악(雪岳)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 꽃은 떨어 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풍수학자가 본 신의터재

산이 모양을 변화하는 과정에서 산줄기의 폭이 좁아지고 낮아진 곳을 고개라고 부른다. 백두대간 중 추풍령과 화령재 사이의 구간을 살펴보면 추풍령 ~ 난함산 ~ 작점고개 ~용문산~ 회룡재 ~ 백학산 ~ 소정재 ~ 금은봉 ~ 신의터재 ~ 장자봉 ~ 화령재로 이어지는데, 산(또는 봉)과 영(또는 고개, 재)이 계속 반복되면서 백두대간은 대장정을 하다가 '界水則止'한다. 계수즉지는 풍수지리 고전인 장경(葬經)에 나오는 구절로 '地氣가 용맥을 따라 가다가 물을 만나면 그치면서 혈이 생긴다'는 의미다.   고개나 재를 한자말로 령(嶺),현(峴),치(峙) 등으로 부르지만 의미는 거의 비슷해 혼용되고 있다. 고개에 해당되는 말을 풍수지리에서는 과협(過峽)이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한다.       ............    몇 년 전 조성모라는 가수가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불러 인기를 모았는데, 유행가 가사치고는 제법 의미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사 중에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다'는 말은 내 마음속에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당신이 쉴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풍수지리로 명당을 찾기 전에 과연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와 어산리 사이에 있으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는 신의터재에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젊은 나이에 오직 나라를 위해 장열하게 순국한 의사 김준신(金俊臣)의 유적비가 있다. 산줄기도 멈춰가는 과협처 신의터재에는 비록 작지만 휴식공간을 마련해 지나가는 길손들을 아낌없이 맞이하고 있다. 나는 나라나 남을 위해 '쉼터'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제 19 소구간 지기재 ~ 화령재 개념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길을 잘못 들어 한참 헤맨 후 신의터재에 도착하니 새벽 세 시다. 신의터재는 짙은 안개 속에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오늘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내도록 옆자리에서 잠만 자고 있는 마눌을 깨웠다. 정신차리고 출발하세!

마눌, 주변을 둘러보더니 너무 무섭다고 좀 더 있다가 출발하자고 한다. 이 사람이 점점...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좋다, 나도 피곤하니 1시간만 눈 붙이고 출발하자!"

오늘 엄청나게 덥다는데 시원할 때 어느 정도 진행해 두려는 계획에 자꾸 차질이 생긴다. 평소 야간산행에 대해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지 않고 있던 터라 - 캄캄한 산속에서 아무 전망도 없이 극기훈련하듯 내 달리기만 하는 것이 영 아니다 싶어- 순순히 OK 하고는 도로 차안으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한 시간 쯤 잤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보니 이런~ 두 시간이나 넘게 잤다. 바깥이 벌써 훤해졌다. 급히 마눌 깨우고 출발 준비를 서두른다. 자꾸 미적대는 마눌에게 짜증을 한바탕 내주고 출발했다. 기분 좋게 출발해도 힘들어 죽을 판인데 이거 오늘 기분이 이래 가지고서야... 

  


# 안개 자욱한 신의터재(05:35)

 

 

 

# 신의터재는 그 이름을 되찾은지 채 10년이 못 되었다.

 

 

 

# 화령재 방향 들머리엔 신의터재를 지나는 길의 이정표가 있다. 버드나무 바로 뒤가 들머리다. 새벽에 찍은 사진이 별로라 나중 오후에 찍은 걸로 대신했다.

 

 

 

# 오늘 구간 들머리. 버드나무 뒤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 간다.

 

 

 

안개 자욱한 신의터재를 뒤로 하고 대간 들머리로 들어서니 오늘도 이슬을 듬뻑 머금은 수풀과 거미줄이 제일 먼저 달려 든다. 당연히 금방 아랫도리는 축축해지고 얼굴엔 거미줄 투성이다.


오늘도 고생 꽤나 하겠구만! 묘 1기를 지나고 20여 분 완만히 오르니 '329.6봉'에 다다른다.

 

 


# 329.6봉. 작은 삼각점이 있다.

 

 

 

329.6봉을 지나 조금 진행하니 묘 2기가 나란히 있는 개활지가 나온다. 묘앞에는 작은 유리상자 안에 꽃이 정성스레 놓여 있다. 대간길에 부지기수로 있는 묘지들 중에 이렇게 관리하고 보살피는 곳이 흔치 않은 일이라 새삼 눈길이 간다.

그동안 대간길을 진행해 오는 동안 가장 많이 봐 왔던 게 묘지가 아닐까 한다. 대간길이 봉우리나 고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묘지와 묘지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백두대간을 명당으로 보고 그 정기를 받고자 하는 염원들이 모두들 대간길에 조상을 모시는 걸로 표출되나 보다.

