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그 스무번째(은티재~이화령) 
이화령고개를 왜 넘는가. / 이화령마루에서 쉬어나 가지. / 치맛자락 거머쥐고 / 님 찾아가는 길. / 애도 간도 다 녹았네, / 소식 한 자 없고. 앞에는 산첩첩 뒤에는 억새밭. / 이화령 고개를 왜 넘는가. / 이화령마루에서 쉬어나 가지. / 새라면 날아갈까, / 저고리 바람에 소매 걷고. / 이화령고개를 울면서 넘네. / 이화령마루에서 쉬어나 가지.
- 양성우 '이화령을 넘으며' (전문)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여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그동안 어느 한 구간 쉽거나 그냥 넘어가는 구간이 없었지만, 계속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힘들게 한 구간이 지난 구간인 '대야산(大耶山)'과 이곳 '희양산(曦陽山)' 구간이다.
대야산 구간은 하산길의 무시무시한 직벽(直壁) 구간이 난관(難關)이었다. 이 100m짜리 삼단 직벽은 전해지는 그 무시무시한 악명 때문에 지레 겁을 먹게 만든다. 그동안 그곳 대야산 하산길에서 여러 차례 사고가 발생했고 사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꽤 고생을 하고서야 그 가파른 직벽을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야산 구간이 자연 지형 때문에 어렵다면, 이곳 희양산 구간은 인위적(人爲的) 장애물이 문제다. 현재 희양산은 출입금지의 산이다. 희양산 일대의 소유권이 어느 사찰의 소유인데, 그 사찰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것이다.
희양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선찰(禪刹)인 '봉암사(鳳巖寺)'를 품고 있다.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지증국사(智證國師)'가 창건한 이래 지금까지 청정 선도량(禪道場)으로 우뚝한 사찰이다.
봉암사가 유명한 것은 칼끝에 선 듯한 청정 수행(淸淨 修行)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1947년 봉암사에 청담(靑潭), 성철(性徹), 자운(慈雲), 향곡(香谷) 등 당대 삼사십대 선승(禪僧)들이 모였다. 이들은 조선왕조 500년의 억불정책과 일제시대 왜색 불교의 여파로 타락한 한국 불교를 개혁하기 위한 결사(結社)를 조직했다. 이른바 '봉암사 결사(鳳巖寺 結社)'다.
그들은 오로지 '부처님 법(法)대로 살자'는 정신 아래 스스로 밥하고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淸規)를 실천하는 한편 화두 참선하며 용맹정진하였다. 이 봉암사 결사로부터 한국 불교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그런 전통이 이어져 봉암사는 지금도 청정 수행 도량으로 청규(淸規)를 이어가고 있고 일년 365일 단 하루 초파일을 제외하고는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고 있다. 희양산은 봉암사를 품고 있어 그 산정에 서면 발 아래 봉암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희양산과 봉암사는 한 몸인 셈이다.
우리나라 등산 문화는 소란스럽다. 우선 떼로 몰려다니는 산악회가 무수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홀로 있으면 조용하다가도 뗴로 모이는 순간 목소리가 높아진다. 산정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십 명이 떼로 몰려다니며 고함지르고 노래부르고 먹고 마시며 야단법석을 이룬다. 이런 소란은 청정도량 봉암사 스님들의 수행에 절대적인 방해 요인이다.
그리하여 봉암사에서는 산문(山門)을 닫아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는 한편, 희양산으로 오르는 은티재와 지름티재에 초소를 세우고 산객들의 출입도 막고 있다.
안타깝게도 은티재와 지름티재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맥(山脈)에 있는 고개이다. 그 두 곳을 지나지 않고는 백두대간을 이어갈 수 없다. 때문에 그곳을 지나가고자 하는 대간꾼과 막고자 하는 봉암사 스님들과의 갈등은 우리네 대간꾼들에겐 심각한 장애 요인이다.
희양산의 입산금지 조치는 그 필요성에 대한 이해와 오죽하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등산 문화의 저급함을 늘 산에서 만나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시작했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삶의 중요한 의례(儀禮) 내지는 전환점으로 굳어가는 나의 '우리 산하(山河) 두 발로 느끼기'가 누군가의 허락(許諾)을 통해서 통과 가능하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이다.
요즘 내 직장 생활의 가장 큰 갈등요인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을 중요한 결정이 나의 의지보다는 상사나 조직의 판단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장년기 중요한 전환점으로 도전하고 있는 백두대간에서조차 누군가의 결정과 허락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찜찜한 일이다.
어쨌든 지난 구간인 대야산 직벽 하산은 힘들었지만 무사히 마쳤고, 이제 희양산만 넘으면 당분간은 부담없이 걷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자면 일단 한 번 부딪쳐 보아야 할 일이다. 사람사는 세상.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봉암사 스님들이야 공부하는 환경 만들자 하는 일이고, 우리야 공부하는 마음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으니 그 공통점으로 해결책을 찾아 보면 되겠지. 마음 단단이 먹고 희양산으로 향했다.

이화령고개를 울면서 넘네!

구간 : 백두대간 제 25,26 소구간(은티재 ~ 사다리재 ~ 이화령) 거리 : 구간거리(23.86 km), 누적거리(427.37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05년 10월 29일. 세부내용 : 은티마을(06:00) ~ 은티재(06:50),10분휴식 ~ 주치봉(07:20) ~ 은티마을 갈림길 ~ 묘지 ~ 마당바위 ~ 무명봉 ~ 전망대 ~ 무명봉 ~ 마당바위 ~ 구왕봉(08:35) ~ 전망대 ~ 암벽 로프 ~ 지름티재(09:20) ~ 개구멍바위 ~ 희양산 오름 직벽,로프구간 ~ 희양산갈림길(10:20) ~ 성터(10:20) ~ 888봉 ~ 은티갈림길 ~ 시루봉갈림길(11:23) ~ 배너미평전(11:46) ~ 무명봉 점심식사,12:40출발 ~ 용바위 ~ 마당바위 ~ 이만봉(13:17) ~ 곰틀봉(13:42) ~ 고사리밭등 ~ 사다리재(14:00) ~ 무명봉 3개 ~ 981봉(15:00) ~ 뇌정봉갈림길 ~ 평전치(15:25),분지리 갈림길, 휴식 ~ 1012봉(16:03) ~ 촛대형암봉 ~ 백화산(16:30) ~ 헬기장 ~ 옥녀봉 갈림길 ~ 암릉구간 ~ 공터 ~ 904봉 ~ 억새밭 ~ 황학산(17:20) ~ 862봉 ~ 777봉 ~넓은 길 ~ 조봉 ~ 군부대 우회 ~ 이화령(19:40).
