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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차이야기]두 바퀴로 고향 찾기 - 진주라 천리길! 본문
강/사/랑은 길 위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산길, 들길, 물길 모두를 두 발로 느껴보자 작정하고 틈 날때 마다 그 길들을 찾아 나선다. 발걸음은 이동을 위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행위이다. 두 발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원시(原始)와 연결되어 있다. 원시는 순수(純粹)의 시공간이었다. 인간은 순수의 원초적 과거를 잊지 못한다. 문명 발달해 바퀴와 내연기관으로 이동성의 획기적 발전을 이뤘지만, 우리는 순수한 근육의 힘으로만 바퀴를 굴려 이동하는 원시성을 아직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 역시 이 땅의 모든 산길과 들길을 두 발로 걷는 외에 바퀴를 굴려 그 길을 저어나가는 자전거 여행을 좋아한다.
작가 김훈은 명저 자전거 여행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어 갈 때 "세상의 모든 길들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간다"고 말하였다. 또 자전거를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가는데, 몸과 길은 이 순간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니 이 몸과 길 사이의 엔진 없는 연결이 축복"이라 했다.
김훈 작가의 표현처럼 자전거 여행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의 연결이다. 비록 바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이용하나 내연기관이 아닌 순수한 인간의 근육만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한 순결한 연결이 좋았다. 그리하여 산에 스며들지 못하는 틈틈이 두 바퀴를 굴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세상의 모든 길을 몸으로 느껴 보기를 즐겨했다. 자전거 바퀴가 더듬어 가는 길 표면의 느낌이 온몸에 전해질 때 작가의 말처럼 몸과 길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어지고 하나로 동화되었다.
산에는 길이 많다. 그 길은 마루금을 따라 산과 산을 이어주기도 하고 고갯길을 따라 산의 이쪽저쪽을 넘어가기도 한다.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가 하면 사면과 능선을 따라 산속으로 스미기도 한다. 이러한 산의 여러 길은 대부분 인간의 발걸음이 만든 길이다. 인간은 산과 동화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산에 의지해 살아가고자 한다. 그 결과 산속에 여러 길이 생겨난 것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 그 길을 따라 수렵과 채취, 그리고 물류를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길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길을 인간이 사용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 그 길은 짐승의 길이었다. 인간의 발길이 멀어지면 산속의 길은 온전히 짐승의 몫이 된다. 나는 홀로 산꾼이어서 이 땅 곳곳의 여러 오지(奧地)를 많이 찾아다녔다. 그때 만난 산속의 길에는 인간의 흔적보다는 산짐승의 흔적이 더 많았다. 이제 문명 발달해 더이상 인간은 수렵 채취를 하고자 오지의 숲속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숲의 길은 이제 짐승의 길이 되었다. 이렇게 산길이 짐승의 길이라면 인간세를 뒤덮고 있는 포장되어진 여러 길들은 그야말로 인간들만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수렵채취를 버린 인간은 이제 산업을 일으켜 문명을 이루고 경제활동을 한다. 바퀴와 내연기관은 인간 문명의 물적 토대이다. 화석 연료에 바탕한 내연기관은 인간의 길을 따라 연결되고 확산된다. 그러나 문명 발달하여도 사람들은 원시의 기억을 버리지 못한다. 바퀴와 내연기관의 편리함이 지극한 이 시대에도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바퀴를 굴리고자 하는 이들은 아직 많다. 그들은 이동이나 생산활동을 위해 닦아 놓은 인간의 길을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근력과 땀방울의 힘만으로 두 바퀴를 굴려 달려가고자 한다.
나도 그런 아날로그적 감성의 인간이다. 그리하여 이 땅 많은 인간의 길을 근육과 땀방울의 힘만으로 바퀴 굴리며 돌아다녔다. 그 길은 산길이기도 했고 들길이기도 했으며 물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인간의 길을 두 바퀴로 흘러다닌 강/사/랑의 여러 길 중에 '고향인 진주(晋州) 찾아가기'가 있다.
내 고향 진주는 서부 경남에 있는 작고 아담한 소도시이다. 주(州)자가 들어가는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가야(伽倻)의 옛터에서 출발해서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의 접경지에 가까운 전략지로,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그를 막으려는 조선군 사이에 2차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적으로도 일찍 성숙하여 최초의 지역예술제와 최초의 지방신문이 이곳 진주에서 시발(始發)하였다. 또 정치적으로도 저항정신이 강해 최초의 민란이 진주에서 발생했었고, 일제 강점기 백정들의 민권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앞서갈 지리적 사회적 여건을 갖추지 못해 이제는 이름 없는 작은 소도시에 불과할 따름이다. 시의 인구가 30년 전 내가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고, 시가지도 큰 변화 없이 여전하니 침체된 그곳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그 덕분에 아직도 공기 맑고 번잡하지 않아 사람 살기 좋고 무엇보다 주변의 풍부한 물산들로 인해 물가가 엄청나게 싸서 노후에 은퇴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고향 떠나온 지 25년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아는 사람도 반겨줄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진주는 언제나 푸근한 울림으로 가슴을 자극하는 곳이라 항상 수구초심(首丘初心) 하게 되는 곳이다.
