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야영산행]중미산/仲美山 - 겸양지산(謙讓之山)!! 본문
오경 중 유일하게 경(經)이 아니라 기(記)라고 이름 지은 것은 이 책이 예(禮)에 관한 경전을 보완하고 주석(註釋)하였기 때문이다. 예기는 따로이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라고 불렀다. 예(禮)에 관한 기록의 모임이다. 예(禮)에 관한 해설서인 이 책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 말기에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시대까지의 예(禮)에 관한 학설을 모아 해설하고 있다. 예기에서 다루는 것은 의례의 해설만이 아니었다. 음악ㆍ정치ㆍ학문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예의 근본정신을 집대성하여 서술하였다.
예기 단궁편(禮記 檀弓篇)에 이런 글이 나온다. "幼名 冠字 五十以伯仲 死諡 周道也 (유명 관자 오십이백중 사시 주도야 ; 아기 때 이름을 짓고 관례 때 자를 짓는다. 오십 세가 되면 자 위에 백ㆍ중 등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고, 죽으면 시호를 내린다. 이것이 주나라의 법도이다.)"
그 글의 내용은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관례를 올린 후 성인이 되고 늙어 죽을 때까지의 각 과정에서 이름을 분명히 하는 법도를 규정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오십 세가 되면 자(字) 위에 형제의 순서를 나타낸다고 되어 있다. 그 예로 '백(伯)'과 '중(仲)'을 말하였다.
이에 숙제도 형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형을 따라 도망쳤다. 그 나라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中子)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 백이와 숙제는 제후국인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천자국인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것이 부자지간의 예의(禮儀)와 군신지간의 의리(義理)를 허무는 행위라 만류하다가 목숨을 위협받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나물을 캐 먹고 살다가 죽었다.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鄒邑)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다. 아버지 이름은 숙량흘(叔梁紇)이다. 숙량흘은 나이 64세에 10대 소녀인 안씨(顔氏)의 딸 징재(徵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노나라 양공 22년이다. 기원전 551년 음력 8월 27일이고 양력으로는 9월 28일이다. 안징재가 공자를 낳고 보니 머리 정수리가 낮고 사방이 높았다. 그래서 이름을 언덕을 나타내는 '구(丘)'라고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이다.
이것은 동양사상의 종주(宗主)인 공자의 출생(出生)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공자는 야합(野合)에 의해 태어났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아 아버지 무덤을 몰랐다"고 적고 있다.
성현(聖賢)으로 추앙받는 공자의 출생이 평탄치 않았음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에서 공자가 둘째 아들이라 중니(仲尼)이고,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은 형제 중 셋째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백중숙계(伯仲叔季)'로 형제의 순서를 나타냈다. 백중숙계는 그 뜻이 '맏 백'ㆍ'버금 중'ㆍ'셋째 숙'ㆍ'끝 계'로써 사 형제의 순서를 차례로 구분하는 단어이다. 만약 형제가 넷을 넘어가면 중(仲)과 계(季) 사이에 여러 명의 숙(叔)을 두는 식으로 호칭을 해결했다. 일숙, 이숙, 삼숙... 하는 식이다.
'맏 백(伯)'은 사람 인(人)과 흰 백(白)을 합한 글자이다. 머리 흰 사람은 나이가 많다는 뜻이다. 곧 맏이를 가리킨다. '버금 중(仲)'은 가운데(中)에 서 있는 사람(人)이다. 둘째를 말한다. '아재비 숙(叔)'에서 숙(叔)은 '손(又)으로 콩(尗)을 줍는다'라는 뜻이다. '작다'라고 풀이되어 셋째를 의미한다. '끝 계(季)'는 어린아이(子)가 벼 이삭(禾)을 들고 있는 모양이다. 어려서 어른들 추수할 때 고작 벼 이삭이나 줍고 있는 모양이다. '막내'를 뜻한다.
