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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삼남길]14구간(경천중학교~건양대학교)-경천장과 동학군! 본문
흰옷 입은 동학군이 빽빽이 밀집하여 경천 고을은 거대한 파도의 포말이 일렁이듯 했다. 그들 손에는 전부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이 들려 있었다. 그리하여 흰색 파도는 푸른 대나무밭 사이에 부서지고 있었다. '입즉백산 좌즉죽산(立卽白山 座卽竹山)'이었다. '서면 흰 산이요, 앉으면 대나무산'이라는 말이다. 흰옷을 입고 죽창을 쥔 동학군의 군세(軍勢)를 당대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 희고 푸른 군대 앞에 키 작은 남자 하나가 섰다. 전봉준이었다. 고부 관아를 점령한 이후 백산에서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대장으로 추대된 것이 1894년 3월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투에서 동학군을 이끌었던 전투 지휘관으로 작은 키 때문에 녹두장군으로 불리던 그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전 병력에게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 적힌 부적이 배포되었다. 이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면 총탄이 비껴가리라 하였다. 거기에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주문'이 더해지면 적의 총알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하였다. "하늘님을 모시면 조화가 체득되고, 하늘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깨달아진다." 는 말이니 적의 총탄 따위야 파도 앞의 모래알이었다. 드디어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목표는 공주 초입의 '우금치(牛禁峙)'였다. 우금치에는 도순무사 신정희가 이끌고 서울에서 급파된 경군(京軍) 3,200명 중 2개 대대 1,000명과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200명이 언덕 위쪽 고지를 점령하고 동학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동학군의 무기는 구식 화승총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이었다. 그에 반해 관군과 일본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일본 자체 개발의 무라타 소총,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보유한 신식 군대였다. 결과는 뻔했다. 전투는 일반적인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虐殺)이었다. 낮은 곳에서 고지를 향해 무리 지어 돌진하는 동학군은 커다랗게 움직이는 흰색 표적지에 불과했다. 신식 군대의 기관총 난사 앞에 궁궁을을 부적과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13자 주문은 허망한 비명에 다름없었다. 전투가 끝난 우금치 들판에는 피로 물든 동학군의 시신과 부러진 죽창으로 가득했다. 이 때 동학군의 전사자는 1만이라고도 하고 2만이라고도 하고 3만 6천이라도 하였다. 비정규군인 동학군의 부실한 관리체계와 정확한 전사자의 파악이 힘들 만큼 피해가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현상이다. 다만 나중에 전봉준이 순창에서 피체되어 심문받을 때 만여 명 병력 중에 전투 후 500명이 남았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1만 병력 중 9,500명이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반면 우금치를 지키던 관군과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1명에 불과하였다. 그야말로 일방적 학살이었다. 이 전투로 동학군은 와해되었고,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해 봉기한 이후 '척왜양장의(斥倭洋倡義)'를 앞세워 봉건사회의 부정ㆍ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나 공과, 그리고 봉기를 주도한 전봉준의 역사적 자리매김이나 공과는 차치하고 우금치 전투로만 국한하면 이 전투의 패배와 동학의 좌절은 철저하게 전투를 지휘한 전봉준의 책임이다. 애초에 그는 전술적 지략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고 우발적 봉기 이후를 기획하고 관리할 거시적 시각을 가지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성정과 탐관오리의 학정에 항거하는 의기에 충실하였던 의로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얻었던 승리에 대한 기억과 썩을 대로 썩은 봉건사회의 학정에 시달리다 드디어 죽창을 든 농민들의 분노 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강력한 화력을 소유한 신식 군대에 대항할 무기로 죽창과 함께 부적과 주문이라는 미신적 선동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 결과는 참패였고 그를 따랐던 무수한 농민들의 죽음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었다. 세월 많이 흘렀다. 봉건사회는 저물었고 외세도 물러갔으며 민주(民主)와 공화(共和)의 세상을 연 지도 어언 70년이 넘었다. 