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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15구간(건양대학교~고내3리)-고내리 단상(斷想)! 본문
어느 허름한 여관에서 하룻밤 묵은 후 아침 일찍 이발소에서 머리를 빡빡 밀었다. 그때 내 머리카락은 여성들처럼 단발머리 스타일로 곱고 길게 기른 장발이었다. 여러 해 정성 들여 기른 머리카락이 민둥산으로 변하는 데는 1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허전한 머리통 쓰다듬으며 헛헛한 마음으로 논산을 떠났다. 동행이 두 명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 한 명과 대학 같은 학번의 동기 한 명이 그들이다. 그들과는 전날 열차 안에서 만나 함께 입대하는 기수라는 것을 알았고 논산에서 밤새 함께 술 마시고 여관에도 함께 묵고 머리도 함께 깎았으며 잘려 나가는 긴 머리칼을 보고 함께 울기도 하였다. 논산에서 육군훈련소가 있는 연무대까지는 택시로 이동하였다. 바짝 긴장한 표정의 어린 청년들에게 이런저런 군대 이야기를 해주던 택시기사가 도착하였다면서 어느 군부대 앞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차를 돌려 떠났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는 아연실색하였다. 그곳은 논산훈련소 입소대가 이닌 평범한 군부대였다. 택시기사가 우리를 속이고 연무대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어느 부대에 내려주고 가버린 것이다. 택시 요금도 잔뜩 바가지 씌운 것을 사회생활 마지막을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참았는데 아예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다 버린 것이다. 입소 시간까지는 30여 분밖에 여유가 없었다. 시골길이라 대중교통도 택시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뛰었다. 땀범벅에 숨은 한계까지 차올랐다. 기진맥진하여 입소대에 도착하니 입대 장병들은 모두 가족들과 이별 후 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입구에는 배웅나온 가족들로 붐볐다. 죽도록 뛰었지만, 10분 지각이었다. 정문에 서 있던 부사관이 멀리서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양손을 흔들며 환영하였다. "어서 와요. 넘어질라. 조심하고!" 중사계급의 그는 깡마른 체구에 다부진 인상이었다. 하지만 웃음 띤 그의 표정을 보자 우리는 모두 안심하였다. 그의 표정 어디에도 노여움이나 적개심은 없었다. 땀범벅에 숨을 헐떡이는 우리를 보고는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 가득이었다. 신분 확인 후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배웅 나온 가족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입대 장정들이 도열해 있는 연병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옥이 시작되었다. 가족들 보는 곳에서는 한없이 온화하였던 그의 표정은 갑자기 저승사자로 변해있었다. 일단 풀스윙의 따귀 세 대를 연달아 맞았다. 군입대에 지각하는 정신 상태를 고쳐주겠다 하였다. 원산폭격, 좌로 굴려, 우로 굴려 등의 기합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10여 분 기합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또다시 욕설로 가득한 긴 훈화 후 우리는 다른 장정들의 줄 속에 함께 설 수 있었다. 모든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아플 여가도 슬플 여가도 없었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군 생활은 시작되었고 8주일간 논산훈련소의 신병 생활은 이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한없이 지지부진하리라 싶었던 청춘의 시절이 사실은 날아가는 화살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문득 정신 차리니 장년의 언저리를 살고 있었다. 그동안 논산은 여러 가지 일로 대여섯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압축성장을 이룬 보기 드문 국가이다. 논산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읍 규모의 소박한 시골 소도시였던 옛 모습을 버린 논산은 여전히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지만, 곳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각종 소비시설과 편의시설도 갖춘 변모를 이루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논산은 한결같이 성의 없는 상차림과 터무니없이 높은 음식값, 낡은 시설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숙박비를 요구하는 인심 사나운 고장으로 각인되어 있다. 거기에는 사십여 년 전 군입대날 빡빡머리 어린 청년들에게 모진 짓을 한 논산의 택시기사의 역할이 컸다. 