그래서 폭염주의보 발령된 지난 7월 22일 나무의 날, 진주라 천리길을 찾아가기 위해 짐 꾸려 등에 메고 바퀴에 바람 채운 후 집을 나섰다. 진주라 천리길! 일 시 : 2010년 7월 22, 23일. 나무와 쇠의 날. 세부내용 : 군포 당정역에서 천안역으로 점프 ~ 천안역 ~ 1번 국도 ~ 선문대 ~ 소정리 ~ 전의 ~ 조치원 ~ 유성/32번 국도 ~ 갑천 ~ 대전/충남대 병원 ~ 남대전 ~ 산내 ~ 추부 ~ 37번 국도 ~ 칠백의총 ~ 금산/찜질방 1박. 금산 ~ 부리 ~ 잠두 ~ 무주 입구/30번 국도 ~ 적상/19번 국도 ~ 안성재 ~ 안성 ~ 솔재 ~ 집재 ~ 장계/26번 국도 ~ 육십령 ~ 서상 ~ 서하 ~ 거연정, 동호정, 농월정 ~ 함양 안의/3번 국도 ~ 산청 생초 ~ 원지 ~ 진주. 진주시/晉州市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市長)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리적(數理的)으로 동경 127°53′∼128°22′북위 35°03′∼35°26′에 있다. 동쪽은 함안군·마산시,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사천시·고성군, 북쪽은 산청군·의령군에 접한다. 1995년 진양군과 통합시를 이루었으며, 역사·문화·예술·교육 등 경상남도 서부의 중심도시로, 자연적·역사적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행정구역은 문산읍 1개 읍, 15개 면, 21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청소재지는 상대동이다. 소백산맥이 시의 북부와 서부에 뻗어 있고, 동남부에는 해안산맥이 뻗어 있다. 동부지역은 방어산(530m)·오봉산(五峰山:525m)·깃대봉(520m) 등이 솟아 있고 대부분 500m 내외의 구릉성산지다. 서부지역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동군과 접하며, 경호강과 남강으로 이어지는 진양호가 있다. 남부지역에는 봉대산(302m)·무선산(277m)·실봉산(185m)이, 북부지역에는 집현산(572m)·검무봉(280m)이 있고, 동부와 북부지역의 산세가 비교적 험하다. 시의 중앙에는 월아산(月牙山:471m)·장군대산(將軍臺山:482m) 등이 솟아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경남의 동맥을 이루는 남강(南江)이 진양호(晉陽湖)를 이룬 뒤 시의 중앙을 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또 하동군과 경계를 이루는 덕천강이 남동쪽으로 흘러 진양호로 유입되고, 나불천·영천강·정수천·향양천 등이 남강으로 유입된다. 남강 유역에는 해발고도 20∼30m의 가늘고 긴 범람원이 있어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남강 우안으로 합류하는 반성천·유천강 하천 연변에 분포하는 경지도 비옥하다. 북서부에서 흘러든 남강은 심한 사행(蛇行)이며,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공급 등을 위해 1970년대에 건설된 남강댐과 인공호수인 진양호가 있다. 시가지는 시의 중앙을 관류하는 남강 유역에 펼쳐져 있으며, 남강을 중심으로 강북·강남·강동의 3개 지역으로 나뉜다. 시내 도로망은 규칙적인 격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아직도 농촌경관이 뚜렷하다. 농경지와 취락은 계곡 사이에 흩어져 있고, 해발고도 100∼500m의 낮은 산이 많아 구릉지를 이룬다. 낮은 지역이 비교적 넓으며, 지형은 만장년기(晩壯年期)에서 노년기산지(老年期山地) 형태를 띤다. 기후는 지리산(智異山)의 영향으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는데,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6℃, 연평균기온 13.1℃이다(평년값 기준). 분지이기 때문에 같은 위도의 다른 도시보다 기온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1,490.0㎜로 다우 지역에 속한다. 특히 진주는 진양호의 영향으로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는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이곳저곳>
# 진주까지의 자전거 궤적. 260KM.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바야흐로 장마철이라 먼 정맥길 들어가기도 가까운 산길 가기도 마땅치 않은 계절이다. 그러던 차에 잠시 장마 전선이 북쪽지방으로 올라가고 대신 그 자리를 무더운 북태평양 고기압이 치고 들어와 목하 대한민국은 폭염주의보 중이다. 일기예보에서는 연일 폭염주의보에 사상 최고의 기온을 예보하고 있다. 그렇지만 간만에 얻은 자유 시간을 그냥 허비하기는 싫고 폭염주의보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일단 길을 나서 보기로 한다.
7월 22일 나무의 날, 아침에 짐 꾸려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어라? 마침 길 나서려고 하는데 이게 뭔 일이람?
비 때문에 출발하지 못하고 하늘만 살피는데 오전 내내 오락가락 하던 날씨가 점심을 먹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강렬한 뙤약볕으로 변한다. 그 모습 확인한 후 잔차 끌고 집을 나선다.
오전 내내 내린 소나기 때문에 집에서 그냥 출발하려던 계획을 바꿔 일단 전철이 가는 천안까지 점프를 하기로 한다. 모래 토요일이 어머님 기일이라 토요일 오전엔 집에 돌아와야 하는데 지금 그냥 집에서 출발하면 내일 안에 진주에 도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얼마 전 집 앞에 새로 생긴 당정역에서 전철을 기다린다.
