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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산행]서운산/瑞雲山 - 서운(瑞雲)의 징크스! 본문
'징크스(Jinx)'란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재수 없는 일' 또는 '불길한 징조(徵兆)', '의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惡運)으로 여겨지는 것' 등을 말한다. 본래 불길한 징후를 뜻하지만, 좋고 나쁨을 떠나서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적 현상 전반을 가리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은 20세기 초반 미국 야구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해서 널리 퍼진 단어이다. 보스턴 레드삭스팀이 가지고 있던 '염소의 저주'와 '밤비노의 저주'가 대표적이고, 개인적으로는 수염을 깎으면 게임에 진다든지 속옷을 갈아입지 않아야 이긴다든지 하는 징크스가 스포츠계의 대표적 예이다. 징크스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設)이 갈린다. 첫째는 딱따구리의 일종인 '개미핥기새(wryneck)'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단어 'junx'에서 비롯됐다는 설이고 둘째는 `Captain Jinks of the Horse Marines`라는 노래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Captain Jinks of the Horse Marines`는 '기병대 대위 징크스'란 노래다. 이 노래는 'William Lingard'란 사람이 1868년 작곡한 것인데, 기병대장 징크스가 훈련을 나가서 나팔 소리만 들으면 병이 나고 말에서 떨어지는 등 불운(不運)한 일이 계속된다는 가사로 되어 있다. 징크스란 의미가 예전보다는 근래 활발히 사용되는 말이라 두 유래 중 기병대 대위 징크스가 더 신빙성이 있다 여겨지는 모양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징크스와도 같은 의미이니 징크스 대위의 불운이 진짜 유래가 맞을 듯싶다. 유래야 어떤 것이든 징크스는 참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승부의 세계를 살고 있는 스포츠 선수들이 온갖 징크스에 시달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스포츠 선수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현대인은 전쟁 같은 나날을 산다. 집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맞이하는 일상은 그 자체로 전투 상황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황을 주도적으로 컨트롤하지 못한다. 주도하지 못하면 상황에 끌려가게 된다. 따라서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역설적이게도 운명지향적(運命指向的)이 되기 쉽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사람은 갖가지 재미있는 징크스를 누구나 한두 가지 쯤은 가지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여서 길을 갈 때 꼭 왼발부터 걷는다든지,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든지, 아침에 일어나 욕실에서 거울을 볼 때 꼭 웃으며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든지, 운전할 때 666이 들어간 번호를 보면 기분이 나쁘고 1004, 2004 등의 번호를 보면 기분이 좋다든지 하는 나름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징크스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환경에서 좋지 않은 일이 반복되거나 그렇다고 믿는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징크스가 생기거나 있던 징크스가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새로운 징크스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안성 '서운산(瑞雲山)'에 관한 징크스이다. 서운산은 안성 서운면과 진천 백곡면에 걸쳐 있다. 주 등로가 안성 청룡사 쪽에 있어 흔히 안성 서운산으로 불린다. 높이 547m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금북정맥(錦北正脈)이 칠장산에서 출발하여 칠현산과 배티고개를 거쳐 천안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우뚝 솟아 있어 존재감이 남다른데 있는 산이다. 고려 시대의 사찰인 청룡사(靑龍寺)를 그 품속에 안고 있다. 공민왕 때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 절을 중건(重建)하였는데, 청룡이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아 절 이름을 청룡(靑龍), 산 이름을 서운(瑞雲)이라 지었다 전해진다. 나는 금북정맥 종주를 할 때인 2007년 8월에 이 산을 지났다. 꼭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백두대간 졸업 이후 느닷없는 질병을 얻어 좌절하였다가 다시 회복하여 산길을 걷고 있던 때라 정맥에 대한 열정은 넘쳤지만, 체력적으로는 늘 살얼음 걷듯 조심스러웠던 시절이다. 8월 무더위가 절정일 때 배티재를 출발하여 서운산을 올랐다. 