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그 스물한번째(이화령~하늘재) 
1986년 12월 31일. 당시 나는 첫 직장의 말단사원(末端社員)이었다. 처음 서울로 취직하여 올라가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경기도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회사 연구소로 발령받았다. 숙식은 연구소 건설 현장에 있는 회사 기숙사에서 기거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기숙사이지 연구소가 신축 공사 중이어서 거의 함바집 수준이었다.
그 회사는 군대 문화 비슷하게 근무 분위기가 억압적이고 업무 강도 역시 아주 빡센 편이었다. 신입사원인 탓도 있었지만,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어쩌다 받은 휴일도 고향하고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두 달에 한 번 정도 고향 진주에 다녀 올 기회가 주어졌다.
그땐 고속도로도 개통되지 않았고 자동차도 귀한 시절이었다. 경기도 장호원에서 경남 진주로 가자면 김삿갓 팔도유람하듯 먼 길을 돌아 가야만 했다. 장호원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3번 국도 따라 충주(忠州)와 수안보(水安堡)를 거치게 된다. 당시 수안보는 꽤 유명한 온천 관광지였다. 수안보에서 백두대간의 이화령(梨花嶺)을 넘어 문경(聞慶)을 들른 후 점촌(店村)에서 버스는 멈췄다.
이후에도 몇 번 버스를 갈아 타야 했다. 우선 점촌에서 상주(尙州)행 시외버스 갈아 타고, 상주에서 다시 대구 가는 시외버스 바꿔 타고, 최종 대구에서 진주(晋州)행 고속버스를 타야만 했다. 무려 네 번이나 버스를 갈아 타야 진주에 도착할 수 있는 먼 길이었다.
정확한 소요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일곱여덟 시간 이상 소요된 걸로 생각된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고 바다 건너 가는 머나먼 길이었다. 지금 같으면 미친 짓이라 엄두도 못 내겠지만, 그때는 진주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또 그때는 다들 이화령(梨花嶺)을 문경(聞慶) 새재(鳥嶺)로 알고 다녔는데, 버스에도 이화령 대신 문경 새재 넘는다고 적혀 있곤 했다. 옛길인 새재가 하도 유명하여 이화령 대신으로 쓰였던 모양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고 하는 이 이야기는 그 이화령을 넘을 때 목격한 일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그날, 12월 31일. 나는 신년 연휴 휴가를 3일 얻어 시외버스 맨 뒷자리 높은 곳에 앉아 이화령을 넘었다.
그날은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린 날이었다. 폭설 때문에 버스는 거북이 걸음으로 천천히 구불구불한 이화령 고개를 넘고 있었다. 배꽃 대신 화사하게 꽃을 피운 눈꽃이 고갯길 좌우로 하얗게 피었는데, 그 눈꽃 터널 속으로 버스는 조심조심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이화령 정상에 도착하였는데, 눈앞에 펼쳐진 하얀 눈세상은 감탄사 저절로 연발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그때 내 시야(視野)에 하얀 눈세상 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들어왔다. 이화령 정상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 좌측에는 경북 도경계석(道境界石)이 있다. 그곳 경계석 앞 공터에 한 쌍의 남녀가 승용차 옆에서 꼭 끌어 안은 채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머리와 어깨에는 흰 눈이 덮이고 있었다.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얗고 그들 남녀도 희게 변하고 있었다. 찬바람 부는 고개 정상이지만,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부럽기도 하였다.
오~~ 그때의 감동이란... 그들이 정말 아름다운 관계인지 아니면 불륜(不倫)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순간 그들의 모습은 내 눈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고개 정상 하얀 눈 밭에 눈을 뒤집어 쓴 남녀가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라니... 시나브로 눈은 계속 난분분(亂紛紛) 휘날리고 있고...
아! 그때는 나도 이십대의 피끓는 청춘(靑春)이었다!

잊혀진 고개. 이화령, 하늘재!

구간 : 백두대간 제 27, 28 소구간(이화령 ~ 문경새재 ~ 하늘재) 거리 : 구간거리(18.36 km), 누적거리(445.73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05년 11월 12일. 세부내용 : 이화령(06:10) ~ 너덜지대 ~ 헬기장(06:40) ~ 갈림길 ~ 조령샘(07:06) ~ 절골갈림길(07:30) ~ 헬기장 ~ 조령산(07:40) ~ 1관문갈림길 ~ 로프구간 ~신풍(절골)/ 새재주막 갈림길 ~ 889봉 ~ 말바위능선 ~ 신선암봉(09:05) ~ 직벽,로프구간 ~ 갈림길 ~ 직벽 로프 오름구간 ~ 923봉(10:03) ~ 암릉구간 ~ 사각바위굴 ~ 새터삼거리(10:57) ~ 757봉 ~ 전망대 ~ 821.5봉 ~ 깃대봉 갈림길(11:25) ~ 성벽 ~ 조령3관문(11:50) ~ 점심식사 후 출발(12:40) ~ 군막터 ~ 성벽 ~ 묘지 ~ 전망대 ~ 마폐봉(13:20) ~ 신선봉 갈림길 ~ 전망대 ~지릅재 갈림길 ~ 북암문(13:45) ~ 756봉 ~ 길고 지루한 능선(묘지,764봉,763봉) ~ 동암문(14:55) ~ 10분 휴식 ~ 부봉갈림길(15:22) ~ 암봉로프구간 ~ 959봉(주흘산 갈림길,16:04) ~ 평천재(16:35) ~ 탄항산(17:09) ~ 전망대 ~ 굴바위(17:25) ~ 766봉 ~ 철조망 지대 ~ 물탱크 ~ 하늘재(18:00).