# 두 바퀴야! 진주까지 같이 잘 가보자!
# 천안역.
전철에 자전거를 싣는 일은 남들 눈치가 보이는 일이라 사람들이 잘 없고 공간도 넓은 전철 맨 뒤 칸에 자전거를 거꾸로 세워 고정한다. 다행히 평일 날 낮시간의 전철은 한산하여 다른 사람 눈치 볼 일은 없다. 다만 너무 강렬한 냉방 때문에 추워서 가만히 앉아 가기가 어려울 지경인 것이 흠이다.
군포에서 1시간 30분가량 달려가니 천안역에 도착하게 된다. 16:00. 출발 시각이 너무 늦어 걱정이다.
천안역 광장에서 긴 여정의 출발을 하는데 뙤약볕이 너무나 강렬해 등짝이 금세 후끈후끈해진다. 역광장 앞 삼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직진하여 1번 국도 방향으로 오르막을 올라간다.
잠시 시가지를 달리다 1번 국도에 올라서게 되고 대전방향으로 달려가는데 금세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숨쉬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이 폭염의 열기가 이틀 동안 나를 몹시도 괴롭히겠구나!
천안을 벗어나 잠시 달리자 선문대 앞의 긴 오르막이 앞을 가로막는데 뙤약볕과 아스팔트의 열기, 오르막의 경사도, 그리고 맞바람까지 불어 4중으로 힘이 든다. 시작부터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어떻게 진주까지 가나?
# 천안역을 출발, 1번 국도 대전 방향으로 올라간다. 천안은 시의 상징인 능수버들이 가로수이다. 무더운 폭염에 능수버들이 축축 늘어졌다. 가로수가 버드나무이니 봄철이면 꽃가루 고생 좀 하겠다.
# 첫 번째 시련지였던 선문대 앞 오르막.
# 굉장한 날씨이다. 그동안 폭염 속에 산행이나 자전거 여행을 여러 차례 해 봤지만 오늘은 좀 유별나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에 시달리며 길게 달려가다 긴 오르막을 오르는데... 얼라? 주변이 안면이 많네? 자세히 보니 전방에 전의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아, 금북정맥할 때 지나갔던 덕고개이다. 그때는 이 고개를 가로로 고가도로를 통해 지나 산길로 들어 갔는데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세로로 도로를 따라 지나간다. 내 인생의 산길과 자전거길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순간이다.
# 햇살 강렬하니 구름도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 악전고투 끝에 조치원에 도착했다. 천안에서 35km 달려 왔다. 조치원 들머리에 있는 어느 편의점에 들러 차가운 아이스 바를 두 개나 연달아 먹었다. 편의점 안이 너무나 시원해 이것저것 사먹으며 계속 시간을 보냈다.
# 조치원 시내를 관통하여 조치원을 벗어나고 대전을 향해 달려 간다. 조치원은 복숭아가 주산물인가 보다. 도로를 따라 판매점이 즐비하다.
# 한참을 달려 가면 연기군 세종시 건설지가 나온다. 행복도시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행복도시인지? 멀쩡한 수도를 분할하고 행정부를 반토막으로 나눠 혼란을 불러 놓고 누가 행복할 수 있을런지??
# 어느새 해가 기울어 구름들이 색을 얻기 시작한다.
# 연기군은 곳곳이 공사 중이다.
# 대전을 향해 가는데 잔잔한 오르내림이 참 많이도 나타난다. 아휴~ 힘들어!
# 노을이 지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 어린 왕자는 노을이 너무 좋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보았다 했지.
# 노을진 산하를 길게 늘여본다.(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낮달이 이미 하늘 위로 올라와 가만히 땡겨본다.
# 금강을 만나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지난다. 사실은 똥꼬도 너무 아프고...
# 강태공들이 한가한 여유를 즐기고 있다.
연기를 지나 유성으로 접어드는 동안 날이 저물어 경광봉에 불 밝혀 배낭에 매달고 자전거 후미등도 켜고 전조등도 불을 밝힌다. 어두운 밤의 국도는 자전거 여행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환경이다. 차량 통행이 적다면 뜨거운 열기에 시달리는 낮보다 자전거 타기가 더 좋겠지만, 이곳은 차량 통행이 아주 많은 곳이라 확실한 후미등을 달기는 했지만 매우 조심스럽다.
특히 세종시 건설 때문에 공사장이 많아 대형 트럭들이 많이 다닌다. 그런데 이 넘들은 운전자가 대부분 젊은 친구들인데 자전거를 보면 일부러 밀어붙이는 듯한 느낌으로 가깝게 접근하여 무서운 속도로 위협하며 스칠 듯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자전거가 휘청휘청 쓰러질 듯 위태로워진다. 저저저넘~~~~
# 유성에 접어들면서 1번 국도는 계룡, 논산을 향해 가고, 나는 유성 나들목 근처에서 지방도를 타고 유성을 가로질러 노은지구 시가지를 따라 간다. 올림픽 경기장을 지나 32번 국도로 방향을 잡아 대전 방향으로 들어선다. 긴 시가지 구간을 지나야 하므로 신호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 갑천을 지나 대전 시내에 접어들고 옛날 진주 갈 때 자동차 타고 대전에서 추부 거쳐 금산으로 가던 기억을 더듬어 대전 시내를 통과한다. 서대전 사거리, 충남대병원 등을 지나 남대전으로 접어들고 대전에서 금산으로 가는 길목인 산내를 지난다.
