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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11구간(쌍령리 입구~광정삼거리)-차령 단상(車嶺 斷想)! 본문

길이야기/삼남길(코리아트레일)

[삼남길]11구간(쌍령리 입구~광정삼거리)-차령 단상(車嶺 斷想)!

강/사/랑 2017. 7. 3. 20:54

[삼남길]11구간(쌍령리 입구~광정삼거리)

 

우리나라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山地)로 구성된 산악국가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빽빽한 산악의 모임인 셈이다. 산악의 모임에도 질서는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산들은 제각각 무질서하게 솟아있지 않고 큰 흐름을 이루어 맥(脈)을 형성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우리나라는 대륙을 향해 포효(咆哮)하는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피와 뼈, 그리고 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국토는 호랑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산맥(山脈)은 호랑이의 뼈대가 되고 물길은 핏줄을 이룬다.


그 뼈와 피, 그리고 살이 모여 용맹한 호랑이가 되었다. 그 용맹한 호랑이의 굳건한 등뼈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국토의 중앙을 남북으로 이어 중심을 이루는 산맥이다. 국토의 중심이라 굳건하고 빼어나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출발하여 1개의 정간(正幹)과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무수한 기맥(岐脈)과 지맥(枝脈)으로 갈래 친다. 이렇게 동맥, 정맥, 모세혈관으로 인체의 혈관망(血管網)이 갈래 치듯 산줄기 또한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전역을 가지 치며 아우른다.


우리 조상님들은 이러한 산줄기 사이사이에 터를 잡아 세세년년(歲歲年年) 삶을 꾸렸다. 산맥의 기운이 높이 솟은 곳에서는 산에서 나는 산림자원을 활용하였고 산맥이 가라앉는 곳에서는 들에 어울리는 곡식을 심었다. 


우리 땅은 백두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이 뼈대를 이룬다. 한반도의 뼈대이니 그 산맥은 높고 험하다. 산맥이 높으면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고 차가운 북풍 한파도 차단된다. 하지만 그 높이 때문에 이웃과의 소통 역시 가로막힌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소통의 존재이다. 산맥 가로막는다고 골짜기에 칩거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의 삶이 산골짜기 안에 국한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산 너머 이웃과의 소통과 교역은 삶의 질을 확장하기 위한 필수적 행위이다. 


산맥 역시 마냥 높기만 한 것도 아니다. 높고 험한 산맥도 군데군데 깊은 골짜기를 산맥 가까이 허락하고 그 골짜기 이어진 잘록이로 낮게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잘록한 고개를 통해 이웃과 소통하고 경제를 공유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수한 인간의 '고개'가 백두대간과 남녘땅 아홉 개의 정맥을 넘고 있다. 진부령, 한계령, 대관령, 추풍형, 괘방령, 하늘재, 죽령, 새재, 이화령, 육십령, 성삼재 등은 백두대간의 고개이고, 석개재, 답운치, 한티재, 황장재, 창수령, 배내고개 등은 낙동정맥의 고개이다.


그러한 큰 고개 중에 '차령(車嶺)'이 있다. 차령은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있는 대표적 고개이다. 금북정맥은 이름처럼 금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는 산맥이다. 안성 칠장산에서 출발해서 천안, 진천, 목천, 성환, 공주, 예산, 청양, 홍성, 서산, 태안을 거쳐 안흥진에서 서해바다로 잠긴다. 도상 거리 280km로 700리에 이르는 긴 산줄기다.


금북정맥이 천안 광덕면 원덕리에서 공주 정안면 인풍리로 넘어가는 높디높은 산마루에 구절양장의 고갯길이 있다. 그 고개가 바로 '차령(車嶺)'이다.


차령의 역사는 깊다.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사(高麗史)'이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太祖 世家) 26년에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가 나온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기팔왈 차현이남 공주강외 산형지세 병추배역)." 훈요십조 팔조에 이르길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의 모양과 땅의 세력이 모두 배역(背逆)하고 인심 역시 그러하니 조정에 등용치 말라는 내용이다.


