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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13구간(금강철교~경천중학교)-왕도공주(王都公州)! 본문
원래 이름은 '웅천(熊川)'이었다. '고마나루', '곰나루', '곰내'란 우리 말의 한역(漢譯)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첫 등장은 백제(百濟) '문주왕(文周王)' 때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은 이렇다. 文周王 蓋鹵王之子也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圍漢城 蓋鹵嬰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都於熊津(문주왕 개로왕지자야 고구려래침위한성 개로영성자고 사문주구구어신라 득병일만회 야병수퇴 성파왕사 수즉위 성유부단 이역애민 백성애지 동시월 이도어웅진 ;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했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요청을 하게 했다. 구원병 일 만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가 물러갔다. 그러나 성은 파괴되고 왕이 죽어 문주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격이 우유부단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들도 그를 따랐다. 겨울 시월에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문주왕(文周王)은 백제 22대 왕이다. 개로(蓋鹵)의 아들이고 삼근(三斤)의 아버지다. 문주(文洲) 또는 문주(文州)라고도 한다.재위기간은 475년에서 477년까지의 단 3년이다.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빼앗긴 국난의 시기에 즉위해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 백성을 사랑하였고 그들의 애정을 받았으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국정 장악이 여의치 않았다. 왕이 우유부단하면 권신(權臣)들이 발호(跋扈)하게 된다. 문주왕 때의 권신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병관좌평 해구(解仇)였다. 왕은 집권 3년 만에 해구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왕도를 옮긴 왕은 죽었어도 왕조는 이어졌고 왕도(王都) 역시 그대로였다. 이후 웅진은 삼근(三斤), 동성(東城), 무령(武寧), 성왕(聖王)으로 이어지는 다섯 임금 63년 간의 세월 동안 백제의 도읍으로 역할 했다. 聖王諱明穠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能斷事 十六年春 移都於泗沘 國號南扶餘(성왕 휘명농 무령왕지자야 지식영매능단사 십육년춘 이도어사비 국호남부여 ; 성왕은 이름이 명농이다.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재위 십육 년 봄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웅진에서 다시 도읍을 옮겨 사비시대(泗沘時代)를 연 왕은 백제 26대 왕인 '성왕(聖王)'이다.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30년이었다. 백제 후기를 찬란하게 만들었던 야망의 왕이었던 그는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결단성을 갖추었다.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것은 백제 중흥(中興)의 위업 달성을 담아내기에는 웅진이 너무 좁고 그 기운이 다했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는 31대 의자왕(義慈王) 20년인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사비시대(泗沘時代)를 이루었는데, 웅진의 재등장은 공교롭게도 백제의 멸망 순간과 함께한다. 大宗武烈王 諱春秋 七年 七月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태종무열왕 휘춘추 칠년 칠월 십삼일 의자률좌우야둔주 보웅진성 십팔일 의자률태자급웅진방영군등 자웅진성래항 ;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춘추이다. 