총 소요시간 13시간 40분.(접속구간 포함). 만보계 기준 45,000 걸음.
10월 28일. 금요일. 아무리 서둘러 보지만, 월말이라 퇴근은 여전히 늦다. 부랴부랴 집에 가서 먹고 씻고 서둘러 출발했다. 시각은 이미 23:00를 넘기고 있다.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괴산쯤 가니 졸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몇 번을 까무룩 해서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 안되겠다. 좀 쉬어가자! 괴산 휴게소에 들어갔다.
휴게소엔 대형 트럭들로 가득하다. 우리도 트럭들 틈에 주차하여 시트 젖히고 잠을 청했다. 지난 번에 차에서 자면서 추위에 떨었던 기억 때문에 이번엔 침낭을 챙겨 왔다. 구스다운 900g 침낭인데 지퍼를 잠그니 오히려 더운 느낌이다.
4시 30분에 맞춰 둔 알람소리에 눈을 떴지만 쉽게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백두대간하면서 제일 힘든 순간이 금요일날 편안한 집 침대를 두고 짐 챙겨 떠나야 할 때와 현지에 도착해서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야 할 때이다. 도대체 뭘 얻자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나 싶고, 따뜻하고 안락한 잠자리 놓아 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여보, 일어나시게! 음~~ 당신이 먼저 일어 나요. 어허! 자네가 먼저 일어 나라니까! 좋다, 그럼 동시에 일어 나세!"
어느새 트럭들은 많이 떠나고 찬바람만 휴게소 주차장에 가득하다. 현재 온도는 7도. 따끈한 우동 국물로 속을 덥히고 양치도 하고 볼일도 보고서는, 가자, 은티마을로!
원래 계획은 이화령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 불러 은티마을로 가서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새벽에 택시기사와 예약하여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긴 구간이라 혹시 중간에 탈출해야 할 지도 몰라서 그냥 은티마을로 가기로 했다.
연풍IC에서 빠져 나와 우회전 하여 1.5km 가다가 우회전하여 연풍을 통과하여 계속 직진. 초등학교를 지나고 공사 구간을 지나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 고속도로를 지나 계속 직진하니 지지난 주 고생고생 끝에 내려왔던 은티마을에 도착한다.
 구산선문 희양산 봉암사/鳳巖寺
희양산(998m)은 멀리 어디서 보아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암봉이 수려한 산이다. 특히 희양산 자락에 들어앉은 봉암사의 유명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기슭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신라헌덕왕 5년(879년) 智證大師가 창건한 고찰이다. 전하기를,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절위치를 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흙으로 메우려 하는데, 큰 용이 살고 있는지라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쫓아내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白雲谷에 鷄岩이란 바위가 있었는데 봉암사를 세울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절이름을 봉암사라고 부른다 한다.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놓은 '봉암사 결사(結社)'.
조계종 특별선원인 봉암사는 지금도 이 땅에서 마지막 남은 청정수행 도량으로 꼽힌다. 산문을 굳게 닫고 일반인은 물론 불자들도 출입시키지 않는 곳. 봉암사 길목 곳곳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다 .등산객이 몰리는 주말에는 절에 사는 스님과 처사들이 순찰을 돌며 입산을 막는다. 1년에 단 한번 산문을 여는데 그날이 바로 사월초파일이다. 봉암사 문턱이 이렇게 높은 것은 봉암사의 꼿꼿한 선풍 때문이다. 해방 직후인 1947년 봉암사에는 20여 명의 젊은 수좌들이 모여들었다.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 장차 고승대덕이 될 일단의 수좌들이 해방을 맞아 봉암사로 집결한 것이었다. 조선 500년, 일제 36년간 짓밟히고 망가진 불교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고 다짐한 이들은 스스로 밥하고 농사짓고 나무하는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를 철저히 지켜나갔다. 법당에서 칠성단, 산신각 등을 허물어 버렸으며 그동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가사, 장삼, 발우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오늘날 조계종은 이를 계승하고 있다. 봉암사 결사는 6·25로 중단될 때까지 3년 동안 계속됐다. 이때 함께 수행한 사람 중에서 4명의 종정, 6명의 총무원장이 나왔고 이들의 수행 가풍은 전설로 남아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제 25, 26소구간 은티재 ~ 사다리재 ~ 이화령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오늘 구간을 조선일보 刊 실전 백두대간에서는 당일 산행도 가능하나 되도록이면 은티재 ~ 사다리재에서 한 구간 끊고 나머지 이화령까지를 또 하루에 하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도 일차 목표는 이화령, 이차는 중간 탈출로 하였다. 그러나 솔방솔방 걷다보면 끝까지 가겠지 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다.
오늘 구간은 은티마을에서 은티재로 올라 대간길에 합류한 후 주치봉,구왕봉을 넘어 봉암사 스님들이 지키고 있는 지름티재를 지나 최대 난코스인 희양산을 올라 시루봉 갈림길까지 진행한다. 그곳에서 오늘 구간 종착지인 이화령은 분지리를 사이에 두고 빤히 건너다 보이지만, 대간길은 동남쪽으로 급격히 꺾여서 이만봉, 곰틀봉, 사다리재, 981봉, 평전치, 1012봉, 백화산을 찍고 다시 서북쪽으로 U턴하여 904봉, 황학산, 862봉, 777봉, 조봉, 681.3봉을 거쳐 이화령에 닿게 되어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마치 미국의 플로리다 반도처럼 불쑥 튀어 나온 모양으로 생겼다. 빤히 보이는 곳을 두고 멀리 돌아 가야 한다는 게 난감하긴 하다. 이곳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의 원칙이 여실히 증명되는 곳이다.