첫 등장이 아름답지 못한 내용이라 거슬리기는 하지만, 역사의 첫 기록이다. 차현은 차령을 말하고 공주강은 금강을 가리킨다. 태조 왕건은 이 지방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던 모양이다. 짐작컨데는 후백제 세력이 워낙 강하여서 태조의 삼한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고, 통일 과정과 통일 후에도 청주, 공주, 목천 등지에서 반란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왕건의 편견(偏見)과는 별도로 차령은 그의 치세 이후 현재까지 삼남 지방(三南 地方)과 한양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 역할하고 있다. 삼남 지방은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下三道)를 말한다. 예로부터 들이 넓고 물이 많아 물산(物産)이 풍부하였다. 이 물산들은 조세(租稅)나 일반 교역으로 한양에 전해졌다. 삼남의 물산이 한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차령이었다.


진상품이나 조세 오가는 길목이고 한양으로 가는 필수 통로이니 왕래하는 이도 많고 도적도 많았다. 공공 도로이니 역원(驛院)도 필수였다. 차령 직전 고갯마루에 '인제원(仁濟院)'이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했다.


도적으로는 명종 때 안수(安壽)라는 도적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안수는 차령과 쌍령 일대에 웅거하면서 진상품이나 조세를 빼앗았는데, 그 일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도 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의적(義賊)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도적놈수렛길', '장수오줌눈자국' 등 그와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많다.


십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할 때 천안역에서 택시를 타고 차령을 찾아갔었다. 천안에서 차령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가는 동안 나이 지긋한 기사님의 옛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의 기억에는 육칠십 년대까지 차령에는 도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천안에서는 호남지방에서 쌀을 조달했는데 털털거리는 GMC 트럭에 쌀을 가득 싣고 차령을 넘자면 거의 기어가는 수준으로 고개를 올라야 했다. 그때 도둑들이 산모퉁이에 숨어있다가 트럭에 올라타서 쌀가마니를 굴러 떨어뜨려 훔쳐가는 게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차령이 높고 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높고 험했던 차령이지만 지금은 천안 원덕리와 공주 인풍리를 잇는 터널이 뚫려 있고, 천안논산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차령 서편 인제원고개 아래로 길고 긴 고속도로 차령터널이 다시 생겼다. 산을 오르지 않는 터널이 뚫리니 사람과 물산이 모두 산 아래 터널로 몰리고 차령은 한가한 옛 고개로 남게 되었다.


차령고개 위에는 고개를 오가는 길손을 위한 휴게소가 있었다. 예전 인제원과 같은 역할이다. 하지만 고개가 교통로의 역할을 잃어버리니 찾는 이 없고 휴게소는 폐허가 되었다. 십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할 때 차령고개에 올라서니 그때 이미 차령휴게소는 문을 닫고 있었다.


이제 다시 세월 흘러 삼남길 걸으면서 차령에 올랐다. 장마철 비 추적추적 내리는 차령에는 이제 완전히 폐허로 변한 휴게소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고 지나는 차량도 사람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천년 세월 넘게 한양과 삼남을 이어 주던 교통 요지(要地)가 문명 발달로 산을 뚫는 기술 생기니 지금은 잊혀진 옛길이 되고 만 것이다.


세월이 무상하다. 텅 빈 차령휴게소 마당에 앉아 차령의 옛날과 지금을 돌아보니 새삼 세상사 모든 일이 뜬구름 하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듯 무상(無常)함을 절감한다. 십 년 전에는 산길을 따라 가로로 고개를 지나고 오늘은 삼남길 따라 세로로 고개를 넘고자 차령에 오른 이 길손의 가슴 속에도 뜬구름 하나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차령 단상(車嶺 斷想)!


구간 : 삼남길 제 11구간(쌍령리 입구 ~ 광정삼거리)
거리 : 구간거리(12 km), 누적거리(178.4 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17년 7월 1일. 흙의 날.
세부내용 : 쌍령리 입구 ~ 무학리 ~ 쌍령고개 ~  태화사 ~ 원덕리오거리 ~ 인저원고개 ~ 봉수산 임도 ~ 차령고개/차령휴게소 ~ 용기순환센터 ~ 일월휴게소 ~ 인풍리 ~ 정안IC ~ 광정삼거리.



장마철의 시작이다. 오래 가물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기후변화로 인해 아열대로 접어든지 한참이다. 기존의 삼한사온이나 분명한 사계절, 규칙적인 장마철 같은 기후현상은 이제 옛 이야기다.