재위 칠 년 칠월 십삼일 의자왕이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십팔일 의자왕은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의자왕(義慈王)'은 백제 무왕(武王)의 장남이었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효심 깊고 형제가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릴 정도로 대내외에 칭송받던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고 그 역시 처음의 초심(初心)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마침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국파(國破)되어 백성들은 유민(流民)이 되고 그는 당으로 끌려가 낙양(洛陽)에서 병사(病死)하였다. 그가 성(城)을 나와 항복하는 왕조의 최후를 지켜본 것은 웅진성(熊津城)이었다. 7백 년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新羅)에 의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루었어도 전란(戰亂)은 끊이지 않았다. 외부로의 전쟁이 종식되자 내분(內紛)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憲德王 十四年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陷 憲昌知不免 自死 (헌덕왕 십사년 삼월 웅천주도독헌창 이부주원부득위왕 반반 국호장안 건원경운원년 협무진완산청사벌사주도독 국원서원금관사신급제군현수령 이위기속 제군공도웅진 여적대전 참획불가승계 헌창근이신면 입성고수 제군위공협순 성장함 헌창지불면 自死 ; 헌덕왕 십사 년 삼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 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신라 하대(下代)는 내분이 심했던 시대였다. 김헌창의 아비 주원(周元)은 원래 귀족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김경신(金敬信)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헌창이 난을 일으켰다. '김헌창(金憲昌)'은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한 지 일 년이 채 못 되어 난을 일으켰는데, 충청·전라는 물론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그 반란에 동조하여 세(勢)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반란이었다. 왕위계승이라는 권력다툼에서 시작된 반란이 전국적 봉기에 이른 것은 당시 웅진을 중심으로 한 구 백제세력의 뿌리 깊은 반신라(反新羅) 감정에 기인(起因)한 것이었다. 仁祖實錄 仁祖 2年 1月 23日 副元帥李适 擧兵反. 2月 13日 大駕發天安郡 向公州 鷄未鳴矣 議者以爲 餘賊豕突 不無震驚行在之患 莫若急往公州 入保山城 故侵夜發行. 2月 14日 上在公州. (인조실록 인조 2년 1월 23일 부원수이괄 거반병. 2월 13일 대가발천안군 향공주 계미명의 의제이위 여적시돌 불무진경행재지환 막약급왕공주 입보산성 고침야발행. 2월14일 상재공주 ; 인조실록 2년 1월 23일 부원수 이괄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2월 13일 대가가 천안군(天安郡)을 떠나 공주(公州)로 향하였는데, 닭이 울기 전이었다. 의논하는 자가 ‘남은 적이 저돌하면 행재소를 놀라게 할 걱정이 없지 않으니 공주로 급히 가서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밤에 떠났다. 2월 14일 상이 공주에 머물다.) 왕조(王朝)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이름도 '공주(公州)'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의 일이었다. 공주는 역사가 깊은 고을이다. 왕조가 바뀌어도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州)의 지위를 가졌고 중심고을인 12목(牧) 중 하나로 우대되었다. 그리고 조선조 16대 왕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일등 공신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괄(李适)'이었다. 그러나 그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밀려 2등 공신이 되었고 급기야 같은 반정공신들의 무고(誣告)에 의해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한양을 침공했다. 역사적 혜안도 공정한 인재 운용력도 없었던 무능한 왕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였다. 목적지는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이었다. 애초에 광해(光海)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것부터 백성의 인심을 얻지 못했던 인조였다. 