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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산행]광제산/廣濟山-뜻밖의 고행(苦行)!! 본문

산이야기/일반 산행

[야영산행]광제산/廣濟山-뜻밖의 고행(苦行)!!

강/사/랑 2015. 4. 15. 12:25
[야영산행]광제산/廣濟山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하지만 원래 무(武)보다는 문(文)을 숭상(崇尙)하는 민족이고, 공격적이고 이동적인 유목(遊牧) 생활보다는 온화하고 정착적인 농경(農耕) 생활을 영위하여 군사적 대비는 취약하였다. 그리하여 오천 년 긴 역사 동안 외적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그러나 그 숱한 외침 속에서도 국맥(國脈)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어졌음은 우리 민족의 강인한 국난극복의 역량(力量)에 그 원천이 있었음이지만, 평소 국난에 대비한 몇 가지 장치를 꾸준히 유지한 탓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대비책이 '봉수(烽燧)'와 '파발(擺撥)'이다. 둘 다 외적의 침입을 신속하게 중앙에 알려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긴급 통신수단이다. 그중 파발이 인마(人馬)를 이용한 직접적 통신수단인 반면, 봉수는 불빛과 연기를 이용한 공간적 통신수단이었다.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만들어 둔 봉수대에서 연기나 불빛으로 외적의 침입을 중앙에 신속히 전달하도록 고안되었다.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서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봉수를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따라서 실제 사용하기는 그 이전의 고대사회부터일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를 거쳐 조선 세종 때에 봉수는 국가 정보전달체계로써 확고하게 정비되었는데, 전국을 세 종류, 다섯 개의 통신망, 육백칠십세 곳의 봉수대로 연결하여 모든 정보가 중앙으로 집결되도록 하였다.

 

봉수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위치나 임무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하였다.

 

경봉수는 중앙에 있던 봉수로 모든 봉수의 집결지이다. 지금의 남산(南山)인 '목멱산(木覓山)'이 바로 그곳이다. 연변봉수(沿邊烽燧)는 국경이나 해안의 최전선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제일 먼저 알리는 역할을 한 곳으로 초소와 수비대의 역할을 겸하였다. 마지막으로 내지봉수(內地烽燧)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로써 전국에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을 합해 673곳이 그물망처럼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

 

내지봉수는 전국을 다섯 개의 직봉로로 나누었는데, 함경도의 경흥(慶興)을 기점으로 한 제1로(路), 경상도 동래(東來) 기점의 제2로(路), 평안도 압록강(鴨綠江) 중류의 제3로(路), 평안도 의주(義州) 기점의 제4로(路), 전라도 순천(順天) 돌산도(突山島)의 방답진(防踏鎭) 기점의 제5로(路)가 바로 그것이다.

 

직봉(直烽)은 전국을 다섯 개의 통신망으로 연결하여 중앙으로 정보를 송신하였고, 간봉(間烽)은 직봉간의 중간지역을 연결하거나 국경 최전선의 전선초소에서 본진(本鎭)이나 본읍(本邑)으로 보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다섯 개의 직봉 중 제2로는 부산 동래의 다대포에서 경북, 충북,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간봉 중 하나는 남해 금산(錦山)에서 출발하여 충주 망이산(望夷山)에서 직봉과 연결된다. 그 간봉은 남해 금산을 출발하여 창선 대방산(臺方山), 사천의 각산(角山)과 안점산(安岾山), 진주의 망진산(望晋山)과 광제산(廣濟山), 산청 벽계(碧溪), 합천 금성산(錦城山)을 거쳐 충주에 도착하게 된다.

 

그 지나는 곳이 강/사/랑의 고향 동네를 비롯하여 평소 자주 오가던 곳에 위치하여 지명이 눈에 익고, 직접 산을 올라가서 현장을 확인한 곳도 여러 곳이다. 남해 금산은 100대 명산 산행하면서 그 산정에서 하룻밤 보낸 곳이고, 망이산은 한남금북정맥 종주하면서 올랐던 곳이다. 또, 광제산이나 망진산은 고향 동네에 있으니 어릴 적에 수 차례 드나든 곳이기도 하다.