주나라의 종법(宗法)을 계승한 동양에서는 '맏이(伯)'의 권위(權威)가 대단하였다. 장자승계(長子承繼)의 원칙에 따라 나라나 가문의 적통(嫡統)이 장자 혈통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가 늘 우수한 것은 아니어서 둘째가 혈통을 잇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허다하였다. 그럴 때면 백(伯)과 중(仲)은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 힘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면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결판이 났지만, 그렇지 않고 두 진영(陣營)의 힘이 비슷하면 그 피해는 두 세력뿐 아니라 가문이나 나라 전체에 재앙(災殃)이 되었다. 이른바 '백중지세(伯仲之勢)'이다.
'중(仲)'은 원래 버금감을 의미한다. 형제 중에서는 둘째를 나타낸다. 그러나 가만히 이인자로써 만족하지 않을 때도 있는 와호장룡(臥虎藏龍)의 의미도 가진다. 그것이 중(仲)이 가지고 있는 함의(含意)이다. 경기도 가평 설악면과 양평 서종면의 경계에는 통방산, 삼태봉, 유명산 같은 빼어난 산이 많다. 산세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문명 발달한 지금도 개발이 더디다. 덕분에 아직도 물 맑고 산 푸르다. 하지만, 산이 아무리 높아도 산과 산 사이에는 잘록한 고개가 있기 마련이다. 그 고개를 통해 산속에 둥지 틀고 살던 사람들은 산 너머 이웃과 소통(疏通)하였다. 설악과 서종의 잘록이 고개로는 선어치 고개와 농다치 고개가 유명하다. 둘 다 깊은 골짜기를 휘휘 휘감아 산을 넘고 가평과 양평으로 혹은 더 멀리 한양으로 연결하였다. 그 두 고개를 사이에 두고 유명산과 마주한 산 하나가 우뚝하다. 그 이름은 '중미산(仲美山)'이다. '중미(仲美)'라는 이름은 두 번째로 빼어난 산이란 뜻이다. 원래 사람이나 산이나 이름만으로는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빼어나다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천황(天皇), 천왕(天王), 최고(最高), 천자(天子), 극정(極頂) 등 최고를 뜻하는 이름으로 자신이 가장 빼어나다 자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스스로 최고가 아니라 버금간다고 조심스레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겸손한 산이다.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아우성인 이 시대에 "난 최고는 아니에요."하고 겸양(謙讓)의 뜻을 나타낸다는 것이 참으로 신선하다. 하지만, 이 산 이름의 유래를 찾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산이 중미(仲美)인 이유는 이 산이 금강산(金剛山) 다음으로 빼어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기록되어 있다. 아! 단순히 겸양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천하절경 금강산을 제외하면 내가 제일 잘 났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역시 버금 중(仲)이다. 중(仲)은 단순한 둘째가 아니다. 언제든지 첫째이고 싶어 하는 둘째인 것이다. 와호장룡이다. 중미산은 그런 산이다.
겸양지산(謙讓之山)!! 일시 : 2017년 6월 3, 4일. 흙과 해의 날. 지난 주 월악(月岳)에서의 산행이 너무 힘들었다. 이틀 동안 가파른 암릉길과 끝도 없는 계단길에서 고생하였다. 맨몸으로도 쉽지 않은 길을 무거운 야영짐을 지고 오르내렸으니 더욱 그러하다. 산행내도록 힘겨워 하던 마눌은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며칠동안 근육통 때문에 고생하였다. 주말이 가까워지자 어느 정도 근육통은 사라졌지만, 힘든 일정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주는 최대한 운행거리를 줄이고 편안하게 쉬었다 올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과 가평의 보납산 등을 고민타가 문득 몇 년 전 비오는 날 갔던 소유곡 생각이 났다. 소유곡은 양평 명달리에 있는 계곡이다. 