왕의 어가가 한강에 도착하였는데, 사공들이 강 건너에서 왕의 호출에 무대응하였고 겨우 배 한 척을 구했으나 주위 신하들이 먼저 배에 올라타려 했으며, 왕이 배를 타고 돌아보니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러 화광(火光)이 휘황하였다 한다. 이후 인조는 수원, 천안을 거쳐 공주에 도착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반란이 삼일천하로 끝나는 바람에 음력 2월 18일 그러니까 공산성에 파천한 지 사 일 만에 다시 공산성을 떠나게 되었다. 인조가 공주를 파천지로 선택한 이유는 대사간(大司諫) 장유(張維)의 의견 때문이었다. 원래 다른 조신들은 전라도나 경상도 등 도성에서 먼 고장을 주장하였으나 장유는 공산성이 강을 앞에 두고 있어 형세가 좋고 길 또한 너무 멀지 않아 정세 관망에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런 여러 역사의 기록은 공주(公州)의 위상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들이다. 공주는 중흥, 멸망, 파천 등의 여러 사연과는 별개로 왕(王)의 고장이고 피난(避難)의 안식처였다. 문주왕은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 한성을 버리고 공주로 들어왔고, 성왕은 새로운 중흥을 위해 공주를 떠났다. 해동증자 의자왕은 국파의 마지막을 공주에서 맞았으며, 왕을 꿈꾸었던 김헌창은 새로운 국가를 이곳에서 선포하였다. 그리고 우매한 왕 인조는 스스로 초래한 난을 피해 허겁지겁 공주로 도피하였다. 공주는 금강과 계룡산으로 외벽을 둘러 방어에 유리하였고 너른 들을 배후에 두어 물산이 풍부하였다. 성안에 웅거하면 대군을 대항할 수 있었고 성문을 열고 소통하면 강과 들을 통해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로써 오랜 세월 왕도(王都)로써 역할 하였고 난을 피해 숨어드는 어리석은 왕들을 품어주었다. 강/사/랑의 삼남길 13구간은 왕의 고장 공주의 속살을 더듬어 걷는 길이다. 역사 깊은 고장이고 왕의 기운 어린 곳이라 발길 닫는 곳곳이 역사의 의미 깊은 고장이다. 그 역사의 흔적 찬찬히 더듬으며 걸어보려 한다. 왕도공주(王都公州)! 구간 : 삼남길 제 13구간(금강철교~경천중학교) 2017년 7월에 삼남길 걸어 공주 공산성 앞까지 갔으니 그동안 1년 넘게 삼남길과는 멀어져 있었다. 원래 삼남길은 허리 아파 쉬는 동안 워밍업 하는 기분으로 경기지역 삼남길만 걸어보자 했던 길이다. 그 길이 연결연결되어 안성과 천안을 넘고 공주에 이른 것인데, 여러가지 일들이 겹쳐 오랫동안 격조하게 된 것이다. 너무 떨어져 있으면 마음까지 멀어지는 법이라 잠시라도 만남을 가져야겠다 싶어 짐 챙겨 삼남길에 나섰다. 이번 구간에는 오랜만에 마눌도 함께 하게 되어 둘이서 도란도란 애기 나누며 걷는 삼남길이 되었다. 둘이 움직이니 대중교통보다는 자동차가 나은 듯하여 공주까지 접근 자동차 운전해서 갔다. 공산성/公山城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돌로 쌓아 높이 약 2.5m인데, 전면만을 석축하였으며 내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고,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나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토축(土築)된 위에 돌로 쌓아 외면만을 축조하여 높이는 4m 정도이다.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는 서문터(현재는 통로) 남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너비 4.5m, 높이 3m이다. 성벽 안에는 7∼8m의 호(壕)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조잡한 석축성벽(石築城壁)이 높이 2m, 너비 1.5m 정도로 남아 있으며, 수구(水口)도 있다. 남쪽에 남문터(현재 鎭南樓)가 있고, 그 서쪽은 높이 3m, 너비 3.7m로 석축하였고, 성내에는 너비 11m의 호가 있다. 진남루 앞의 넓은 터는 백제의 궁터이고, 공북루(拱北樓)의 윗부분은 건물터로 추정된다. 또, 이 부근에는 우물터 3개가 있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이곳저곳>