캄캄한 은티마을엔 아직 인적은 없고 어느 집의 수탉 만이 "꼬끼요~" 세상을 깨우고 있다. 은티마을 구판장 앞엔 은티마을 유래비와 삼사백 년 먹었다는 쭉쭉 뻗은 전나무들, 그리고 금줄을 두른 남근석(男根石)이 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대충 눈대중으로 보고 지나쳤다.
은티마을은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라 한다. 따라서 음기를 재우고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남근석을 세웠고, 매년 섣달 20일에 동구제(洞口祭)를 지내는 모양이다.
각자 이마에 불 밝히고 손 한번 꼭 잡아 서로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고 출발했다.(06:00). '마을 구판장'을 지나자 마자 길은 다리 앞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은티마을에서는 길들이 마치 부채살처럼 퍼져 입석골, 은티재, 지름티재, 시루봉 등으로 갈라진다.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닌 은티로 통한다고나 할까?
'오른쪽 길'로 올라서 마을을 통과하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도 건넌다. 지지난 주 산속에서 길잃고 헤매느라 너무나 힘들었지만 다시 올라올 때 헷갈리지 않으려고 하산하면서 주변을 유심히 보아 두었더니 중간에 갈림길이 몇 개 있지만 의외로 쉽게 길을 찾아 올라갈 수 있다.
곧 '사과 과수원'에 이른다. 오늘도 사과가 주렁주렁 탐스럽다. 하나 따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눈맛으로 만족하고 과수원 벗어나 본격적으로 숲길로 접어든다. 한참 오르니 계곡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에서 다시 우측으로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양쪽 모두 표지기가 붙어 있어 잠시 고민하다가 우측은 입석골 가는 길로 짐작하고 아래쪽 길로 접어든다.
한참 오르니 지난 번 하산하면서 길이 잠시 헷갈렸던 곳이 나타난다. 어느새 날이 밝아 헤드램프 불을 껐다. 오늘 두 번 다시 불 키는 일은 없기를 바라며...(택도 없는 소리!!! ^^;)
잠시 후 지난번 길 잃고 어두운 숲속 헤매느라 대간길 최대의 위기를 안겨 주었던 '은티재'에 도착했다.(06:50). 감개가 무량하다. 여길 찾느라 그날 밤엔 그렇게 헤맸는데...
은티재엔 낙엽이 가득하고 쭉쭉 뻗은 나무들로 아름다운데, 봉암사쪽 하산길, 주치봉쪽 오름길엔 목책을 쳐 막아 두었고 등산금지라고 큰 현수막과 경고문을 붙여두었다.
# 은티재. 
등산금지 현수막이 무시무시하지만 우리는 등산하는 것이 아니라 산행을 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으니 너와 상관없다, 어험! 기침 한번 해주고 주치봉 오름으로 들어섰다. 주치봉 오름은 아주 가파른 흙길인데 온통 발목 깊이의 낙엽으로 뒤덮혀 있고 전부 참나무잎이어서 아주 미끄러워 오르기가 힘이 든다. 지난 봄, 소백구간 선달산 오름도 똑같은 환경이어서 이렇게 힘이 들었는데... 참나무 낙엽은 잎의 크기도 두텁고 크며, 표면이 기름을 발라 놓은 듯 미끄럽다.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을 스틱에 의존해 낑낑대며 오르니 등 뒤쪽으로 지난 구간 하산길의 암벽 슬랩지대가 모습을 들어낸다. 특히 세 번째 슬랩은 지금 쳐다봐도 무시무시하다. 이제 멀리서 쳐다보니 슬랩지대에서 은티재까지는 바로 아래인 걸 알 수 있다.
저 거리를 한 시간 넘게 헤맸다니... 무릇 모든 진리란 알고 나면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하기만 한 것을! 20여 분 낑낑대며 오르니 널찍한 '주치봉' 정상에 도착한다.
# 주치봉 정상. 기름지고 두터운 참나무 낙엽이 가득하다. 
주치봉 내림은 오름보다도 더 미끄러워 방심하다간 엉덩방아 찧기가 십상이다. 스틱으로 찍어가며 조심조심 안부로 내려오니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구왕봉 오름을 잠시 오르자 묘지 1기가 나오고 구왕봉 50분을 알리는 이정표도 나온다. '무명봉' 하나를 오르자 뒤쪽으로 구왕봉 정상이 조망된다. 구왕봉은 미끈한 단일 산이 아니고 몇 개의 무명봉을 거느린 형태다.
전망대를 지나 잘생긴 소나무가 있는 두 번째 '무명봉'을 오른다. 이곳에선 은티마을쪽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명봉을 조금 지나니 '마당바위'가 나온다.
널찍한 마당바위 위엔 솔잎이 떨어져 덮혀있고 홀대모 초은(艸垠)님이 성혈이라고 표현한 구멍도 두 개 이어 있다. 마눌에게는 이것이 용의 발자국이라고 설명해줬다. 원래 구왕봉은 구룡봉인데 봉암사를 지을 때 쫓겨난 용들이 이 산으로 와서 살았다고 하니 저 구멍은 틀림없이 용의 발자국 일거야.
# 주치봉 안부.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 
# 무명봉에서 바라 본 구왕봉 정상. 
# 무명봉을 지나 한참을 오르자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 구왕봉 사면의 절벽지대가 보이고, 
# 은티마을과 석회석 광산의 흉칙한 모습도 보인다. 
# 구불구불 용이 승천하는 듯한 소나무 
# 마당바위. 
# 구왕봉 정상.(08:35) 낙엽진 나무들에 둘러 싸인 정상은 볼품없다. 
# 둘산악회의 코팅 안내판. 
'구왕봉 정상'은 볼품없는 맨땅이고 지난 구간부터 보이기 시작한 둘산악회의 코팅된 안내문이 나무에 붙어 있다. 간식 먹고 한숨 돌린 후 출발했다.
잠시 가자 희양산의 무시무시한 직벽이 눈앞에 펼쳐진 전망대가 나온다. 희양산 직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주눅이 들게 만든다. 산 전체를 하얀 직벽으로 둘러 쳐 있어 거대한 요새를 보는 듯하다. 봉암사를 희양산 꼭대기에 짓는다면 사람들을 막을 필요도 없을 건데...
