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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열일곱번째(윗갈치~붉은재)-우리나라 운하의 원조 굴포운하! 본문

1대간 9정맥/금북정맥 종주기

[금북정맥]열일곱번째(윗갈치~붉은재)-우리나라 운하의 원조 굴포운하!

강/사/랑 2008. 3. 31. 00:18
 [금북정맥]열일곱번째(윗갈치~붉은재)

  

지금 온 나라가 '한반도 대운하(大運河)' 문제 때문에 찬반양론으로 갈려 국론 분열이 심각하다. 대운하는 수십 년 전 박정희정권 시절부터 일부 학자들이나 관료들 사이에서 연구 수준으로 검토되어왔던 일이다. 그랬던 것이 이명박 대통령이 청계천 개발 후속탄으로 들고나오면서 본격적으로 국가적인 화두(話頭)로 떠올랐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대역사(大役事)를 통한 경제 살리기, 이미 도래한 물 부족 현상과 매년 반복되는 홍수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이수 치수책(利水 治水策), 그리고 심각한 물류난 해소책으로 그 이유를 들고 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대운하로 인한 환경재앙, 물류 해소 효과 빈약 등을 반대의 명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기실 속사정은 언제나 그렇듯 내 편이 아닌 사람이 주장하는 사업이니까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고, 또 내 편이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찬성하는 것이다.

나는 경제적 지식도 환경적 혜안(慧眼)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대운하가 가져올 경제적 이득이 얼마나 되는지, 대운하로 인한 환경적 악영향이 얼마나 되는지 판단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가 없다. 정치적 지향성도 약하여 어느 한쪽을 특별히 지지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는다. 그 진흙탕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TV에 나와서 열렬히 게거품 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들은 언제나 반대하는 일만 해 온 사람들이다. 천성산 도룡뇽 살린다고 반대했던 사람들, 사패산 승려들 공부 방해된다고 반대했던 사람들, 새만금 물 썩는다고 길바닥에 엎드렸던 사람들, 청계천 헛질한다고 떼로 뭉쳐 고함지르던 사람들, 평택 미군 기지 이전 반대한다고 군인들에게 쇠파이프 휘둘던 사람들... 이들의 얼굴이 이곳저곳에서 겹치기로 오버랩된다.

그들은 국책사업이면 언제나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다. 하도 여러 곳에 반복적으로 나타나 이제는 웬만한 국민은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 그들은 원래 종교인이고 노동자이고 교사이고 정당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직장이나 영역에서보다 반대하고 투쟁하는 곳에 더 자주 보이고 그 행위로 이름을 얻었다.


그들은 반대할 적당한 곳이 나타나면 어디든 '출몰(出沒)'한다. 그들의 열정적 반대로 인해 대규모 국책사업은 늘 지연되거나 무산된다. 그로인한 엄청난 액수의 혈세 낭비는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 만약 그 아까운 세금으로 유용한 곳에 사용했다면 수십 수백 명의 목숨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지러운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대를 수용하고 극복하는 것 역시 국가공동체를 운영하는 이들의 의무이다.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계획과 민주적 절차에 따른 과정, 그리고 엄정한 적법 절차의 시행으로 국가 정책을 운영할 의무와 권한은 국민이 그들에게 부여한 책무이다. 분발이 필요하다.


한편, 문외한인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대역사를 그냥 밀어붙이거나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모든 일에는 사전 테스트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에겐 이미 운하에 관한 시행착오의 기록이 있다. 그것은 '경인운하(京仁運河)'이다. 경인운하 역시 진행하다가 반대로 인해 중단했던 사업이다. 그 경인운하(京仁運河)를 먼저 완공하여 시험 운행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듯하다.


경인운하는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에서 인천 계양구 계양동과 서구 검암동을 거쳐 황해로 연결되는 총 길이 20.5 km의 운하이다. 기존 굴포천(掘浦川)을 준설하고 나머지는 수로를 뚫어 건설할 예정이었던 공사다. 하지만 진행과정에 극심한 반대가 있었고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경인운하는 한남정맥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어 지난 2006년 한남정맥 종주 시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곳이다. 김포 보구곶리를 출발한 한남정맥은 대곶과 검단을 거쳐 굴포천을 만난다.


'굴포(掘浦)'라는 이름은 인위적으로 땅을 파서 하천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곳 굴포는 세곡미의 안전한 운반을 위해 운하 개척을 시도했던 곳이다. 고려 고종 때 최우(崔瑀)가 시작한 이래 조선 중동 때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시도하는 등 여러 차례 운하 개발을 시도했으나 부평 원통이고개를 뚫지 못해 실패한 역사를 가졌다.