서운산 정상에 접근하다 커다란 뱀을 만나 혼자 식겁하기도 했다. 더운 날이라 정상에 오르니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때는 술을 극도로 조심하던 때라 도시락과 물만 챙겨 산길을 걸었는데, 정상 입구에 막걸리 장수가 있길래 딱 한 잔 사 마셨다. 시원한 막걸리로 기분이 좋아져 막걸리 장수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마침 그이가 정맥과 대간에 대한 지식이 있던 사람이라 꽤 오래 같이 얘기를 나눴다. 한참을 둘이서 놀다 갈 길 바빠 작별하고 정맥을 이어갔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정상 입구에서 좌측길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정상 부근의 표지기를 모두 제거해 버려 길 찾는 데 한참 애를 먹었다. 일단 산행기에서 말한 대로 좌측길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 헬기장을 지나고 산의 사면도 우회했다. 그런데 지도상 지형과 많이 달랐다. 알바였던 것이다. 표지기도 없고 일반 산객들은 정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니 길을 물어도 정답이 없었다. 결국, 내려갔던 산길을 다시 꺼이꺼이 되밟아 정상으로 돌아갔다. 한 시간 가까이 헤맨 모양이다. 땀범벅이 되어 정상으로 돌아가니 막걸리 장수가 왜 아직 이 근처에 있냐고 깜짝 놀랬다. 이번에는 술 대신 물 한 잔 마시고 정신 가다듬어 지도를 정치(正置)했다.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가자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그곳에서 좌측으로 가니 올바른 정맥길이 이어졌다. 지도보다는 산행기에 표현된 정상에서 좌측길이란 말만 믿었던 것이다. 좌측길은 좌측길이로되 정상 갈림길에서 내려가 다시 만나는 갈림길에서 좌측길이었던 것이다. 그날 힘들게 서운산을 통과한 이후 서운산은 다시 찾을 일이 없었다. 이후 육칠 년간 1대간 9정맥 완주에 집중했었고, 완주 이후에는 100대 명산이나 올레길 등에 다시 관심이 갔던 탓이다. 그러다 야영 산행으로 다시 방향을 잡아 여러 곳의 새로운 산을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렇게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 세월 이후에 다시 서운산을 찾을 일이 생겼다. 홀산의 2017년 가을 모임이 서운산으로 결정된 것이다. 우리 홀로 산꾼들은 공식적으로 일 년에 딱 두 번 만난다. 초봄에 하는 시산제(始山祭)와 가을에 하는 가을 모임 두 차례이다. 그 두 번의 행사 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홀로 산꾼들이 사발통문을 듣고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산 얘기와 살아가는 얘기도 나누며 곁들여 막걸리 잔도 함께 나눈다. 이번에는 서운산이 간택되었다. 서운산에는 야영하기 좋은 헬기장이 두어 곳 있다. 인근 백패커들에겐 꽤 알려진 곳이고 주말이면 늘 한두 팀은 눈에 띄는 곳이다. 나 역시 그곳의 존재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아직 서운산 헬기장은 미상봉(未相逢)이었다. 오랜 산 동무들과의 만남과 서운산과의 해후가 한꺼번에 이뤄지는 것이니 열 일 젖혀두고 무거운 야영 짐을 챙겼다. 청룡사 입구에 주차하고 무거운 등짐 짊어졌다. 땀 뻘뻘 흘리며 산길을 걸어 좌성사(座聖寺)에 도착했다. 꽤 멀고 힘들었다. 다시 산길 조금 걸어 모임 장소인 헬기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산 동무들과 반가운 만남을 가졌고 다시 밤중에 도착한 동무들과도 해후(邂逅)했다. 긴 밤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술이 등장했고 여러 얘기들이 오갔다. 나중에 술 취하고 몸 지쳐 텐트 속으로 들어갔는데, 체력 좋은 산꾼들은 더 오래 남았던 모양이다. 뒷날 쓰린 속을 해장하고 짐 꾸렸다. 술이 아직 고픈 사람들은 헬기장에 남고 나머지는 정상을 향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하듯 탕흉대와 서운산성, 그리고 헬기장을 거쳐 정상에 도착했다. 서운산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은 산이다. 십 년 전에도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는 많은 산객들이 정상을 찾고 있었다. 서운산정은 십 년 만의 재방문이다. 그동안 데크나 쉼터 등 편의시설이 많이 생겼고 새로운 정상 표식도 생겼다. 정상 입구의 막걸리 장수는 그대로이다. 다만, 십 년 전의 그 사람인지는 기억이 없었다. 정상 찍고 조망 감상한 후 하산하였다. 갈림길을 지나 헬기장에 내려서는데, 우리 팀 몇몇이 올라오고 있다. 망설이다 늦게 출발한 모양인데, 우리더러 정상을 다시 올라가잔다. 아직 간밤의 숙취가 덜 빠져 온몸이 녹작지근하여 거절하였지만, 워낙 완강하다. 꺼이꺼이 끌려가다시피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그이들과 정상에서 단체 사진 찍고 정상석과 또 한 번 재회했다. 그리고 정상을 물러 나오는데, 문득 오늘 또 정상을 두 번 올랐음을 느꼈다. 십 년 전 금북정맥 종주할 때 알바 때문에 정상을 두 번 올랐고 오늘은 야영 왔다가 동무 때문에 다시 정상을 두 번 오른 것이다. 결국, 서운산은 두 번 방문에 정상은 네 번을 찍은 것이다. 나에게 있어 서운산은 반드시 복습(複習)이 필요한 산이 된 것이다. 