총 소요시간 11시간 50분. 만보계 기준 42,800 걸음.
11월 11일. 금요일. 빼빼로 데이라고 사무실 여직원들이 커다란 몽둥이 만한 빼빼로를 선물로 준다. 별의별 날이 다 있고 제과업계의 상술이 기가 막힌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날들의 연속이기 보다는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즐김으로써 삶에 활력을 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싶기는 하다.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금요일은 언제나 퇴근이 늦어서 짐 싸서 현장에 도착하면 새벽 한두 시가 되어 버리고 맨날 출발 시간이 늦어서 요즘같이 해가 짧은 때엔 구간 마지막을 늘상 이마에 불 켜고 다녀야 한다.
이번 주는 그 틀에서 벗어나 보자 싶어 좀 일찍 퇴근했다. 하지만, 밥 먹고, 씻고, 준비하다가 안락한 집을 두고 가기 싫어 미적대다 보니 역시나 출발은 열한 시를 훨씬 넘겨서야 가능하다.
오늘도 영동, 중부내륙고속도로 거쳐 괴산휴게소까지 날 듯이 달려갔다. 늦었다 싶어 냅다 밟았더니 괴산휴게소까지 한 시간 조금 더 걸렸다. 차가 이제는 비행기로 변할려나? ^^* 괴산휴게소에는 오늘도 화물차들로 만원이다. 우리도 한쪽 구석에 주차하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4시 30분, 알람소리에 눈 떴지만 얼른 침낭 밖으로 나와지지가 않는다. 백두대간 하면서 이 때가 제일 싫다. 오늘도 마눌과 둘이 서로 먼저 일어나라고 말장난 하다가 결국엔 내가 먼저 침낭을 박차고 나왔다.
부지런한 화물차 기사들은 대부분 다 떠나고 우리도 서둘러 밥 사먹고 양치하고 내 보내고 출발했다. 연풍IC 나와 우회전한 뒤 5분여 가다가 행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이화령 옛길로 접어들게 된다. 행촌사거리는 방향 설정이 약간 애매한 듯하여 주의해야 했다.
구불구불한 이화령 옛길을 돌아 돌아 올라가니 그 시간에 벌써 운동하는 연풍면 사람들이 고갯길에 나와 있다. 한참을 돌아돌아 올라가면 캄캄한 어둠 속에 건물만 뎅그러니 외로운 이화령휴게소가 나온다.
 이화령/梨花嶺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와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의 경계에 있는 고개. 높이 548m.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갈미봉과의 사이에 있다. 동쪽 사면은 조령천(鳥嶺川), 서쪽 사면은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그 이전에는 국도가 새재[鳥嶺]로 통하는 험난한 산로(山路)뿐이었으나, 신국도 3호선이 이화령을 통과함으로써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잠·엽연초 등 특용작물의 수송도로로 이용되었다. 충청북도의 忠州圈과 경상북도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탈바꿈하여 옛 조령에 이어 새로운 교통요충지가 되었으나 현재 이 고개 밑으로 이화령터널이 개통되면서 고갯마루 옛도로는 한적하다. 옛날에는 이우리고개라고 하였으나 1925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이화령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문경새재가 여기인 줄 알고 있다.
문경새재/鳥嶺
문경 새재는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통하는 고갯길로서 교통 및 군사상의 요지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옛 새재 남서쪽으로 이화령이 뚫리면서 길로서의 구실을 잃고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문경 새재에는 3개의 관문이 있다. 제1관문은 영남제1관인 주흘관으로서 조선 숙종 34년(1708년)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제2관문인 조곡관은 선조 27년(1594년)에 건립되었고 주흘관을 세울 때 중건했다. 그 후 불에 타서 홍예문만 남았던 것을 1975년에 복원했다. 부근 계곡의 경관이 빼어나다. 제3관문은 새재 정상에 있는 조령관으로서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 구실을 한다. 주흘관과 함께 세워졌으나 불에 타고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6년에 복원했다.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는 6.5㎞의 거리로서 차는 다닐 수 없으며 길 주위에 주막들이 있다. 주흘관에서 조곡관 쪽에 있는 조령원 터는 옛날 출장중의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는 일반 나그네도 이용했으며 물물교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새재』는 새도 날아넘기 힘든 고개,또는 억새풀이 많은 고개로 풀이 되고 있으며 『고려사』에는 초점(草岾),『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교통여건으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稅穀과 궁중 진상품등 각종 영남의 産物이 새재길을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으니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水運)을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충이었고 또 조령산성, 조령원터를 비롯하여 수 많은 문화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며 『신립장군과 새재 여귀』,『새재 성황신과 최명길에 관한 전설』등 숱한 사연이 전해져 오고있는 곳이다.