그동안 우리는 경제개발과 선진화를 이뤄 세계 10위권의 국력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더이상 맨주먹 붉은 가슴으로 총칼 앞에 내던져질 걱정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개명천지한 21세기 대한민국에 또다시 죽창을 들자는 요설(妖說)과 의병을 일으키자는 궤변(詭辯)이 장마철 곰팡이 피듯 스멀스멀 번지고 있다. 발단은 이념에 물든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 판결과 그로 인해 시작된 일본의 경제보복이라는 국제적 갈등 상황이었다. 애초에 시작이 선거전략과 국내정치용이었던 만큼 국제적 외교 관례나 국제조약의 처리 절차 따위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국내 정치판의 헤게모니 장악과 국민적 선동(煽動)뿐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죽창이고 의병이었다. 죽창은 강남좌파로 불리던 전 민정수석이었다. SNS에 미친 듯한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페이스북을 활용했다. 80년대 운동가요인 '죽창가'를 그의 페북에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골적으로 죽창을 들자고 선언하는 대신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며 죽창가 가사를 올려 은근슬쩍 죽창을 거론하는 교활함도 잊지 않았다. 의병을 거론한 것은 더불당 일본경체침략대책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최모이다. 학생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을 반복했던 그는 강남좌파 같은 교활함을 장착하지 못한 우직한 586 운동권 출신이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거칠고 직접적으로 선동이다. "이 정도 경제침략 상황이면 의병을 일으켜야 할 일"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현역 집권여당 중진 국회의원의 입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의병과 죽창으로 전 세계 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을 상대로 싸우자고 일반 국민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 2019년 대한민국 청와대 수석이고 여당 국회의원의 민낯이다. 일본은 2018년 기준 인구 1억 2,640만 명으로 5,170만 명인 한국의 2.4배이고 GDP는 5조 706억 불로 1조 6,556억 불인 한국의 3배이다. 그리고 1인당 GDP는 4만 106불로 3만 2,046불인 한국의 1.25배이다. 군사력 역시 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꾸준한 투자가 누적된 일본의 우위가 해군력과 공군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최신예 전투기를 미국과 합작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현대 해군력의 총아인 이지스함을 8대나 보유하고 있고 언제든지 항공모함으로 변신이 가능한 항모급 함정도 세 척이나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또다시 의병을 일으키고 죽창을 들자고 명색이 집권당 청와대의 요인과 국회의원이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농사짓던 농민들이 회사 다니던 사무원들이 공부하던 학생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손에손에 죽창을 들고 일본으로 쳐들어가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답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역사가 그 결과를 말해 주고 있다. 1894년 11월 우금치에서 죽창을 든 동학군이 일본군의 화력 앞에 어떻게 되었는가? 일본군 1명 사망에 동학군 9,500명 사망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허망한 짓을 또다시 하자고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들이 절대 본인들은 앞장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선동하지 절대로 내가 의병을 일으킬 테니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죽창가를 올려 은근슬쩍 선동만 하지 죽창 들고 나를 따르라고 앞장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120여 년 전 동학 접주들이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전쟁을 앞둔 동학 접주들은 튼튼한 갑옷과 뛰어난 전략 대신 궁궁을을 부적과 시천주조화정 주문을 농민군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 부적과 주문이면 총알이 비껴갈 것이라 하면서. 2019년 대한민국의 주사파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튼튼한 경제력에 바탕한 강력한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 '토착왜구' 프레임과 전가의 보도인 '반일정서'라는 부적과 주문을 국민들 손에 들려준다. 그리고 그 부적을 이마에 붙이고 '반일조화정' 주문을 외며 일본으로 돌진하라 선동한다. 그들은 결코 앞장서지 않으면서... 니는 길을 걷는 사람이다. 요근래 내 발길은 삼남길에 간간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발길이 공주를 지나 논산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공주와 논산의 경계에 계룡면 경천리가 있다. 경천은 예전에 경천역(敬天驛)이 있던 교통의 요지이다. 