난감한 일이다. 우연이겠지만 새로운 징크스의 탄생이다. 물론 두 번의 반복 만으로 징크스가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나같이 전국 곳곳의 산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서운 정도의 산을 여러 번 찾기는 어려운 일이라 같은 행위가 두 번 연속 일어난 것은 예삿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제 언제 다시 서운산을 찾을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번 만남처럼 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 그보다 빠를 수도 있다. 다시 그때 서운의 정상을 두 번 찾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때도 그렇다면 진정한 징크스의 성립이라 할 수 있겠지. 그 결과가 궁금하다. 서운(瑞雲)의 징크스! 일시 : 2017년 10월 28, 29일. 흙과 해의 날.
2017년 홀로 산꾼들의 가을 모임이 확정되었다. 해마다 가을 모임은 야영산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올해는 서운산이 낙점되었다. 서운산은 예전에 금북정맥 종주 할 때 지난 곳이다. 다만 그때는 마루금으로만 지났고 갈 길 바빠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 서운산 정상 부근에 있다는 헬기장에서 하룻밤 별 보며 산동무들과 막걸리 한 잔 나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홀로 산길 걷는 사람들이라 일 년에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사람이 대부분이다. 원래 이날은 다른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동무들 때문에 행사는 마눌 혼자 가고 나는 산꾼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집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좀 넘게 달리니 안성 엽돈재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나타난다. 바우덕이 묘지가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자 갈림길이 나온다. 엽돈재는 곧장 고개를 치고 올라 가고 청룡사는 좌측길로 가야 했다. 좌회천 하자마자 억새꽃 하얗게 피어 있는 청룡저수지가 나온다. 서운산/瑞雲山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금북정맥(호서정맥)에 속해있으며 높이는 해발 547m이다. 옛 이름은 청룡산(靑龍山)으로, 고려 원종 6년(1265년) 명본국사가 창건한 대장암을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건하였는데, 이때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靑龍寺)로, 산 이름은 서운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서쪽 봉우리에 단이 있고 아래에 세 우물이 있어 가뭄을 만나면 우물을 깨끗이 하고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고 되어있는 등, 오래전부터 영험한 기운을 가진 산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아담하고 바위가 거의 없는 유순한 산세를 지녔고 봄이면 계곡과 능선으로 진달와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초입의 청룡저수지에는 벚꽃이 만발하다. 산의 서쪽능선부로는 둘레 약 620m의 반면식 토축산성인 서운산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이 수축하였다고 전하나 출토유물로 보아 초축 시기는 삼국시대로 보이며, 성안에 높이 2m의 석불과 용굴(龍窟)이 있고 남문터 밑으로 약천암과 토굴암이 있다. 성 북쪽의 봉우리인 탕흉대는 서운산 최고의 전망대로 안성평야가 펼쳐지는 가운데 평택·성환·천안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일대로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청룡사는 본래 고려 공양왕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세종 6년에 옮겨졌고, 이후 인조의 셋째인 인평대군이 원당으로 삼은 이후 사세가 확장되었는데, 현재 명본국사가 세운 삼층석탑, 공민왕 때 건립되어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는 대웅전(보물 제824호)과 조선 현종 때에 만든 800근 동종 등의 문화재가 전한다. 그러나 청룡사는 무엇보다 조선시대 남사당패의 근거지로 유명하다. 남사당패는 안성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유랑연예집단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며 생활하다가 겨울이면 청룡사로 들어와 지냈다. 남사당패의 우두머리는 여성 최초의 꼭두쇠인 여장부 바우덕이로 노래와 춤·줄타기가 일품이었다고 전하는데, 경복궁 중건 당시 위무 놀이판에서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불당골에 남사당마을이 남아있으며, 청룡사 초입의 청룡천변에 바우덕이의 묘가 있다.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서운산 지형도.(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 청룡저수지. 