하늘재/鷄立嶺
얼핏보면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하늘재(해발 525m)는 이름처럼 높지는 않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고 있는 도 경계로서 미륵리에서 30∼40분(2㎞) 정도 걸어 오르면 곧바로 문경 관음리로 연결된다.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은 하늘재 고갯마루에 이르러 쭉 뻗은 아스팔트 길로 이어지는데 서쪽으로 문경 대미산(해발 1,115m) 정상이 아스라히 시야에 들어온다. 겨릅산, 계립령, 대원령으로도 불리는 하늘재는 우리 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 신라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 죽령 보다 수 년 먼저 개통된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강으로 진출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이처럼 중요한 전략거점이다 보니 하늘재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했으며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 으로 공민왕이 몽진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신라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향할 때 피눈물을 머금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한다. 하지만 하늘재는 조선태종 14년(1414년)에 지금의 문경새재인 조령로가 개통되면서 군사적 요충지와 사통팔달의 아성을 한꺼번에 조령에게 넘겨 주게 되었다.
<이곳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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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제 27, 28 소구간(이화령 ~ 하늘재)구간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차문을 열고 나오자 찬바람이 훅하고 달려든다. 일기예보엔 오늘 최저기온을 영하 1도로 예상했는데, 이화령휴게소는 바람이 많은 곳이라 체감온도는 훨씬 차갑고 날카롭다. 준비해 간 옷을 하나씩 더 껴입고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고생보따리를 둘러멨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저 아래 이화령 터널로 오고 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눌 이마에 등불 달아 주고 내 이마엔 이번에 새로 산 LED 랜서 등불을 켰다. 그동안 3구간 연속 야간산행을 하게 되면서 등불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터라 OK 목장에서 추천해 준 랜서를 구입했는데 이놈 이거 걸물이다. 기존에 쓰던 7주 LED 보다 몇 배는 밝고 직진성도 좋다. 약 50m 전방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진작에 바꿀 걸... 그랬으면 은티재에서 한시간이나 헤매지는 않았을텐데...
오늘 구간은 실전 백두대간에서는 이화령 ~ 문경새재, 문경새재 ~ 하늘재 두 구간으로 나눠놓았고 역시나 홀대모 고수들은 하루에 내달리고 있다.
지난 구간(은티~이화령) 다녀 온 이후 아킬레스 건염 진단을 받고 며칠 고생을 했으며, 지난 주 일요일 수리산을 다섯 시간 동안 한바퀴 돌면서 검사해 본 결과 마지막엔 발목이 다시 아파서 고생을 한 지라 오늘은 일단 조령3관까지 가 보고 발목이 괜찮으면 하늘재까지 계속 가기로 했다.
마눌 손 잡아 "잘하세!" 격려하고 '도 경계석' 좌측의 구간 들머리로 진입했다.(06:10). 들머리엔 작은 '쉼터'가 있는데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듯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다. 이런 몰상식한...!
산불감시초소가 있지만 시간이 일러 빨간모자는 아직 출근하지는 않았다. 길은 급하지 않게 쭈욱 산의 사면을 따라 이어진다. 길이 순탄하고 등불이 밝아 큰 어려움없이 전진한다. 잠시 가자 이내 등쪽엔 땀이 흐른다. 반면 낮은 기온 탓에 얼굴엔 전혀 땀이 흐르지 않고 뺨에 와닿는 바람이 차서 볼이 아주 차갑다.
한참 진행하니 '너덜지대'가 나오고 문경 각서리 쪽에서 개짖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다시 두세 개의 너덜지대를 지나고 능선으로 오르자 폐타이어로 축대를 쌓은 '헬기장'이 나온다.(06:40). 헬기장엔 억새가 하얗게 피어 있고 어느새 날이 밝아 대간 오른쪽에 솟아있는 878봉 마루금이 벌겋게 물들어 있다.
# 억새꽃 피어 있는 헬기장. 플래쉬를 터뜨렸는데도 사진이 흔들렸다. 
# 억새 너머 아침 노을이 붉게 타오른다. 
헬기장을 지나 능선을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고 표지기들은 일제히 우측 방향에 집중적으로 붙어 있어 조령샘 가는 길임을 알리고 있다. 물론 날등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능선쪽에 붙여 둔 표지기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우리는 조령샘 쪽으로 길을 택했다.
처음 시작처럼 산의 사면을 따라 진행하던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며 아까와 똑같은 모양을 연출한다. 이번에도 우측의 우회로를 택해 한참 진행하니 조령샘 아래 '이정목'이 나타난다.
# 조령샘 이정목. 조령산까지 45분을 예상한다. 
# 아침 햇살 비취는 조령샘. 
# 깊은 산속 옹달샘엔 토끼 대신 산새가 물 먹으러 왔다. 줌으로 당겼더니 광량이 부족해 촛점이 흐리다. 
'조령샘'엔 육십령 깃대봉이나 대덕산 샘물처럼 "길손이시어, 사랑 한모금..."하는 글귀가 붙어 있고 햇살이 비추인 가운데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쉼없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차가운 물 한 모금 마시고 한 숨 돌리며 휴식을 취했다. 조령샘 옆에는 텐트 두 동 쯤 칠 수 있는 공터가 있고 뒤쪽엔 억새밭이 있다. 누군가 야영을 한 듯 억새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다.
그 때 숲속에서 비둘기만한 새 한마리가 나오더니 샘쪽으로 조금씩 접근한다. 이 녀석 밤새 목이 얼마나 말랐는지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한걸음 다가와서는 눈치 살피고 한걸음 다가와서는 눈치 살피기를 계속한다. 어떡하나 가만히 지켜봤더니 갈증이 두려움보다 더 컸는지 5분 여를 조금씩 다가와서는 결국에는 물을 먹기 시작한다. '조령샘! 길손에게도 산새들에게도 생명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마운 조령샘을 뒤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올라 능선에 다시 오르니 곧바로 이정목이 서 있는 '절골갈림길'이 나온다.