산내를 지나 추부를 향해 가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코스는 옛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생기기 이전 고향 진주에 가던 가장 단코스의 길이라 그 당시 항상 지나 다니던 길이다.
옛날에 고향 진주에 가자면 고속도로는 대구,김천을 지나 구미에서 구마고속도로를 거쳐 빙빙 돌아가야 하므로 우리는 대전에서 추부, 금산, 무주, 장계를 거쳐 육십령을 넘고 함양, 산청을 거쳐 진주에 이르는 가장 단코스의 길을 자주 이용했고 오늘 내가 잡고 있는 자전거 코스도 그 길에 맞춰 가고 있다.
그런데 남대전을 벗어나 산내를 지나고 추부로 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 아주 길고 높은 만인산 고개를 넘어 가야 한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그 고개를 어떻게 넘나? 여기서 멈추고 숙소를 잡아야 하나?
걱정이 태산인데 다행히 새롭게 도로가 뚫려 만인산을 넘을 일이 없단다. 다만 터널을 지나 달려야 하는 새로운 어려움은 있지만 고개를 넘는 일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 밤 11시가 다 된 시각에 겨우 추부에 도착한다.
# 추부엔 추어탕을 잘하는 집이 있어 지난해 가을 운장산 산행 마치고 여럿이서 들러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 집을 찾아갔더니 밥이 떨어졌단다. 돌아 나오는데 지치고 배고파 보이는 내 모습이 보기 안 되었든지 주인 아주머니가 밥 대신 국수라도 넣어 먹겠냐고 묻는다. "아이고~ 내가 밥보다 국수를 더 좋아한다오." 그래서 추어탕 대신 추어탕 국수를 처음으로 먹어 보게 된다. 원래 추어탕이 맛있는 집인데 지치고 배까지 고프니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뱃속으로 사라진다.
# 추부에서 저녁을 먹고 주인께 물으니 추부에도 찜질방이 있다고 하지만, 오늘 출발하면서 계획했던 금산까지 일단 가 보기로 한다.
# 추부에서 금산까지는 세 개의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지친 몸으로 캄캄한 밤중에 고개를 넘자니 정말 힘이 든다. 그러다 칠백의총 갈림길을 만나 잠시 한숨 돌린다. 달빛 구경도 하고...
# 자정을 넘기고서야 금산에 도착하게 된다. 금산은 인삼의 고장이라 도시 초입에 거대한 인삼상이 세워져 있다. 이 고장은 한 10년 만에 와 보는 것 같다.
# 인삼을 형상화한 빛의 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 금산에서 제일 깨끗하다는 찜질방을 찾아 하룻밤 묵어 가기로 한다.
찜질방 계단에 자전거를 묶어 두고 안으로 들어 간다. 거울을 비춰보니 하루종일 땀에 절은 상태라 몰골이 말이 아니고 옷에서는 물이 줄줄 흐른다. 버프나 토시, 상의 등 발수력이 좋아 빨리 마르는 종류는 함께 들고 탕으로 가서 세탁을 한다. 차가운 샤워 틀어놓고 물을 맞는데 하루종일 열기에 익은 몸이 식으면서 쉬잇쉬잇 소리가 나는 듯한 기분이다.
평일날 자정을 넘긴 찜질방은 이용객이 별로 없지만 그 시각에도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꽹과리를 두들기는 둣한 코골이 아저씨 때문에 숙면은 딴나라 이야기이다. 휴지로 귀를 틀어 막아 보지만 별 소용이 없어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5시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샤워하러 탕으로 내려간다.
# 그런데 짐 챙겨 나와 자전거를 확인하니 앞바퀴가 폭삭 주저 앉아 있다. 어젯밤에 세워둘 때는 멀쩡했는데 웬일이래?
# 밖으로 나와 타이어를 분리하고 펑크를 때운다. 그동안 자전거 여행하면서 두어 차례 펑크가 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도심 근처에서 발생하거나 펑크 수리 도구가 고장이 나 수리점에서 고쳤는데, 오늘 처음으로 펑크를 때워본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오래전에 동영상으로 공부를 해 둔 거라 좀 버벅대기는 했지만, 무사히 펑크를 수리할 수 있다. 확인해보니 아주 가는 철사가 타이어에 박혀 있다. 펑크수리를 할 때는 튜브의 구멍만 때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이어에 박힌 이물질을 제거해 줘야 2차 피해를 없앨 수 있다.