꽤 규모가 있는 계곡형 저수지이다. 이런 계곡형 저수지는 물고기 힘이 좋고 색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곳 청룡저수지는 서운산과 청룡사가 유명 나들이 장소가 되면서 유원지로 역할하는 모양이다. # 전국 어느 유원지에나 공통적으로 있는 오리배가 떠있다. 아, 우리나라는 너무 창의력이 없어 큰일이다. # 사람들의 창의력은 떨어져도 자연은 정말 아름답다. 산에는 단풍잎 곱게 물들었고 저수지 둑에는 억새꽃 하얗다. # 바람 좋고 햇살 좋은 가을 오후다. 그 햇살과 바람 맞으며 억새꽃이 은빛 자태를 뽐내며 춤춘다. # 갈 길 바쁜데 억새꽃 예뻐 쉬 떠날 수가 없었다. 오래 그 저수지 둑에 머물며 억새꽃 구경하였다. # 오늘 우리 집결 장소는 좌성사 위에 있는 헬기장이다. 좌성사는 산의 8부 능선 쯤에 있다. 꽤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하지만 그곳까지 임도가 이어져 있어 자동차가 올라 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 동무들은 다들 자동차로 올라 갔을 것이다. 산에서는 펄펄 나는 사람들이지만, 산 아래에서는 '삼 보 이상은 승차'를 기본으로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였다. 편하게 좌성사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나라고 다를 일 있나? 하지만 매주말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산길 오르던 사람이 오늘이라고 예외를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땀 한 번 쫘악 흘려야 한 주를 마감하는 기분이 제대로 들기 때문이다. 결국, 청룡사 입구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 가기로 했다. # 나는 야영 갈 때 두 가지 배낭을 사용한다. 추동계는 MR 그리즐리, 다른 계절에는 그레고리 발토로를 멘다. 그동안 빨간 발토로 배낭을 열심히 메고 다녔는데, 이제 날 추워져 짐 부피 늘어나니 그리즐리가 필요한 계절이 되었다. 오랜만에 무게감 있고 덩치 큰 그리즐리를 멨더니 배낭 무게중심이 달라 처음 얼마동안은 적응이 쉽지 않다. 지난 오월 휴대폰을 바꾼 이후 그동안 사용하던 무거운 DSLR 카메라는 집에 처박아두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결과물이야 상대가 되지 않지만, 무게 줄어 들고 사용하기 간편하니 큰 불만이 없다. 대신 셀카 사진이 종종 끼어든다. DSLR 카메라로는 언제나 풍경 혹은 타인의 사진을 찍었는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이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한두 장씩 찍게 된다. 그리고는 깜짝 깜짝 놀랜다. 아... 나이 들었구나! 아... 살 많이 쪘구나! # 등짐 짊어지고 출발했다. 길 따라 조금 오르니 버스정류소가 나온다. 청룡사 종점이다. 정류소 우측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청룡사와 서운산은 이 고장 최고의 관광지가 된 모양이다. 넓은 주차장에 차량이 가득하다. # 조금 더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길이 청룡사 가는 길이다. # 그 길 한 가운데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청룡사사적비(靑龍寺事蹟碑)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원제는 ‘조선국 경기도안성 서운산청룡사 중수사적비(朝鮮國京畿道安城瑞雲山靑龍寺重修事蹟碑)’이다. 청룡사를 중수한 후 그 공사에 관한 업적을 기록한 내용인 것이다. 청룡사의 역사와 공사에 공이 있는 사람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숙종 46년인 1720년에 건립한 비석이다. # 느티나무 좌측으로 올라갔다. # 그곳에 청룡사가 있다. #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인 1265년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공민왕 13년인 1364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 이 절은 남사당패의 근거지로 더 유명하다. 원래 안성은 평택, 천원, 대덕과 더불어 남사당패가 놀이판을 벌이던 고장이었는데, 안성의 남사당패는 이곳 청룡사에 그 적(籍)을 두고 있었다. 나는 청룡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오늘은 갈 길 바쁘니 그냥 바깥에서만 보고 내일 하산하여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뒷날 동무들 찾느라 까맣게 잊고 말았다. # 어느새 계절 깊어 단풍잎 붉게 물들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저 잎 다 떨어지고 흰눈 그 가지 위에 매달릴 것이다. # 좋은 길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차소리 들리더니 SUV차량 한 대가 서고 낯익은 얼굴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진주 산꾼인 객선상이다. 호박씨님과 설악에서 몇일 헤매다 모임에 참석하러 오는 길이란다. "헹님, 짐 싣고 타이소!" 라고 하면서 타기를 권한다. 잠시 망설였다. 지금 이 차를 타면 편하게 올라 갈 수 있지만, 땀을 못 흘린다. "먼저 가시게, 나는 땀 좀 흘릴라네!" 