그런데 그 많은 묘지들 중에 상당수는 수십 년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아름드리 나무들이 묘지 위에 뿌리를 내렸거나 봉분이 다 무너져서 평지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절손이 되거나 자손들의 삶이 피폐하여 조상 묘를 돌볼 여력이 없게 된 탓일 것이다.

 

명당을 찾아 험하디 험한 대간길에 조상을 모셨는데 자손들이 잘 되기는 커녕 몰락했다면 대간길에 묘를 세우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누군가는 대간의 기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도 하더라만...

잘 가꿔진 묘지 옆에서 한숨 돌리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맞은편 무지개 산 위로 아침 노을이 번지며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 동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싱싱한 오늘의 태양.

 

 

 

# 한순간에 불쑥 모습을 드러 낸다.

 

 

 

# 태양빛의 두들김에 잠에서 깨어나는 山河들!

 

 

 

# 오솔길처럼 완만하여 걷기 좋기만 하건만, 컨디션 나쁜 마눌은 자꾸만 뒤로 처진다.

 

 

 

평소와는 다르게 출발부터 차에서 내도록 잠만 자던 마눌은 오늘 영 컨디션이 별로인 모양이다. 일찍 시작해서 빨리 끝내자던 애초의 계획은 사라져 버리고 이 핑계 저 핑계 늘어지기만 한다. 그 모습이 짜증스러워 일부러 먼저 내달려 버렸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온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고 수풀의 이슬로 신발도 다 젖은 상태라 끈적끈적하여 불쾌지수도 높은데...

 

무지개산 갈림길을 지나 희미한 옛고개를 서너 개 지난 후 한 차례 올려 437.7봉에 오른다. 09:05.

 

 


# 대간길이 좌측으로 90도 꺾여 들어가는 무지개산 갈림길(07:18).

 

 

 

# 옛날엔 사람의 왕래가 많았을 소로(小路) 갈림길.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 이런 갈림길이 무지개산까지 세 군데나 있다.

 

 

 

# 437.7봉(09:05).

 

 

 

무지개산에서 437.7봉을 거쳐 윤지미산에 이르는 길은 아주 길고 지루한 길의 연속이다. 전망은 전혀 볼 수가 없고 숲속을 계속 진행할 따름이다. 해가 높이 떠 오르면서 숲속의 기온은 점점 올라만 가고 바람이 전혀 불지 않으니 뜨거운 찜통 속을 걷는 기분이다.

평소 나 보다 훨씬 산을 잘 타는 마눌은 오늘은 자꾸 쳐지기만 한니다. 컨디션도 문제지만 아마도 시작할 때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 본인은 서운해 하겠지만...

성질 같아서는 그냥 혼자 가버렸으면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조금 가다 기다리고 조금 가다 기다리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리듬이 깨져 나 역시 갈수록 힘이 들었다.

오늘 구간에도 등로엔 조그만 청개구리가 아주 많다. 밟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걸음이 휘청 휘청한다.

 

 


# 때죽나무 열매.

 

 

 

# 무릇. 맥문동과 꽃이 비슷하다. 데쳐서 무치거나 조려 나물로 먹을 수 있어 흉년에 구황식물로 쓰였다.

 

 

 

# 이질풀. 현초(玄草)라고도 하고 탄닌 성분이 있어 이질이나 설사에 약용된다.

 

 

 

 

가파른 오름을 힘들게 오르고 완만한 봉우리를 몇 개 더 지나야 드디어 '윤지미산' 정상이다.(09:42). '윤지미산'은 그 이름이 특이하다. 이름의 내력이 궁금해서 자료를 뒤져보지만 찾을 수가 없다. 김지미와 닮았다는 우스개 소리 밖에는...

신의터재에서 네 시간 정도 걸렸다. 예상 시간보다 30분 정도 오버 했다. 오늘 목적지인 갈령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화령재를 지나서부터는 산세가 다시 험해지고 고도도 높아지기 시작하는데 걱정이다.

 

 


# 윤지미산 정상

 

 

 

# 누군가 비박을 한 듯 비닐이 쳐 있다.

 

 

 

# 백두대간의 여러 산 정상 중 가장 소박한 정상석. 누군가 돌을 모아 정상석을 만들고 매직 펜으로 윤지미산이라 써 놓았다.

 

 

 

# 윤지미산 하산길은 아주 가파른 된비알의 내림이다. 동절기나 우중엔 상당히 위험할 듯.

 

 

 

# 가파른 내림을 벗어나자 갑자기 전망이 툭 트인 안부가 나타나고 멀리 판곡저수지의 모습이 조망된다.

 

 

 

윤지미산 하산길은 아주 가파른 된비알이다. 동절기에는 상당히 위험하겠다. 길게 내려 급경사를 벗어나는데, 누군가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라디오를 듣는 듯 아주 크게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완만한 하산길을 벗어나자 임도가 나타나고 그 옆에 인삼밭이 펼쳐진다. 인삼밭에선 농부 한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고 라디오 소리가 크게 들린다.