교통 발달한 곳이니 장시(場市)도 있었다. 경천장(敬天場)은 한때 공주 지방 최고의 오일장이었다. 계룡과 노성 일대의 산물이 모여들던 장터이고 논산에서 공주로 가는 교통 요지라 동학전쟁 당시 동학군의 집결지 역할도 한 곳이다. 때 이른 더위로 열기 높아 숨소리 거친데 경천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중앙에 경천장이 제법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동학군 1만 명이 집결했던 곳이라 싶어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동학군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그들의 일생은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학정으로 점철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수탈과 학정의 끝에 반란이 일어났고 손에손에 죽창을 들게 되었다. 죽창은 빈약한 일차적 무기이다. 이 빈약한 무기를 들었어도 좋은 지도자를 만났으면 그 결과가 달랐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총탄 앞에 부적과 주문을 처방하는 지도자를 만났고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와 죽음이었다. 축구장 반 개 만한 경천장은 장날이 아니어서 텅 비어 있고 자동차 두어 대만 서 있었다. 장날 아닌 장터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였다. 120년 전 그날에는 다가올 전투에 대한 두려움과 적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두려움을 잊고 적개심을 높이고자 '시천주조화정'을 소리높여 외쳤으리라. 그리고 다음날 대부분 불귀의 객이 되었다. 120년 세월이 흘렀다. 이 개명천지의 세상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으로 전 세계와 자유 무역을 하는 이 나라에 또다시 반일과 전쟁과 의병과 죽창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고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 헛헛한 마음 안고 경천장을 둘러보았다. 슬펐다. 그리고 울화통 터졌다. 경천장과 동학군! 구간 : 삼남길 제 14구간(경천중학교~건양대학교) 다시 삼남길에 나섰다. 공주를 출발해 경천중학교에 도착했던 것이 작년 10월이었으니 해를 넘긴 일이고 정확히는 8개월 만이다. 내 삼남길이 참으로 더디고 느리다. 이런 추세로 언제 해남 땅끝에 도착하겠나 싶지만, 애초 삼남길에 나설 때 내 발길에 데드라인이 없었으니 마음 급할 일은 없다. 쉬엄쉼엄 가다보면 언젠가는 땅끝에 도착하겠지... 그런 느긋한 마음으로 신발끈 동여매고 삼남길 열네 번째 길에 나섰다. 경천리/敬天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 속하는 법정리. 경천역(敬天驛)이 있어 경천(敬天)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에 공주군 익구곡면(益口曲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익구곡면의 용두리(龍頭里)·장대리(場垈里)·상성리(上城里)·석정리(石井里)·하성리(下城里)·공평리(公坪里)가 통합되어 경천리라 하여 계룡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가 되었다. 경천리의 동부 경계에는 해발 고도 100여m의 산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고, 성재가 있다. 월암천(月岩川)이 남북 방향으로 흐르고, 용두천(龍頭川)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해발 고도 40~60여m에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평야는 마을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 있으며, 화평들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월암천과 용두천의 연변에는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용두천 연변의 평야는 벼농사 지대이고, 산기슭은 밭농사 지대이다. 하천 연변과 평야 지대에 상평·장터·석정·용머리·화평 등의 촌락이 들어서 있다. 지방도 697번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뻗어 북서쪽으로는 화헌리에, 남동쪽으로는 논산시 상월면에 각각 연결된다. 이밖에도 곳곳에 소규모의 도로가 있다. <이곳저곳>
# 삼남길 14구간(경천중학교~건양대학교)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작년 가을 이후 8개월 만에 다시 경천리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논산에서 공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물산의 왕래와 사람의 소통이 많았던 곳이지만, 이제 세월 흘러 경천리는 작고 아담한 시골마을일 따름이다. # 경천교회 옆 나무그늘에 주차하고 짐을 챙겼다. 경천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마트가 있다. 그곳에서 간식을 준비했다. # 경천중학교. 휴일이라 학교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 버스정류장과 작은 구멍가게. 할머니가 운영하는 저 구멍가게에서 공주가는 버스표를 구할 수 있다. # 햇살 뜨겁고 기온 높다. 단단이 무장하고 출발했다. 비상용 우산이 햇빛 가리는 양산을 대신했다. # 논산 연산리로 이어지는 697번 지방도가 경천리를 통과한다. 이 도로는 북상하면 공주로 곧장 이어진다. 