 

특히 광제산(廣濟山)은 고향 선산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어린 시절 뜻 모르고 몇 차례 오른 곳인데, 당시는 봉수대의 흔적만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세월 흘러 산꾼이 되어 이 땅 곳곳의 산들을 누비고 다니던 차에 문득 광제산 봉수대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광제산은 진양기맥(晋陽岐脈)의 주요 산 중 하나라 이 땅 백두대간의 큰 맥이 이어진 산이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위기를 알리는 봉수대가 있는 곳이니 낮은 산이나마 의미는 높은 산이다. 그러니 그 산정에서 하룻밤 보내며 그 정기와 합일(合一)을 도모해 봄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정말 오랜만에 고향 동네의 산을 찾기 위해 무거운 등짐을 둘러메고 집을 나서게 되었다.

  

 


뜻밖의 고행(苦行)!!


일시 : 2015년 4월 11, 12일. 흙과 해의 날.
세부내용 : 
주차장 ~ 소류지 ~ 농로 ~ 들머리 ~ 광제서원갈림길 ~ 덕곡마을갈림길 ~ 광제산 봉수대/야영 ~ 면사무소갈림길 ~ 집현산갈림길 ~ 약샘 ~ 주차장.  

 

고향을 떠난 지가 삼십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다 보니 고향에서 살았던 세월보다 타향에서 산 세월이 더 길다. 게다가 고향이 워낙 멀다 보니 일년에 한두 번 이상 찾기도 어렵다.  

 

그래도 선산이 고향에 있고, 벌초나 시제 모시러 가는 것은 빠지지 않았으니 고향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평소 효성스런 인물이 못되어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님 산소를 정해진 행사 때 외에 따로이 찾는 일은 드문 편이었다.

 

그러던 차 문득 마눌이 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올리러 가자고 제안을 한다. 나름 윗어른들께 감사드릴 일도 있고, 기원드릴 일도 있었나 보다. 마침 일요일이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이라 형에게 술 한 잔 올리는 것도 좋을 듯하여 얼른 짐을 챙겼다.

 

하지만 우리 고향 진주는 참으로 멀다. 천리 먼길 진주이니 그러하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주말 정체 겪으며 도착하니 이미 점심 때가 넘었다. 




광제산/廣濟山

높이 420m로서 진주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인 덕유산에 뿌리를 두고 금원산, 황매산을 거쳐 집현산을 일구었고 서쪽으로 부드럽게 뻗어나가 봉우리를 이룬 산이다. 산세는 진주 시내에 있는 숙호산으로 이어져 이현, 신안, 평거, 판문동 일대를 감싸고 있다. 전형적인 흙산이어서 경사가 완만하며, 토종 소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가족 단위의 등반객이 많다. 현재 11개의 등산로가 30여 개의 안내판과 함께 설치되어 있는데, 4km에서 20km까지 길이가 다양하여 체력과 시간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다. 집현산을 횡단하는 왕복 30km의 산악마라톤코스도 유명하다. 그다지 높지 않으나 남쪽의 남해바다와 북쪽의 덕유산 자락이 보일 만큼 주변 시야가 넓어 조선시대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의 봉수대는 전국의 5개 직봉 중 동래 다대포진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간봉으로, 남쪽으로는 남해 금산→창선 대방산→사천 각산→사천 안점→진주 망진산, 북쪽으로는 산청 신안 벽계봉수대→합천 금성산→충주 망이산으로 이어진다. 봉수대는 윗부분이 무너진 것을 제외하고는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어 1997년 경상남도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무너진 돌더미를 사용하여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광제산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고향 선산에 올라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부모님, 형을 비롯하여 고모님과 삼촌 두 분까지 모두 찾아 뵈었다. 이런 제안을 해 준 마눌이 기특하였다.

 

 

 

# 우리 선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광제산 종주 등산로가 나타난다. 그 길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마눌이 거꾸로 광제산을 먼저 올라 그 곳에서 일박한 후 뒷날 좀 길게 걷자고 한다. 그리하여 선산에서 하산하여 다시 차 몰고 북상하여 광제산 주차장으로 바로 갔다.

 

 

 

# 광제산 아래 홍지동 주차장이 넓다. 깔끔한 화장실도 갖추고 있다. 나는 우리 동네의 이렇게 잘 가꿔진 등산시설은 처음 본다. 우리 어릴 때는 꿈도 못 꾸던 시설들이다.

 

 

 

# 어느 먼 곳에서 온 듯한 산악회에서 산행을 마치고 뒷풀이가 한창이다. 여인들의 조심성 없는 웃음소리와 남자들의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낭자하다.

