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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산행]부용산/芙蓉山-두물머리에 피어난 연꽃의 산!! 본문
부용산 산허리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 너만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 부용산 산허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詩, 안성현 曲, 부용산>
빨치산이란 이름은 유격 대원을 일컫는 '파르티잔(Partisan)'을 우리말로 부르면서 변음(變音)된 것이다. 파르티잔은 당원, 동지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되었는데, 정규군과는 달리 적의 배후에서 무기와 물자를 탈취하거나 교통, 통신 등을 파괴하고 기습작전을 펴 인명을 사살하는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
적진 내부에서 활동하였기에 지역주민의 협조나 지원 없이는 활동할 수 없고, 해당 지역의 지리나 지형지물에 밝아야 해서 아무 곳에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전투조직은 아니다.
빨치산은 전 세계적으로 그 예가 많은데, 스페인 내전 당시의 反프랑코 세력의 게릴라, 구 소련의 적백내전(赤白內戰) 시의 볼셰비키, 2차대전 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역시 2차대전 때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한 무장조직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육이오전쟁 당시 주로 전라도 지방의 험준한 백운산과 지리산을 근거로 활동한 정식 명칭 '조선인민유격대'의 빨치산 활동이 유명하다. 해방 공간과 육이오전쟁 전후 화순, 나주, 영광, 광산, 장흥, 광양, 장성, 담양 등 전남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역 유격대들이 암약하였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광양 백운산, 영광 불갑산, 화순 백아산 등에 거점을 두고 군 보급로 습격, 관공서 습격, 우익인사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들의 출신 성분과 빨치산이 된 이유에는 여러가지 사연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우리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이 땅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암약한 이들이다. 이른바 역사의 죄인이자 반역자인 것이다. 때문에 오랜 세월 그들의 이름은 거론되지 못하고 그들의 사연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세월 흐르고 시절 변하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옛 이름들이 밝은 햇살 속으로 나오기도 하고 그들의 사연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고 역사의 이름으로 미화(美化)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사연 중에 전라도 지방의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노래가 있다. 바로 '부용산'이란 노래다. 빨치산들이 전투의식을 고양하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행진곡 풍(風)의 노래를 불러야 마땅하겠으나, 열악한 산속의 생활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감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애절한 가사와 슬픈 곡조의 부용산을 즐겨 불렀다 한다.
부용산은 음반으로 취입된 노래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구전 가요다. 1948년 목포 항도여중 학예회에서 학생들에 의해 처음 발표된 이 노래는 애절한 노랫말과 슬프고 아름다우며 간결한 곡조 때문에 목포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후 전라도 각지로 입에서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갔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박기동'은 벌교 출신으로 목포 항도여중의 교사였다. 그에게는 '박영애'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폐결핵을 앓다 스물네 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 동생을 고향 벌교에 있는 작은 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쓴 시가 바로 '부용산'이다.
당시 항도여중에는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로 만든 작곡가 '안성현'이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애절한 사연의 노랫말을 듣고는 곧바로 곡을 부쳐 부용산이란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육이오전쟁 때 안성현이 월북하는 바람에 이 노래는 밝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졌고, 빨치산의 노래였다는 사실이 더해져서 더욱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가 되었다.
그러다 7, 80년대 운동권에서 저항가요로 재해석되어 운동현장에서 많이 불리웠지만, 작곡가의 월북과 빨치산의 노래라는 멍에 때문에 오랜 세월 작자 미상(作者 未詳)의 구전 가요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자 미상의 노래는 이후 박기동의 제자인 어느 대학교수가 부용산의 원본을 발굴하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한국일보에서 그 내용을 다루면서 비로소 그 탄생 배경과 지은이들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월북작곡가의 작품이라는 점과 빨치산의 노래라는 주홍글씨를 극복하고 이 노래가 백일하에 알려지게 된 데는 민주화와 우리 사회의식의 성숙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한편 1997년 가수 '안치환'은 민중가요를 담은 앨범 '노스탤지어'에 작자 미상의 부용산을 담아 이 노래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안치환 특유의 드라마틱한 창법(唱法)이 슬픈 가사와 애절한 곡조와 어울려 명곡에 빛을 더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 나름 진보적 지식인과 중도 좌파의 정치적 지향점을 추구했던 강/사/랑도 빨치산의 노래로 알려진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는데, 나이 들고 정치성향도 변하면서 부용산은 오래 잊혀져 있었다.