# 바람이 아주 차가운 절골 갈림길. 
# 전망이 좋은 헬기장. 
갈림길 바로 위엔 전망이 좋은 '헬기장'이 있다. 남쪽으로 속리산 연봉과 희양산, 백화산과 동쪽으로 주흘산이 보인다. 너무 추워 계속 있기가 힘들다. 그냥 가자!
아침 햇살이 헬기장을 밝게 비춰 주지만, 바람이 차가워 체감온도는 아주 낮다. 바라클라바까지는 아니더라도 얼굴에 대한 보온대책이 필요했다. 등로엔 벌써 서릿발이 엉켜 얼음꽃을 피워 놓았다.
헬기장을 지나 안부로 내려갔다가 '잣나무 숲'을 지나 15분쯤 올라가니 오늘 구간의 두 번째 포스트인 '조령산'이 나온다.(07:40)
# 조령산 정상. 해발고도 1,026m다. 
# 멀리 월악의 연봉과 주흘산, 부봉 등이 조망된다. 
# 히말라야에서 산화한 산악인을 추모하는 하얀 비목(碑木). 
조령산은 전망이 아주 좋아 가슴 속이 후련하다. 바람이 차갑지만 경치에 빠져 한참을 머물렀다. 카메라 배터리가 부족해서 준비해온 예비 배터리로 갈았는데 이런~ 충전이 되질 않았는지 계속 배터리 부족 메시지가 뜬다. 큰일났다! 오늘 구간은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인데 사진을 못 찍는다니... 베낭 벗어서 구석구석 뒤졌더니 다행히 AA 건전지가 하나 나온다. 배터리 4개 중 한 개만 갈았는데 고맙게도 잘 작동한다.
조령산 바로 뒤쪽엔 전망대가 나오고 돌탑이 하나 서 있다. 돌탑에선 가야 할 대간길이 한눈에 조망되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급하게 떨어져 내린다.
# 돌탑이 있는 전망대. 
# 가야 할 대간길. 아찔하다. 뾰족뾰족한 암붕이 연달아 솟은 모습이 설악의 공룡 분위기가 난다.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되고 로프 구간이 나오기 시작한다. 직벽에 가깝게 가파른 길을 내렸다가 다시 무명봉을 하나 올랐다가 당연히 다시 아주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주변 경치는 너무나 훌륭해서 마치 중국 영화의 한장면 속에 들어 온 기분이다.
# 무명봉을 치고 올랐다가. 
# 다시 급하게 아래로 내린다. 
# 가야 할 신선암봉. 
# 신선암 사면의 하얀 직벽. 
# 100여m는 됨직한 로프 하산길. 
# 신풍(절골) 새재주막 갈림길. 
갈림길을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 '889봉'을 지나고 신선암을 향해 오른다. 신선암 가는 길은 바위 날등을 타고 진행해야 한다. 좌측으로 천길 낭떠러지가 이어진 바위 사면을 로프를 잡고 오른다. 아마도 '말바위능선'인 듯하다.
줄을 놓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낭떠러지이지만, 주변 경관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경치에 넋이 빠져 시간이 자꾸만 지체된다.
# 돌아 본 조령산. 로프가 많고 길었던 이유가 있다. 저 가파른 사면을 따라 내려 왔다. 
# 가야 할 신선암과 923봉. 
# 아찔한 절벽위의 로프 구간. 
# 직벽 너머 923봉의 위용. 
# 로프 때문에 쉽게 지나왔지만 만약 떨어진다면...돌아보니 아찔하다. 
#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암벽. 
# 커다란 암봉을 기어 올라가고. 
# 지나 온 길을 돌아본다. 
# 암봉의 위용과 낙락장송. 
# 두부모 같이 홀로 놓여 있는 바위. 
# 로프, 또 로프. 
# 어렵게 도착한 신선암봉. 09:05. 사방 걸림없이 전망이 좋다. 
'신선암봉' 973m, 공명 선거를 알리는 '철팻말'이 서 있는 신선암봉에서 잠시 휴식하고 간식도 먹었다. 조망이 너무 좋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곳저곳 셔터를 누르느라 시간이 하염없이 지체된다.
한참을 경치에 넋을 잃고 있다가 다시 923봉을 향해 급비탈을 내렸다. 무시무시한 '직벽 로프구간'이 이어졌다. 마눌은 바둥바둥 대면서도 혼자서 씩씩하게 잘 간다.