 

 

 

# 종주코스는 10km가 넘는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2km, 다시 그곳에서 면사무소까지 10km 거리이다. 대형배낭 차림으로는 제법  먼 거리이다. 지도 하단의 종주코스 끝무렵에 우리 선산이 있다. 내일 걸을 거리가 꽤 된다.

 

 

 

# 주차장 앞에 있는 소류지에 꽃비가 내렸다. 지금 이 저수지는 꽃그릇이 되었다.

 

 

 

# 그 광경이 이뻐 한참을 구경하였다. 이곳이 남쪽나라는 분명하다. 서울은 아직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이곳은 벌써 낙화 중이다. 물에서 꽃향기 날 것 같은 분위기다. 한 잔 떠 차를 끓이면 곧바로 꽃차가 되리라.

 

 

 

 

 

 

# 한참을 꽃구경하다가 짐 챙겨 주차장을 떠났다. 소류지 곁으로 등로가 열려 있다.

 

 

 

 

# 벌써 계절이 이렇게 깊어졌다.

 

 

 

# 어따~ 그 팀들 뒷풀이가 요란타~

 

 

 

# 농로를 따라 길게 올라 가니 본격적인 들머리가 나온다.

 

 

 

 

 

# 곧바로 한차례 오름질이 시작된다.

 

 

 

# 능선에 올라 그 경사를 따라 곧장 정상을 향한다.

 

 

 

# 시작부터 제법 경사가 가팔라 산길은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 광제산은 소나무숲으로 유명한 산이다.

 

 

 

# 솔갈비 등로에 가득해 푹신하고 좋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솔향기 올라온다.

 

 

 

# 숲속엔 솔향기 가득하다.

 

 

 

# 올해 초 강릉 안인진의 괘방산에서 이런 솔향기를 실컷 맡았었다.

 

 

 

# 봉우리 하나를 넘어 내리면 숲 너머로 가야 할 봉우리가 우뚝하다.

 

 

 

# 그 내리막이 광제서원 갈림길이다. 저곳 광제서원은 내 고교시절 방자했던 청춘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 따뜻한 이 남쪽나라는 계절이 빨라  진달래가 벌써 꽃을 다 떨구고 잎만 남았다.

 

 

 

# 그래도 연초록 새잎이 돋아나는 이 계절의 숲이 정말로 좋다.

 

 

 

 

# 4월말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산벚나무가 벌써 꽃을 피웠다.

 

 

 

# 솔향기와 연초록 잎들이 풍기는 새봄의 향기가 어우러져 이곳 숲속은 싱그러움 그 자체이다.

 

 

 

# 아직 제대로 된 진달래 구경도 못했는데 이 동네는 벌써 끝물이다.

 

 

 

# 역시 만춘(晩春)이 되어야 꽃을 볼 수 있는 매화말발도리도 이곳에서는 벌써 꽃을 피웠다.

 

 

 

# 윗쪽으로 오를수록 경사는 점점 더 가팔라진다.

 

 

 

# 덕곡마을 갈림길을 만났다. 저 마을엔 정말 친했던 친구들이 살았다. 우리 집 드나들 듯 했던 곳인데, 고향 떠난 이후 한 번도 가 보질 못했다. 그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어졌고...

 

 

 

# 그런데 오름 도중에 마눌이 갑작스레 복통을 호소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 된 듯하단다. 복통과 두통을 함께 겪더니 급기야 토하기까지 한다. 식중독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속이 별로 좋지 못하다. 마눌처럼 복통이 오거나 토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속이 거북하고 답답하다.

 

 

 

# 증상이 심하면 하산하자고 권해 본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그냥 하산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일단 정상까지 가보자 한다. 그러면서도 많이 힘들어 하고 중간중간 토하기도 한다.

 

 

 

# 일단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낮은 산이니 증상이 심해지면 그때 하산하여도 될 일이다. 

 

 

 

# 정상 부근에는 진달래가 만발하다. 불과 400 미터의 산이고 산 아래와 이삼백 미터의 고도차인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

 

 

 

# 마눌의 식중독 증상 때문에 시간 지체가 있었다. 정상에 이르니 이미 해가 많이 기울었다.

 

 

 

# 정상에는 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 그 뒷쪽에 정상이 있고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 전방으로 조망이 훌륭하다.