임도는 금방 숲속으로 사라지고 대간길은 우측 능선으로 올라 간다. 힘들어 하는 마눌을 억지로 끌고 무명봉 몇 개를 다시 넘으니 제법 넓은 임도가 나타난다. 마눌은 넓은 임도를 바라 보더니 여기서 탈출을 하자고 한다. 죽어도 못 가겠다고. 조금만 더 가면 화령재이니 그기서 점심 먹고 결정하자고 조금만 참으라고 하고는 출발했다.

대간길은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졌다. 아주 강렬한 뙤약볕이 내려 쬐고 있어 임도를 따라 걷기가 너무 힘들다. 임도는 으례이 빨리 사라지고 숲속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아예 뛰어 가버렸다. 다행히 금방 우측 숲속으로 대간길을 알리는 리본이 나타난다.

 

 


# 인삼밭. 라디오 소리가 크게 들린다.

 

 

 

# 햇살이 아주 강렬한 넓은 임도.

 

 

 

# 임도를 벗어나 숲속길을 한참 차고 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 라디오 소리가 끊어지고 중장비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고속도로 공사하는 곳이 나온다. 아마도 터널 굴착 중인 듯. 폭파음도 크게 들린다.

 

 

 

# 상주 ~ 청원간 고속도로 공사라는데 엄청난 규모다.

 

 

 

공사 구간을 지나 한참을 진행하니 이번엔 차량 지나 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를 따라 나아 가니 드디어 '화령재'다.(11:00). 윤지미산에서 화령재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예상되는데, 우리는 오히려 20분 정도 단축되었다. 마눌이 힘들어하면서 자꾸 처졌는데 오히려 단축되다니... 지도 상의 예상 시간이 잘못 되었나? 그동안 대부분 정확하게 맞아 들어 갔는데?

결국 신의터재에서 화령재까지 5시간 25분이 걸렸다. 예상시간보다 30분 정도 오버 했다.

 

 


# 신의터재에 있는 표언복교수의 표지기.

 

 

 

추풍령에서 이곳 화령재까지를 '중화지구대'라 부른다. '지구대(地溝帶, rift valley)'란 지각이 단층에 의한 함몰로 생긴 길쭉한 요지(凹地)를 말한다. 단층 사이에 함몰된 낮은 지대가 길게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지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추가령지구대, 길주명천지구대, 형산강지구대, 이곳 중화지구대가 있다.

따라서 추풍령에서 화령재까지의 구간은 비교적 낮고 완만한 높낮이를 보이고 있다. 천 미터급 산들이 즐비한 다른 백두대간 구간과는 여실히 대비가 되는 구간이다. 그러나 추풍령에서 이곳 화령재까지의 중화지구대 54.69km 역시 결코 허술한 구간이 아니었으며,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준 구간이었다.

 

 


# 국도 25번이 지나가는 화령재. 차량 통행이 아주 많다.

 

 

 

# 화령재에 있는 화령정.

 

 

 

# 정자의 건립기가 붙어 있다.

 

 

 

火嶺亭 建立記

옛 상주를 기록한 商山誌에 본주의 산은 商嶺, 물은 洛江이라 했다. 백두에서 태백을 거쳐 소백에 이르는 큰 줄기의 맥은 商山을 에워싸고 있는데 문장대와 이곳 봉황산은 험준하지만 수려한 기암으로 구름 위에 높이 솟아 정기로 뭉친 영산이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다. ...(중략)
신라시대 초기에 건비군 ... 경덕왕때 化寧군 ... 조선조 태종때 化寧현 ... 동서남북의 십자대로가 트여 中化지역의 행정 경제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충이고 산악이 천연요새로서 ... 신라때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사를 물리친 ... 견훤의 야망을 키운 견훤성..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정기룡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 625동란 때는 괴뢰군 15사단 병력 일천명을 사살한 화령장 지구전적... 옛부터 국방의 요충지였다. 여기 소백산맥 준령을 넘나들며 이곳을 지나는 길손에게 商嶺 또는 火嶺이란 이름을 지닌 화령재 산마루에 옛 빛이 찬란한 년륜을 자랑하고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자 이 정자를 건립하였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화령정 건립기가 내걸려 있다. 원래는 화할 化, 편안할 寧 자를 써서 화령이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불 火, 고개 嶺 자의 화령으로 변한 듯하다. 아마도 다른 많은 예의 지명이 변화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시대 문서화 과정에서 변질되었지 않았나 혼자 상상해 본다.


어쨋든 정적이고 온화한 이름에서 동적이고 공격적인 이름으로 변한 듯 하여 조금은...