# 삼남길 13구간(금강철교~경천중학교)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작년 7월 엄청나게 더웠던 날 이후이니 무려 1년 3개월 만에 다시 삼남길에 섰다. 먼저 공산성을 찾았다. # 공산성 성벽 성돌이 촘촘하다. 원래 토성(土城)이던 것을 새로 보수하였으니 저 돌들은 이 성에서 몸을 일으켰거나 이 성으로 도망 들어왔던 옛 왕들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 언덕과 저 봉우리들이 그들을 기억할 것이고 또한 역사가 그들을 평가할 것이다. 마음 심란하여 공산성 성벽 앞에 오래 머물렀다. # 비단강 건너 둔치에 아주 넓은 둔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 주차장에 주차하고 채비를 차렸다. 둔치 끝으로 나가 강 건너 공산성을 조망하였다. 강을 향해 낮게 가라앉는 구릉지대가 있고 뒤로는 높은 산으로 되어 있어 방어에 적합한 구조이다. # 우측 산 봉우리에 새로 지은 전망대인 공산정이 있고 아래에 공북루, 그리고 좌측에 만하루가 보인다. 공북루(拱北樓)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예전에는 아래에 나루가 있어 뱃길의 관문이었다. 좌측의 만하루(挽河樓)는 드나드는 문루가 아니고 조망 감상을 위한 누각이다. #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강 상류를 향해 곧게 뻗었다. # 잠시 둔치를 따르다가 강둑으로 올라갔다. # 금강 자전거길이 이곳 강둑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 나는 2012년 8월에 금강 자전거길을 종주했다. 무더운 날이었지만, 강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힘든 줄 모르고 종주했다. 아라뱃길, 한강 서울구간, 한강, 낙동강, 영산강, 새재길, 섬진강 등 국토종주 자전거 길 모두를 종주했는데 , 개인적으로 금강 길이 가장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 날도 금강 자전거 길 종주에 나선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 자료 뒤져보니 금강자전거길 종주할 때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 곰 조각이 있는 공주대교 통과. # 하늘이 흐리다. # 공주대교 위에서 비단강을 굽어 보았다. 맑은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강을 관리하였으니 이렇게 깨끗한 수질의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하천을 방치하면 강은 썩은 물 고인 똥통이 되고 만다. 우리나라는 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어 대부분의 계절은 강이 건천(乾川) 상태를 유지한다. 물이 흐르지 않고 수량이 적으면 강은 썩는다. 치수(治水)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 공주대교를 건너자마자 건널목을 통해 좌틀한다. # 금강 우측에 있는 이 도로의 이름은 '창벽로'이다. # 이곳의 가로수는 은행나무다. 인도에 은행열매가 짓밟혀 엉망이 되어 있다. 은행 열매는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열매다, 하지만 그 과육에 치명적인 악취를 가진 넘이다. 신발 바닥에 묻으면 하루종일 악취를 맡아야 한다. 조심조심 걸었다. # 시멘트 포장된 강변길을 따라 내려 갔다. # 강변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혈흔천(血痕川)'을 만났다. 개천 이름이 강렬하다. 자료 찾아보니 어느 효자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냇물이다. 신라 경덕왕 때 신기동(新基洞)에 향덕(向德)이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데 어머니가 등창이 났을 때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고, 아버지가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하자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고아 먹여 병을 낫게 하였다 한다. 그때 흐른 피가 냇물을 붉게 물들였는데 이후 냇물을 혈흔천이라 불렀다 한다. 이후 혈저천(血渚川) 혹은 혈저천(血底川)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효자천 정도로 하면 될 것을 너무 상세히 표현하여 섬뜩한 이름의 강이 되어 버렸다. 나는 처음 이 이름을 보고 전쟁 때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나 싶었다. 아무튼 혈흔천은 계룡면 기산리의 천마산과 성화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화은리를 거쳐 금강에 합류한다. 전체 길이가 10여 km에 불과한 짧은 하천이다. # 혈흔천 좌측 강둑을 따라 진행했다. # 폭이 좁은 하천이다. 우측 동네는 공주시 소학동이다. # 23번 국도 아래를 통과했다. 23번 국도는 계룡, 논산, 강경, 익산으로 이어진다. # 좁은 강둑을 따라 길게 내려갔다. # 인적이 완전히 끊긴 한적한 길이다. 우리 부부 외에 움직이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꽃 뿐이다. # 어느 동네나 꼭 한두 그루씩은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이 동네도 강둑에 있다. # 흐린 날이지만, 햇살 강하다. 