 

 

 

# 미세 먼지 때문에 깨끗한 조망을 보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 진양호의 수면이 노을빛에 물들고 있다.

 

 

 

# 덕곡리, 관지리 일대와 그 뒷쪽의 진주 시가지가 보인다. 그 뒤에 이곳과 상응(相應)하는 망진산 봉수대가 있다.

 

 

 

# 월아산의 모습이 보인다. 저 두 봉우리 사이로 달이 뜨고 진다. 그래서 우리는 저 산을 달음산이라 불렀다.

 

 

 

# 중앙 12시 방향 끝에 내가 나고 자란 고향집이 있다.

 

 

 

# 우측에서 중앙을 거쳐 좌측으로 이어지는 저 산줄기가 광제산 종주 길이고 진양기맥 길이기도 하다.

 

 

 

# 예전 봉수대를 복원하기 전에 세워진 안내판인 모양이다.

 

 

 

# 홍지주차장에서 2km를 올라 왔고 면사무소까지 가야 할 길은 10km가 남았다.

 

 

 

# 내일 귀경길이 멀고, 아직 해도 남아 있는 상태라 좀 더 진행을 했으면 한데, 마눌은 도저히 더 못 가겠다 한다.

 

 

 

# 면사무소 방향으로 좀 더 진행하면 텐트 치기 좋은 데크가 있고, 이곳 정상은 아침 일찍 올라 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웬만하면 가보자고 권유하는데 요지부동이다. 식중독 증세가 의외로 심한 모양이다. 복통, 두통에 오한까지 생긴다고 한다. 결국 이곳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 더이상 진행을 포기하고 느긋하게 정상 구경을 한다. 가만보니 이곳 봉수대는 엉터리로 복원을 하였다. 원래 봉수는 5거수(五炬數)의 원칙으로 연락하였다. 평상시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가까이 접근하면 3거, 바다에서 우리 병선과 조우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상륙하거나 접전하면 5거를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봉수는 불 피우는 화덕이 세 곳 뿐이다. 적의 침범이나 접전상태를 알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왕 복원을 하려면 정확한 고증을 거쳐 할 일이다.

 

 

 

 

# 북동쪽으로 집현산이 건너다보인다.

 

 

 

# 저 산 임도 윗쪽에 고조부님 산소가 있다. 저 임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벌초나 성묘하러 가는 길이 완전히 하루치의 산행이었다. 아래에 보이는 저 마을에서 길이 끝나기 때문에 이후는 두어 시간 산속을 걸어 올라야 했다. 지금은 임도가 있어 산 중턱까지 자동차로 접근이 가능하다.

 

 

 

# 진양호. 예전 학교 다닐 때 나는 낚시에 미쳐 있었고, 저 호수에 들어가면 일주일씩 머물며 낚시를 하곤 했다.

 

 

 

# 사천 와룡산이 미세 먼지 때문에  희미하게 보인다.

 

 

 

#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 진양호 곁에 있는 대평면의 모습이 보인다. 저곳은 굵고 맛난 무가 유명하다.

 

 

 

# 산첩첩하다.

 

 

 

# 저 첩첩 산그리메 뒤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했는데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된다.

 

 

 

# 월아산이 노을빛에 물들고 있다. 몇 해 전 가을 저 산 우측 봉우리인 장군봉에서 하룻밤 머물며 달빛 구경을 했었다.

 

 

 

# 마눌이 오한으로 떨고 있어 얼른 집 한 채 짓고, 매트 바람 넣은 후 침낭을 깔아 주었다.

 

 

 

# 그리고 나는 일몰을 감상했다.

 

 

 

 

 

# 계획했던 곳에서의 야영은 아니지만, 이런 일몰을 볼 수 있어서 나름 행복하였다.

 

 

 

 

 

 

# 지리 주능 너머로 하루 일을 마친 해가 넘어 가고 있다.

 

 

 

# 맑고 청명한 날이 아니어서 황홀한 노을빛의 일몰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일몰을 감상하였다.

 

 

 

# 해가 넘어 가고도 오랫동안 주위는 밝다.

 

 

 

# 너무 오래 밖에 있었더니 한기가 든다.

 

 

 

일몰 감상하고 텐트로 돌아왔다.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한기가 든다. 얼른 옷 벗고 물티슈 목욕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눌은 침낭 속에 들어가 꼼짝 못 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저녁 끓여 먹을 시간이지만, 마눌의 상태가 저러니 일단 한숨 자기로 했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 보는데, 갑자기 속이 답답해지며 욕지기가 치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두통과 오한이 동반된다. 산을 올라오면서 마눌이 겪었던 증상이 그대로 나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좀 전에 찬바람을 너무 오래 맞고 있어서 그런지 뒤늦게 식중독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속은 계속 메슥거리고 오한이 들어 덜덜 떨리고 춥다. 옷을 있는 대로 모두 꺼내 입고 침낭 속에 들어갔다. 핫팩까지 터뜨려 안아 보지만 추위를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앓았나 보다. 한 잠 자고 난 마눌은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는데, 뒤늦게 증세가 시작된 나는 아픔을 견디기가 어렵다.