 

그런데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바닷가에도 같은 역사의 흔적이 있다. 그곳 역시 고려 시대부터 운하개발의 시도가 있었고, 경인운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술적 이유로 인해 완공하지는 못했던 곳이다. 공교롭게도 이름까지 똑같이 '굴포(掘浦)'이다. 그 역시 인위적으로 운하를 팠음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굴포운하는 태안의 천수만(淺水灣)과 서산의 가로림만(加露林灣)을 연결하고자 하였던 옛 왕조시절 숙원(宿願)의 토목공사였다. 그 시작은 고려 인종 12년 1134년이다. 원래 국가의 운영과 유지는 조세(組稅)와 국방(國防)이 최우선이다.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세곡(稅穀)을 안흥량의 험한 수로와 많은 암초로부터 보다 안전하고 빠르게 운반하고자 하는 시도가 굴포운하의 착공이다.


하지만 암반이 많고 조수의 왕래로 굴착지점이 다시 허물어지기를 반복해 공사 마무리는 실패했다. 이후 공양왕 3년에 다시 공사를 재개했으나 실패했고, 왕조가 바뀐 후 태종, 세종, 세조, 중종, 현종 때에도 여러차례 검토 혹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실록에도 굴포의 기록은 허다(許多)하다. 특히 세조 10년 3월의 기록이 굴포운하 실패의 이유를 그대로 보여준다. "臨瀛大君 璆 領議政申叔舟等自堀浦復命 上御西閤 問開鑿利害 璆等對曰 水道不直 泥淖沮洳 隨鑿隨塡 不可開鑿 從之. (임영대군 구 영의정신숙주등굴포복명 상어서합 문개착이해 구등대왈 수도부직 니뇨저여 수착수전 불가개착 종지 ;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와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 등이 굴포(堀浦)로 부터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서합(西閤)에 나아가 개착(開鑿)의 이해(利害)를 물으니, 이구(李璆) 등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수도(水道)가 바르지 않고 진흙이 물러서 파는대로 무너지니, 개착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많은 암반과 개펄지역을 극복할 수 있는 토목 기술이 당시로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왕조에 절친 숙원의 토목공사는 고려 인종12년인 1134년부터 조선 현종 10년 1669년까지 무려 530년 간 계속되었지만, 전체 7㎞중 4㎞만 개착되고 나머지는 완공하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이 비운(悲運)의 굴포운하는 그후 세월 흘러 다 메워져 자연으로 돌아가고 일부 구간만 유적으로 남아 있다. 육운(陸運)이 발달하여 도로교통 원활하고 조세를 미곡으로 걷을 일 없으니 운하의 필요성이 없어진 탓이다.

금북정맥 열일곱 번째 나들이는 윗갈치에서 붉은재까지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인 굴포운하를 만나게 된다. 그나저나 한반도 대운하 건설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난제(難題)로다!

 

 

우리나라 운하의 원조 굴포운하!

구간 : 금북정맥 제 18구간(윗갈치~붉은재)
거리 : 구간거리(13.8 km), 누적거리(244.6km)(접속구간 포함)
일시 : 2008년 3월 1일. 흙의 날.
세부내용 :

윗갈치/29번 도로(09:45) ~ 사격장 ~ 123봉 ~ 169.9봉 ~ 183봉 ~ 솔개재(10:45) ~ 임도 ~ 비룡산(11:43) ~ 집뿌리재 ~ 295봉 ~ 금강산(12:35)/점심 후 13:15 出  ~ 팔봉지맥 갈림길 ~ 장군산(13:45) ~ 수량재 ~ 물래산(14:35) ~ 100봉 ~ 140봉 ~ 32번도로 ~ 팔봉중학교 ~ 시멘트도로 ~ SK 중계탑 ~ 과수원 삼거리 ~ 굴포운하 ~ 마을회관 ~ 파란지붕 오거리 ~ 인삼밭 ~ 30분 알바 ~ 버스정류장 ~ 붉은재(17:24)

총 소요시간 7시간 40분. 만보계 기준 30,200보.

 


3월 1일 흙의 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너무 어렵다. 요즘 계속 회사일 때문에 무리해서 과로가 겹친 탓이다. 뭐 그다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일어나 씻고 먹고 집을 나섰다. 서해안 고속도로 타고 서산 나들목을 나와 서산을 거쳐 대산 가는 29번 도로 타고 가다 보면
지난주 내려왔던 윗갈치에 서게 된다.