# 펑크수리하느라 1시간이나 소모해 버렸다.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한 두 바퀴여, 다시 진주를 향해 가 보자!
# 인근 시장에서 백반 한그릇 사 먹고,
# 찜질방 1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화장도 마친다.
# 금산을 떠나 37번 국도를 타고 장수 무주 방향으로 달린다. 하늘이 잔뜩 흐리다. 하루 종일 이 상태였으면 좋겠다만...
# 아침의 한산한 도로를 달려 가다 진안 가는 13번 도로가 갈라지는 곳에서 장수 무주행 37번 도로를 계속 따른다.
# 긴 고개 하나를 꾸준히 오른 후 내리막을 신나게 달려 내려 가는데 큰 느티나무와 고풍스런 옛집이 있어 급브레이크. 청풍서원이라고 표지석이 서 있다.
# 百世淸風(백세청풍)이란 달필의 글이 새겨져 있다.
# 그 곁엔 '지주중류(砥柱中流)'란 글이 적힌 비석이 있다. 강물 속에 서 있는 바위산이란 뜻이다. 지주(砥柱)는 황하 삼문협(三門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우(禹)임금은 치수(治水)를 통해 고대 중국의 기틀을 이룬 전설 상의 임금이다. 우임금이 황하 치수를 할 때 바위 산 하나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어 산의 좌우를 파내어 물길을 만들었다. 그래서 황하의 물길이 이 산의 좌우로 갈라져 흐르게 되었다. 삼문협은 물살이 거친 곳이다. 이 산은 거친 격류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수천 년을 우뚝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산을 난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의리와 기개를 지키는 선비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산이 '지주산(砥柱山)'이고 '격류 속에 의연한 지주처럼 역경에도 절개와 기개를 지키는 선비'라는 의미로 '지주중류(砥柱中流)'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 이곳은 길야은(吉冶隱)선생의 굳건한 지조를 기린 곳이다. 선조 20년인 1587년 인동 현감 류운용(柳雲龍)이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산 오태동에 지주중류 비석을 세웠다. 이곳의 비석은 선산의 비석을 탁본하여 다시 제작한 것이다.
# 옛날 이곳을 지날 때 동네 이름이 부리면이어서 무슨 새의 부리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충절을 나타내는 不二에서 나온 이름이구나!. 멋지다.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부리면을 지나 긴 오르막 하나를 치고 올라 갔다. 길 가에 부처당이란 고개 이름표와 사찰이 하나 있다. 그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마침 버스 정류소가 있어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
# 버스 정류소에서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며 이번 여행을 여기서 멈춰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다행히 지나가는 소나기라 10여 분 내리다 가늘게 이어진다. 다시 길을 나서 고개를 넘는다. 이 고개에서 충청남도와 헤어지고 전라북도로 접어들게 된다.
# 고개를 달려 길게 내려간다. 계속 소낙비가 오락가락해서 그때마다 주변 버스 정류소에서 비를 피한다. 그렇게 길게 가다보면 멋진 조망을 보여 주는 강줄기를 만나게 된다. 비단강, 즉 금강이다.
# 동네 주민들이 강물 속에 푹 잠겨 다슬기를 채취하고 있다. 시원하시겠습니다.
# 잠시 경치 구경하다 다시 출발한다.
# 예전에는 없던 정자가 생겼구나! 이 지역은 맑은 물과 수려한 산들이 가까이 있어 경치가 아주 훌륭한 데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조용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10여 년 전 견지낚시를 열심히 할 때 이곳에서 야영하며 낚시를 많이 했었고 마눌과의 추억, 젊어 세상 떠난 형과의 추억 등 개인적으로 추억이 많은 곳이다.
# 그런데 10여년 만에 찾아 왔더니 래프팅 업체가 강 이곳저곳을 점령하고 있다. 강에는 녹조가 끼어있고 물빛도 탁하다.
# 참으로 아름다운 강이었는데 이렇게 변해 버렸다.
# 수려한 경치를 간직했던 잠두 마을. 지금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하류쪽 풍경.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가 생겼고 백사장과 자갈밭이던 곳에 수풀이 점령했다. 강폭도 많이 좁아졌다. 저쪽 우측 강변에서 야영을 여러 차례 했었는데...
# 이곳도 마실길이란 길을 만들었다. 유행이란 참 무섭다.
# 잠두를 지나 잠시 달려가면 길은 다시 강을 넘게 되고 금강과는 헤어지게 된다. 용포교 위에서 강을 굽어보니 왜가리 한 마리 물속에서 한가롭다.
# 오락가락하던 소나기는 완전히 멈추고 길가 가겟집에 들러 시원한 아이스바를 하나 사서 입에 문다. 가겟집 할아버지께 길을 물으니 한 번은 무주로 들어가 구천동을 넘어 거창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 하고, 또 한 번은 안성, 장계를 지나 육십령을 넘어 함양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어찌 하오리까?
# 용포리를 지나 길게 가는데 계속 오르내리기는 멈춰지지 않는다. 그러다 무주와 장수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가깝고 쉽기는 무주 쪽으로 가는 것이 맞을 듯 한데...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아는 길을 택해 장수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30번 국도이다.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어 오르는 길을 길게 내려가는데 뙤약볕이 무섭게 내려쬐고 습도가 높아 엄청나게 힘이 든다. 그러다 고속도로 교각 아래 그늘에서 휴식하며 이곳에서 멈출까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 그러다 적상에서 19번으로 도로명이 바뀌게 된다. 갓길이 좁아 무척 위험했던 적상 터널을 지나지만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고 좌측 아래에 적상면 소재지가 내려다 보인다.
# 적상면을 지나 적상산을 좌측에 두고 긴 고개를 올라간다. 적상산은 가을 단풍과 겨울 흰눈 구경이 멋진 산이다.
# 고개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길가에서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가 부르시더니 얼음같이 차고 맛나는 보리차를 한 잔 주신다. 물이 꿀같이 달콤해 맛나게 먹었더니 물을 한 잔 더 주신 후 아예 파시는 옥수수까지 하나 권해 주신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분같아서는 옥수수를 팔아드리고 싶은데, 배낭 무게 때문에 감사의 인사만 드렸다. 다음에 꼭 한번 보답할 기회를 보지요!