그러다 전철로 접근 가능한 수도권 인근의 야영산행지를 찾다가 양평 두물머리 인근에 있는 부용산을 발견하고 그 산정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문득 오래 잊혀져 있던 안치환의 부용산 곡조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막걸릿잔 앞에 두고 밤새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 를 흥얼거리며 잊혀졌던 옛노래와 옛 기억들을 추억하였다.
정작 이 노래의 무대인 부용산은 이곳 두물머리의 부용이 아니라 저 멀리 전라도 벌교 땅에 있는 높이 190여m의 작은 야산 모양의 부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물머리에 피어난 연꽃의 산!! 일시 : 2014년 6월 14,15일. 흙과 해의 날. 세부내용 : 신원역 ~ 몽양기념관 ~ 신원리 샘골마을 ~ 샘골고개 ~ 헬기장 ~ 부용산/야영 ~ 하계산 ~ 218봉 ~ 평상쉼터 ~ 용담리 ~ 양수역.
강/사/랑이 진행하고 있는 여러 산길, 들길, 물길 중에 '전철 타고 가는 근교 야영산행'이 있다. 현재 수도권의 전철은 동쪽으로는 춘천, 서쪽으로 영종도, 북쪽으로는 동두천, 남쪽으로는 아산 온양까지 그 범위를 넓히고 있어 전철이 닿는 지방의 폭은 전국의 삼분지 일은 넉넉히 품고 있다.
그러하니 그 품속에 있는 여러 산들을 하나씩 찾아 다니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전철로 접근 가능하니 오며가며 피곤한 운전 할 일 없고 교통비 저렴한 것은 덤으로 얻는 기쁨이고.
그 전철이 닿는 산들 중에 두물머리 인근의 신원역에서 접근 가능한 부용산이 있다. 부용산은 한강기맥이 그 끝자락으로 내달리며 우뚝 솟구친 청계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물길로는 남한강이 충주호를 출발하여 여주, 양평을 거쳐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쳐지는 곳이니 산길, 물길이 모두 한강과 연결되어 있는 산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말한다. 부용꽃이라고 접시꽃이나 무궁화를 닮은 꽃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우리 옛사람들은 연꽃을 일러 부용꽃이라 불렀고, 옛날 기생들 중에는 부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경우가 흔했다.
부용산은 산 푸르고 물 맑은 곳에 한송이 연꽃처럼 피어 올라 부용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산정에 서면 형제봉을 거쳐 청계산으로 이르는 산줄기와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합치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들어오니 산 좋고 물 맑은 천혜의 조망처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계절이 여름으로 치닫는 유월 중순의 어느 주말에 부용산정에서의 하룻밤을 꿈꾸며 무거운 짐 챙겨 집을 나섰다. 이 산길 주제가 전철 타고 가는 근교 야영산행이니 자동차 세워 두고 걸어서 전철역으로 향한다. 부용산/芙蓉山
<이곳저곳>
# 산본에 있는 수리산역에서 4호선을 타고 출발했다. 길게 북상해서 이촌역에 도착했다. 부용산에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중앙선 열차로 갈아 타야 한다.
# 목적지인 신원역까지는 꼬박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신원역은 국토종주 라이딩하면서 자전거로 두어 번 통과한 곳이다. 역 바로 앞에 맛집이 하나 있길래 점심 해결하러 들어갔다. 마침 그 집에서 민물매운탕을 하고 있다. 민물매운탕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데 오래 못 먹었다. 그래서 하산하여 거하게 먹으려던 계획을 앞당겨 산을 오르기도 전에 술판을 벌였다.