윗갈치는 고개 아래의 갈산 3통 전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칡 갈(葛)'자가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구불구불한 지형을 의미하는 말일 거라 짐작된다.
 



굴포운하/掘浦運河

굴포운하는 가로림만과 인접한 팔봉면 오송리와 천수만(淺水灣)과 연접한 태안읍 인평리와의 약 3km에 달하는 지협(地峽)을 착통하는 운하를 말한다. 굴포운하의 개착공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전, 즉 12세기초 고려 인종때(1134년)부터 시작하여 조선중기까지 약 400여년간을 통해 우리나라 운하사상 가장 오래된 것임. 굴포운하를 개착하게 된 요인은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함에 있어 조운선단이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안흥량은 서해안상에 돌출한 장봉으로 해중에 암초가 있고, 또한 급격한 조류로 인해 빈번히 조운선이 전복(顚覆)되고 파선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재정손실이 컸다. 그리하여 세곡미의 안전수송과 조운에 따른 지리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려고 지금의 굴포운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려 인종때부터 굴포를 개착하여 조선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비록 단속적이기는 하였지만 실로 400여년간 수천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계속하였으나 개착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암석을 뚫지 못한 사회적 사정과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성공치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재원이 세곡미라는 당시의 사회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선 현종때에는 굴포개착지 주변에 많은 조창(漕倉)들을 설치하여 조운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나 조운행정에서 야기된 문제들로 인해 폐창하고 말았다. 비록 설창육운안(設倉陸運案)의 실행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세창고지와의 관련으로 인해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해로를 따라 많은 창촌락이 발생,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고려초부터 제도화된 조운제도와 관련하여 안흥량과 굴포운하지에는 조운로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건설된 각종 관방시설도 발달하였다. 이처럼 굴포운하와 설창제의 잇따른 실패에 따라 그 최종 대안으로 조선 인조때 안면곶을 착통하여 조금이나마 조운로를 단축하여 세곡미 조운을 편하게 하였으나 麗,朝를 통한 굴포운하와 안면곶 착통공사로 인해 한국의 전형적인 산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저곳>

(F11 키를 누르면 보시기 편합니다.)


 


# 금북정맥 제 18구간 윗갈치~붉은재 지형도. (아래 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음) 




  

대산 가는 29번 도로 우측에 골프연습장이 하나 있다. 그 입구 주차장에 주차한 후 가볍게 몸 풀고 산행준비를 했다. 일주일 사이에 날씨가 많이 풀렸다. 기온 체크하니 영상 4.5도다. 계절의 변화가 놀랍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와 버렸다. (09:45). 도로 건너 '서령정'표지석 뒤로 올라갔다. 

 



# 윗갈치의 29번도로 상에 있는 골프연습장 주차장에 주차하고 출발했다.
 

 

 

 

# 서령정 비석 뒤로 오늘 구간 들머리가 시작된다.

 

 

 

묘지 뒤로 오르면 완만한 오름이 시작된다. 시작부터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전부 진달래나무다. 한두 달 뒤에 이곳을 지난다면 온몸에 꽃향기 가득 묻힐 수 있겠다.

잠시 후 숲을 벗어나고 '서산시 사격장' 건물이 나온다. 사격장과 궁도장이 나란히 있다. 하얀 건물 안에서 총소리가 빵빵 들린다. 궁도장에선 궁사가 멋진 포즈로 시위를 당기고 있다.

 


      

# 서산시 사격장. 뒷쪽 산으로 정맥이 이어진다.

 

 

 # 국궁장.

 

 

 # 관중(貫中)이요~~

 

 

 

사격장 뒷쪽 숲속으로 들어 갔다.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작은 고개를 지나 한차례 올리면 '123봉'이 나오고, 아래로 내렸다가 작게 오르내리고 다시 한차례 밀어 올려 삼각점이 있는 '169.9봉'에 오른다.(10:27)

우측 숲너머로 정맥 북사면을 석산 공사 현장이 있다. 이미 정맥을 상당히 갉아먹었는데 지금도 요란하게 작업 중이다. 금북도 저 놈의 석산개발로 인한 훼손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두어 차례 작게 오르내리다 한 차례 올려 '183봉'에 오르는데, 아직은 바람이 상당히 차갑다. 얼른 정상을 지나 아래로 상당히 길게 내려 희미한 옛고개를 만난다. '솔개재'이다.(10:45)

 


      

# 잔설이 남아 있는 솔개재.

 

 

 

솔개재는 갈산 3통의 큰말에서 성연면 일람리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옛날에 이곳에 솔개가 많이 살았다 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서산문화원에서 기록해 두었다. 생뚱 맞은 이름 유래이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솔개 있고 없고로 고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보다는 뭔가 다른 어원이나 전설이 있을 듯하다.