# 신선암봉 내리막과 가야 할 923봉. 
# 로프 타고 내리고. 
# 또 로프 타고... 로프가 끝도 없이 나온다. 
# 낑낑 오르기도 하고. 
# 로프로 막아 둔 안부도 지난다. 
# 신선암인가? 가야 할 봉우리가 까마득하다. 
# 암봉 위에서 몸을 말리고 있는 하얀 억새꽃. 
# 문경쪽 조망. 
# 사진찍느라 지체하는 사이 마눌은 어느새 923봉에 먼저 올랐다. 자세히 보면 정상에 서있는 마눌이 보인다. 
# 줌인하면... 
# 바위에 뿌리를 내린 낙락장송. 
# 확보를 봐주지 않아도 혼자서 직벽을 오른 마눌. 오늘 엄청난 수의 밧줄을 타더니 바위 타는 실력이 조금 는 모양이다. 
# 아주 가파른 직벽인데 혼자서 잘 올랐다. 처음엔 바위에 매달려 바둥대기만 하더니 어느새 실력이 늘었다. 
# 끙끙 소리가 절로 나오던 직벽 로프구간. 
# 923봉. 친절한 둘산악회. 
923봉에서 삼거리에 이르는 길도 역시 위험한 '로프 구간'의 연속이다. 그동안 백두대간 종주해 오면서 봐 왔던 모든 로프를 다 합친 것보다 오늘 구간의 로프가 더 많다. 그만큼 월악의 조령산 구간은 험한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 또 로프. 
# 낑낑 또 올라 갔다. 
#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 소나무. 바위를 타고 뿌리를 길게 내렸다. 
923봉 지나 무명봉 정상 직전에 갑자기 양쪽으로 갈라지는 로프 구간이 나온다. 우측으론 바위굴 속으로 내려가게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좌측으론 암봉 위로 두 개의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마눌은 오른쪽 바위굴 속으로 내려가고 나는 좌측 암봉으로 올라 갔다. 바위 굴로 내려 간 길은 다시 암봉으로 밧줄타고 올라 와야 하는 길이다. 마눌 투덜투덜대며 원위치해선 '좌측길'로 합류한다.
# 바위굴 속으로 난 길. 이 길로 가면 안된다. 
# 좌측 두 개의 밧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바위 암봉을 넘어 가자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긴 로프구간'이 나타난다. 거의 100여m는 됨직하다. 이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추월 당했다. 신선암에 있을 때 건너편 산 정상에 몇몇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며 따라 오더니 우리가 계속 지체하는 사이 이곳까지 한 달음에 따라 온 모양이다.
먼저 대구비실이 부부란 표지기를 단 분들이 몇 분 지나 간다. 그동안 진행하면서 울산비실이, 부산비실이 팀의 표지기를 봤는데, 이번엔 대구비실이팀이다. 비실이가 유행인가? 전혀 비실거리지 않고 내달리는 사람들이 이름만 비실이로 정했다. 정작 비실대는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로프 잡고 내려가는데 말이다. 이번엔 또다른 대구팀이 우리를 추월해서 지나간다. 이 팀은 대형 단체 산행객들이다.
대간길에 단체 산행객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속리 구간에선 맞은편에서 오면서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단체 팀때문에 열 받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줄이 끝날 때까지 양보하지 않는다. 웬만큼 양보해주고 우리도 속도를 조금 높여본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한 분이 낑낑 힘들어 하며 올라 오길래 혹시 조령3관에서 빨간모자를 봤는지 물어봤더니 다행히 그쪽엔 없다고 한다. 만약에 지키고 있으면 우회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떨어져 내린다. 
# 100여 m는 족히 될 듯. 
# 멀리 주흘산이 멋진 모습을 보여 준다.

# 10:57.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새터로 하산할 수 있다. 
산행 시작한 지 다섯 시간쯤 지났더니 왼쪽 아킬레스 건이 묵직해지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종아리까지 땡기기 시작하는데, 큰일이다. 아직 절반도 못했는데... 너무 무리하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중간중간 스트레칭으로 발목과 종아리를 자극해가며 조심조심 진행하였다. '757봉'을 지나고 '전망대'도 지나니 '깃대봉 갈림길'이 나온다.(11:25)
이제 25분만 더 가면 조령관이다. 아픈 발목 끌고 깃대봉까지 갔다 올 정신도 없고 우측으로 급비탈을 내려 조령관쪽으로 향했다.
수시로 성벽이 나오는 걸로 보아 조령관이 가까운 모양이다. 어디선가 대금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마침내 오늘 구간의 중간지대인 '조령3관'에 도착했다.(11:50)
# 깃대봉 갈림길. 대구분들을 다시 만났다. 
# 대간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드러누운 고사목. 
# 성벽이 수시로 나타난다. 
조령3관문엔 관광객들로 소란스럽다. 울긋불긋한 등산복과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도 하고 얘기도 하면서 왁자지끌하다.
# 조령3관의 산신각. 
# 조령약수. 
# 조령3관문. 
조령3관문은 잘 정비된 모습으로 정좌하여 있다. 조령관은 조선 초 북쪽에서 넘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숙종 34년(1708년)에 중창하고 1976년에 보수해서 현재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관(關)은 중국에서 기원한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아 북쪽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만리장성은 인간이 건설한 가장 광대한 건축물이다. 만리에 뻗어 있는 장성(長城)을 모두 군사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장성의 중간중간에 관(關)을 설치하였다.
가욕관(嘉峪關), 산해관(山海關) 등이 그러한 관문(關門)이다. 관(關)은 홀로 단절되어 있으면 적의 공격에 취약하게 된다. 그래서 관(關)과 관(關)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게 관(關)과 관(關)을 이어주는 것이 '관계(關係)'인데, 중국인들은 이를 '관시'라고 부르며 삶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있다. 관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관계 단절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다. 산해관에서 가욕관에 이르는 무수한 관들이 서로 생존을 위해 연결되어 있던 역사적 전통이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한다 하겠다.
조령3관을 보면서 요즘 세상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네트워크 관리가 중요한 사회적 파워라는데 걱정이다. 나도 관계의 정립에 좀더 노력해야 할 모양이다.