나는 산길과 들길을 걷는 사람이다. 이십여 년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산길과 들길을 누비느라 여러 고장을 드나들었다. 그 발길이 어느날 논산과 연무 일대에 이르렀다. 삼남길의 발길이었다. 논산시를 벗어난 삼남길은 은진을 지나 연무를 거쳐 간다. 대부분 시골길은 구불구불 휘어지고 이곳저곳 갈라지는 곳이 많다. 잠시 딴생각하다 보면 가야 할 삼남길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충청도 논산과 전라도 여산의 경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도 그랬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갈림길을 지나쳤다. 문득 보니 엉뚱한 길이다. 이정표를 확인했다. '고내리'라고 되어 있다. 고내리? 그 지명이 참 귀에 익다. 그랬다. 고내리였다. 사십여 년 전 유격훈련 받고 각개전투 훈련받던 '고내리'! 내 청춘의 땀과 눈물이 어린 고내리가 바로 거기였다. 그래 이 골목과 저 거리를 훈련받으러 오고 갔었지. 한여름이라 땀이 비오듯 쏟아져 앞줄 전우들이 흘린 땀이 아스팔트 위에 비 오듯 점점이 박혔던 그 동네였다. 몸무게 47kg의 깡마르고 가날픈 체구였지만, 악으로 깡으로 반복되는 훈련을 견뎌냈던 내 청춘의 그 장소였다. 그 이정표 아래 오래 서 있었다. 내 기억 속으로 사십 년 세월이 타임랩스 동영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아침에 눈을 뜬다는 사실이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던, 내 모든 행동이 타인의 통제 하에 구속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던, 체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오히려 정신이 명징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처음 배웠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땅끝까지 걸어가 보자 몇 해 전 시작했던 삼남길 순례가 오랜 공백을 겪으며 논산을 거쳐 충청도 구간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그 발길이 논산과 연무를 더듬게 되고 그곳 고내리에서 문득 오랜 옛 기억을 만나 오래 그 자리에 서서 홀로 깊은 감회에 빠졌다. "아, 고내리! 내 오랜 청춘의 장소여! 고통의 기억이여! 긴 세월 흘러 다시 만났구나!" 고내리 단상(斷想)! 구간 : 삼남길 제 15구간(건양대학교~고내3리)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이다. 오랜만에 삼남길 순례에 나섰다. 고속도로 길게 달려 논산에 도착했다. 이번 구간 출발지인 건양대학교 담벼락 한쪽에 주차했다. 휴일의 대학 캠퍼스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우측 반야산 등산로에도 인적은 끊겼다. 고요한 동네다. 가볍게 몸 푼 후 등짐 둘러멨다. 햇살 강렬했다. 금세 등짝이 뜨끈해졌다. 그 열기가 만만치 않을 하루를 예고하는 듯했다. 육군훈련소/陸軍訓練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1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鍊武邑)에 신병기초군사훈련을 임무로 하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기존의 제21교육연대와 교관단을 주축으로 ‘육군 제2훈련소’로 창설하였다. 그뒤 8개의 교육연대가 차례로 창설되어 9개 교육연대로 확장되었으며, 1952년 2월부터 각 교장에서 신병훈련을 시작하였는데, 교육기간은 전반기 8주, 후반기 4주씩 모두 12주였다. 1953년에는 훈련소 내에 여군교육대를 창설하고, 하사관교육대를 설치하는 등 교육대상이 확장되었고, 한국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충원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4년 9월 교육총본부 발족과 함께 그 예하에 들어갔다가 1960년 4월 제2군으로 예속·변경되었고, 1981년 10월 교육사령부가 창설되면서 그 예하로 있다가 1982년 12월 육군본부로 예속·변경되는 등 육군의 교육체계 및 교육환경 개선책에 따라 자주 부대 예속관계가 변경되기도 하였다. 1999년 2월 육군훈련소로 부대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일명 논산훈련소, 연무대라고도 한다. <이곳저곳>