벽계구곡 상류에 있는 오지(奧地) 마을로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깨끗하고 고요한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통방산과 삼태봉, 그리고 중미산에 둘러 싸여 있어 깊고 고요하며 한적하다. 몇 해 전 초여름 비소식 있는 날에 소유곡과 중미산을 목표로 그 골짜기를 찾았다. 마침 쏟아지는 비 때문에 중미산 산행은 못했지만, 소유곡에서의 야영은 고요하고 안온하여 정말 환상적이었다. 소유곡은 요순시대의 현자(賢者)이자 은자(隱者)인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머물고 간 곳이란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골짜기이다. 그만큼 한적하고 고요하다는 얘기이니 힘든 야영산행 도중 하룻밤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게다가 지난 번 실패했던 중미산 산행까지 연계하면 금상첨화일 터이다. 이런 계획을 들은 마눌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야영짐 무게는 힘들고 싫지만, 좋은 숲속에서의 하룻밤은 포기할 수 없는 기쁨으로 자리잡은 모양이다. 잘 하였다. 고요한 숲속 야영의 즐거움을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은 어찌 알겠는가? 짐 꾸리세!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간 사람 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찾아 가세! 중미산/仲美山
<이곳저곳>
# 2014년 여름에 다녀 갔으니 꼭 3년 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섰다. 명달리 저 골짜기 안쪽에 기가 막힌 잣숲 야영지가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떼야영과 소란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출입을 막았다는 소식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OECD 국가라고 하지만, 우리 국민성은 아직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공중도덕, 타인에 대한 배려, 자제력, 자율성 등등 이런 문명 사회의 시민의식 같은 것은 아직 요원하다. # 전방으로 삼태봉이 우뚝하다. 삼태봉은 명달리쪽으로 가파른 경사도를 가진 산이다. 몇 해 전 통방산 거쳐 저곳 삼태봉으로 하산하였는데, 그때 그 가파름을 경험하였다. # 야영지까지 거리가 짧은 곳이다. 길도 좋은 곳이고. 그것 믿고 집에서 출발이 너무 늦었다. 들머리 진입할 때 시각이 이미 오후 네 시가 가깝다. # 아무래도 내가 이번 산행을 너무 안일하게 준비한 모양이다. 산행보다는 마눌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많았던 탓이다. 출발하면서 보니 카메라를 집에 두고 챙겨오지 않았다. 나는 산행하면서 늘 크고 무거운 DSLR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 눈에 잘 띄고 큰 카메라를 잊어버리고 온 것이다. 십 수년 산행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때문에 이번 산행에서는 낡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전체적으로 사진이 흐릿하고 구도가 한정적이다. # 차량 차단봉을 지나 임도에 들어섰다. # 넓고 편안한 임도를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지난주 월악에서는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길이 앞을 막았다. 참으로 대조적이다. # 삼태봉 전위봉이 구름 모자를 쓰고 있다. 뾰족한 정상은 앞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삼태봉 산행을 마친 산객 한 팀이 하산하고 있다. 우리 야영짐을 보고 많이 부러워했다. # 하산하는 팀과 인사 교환하고 우리는 소유곡을 향해 계속 올라갔다. # 계곡을 따라 몇 굽이 올라가면 숲에 가렸지만 쉬기 좋은 곳이 한 곳 있다. 저곳은 늘 눈으로만 구경한다. # 자동홍수경보장치가 있는 다리를 통과. # 올해 우리나라는 엄청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봄 내도록 비 구경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전국 곳곳이 바짝 말랐다. 