# 희양산 직벽. 역광 탓에 제대로 표현이 안된다. 
희양산 암벽
희양산 암벽은 양지녘 높은 곳에 앉은 우리 마을 할아버지다. 바람에 실려오는 아랫세상 온갖 얘기 다 듣고도 천년을 말 없으신 봉암사 부처님이다. 어쨌거나 요즘 세상 오욕칠정 얘기는 차라리 안 들으시는게 나은데.
- 권경업
# 소나무 가지 너머 저 멀리 봉암사가 보인다. 
# 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지나고 
# 두 번째 전망대에서 바라 본 희양산.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마지막 격투 씬이 나오는 암봉 같은 느낌이다. 
# 희양산 너머 찬란한 아침해가 비친다.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 내리는 길은 아주 위험한 구간이다. 아주 가파르고 위험한 암벽구간이 이어진다. 로프에 매달리고 나무뿌리 잡으며 억지억지로 힘들게 내려섰다. 당연히 마눌은 오늘도 암벽구간에서 바둥바둥, 어머어머! 자연히 시간은 계속 오버된다.
지름티재가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앞선다. 스님들이 나와 있으면 어떡하나? 뭐라고 얘기하나? 만약 못 가게 했을 때는 어찌하나? 번뇌로다. 번뇌로다. 스님들 공부하기 위해 외인들 막느라 번뇌이고 산꾼들 백두대간 이어가기 위해 막아서는 스님 피할 걱정에 번뇌다.
# 암벽 하산길의 고사목. 은티마을 석회광산은 여기서도 보인다. 
# 바위 사이로 난 길도 지나고. 
# 바위 로프 구간을 벗어나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가파르고 낙엽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기만 하다. 
드디어 '지름티재'에 도착했다. 이곳 목책은 은티재와는 비교가 안되게 무시무시하다. 초소용인지 움막도 하나 세워져 있다. 두 분의 젊은 스님이 추운지 담요로 무릎을 덮고 앉았다가 벌떡 일어선다. "못 갑니다. 돌아가십시오!"
우여곡절이 많았다. 예의, 미소, 대화, 논리 동원하여 허락받고 감사 인사드리고 또 약속도 드리고 희양산 오름에 들어섰다. 빨리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 거대한 바위 한 덩어리 올려져 있다. 
# 한숨 돌리며 돌아보니 우리가 조금 전 지나온 가파른 구왕봉 하산길이 보인다. 
# 두부 한 모 잘라서 올려 놓은 듯 거대한 바위덩어리. 
#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뚱뚱이는 기어서 날씬이는 서서 지난다는 개구멍바위. 마눌은 날씬이인 데도 배낭에 걸려 앉아서 통과. 
# 봉암사 쪽으로 일제히 가지를 뻗은 소나무. 
가파른 사면을 한참 올라가니 좌측에 무시무시한 직벽이 나타나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지도엔 희양산 정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암벽 밑을 우회하여 성터 쪽으로 가는 우회로가 표시되어 있어 주변을 찾아보니 정말 작은 소로가 암벽 쪽으로 나 있다.
그러나 고사목으로 진입구를 막아 두었고 선답자들의 산행기는 모두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라고 적혀 있다. 우회로가 정말 있다면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누구도 그 길로 갔다는 말은 없으니 일단 위로 치고 올라갔다.
#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힌 나무뿌리. 중국 영화 천녀유혼에 나오는 나무 분위기가 난다. 
드디어 그 유명한 희양산 오름길이 나타난다. 겁 많은 마눌 어느새 창백해진다. "걱정 말고 올라가자. 일단 줄을 잡으면 줄에만 의존하지 말고 항상 발디딤을 확보해라. 그리고 내가 올라가는 것을 잘 지켜 봤다가 그대로 따라 오시오!."
마눌 스틱 넘겨 받고 먼저 줄 잡고 올라와서 마눌 발 디딜 곳 힘줄 곳 일러주며 한 구간 한 구간 올라갔다. 줄에 매달려 바둥거리는 마눌 조심스레 달고 올라가느라 시간이 하염없이 지체된다.
그런데 희양산 오름 직벽구간 정말 장난이 아니다. 매달아 놓은 로프 길이만 따진다면 100여 미터는 넘을 것 같다.
# 희양산 로프 구간의 시작 지점. 
# 온몸으로 로프에 매달려 올라가는 마눌. 
# 이제 좀 실력이 늘 때도 되었는데... 
# 중간에서 한 숨 돌리고. 
# 다시 낑낑 올라간다. 
# 마지막 로프구간. 홈통은 저절로 생긴 건지 아님 사람들이 다녀서 생긴 건지... 
# 다 올라와 내려다보니 으스스 하다. 
'희양산 갈림길'에 10시 20분에 도착했다. 밧줄에 매달려 얼마나 용을 썼는지 마눌은 몸 이곳저곳이 아프다고 야단이다. 수고했다고 격려하고 다음 포스트인 성터를 향해 출발했다. 희양산 정상은 여기서 금방인데, 꼭 한번 가 보고 싶지만 약속이 약속인 만큼 미련없이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막 출발하려는데 옷이며 배낭이며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한 남녀 다섯 명이 올라온다. 인사하고 어디 가시느냐니까 희양산으로 간단다. 안 가시는 게 좋으시겠다고 말씀드리고 있는데, 배낭을 맨 건장한 스님 한 분이 뒤이어 올라와서는 절대로 희양산엔 못 올라간다고 강경하게 막아선다.
갈 길도 바쁘고 실랑이하는 모습이 보기도 안좋아 우린 성터를 향해 출발했다. 웃음이 좋아보이는 스님 한 분을 더 만나고 10여 분 편안한 산길을 걸었더니 어느덧 '성터'에 도착했다.(10:30)
옛 신라산성으로 '희양산성'이라 불렀던 곳이다. 천년 세월의 흔적이 완연하다. 복성이재 부근의 신라 산성에서 느꼈던 감회가 여기서도 일어난다. 천 년 전 어떤 이들이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저 돌들을 하나 하나 쌓아 올렸을까? 바윗돌에 손을 올려 천년 세월을 음미해 보았다.