# 매운탕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맵다. 나는 평소 매운 맛의 고통으로 재료의 신선함이나 요리 실력을 묻히게 만드는 음식을 혐오한다. 어쨋거나 산행 전에 미리 막걸리 한 통 비웠다.
# 신원역 좌측으로 올라간다. 신원역은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지나는 곳이다. 남한강종주길에 나선 라이더들이 계속 지나친다. 우리는 이미 몇 해 전에 종주를 마쳤다.
# 부용산은 접근거리가 짧은 산이라 출발에 여유가 넘친다. 반사경 앞에서 이런 장난도 해 본다.
# 신원역 좌측에 전철길 아래를 통과하는 굴다리가 있다.
# 아스팔트길을 따라 길게 올라간다. 이 길은 신원리로 통하는 길이다.
# 그 언덕 위에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관이 있다.
# 몽양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공간의 정치인이다. 이곳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1886년생이다.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수학했고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고 가장이 되었을 때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켰다. 그 때의 이야기가 돌에 새겨져 있다.
# 그의 어록이 적힌 비문들을 감상하며 찬찬히 올랐다.
# 몽양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1920년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했고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기도 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상해임시정부 사람들과 대립하였고 내부적으로도 박헌영과 내분하여 건국주도세력이 되지 못했다.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부주석이 되었지만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고 우파, 좌파 모두에게 소외당했다. 극우, 극좌가 힘을 얻기 마련인 정치 혼란기에 중도 좌파인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1947년 극우파 한지근에 의해 암살당했다.
# 이 기념관도 입장료를 받는다. 몽양의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널리 알리려면 입장료는 고사하고 선물을 주어서라도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하지 않겠나?
#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던 몽양 여운형.
# 기념관 좌측으로 올라 간다.
# 기념관 윗쪽에 생가를 복원해 두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복원은 너무나 천편일률적이다.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애국지사, 업적을 남긴 옛 선인, 이름을 남긴 시인이나 소설가 등등의 생가 대부분이 이런 형태로 복원되어 있어 별다른 감흥이 없다.
# 몽양기념관을 지나 고개를 치고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 아래에 작은 골짜기 마을이 있다. 풀무골이다.
# 갈림길에서 좌측길을 택해 내려 간다.
# 등산로입구까지는 아직 일킬로쯤 더 가야 한다.
# 풀무골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 가면 샘골마을이 나오고 그 뒤로 부용산이 우뚝하다.
# 연꽃 모양을 닮았나?
# 부용산 우측에 잘록한 샘골고개가 보인다.
# 마을 안을 통과한다. 양수역에서 산행을 시작해 하계, 부용을 넘은 단체 산악회사람들이 하산하여 맞은 편에서 내려 온다.
# 샘골마을 윗쪽으로 곧장 올라 간다. 길가에 오디가 가득하다.
# 샘골마을은 원주민보다는 외지에서 귀촌귀농한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전원주택들이 깔끔하다.
# 마을이 끝나는 윗쪽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
# 정상까지는 한차례 제대로 용을 써야 할 모양이다.
# 양평 물소리길이 이곳으로 이어진다.
# 작은 등로를 따라 위로 치고 오르면,
# 샘골고개가 나온다.
#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부용산으로 올라 가고, 우측으로 가면 형제봉 넘어 청계산으로 이어진다. 짐 가볍게 지고 하계, 부용, 형제, 청계로 능선 마루금을 따르는 코스도 괜찮을 듯 하다.
# 모산악회에서 우리와 같은 일정으로 부용을 찾았다.
# 윗쪽으로 올라 갈 수록 경사가 가팔라진다. 오늘은 가까운 거리이고 힘든 코스가 아니라 짐을 좀 많이 챙겼다. 게다가 신원역에서 물을 3리터, 막걸리를 두 병 더 챙겼더니 집에서 가져온 물까지 합해 물무게만 8kg이 넘는다. 배낭무게가 대충 30kg에 육박할 듯 싶다. 때문에 막판 오르막 치고오르면서 땀 꽤나 흘렸다.