월악은 큰 산이다. 하지만 지난주 월악에서는 계곡에 물 한 방울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 소유곡은 여전히 맑고 깨끗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저멀리 중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정면으로 보고 진행한다. # 중간중간 꽤 깊어 보이는 소(沼)가 있다. # 이 동네도 가물기는 하였다. 물 흐르던 곳에 억새 군락이 자리잡았다. # 아직은 경사 급하지 않으니 콧노래 부르며 갈 수 있다. # 사람 손 덜 타는 곳이라 임도 중간중간 두릅, 취 등을 구경할 수 있다. # 임도가 휘감는 곳에 계곡 갈림길이 있다. # 이곳에서 계곡 건너 고개로 올라가면 삼태봉 거쳐 통방산으로 이어진다. # 이 근처 숲에도 어디 쉴 곳이 있나 싶었다. 마눌이 주변 탐색한다고 계곡을 먼저 건너 갔다. # 우측 숲에 소나무 우거진 곳이 있어 혹시나 해서 들어가 봤다. 나도 곧 뒤따라 갔는데 소나무숲이 있긴 하지만 잡목 우거져서 야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 마땅치 않은 곳이라 계곡 건너 임도로 복귀했다. # 먼저 계곡을 건너 임도에서 마눌을 기다리는데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아뿔싸~ 손에 들었던 스틱과 좀 전에 땄던 나물 등을 집어 던지고 얼른 뛰어갔다. 우려대로 마눌이 바위에 쓰러져 있다. 흔들리는 바위를 밟은 모양이다. 손에 쥔 스틱이 흔드리는 바위에 끼면서 앞으로 넘어진 것이다. 배낭 벗기고 급히 일으켰다. 손, 얼굴 등은 다친 곳이 없는데 넘어지면서 양쪽 무릎을 바위에 찧었다. 두 무릎에 모두 상처가 나고 피멍이 들었다. 다행히 깊이 다치지는 않은 듯한데 상처가 나서 쓰라리고 아파 보인다. 상처 닦아내고 밴딩하였다. 상처보다 놀란 마음 진정시키는 것이 더 힘들었다. 넘어지는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스틱이 완전히 두 동강이 났다. # 놀랜 마눌 달래며 한참 쉬었다. 어느 정도 진정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부러진 마눌 스틱은 배낭에 매달고 내 것을 들려 주었다. 다행히 무릎 안까지 다친 것은 아닌 듯 쓰라리고 아프기는 해도 걷는 데는 지장이 없다. # 잠시 더 올라가면 소부와 허유가 쉬었던 곳이 나온다. # 이 인근에서 가장 넓고 깊은 소(沼)가 있는 곳이다. # 이곳은 3년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하다. # 그 인근에 있는 야영 싸이트도 여전한 모습이다. # 근처 숲속에 무거운 야영짐을 숨겼다. 이번 산행의 주산(主山)인 중미산을 오르기 위해서다. 숲길에 이름 모를 새의 둥지가 있다. 봄철 새끼 다 키워내고 버려진 빈집이다. # 산행에 필요한 간단한 물품과 귀중품만 따로 공격용 배낭에 챙겼다. 어둠에 대비해 헤드랜턴도 준비했다. 우리가 야영지를 떠나 중미산으로 출발한 시각이 이미 다섯 시 칠 분이다. 잘못하면 야간 산행을 할 수도 있겠다. # 등짐 가벼우니 발걸음 날라간다. 이렇게 가볍게 산길 걸을 수 있는데, 우리는 맨날 산더미만한 등짐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간다. 의식주 모두를 등짐에 담았기 때문이고 그 등짐 덕분에 산중 야영이 즐거워지는 탓이다. # 계곡 발달한 산이니 물난리 날 일이 많았나 보다. 자동홍수예경보장치가 상류에 또 설치되어 있다. # 어느새 계절은 찔레꽃 향기 풍성한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꽃향기 맡으며 올라간다. # 상당한 길이의 임도이다. 자전거 타고 한바퀴 돌아도 좋을 길이다. # 개다래의 잎이 하얗게 변해있다. 백화현상(白化現狀)이다. 이맘때 숲속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모습이다. 개다래 잎이 희게 변하는 것은 병든 것이 아니라 잎을 꽃처럼 변화시켜 곤충을 불러 들이기 위한 개다래의 생존방식이다. # 소유곡을 벗어나 삼각골 쪽으로 올라가면 개인 농장 하나와 기도원을 만날 수 있다. # 이 기도원은 첩첩산중 이곳에 자리하였다. 가족 단위로 들어왔는지 아이들 목소리도 들린다. # 임도가 생각보다 꽤 멀다. 명달리에서 삼각골재 고개 위까지 4.5km 거리이다. 마눌은 좀전에 당한 부상때문에 무릎이 완전하지 않다. 