우측 일람리의 큰덕삼이 마을 방향에 농약병이 잔뜩 버려져 있다. 저런 농약병을 이 고개 꼭대기까지 지고와서 버릴 정성이면 쓰레기장에 갔다 버리는 게 훨씬 덜 힘들었겠다.

지도 확인하니 등고선을 꽤나 올려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690걸음을 걸어서야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다. 고도계에 220이 찍힌다.

비룡산까지는 다시 아래로 잠시 내렸다가 100여m를 더 올려야 한다. 곧바로 비룡산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길게 오르내려야 한다. 바위 암봉이 있어 그 위에 올라서면 너머로 비룡산이 건너다 보인다. 조금 가면 잘 닦인 '임도' 하나가 정맥을 가로질러 넘어 간다.

 


      

# 바위암봉에서 비룡산을 건너다본다.

 

 

 # 지도에 없는 임도 하나 정맥을 넘어 간다.

 

 

 

지도에는 없는 임도다. 최근에 닦은 듯하다. 급경사는 아니지만 길게 고도를 높여 올라간다. 비룡산 사면은 산불 피해지역이다. 한차례 밀어 올리면 바위들로 된 봉우리에 서게 되고 주변 조망이 트여 비룡산 정상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고도 확인하니 아직 정상이 아니다. 아래로 내리지 않고 그 고도 그대로 능선을 타다가 잠시 오르면 '飛龍山'정상에 서게 된다.(11:43)


 


# 정상으로 착각한 바위봉우리.

 

 

 # 금학리쪽 조망.

 

 

 # 묘지가 있는 비룡산 정상.

 

 

 

비룡산 정상에는 전주 이씨의 묘가 모셔져 있다. 이곳이 비룡의 꼭대기라면 좀 전의 그 바위봉우리는 비룡의 콧구멍쯤 되나 보다. 묘지 우측길로 내려 간다. 좌측길은 성리의 풍전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올라온 그 각도 그대로 길게 내려간다. 마루금 좌우로 트인 숲 너머로 인간세가 언뜻언뜻 보인다. 길게 내려가다 보면 우측으로 트인 곳이 나오고 가야 할 금강산 산줄기와 그 뒤로 팔봉산이 보인다. 잠시 후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에 내려섰다. '집뿌리재'다.

 


      

# 금강산 산줄기와 저멀리 팔봉산이 보인다.

 

 

 

# 지난주에 시산제를 올렸던 팔봉산을 땡겨본다.

 

 

 

# 집뿌리재.

 

 

 

# 당산나무가 서 있다.

 

 

 

# 괜차뉴님이 집뿌리재란 이름을 발굴해서 기록해 두었다.

 

 

 

집뿌리재는 마전과 용암을 잇는 고갯길이다. 이 지역 산꾼인 괜차뉴님이 지역 노인들을 통해 이 고개의 이름을 발굴했다. 당연 지도에는 없는 이름이다. 고개 위에는 멋진 당산나무가 한 그루 의연하다. 그 나무에 기대 잠시 머리 숙여 안전산행을 기원해 본다.

이곳에서 금강산까지는 고도를 140여m 올려야 한다. 서낭당 뒤 넓찍한 길따라 올라간다. 한 차례 올라 임도는 계속 산을 따라 넘어가고 정맥길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사면을 따라 올라간다.

한차례 길게 올리면 큰바위가 우뚝 서 있는 봉우리에 오르고, 잠시 능선을 따르다 다시 한차례 올려 '295봉'에 오른다. 정상엔 갈림길이 있는데 우측으로 내렸다가 이내 위로 찐하게 밀어 올리면 '금강산'이 나온다.(12:35)

 


                         

# 선바위가 있는 봉우리를 넘고,

 

 

 # 금강산에 오른다.

 

 

 # 누군가 냄비를 매달아 두었다.

 

 

 # 정상에서 본 금학리쪽 조망.

 

 

 

이 산은 316m의 낮은 고도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이란 멋진 이름을 얻었다. 이 동네 사람들 허풍이 좀 심하다. 비룡(飛龍)에 금강(金剛)에 장군(將軍)까지...