 

 


# 화령정 안에 말벌이 환상적인 집을 지어 놓았다. 작점고개에 있는 능치쉼터에도 있더니...

 

 

 

지쳐하는 마눌을 이끌고 화령정에 올랐다. 오늘 처음으로 배낭 벗고 내친 김에 등산화도 벗고 양말도 벗어 던졌다. 화령정은 바람이 사통팔달로 통하여 너무나 시원하다. 차들이 씽씽 내달리고 있지만, 거리도 약간 있고 해서 윗옷도 벗었다. 쥐어 짜니 옷에서 물이 주루룩 흐른다. 바람이 너무나 시원하여 잠깐 동안에 땀이 다 식었다.

준비해 간 도시락 먹고 후식으로 과일도 먹고 시원한 바람 쐬니 부러울 게 없다. 막걸리도 한 잔 했더니 음 좋다!!! 마눌 보고 짐 챙겨 출발하자고 했더니 도저히 못 가겠단다. 


좋다! 그럼 잠깐만 눈 붙이고 가자. 좀 자고 나면 당신도 괜찮을 거다. 난간에 붙어 있는 의자에 드러누워 눈 감으니 금방 잠이 든다. 머리 위에서 말벌들이 붕붕 날아다니지만 지금 그런 것은 돌아 볼 겨를이 없다.

얼마나 잤을까?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니 커다란 덤프 트럭이 한 대 들어서더니 몇 사람이 내려 정자 쪽으로 걸어 온다. 아이구 싶어 얼른 윗옷을 챙겨 입고 마눌도 깨운다. 고속도로 공사하는 사람들이라는데 점심 먹고 잠시 쉬어 갈려나 보다. 우릴 보더니 오늘 같이 더운 날 이 무슨 고생이냐며 혀를 찬다. 그 사람들 30여 분 이런저런 이야기 하며 쉬다가 간다.

점심 먹고, 잠시 눈 붙이고, 잡담하고 하느라 1시간 30분이나 소모했다. 이제는 정말 출발해야 하는데 마눌 죽어도 못 가겠단다. 그러면서 오늘은 혼자서 가라 한다. 자기는 택시 타고 신의터재에 가서 차를 회수해서는 갈령에서 기다리겠단다. 이 사람이 점점!!! 화를 내 봐도 소용이 없다.

지금 혼자서 진행하면 서로 구간이 달라 나중에 마칠 때 곤란하게 되고, 무엇보다 힘든다고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다시 시작하기가 힘든 법인데... 이런 저런 설명을 해도 못 가겠단다. 그럼 백두대간을 여기서 포기하겠냐고 했더니 지금 상태로는 죽여도 못 하겠단다.

당신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냐? 그렇게 의지가 약해서 어떡하느냐? 화를 내고 얼러도 보지만 한번 꺾인 의지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떡한다... 그냥 혼자 진행을 할까? 이번 구간은 혼자서 진행하고 나중에 한가할 때 마눌 하고 같이 한번 더 이 구간을 땜빵으로 할까?

따로 하느냐? 아님 같이 하느냐?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어차피 처음 여원재에서 시작할 때 둘이서 같이 시작했고 진부령에 내려 설 때도 같이 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따로 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싶다. 또, 마눌 상태가 정말 장난이 아닌 듯하여 혼자 두고 간다는 것도 안 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휴가 시작하면서 세운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어 마눌의 상태보다는 내 욕심을 앞 세운 것 같은 반성도 들고... 나머지 구간(화령재 ~ 비재~ 갈령)은 다음 주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화령재 난간에 대간꾼들을 겨냥하고 붙여둔 화령택시 스티커를 보고 전화를 하니 금방 도착한다. 신의터재까지 13,000원.

신의터재에 세워 둔 우리 차는 뙤약볕 속에 얼마나 달아 올랐는지 손잡이를 잡을 수가 없다. 신의터재에서 화동쪽으로 조금 내려 오자 오른쪽으로 김준신 의사의 사당과 소나무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오늘 이왕 일찍 마쳤으니 저기나 한번 가 보자 하고 운전대를 꺾었다. 10여 분 올라가니 조그만 사당과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반긴다.

 

 


# 김준신 의사 제단비를 모신 사당.

 

 

 

 

# 벼슬만 주고 시호는 내리지 않았나 보다.

 

 

 

# 임란 당시 김준신 의사 가문의 여성들이 자진하였다는 낙화담과 수려한 소나무. 물이 아주 얕은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백마강 낙화암 삼천 궁녀의 의기가 이곳 낙화담에 이어졌나 보다.

 

 

 

# 노산 이은상 선생의 찬(讚).

  

 

 

# 괴산 쪽으로 오면서 만난 송림. 이 고장은 소나무가 성한 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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