봄과 가을은 짧아져 잠시 스쳐가고 긴 여름과 따뜻한 겨울이 그 빈자리를 차지했다. 사철 가리지 않고 가뭄은 일상화되어 겨울부터 시작된 물 부족은 봄에 절정을 이룬다. 그리하여 봄날 산불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장마철이 되어도 마른 장마가 되어 몇 년 연속 제대로 된 장맛비를 보기 어렵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올해 장마는 제대로 된 비를 보여 주려나 보다. 기상청 예보의 장마 시작부터 한반도 아래 위를 오르내리며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얄궂은 것은 꼭 주말이면 비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주도 예외는 아니다. 주말과 휴일 양 일 모두 비소식이 예정되어 있다. 벌써 몇 주째 야영 산행을 못하였다. 그렇다고 황금같은 주말에 집에서 뒹굴 수만은 없어서 가볍게 오갈 수 있는 삼남길을 걷기로 했다. 삼남길이야 들길 위주로 되어 있으니 비 온다고 해도 숲속에서 헤맬 일 없고 우산 쓰면 되니 옷 젖을 일도 없다.


그런 생각으로 가벼운 집 꾸려 집을 나섰다. 다만 다른 때와는 달리 우산과 비옷을 따로 배낭 안에 챙긴 것만 색다를 뿐이다.



차령/車嶺


충남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仁豊里)와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院德里)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원터고개라고도 불렸다. 인풍리와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를 연결하는 차령터널이 개설되어 있으나, 최근 논산-천안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이 고개 서편의 인제원(仁濟院)고개에서 무학산(舞鶴山, 401m)을 거치는 구간에 새로운 차령터널이 개설되었다. 이 고개의 북동쪽에는 신암문이 마을이 있고, 북쪽에는 성내말, 원터, 새터말 등의 마을이 있다. 또한, 북동쪽 원덕리 일대에는 곡교천이 흐르고 있고, 남서쪽 인풍리 일대에는 사현천(沙峴川)이 흐르고 있다. 이외에, 고개의 서쪽 인풍리 일대에는 인제원고개와 봉수산(323m)이 있고, 북쪽에는 원덕산(院德山, 276m)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차현(車峴)은 서북쪽 57리에 있다. 고려 태조의 훈요(訓要)에 이르기를,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등을 지고 뻗어 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서는 차령(車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차령 위에 원기(院基) 표시가 되어 있다. 이 고개는 원래 '높은 고개'라는 뜻을 가진 수리고개였을 것인데, 이후 수리고개가 수레고개로 바뀌고, 수레고개가 한자어인 차령(車嶺)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삼남길 11구간(쌍령리 입구~광정삼거리)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강/사/랑의 삼남길 순례는 아직 천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는 길 더디기는 하여도 아직 전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장점도 있다. 1호선 전철 타고 천안으로 향했다. 수원을 벗어나면 전철은 한산하다. 창밖으로 농사 짓는 들판도 보이고.



# 우리 집에서 천안까지는 전철이 다니기는 해도 먼 거리다.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이니 멀 수밖에 없다. 천안역에서 점심 먹고 화장한 후 역광장으로 나갔다. 얼마 전 휴대폰이 갑자기 고장 나 버렸다. 외관은 금방 구입한 것처럼 깨끗한데 핵심 칩이 맛이 갔다는 것이다. 소문에는 휴대폰 회사에서 일부러 수명을 삼 년으로 조정해 두었다는 말도 있다. 내 폰 역시 딱 삼 년 만에 고장이 났다. 어쩔 수 없어 최신폰으로 폰을 바꿨다. 돈은 많이 들었는데 카메라 기능 하나는 마음에 든다. 광각 기능을 갖춘 것이다. 125도의 넓은 화각을 가져 화면이 넓고 시원하다.



# 천안역 앞으로 나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일기예보에서는 밤부터 비가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더니 예상보다 훨씬 일찍 비가 내린다. 어느 가게 처마 밑에서 비를 그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광덕사행 버스가 도착했다.




# 주말이지만 광덕사행 버스는 한산하다. 비 내리는 날 광덕사를 찾을 사람은 없는 탓이다. 천안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풍세면을 거쳐 광덕면으로 들어간다. 