성벽을 따라 한참 걸으니 목책으로 성벽을 막아둔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나타난다. 성벽에 앉아 물 마시고 한숨 돌리자니 희양산 갈림길에서 봤던 이들이 결국 희양산 정상을 못 가고 돌아 간다.
아쉽겠지만 저토록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뜻을 이해해야 한다. 만약 저렇게 막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희양산 정상에서 야호 소리 난무할 것이고, 음주가무에 쓰레기 천지에 난리가 아닐 것이다. 성철스님 일행이 남기신 봉암사 결사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눈 푸른 선승들의 목숨 건 큰 공부를 방해하지 말아야지.
내 생각엔 우리 대간꾼들의 백두대간 종주에 대한 의지 역시 만만치 않은 만큼 지금처럼 무조건 막기만 하는 것 보다는 '총량제'를 도입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희양산은 기본적으로 입산금지를 하고, 대간길이 정상을 빗겨 통과하는 만큼 대간꾼에 한해서 인터넷을 통해 접수를 받고 허가를 내주되 하루에 10명 내지는 20명만 통과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봉암사의 청규도 지켜 나가고 대간꾼들의 원성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윈윈(win win)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 희양산성. 
# 산성을 따라 키작은 산죽밭으로 대간길은 이어진다. 
# 목책으로 막아 둔 구간. 
목책을 우회하여 888봉을 향해 가는데, 이번에 수십 명의 단체 산행객이 동시에 나타난다. 역시나 사다리재에서 올라와 희양산으로 간다고 한다. 희양산 정상엔 스님들이 지키고 있어 가시기 힘들 거라고 했더니 자기들은 대장이 괜찮다고 했다면서 문제 없단다.
아마도 안내 산악회인 듯한데 대간종주도 아닌데 굳이 희양산을 선택하고 강행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차 한 대를 가득 채워서 왔는지 행렬이 아주 길다. 그 많은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웃고 떠들고 요란하다.
자꾸만 저렇게들 행동하니 봉암사 측에서는 더욱 강경하게 희양산을 통제하려 하고, 따라서 꼭 지나 가야 할 대간꾼들이 마음 졸이며 밤중에 위험한 산행을 하거나 우회해야만 하는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 팀은 얼마나 많이 왔는지 선두와 후미 간의 간격이 30분 이상 벌어져 있고 맨 뒷쪽의 50대 여성 한 분은 산행이라고는 처음하는지 거의 초죽음이 된 표정으로 총무쯤 되어 보이는 사람과 같이 올라오고 있다. 기운 내시라고 박수 한번 쳐줬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 가야 할 888봉. 
# 고사목 
# 시루봉갈림길. 
# 솔잎이 푹신한 야영하기 적당한 곳. 야영 흔적이 있다. 
'888봉'을 넘어 가자 시루봉을 좌측에 둔 '갈림길'이 나온다. 은티마을에서 올라 온 길이 대간길 아래쪽에서 계속 이어져 있고 대간길은 솔잎이 푹신히 깔려 있어 걷기가 좋다. 지도에는 963봉을 오르는 길이 표시되어 있고 그 쪽으로 올랐다는 산행기도 있지만 표지기들은 모두 우회로를 따르도록 붙어 있다.
편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억새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배너미평전'이 나온다. 배너미평전. 은티마을이 여근곡이라더니 혹시 그것을 배에 비유했나? 아니면 이 동네도 천지 개벽의 홍수 전설이 있었나?
길은 이곳에서 다시 시루봉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오고 대간길은 본격적으로 동남쪽으로 급격히 꺾여 내려간다.
# 배너미평전. 억새밭 속에 들어가니 눈에 띄지도 않는 헬기장이 있다. 
# 시루봉을 거쳐 분지리로 갈라지는 곳. 
배너미평전을 넘어 오면서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졌다. 종아리가 땡기고 고관절 쪽이 아파오면서 걸음이 자꾸 늦어진다. 희양산 오름에서 쩔쩔매던 마눌은 이제 힘이 나는지 저만큼 앞서 가버린다.
저 혼자 마구 내달리는 마눌 불러 세워서 점심 먹자고 청했다. 체력이 떨어진 모양이다, 밥 먹고 에너지 보충하자! 감식초 탄 막걸리에 삼각김밥으로 안주하고 입가심으로 포도 한 송이 먹으니 조금 살 것 같긴 한데, 쉬었더니 금방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린다. 얼른 짐 챙겨 다시 이만봉을 향해 출발했다. 12:40
밥 먹고 나도 난 금방 회복이 안되어서 뒤로 쳐지고 마눌은 씩씩하게 잘 달린다. 발 아파 늦은 데다 사진 찍느라 지체했더니 마눌은 어느새 이만봉에 올랐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부랴부랴 카메라 집어 넣고 이만봉 오름으로 올라 섰다.
밥 먹고 나서인지 오히려 더 힘이 들어 헉헉대며 올라서니 까만 오석으로 만든 정상석이 있는 '이만봉'에 도착했다. 13:17. 마눌은 내가 오는 것을 확인 하더니 금방 또 먼저 가버린다.
# 용바위. 
# 이만이골의 멋진 단풍과 분지리 마을. 
# 가야 할 곰틀봉과 멀리 백화산. 
# 마당바위에서 건너다 본 건너편 이화령으로 가는 대간길. 오른쪽으로 하염없이 갔다가 다시 꺾어져 저 길로 지나가야 한다. 
# 이만봉. 
# 이만봉 넘어 곰틀봉과 저 멀리 백화산자락. 저기까지 언제 가나... 
# 그냥 가로 질러 건너편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다. 
# 이만봉. 
지도에는 높이를 989m라고 했는데, 정상석엔 반올림을 했는지 990m라고 기록해 두었다. 이만봉은 가은읍 원북리 홍문정, 성골을 가운데 두고 희양산, 시루봉과 함께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자료에는 산 이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이곳 산골짜기로 2만여 가구가 피난해 들어와 붙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날 이만호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이 산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 지는 알 길이 없다. 좁은 정상을 벗어나 아래로 떨어지던 대간길은 다시 곰틀봉을 향해 솟아 오른다. 곰틀봉 가는 길은 곰의 등짝인지 바위로 된 날등을 타고 안부를 건너야 한다. 곰틀봉은 정상에 홀로 자란 소나무 탓에 멀리서도 쉽게 구별이 된다.