강둑을 따라 길게 내려갔다. # 신기교 통과. # 신기(新基)마을은 '새터'의 한역이다. 기존 마을에서 분화되어 새로이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신촌, 신기, 신동 등의 이름을 가진 마을이 대부분 그런 마을이다. 새터, 새마을, 새말 등의 우리 이름을 가진 동네이다. # 새터마을 앞의 신기2교에서 우틀하여 다리를 건넌다. # 갈림길이 나오고 상상공작소 팻말이 있는 공방 우측으로 방향을 꺾는다. # 23번 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하라 한다. # 굴다리 통과 이후 23번 도로 우측의 작은 길을 따라 남하한다. # 가마울 마을 앞을 지난다. 가마울이란 이름은 전국 각지에서 관찰되는 이름이다. 동네가 가마솥처럼 오목한 분지여서 한자로 '부곡(釜谷)'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고 검은 돌이 많아 '감실' 등으로 불리다 가마울이 된 경우로 있으며 정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던 곳이라 가마울이 된 곳도 있다. 이곳 화은리의 가마울은 오목한 분지 지형에서유래된 듯하다. # 내가 그런 짐작을 하는 이유는 이 동네가 철마산 자락에 오목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화은리 마을 앞길을 따라 길게 내려 가다가 다리 아프고 배 고파 길가에 자리 잡았다. 마땅한 쉼터를 만나지 못해서 그랬는데 나중에 고개 하나를 넘어가자 쉴만한 곳이 여럿 나타났다. # 간식 먹고 다리 풀며 삼십여 분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 공주에서 계룡 거쳐 논산으로 내려 가는 긴 회랑(回廊) 모양의 골짜기를 따라 23번 국도는 남하하고 있다. 그 주변으로는 곳곳에 작은 골짜기들이 많고 사람들은 그 골짜기에 마을을 형성하여 대대손손 이어져 오고 있다. # 화은리를 지나 기산리로 접어든다. # 미술관이 있는 동네라 길가에 허수아비로 미술작품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여 밤중에 만난다면 기겁을 하겠다. # 임립미술관이 있는 기산리에서 좌측 굴다리를 통과한다. 임립미술관은 임립이라는 작가가 만든 사립미술관이다. 비록 한적한 시골에 있는 미술관이지만 활발한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갈 길 바빠 그냥 지나쳤다. # 삼남길은 다시 국도 좌측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 나락은 이미 누렇게 물들었고 길가에 심은 메주콩도 누런 빛을 띄고 있다. # 농로를 따라 길게 내려가다가 평재말에서 다시 굴다리 통과. 오늘 삼남길은 23번 도로의 아래 굴다리를 여러 차례 넘나든다. # 제일제당 공장이 보인다. # 오늘 우리는 제대로 된 쉼터를 제 때에 만나지 못한다. 농로 곁에 자그마한 공터가 있어 그곳에 돗자리 펼치고 점심 상을 폈다. 마을 주민들이 들판 살피러 나왔다가 기웃기웃 살피다 간다. 예전 같았으면 간첩신고 여러 차례 들어갔을 것이다. 점심 먹으며 공주 밤막걸리 한 통 비웠다. 고소한 맛이었다. # 점심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점심 먹는 동안 하늘이 잔뜩 흐려졌다. # 봉명리 들판을 따라 길게 내려갔다. 길가 산자락에 밤나무가 많다. 이미 수확이 끝난 밤밭인데 길에 떨어진 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알밤 줍느라 한참 동안 허리 굽혀야 했다. # 계룡면 소재지인 월암리 계룡양조장 앞에서 다시 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했다. # 월암교 앞에서 월암천을 따라 우틀하여 남하한다. 월암교를 건너 조금만 가면 계룡저수지가 나온다. 붕어낚시가 꽤 되는 곳인 모양이다. #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 굴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다. # 그런데 삼남길 표식이 반대 방향으로 덧칠해져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트랙은 예전 표식대로 굴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다. 지도를 축소하여 크게 보니 어느 쪽으로 가든지 유평리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 수정된 삼남길 표식이 가리키는대로 월암천을 따라 가기로 했다. # 중간에 표지기도 나타난다. # 유평리 유평교차로 못 미쳐 좌측으로 다리를 건넜다. # 하천 이름은 다시 노성천으로 바뀌었다. # 버섯농장들 사이로 진행했다. # 전방으로 계룡산이 보인다. 천황봉에서 쌀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 잠시 계룡산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 하대리에서 금대리쪽으로 내려간다. # 금대리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한다. 