두 사람 먼저 올려보내고 나는 계속 좌성사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곧 후회 많이 하였다. 그냥 편하게 차 타고 갈 것을 괜히 고집 피우다 힘 들기만 하였구만... # 시각이 꽤 늦은 때라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다. 좌성사까지는 아직 2km를 더 올라가야 한다. #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이 그야말로 울긋불긋이다. # 갈림길에서 대형배낭을 멘 산꾼을 한 사람 만났다. 좌성사 헬기장에 오늘 여러 팀이 와서 시끄러울테니 정상쪽으로 가기를 권하다. 이 지역 산꾼인 모양이다. "나도 그 팀 중 일행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 서운산에도 단풍 물들었다. # 이정표 거리가 2.2km로 더 늘어났다. # 윗쪽으로 오를수록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한다. 낙엽송 군락 통과. # 은행잎 깔린 길에서 잠시 쉬었다. # 구불구불 경사로를 한차례 찐하게 밀어 올렸다. 일반 승용차는 못 오를 길이다. 갈림길이 나타난다. 은적암 갈림길이다. 온 몸이 땀범벅이라 그곳에서 짐 내리고 쉬었다. # 길어진 햇살이 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 오랜만에 동계 배낭을 멨더니 힘이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동계배낭은 덩치가 커서 이것저것 짐을 더 챙겨 넣게 된다. 지난 주에 비해 최소 십 킬로그램은 더 나가지 싶다. 동무들 많아 음식물도 좀 더 챙기고, 술도 한 병 더 넣었다. 무겁다. 힘 들고! # 좌성사까지 올라갔던 차량 한 대가 산을 내려간다. 먼지가 풀썩 풀썩 일어난다. 차 두고 걸어 온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 알겠다. # 두어 굽이 더 돌아 올라가자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정상으로 가게 된다. 좌성사는 좌측길로 한참을 더 가야 한다. # 왕눈을 가진 산림청 캐릭터 인형이 있다. 저 넘을 한밤중에 산길에서 만나면 놀래서 뒤로 넘어가게 된다. 여러 해 전 산 동무들과 장마철에 청계산 우중 야영을 한 적 있다. 동무들은 양재동 옛골에서 대낮에 일찍 올라 가고 나는 의왕 청계사에서 어두워진 뒤에 올라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물안개 짙어 한 치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밤이었다. 절고개를 올라 석기봉을 향해 홀로 칠흙같은 밤길을 더듬었다. 헤드랜턴 빛은 물안개에 산란되어 일이 미터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데 갑자기 내 전등 불빛 속에 눈깔 커다란 괴물이 불쑥 나타났다. 얼마나 놀랬던지 "어이쿠~"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바로 저 산림청 캐릭터였다. 산림청은 속히 저 민폐의 캐릭터를 다른 것으로 바꾸든지 없애든지 해야 한다. # 좌측 길을 선택해서 좌성사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큰 오르내림 없는 편안한 길이다. # 무거운 등짐 때문에 힘은 들지만 이렇게 고요한 숲길을 홀로 걷는 재미가 좋다. # 좁다란 고개 하나가 나타난다. 직감적으로 다왔음을 느낀다. # 우리 동무들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 오래 같이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 차도 안면이 있어 낯익은 녀석들이 보인다. # 아래로 내려 한 바퀴 돌자 좌성사가 나타난다. # 전방이 트인 산의 사면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사찰이다. 자리가 좁아서 그렇지 앉은 자리는 기가 막히는 곳이다. # 전방으로 안성들이 내려다보인다. # 그 뒤로는 입장, 성환, 천안의 들녘이다. #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좌측으로 뻗어가고 있다. 부소산, 위례산, 성거산, 태조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의 산그리메가 첩첩하다. # 예전 호남정맥 종주할 때 엄청나게 무더운 날 산행 막바지에 물이 떨어져 정맥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순창의 석탄사(石灘寺)로 물을 구하러 갔다. 석탄(石灘)이란 돌이 여울처럼 흘러내리는 곳이란 뜻이다. 이곳 좌성사처럼 절벽 위에 자리하여 전방으로 툭 트인 조망이었다. 그곳 스님이 지친 나그네를 위해 시원한 물과 오미자 음료, 감자와 간식 등을 넉넉히 챙겨 주셨다. # 석탄사와 좌성사는 여러 모로 비슷한 곳이 많은 곳이다. 둘 다 정맥 자락에 있는 사찰이고 절벽 위에 자리하여 전방으로 기가 막힌 조망을 보여 주는 공통점이 있다. # 좌성사(座聖寺). 성(聖)스런 곳에 자리한 사찰이란 뜻인 모양이다. 한 백 년 정도 된 사찰이다. # 자그마한 대웅전이 넘어가는 오후 햇살 속에 고즈넉하다. # 경치 좋아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 대웅전 뒤켠에 샘터가 있다. # 탕파에 넣어 끓일 물이 필요하였다. 짐 내리고 물을 보충하였다. # 잠시후 아는 얼굴이 산위에서 내려온다. 먼저 도착한 동무들이 물 구하러 내려왔다. # 반갑게 악수하고 그들과 헬기장으로 향했다. # 산 위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아는 목소리다. 산 아래에서 만났던 객꾼은 천하가 다 아는 '길치'다. 그는 전국 모든 산길에서 엉뚱한 길로 벗어나는 알바를 한다. 