많이 아프지는 않아도 시큰거리는 모양이다. 일단 조심하면서 가는 데 까지 가보기로 했다. # 나무 탁자 하나 자리하고 있다. 하늘카페란 거창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 전방에 중미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보인다. # 이 위쪽으로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으니 임도 중앙에 풀이 무성하다. 임도 좌우에는 미역취가 아주 많다. 간혹 취나물과 참나물도 눈에 띈다. 중앙엔 보랏빛 꿀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 길게 걸어 삼각골재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중미산으로 향하는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 699봉으로 오르는 등로는 열려 있는데 중미산 등로가 없는 것이다. 지도를 확인하니 고개를 넘어 휴양림 쪽으로 가야 그곳에서 올라오는 정규 등로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지도상 이곳이 중미산으로 오르는 최단거리이니 등로가 있을 것이다 싶어 수풀을 헤치고 찾아보니 과연 수풀 너머에 희미한 등로가 있다. # 다니는 사람 거의 없어 등로는 점점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길잃지 않게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잡목 자라 앞을 막는다. 하긴 우리처럼 명달리에서 중미산으로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잠시후 능선 우측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난다. 길은 이제 제대로 열려 있다. # 이내 경사가 가파른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마눌은 임도를 오를 때와는 조금 더 힘들게 무릎이 시큰거리는 듯하다. 천천히 조심하며 가세! # 정상에 통신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지도에는 606.6봉으로 적혀 있다. # 이 봉우리는 다시 아래로 잠시 내려야 한다. # 그 안부에 우리가 넘어 온 방향으로 목책을 둘러 길을 막아 둔 갈림길이 있다. # 이곳이 정규 등로인 것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중미산휴양림으로 연결된다. # 정상까지는 1km 남았다. 결국 삼각골재에서 정상까지 1.5km 정도 되는 셈이다. 이곳 갈림길에서 중미산 임도까지는 1.1km 거리이다. 우리가 섰던 삼각골재에서는 휴양림 방향으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하는 길이다. 희미한 숲길 헤치고 온 것이 잘한 일이다. # 지금 숲속은 그늘 짙어 어둡다. 낮은 광량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는다. 기능 약한 휴대폰 카메라의 한계이다. 십수 년 산 다니면서 카메라를 챙겨 오지 않은 것은 또 처음이다. # 움직임 있는 사진은 어김없이 흔들린 결과물을 보여 준다. 지도에 664.3봉으로 표시된 봉우리를 오른다. # 휴양림에서 올라오는 또다른 갈림길이 있다. # 정상부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가팔라진다. 노출된 등로는 다져져서 미끄럽다. # 간혹 취나물이 눈에 띈다. 북사면 숲속을 한 번 뒤져보고 싶었지만 어두워질 것을 걱정하는 마눌 등쌀 때문에 눈에 띄는 것만 몇 개 취했다. # 이 산도 정상부는 암릉으로 되어 있다. # 마지막 정상 진입은 바위 한 번 타 줘야 한다. # 중미산 정상이다. 두 번째 도전 만에 선 정상이다. 해발 834m로 제법 높은 고도를 보인다. 야영지에서 1시간 35분, 삼각골재에서 55분 쯤 걸렸다. # 중미의 정상은 하늘을 향해 열린 좁은 암봉이다. 막힌 것 없어 사방으로 훌륭한 조망을 보여준다. 동남쪽으로 용문산 줄기가 가로누워 있다. # 용문산에서 장군봉 거쳐 백운봉으로 이어지는 용문산 산줄기의 흐름이 장쾌하다. # 그 앞쪽으로 유명산과 소구니산이 보인다. # 동북쪽으로 고압선 철탑이 산맥을 따라 북진한다. 그곳에 우뚝한 산은 629.5m인 장락산이다. # 용문산에서 배너미고개 거쳐 유명산으로 이어지는 한강기맥의 흐름. # 선어치고개에서 가일리로 내려가는 인간세의 길. # 중앙의 소유곡과 삼각형으로 우뚝한 삼태봉, 그리고 바로 뒤의 통방산. 