햇살 따뜻한 전나무 숲속 벤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다시 마폐봉을 향해 길게 치고 올라 가자면 너무 힘이 들겠지만, 발목이 아파 휴식이 필수적인 것 같아 일단 쉬기로 했다.
대구에서 온 팀들은 버스 여러 대를 가득 채워 왔는지 계속 산에서 내려오는 데도 먼저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만 수십 명이다. 언제나 준비해 가는 감식초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고 따뜻한 햇살과 편안한 휴식을 만끽했다.
# 이곳은 아직 가을이다. 
# 돌에 새겨 놓은 싯귀가 발길을 붙잡는다. "此是詩人出峽圖(차시시인출협도)" 그림속에서 튀어 나온 시인 같다는 귀절이 인상적이다. 
# 회사 인사카드에 취미를 한시 감상이라고 기록해 뒀는데, 요즘 사는 게 팍팍해 한시 공부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 "瘐馬凌兢步步僵(유마능긍보보강). 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 듯 오르네". 란 대목이 대간길의 내 모습 같아 쓴웃음이 난다. 한시의 瘐는 '병들 유'이고 僵은 '쓰러질 강'이다. 
# 아늑한 군막터. 
# 조령관의 명물 검은 고양이. 이 넘은 영악하게 사람들 식사하는 옆에 가서 야옹야옹 구슬프게 울면서 동정심을 자극해서는 밥을 얻어 먹고 있다. 
# 입산금지 플래카드 뒤쪽이 마폐봉 들머리다. 
조령관은 소란스럽기는 해도 따뜻한 햇살에, 포만감 뒤에 오는 나른함까지 겹쳐 아늑하게 느껴진다. 다시 대간길에 들어 서기가 자꾸만 망설여진다. 가야 되는데 가야 되는데 하면서도... 발목과 종아리에 맨소래담 맛사지를 하고 화장실 가서 오늘 처음 소변 봐 몸도 가볍게 만들고 서로 배낭 한번 두들겨 주고 출발했다.(12:40)
# 마폐봉 오르는 길은 시작부터 가파른 성벽을 따라 오른다. 
마폐봉 오름은 지도에서는 50분을 예상하는데 만만치 않은 길이다. 게다가 점심 먹고 바로 오르막에 붙은 거라 더욱 힘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반드시 산 정상 부근에서 식사를 하고 내리막이나 평탄한 마루금으로 오후 산행을 시작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부득이 조령관에서 식사를 한 터라 팍팍한 산길을 가파르게 치고 오르자니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마폐봉 오름길엔 산행객이 많다. 대구팀들도 일제히 오름에 들어 섰고 추리닝에 운동화 차림의 사람들도 같이 끼어 있어 중간중간 정체도 생긴다.
풀 한포기 없이 하얀 마사토로 덮힌 묘지를 지나고 갑자기 급격하게 경사가 가팔라지는 곳을 지나 로프 붙잡고 암봉을 올라서니 전망대다. 힘들어 전망 감상은 포기하고 다시 정상을 향해 낑낑 올라 가니 햇살이 강렬한 '마폐봉 정상'이 나온다. 13:20. 산행객 한 분이 정상석에 배낭을 올려 놓고 기대고 있어 양해를 구하고 사진 한 장 남겼다.
# 마폐봉 정상석. 
까만 정상석엔 마역봉이라 적혀 있다. 마폐봉은 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나무에 걸어 놓고 쉬었다고 해서 마폐봉이라 한다. 마폐봉 정상엔 '신선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좌측으로 신선봉, 대간길은 '우측길'이다. 마폐봉에서 조금 전진하면 대간길이 한 눈에 들어 오는 '돌탑이 있는 전망대'가 나오고, 이곳에서 대간길은 다시 '지릅재 갈림길'로 갈라진다. 실전 백두대간 지도에는 '지름재'라 표기되어 있다. 갈림길을 지나 급경사길을 쏟아져 내리니 '북암문'이 나타난다.(13:45)
# 북암문.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통로로써,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 두었다가 필요시에 사용하는 곳이다. 북문이라고 해서 규모가 클 것으로 예상했으나 일종의 개구멍 형태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 중 하나가 저러한 암문이고 성을 에워싼 적에게 기습공격을 가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사가 면면히 흘러 예까지 이르렀다.
조령3관문 좌우로 성벽을 따라 대간길을 지나 오면서 가만 보니 이곳이 정말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산의 사면은 가파르기가 이를 데 없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성을 구축했으니 적들은 성벽에 가까이 오기도 전에 지쳐 죽을 것 같다.
임란 때 신립장군은 이런 천혜의 요새를 두고 왜 충주 탄금대에서 무모한 배수진을 쳤을까? 배수진은 그 자체로써 충분히 가치가 있는 전법이기는 하나 반드시 옳은 것 만은 아니고 실패했을 경우의 피해, 열세인 무기와 인원을 지형적 조건으로 커버할 수 있는 기회등을 생각할 때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틀림없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새재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 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북문을 지나 대간길은 다시 756봉을 향해 급하게 올라간다. 점심 무렵부터 아프기 시작한 발목과 종아리는 아직 회복이 되질 않아 자꾸만 뒤쳐지게 만들고 마눌은 먼저 휭하니 내달려 버린다.