# 5월초에 이곳 광덕면에 왔었으니 꼭 두 달 만에 같은 자리에 섰다. 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있다.




# 광덕면 버스정류소를 떠나 쌍령리 입구 무신교차로를 향한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물보라가 인다.





# 무신교차로에 도착했다.




# 쌍령 1길을 따라 쌍령리로 들어가면 된다.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본격적인 삼남길 열한 번째 걸음을 시작했다.





# 천안논산고속도로 곁에 나 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우산을 썼다 벗었다 반복했다.




# 도로 따라 가는데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 무학리로 들어가는 농로 쪽에 삼남길 표식이 있다.




# 그 농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는데 트랙을 벗어났다고 알람이 운다. 전방의 저 나란한 나무에 삼남길 표식이 있긴 하다.




# 갈림길로 다시 돌아왔다. 지도 확인하니 처음 삼남길을 만들면서 저 농로를 따라 우회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이 포장도로 따라 직진하는 길로 수정한 모양이다. 지도에는 포장도로를 따르게 되어 있다. 주변 확인하니 수로 구조물에 농로쪽 표식을 지우고 포장도로 쪽에 다시 새로운 표식을 그려 두었다.




# 광덕은 호두가 유명하다. 길가에 호두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다. 이곳 호두로 천안 호두과자를 만드는 모양이다.



# 두릅도 많이 있다. 봄철 연한 새순이면 맛난 나물이겠지만 지금은 억센 잎이 무성하다.




# 우측 무학리 뒤쪽으로 산이 우뚝한데 운무가 그 정상을 휘감고 있다. 광덕산(光德山)인 듯 싶다.




# 무학리 안으로 들어 간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 진다.




# 전방 멀리 태봉산과 무학산이 있고 그 사이 잘록한 쌍령이 보인다. 고개가 상당히 높은 곳에 있다. 나는 오늘 구간에 대해 전혀 사전 공부를 하지 않았다. 구간 정보가 있었다면 이렇게 비오는 날 이 구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렇게 높은 고개가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쌍령마을 버스정류소에서 한참 동안 비를 피했다. 옛날 쌍령고개 넘어 삼남길로 내려 가던 사람들도 이곳 쌍령마을 어딘가에 있었을 주막에서 한숨 돌리고 쉬었을 것이다.




# 쌍령 마을 안 길가에 접시꽃이 큰 꽃을 피웠다. 아욱과의 접시꽃은 역사가 오랜 꽃이다. 신라시대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시에도 등장할 정도이다. 한자로는 촉규화(蜀葵花)라고 한다.


寂莫荒田側 / 繁花壓柔枝 / 香輕梅雨歇 / 影帶麥風湫 / 車馬誰見賞 / 蜂蝶徒相窺 / 堪恨人棄遺 (적막황전측 / 번화압유지 / 향경매우헐 / 영대맥풍의 / 거마수견상 / 봉접도상규 / 감한인기유 : 거친 밭 언덕 적막한 곳에 /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렀네 / 장맛비 그쳐 향기 날리고 /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주리 /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 최고운(崔孤雲)은 학문적 소양을 갖춘 자신이 신라의 신분제도에 막혀 뜻을 펼치지 못함을 촉규화에 빗대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살다가 신선(神仙)이 되었다. 오래 전 '접시꽃 당신'이란 병든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부곡(思婦曲)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 있다. 그는 최고운과는 다르게 활발히 현실 정치에 뛰어 들어 국회의원이 되더니 이윽고 장관까지 되었다.


향기 높았던 최고운은 현실의 뜻을 접고 지리산 신선이 되었는데, 그 시인에게 향기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두고보면 스스로 증명하겠지. 촉규화 배웅 받으며 쌍령 마을을 벗어난다.




# 곧장 고개를 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외곽 길을 길게 진행하여 고개 아래로 접근하는 모양새이다.




# 농장이 계속 나타나고 갈림길도 지난다.




# 우산 쓰고 걷는 삼남길이 이채롭다. 색다른 경험이다. 점점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한다. 고개 위에서 트럭 한 대가 내려온다. 고개 위나 건너에 식용 개를 키우는 농장이 있나 보다. 트럭 짐칸에 개를 실었는데 그 모습이 충격적이다. 작은 라면 박스 만한 철장에 대형견 세 마리를 종이 구기 듯 우겨넣었다. 숨 쉬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 철장 안에서 비 철철 맞고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 고개 8부 능선까지 농장이 있다.



# 산딸기 익는 철이다. 길가에 산딸기가 지천이다. 다만 수풀이 젖어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다. 마른 날이었으면 배가 부를 정도로 따 먹을 수 있었겠다.