이곳 좌성사 헬기장은 지난번 모임 때도 몇몇이 알바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객꾼이 길 잃었을 가능성 높다. 나중에 확인하니 정확하였다. 차 타고 나보다 한 시간 먼저 올라 간 그들과 내 도착시간이 똑 같았다. 좌성사까지 자동차로 올라 와서는 바로 뒤에 있는 헬기장을 놔두고 정상으로 올라 간 것이다. 대단타! 그 정신으로 백두대간, 정맥, 지맥을 넘어 왜국의 산까지 두루 섭렵하고 다니다니... # 조금 올라가자 산의 사면을 따라 토성과 석성이 섞힌 형태로 평탄하게 조성된 곳이 나온다. 서운산성터이다. 서운산성은 역사가 깊다. # 전하기는 임란 때 의병장 홍계남이 수축하였다 전해지나 삼국시대까지 그 연원이 올라가는 옛 성터이다. 의병장의 힘으로 세울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그 역사를 증명하였다. 실록에는 왜란 당시의 기록이 있다. 선조 30년인 1597년 2월 25일 기록에 거론하기를, "安城亦有瑞雲山城 大且堅固 郡人不欲入無限山城 故欲築而守之 但以拒大路甚遠 物力不足 故不爲矣 (안성역유서운산성 대차견고 군인불욕입무한산성 고욕축이수지 단이거대로심원 물력부족 고부위의 ; 안성(安城)에도 서운 산성(瑞雲山城)이 있는데 크고 견고합니다. 고을 사람들이 무한 산성(無限山城)에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성을 쌓아 지키려고 합니다. 다만 대로(大路)를 방어하기에 너무 멀고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므로 하지 못합니다.) 대신들이 수원 독성에 관한 보고를 올리면서 인근에 있는 서운산성의 상태를 함께 보고한 것이다. # 서운정이란 시멘트 정자가 있다. 안성 산꾼 팔광이 말하기를 겨울에 심하게 추우면 이곳에서 야영하기도 한단다. # 서운정을 지나 산을 돌아 올라 가자 오늘의 목적지인 헬기장이 나온다. 억새 많이 자라 헬기장으로서의 기능은 약해 보이는 곳이다. 먼저 온 동무들은 이미 집을 세우고 막걸리도 한 순배 돌린 뒤다. # 오랜만의 동계배낭 착용이라 험한 산길 아니지만 제법 힘들었다. # 나도 집부터 한 채 세웠다. 이번에는 마눌과 떨어진 혼자 몸이라 바우데 호간을 가져왔다. 이 텐트는 2인용이지만, 폭이 좁고 출입구가 세로 방향 한 곳이라 혼자 쓰기 알맞다. 결로 적고 입구에 작은 전실이 있어 신발이나 짐을 수납하거나 비올 때 음식 조리하기 좋다. 대신 자립이 되지 않는 흠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마눌과 함께 산행을 다니느라 이 넘을 삼사 년 넘게 방치해 두었다. 오랜만의 설영이라 설치 방법을 잊어 먹었다. 한참 버벅거린 후 겨우 기억을 되살렸다. 방치해 두었더니 폴대 내부의 고무줄 스트링이 늘어났다. 집에 돌아가면 수리해야 겠다. # 각자 집 짓고 헬기장 중앙에 집결하였다. 타프 하나 둘러 밤 이슬 피하였다. # 우리는 원래 홀로 산꾼들이라 제각기 자기 먹을 것은 항상 챙겨 다닌다. 가을 모임의 콘셉트 자체가 그렇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성에서 모임이 있는 지라 안성 산꾼들의 각오가 남달랐다. 자기 고장을 찾은 산동무들을 호강시킬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특히 대방님은 집안 살림을 전부 갖고 왔다. 자신이 정성들여 키운 토종닭 세 마리와 각종 채소, 미리 끓인 닭죽, 연잎밥과 오곡밥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그가 직장생활 중에도 새벽과 저녁에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키워낸 농작물들이라 맛과 정성이 깃든 음식들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안성막걸리 사랑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성막걸리를 동반하였다. # 엄청난 정성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 우리는 그저 그들의 정성에 감사하며 맛나게 먹고 마시면 되었다. # 익산 파산적은 지난 여름 미륵산에서 심을 보았던 모양이다. 미륵산은 그렇게 심심유곡이 아닌데, 그 품속에 저런 보물을 감추고 있었다. 대단한 일이다. 파산적이 그 중 하나를 술로 담가 산삼주를 만들었다. 그 귀한 산삼주가 이곳 서운산에 등장했다. # 각 지역의 막걸리와 중국 술이 오고가던 술자리가 갑자기 활기를 띄었다. 산삼주라고 하니 다들 입에 침이 고인 것이다. 나도 한 잔 가득 마셨다. 작은 한 뿌리임에도 삼냄새 가득하였다. 술에게 약효 다 내어 주었을 삼은 술안주가 되었다. # 보름이 가까웠는지 하늘에 보름달 둥실하였다. # 토요일에도 근무하는 동무 두 분이 늦게 합류하여 성원을 이뤘다. # 성원을 이뤘으니 본격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만 남았다. # 올해 처음 만나는 동무들도 있어 그동안의 안부와 산길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등 화제가 풍부하였다. 술도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였다. 서울막걸리, 안성막걸리, 맥주, 빼갈, 양주, 복분자주, 산삼주까지... # 대방님의 농장에서 공수된 신선한 채소와 각자의 배낭에서 나온 안주들이 줄을 이었다. # 마실 것 다양하니 산길 이야기도 다양하였다. 밤새 히말라야 얘기 들을 각오하고 왔는데, 주인공이 다른 일정으로 불참하였다. 히말라야 다녀 오신 분이 안 계시니 JMT 다녀 온 이가 미국나라 산 이야기를 풀어낸다. # 술 다양하고 화제 다양하였다. # 다있소 상점에서 산 삼천 원짜리 삼각대가 자끈둥 부러지는 바람에 휴대폰을 의자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달과 노란 텐트가 함께 들어간 허접한 사진을 한 장 건졌다. # 내 텐트 사진은 늘 빨갱이였는데, 오늘은 노랭이 사진으로 연출되었다. 