# 곰틀봉 오름을 씩씩하게 오르는 마눌. 
# 가야 할 대간길. 곰틀봉과 981봉, 1012봉, 뒤쪽의 백화산. 
# 곰틀봉 정상의 독야청청(獨也靑靑) 소나무와 그 아래 마눌. 곰틀봉은 저 소나무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구별 가능하다. 
# 둘산악회에서 힘내라고 하는데, 나는 너무 힘이 든다. 
(13:42)'곰틀봉'에 올랐다. 곰과 관련된 전설이 있을 법 하건만 찾을 길 없고, 대야산 곰넘이봉을 넘어 온 곰이 이곳에서 둥지를 틀었나 시덥잖게 상상해 보았다.
앞장서 잘 달리던 마눌은 희양산 오름에서 너무 무리를 해서 무릎이 아프단다. 배낭에서 무릎보호대 꺼내서 채워주고 나도 마침 무릎이 시끈시끈하던 참이라 착용했다.
# 대간길은 이곳에서 꺾였다가 다시 저 멀리 백화산에서 완전히 꺾여 북서진한다. 
곰틀봉 정상 바로 뒤쪽엔 전망대가 있어 가야 할 대간길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해 마음이 급해진다. 곰틀봉에서 대간길은 급하게 내렸다가 고사리철이 아니라 구별이 어려운 '고사리밭등'을 지나 잠시 후 '사다리재'에 이른다.(14:00)
사다리재는 분지리로 하산하는 최단 코스라 탈출하려면 이곳으로 해야 한다. 마눌은 무릎이 아프다면서 이곳으로 탈출하자고 하지만, 한시간 걸려 저 가파른 내림을 탈출하느니 차라리 네 시간여 더 가서 오늘 구간을 마치자고 얘기해 주고 출발했다.
# 사다리재. 
무명봉 두 개를 가파르게 오르 내리고 긴 안부를 지난다. 다시 무명봉 하나를 가파르게 올랐다가 내린 후 다시 가파르게 치고 올라야 '981봉'에 도착한다.(15:00). 사다리재에서 1시간이나 걸렸다. 981봉은 '뇌정산 갈림길'이다. 뇌정산은 대간 우측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미끈하게 솟아 있다. 해발 991.4m다.
# 뇌정산 갈림길. 오래된 이정목엔 뢰정산이라 적혀 있다. 
# 낙엽 다 진 숲엔 애기단풍만 남았다. 
# 새빨간 녀석도. 
981봉에서 급하게 30여 분 내려가니 분지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는 '평전치'가 나온다.(15:25). 갈림길을 보더니 마눌은 다시 하산할 건지를 묻다가 분지리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과 단호한 내 말에 맘을 돌린다. 10여 분 휴식 취하고 다시 백화산을 향해 출발했다.
# 평전치. 
평전치에서 백화산으로 가는 길은 대단한 난코스이다. 백화산은 멀리서 볼 때 봉우리가 한 개, 두 개, 혹은 세 개로 보이더니 막상 가보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백화산까지는 두 개의 가파른 암봉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 험한 암릉구간을 오르내리다가 피라미드 처럼 우뚝 솟아 있는 '1012봉'을 향해 올라갔다.
점심식사 후 씩씩하게 잘 달리던 마눌은 곰틀봉 하산길에서부터 무릎이 아프다고 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계속 뒤로 쳐진다. 그런데 곰틀봉까지 내도록 종아리가 땡기고 고관절이 아파 힘이 들었던 나는 오히려 통증이 사라지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런 불협화음이 있나? 컨디션이 같이 좋아지고 같이 나빠져야 좋을 땐 속도를 내고 나쁠 땐 속도를 줄여 평균 속도 이내에 구간을 마칠 수가 있을 텐데, 서로 교대로 컨디션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니 내가 나쁠 때는 마눌이 기다리느라 시간이 늘어지고 마눌이 나쁠 때는 내가 기다려야 하니 결국 시간지체만 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다 오늘 또 밤길에 길 잃는 것 아냐?
# 1012봉 가는 암릉 내림을 어렵게 내려가는 마눌. 
(16:03)'1012봉'에 오른다. 1012봉은 멀리서 볼 때 백화산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좁은 정상엔 돌판이 있어 앉아 쉬기 좋은데 백화산은 멀고 암벽이 험하게 솟아 있어 지도상 20분이라는 예상 시간이 믿기질 않았다. 백화산 바로 앞에 촛대같이 우뚝 솟은 암봉 하나가 앞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저 암봉을 다시 넘어야 하다니...
# 죽을 힘을 다해 1012봉에 올랐지만 백학산은 아직 저 뒤쪽에 우뚝 솟아 있다. 지도상엔 20분 거리라는데 저기까지 20분에? 
한숨 돌리고 1012봉에서 급하게 내렸다가 촛대같은 하얀 암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암봉 중턱까지 오르던 길은 중간에서 뒤쪽으로 감겨들더니 우회하여 곧장 백학산을 향해 이어진다. 아이구, 다행이다! 자꾸만 처지는 마눌을 격려하며 낑낑 올라 '백화산 정상'에 도착했다.
초은(艸垠)님이 백화산을 가까이 당겨 놓으시겠다고 하시더니 너무 무거워 못 옮기셨는지 지도의 예정시간을 넘겨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 백화산 정상 근처에서 돌아 본 촛대같은 암봉과 1012봉. 
# 백화산. 
(16:30)백화산 정상에 도착했다. 백화산 정상에는 꽤 큰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다. 백화산은 오늘 구간의 최고봉인 만큼 전후좌우 조망이 좋다. 우측으로 옥녀봉이 갈라지고 이곳에서부터 대간길은 북서진하여 이화령을 향해 내달린다. 예를 들자면 플로리다반도의 끝 곶부리인 셈이다. 우리나라 지도로 본다면 부산 쯤이 될것이다.