# 삼남길 15구간(건양대학교~고내3리)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3개월 만의 논산 재방문이다. 지난 구간 마무리했던 건양대학교 곁 골목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 대학이 많기는 하다. 인구적고 물산 빈약한 이곳 논산에까지 대학이 생겼다. 이 학교는 91년에 설립되었다 한다. # 학교 담벼락 그늘에 주차하고 짐 꾸려 출발했다. 햇살 강하다. # 곧장 도로를 건넌 후 편의점 골목으로 들어간다. # 대학가라 원룸 건물이 많다. 요양원 우측 좁은 소로길로 삼남길은 이어진다. # 어느집 담벼락에 상사화가 만발했다. 잎보다 먼저 피어 잎을 보지 못하고 떨어지는 상사화의 꽃잎이 피빛으로 붉다. # 원룸촌을 벗어나면 와야들로 접어든다. 담벼락 벽화가 보기 좋다. # 와야들에는 나락이 익어가고 있다. 새를 쫓자고 매 모양의 연을 매달아 두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참새들이 겁을 내지 않는다. 와야는 충청도 방언으로 "왜"라는 감탄사이다. 이 동네도 충청도이니 관련이 있으려나 싶지만 유래는 알길 없다. # 와야들과 와야리 마을의 좁은 길을 구불구불 지난다. # 와야리를 벗어나 교촌리로 접어든다. # 갈림길을 만났다. 무심코 직진하였다가 삼남길을 벗어났다. 갈림길로 복귀하여 우측 길로 들어간다. # 논산은 딸기가 유명한데 이곳은 곳곳에 인삼밭이 있다. # 야산을 넘어 교촌리에 들어가면 은진향교가 나타난다. # 은진향교는 고려 우왕 때까지 역사가 올라가는 오랜 역사의 유물이다. # 공자를 모신 명륜당이 정면에 있다. 지역 교육의 장으로써 향교의 역할에는 대찬성이나 중국의 유학을 대대손손 숭배한 것은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이 날도 향교 운영과 관련한 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연세 높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향교로 모이고 있었다. 공자 사상의 흔적이 참으로 오래 이땅에 남았다. # 향교 정문이 높아 정면으로 은진 일대가 조망된다. # 오는 길에 주운 홍시 하나 먹으며 한참 휴식했다. # 오래 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은진에서는 감농사가 성하다. 길가 곳곳에 감나무가 많다. # 탑정로를 따라 잠시 북서진하다가 은진감리교회가 있는 삼거리에서 교회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 이후 은진면소재지를 통과한다. 은진(恩津)은 오랜 역사의 동네다. 백제 때는 덕근(德近), 득안(得安) 등으로 불리다 통일신라 때 덕은군(德殷郡)이 되었고 내내 그렇게 불리다 세종 때 은진현으로 개칭하였다. 현감이 파견된 지역 중심지 중 하나였던 은진이지만, 세월 흘러 역사는 유물이 되고 육군훈련소로 유명한 논산의 작은 시골면으로 한적하게 퇴락하고 있다. # 면사무소 담벼락에 비석들이 무리지어 있다. 은진비석군(恩津碑石群)이다. 은진 일대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 두었다 한다. 살펴보니 대부분 옛 고을수령들의 불망비와 공덕비들이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들은 가렴주구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제 배를 채운 뒤 다른 임지로 떠날 때는 고을 백성 명의의 공덕비를 세우게 했다. 형식상으로는 백성들의 자발적 건립이지만 실제로는 강압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덕비나 불망비는 지방 수령의 인사고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참혹한 일이다. # 은진면소재지를 벗어난 삼남길은 용신리 들판으로 이어진다. 나락 익어가는 용신리 들이 광활하다. # 시묘천 둑길도 잠시 따른다. # 억새풀이 가을 볕에 익어가고 있다. # 시묘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 이 하천은 시묘리를 흐르는 작은 하천이라 시묘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시묘(侍墓)는 조상의 산소에 움막을 짓고 망인을 기리며 모셨던 옛 풍습의 이름이다. 이 고장에 시묘로 유명한 효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 길은 이제 동산리로 접어든다. # 동산5리 마을회관 통과. # 은진면을 벗어나면 길은 이제 연무읍으로 이어진다. 1번 국도 위 고가를 통과한다. # 길게 걸어 연무읍으로 들어섰다. # 40년 만의 방문이다. 그동안 연무읍은 상전벽해를 이뤘다. 한적한 시골동네였던 곳이 이제는 아파트 단지 산재한 도시가 되었다. # 연무 고속터미널이다. 소박한 터미널에는 휴일이라 왕래가 적다. 그늘 좋은 외부 대합실 의자에 앉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화장실이 있어 양치도 가능했다. # 점심 먹으며 오래 쉬었다. 이윽고 짐 꾸려 다시 길을 나섰다. 삼남길은 연무읍 골목골목으로 이어진다. # 연무체육공원 인근에서 잠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였다. # 제법 규모를 갖춘 체육공원이다. 오거리에서 정면 언덕길로 올라가면 된다. # 체육공원 언덕을 넘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 넓은 길을 버리고 좌측 소로길로 들어간다. # 농장 언덕을 내려간다. 전방으로 툭 트인 길이 이어진다. # 강경선 철길을 통과한다. # 이 철길은 강경역과 연무대역을 잇는 아주 짧은 노선이다. 주고객은 육군훈련소의 훈련병과 군수물자다. 나는 1982년 6주간의 훈련과 2주간의 대기 후 연무역에서 열차에 올라 이 철길을 통해 강경역으로 이송되었다. 철로 위에 서서 40년 세월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 잠시 후 길은 금곡4리로 이어진다. # 그곳에는 견훤왕릉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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