# 지치고 물을 너무 많이 마셔 입맛을 잃어 옥수수는 그냥 배낭에 넣어 둔다.
#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긴 고개에 절망하게 된다. 안성재이다. 안성재는 옛날에 차로 넘어 다닐 때도 쉽지 않은 고개였고 고개 위 휴게소에서 꼭 쉬어가곤 했었다. 오늘은 두 다리로 바퀴를 굴려서 올라야 한다. 힘에 부쳐 중간중간 휴식을 많이 취한다. 그렇게 힘들게 고개를 넘고 신나는 내리막을 브레이크도 잡지 않고 무조건 달려 내려간다. 고개 아래는 안성면이다.
안성에서 다음 포스트인 장계까지는 이십오륙 킬로미터를 더 가야 한다. 옛날에 자동차로 다닐 때는 바로 곁이었는데? 안성을 지나 길게 가다보면 또다시 고개 하나가 앞을 가로 막는다. 한자로 松峙로 표기하는 솔재이다. 힘든 걸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MP3를 꺼내 귀에 꽂고 간다. 원래 자전거를 탈 때는 절대로 이어폰을 꽂으면 안되는데 오늘은 워낙 힘이 들어 어쩔 수가 없다.
솔재를 내려가도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고개 이름은 집재이다. 이 고개 역시 가다쉬다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집재 꼭대기에서부터 장계면까지는 오륙 킬로미터 정도의 긴 내리막이 이어진다.
# 긴 내리막을 끝도 없이 달려 내려가다 보면 장계에 도착하게 된다. 장계는 옛날에 진주를 오갈 때 수십 차례 드나든 곳이고, 근자에는 금남호남정맥 종주를 하면서 두 차례나 들러 묵고 간 곳이라 정이 가는 곳이다.
# 장계에서 좌틀하여 육십령고개를 향해 26번 도로를 타고 간다. 한참을 가다 보면 논개 생가와 무룡고개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무룡고개는 백두대간 영취산과 금남호남정맥 장안산 사이에 있어 두어 차례 다녀 간 곳이다.
# 육십령 고개는 그 구비가 육십 구비여서 육십령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옛날 도적이나 호랑이가 많아 육십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이 고개는 자동차로 넘을 때에도 현기증이 나게 높고 구불구불 구비쳐 올라야 하는데, 오늘 이 폭염주의보 아래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오르자니 거의 죽음이다. 고개 입구에서 이미 타고 넘는 것은 포기하고 자전거를 끌고 꺼이꺼이 올라 가는데, 마침 작은 트럭 한 대가 오길래 손을 들었더니 금방 세워 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개 위까지만 부탁합니다! 트럭 짐칸에 자전거 싣고 한 방에 육십령 고개 위에 올라선다. 후유~~
# 이 고개는 2005년 백두대간 할 때 이후 처음 찾아 온다.
# 오랜만에 만나는 육십령루.
# 옛날 처음 내가 이 고개를 지날 때는 휴게소도 없고 넓은 공터에 컨테이너로 만든 작은 쉼터가 있어 라면이나 국수 등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었다.
# 고개 아래 장계면 일대.
# 우측은 백두대간 덕유산의 할미봉이다.
# 할미봉을 땡겨본다.
# 장안산 자락이다.
# 여긴 백두대간 깃대봉이다.
# 장계면 쪽에 마사회 목장이 조성되어 있다.
# 전방을 파노라마로 펼쳐본다.(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휴게소에서 늦은 점심으로 된장국 하나 사 먹고 있는데, 바이크 투어 중인 사람이 들어온다. 자동차 몇 대 값이라는 BMW 바이크를 몰고 왔다. 얘기 나눠보니 장거리 여행은 아니고 인근을 돌고 있다 한다. 나는 그의 멋진 바이크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냥 내연기관을 이용한 엔진이 부러웠다.
# 육십령 너머부터는 경상남도가 이어진다.
# 시속 50km에 맞춰 내리막을 신나게 달려 내려간다. 마구 달리자면 6, 70km도 가능하겠지만 위험해서 속도를 조절하며 내려간다. 이렇게 진주까지 계속 내려가면 얼마나 좋을까? 고개 좌측으로 장수 덕유와 남덕유산이 보인다.
# 저 멀리 덕유산의 흐름을 펼쳐 본다(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여름 특유의 하늘 풍광이다.
# 서상, 서하까지 길고 긴 내리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진주까지 이 속도 그대로 달려 내려가고 싶지만 멋진 정자가 나타나 자전거를 멈출 수 밖에 없다.
# 거연정(居然亭)이다. 거연정이 있는 이곳 계곡은 화림동(花林洞)이다. 덕유산 골골에서 흘러내린 계곡이 60리를 이루는 곳이다. 기암과 괴석이 계곡을 장식하고 맑고 차가운 계곡물이 우당탕탕 흘러 반석을 다듬고 소를 만들었다. 옛 사람들은 이 계곡을 백두대간 남쪽의 무릉도원이라 여겼다. 연암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화림동에 왔다가 한양사람들이 왜 무더운 여름날 화림동에서 탁족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 했는지 알겠노라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계곡이라 자연을 사랑한 많은 이들이 화림동 계곡에서 머물고자하였다. 그리하여 저마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벗과 함께 시을 읊으며 화림동의 자연을 즐겼다. 그것이 화림동 '팔담팔정(八潭八亭)'이다.