# 땀을 진하게 흘린 이후 능선 마루금에 도착했다. 우리가 올라 온 방향과는 다르게 신원역으로 내려가는 코스가 있나보다. 정상은 우측인데 부인당이라고 이정표에 적혀 있다.
# 우측으로 살짝 오르면 정상이다. 조망 막힌 좁은 공터에 삼각점이 있다. 팻말에는 부인당이라고 적혀 있다. 부인당은 여성을 서낭신으로 모신 당집을 말한다. 전설에 전하기를 왕 앞에서 방귀를 뀌어 귀향왔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친 왕비를 모신 당집이 있었다 한다.
# 부인당에서 내려가면 곧바로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
# 정상석은 그 헬기장 한 켠에 서 있다. 정상인 부인당을 마다하고 이곳에 정상석을 세운 까닭을 모르겠다.
# 헬기장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묘지들이 나오고 그 뒤에 넓은 전망대 데크가 있다. 데크에 서면 두물머리 방향으로 조망이 열려 있다.
# 양수리와 그 뒤로 운길산, 예빈산이 건너다 보인다.
#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로 합해지고 있다. 그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 물결이 갯벌에 물길 나듯 갈라져 있다.
# 더이상 올라 올 사람들 없을 즈음 하룻밤 묵을 헝겊집을 세웠다.
# 두 팀 다섯명이 집을 세웠지만 데크가 넓어 공간이 넉넉하다.
# 설영 당시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 가이라인으로 텐트를 꽁꽁 묶었는데, 땀 흘리며 끝내 놓고 나니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 텐트 안에서도 두물머리가 보인다.
# 이윽고 노을이다.
# 두 강이 합해지는 그 언저리가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 양수리는 이제 도시가 다 되었다.
# 석양이 멋지게 물들고 있다.
# 올해는 이곳저곳에서 낙조 감상을 원없이 한다.
# 장엄하게 불타면서 넘어가는 낙조가 아름다워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켰다.
# 강렬하게 불타오르다 운길산 너머로 서서히 잠긴다.
# 서서히...
# 그러다 완전히 잠긴다.
# 붉게 물든 채운(彩雲)만 하늘 끝에 남긴 채.
# 땀이 식어 몸이 서늘해지는 것도 잊은 채 오래 그 모습을 보았다.
# 낙조구경 원 없이 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 갔다. 물티슈 목욕하고 깨끗한 새옷으로 갈아 입으니 상쾌하고 좋다. 해 넘어 갔으니 저녁만찬의 시작이다. 오늘은 마눌이 특별하게 붕장어를 준비했다.
# 붕장어 구워서 곰취나물에 싸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산나물 장아찌에 싸 먹어도 좋고.
# 언제나 빠지지 않는 오리 훈제. 구워서 곰취에 싸 먹다가 마지막엔 밥도 볶고...
# 디저트로 수박까지 준비했다.
# 문명과 떨어지니 밤이 길다.
# 옆집분들은 밤 늦게까지 토론이 길다. 나도 막걸리 한 잔에 취흥이 올라 부용산 노래를 계속 나즈막히 불렀다. 부용산정에서 부르는 부용산.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옆집에 계신 한 분이 부용산을 아신다. 이러한 작은 공감이 낯선 곳에서의 만남을 기분 좋게 만든다.
# 양수리 야경이 나름 멋졌는데 데크가 작은 충격에도 계속 흔들려 사진이 전부 흔들렸다. 사진은 허접하나 현지에서의 야경은 아름다워 오래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 편안한 밤을 보냈다. 새벽 일찍 요란하게 울어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 두물머리는 안개속에 잠겼다.
# 그 안개가 오늘 하루 엄청나게 더울 것을 예보한다.
# 부용산은 전철역에서 접근하기가 편리해 휴일엔 단체 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남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 마눌은 나름 만족스런 야영지였다 평가해 준다.