북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길은 지도상 '756봉', '764봉', '763봉'의 세 봉우리를 지나 45분을 예상하고 있으나 이정표에는 1시간 거리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구간은 큰 세 개의 봉우리 외에도 작은 오르내림이 꾸준히 이어지고 마루금 좌우로 큰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조망은 전혀 없다. 길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길이다.
누군가 소나무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아름드리 소나무의 껍질을 움푹움푹 벗겨 놓았다. 모두들 족히 기백년 가까이 되었을 나무들인데... 상처없는 소나무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아마도 일제시대 왜놈들의 잔재인 듯하다. 지친 다리 끌고 길고 지루한 길을 걸어 1시간 10분 걸려 '동문'에 도착했다.(14:55)
먼저 와서 기다리던 마눌이 사과 깍아 입에 넣어 준다. 동암문에서는 문경 쪽으로 하산하는 길과 '평천재'로 질러가는 지름길이 갈라진다.
쉬는 동안 대구에서 온 팀의 후미조 두 분이 도착한다. 이 팀은 대부분 조령3관에서 하산하고 하늘재까지는 일부만 가는 모양이다. 총무나 대장인 듯한 분이 신입회원과 같이 뒤쳐졌는지 늦었다고 부봉 쪽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평천재로 질러 가겠다고 하산길로 내려갔다.
지도를 보니 30분 이상을 절약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만 그래서는 대간길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 유혹을 뿌리쳤다. 10여 분 푹 쉰 후 부봉을 향해 다시 가파른 성벽길을 치고 오른다.
# 동암문. 이정목엔 홀대모님들의 흔적이 있다. 
# 표언복교수의 친절한 안내. 
동암문에서 평천재까지는 부봉과 959봉을 기점으로 U자 형태로 구부러져 있다. 지난 구간의 시루봉에서 이화령까지 길게 구부러진 대간길의 축소형이라고나 할까? 헉헉대며 가파르게 오르자 '부봉 갈림길'이 나온다.(15:22). 이곳에서 10여분간 올라가면 부봉에 이른다. 대간길은 좌측으로 급하게 떨어져 내리게 되어 있다.
# 부봉갈림길. 
가파르게 내렸던 대간길은 다시 959봉을 향해 된비알로 치고 오른다. 한참 오르니 그동안 없었던 암봉 구간과 로프 구간이 다시 나타난다. 오늘 로프 구경 지겹게 한다. 바위 사면을 아슬아슬하게 로프 잡고 돌아간 후 다시 로프 잡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
# 바위 사면을 로프 잡고 지나갔다. 
# 돌아다 본 부봉. 마루금에 작은 건물 두 채가 보인다. 
# 다시 로프 잡고 오른다. 
# 누군가 일부러 세로로 올려 놓은 듯한 바위. 얼굴 조각을 하면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같은 형상이 나올 듯. 
30여 분 낑낑대며 전진하니 표지기가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는 '주흘산 갈림길'이 나온다.(16:04). 단일 장소에 가장 표지기가 많은 곳이 아닐까 한다.
간식 먹으며 잠시 쉬고 있는데 주흘산 쪽에서 부부 두 분이 내려온다. 대구팀인데 이곳을 지나쳐 주흘산까지 갔다가 돌아 온 모양이다. 부인은 연방 투덜거리고 남편분은 민망한지 허허허 하며 그래도 주흘 영봉 구경했지 않느냐고 둘러 댄다. 이렇게 표지기가 많고 이정표가 선명한데 지나쳤다는 게 이해가 않되지만, 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항상 비상식적으로 나타나는 법이라...
# 표지기가 엄청 많은 주흘산 갈림길. 
# 둘산악회 안내문도. 
다시 대간길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급한 비탈길을 길게 내려가야 한다. 7,80m 이상 되어 보이는 로프가 길게 묶여 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내려 갔다.
먼저 내려가던 대구 분 부인이 로프 구간을 거의 다 내려 가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가 보니 굉장히 미끄러운 곳이라 마눌 보고 조심하라 하고 돌아보며 기다리는데, 갑자기 미끌어지며 줄을 놓치고 한바퀴 돌더니 얼굴부터 땅바닥을 향해 찧으며 구른다. 엉겹결에 손을 내밀어 더 이상 굴러 내리지 않게 붙잡았다. 다행히 구른 곳이 돌이나 흙바닥이 아니라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길 가장자리여서 크게 다치거나 피나는 곳은 없다. 그래도 마눌 얼마나 놀랐는지 거의 울기 직전이다. 손엔 든 스틱이 휘었다.
"괜찮소, 다친 데 없고 이만하기 천만다행이다." 흙 털어주고 결리고 아프다는데 주물러 주고 살살 달랬다. 그래도 말은 안했지만 저 역시 얼마나 놀랬던지. 만약에 돌바닥이나 나무 쪽으로 굴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놀랜 가슴 진정시키고 조심조심 내려오니 평천리로 내려가는 넓은 길이 있는 '평천재'에 도착한다. 16:35.
# 바로 여기 좌측 나무 토막 아래로 굴렀다. 
# 평천재. 좌측으로 동암문과 우측 넓은 길로 평천리로 내려간다. 
아직 하늘재까지는 1시간 10분정도 더 가야 한다. 부지런히 내달리면 이마에 불 밝힐 필요없이 갈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평천재에서 탄항산까지는 다시 가파르게 올라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마눌도 나도 다리가 좋지 않다.