신원이용원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697번 도로는 좌측으로 휘어지고 삼남길은 우측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우측에 축구장 반 개 만한 장터가 나온다. 경천장이다. 경천장날은 2일과 7일에 열린다. 일제시대 이래 잡곡시장이 유명했던 모양이다. 우시장도 제법 규모가 있었고. 지금은 한가한 시골 장터로 변했다. 경천장은 120여 년 전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를 치르기 전 집결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전봉준 휘하의 동학남접 1만 명은 이곳 경천장터에 집결한 후 공주 우금치로 진격했다. 그리곤 500명 만 생존한 채 전멸하였다. 미신과 분노에만 의존했던 우매한 지도자와 몽매한 군사들의 모임이었으니 필연적 결과였다. 지형을 활용하는 전술과 우위 요소인 대규모 병력을 분산하여 효율적으로 운용했다면 비록 화승총과 죽창이었을지언정 그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과 그의 참모들은 애초에 그런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농투사니 출신 동학교도일 뿐이었고 궁궁을을 부적과 시천주조화정 주문이면 총탄 따위는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우매한 인물들이었다. 세월 많이 흘렀다. 세상은 많이 변하기도 하고 또 전혀 변하지 않기도 하였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 피우고 전 세계를 상대로 교역을 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또다시 의병을 일으키고 죽창을 들자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이 나라를 책임지고 있다는 정부와 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작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병이고 죽창이다. 의병을 일으키고 죽창을 들어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앞장 설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죽는 자들은 민초이고 국민이다. 그들은 뒤에서 선동만 할 뿐이다. 죽음은 또다시 백성의 일이다. 슬프고 허망한 일이다. 그런 허망하고 헛헛한 마음 안고 장터를 한바퀴 휘 둘러 보았다. 장날 뒷날이라 장터는 인적 끊어지고 고요하기만 하다. # 경천장터를 지나 면 곧 길은 마을을 벗어나 넓은 들판으로 나가게 된다. '빈재미들'이다. 노성천을 끼고 화헌리와 경천리가 넓은 들로 펼쳐진 곳이다. 들 이름인 빈재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부지런한 경천리 농부 내외가 뙤약볕 아래 감자수확이 한참이다.농사가 잘 되어 감자알이 굵고 실하다. # 탐스런 감자 씨알 구경하다가 갈림길을 놓쳤다. 느낌 이상해 지도 확인하니 갈림길을 지나쳤다. 전봇대에 적힌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틀하여 노성천 강둑으로 향한다. # 노성천 강둑 위에 올라섰다. 삼남길은 천변 강둑을 따라 길게 남하한다. # 강둑에서 경천리를 돌아본다. 계룡(鷄龍)의 산줄기가 동네 뒤쪽 멀리 우뚝하고 장쾌하다. # 자그마한 노성산 아래 상월면 소재지 입구에서 노성천을 건넌다. # 691번 지방도 통과 # 노성천을 따라 길게 남하한다. # 도로를 다시 만난다. #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내 그림자 길게 섰다. # 차돌모랭이란 마을 앞에 있는 삼거리 못미쳐 좌측 작은 소로로 삼남길은 이어진다. # 도로 아래 굴다리가 시원하다. # 잠시 작은 소로를 따르다가 # 노성로에 올라선다. # 노성산성과 명재고택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른다. # 언덕 위에 노성면 마을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있다. 그 갈림길로 접어든다. # 접시꽃 곱게 피었다. # 노성궐리사가 있다. 궐리사(闕里祠)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공자가 생장했다는 궐리촌에 그 이름의 기원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원과 이곳 노성면 두 곳에 궐리사가 있다. 둘 다 삼남길 위에 있어 궐리사를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옛사람들의 사대사상은 그 뿌리가 질기고 깊다. 대국이고 상국인 중국을 모시고 또 모셨다.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다. 궐리사는 두 곳 모두 조선조 최대의 문제적 인물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 궐리사는 입구에서 눈으로만 둘러보고 명재고택으로 향했다. # 노성면은 논산의 작은 시골 마을인데 궐리사와 명재고택 등 옛 향기 물씬 나는 곳이다. 의외의 마을이다. # 명재고택(明齋古宅)은 숙종 때 소론의 지도자였던 윤증(尹拯)의 고택이다. 윤증은 고려 때부터 이어진 파평 윤씨의 후예로 평생 벼슬하지 않고 산림(山林)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한 명망이 높아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지만 윤휴에 대한 평가와 부친 윤선거의 묘갈명 부탁에서 비롯된 '회니시비(懷尼是非)'로 갈등하였고 이들의 갈등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였다. # 명재고택 입구 숲 그늘이 서늘하였다. 등짐 내리고 신발까지 벗은 후 휴식하였다. 긴 보행으로 피로해진 발이 행복해했다. # 오래 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명재고택 입구에 윤증의 어머니 공주 이씨 정려각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순절을 택하여 나라에서 정려각을 내렸다 기록되어 있다. # 다시 길 위에 섰다. 