충무공 백의종군길 표지기가 삼남길 표식과 함께 매달려 있다. 백의종군길은 정안에서 공주, 논산, 익산 등지로는 삼남길과 그 여정이 거의 합치한다. 익산 이후로는 삼남길은 정읍, 나주를 거쳐 해남으로 가고 백의종군길은 전주, 임실, 운봉을 거친 후 다시 구례, 하동을 거쳐 합천 초계로 간다. 충무공은 정유재란 중 선조에 의해 의금부에 구금된다. 27일 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충무공은 도원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명을 받고 한양 의금부를 출발하여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의 도원수진까지 걸어갔다. 그 길을 복원하여 백의종군로라 명명했다. 저 길을 또 걸어야 해? 아직은 잘 모르겠다. # 이 동네는 축산 농가가 아주 많다. 관리가 잘 된 농가는 깔끔하고 냄새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가는 소들이 자기가 싼 똥 위에서 뒹굴고 있고 악취도 아주 심하다. 비 많이 오면 축산 농가의 오염된 폐수들이 모두 강으로 흘러 들 것이다. 저렇게 방치되어 있는데 폐수 넘치지 않게 관리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대강 자전거 종주 할 때 나주 무안 일대의 영산강 변에 수십 곳의 축산 농가가 강변에 즐비한 것을 보았다. 그곳 축산 농가의 오염수 탱크는 축산폐수로 가득 차 있었다. 비가 내리면 곧 넘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그냥 두고 우리나라 주요 강들이 깨끗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길게 걸어 경천리에 도착했다. 경천리는 계룡산 자락의 마을인데 공주와 논산의 길목에 있어 예전부터 장시(場市)가 발달했던 곳이다. 경천장은 2일과 7일에 열리는 오일장인데 공주 남단에서는 가장 큰 장시였다. 농사가 성한 곳이라 잡곡으로 유명하였던 모양이다. # 경천리에 접어드는데 버스 한 대가 들어오더니 손님을 내리고 회차한다. 얼른 달려갔다. 하지만 이 버스는 우리가 탈 공주행이 아니고 논산으로 가는 버스다. 이곳이 회차지인 모양이다. # 오늘 구간의 목적지인 경천중학교에 도착했다. 오늘 구간은 들판 길이라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걸었다. 마눌은 오랜만의 장거리 운행이라 발바닥이 좀 아팠다 한다. 그래도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편하게 왔다. # 697번 지방도가 경천리 안을 통과하여 공주와 논산을 잇고 있다. 중학교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정류장 바로 옆 콧구멍 만하게 작은 가게에서 버스표를 판매하고 있다. 배차 간격이 길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정류장에는 햇살이 좋다. 먼지 앉은 그 벤치에 낮술이 거나하게 취한 60대 남자가 혼자 앉아 계속 혼잣말로 가슴속 울분을 얘기하고 있다. 오래 중얼거리던 그는 막걸리 한 통 들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더니 십여 분 후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나와 앉는다. 그의 울분이나 애환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낮에 홀로 취해야 하는 그래서 사람 오가는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그의 외로움이 슬펐다. # 버스편으로 공주에 복귀했다. 버스는 우리가 하루종일 걸었던 기다란 골짜기의 23번 국도를 북상하여 공주시로 들어갔다. 공주대교 앞 옥룡동 주민센터 앞에서 하차했다. 아침에 우리가 지나갔던 곳이다. 그곳에서 공주대교를 다시 건넜다. # 오전에 보았던 그 뷰를 삼남길 한 구간 걷고 나서 노을 질 때 다시 보았다. 노을 진 강물 도도하다. 이후 금강 둔치주차장으로 복귀해서 삼남길을 마무리했다. 몸에 묻은 먼지 털어내고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었다. 그리고 공산성 앞으로 가서 공주 밤으로 만든 먹거리와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먼 길 운전하여 귀가했다. 이제 삼남길은 공주(公州)를 벗어나 논산(論山)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면 성환, 입장, 천안, 정안과 공주를 거쳐온 삼남길 충청도 구간도 마무리 구간에 들어가게 된다. 꽤 멀리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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