 

급기야는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근육통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속은 계속 메슥거리는데 토해지질 않는다. 시원하게 토해 버리면 증세가 좀 나아지련만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 하고 잠도 거의 못 자고 밤새 끙끙 앓았다. 그동안 십여 년 넘게 산을 다니면서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밤은 또 얼마나 길던지...

 

길고 고통스런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점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못했지만 배가 전혀 고프지 않다. 마눌은 하룻밤 자고 난 뒤 많이 안정이 되었는데, 나는 복통이 여전하다. 한기나 두통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근육통은 남아 있다. 마눌처럼 시원하게 토해버렸으면 안정이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후유증이 계속 남은 모양이다.

 

 

 

# 밤새 앓고 나서 아침을 맞이했다. 텐트 문을 여니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 어제 우리가 동향으로 집을 지었더니 대문 열자 바로 일출을 볼 수 있다.

 

 

 

# 한기는 많이 가셨지만 침낭 속의 따스함이 좋아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일출을 감상했다.  

 

 

 

 

# 그러다 본격적인 일출 영접을 위해 텐트 밖으로 나왔다.

 

 

 

# 서남 방향의 조망. 천천히 잠에서 깨고 있다.

 

 

 

# 진양호 너머에 우뚝한 저 산줄기는 아마도 위치로 보아 호남정맥의 마지막 산줄기인 듯하고 우측에 솟아 있는 산은 백운산이지 싶다.

 

 

 

# 의령 자굴산 우측 산줄기 위로 아침 해가 솟고 있다.

 

 

 

# 의령의 백화산이나 함안의 방어산쯤 될 것이다. 나중에 확인하니 백화산이 맞다.

 

 

 

# 식중독으로 인한 복통과 근육통은 남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황홀한 일출은 그런 잡스런 고통 쯤은 모두 잊게 만든다.

 

 

 

# 느닷없는 식중독으로 잠 한숨 못 자고 끙끙 앓아 황당하였으나 이 아침 일출감상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 불덩이로 솟아 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두 손 모아 기원을 올리고, 팔 벌려 그 기운을 양껏 받아 본다.

 

 

 

# 따뜻한 이 남쪽 나라는 계절이 빨라 산벚나무가 벌써 산 속 이곳저곳 무리지어 피었다.

 

 

 

# 봉수대 안내판에 아침해의 붉은 기운이 서렸다.

 

 

 

# 마눌의 고집으로 이곳에 설영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 집현산도 잠에서 깨어 났다. 재미있는 것은 저 집현산을 우리 동네에서는 사투리 소리나는 대로 불러 '칠팽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 저 산에서 이곳 광제산으로 진양기맥이 이어지고 있어서 조만간 다시 이 산줄기를 걸어야 한다.

 

 

 

# 의령 자굴산.

 

 

 

# 월아산도 수묵담채의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 사천 와룡산. 저곳도 야영계획지 중 하나이다.

 

 

 

# 진양호 일대.

 

 

 

# 대평면.

 

 

 

# 서북쪽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 지리산 웅석봉의 모습이다. 언젠가 웅석봉에서도 하룻밤 보낼 계획이다.

 

 

 

# 지리 천왕봉이 오늘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아~ 지리산!

 

 

 

 

# 봉수대 전방의 조망을 파노라마로 찍어 보았다. 이곳 광제산은 높이가 420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사방으로 완전히 조망이 트여 있다. 이곳에 봉수대를 조성한 이유를 정상에 서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고향집 뒤에 있는 이 광제산에서 산꾼의 모습으로 하룻밤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일 참 알 수 없다. 예전 내가 이 동네에 살 때는 세상이 다 아는 광(狂)적인 낚싯꾼이어서 지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저 산줄기를 타고 면사무소까지 갈 생각이다.