# 이름 그대로 세상을 잊고 자연에 거하고자 하는 곳이다. 이곳 거연정은 화림동 팔담팔정 중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조선 중기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華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인조 18년인 1640년에 건립했다. 처음에는 억새 지붕을한 소박한 정자였다. 지금의 정자는 1901년에 중수한 것이다. '거연정(居然亭)'이란 이름은 주자(朱子)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12수 중 첫 수에서 따온 것이다. "琴書四十年 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 居然我泉石( 거문고와 책읽기 사십 년/ 거의 산중 나그네 되었네/ 하룻 만에 띠집 지을 수 있으니/ 그렇게 나는 자연에서 산다네)"
# 멋진 계곡이 정자 아래로 흘러 내려가고 있다.
# 멋진 곳이다. 아름다운 곳이고. 이름처럼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곳이다.
# 정자에 올라가니 몇 사람의 선객(先客)들이 천렵을 하고 있다.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있고 정자에서 쉬는 사람도 있다. 정자 한켠에 자리하고 앉아 나도 휴식을 취한다. 거연정은 경치가 훌륭한 데다 바람까지 어찌나 시원하던지 잠시 누웠더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짧지만 달콤한 오수를 즐겼다.
# 6대손이 쓴 글도 있다.
# 바위벽엔 화수천이란 글도 있다.
# 거연정에서 잠시 달려 내려오면 다시 누각 하나가 나타나는데 바로 동호정(東湖亭)이다.
# 동호는 지명이 아니라 사람의 호이다.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는 임란 당시 선조의 의주 몽진(蒙塵)에 함께한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임금을 업고 수십 리를 달렸다 한다. 그 공으로 나중에 호성원종공신이 되었다. 그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이곳 동호정 정자 인근의 초현마을에 살았고 정자 앞 너럭바위에서 낚시를 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 동호정 앞에는 거대한 너럭바위가 있다. '차일암(遮日巖)'이다. 차일은 세월을 막는다는 뜻이다.
# 맨날 정자 앞을 지나만 다녔지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 아이들이 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 이곳도 풍광이 좋은 곳이다.
# 지역 주민 두 분이 쉬고 있는 커다란 바위 앞의 소가 옥녀담(玉女潭)이다.
# 음...
# 동호정에서 다시 한참을 달려 내려가면 농월정(弄月亭)이 나온다. 함양 서상 서하의 화림동 계곡에는 거연정, 동호정 등 멋진 정자가 즐비해 우리 조상들의 자연 사랑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의 백미(白眉)는 바로 '농월정(弄月亭)'이다. 말 그대로 달빛을 즐기는 정자란 뜻인데, 넓은 계곡 한켠에 단아한 정자 한 채가 멋들어지게 서 있었다. 어느 해인가? 가을날 단풍잎이 계곡물에 둥둥 떠내려오는 어느 멋진 날에 그 정자에 앉으니 그야말로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 들더라. 농월정은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가 1638년에 지은 정자다. 박명부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 조선의 최위기 시기를 산 사람이다. 지조 높고 꼿꼿한 선비였던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斥和波)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삼전도의 굴욕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월정에 짓고 은거했다. 농월정은 화림동 팔담팔정 중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명승이다. 그런데, 몇 해 전 농월정이 어떤 미친 놈의 방화(放火)로 불에 타 없어져 버리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그래도 그 일대는 관광지로 남아 오늘 보니 정자도 없는 계곡에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고 노인들과 아줌마 아저씨 부대가 왁자지껄 장터를 이루고 있다.
#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마침 매점에서 팥빙수를 팔고 있길래 한 그릇 시원하게 비운다.
# 농월정을 나와 다시 긴 내리막을 달려 내려가면 함양 안의에 도착하게 된다. 안의는 동네 이름이 참 특이한 곳이다. 고교시절 반 친구 하나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하더라. 그래서 집이 어디냐고 재차 물었지만 계속 아니라고 해서 화를 냈더니 동네 이름이 "안" "의"라고해서 한바탕 웃은 기억이 난다. 안의에서 거창에서 내려오는 3번 국도와 만나 함양 산청 방향으로 우틀한다.
# 육십령에서 시작하여 안의까지 20여km 이상 길게 이어지던 내리막이 끝나고 오르락내리락이 이어진다. 안의에서 함양으로 이어지는 길은 곳곳이 공사 구간이라 어수선하고 위험하다. 긴 잔차질에 지치고 체온이 올라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다. 마침 길가에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그늘이 있길래 그곳에서 한숨 돌리며 휴식을 취한다.
# 다시 길을 나서 길게 오르내리며 가다 보면 함양읍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수동삼거리를 지나게 된다.
# 뭐 이제는 여행의 즐거움, 의미 따위는 간 곳 없고 도대체 이 뜨거운 폭염주의보 내린 날에 혼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 한심할 따름이다. 이제는 작은 오르막 하나도 죽을 맛이다. 그러다 함양을 벗어나 산청으로 접어드는데 저멀리 산 위에 작은 무지개가 걸려 있다. 오호라! 소원을 빌어야지!