# 길게 구불구불 올라 쌍령고개에 도착했다. 쌍령(雙嶺)이란 이름은 가파른 고개가 쌍(雙)으로 있어 부른 이름이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밤나무골이 나오고 그곳에서 태성리로 넘어가는 개치고개와 인풍리로 넘어가는 인제원고개가 있다. 어느 고개 때문에 쌍령으로 불렀는 지는 정보가 없어 잘 모르겠다. 조선지형도에 상쌍령과 하쌍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쌍령산으로 대동여지도에는 쌍령으로 되어 있다.



# 고개 위에 외딴 집이 있다. 제법 정성을 들인 집인데 지금은 비었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 쌍령을 넘어 원덕리 쪽으로 길게 내려갔다. 우측 골짜기에 태화사란 꽤 큰 규모의 사찰이 있고 그 앞에 기묘한 모양의 하얀 건물이 있다.




# 무슨 감시탑 같기도 하고 관측소 같기도 한 건물이 홀로 우뚝하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고속도로 터널의 환기시설이다.




# 길가 자귀나무에 새소리 요란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제법 큰 새들이 무리를 이뤄 지저귀고 있다.




# 고개 끝나는 곳에 태화사 입구 삼거리가 있다. 삼남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인다.




# 원덕리 밤나무골쪽으로 간다. 저멀리 잘록한 곳이 개치고개이다.




# 정면 개치고개로 가는 줄 알고 밤나무골 안으로 들어가는데 길을 벗어났다고 알람이 운다. 갈림길로 복귀했다.




# 좌측으로 꺾어 가라고 바닥에 삼남길 표식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스쳐 지날 곳이다.




# 외딴 전원주택 뒷쪽 임도로 들어간다.




# 전원주택 뒤에서 임도는 다시 산 윗쪽으로 꺾어 구불구불 올라간다.




# 임도 올라 가는데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 임도가 아주 길고 높게 이어진다. 다니는 사람 없으니 수풀이 자라 등로를 덮고 있다. 그 수풀이 비에 젖어 다리에 척척 휘감긴다. 걷기에 아주 불편하다.




# 물안개 가득한 임도를 올라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이 인제원고개이고 십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하면서 지난 곳인데 날씨 좋지 않고 주변 지형지물 많이 변해 알아보지 못했다.




# 일기예보에서 오늘 저녁부터 비를 예보하였고 오늘 구간의 정보가 없어 나는 오늘 칠부 바지에 얇은 트레킹화를 착용한 간편한 차림으로 삼남길을 나섰다. 이렇게 산길 걷고 비 많이 내릴 줄 알았으면 등산화에 등산바지를 입고 왔을 것이다. 이곳 임도를 오르면서 이미 아랫도리는 완전히 다 젖어버렸고 신발 안은 물구덩이다.




# 진행 방향의 임도는 완전히 풀밭으로 변해 있다. 당연히 물구덩이다.




# 반대편은 송전탑 방향이다.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곳으로 금북정맥이 이어졌던 것 같다. 비 내리고 물안개 가득하여 바로 앞에 있는 송전탑이 희미하다.



# 잠시 진행하자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은 약간 넓은 길이고 우측 길은 풀밭이다. 아쉽게도 삼남길은 우측길이다.




# 비는 점점 많이 오고 흠뻑 젖은 수풀은 다리에 칭칭 휘감긴다. 내 복장이 7부 바지라 노출된 정강이와 종아리에 풀에 긁힌 자국과 벌레 물린 자국이 자꾸 늘어난다.





# 길게 휘감아 돌면서 오르내린다 그러다 임도가 좌로 꺾여 내려가는 곳에 멀리 송전탑이 보인다. 그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그 길이 아니라고 알람이 운다. 지도 확인하니 길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 가라 한다. 표지기도 없다. 이렇게 어둡고 축축하며 길도 없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 타구봉으로 수풀을 헤치고 안을 들여다 보니 과연 그 안에 길이 있다.




# 숲속은 어둡고 축축하며 미끄럽다. 신발이 등산화가 아니어서 더욱 미끄럽다.




# 숲속 길도 꽤 멀고 깊게 내려간다. 오늘 삼남길은 들길 보다 산길이 더 많다. 정보 어둡고 준비 부족하여 고생이 많다.




# 치마 형태로 된 비옷 하의를 입었다. 덕분에 옷은 젖는 것을 피했는데 신발과 노출된 정강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 아래로 내려갈수록 경사가 급해진다. 로프 구간을 지난다.