 

 

 

# 해가 오르고 기온도 올라 어느새 조망이 뿌옅게 흐려졌다.

 

 

 

# 참으로 힘든 밤을 보냈지만 기념촬영은 해야지...

 

 

 

 

# 둘이서 밤새 끙끙 앓았던 광제산 정상을 떠난다. 산복사꽃 예쁘게 피어 있다. 어쨌거나 경치 좋고 조망 좋은 산이었다.

 

 

 

# 밤새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무사히 아침을 맞게 해 준 광제산 산신령께 감사드리고 정상을 떠났다. 사실 간밤에 너무 아파 119를 부를 뻔 했다.

 

 

 

# 일단 욕심은 처음 계획대로 면사무소까지 길게 종주를 할 작정이다.

 

 

 

# 하지만 배낭 둘러메고 채 열 걸음도 걷지 않고 그 계획을 포기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배가 뒤틀리고 통증이 오는 것이다. 게다가 어제 점심 이후 쫄쫄 굶었더니 30kg 배낭이 너무 무겁다. 음식을 끓여 먹지 않아 배낭 무게가 전혀 줄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면사무소 쪽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약샘 거쳐 홍지동주차장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 하산 거리는 어제 올라 온 거리와 동일하다.

 

 

 

# 봉수대와 작별한다. 다음에 진양기맥 할 때 다시 오리다.

 

 

 

# 잠시 내리면 집현산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진양기맥 길인 집현산 가는 길이다.

 

 

 

# 우리는 약샘 방향으로 우틀.

 

 

 

# 제법 길게 아래로 내려 가면 등로 우측에 약샘이 있다.


 

 

# 식중독이 말끔히 낫길 기원하며 시원하게 한 잔 마셨다.

 

 

 

# 아랫쪽에는 벌써 철쭉이 피었다.

 

 

 

# 아직 진달래 구경도 못했는데 이 동네는 벌써 철쭉의 계절이다.

 

 

 

# 아직 남아 있는 복통과 무기력한 기운 때문에 하산길이 제법 힘들었다. 마눌은 이 동네의 풍광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우리 어릴 때는 여기를 산골짜기라고 멸시했는데, 세월 흐르니 풍광 좋은 귀촌(歸村) 후보지가 된다.

 

 

 

# 주차장으로 복귀했다.

 

 

 

# 이후 진주 시내로 이동하여 중앙시장에 있는 제일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속을 달랬다. 딱 만 하루 만에 먹는 음식이다.

 

 

 

광제산은 고향 선산에서 산길로 연결되어 있는 산이다. 진양기맥이 지나는 곳에 위치해 있어 기맥 종주할 때 지날 작정이었다. 하지만 마눌의 성묘 제안으로 성묘와 겸해서 하룻밤 그 산정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은 음식이 탈이 나서 둘 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밤을 그 산정에서 보내야 했다. 정말 뜻밖의 고통이었다. 그동안 숱한 밤을 이 땅의 여러 산정에서 보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게다가 그 낯선 경험이 고향 땅에 있는 광제산정이었으니 그 경험이 더욱 생경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광제산은 사방으로 막힌 데 없이 시원하고 장쾌한 조망을 보여 주었고, 화려하고 숨 막힐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 황홀하고 아름다운 일몰과 일출을 골고루 보여 주었다. 그러면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한편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안위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워 보이는 요즘, 우리 선조들이 국가의 방위를 위해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수천 년 유지해 온 봉수제도를 보면서 평상시의 예방과 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봉수제도는 우리 땅 어느 곳이든지 외적의 침입을 12시간 내에 중앙으로 전송할 수 있게 설계된 제도이다. 하지만 그 좋은 설계와 제도가 막상 임진왜란 같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그것은 외딴 산속에 언제 있을지 모르는 변란에 대비하여 병력과 물자를 상시 운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관이나 민 모두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좋은 제도를 갖춰 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탓이다.

 

수백 년 세월 흘렀지만 세상사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온갖 사건사고와 외침같은 국난의 위협 속에 늘상 노출되어 있는 것은 법이나 제도의 미비 때문이 아니다. 비용 때문에, 일일이 챙기기 귀찮아서, 먹고 사는 일에 비해 중요성이 밀려 정작 중요한 안전과 국난에 관한 일을 미뤄 두고 있는 탓이다.

 

이제라도 정부와 민간 모두가 평소에 국난에 대비하는 자세를 공유하고 국가적 재난에 예방 및 대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세월 흐르고 기술 문명 발달하여도 사람 사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법이다. 광제산정에서 하룻밤 보내며 스쳐 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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