정상엔 삼각점이 있고 누군가 냄비를 매달아 두었다. 냄비 두들겨 금북졸업을 미리 자축했다. 햇살 따스해 정상에서 마음에 점 하나 찍었다. 거풍으로 천지기운도 받아들이고... 햇살이 좋아 한숨 자고 싶은 유혹이 강했다. 얼른 정맥 졸업하고 쉬엄쉬엄 낮잠도 즐기고 독서도 즐기는 만고강산 산행을 해얄텐데... 13:15에 출발했다.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내리는데 갈림길이 나오고 괜차뉴님이 '팔봉지맥' 갈림길이라고 팻말을 매달아 두었다. 우측으로 가면 팔봉산으로 가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좌측길로 떨어져 내린다. 길게 내려가다가 한차례 올라 바위봉우리에 서고 이후 좌측으로 급경사 내리막이 이어진다. 길게 진행하면 갈림길이 여럿 나오지만 표지기를 따르면 되고 곧 '수량재'에 내려서게 된다.(14:02)

 


      

# 팔봉지맥 갈림길.

 

 

 # 산림 정리를 하지 않아 볼품없이 빽빽한 내리막길.

 

 

 # 군부대 뒷산의 바위봉우리.

 

 

 # 수량재.

 

 

 

수량재는 태안 가는 '32번 도로'가 전방에 있고 차량들이 씽씽 날아다닌다. T자형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지하도가 있는 모양이지만 빙 돌아가는 게 싫어서 우측으로 내려가서 차량 흐름이 끊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중앙분리대를 넘어 얼른 도로를 횡단했다. 위험했다.

 


      

# 우측으로 내려가서 도로를 무단횡단했다.

 

 

 

도로 건너 식당 좌측으로 고개를 올라 넓은 수렛길을 따라 올라간다. 길이 녹아 질퍽질퍽하다. 잠시 올라 고개 위 독립농가 앞에서 우측 숲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개활지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오른다. (14:35) '물래산'에 도착했다. 

 



# 개활지에서 돌아본 지나온 정맥길.

 

 

# 물래산.

 

 

 

좌측으로 갈라지는 길이 부석지맥이라고 괜차뉴님이 적어 두었다. 지맥, 기맥 참 많기도 하다.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데 길게 고도를 낮추며 가는 모양세다.

그러다 한차례 올라 바위봉인 '100봉'을 넘고 아래로 내리면 전방에 산이 또 하나 나타난다. '140봉'이다. 오름의 시작점에 산의 좌우 모두에 우회로가 있는데 직진하여 봉우리를 넘는다. 길게 아래로 내린다. 갈림길이 많이 나온다. (15:20) '32번 도로'와 다시 만났다.

 


      

# 팔봉산이 건너다 보인다. 오전에는 팔봉산의 반대쪽을 보고 왔는데...

 

 

# 32번 국도.

 

 

 

32번 도로를 다시 무단횡단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잠시 갈 길을 몰라 헤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챙겨와야 하는데 요즘 바빠서 미처 챙기지를 못했다.

누군가 매달아 둔 표지기를 따라 작은 도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하다. 백곰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 길이 아니고 팔봉중학교 쪽으로 가란다. 그렇다면 저 표지기는 누가 매달아 둔거야??? 방향을 돌려 '팔봉중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 팔봉중학교.

 

 

 

팔봉중학교 본관 우측으로 올라갔다. 마을 뒤쪽으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구릉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숲을 지나 '시멘트도로'에 섰다. 잠시 가면 'SK 중계탑'이 나오고 바로 뒤 '과수원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내려갔다. 저 멀리 오서산이 보인다.

길게 아래로 내려가면 밤나무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틀하라고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표지기 무시하고 길 따라 가는 것이 맞다)

표지기 따라 우틀하자 표지기가 바로 아래에서 좌틀하여 논둑길을 따라 가라고 한다. 마루금을 차지한 농장 때문에 우회하라고 하는 듯하다. 대밭을 따라가는데 길이 끊기며 전방에 '굴포운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곳으로 불러 들인 표지기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런 분들이 종종 있다. 자기 나름의 고집 때문에 불필요한 마루금이나 길 없는 곳으로 표지기를 매달아 둔 다음 정작 표지기가 필요한 곳에서는 자신감이 사라졌는지 표지기를 생략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앞을 가로막은 굴포운하를 우회하기 위해 좌측으로 작은 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농장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나무들이 키가 어중간하게 작아 지나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참을 헤맨 후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곧 바로 올 수 있는 농로에 다시 합류하게 되고 '굴포운하 안내판'을 만났다.