# 후박나무 줄기에 삼남길 표식이 그려져 있다. 이제 경사가 완만하다.




# 대나무 숲을 벗어나면 폐건물이 나타난다. 차령이다.





# 10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하면서 만났던 대나무숲이다. 대나무는 아열대(亞熱帶)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식물이다. 내한온도가 영하 이삼 도 내외여서 겨울에 추워지는 곳에서는 살지 못한다. 그래서 이곳 차령이 북방한계선이다. 여기까지는 예전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운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아열대 기후로 진입하고 있다. 따라서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은 이미 차령을 벗어났다. 서울 경기권의 아파트에 대나무로 조경한 곳이 꽤 있다. 생육에도 문제가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더워진 것이다.



# 폐 휴게소 위쪽에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스님의 통일기원 시비(詩碑)가 있다. 힘 넘치고 멋진 글씨이다. 이 분은 우리나라 불교계의 이단아 같은 분이다. 조계종의 중진으로 있다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 이후 세계 불교계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 차령고개. 휴게소는 폐쇄되어 울타리를 둘렀다.




# 이 휴게소는 내가 알기로 거의 영업을 하지 못하였다. 짓는 도중에 터널이 뚫렸을 것이다.




# 이곳이 차령고개이다. 공주와 천안을 잇는 고개이고 봉수산과 원덕산 사이에 있으면서 금북정맥을 이룬다. 그리고 호서(湖西)의 기점이며 예전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을 이루던 곳이다.




# 10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를 하면서 이 고개를 두어 번 찾았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전의의 덕고개를 출발해 국사봉과 봉수산을 넘어 이 고개에 내려 섰었다. 당시는 건강이 썩 좋지 못할 때여서 같은 구간을 몇 시간 먼저 걸은 산동무인 백곰님이 택시를 불러 이 표지석 앞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 참 오랜 옛 일이고 옛 동무인데 그 동무는 요즘 통 소식이 없다.




# 삼남길은 남북으로 고개를 넘는 길이고 금북정맥은 동서로 고개를 가로지른다. 도로 안내판 뒤가 금북정맥 들머리이다. 요즘은 정맥 종주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잡목 우거져 있고 사람 드나든 흔적 없다.




# 10년 세월 흐르는 동안 휴게소는 점점 폐허로 변했다. 인적 끊어진 차령휴게소 마당에 주저앉아 간식 먹으며 휴식했다.





# 비는 이제 거의 그쳤다. 오래 휴식하며 옛 추억을 더듬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갈 길이 아직 먼 탓이다. 




# 휴게소 건물 일부를 개조해 펜션과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 차령과 작별하고 고개를 떠났다.




# 1번 국도에서 갈라진 23번 국도가 산중턱 터널로 지나면서 이곳 옛 차령고개는 한적한 옛길이 되고 말았다.




# 차령 아래쪽은 공주 땅이다. 공주는 밤이 유명하다. 공주의 초입부터 공기 중에 밤꽃냄새 가득하다. 고개를 구불구불 돌아 내려가자 용기순환센터란 건물이 나타난다. 잠시 후 참숯가마 찜질방도 지난다.




# 고속도로 수준의 도로가 차령터널을 통해 뚫렸다.




# 돌아보면 금북정맥의 산줄기와 차령고개가 보인다.




# 자귀나무 꽃 예쁘게 피어 있는 곳에 숯가마 찜질방이 있다.




# 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길게 내려가면 좌측 23번 국도변에 차령휴게소가 있다.




# 오늘은 내내 물기 듬뿍 머금은 산길을 걷다가 차령고개부터 뽀송뽀송한 아스팔트 길을 걷게 된다. 평소 삼남길 걷다가 아스팔트 길을 만나면 힘들고 괴로웠는데, 오늘은 반대로 이렇게 마른 길이 아주 좋다.




# 길게 내려 태양열 발전소가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인풍리로 들어간다.




# 인풍리 마을 삼거리이다. 삼남길은 마을 안으로 이어진다.




# 인풍리는 어질 인(仁), 풍년 풍(豊)을 쓴다. 어진 사람들이 사는 풍요로운 고장이란 뜻이다. 마을 이름으로는 최고의 단어 조합이다. 차령은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이다. 사람과 물산이 차령을 통해 이동하였으니 차령 입구의 인풍리는 늘 번잡하고 활기 넘쳤을 것이다. 마을 이름에 옛 이야기가 들어있다. 다만 지금은 국도와 고속도로가 마을 앞뒤를 지나고 있어 좀 시끄럽겠다.