덤으로 나뭇가지에 걸린 달과 별도 두어 개 들어왔다. 노란 색이 아늑한 맛이 더 있긴 하다. # 술 취한 사람들이 하나둘 각자 텐트 속으로 사라지고 깡 좋은 사람들만 늦게까지 남았다. 새벽까지 버티긴 했는데, 술이 너무 올라 끝까지 남진 못했다. 이들 남기고 텐트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그 후로도 오래 남았다. # 숙취가 심해 아침에 눈 뜨기 어려웠다. 간밤에 도를 넘겨 너무 심하게 달린 것이다. 정말 근래 보기 드문 술자리였고 찐한 밤이었다. 꿀물 한 잔 주셔서 시원하게 마셨다. 이윽고 해장국으로 쓰린 속을 달랬다. 반면 아침부터 해장술을 마시는 이도 있다. 대단하다. # 이 헬기장은 억새 많이 자라 편안한 싸이트 풍부하지 않은 단점은 있지만, 고요하고 바람없어 동계에 아주 적합해보였다. # 몇 년 만에 자기 존재의 의미를 되찾은 내 노랭이 텐트. 우리 집에는 몇 년이 가도 필드 구경을 못하는 텐트와 쉘터가 대여섯 개는 된다. # 아침 끓여 먹고 주변 정리하였다. 그동안 어젯밤 정상 부근 헬기장에서 야영한 이 지역 산꾼들이 내려왔다. 그 중에는 어제 산 아래서 나와 만났던 산꾼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안성 토박이인 팔광의 지인이었다. # 술에 깊은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야영지에 남아 술과의 한 판 승부를 계속 하고 나머지는 정상을 향해 떠났다. # 한 차례 오르자 전방이 트인 전망대가 나온다. # 탕흉대이다. # 탕흉대는 서운산 제일의 조망지로 전방으로 조망이 트인 곳인데, 오늘은 박무 짙어 근처의 단풍만 눈에 들어온다. # 바로 아래에 활공장이 있다. # 바위에 탕흉대(盪胸臺)한 글씨가 적혀 있다. 盪은 '씻을 탕'이다. 가슴을 씻어내는 곳이란 뜻이다. 다른 의미로는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풍광의 장소란 뜻이다. 풍수지리 어쩌고 하는 말도 적혀있더라만 글 그대로 해석하면 될 일이다. # 탕흉대를 떠나 정상을 향했다. #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서운산성의 성벽 길이다. # 편안한 길이다. 가을 낙엽 가득하여 발 아래가 푹신하다. # 달총각 사진에서 내 모습 하나 빌려 왔다. # 바람 좋은 곳에 막걸리 장수가 자리하였다. 향긋한 막걸리 냄새 가득하다. 간밤에 많이 달린 우리는 그냥 통과. # 좌성사 입구 우측에서 올라 오는 갈림길을 만났다. 어제 정상으로 잘못 올라간 이들은 이곳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 가을 냄새 가득한 숲길이다. #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정상으로 갔다. # 한 차례 올라가자 아주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 # 굉장한 규모다. 간밤에 이곳에서도 텐트 몇 동 불 밝히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곳은 새벽같이 올라오는 부지런한 등산객 때문에 일찍 철수해야 하는 곳이다. # 조금 더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 엽돈제로 넘어가는 금북정맥 갈림길이다. 나는 예전에 이곳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이 일대에서 한참이나 길을 잃고 헤맸다. 그때는 이런 이정목이 전혀 없던 시절이다. # 안성 산꾼 둘이서 만든 이정표가 아직도 붙어 있다. 이 갈림길에 이정목이 생기기 전에 하도 알바 하는 이들이 많아 대방님과 팔광 둘이서 만든 것이다. # 서운산은 이 고장 인기 최고의 산이다. 서울 근교 어느 산에 못지 않은 인파다. 안성 산꾼들 말로는 인근의 평택, 천안에서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 전에 없던 편의시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 곧 정상에 도착했다. 꼭 십 년 만의 방문이다. 저 정상석은 예전 그대로다. # 정상석 뒤에 나무 데크로 새로운 정상이 꾸며졌다. # 조망 좋은 곳인데, 오늘은 박무 짙어 조망이 약하다. 다만 전방의 탕흉대만 보인다. # 먼 곳은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의 풍광은 아름답다. 단풍 붉게 물든 숲 위로 낙락장송 우뚝하다. # 서운산은 그다지 높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그 이름 잘 알려진 산이었다. 옛 시절에는 지금처럼 빼어난 산을 찾아 도락(道樂)으로 산을 오르는 일은 드물었다. 다만 명산대천에 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를 올리는 영험한 산이 이름 있는 산이었다. 이곳 서운산도 그런 산이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그 기록이 있다. "近來 連歲不熟 民不粒食 今年之旱 比前尤甚 亢陽數月 禾稼盡槁 言念及此 良用惕慮 凡祀典所載 靡所不禱 未見一雨之效 考諸輿地勝覽 禱雨有應 如京畿則積城 龍池 龍頭山安城 瑞雲山 (근래 연세불숙 민불립식 금년지한 차전우심 항양수월 화가진고 언념급차 양용척려 범사전소재 미소부도 미견일우지효 고제여지승람 도우유응 여경기칙적성용지 용두산 안성서운산 ; 근래 해마다 흉년들어 백성이 곡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금년의 가뭄은 전에 비하여 더욱 극심하여 두어 달이 넘게 가물어 곡식이 모두 말라버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참으로 두려운 마음 간절하다. 