우측에 삼각으로 뾰족한 산은 곡달산이다. 뒤쪽에 가로로 누워 있는 산줄기는 화야산과 고동산이지 싶다. # 용문산 좌측의 산줄기를 파노라마로 그려봤다.(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이번에는 용문산 우측 산줄기이다. 이런 정상에서의 장쾌한 조망 때문에 이 동네 옛사람들은 이 산을 금강산 다음 가는 아름다운 산이라 불렀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정상 뒤쪽에 예전에 세운 정상석이 있다. 중미산은 양평군 서종면과 가평군 설악면이 경계하는 곳이다. 아마 두 지자체에서 각각 정상석을 세운 모양이다. 서로 합의해서 한 곳에서만 세우면 될 일을 쓸데없는 예산 낭비를 하고 있다. # 정상에서 조망 구경하는 동안 오후 일곱 시가 다 되었다. 삼태봉 쪽 조망 구경하면서 그 쪽 산줄기를 타고 야영지로 돌아가는 방안을 고민하는데, 앞쪽 숲에서 산객 한 분이 불쑥 나온다. 휴양림에서 출발했는데 산길로 가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려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 한다. # 산길이 가깝기는 해도 오르내림이 제법 있어 쉽지 않은 길인 모양이다. 마눌의 다리 부상 때문에 좀 멀더라도 임도로 가는 것이 나아 보였다. # 그리하여 노을 지는 정상과 작별하고 왔던 길 되돌아 가기로 했다. # 우리가 가야 할 삼각골재와 그 뒤의 699봉이 역광 속에 검게 서 있다. # 한 가운데 오목한 곳이 소유곡이다. 거리상으로는 우측 산길이 훨씬 가까워 보인다. # 다시 암봉 타고 하산. # 정상 입구에 딱 텐트 한 동 칠 공간이 있다. 이곳에 야영하며 별구경 하는 것도 훌륭해 보인다. #시간 갈수록 광량이 부족하여 사진이 부실하다. # 마눌의 무릎은 하산길이 더 시큰거리고 아픈 모양이다. 무거운 배낭을 진 채로 앞으로 쓰러져 두 무릎이 바위에 쳐박혔으니 이만한 것이 다행일 지경이다. 나는 그때 꽤 멀리 임도에 서 있었는데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동에 비해 지금 부상은 약소하다. 최대한 체중을 스틱에 실어 조심조심 내려갔다. # 휴양림 갈림길을 다시 지나고, # 임도 갈림길도 다시 만났다. # 이쯤에서 숲속은 매우 심하게 어두워졌다. 사진은 노출 조정을 해서 밝게 나왔다. # 그곳 참나무 줄기에 어떤 몰상식한 넘이 담배 꽁초를 비벼 껐다. 요즘 가뭄이 극심하여 온 국토가 바짝 말라 있는 상태이다. 조그마한 화기에도 불이 확 붙을 준비가 되어 있는 숲에서 담배를 피고 그 꽁초를 나무에 비벼 끄다니 이런 인간의 머리 속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열어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 마지막으로 606.6봉 넘어 삼각골재에 복귀했다. 삼각골재의 중미산 들머리는 이렇게 숲에 가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 고개 반대쪽 699봉 들머리는 이렇게 넓고 확실하다. # 어쨌거나 어두워지기 전에 숲을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이제부터는 편안한 임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 마눌은 무릎이 계속 불편한 모양이다. 산행을 다 마치고 나니 오히려 통증이 생긴다 한다. # 아픈 무릎 살살 달래가며 길게 임도를 걸었다. # 그리고 싸이트로 돌아와 얼른 집 한 채 지었다. # 물소리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계곡이 바로 곁에 있어 땀에 절은 몸을 씻을 수 있어 최고의 싸이트이다. 아직 계곡물은 얼음같이 차다. 마눌의 걱정이 많았지만 나는 홀랑 벗고 알탕을 하였다. 계곡물 알탕은 꽤 오랜만이다. 세상 근심과 몸에 절은 피로가 한방에 사라졌다. # 차디찬 계곡물 뒤집어 쓰고 새옷으로 갈아 입으니 날아갈 듯하다. # 의(衣)와 주(住)를 갖췄으니 이제 식(食)을 해결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사 원초적 생존 조건은 모두 해결되는 셈이다. 지난 달 불발현에서 구한 산나물을 한 번 먹을 양만큼 따로 냉장고에 보관했더니 이런 야영지에서 훌륭한 쌈채소가 된다. # 땀 흘린 후 깨끗이 씻고 마시는 이 한 잔의 막걸리가 소소한 행복감의 극치이다. # 숙면의 밤이었다. 아침 새소리 요란하여 일찍 눈을 떴다. 