# 마을 회관에서 곧장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마을을 벗어나라고 한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이 동네도 고요하다. 어진 고을에 사는 개라서 그런지 저 골든 리트리버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게 묵직하고 느긋하다. 얼굴 가리고 막대기 든 낯선 나그네를 보고 그냥 가만히 있기에는 주인에게 미안했든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딱 한번 컹 짓는 시늉만 하고는 다시 느긋하다. 개는 키우는 주인을 닮기 마련이다. 이 댁 주인의 인품이 짐작된다.




# 은행나무 심어진 농로를 따라 길게 진행했다. 우측 멀리 고속도로가 보인다.




# 길게 내려가다가 수로를 건너는 다리를 만난다.




# 시냇물 좌측변 포장된 농로를 따라 내려갔다. 이 농로를 포장하면서 길가에 화초를 심기 위한 화분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 공간이 아까웠던 농심(農心)은 그곳에 참깨를 심었다. 하얀 참깨꽃이 화초를 대신하고 있다.




# 고속도로 정안 나들목 근처로 접근하는데, 저멀리 이상하게 생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 가까이 가서 보니 어느 닭고기 가공회사의 건물이다. 옥상에 닭 쫓다가 지붕 쳐다보는 개 조형물을 만들어 두었다. 재미있는 회사이다. 저 회사는 창업자인 김홍국 회장이 열 살 때 외할머니가 선물해준 병아리 열 마리로 시작한 사업이다. 꼬맹이의 애완 병아리로 시작된 회사가 이제는 수십 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그룹이 되었다. 열정을 가진 기업가의 도전 정신이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국가 경제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애국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민정서는 대기업은 나쁜 놈들이고 중소기업을 착취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정치하는 작자들이 그런 프레임을 대기업에게 덧씌운 결과이다. 슬픈 일이다. 주둥아리 애국자들이 진짜 애국자를 매도하고 단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이다.




# 정안 나들목을 지난다. 충청이나 호남지방의 산행을 위해 뻔질나게 지나다녔던 곳이다.




# 광정리에 접근하는데 근처에 김옥균(金玉均) 생가(生家)가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구한말(184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으로 근대적 개혁운동을 주도한 개화파 정치가이다. 그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중세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혁명이었지만,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지한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


혁명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던 김옥균은 왜인들의 이용만 당하다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김옥균은 1851년 이곳 정안면에서 출생하였다. 생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가 보려고 했는데, 차량 통행 많은 도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을 기약하고 광정리로 들어갔다.




# 잠시 후 광정리에 도착했다. 광정리는 정안면 소재지이다. 예전에는 커다란 시장이 있던 곳이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유구와 마곡사로 이어진다.




# 광정리에 도착하자마자 천안행 버스가 도착했다. 몸에 묻은 먼지 털어낼 틈도 없이 곧바로 버스에 탑승했다.




# 버스에서 물티슈로 대충 닦아내고 물 한 잔 마시며 정신 가다듬었다. 직행버스라 한 번에 천안터미널로 갔다. 그곳에서 택시편으로 천안역으로 다시 열차편으로 귀가했다.



이번 구간은 장마철 먼 곳 야영산행 못가는 대안으로 문득 선택되어진 답사길이었다. 삼남길은 대부분 들길로 구성되어 있다. 들길 걷는데 특별한 완전무장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번 열한 번째 삼남길에 나서면서도 별다른 준비없이 편한 복장으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고 삼남길은 들길이 아니라 산길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니는 사람 별로 없어 산길은 수풀이 무성히 자라 있었다. 때문에 비에 흠뻑 젖은 수풀이 달려들어 시작부터 아랫도리가 완전히 젖어 버렸다.


집에 돌아와 살펴보니 하루종일 비에 젖은 발은 퉁퉁 불어 있고 아랫도리는 수풀에 긁히고 벌레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은근히 힘든 구간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금북정맥 종주를 하면서 지났던 차령과 일대의 산길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정맥과 삼남길이 가로세로 교차한 덕분이다. 여러 테마의 길을 걸으니 이런 재미도 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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