# 신원역에서 양수역까지 7.7km 거리이다.
# 짐 챙겨 하계산 방향으로 출발했다.
# 첫시작부터 가파른 내리막이다.
# 길게 떨어져 내려 능선 갈림길에 이른다. 갈길은 좌측이다.
# 참나무가 많은 산이다.
# 하산길의 부용산 능선은 기역자 모양으로 구부러져 진행하게 되어 있다. 그 구부러지는 정점이 하계산이다. 우틀하여 능선을 치고 오르면 하계산이 나온다.
# 그런데 이곳에서 위로 올라 가면 봉우리 하나를 올랐다 다시 내려야 한다.
# 지도 열어 지형을 확인한 후 갈림길을 버리고 일단 사면 길을 계속 따른다.
# 과연 짐작대로 하계산 갈림길이 다시 나온다. 이곳에서 갈림길로 올라 간다.
# 좀 전 갈림길에서 봉우리를 넘어 오는 길을 만나 하계산을 치고 오른다.
# 경사가 점점 가팔라진다.
# 간 밤에 갈아 입은 옷이 다시 땀범벅이 되었다.
# 한 차례 땀 흘린 후 하계산에 올랐다. 일부 지도에는 하개산이라 적혀 있다. 아마도 청계산 아랫쪽에 있어 하계산이라 불렀나 보다.
# 하계산 정상에도 넓은 데크전망대가 있다.
# 텐트 열 동은 무난하겠다.
# 두물머리쪽으로 조망이 열려 있다. 부용산보다는 조망이 약하다.
# 부용산보다는 두물머리가 훨씬 가깝다.
# 부식과 물이 모두 빠졌으니 배낭이 많이 가벼워졌다.
# 오래 휴식한 후 하계산을 떠났다.
# 잔봉 하나를 오르자 돌탑이 있다. 우리도 돌 하나 얹어 소원을 빌어 본다.
# 잔봉이 꾸준히 나온다.
# 참나무시듬병은 곤충이 매개체이다. 그 방재 대책으로 참나무에 끈끈이 비닐을 감아 두었다.
# 경사가 아주 가파르다. 그 경사를 극복하고자 길을 지그재그로 만들었다.
# 양수역 방향에서 오른다면 땀 꽤나 흘리겠다.
# 산길은 계속 계단식으로 고도를 낮춰 간다.
# 약간 평탄하게 가다가 급경사 내리막, 다시 평탄하게 가다가 내리막이 반복하여 나타난다.
# 양수역을 출발한 사람들이 수시로 지나친다.
# 마지막까지 오르막이 나타난다.
# 그러다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떨어져 내린다.
# 용담약수터는 다시 봉우리 하나를 넘어야 하는 모양이다.
# 두 물에 눈물이 더해져 세 물이 되었나 보다.
# 이제는 내려가기만 한다.
# 도수로를 건너 숲을 벗어 난다.
# 뙤약볕을 맞으며 농로를 따른다.
# 용담2리의 개천을 건넌다.
# 금계국 만발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양수역에 도착했다.
# 두물머리역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친다.
역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아침 일찍 서둘렀더니 오전 중에 하산을 완료했다. 이후 왔던 길 그대로 전철 갈아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야영산행이었지만 전철로 갈 수 있는 근교의 산이라 해가 중천에 있을때 산행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가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와 짐 정리한 후 찬물로 샤워하고 쇼파에 누으니 아직 남아 있는 일요일의 한가함이 귀하고 좋다. 가끔은 이런 짧은 일정의 산행도 해 볼만 하다.
전철로 갈 수 있는 쉬운 접근성, 실패한 공산주의자이자 비운의 민족주의자인 몽양의 흔적,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물빛과 그 물속에 담긴 운길산의 산영(山影), 비록 같은 이름때문이기는 하나 부용산의 노래를 상기할 수 있는 산. 부용산은 그런 산이다. 두물머리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같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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