첫 번째 봉우리를 힘들게 올라서니 뒤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더 보인다. "아, 그래서 탄항산을 월항삼봉이라고 하는구나!" 아마도 저 마지막 봉우리가 탄항산이겠지 싶다. 두 번째 봉우리는 오름과 내림에 바위가 많이 있고, 역시나 세 번째 봉우리가 '탄항산' 정상이다.(17:09)
# 탄항산. 
탄항산을 '월항삼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월항 마을 부근의 세 봉우리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잘못 된 산이름이라고 한다. 탄항산의 탄항(炭項)은 변방이나 국경 등을 지킨다는 의미의 수자리 '수(戍)자와 지키기에 알맞은 '목'이라는 의미의 '항(項)'자가 합성되어 '수항'이라 일컫던 말이다. 그것이 숫항 → 숯항으로 전음되었고 '숯 탄(炭)' 자의 훈을 빌리어 뜻옮김하여 불리어지게 된 것인 모양이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이 산정에 봉수대가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탄항산 정상에서 이제 겨우 다섯 시 밖에 안됐는데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가버려 봉홧불 대신 등불을 밝혀야 되려나 보다. 최대한 빨리 가서 등불없이 오늘 산행을 마치기로 하고 출발했다.
언제나 산행길 마지막엔 멀쩡하게 살아나는 나는 오늘도 빠르게 산길을 내달린다. 점심 무렵부터 아프기 시작하는 다리가 항상 마지막 한두 시간 무렵이면 멀쩡해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빨리 끝내고자 하는 심리적 이유 때문인지, 대간에서 기를 팍팍 받아 엔돌핀이 생성되어 통증이 사라져 버리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다시 무명봉 두 개를 오르내려 '전망대'에 서 보지만 어둑어둑해져서 전망은 볼 수 없다. 전망대 앞엔 큰 바위를 포개 놓은 '굴바위'가 있다.
# 굴바위. 
굴바위를 지나 766봉을 오르니 잡목숲 너머로 다음 구간의 첫 번째 산인 포암산이 무시무시한 직벽을 병풍처럼 두른 채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저 산 아래까지 가야 오늘 구간이 끝날 것 같다. "이제부터는 계속 하산길의 연속인데 쉽게 끝이 나지는 않겠지? 대간이니까!"
어둠이 점점 짙어져서 내려가는 길이 조심스럽지만 일부러 등불을 매달지 않았다. 어떡하던지 등불없이 끝내고 싶어서였다. 무릎 아프다며 자꾸 처지는 마눌을 가다 서다 격려하며 갔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싶지만, 너무 어두워서 더이상 고집부리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 싶어 마눌 이마에 등 달아 주고 나도 등불 밝혀 매달았다. 한참 내려오니 철조망이 나오고 대간길은 철조망을 따라 아래로 이어진다.
드디어 물이 콸콸 나오는 물통을 만나지만 마음이 급해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내려 오자 임도가 나오고 임도를 돌아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하늘재'에 도착했다.(18:00)
# 계립령 유허비. 자세히 읽어 볼 정신은 없었다. 
하늘재는 우두령 너머 바람재와 더불어 이름의 어감이 너무나 좋은 곳이다. 하늘 높이 솟은 고개란 의미다. 그러나 원래 하늘재는 옛이름인 '대원령'에서 변한 이름이다. 대원령의 훈과 음이 혼용되어 한원령→한월령→한월재→하늘재로 전음되어 불려온 것이다. 하늘재 좌측 괴산쪽으로는 비포장도로이고 차량 통행을 막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그 유명한 하늘재 산장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하늘재에는 우리들 대간꾼을 위한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바로 하늘재 산장이다. 하늘재 산장 마당엔 만장이 수십 개 알록달록 서 있고 무대도 설치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간꾼 세 분이 앉아 계시고 하늘재 선녀와 나무꾼이 반겨준다.
# 낯가림 심한 나는 부끄러워 선녀를 직접 찍지는 못하고 선녀님이 일하는 공간만 찰칵. 
#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간꾼들의 흔적과 홀대모님들. 
같은 대간꾼을 만나면 반갑기가 이를데 없다. 영천에서 오셨다는 남한진님 일행과 반가운 얘기꽃도 피우고 토종닭 백숙으로 끼니도 해결했다.
이 날 하늘재에서는 문경지역 원혼(寃魂)들에 대한 위령제(慰靈祭)가 열렸단다. 문화적 소양을 갖춘 무슨무슨 법사라는 사람이 주최하고 위령제, 바라춤, 사물놀이 공연 등이 성대하게 치뤄졌던 모양이다. 하늘재 선녀님도 그 일을 도우느라 저녁 메뉴가 다 떨어지고 본인들 드실려고 준비한 백숙이 있다고 같이 들자고 해서 나무꾼 가족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대간길 품안 좋은 곳에는 좋은 사람들이 좋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어 보기 좋고 부럽기도 했다. "나도 어디 좋은 곳 하나 점지해서 좋은 생각 갖고 이렇게 살아볼까나?"
그나저나 하늘재 나무꾼은 부지런히 노력해서 애를 한 명 더 낳아야 할 것 같다. 선녀님 어느날 날개옷 찾아 입고 양손에 애 하나씩 안고 날아가면 안되잖아? 애들이 너무 커서 양 손에 안고서 날기는 어렵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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