# 완전히 탈진하여 도착한 산청 생초. 이곳은 피래미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피래미회, 구이, 도리뱅뱅, 매운탕 등 각종 민물고기 요리집들이 나래비로 위치해 있다.
# 이곳이 민물고기로 유명한 이유는 맑고 깨끗한 경호강이 바로 앞에 흐르기 때문이다.
# 시원하시겠습니다.
# 생초 마을 앞 나무그늘에서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다. 목이 너무 말라 마을 횟집에서 물을 두 통이나 얻어 먹었다. 물을 순식간에 1리터나 마셨더니 횟집 주인이 놀란다. 건너편 산위에 구름이 입체감 있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 생초를 지나 산청으로 향하는데 어느새 노을이 다시 지고 있다. 산청은 이름 그대로 山이 맑은(淸) 곳이니 지리산을 품고 있어 길 또한 평지가 아니라 오르내림이 극심하게 많은 곳이다. 오르막이 나타날 때마다 죽는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긴 오르막을 하나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니 우측에 산청읍이 나타난다. 이후도 오르내림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 기나긴 고개를 낑낑 올라가니 주유소와 휴게소가 나온다. 주유소는 영업 중인데 휴게소는 폐쇄되어 있다. 휴게소 벤치에서 간식 먹고 쉬다가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땀도 닦는다. 그러다 뒤로 돌아가니 전망이 툭 트이며 경호강과 너머에 산청 어천이 나타나고 그 뒤로 지리산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웅석봉(熊石峰)이다.
# 그곳에서 오래 쉬며 노을 구경을 한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서 다시 각종 등을 밝히고 어두운 국도를 길게 달려간다. 잔잔한 오르내림이 어찌나 길게 이어지던지 한숨이 절로 난다. 다시는 이런 형태의 자전거 여행은 안하리라 다짐을 골백 번도 더 해본다.
그렇게 길게 달려 원지를 지나고 행정 구역으로 진주시에 접어들지만, 아직 진주 시가지까지는 20여km를 더 가야 한다. 이곳부터는 어릴 때부터 많이 돌아다닌 곳이라 눈에 훤한 곳이고 고향 땅이라 감격스러울 만 하지만 지금은 그저 힘들다! 어서 빨리 끝내자! 하는 생각뿐이다.
명석면의 외율, 오미, 용산을 지나 계속 오르내리며 길게 달려 가다 보면 드디어 진주 시가지에 접어들게 되고 계속 달려 최종 목적지인 촉석루 건너 남강 변에 도착하게 된다.
시각은 이미 10시에 접어들고 있고 탈진하여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 아, 정말 멀고 힘든 길이다!
# 진주 남강 변 일대를 파노라마로 담아 본다. 야경을 삼각대 없이 찍어서 사진은 허접하다. 촉석루와 성벽, 남강 변의 명물 장어요리집들, 그리고 남강교가 눈에 들어온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촉석루만 찍어 본다.
# 18-200 렌즈로 삼각대 없이 찍으려니 결과물은 이 정도뿐이다.
# 그래도 진주라 천리길을 자전거로 달려 와서 불 켜진 촉석루를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 남강교 일대.
# 진주의 명물 중 하나인 남강변 장어구이집들.
# 남강 변엔 대밭이 유명하다. 데이트 코스로 그만이다.
# 남강 변 일대는 잘 꾸며 두어서 산책하거나 운동하기에 좋다.
# 시간이 늦어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누나댁을 향해 가다가 진주역 앞에서 포장마차촌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킨다. 안주는 라면과 꼼장어 구이.
완전히 탈진한 모습으로 누나 댁에 들어갔더니 우리 누나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너 정말 독종이구나. 어떻게 그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올 생각을 했냐?"고 혀를 끌끌 찬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것수!"
뒷날 토요일이 마침 돌아가신 어머님 기일이라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에서 친구들과 회포를 풀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고속버스로 귀경길에 오른다.
# 강남터미널에서 큰형댁이 있는 용산을 가기 위해 반포대교를 넘는다. 어젯밤엔 남강을, 오늘은 한강을 건넌다.
# 반포지구 둔치엔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다.
# 반포대교 위에서 넓은 한강을 파노라마로 펼쳐본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그렇게 이틀 동안의 긴 자전거 여행의 여정을 마감한다.
이번 진주로의 자전거 여행은 장마철 폭염주의보하 의 무시무시한 날씨 속에 찌는 듯한 날씨, 지글지글 끓어 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 그리고 계속적인 맞바람과의 사투였다. 무엇보다 힘이 들었던 것은 코스 전체적으로 산악 지역을 통과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오르막이 끝도 없이 나타나 저질 체력의 나그네를 더욱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정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계절이고, 두 번 다시 거들떠보고 싶지 않은 자전거 여행 코스이다.
다만, 중간중간 물이 떨어져 들렀던 주유소에서 친절하게 시원한 찬물을 제공해 주신 점과 무주 적상면에서 만난 옥수수 파시는 할머니의 인정은 너무나 힘들었던 폭염속 자전거 여행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 준 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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