4시 30분인데 벌써 어둑어둑해 지는 기분이다. 실전 백두대간에서는 여기서 이화령까지 2시간 20분을 예측하는데, 그렇다면 7시가 되어야 도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6시에 해가 진다면 1시간 정도는 또다시 밤길을 걸어야 한다. 아이구, 큰일났다! 빨리 가자!
# 백화산 정상에서 갈라져 나간 옥녀봉. 
# 옥녀봉 갈림길. 이정목에 흰두뫼 방향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키는 말인가 보다. 
백화산 정상 너머엔 잘 가꿔진 '헬기장'이 나오고 한참 진행하니 암릉지대가 나온다. 자꾸만 쳐지는 마눌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간꾼 한 분이 스틱도 없이 배낭만 달랑 메고 날 듯이 달려온다.
백화산 정상 직전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1012봉을 내려 오더니 어느새 우리를 추월한다. 인사를 해도 받는둥 마는둥 급하게 앞만 보고 내달린다. 해지기 전에 이화령까지 내달릴 생각인 모양이다.
나중에 다른 이를 통해 알고 봤더니 강원도에서 온 사람인데, 오늘 내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산행을 했다고 한다. 솔발솔방 다니는 우리하곤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사람이다.
암릉에서 표지기들은 암릉사이 내리막 틈으로 급하게 떨어지게 달려 있고 직진길에도 몇 개 달려 있다. 결국 거대한 암봉 앞에서 다시 만나는 길인데, 굳이 위험하게 암릉 사이로 내려 갔다가 올라올 필요없이 직진했다가 바위 하나만 내려 서면 된다. 바위 옆을 조금 진행하다가 다시 사다리와 로프를 붙잡고 암봉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잠시 후 관리가 아주 잘된 헬기장'이 다시 나오고 멀리 황학산이 잡힐 듯 다가온다.
# 암릉 내림길. 
# 황학산 가는 길은 편안한 마루금이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어졌다. 
# 황학산 사면의 낙엽송 조림지. 
# 황학산 직전의 억새밭. 
황학산 사면엔 낙엽송이 빽빽하게 조림되어 있고 노랗게 물들어 있어 황학산이란 이름 값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낙엽송은 일본잎갈나무를 말하는데, 목재가 물러서 상품성은 없지만 조림 후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우리나라 초기 조림사업에 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황학산 가는 길엔 '억새밭'이 길게 있다. 6, 70년대 사람들이 살면서 목장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는 잡목이 갈수록 늘어나 억새밭이 없어지고 있다.
# 황학산 정상. 학은 안 보이고 둘산악회의 표지기만 있다. 
둘산악회는 산악회 회원들이 둘씩 짝을 지어야 되는가? 아니면 두 명이서 만든 산악회인가? 곧 '황학산'을 지났다.(17:20). 황학산을 지나면서부터 마눌은 이제 발목이 너무나 아프다고 호소한다. 지난 번 대야산 하산하면서 직벽 구간에서 발디딤을 잘 못하길래 등산화 바닥이 낡아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등산화를 새로 사줬다. 기존엔 트랙스타를 신었는데 블랙스톰이 좋다고 추천이 많길래 둘이서 각각 구입해서 이번에 신고 왔다.
아직 길 안들인 등산화를 신고 오는 게 걱정되긴 했지만, 요즘 등산화가 잘 나와서 길들일 필요 없다는 말과 희양산 암벽 오르자면 새 등산화가 유리하겠다 싶어 신게 했다.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발목이 기존 등산화보다 높은 편이라서 발목을 자꾸 자극한 듯하다.
마침 짐 속에 여성들 매달 손님 맞이용 물품이 있길래 양 발목에 붙여주고 이왕 늦은 것 천천히 가자 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한쪽 발목이 부어 올라 계속 아픈지 절뚝절뚝하며 따라온다.
환장하겠네. 아픈 사람 뭐라 할 수는 없고... 좌측 이만봉 쪽으로 노을이 불게 물들어 아름답긴 하지만, 갈길이 먼 우리는 가슴이 시뻘겋게 탄다.
여섯 시가 되기도 전에 해는 산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등로엔 서서히 어둠이 짙어져 간다. 오늘도 영락없이 이마에 불 밝히고 가야 한다. 연달아 세 구간을 야간 산행을 하다니... 마눌 이마에 불 달아 주고 나도 불을 달긴 하지만 아직 길이 찾을 만해서 불을 밝히진 않고 갔다.
어느 지점인가 구별할 기력도 없이 앞만 보고 묵묵히 걷고 있는데, 좌측 완만한 억새 수풀 속에서 갑자기 커다란 동물 두 마리가 튀어 나오더니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든다. 엉겹결에 "엇!" 소리를 지르고 스틱 두 개를 앞쪽으로 쭉 내밀어 달려드는 동물을 향해 찔렀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고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스틱을 휘둘렀는데, 달려들던 두 녀석이 2 ~ 3m 전방에서 휙~ 몸을 틀더니 반대쪽으로 달려가 버린다.
정신 차리고 보니 고라니 두 마리가 사랑 싸움을 하는 건지 암놈 쟁탈전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녀석들도 놀래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꽁지가 빠져라 도망간다.
어찌나 놀랬던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저녀석들이 고라니가 아니라 멧돼지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멧돼지가 덤벼들면 어떡하지요?" "어떡하긴, 저렇게 덤비면 아무 방법도 없다." "TV에서 보니까 우산을 펼치니 덤비던 멧돼지가 놀라 도망을 가던데 저런 식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불쑥 나타나 덤빈다면 백약이 무효올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널찍하고 완만한 산길을 걸어 갔다. 어느새 등로엔 어둠이 짙게 찾아들고 이마에 밝힌 불빛을 쫒아 조심조심 앞으로 나갔다. 다행히 등로는 완만하고 편안하고 헬기장도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작은 봉우리들도 연이어 나타난다.