이곳 숲의 아침은 서늘하고 깨끗하다. # 이곳은 비록 산정(山頂)에서 처럼 별구경 달구경하며 보내는 재미는 없지만, 깨끗한 숲바닥과 맑은 계곡을 가까이 하고 있어 또다른 가치가 있는 싸이트이다. # 텐트 문 밖으로 보이는 숲그늘이 싱그럽다. # 지난번 동계야영하면서 잘못하여 텐트 방충망을 태워 먹었다. 텐트 방충망 수선킷을 구입하려 했더니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만만찮다. 다있소 상점에 갔더니 천 원짜리 수선테잎이 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고급품처럼 접착제 바른 모기장이 아니라 모기장 그림을 그린 테잎이다. 조금씩 잘라 앞뒤로 붙였더니 흥부 옷처럼 궁기가 있어 보이는 것이 흠이긴 해도 크게 눈에 거슬리지는 않다. 가성비 좋은 녀석이다. 천 원짜리 하나면 몇 년은 쓸 수 있겠다. # 느긋한 아침이다. 아침 챙겨 먹고 한참을 쉬었다. 보통 때 같으면 오늘 분량의 산행길이 남아 있어 마냥 놀멘놀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임도 따라 잠깐 하산하면 되니 바쁠 일이 전혀 없다. 음악 나지막히 틀어놓고 느긋한 휴식을 오래 취했다. # 오래 쉬었어도 시간은 넉넉하다. 우리가 짐 정리 거의 끝날 때 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절고개를 향해 올라갔다. 산악회에서 통방산 산행을 온 모양이다. 여성들의 호들갑스런 감탄사가 숲을 뒤흔든다. # 정말 좋은 계곡이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매력 넘치는 곳이다. # 한 주일 분량의 집을 지었다 허물었다 우리는 자유자재이다. # 다음을 기약하며 고마운 싸이트를 떠났다. # 그냥 하산하기 아쉬워 절고개로 올라가 봤다. # 절고개 위에도 잣나무 좋은 싸이트가 있다. 경사가 약간 있긴 해도 겨울날 하루 머물기엔 모자람 없어 보였다. # 잠시 숲속 구경을 했다. 아직 남아 있는 두릅, 엄나무, 취 등이 조금은 눈에 띈다. 굵은 덩쿨의 개다래도 하얀 꽃을 이곳저곳 피우고 있다. 그 꽃을 조금 취했다. 집에 돌아와 끓는 소금물에 튀겨 낸 후 말렸다. 나중에 꽃차를 맛볼 작정이다. # 안쪽으로 들어가자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 깊은 산속에 어느 자연인이 홀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 고요 깨기 싫어 숲을 돌아 나왔다. # 짐 챙겨 임도로 복귀했다. 어느새 계곡에 물놀이 나온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 꼬맹이 둘 데리고 온 저 젊은 아빠는 피래미를 몇 마리 잡아 아이들에게 자연공부를 시키고 있다. # 그들과 작별하고 우리는 임도 따라 하산했다. # 어제 큰 사고를 당했던 통방산 갈림길을 지난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아찔한 기억이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살펴보니 마눌 무릎엔 퍼렇고 벌건 피멍이 양쪽 모두 들었다. 몇 달 고생 좀 할 모양이다. # MTB 라이더들이 신나는 임도 하산을 즐기고 있다. # 이 동네는 산악자전거 타기에도 딱인 곳이다. 하지만 자전거는 늘 사고 위험이 상존한다. 나중에 명달리를 떠나면서 보니 한 무리의 단체 라이더 중 몇이 도로에서 슬라이딩 사고를 당해 치료를 하고 있더라. # 뙤약볕 강렬하다. 그 햇볕 맞으며 길게 하산하였다. # 차 세워둔 명달리 삼거리에 도착했다. 간편한 하산이었다. # 삼 년전 그 자리에 서서 같은 포즈로 사진 한 장 남겼다. 나중에 이 곳 사진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보낸 세월의 변천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중미산과 소유곡에서의 야영 산행을 마무리했다. 삼 년 전 비 내리는 날 완성하지 못했던 소유곡 야영과 중미산 정상 등정을 비로소 완성하였다. 삼 년 세월 흘렀어도 이 동네는 여전히 고요하고 한가롭다. 산 푸르고 물 맑은 것도 여전하였다. 아름다운 곳이다. 스스로 최고가 아니라 버금 가는 산이라 겸양의 뜻을 가짐이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다음에 눈 많이 내린 겨울 날 다시 한번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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