노성면소재지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삼남길은 논산 방향이다. # 노성중학교 통과 # 저멀리 계룡의 준봉들이 우뚝하다. 예전 금남정맥 종주할 때 저곳 계룡에서 군인들과 갈등하였다. 계룡의 주봉은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일반인은 출입금지인데 우리가 가는 정맥길은 그 주봉을 넘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천황봉과 쌀개능선 관음봉 등 추억 어린 계룡의 주봉들이 정겹다. # 옥천 통과 # 둥덩골 저수지라는 작은 소류지를 만났다. 이런 작은 소류지에 의외로 월척 붕어가 많을 수도 있다. 예전 낚시꾼 시절 이렇게 숨어 있는 저수지를 찾아다녔던 적도 있다. # 여름 하늘이 저수지 수면에 내려앉았다. # 23번 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했다. # 삼남길은 노성면의 넓은 들을 가로지른다. # 그러다 노성천변을 따라 다시 길게 남하한다. # 그런데 이 길은 평소 사람의 왕래가 드물었는지 잡목과 풀이 자라 통행이 어렵다. 노출된 다리에 상처가 여럿 생겼다. # 정말 더운 날씨다. 강변 양수장 그늘에서 한참을 쉬었다. # 다시 강둑을 따라 남하. # 하도리에서 도로를 만났다. # 그러나 곧바로 항월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 뜨거운 햇살 아래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 마을회관 # 마을을 벗어나 버스정류소 그늘에서 한참을 쉬었다. # 노성천이 넓어진 곳에 큰 다리가 있다. # 노성천은 하류로 내려가며 몸집을 크게 불렸다. # 강을 건너자마자 곧바로 넓은 들을 가로지른다. 이 들의 이름은 덕평들이다. # 곧 철도 건널목을 만나 # 이번에는 철길을 따라 길게 내려간다. # 다시 건널목을 만나 이번에는 그곳을 통과한다. #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 모내기 마친 논에서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 길게 걸었다. 삼남길은 부적면으로 들어간다. # 4번 국도 아래를 통과했다. # 현대자동차 서비스센터가 있는 아호1리로 올라섰다. # 그리고 논산천 둑에 올라섰다. # 논산시내로 들어가는 계백교를 통과했다. # 논산천 둔치가 광활하다. 여름 하늘에는 흰구름이 꽃처럼 피었다. # 잠시 강둑을 따르다 곧 들판으로 내려간다. # 지산동 들판을 길게 통과했다. # 지산동 입구에서 관촉사로 넘어가는 관촉로를 만나 길을 건넌다. # 잠시 언덕을 오르다가 우측 마을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 구불구불 좁은 마을 안으로 이어지던 길은 언덕을 넘어 기민중학교를 지나고 곧 논산시민공원을 만난다. 물놀이 시설을 갖춘 시민공원에는 이이들 웃음소리 가득하다. #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전국 곳곳에 이런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많이 생긴 것은 참 잘 된 일이다. # 공원 안쪽으로 깊이 올라 갔다. # 소란스런 물놀이 공원과는 달리 안쪽은 인기척 없이 고요하다. # 그러다 공원 좌측 소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 가라 한다. # 곧 갈림길을 만나 좌측 산 위로 올라 간다. 반야산(般若山)이다. 반야는 지혜를 뜻하는 불교 용어다. 이 산 좌측에 유서 깊은 관촉사가 있어 이런 산이름을 얻었다. # 그늘진 숲길이라 걷기에 참 좋다. # 반야정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 반야산은 채 100미터가 되지 않는 낮은 산이다. 산 정상부에 안향의 동상 있다. 안향은 고려 때 원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학자로 경북 풍기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동상이 뜬금없이 이곳 은진에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의 본관인 순흥도 영주 풍기이니 이곳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일인데... # 산을 넘어 내려가면 길은 양 갈래로 갈라진다. 좌측은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로 가는 길이고 삼남길은 우측길이다. 은진의 미륵님 얼굴 한 번 보고 싶기는 하였어도 오늘 하루 뙤약변 아래 너무 오래 걸었더니 피로가 극심하였다. 다음을 기약하고 삼남길을 따랐다. # 길게 내려가니 숲너머로 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건양대학교다. 논산처럼 작은 소도시에도 대학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1991년에 개교하였다 하니 내가 모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 삼거리에 버스 정류소가 있다. 그곳에서 삼남길 14번째를 마무리했다. 옷에 묻은 먼지 털어내고 논산으로 넘어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힘든 구간이었다. 전체적으로 25km에 이르는 긴 거리가 부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강렬한 뙤약볕과 높은 기온이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한 구간을 마무리했다. 이제 충청도 구간도 한 번만 더하면 종료되고 삼남길은 전북으로 넘어간다. 지지부진하기는 하여도 꽤 멀리까지 왔다. 참으로 사람의 발걸음이 무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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