그러나 마눌은 발을 질질 끌고 자꾸만 뒤쳐지고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777봉'은 짐작만 하고 지났다. 내리막이 길게 이어지는데, 가다가 돌아서 마눌 기다리고 가다가 기다리고를 반복했다.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만큼 넓고 평탄한 길이 쭈욱 이어져서 다행이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꼭 등장하는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지름 7 ~ 8m 정도의 둥근 연못에 가운데는 나무가 서너 그루 있는 섬도 있다. 불빛을 비춰보니 흙탕물이 가득 담겨 있다. 백두대간 상에 자연 습지는 못재 밖에 없다는데 아마도 여기는 조림사업을 하면서 인공적으로 파 놓은 곳인 모양이다. 이 구간은 쭉쭉 뻗은 나무들이 잘 가꿔진 조림지다.
이화령은 정말 먼 길이다. 백두대간 시작할 무렵 중재에서 육십령갈 때 처음 야간 산행을 하면서 육십령 가는 길이 너무나 멀고 어두운 산길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해서 고생을 한 기억이 있는데, 오늘 이화령 가는 길은 그때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이마 등불에 의지하여 길만 보고 그냥 걸었다. 온 신경을 등로의 연결 상태와 표지기에만 집중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표지기 발견하면 돌아서서 마눌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다음 표지기를 향해 가기를 반복했다. '조봉'은 짐작만하고 갈림길이 나오지만 표지기만 확인하고 계속 전진했다.
마눌은 이제 한 쪽 발은 질질 끌면서 걷는다. 안 되겠다, 좀 쉬었다 가자. 초코바 하나씩 먹고 지도를 보았다. 군부대가 나오고 그걸 우회해서 가야 되는데, 멀리 불빛들은 보이지만 그곳이 군부대인지 이화령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초코바가 너무나 맛있어서 상표 기억해 두고 다시 출발했다. 마눌은 한 쪽 발을 질질 끌며 가고 있는데, 등로에는 계속 쓰러진 나무들이 나타나 마눌을 힘들게 만든다. 가다가 서서 기다리고 가다가 기다리고를 계속했다.
힘들었지만 모든 일에 끝은 있기 마련이다. 마침내 '군통제 구역을 나타내는 팻말'이 나타나고 이화령 1.5km 란 안내문이 나온다. "이제 다왔다, 조금만 더 힘내세!"
이후 대간길은 사면을 우회하여 내려가는데, 낙엽이 가득 덮혀 있어 아주 미끄럽다. 마눌은 발이 너무 아프다고 등산화를 벗고 걷겠다고 한다. "안 된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 조금만 더 참으시오!"
느린 진행을 감안하더라도 이화령은 도무지 나타날 생각을 안한다. 심리적 요인이 많이 작용했겠지만 가도 가도 이화령은 나오질 않고 길은 계속 사면으로 위험하게 구불구불 이어진다.
온갖 긍정적인 말들로 마눌 달래가며 얼마나 갔을까? 하염없이 이어지던 길이 드디어 아래로 뚝 떨어지며 '계단'이 나타나고 10여m 아래로 도로인 듯 차량 불빛이 지나간다.
"기뻐하시오. 마눌, 드디어 다 왔다!" 군부대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고 현수막 하나 걸려 있길래 불빛 비춰보니 백두대간이 이화령에서 끊어졌다는 등등의 말들이 적혀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화령 뿐만 아니라 수백 군데에서 끊어졌을거요, 백두대간을 보존하자는 뜻으로 이해하겠소!
그동안 대간길에서 계단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다. 계단 내려오니 도 경계석과 다음 구간 들머리의 산불감시초소도 보이고, 찬바람 가득한 '이화령 휴게소'가 나타난다. "수고했소, 마눌!" 지친 마눌 껴안아주고 그동안의 수고를 격려했다.(19:40).
이화령휴게소는 여러 가지로 육십령휴게소와 비슷하다.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 중의 하나인 데다, 둘 다 산 아래 새로운 터널의 개통으로 이제는 한산한 옛길로 변한 것도 똑 같고, 고개를 중심으로 도(道)를 경계짓는 것도 같고, 우리에게는 야간산행으로 가도 가도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다가 기진맥진할 무렵 드디어 찬바람 가득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까지 닮아 있다.
휴게소에 들어서니 주인아저씨가 늦어서 식사는 안된다고 한다. 커피 한 잔씩 달래서 마시고 쉬면서 연풍택시에 전화해서 휴게소로 오라고 부탁했다. 한참 쉬고 있는데 대간꾼 한 사람이 지친 표정으로 들어선다. 우리를 보더니 혹시 강/사/랑 아니냐고 묻는다. 홀대모 산행기에서 보았노라고, 오늘 버리미기재에서 예까지 왔는데 혹시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노라고, 알바를 몇 번씩이나 했다고, 지름티재에서 봉암사 스님 때문에 희양산을 못하고 은티마을로 내려갔다가 시루봉으로 올라와 다시 합류했다고, 우리처럼 마지막 이화령 직전이 너무나 멀어서 혼났노라고, 이화령 1.5km 안내판 그거 엉터리라고 등등...
천안 사신다는데 같이 커피 한 잔 나누면서 이런저런 대간꾼들의 공통 화제로 얘기꽃을 피웠다. 마침 연풍택시가 도착해서 같이 우리 차 세워 둔 은티마을로 가서 차량 수거하고 다시 우리 차편으로 버리미기재까지 같이 가서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버리미기재에서 차에 타시는 것 보고 출발하면서 생각하니 성함이나 닉네임도 모르고 헤어졌다.
드디어 이화령 구간을 마쳤다. 이화령. 너무나 멀었던 이화령. 울면서 넘은 이화령. 그렇게 말 많고 사연 많은 희양산 구간을 끝냈다는 생각에 세상 큰 짐을 벗어 던진 듯한 기분이다. 이제 당분간 우리 발걸음을 막아 설 장애는 없다. 그저 묵묵히 산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뒷얘기 ; 일요일 동네 공원에서 산책하고 ok 목장에 들러 이것저것 보충도 할 때는 괜찮았는데, 월요일 아침 일어나니 왼쪽 아킬레스 건이 엄청나게 아팠다. 회사일 때문에 수요일에야 병원에 갔더니 아킬레스 건염이란다. 주사 맞고 약 타고, 물리치료했더니 조금 나아졌다. 산행 막바지에 발을 질질 끌고 온 마눌은 멀쩡하고 오히려 내 다리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큰일이네! 이번 주 이화령 ~ 하늘재 구간 가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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