 


      

# 올해 처음 만나는 큰개불알풀.

 

 

# 통신회사 중계탑을 기준으로 갔다.

 

 

# 과수원 삼거리에서 우틀한다.

 

 

# 이 삼거리에서 우틀하라고 표지기가 매달려 있는데, 그냥 직진하면 된다.

 

 

# 굴포운하. 상류여서 이렇지 하류 쪽은 온전한 운하의 모습이다.

 

 

# 굴포운하 안내판.

 

 

 

한남에서는 현대식 운하를, 이곳 금북에서는 옛 사람들의 손길 그대로인 운하유적지를 만났다. 굴포운하를 지나 시멘트도로를 계속 따르면 큰 '느티나무'와 '교회'를 지나게 되고 '인평리 다목적회관'도 지난다.

계속 진행해서 '파란 기왓집이 있는 오거리'를 만나 집뒤 좌측길로 길게 진행한다. 곧 '묘지'를 지나고 '인삼밭이 있는 삼거리'를 지나 소나무 숲길로 올라 갔다. 소나무숲 앞에 표지기 하나가 올라오라고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인삼밭 앞에서 좌측으로 시멘트 도로를 그냥 따르면 되는 곳이었다.

표지기 따라 소나무 숲길로 계속 올라 가는데 어느 순간 표지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표지기 따라 왔다 싶어 계속 산을 오르는데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싶다. 나침반 꺼내 확인하니 북동진하고 있다. 엉뚱한 산길로 들어 왔다. 그것도 한참이나...

빠꾸 오라이닷!! 한참을 올라 왔구나! 계속 내려가 소나무숲 초입까지 내려 왔더니 좌측 인삼밭 뒤로 가라고 표지기가 보인다. 아까는 왜 이걸 못 봤지? 갈림길 앞이 아니라 뒷쪽에 깊숙히 매달아 뒀으니 잘 안보이지...


그러나 그 길은 잡목이 무성해 헤치고 나가기가 어렵게 생겼다. 다시 산을 내려와 인삼밭 삼거리까지 완전히 컴백해 버린다. 표지기 믿었다가 30여 분 알바했다.

 

 

      

# 느티나무와 교회를 지난다.

 

 

# 농가 담벼락에 고개를 빼꼼히 내민 얌생이. 아자씨~ 누구셔유~~

 

 

# 파란 지붕집 뒤 오거리.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한다. '인삼밭'을 지나고 가겟집도 지나고 '북창마을 버스정류소'가 있는 사거리에서 우틀하여 길게 도로 따라 올라간다. 축산농가를 지나 고갯길을 위로 올라가니 '붉은재'가 나온다.(17:24)

 



# 이곳에선 마루금 따윈 의미 없고 그냥 마을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면 된다.

 

 

# 저 이정표 따라 우틀하면 붉은재가 나온다.

 

 

# 붉은재. 좌틀하여 산을 올라가면 오서산 가는 길이다.

 

 

 

중간에서 두 번이나 알바를 하는 바람에 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걸렸다. 그냥 도로를 따르면 팔봉중학교에서 1시간이면 족한 거리를 쓸데없는 고집 피우는 표지기들을 따르다가 2시간이나 걸렸다.

마루금도 찾을 데서 찾아야지 이런 비산비야의 구릉지대, 농장이나 마을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서 마루금을 따른다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 듯하다.

애초에 오서산을 넘어 태안 모래기재까지 가려고 계획을 했었는데, 알바 때문에 시각이 벌써 6시가 다 되었다. 틀렸다, 그만 여기서 끊자! 그런데 문제는 차량회수다. 올라왔던 고개를 도로 내려 북창 버스 정류소로 내려갔다.

 


# 어느새 오서산 너머로 해가 넘어 가려고 한다.

 

 

# 팔봉산을 배경으로 유유자적한 젖소부인.

 

 

# 버스 기다리며 반사경에 셀프샷 한 방!

 

 

 

북창 버스정류소에서 간식 먹으며 한참을 기다리니 버스가 나타난다. 두 시간을 걸어왔던 길을 순식간에 달려 태안으로 나갔다가 태안에서 택시 타고 윗갈치로 돌아가 차량을 회수했다.

알바를 했건 어쨌건 금북도 이제 두 구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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