모든 사전(祀典)에 실린 바에 따라 기도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아직 한 번도 비가 오는 효과를 못보았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면 비를 빌어 응답이 있는 곳으로는 다음과 같았다. 경기도에는 적성(積成)의 용지(龍池)·용두산(龍頭山), 안성(安城)의 서운산(瑞雲山)이다.)" 중종조에 가뭄이 극심하여 왕이 팔도 관찰사에게 명산을 찾아 기우제를 지내라고 하명한 내용이다. 오늘 우리는 서운산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 산이 이 지역에서 이렇게 인기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예전에 이 산이 하늘에 제를 올리던 신성한 산이었고 명산이었음이 오늘 사람들에게 말 없이 전해진 모양이다. # 어느 부부가 정상표지목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좋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 함께 즐기니 얼마나 좋은가? 허락 없는 사진이라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 왁자지끌하였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소음이다. 정상에 모여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정상 찍고 서운산정과 작별했다. 많은 사람들의 소음을 뒤로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금북정맥 갈림길 쯤 내려갔을 때 아래에서 우리 팀이 올라 온다. 정상 기념사진 남겨야 하니 다시 올라 가잔다. 간밤의 술기운 아직 남아 몸이 녹작지근하여 거절하지만 워낙 완강하다. 강권에 못 이겨 다시 정상으로 올라갔다. 하루에 서운산 정상을 두 번 찍은 것이다. 단체 사진 남기고 다시 하산하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하니 지난 번 금북정맥 할 때도 이곳 정상을 두 번 찍은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금북 갈림길을 찾지 못하고 청룡사 쪽으로 하산하는 바람에 다시 정상으로 복귀했던 것이다. 결국, 서운산은 두 번 방문에 네 번 정상을 찍은 것이다. 새로운 징크스의 탄생이다. 서운산은 왔다 하면 정상을 두 번 오르게 되는... # 아래로 조금 내려 헬기장에 복귀했다. 안성 팔광의 가방에서 막걸리가 나왔다. 그런데 이 청춘 그 많이 남은 안주 모두 버리고 술만 챙겨 왔다. 깡막걸리 한 잔씩 돌리다 아쉬웠는지 현지에서 안주를 조달한다. # 대단한 입심이다. 헬기장 한 쪽에서 식사 중인 어느 지방에서 왔다는 단체 팀에게 가더니 맛난 안주를 얻어 왔다. # 안주 생겼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한 잔 마셔 보세! 고마운 술과 음식으로 가볍게 정상주를 갈음했다. # 막걸리 들어가 든든한 배를 안고 다시 길을 나섰다. # 탕흉대 길이 아니고 좌성사로 내려가는 길을 택해 내려갔다. 어제 올라 갈 때 지났던 서운정을 다시 만났다. # 그 우측에 석조 여래입상이 있다. 고려 전기 유물인데 손상된 것을 시멘트로 복원했다. # 헬기장으로 복귀했다. 아침부터 달리다 지나가는 산꾼 모두 불러모아 이어달리기 하던 이는 장렬히 쓰러졌다. #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각이다. 주변 정리했다. # 아늑한 곳이다. 안성 산꾼들 시시때때로 찾는 이유 있다. # 하룻밤 아늑한 잠자리를 제공해 준 헬기장에 감사하고 길을 떠났다. # 각자의 등짐 짊어지고 길게 나래비 섰다. # 달총각 사진에서 하나 더 얻어왔다. 이렇게 보니 내 동계 배낭이 정말 크기는 크다. # 가을 숲 색감이 고운 길이다. # 좌성사로 복귀했다. # 좌성사 기와 지붕 너머로 금북의 산그리메가 아득하다. # 정말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 저멀리 성거산 위로 구름 하나 떴다. # 좌성사에서 점심 공양을 산꾼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우리도 한 자리 잡았다. 국수가 정갈하고 맛났다. # 밥 먹고 화장실 다녀왔더니 모두 떠나버렸다. 나 없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절 입구로 나가니 달총각 차가 막 출발하고 있다. 얼른 달려가서 차 세우고 올라탔다. 하마트면 걸어내려 갈 뻔 했다. 청룡사쪽으로 내려 왔더니 모두 자기 서식지로 떠났다. 뒷풀이 하는 줄 알았는데, 갈 길 바빴던 모양이다.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 청룡저수지 둑에 어제처럼 억새꽃 예쁘다. 바람 좋고 햇살도 좋다. 그 햇살 아까워 짐 풀어 눅눅한 장비를 모두 말렸다. 순식간에 뽀송뽀송해졌다. # 좋은 동네다. 요란하지 않고 소박한 맛이 있는 곳이다. 산도 절도 골짜기도 모두 아늑하다.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품어주는 아늑한 곳이다. 그렇게 안성 서운산에서의 일박 이일을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만난 산동무들과 마음껏 떠들고 즐거웠던 날이다. 아늑한 동네였다. 위압적이지 않고 소박하였다. 다시 이 산을 찾을 일 있을 지 알 수 없다. 만약에 다시 이 산을 찾았을 때 그때도 서운산정을 두 번 찾아지게 될지 두고볼 일이다. 그러면 진짜 징크스의 완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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